바이블 오디세이 I2018. 10. 29. 16:40

21세기 종교개혁

(로마서 1:17, 창세기 3:1-7)

 

종교개혁 기념 주일이다. 작년에는 종교개혁 500주년이라고 온 개신교회가 각 종 기념 행사를 하고, 언론이 특집 기사를 싣는 등, 엄청난 종교개혁 붐이 불더니, 어째 일년만에 종교개혁의 열기가 어디론가 사라진 것 같다. 세상이야 어쨌든, 우리는 교회력 대로 중교개혁 기념 주일을 지키면서 우리의 삶의 자리를 돌아보려 한다.

 

500년 전 종교개혁은 사람들 사이에 일어난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노력이었다. 그 중에 핵심이 되는 세 가지 가치가 ‘sola fide(오직 믿음)’, ‘sola scriptura(오직 성경)’, 그리고 만인제사장론이였다. 이 세 개의 종교개혁 핵심 가치가 가져온 사회적 파장은 대단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오직 믿음이라는 가치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오직 믿음의 가치를 통해 개인주의가 발전했다. ‘믿음은 개인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양심의 작용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지만, 그 은혜에 응답하는 것은 개인의 양심이다. , 구원이 일방통로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상호협력이 필요한 어떤 것이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믿음은 인간을 하나님에게서 떼어놓는다. 대개 사람들은 믿음을 행위와 대립적인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구원을 논할 때, 우리는 행위로 구원 받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받는 거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지만, 믿음을 행위와 대립적으로 설명하는 이러한 구원론은 오직 믿음이라는 가치가 몰고온 사회적 파장을 잘못 파악하는 것이다.

 

오직 믿음이라는 가치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독립적인 주체의식을 갖게 하는 개인(person)의 발견에 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개인은 가족에게 예속된 존재고, 교회에 예속된 존재이고, 무엇보다 신(하나님)에게 예속된 존재였다. 어딘가에 예속된 존재에게는 자유가 없다. 종교개혁 이후부터자유는 인격(개인)을 예속시키는 어떠한 힘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게 된다. 해방되어야 할 힘에는 신(하나님)도 포함된다. 이것을 다른 말로 세속화라고 한다. 그래서 세속화라는 말이 나쁜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세속화가 없었다면, 우리는 현재 개인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살지 못할 것이다.

 

오직 믿음이라 종교개혁의 가치에서 시작된 개인의 발견은 이러한 구호로 재구성되고 있다. “내 인생은 나의 것!”, “Love yourself!” (BTS가 표방하는 가치는 결국 따져 들어가면 종교개혁 정신에서 온 것이다). 루터는 그의 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굉장히 역설적인 말을 한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지극히 자유로운 주인이며,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을 위하여 봉사하는 지극히 충성스러운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종속된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은 자유인이면서 종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존재의 동시성이라고 볼 수 있다. (루터의 신학은 동시성이다. “의인이면서 죄인”)

 

인간 존재의 동시성을 아는 일은 굉장히 중요하다. 우리는 자유를 가졌지만, 그 자유를 가지고 절대적으로 종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의인이면서 죄인인 인간 존재는 자기 자신의 자유를 깨닫는 순간 그 자유를 이웃에게 향하여 쓰지 못한다. 대개 자유는 자기 자신에게 머물고 만다. 여기서 인류 역사의 비극이 시작된다. 다른 말로 표현자면, 자유는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탐욕에 머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자유가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탐욕에 머무는 데 일조한 것이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윤을 남길 수 있는 시장이다. 시장은 크고 많을수록 좋다. 가장 좋은 시장은 인구가 많고, 그 인구 개개인 자체가 시장이 되는 것이다. 그래야 상품을 최대한 많이 팔 수 있기 때문이다. (전화기를 한 가정 당 한 대 파는 것과, 각 개개인에게 파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좋은 시장인가?)

 

루터가 발견한 오직 믿음이라는 가치는 좋은 것이다. 정말 좋은 것이다. 자유는 인간성의 핵심이다. 인간성은 곧 자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100% 주어진 자유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에 있다. 루터는 그 자유를 통해 사랑의 완성을 이루기 원했다. 그게 곧 구원이다. 그런데, 인간의 죄성은 자유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자유는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탐욕으로 나아갔다. 그래서 500년 전의 종교개혁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었지만, 500년이 지난 21세기의 종교개혁은 또다른 도전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21세기에 종교개혁을 말하는가? 500년 전 사람들에게는 자유가 없었다. 권력을 잡은 자들이 종교를 이용하여 모든 사람들의 자유를 구속했다. 교회의 허락 없이 함부로 구원 받지 못했다. (이는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40년 간의 수감생활을 마친 모건 프리먼이 그로서리에 취직해서 한 독백과 같다. “이젠 허락을 받지 않으면 오줌도 안 나온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겐 자유가 있다. 요즘 구원 받는 데 교회의 허락을 받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우리는 각자의 양심에 따라, 믿음의 고백에 따라 구원받는다고 믿는 시대에 살기 때문에, 교회 공동체가 느슨할 수밖에 없다. (여러분들의 구원에 교회가, 목사가 간섭하면,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나? 가족관계도, 인간관계도 다 마찬가지 세상이 되었다. 부모 자식 간에도 간섭하는 거 싫어한다. 젊은이와 노인 간에도 간섭하는 거 싫어한다. 자신의 인생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믿음에 따라 결정하는 게 자유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종교개혁의 오직 믿음의 가치가 인간의 내면에 자유를 가져다 주었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인간의 죄성이 그 자유를 견디질 못했다. 그래서 인간은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탐욕으로 나아갔다. 그 탐욕이 이제는 인간 스스로를 죽게 만들고 있다. 이것은 내면적인 문제라기 보다, 외면적인 문제다. 탐욕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망쳐 놓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인간의 삶의 터전인 지구 자체를 망쳐 놓았다.

 

현재 가장 중요한 화두는 생태이다. 생태파괴가 너무 심해서, 순식간에 식량부족 현상(식량문제로폭동이 일어날 거라 본다)이 오고, 자연재해의 폭발적 증가로 인해서 온 생명체가 위협을 받는다. 산불 나면 인간 피해 현황만 파악한 기사를 보지만, 산불 때문에 죽은 자연생명(식물/동물)이 얼마나 많은가. 쓰나미나, 허리케인, 태풍이 들이치면 인간 피해 현황만 파악하지만, 그것 때문에 피해를 보는 자연생명(식물/동물)은 아예 관심 밖의 일일 뿐이다. 그런데, 생태계 파괴는 결국 인간에게 화살이 되어 돌아와 인간을 죽인다.

 

얼마전 인도네시아의 술라웨시섬에 지진과 쓰나미가 강타해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런데, 학자들은 그곳에 그렇게 큰 피해가 온 이유에 대해서 사라진 맹그로브 숲을 지목했다. 동남아시아 등 전 세계 열대·아열대 해안에서 생장하는 식물 맹그로브는 뛰어난 이산화탄소 흡수 능력뿐 아니라 해안 지반을 지지하고 수질을 맑게 유지해 멸종위기종의 서식지라고 한다. 학자들에 의하면, 맹그로브 숲이 망가지지 않았다면 그 지역의 피해는 훨씬 적었을 거라고 한다.

 

그런데, 왜 그 좋은 맹그로브 숲이 사라졌을까? 가장 큰 이유는새우. 천연 영양분이 많은 맹그로브 숲은 새우 양식의 최적 장소라고 한다. 새우 중에서 특별히 블랙타이거 새우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데, 그것을 양식해서 팔면 큰 수입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여러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새우 양식을 위해서 맹그로브 숲을 마구 훼손하고 있다고 하고, 이 추세라면 머지 않아 맹그로브 숲이 완전히 사라질 거라 한다. 그런데, 맹그로브 숲을 복원하는데, 최소 226년이 걸린다고 한다.

 

새우를 먹고 싶은 인간의 탐욕과 돈을 벌고 싶은 인간의 탐욕이 만나 벌이는 생태계 파괴의 현장이다. 새우 먹고 싶은 자유와 돈 벌고 싶은 자유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 자유가 우리의 삶의 자리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게 우리 인간이다. 이 탐욕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얼마전 멋진 소식이 들려왔다. 네덜란드의 한 청년이 해양 플라스틱 쓰레기를 청소하는 장치를 발명해서, 북태평양 미국과 하와이 사이에 있는 플라스틱 쓰레기 섬에 쌓인 쓰레기를 치우기 시작했다는 소식이었다

(동영상, https://tv.kakao.com/channel/1506/cliplink/391705896)

 

21세기의 종교개혁은 더 이상 사상이나 이념, 또는 신학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그러한 것도 계속하여 정의롭게 재구성해 나가야 하지만). 21세기의 종교개혁은 실천에 관한 것이다. 탐욕이 망쳐 놓는 삶의 자리(생태) 기독교 공동체가 삶의 방식(생활 방식)을 전환함으로써 생명의 길을 열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탐욕을 줄이고, 공동의 삶(나눔의 삶)을 살까. 어떻게 하면 자연을 착취하는 삶의 형태가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살까. 어떻게 하면 거주의 변화(도시 à 마을(걸어서 모든 일을 할 수 있거나, 자전거로 해결할 수 있는 거리), 생산의 변화(대량생산 à 필요생산), 소비의 변화(대량소비 à 필요소비)를 이끌어 낼 수 있을까 고민하고 개혁하는 것이 우리에게 당면한 절실한 과제이다.

 

종교개혁이, 기독교가 인간에게 자유를 가져다 주었듯이, 이제 기독교가 21세기의 종교개혁을 통해서 새로운 공동체를 제시하고 우리의 삶의 터전(생태)을 지키는 데 공헌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교회 공동체(기독교)의 존재 이유는 점점 희박해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기도의 정의도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기도는 말이 아니라 실천이다. 왜냐하면, 행동을 절실하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정적인 신앙에서 동적인 신앙으로의 변화 필요하다. 주님, ‘환경파괴를 막아주세요!’라고 하는 게 기도가 아니라, 타이거새우를 안 먹는 게(또는 덜 먹는게) 기도 자체다. ‘주님, 환경파괴를 막아주세요!’라고 하는 게 기도가 아니라, 플라스틱 소비량을 조금씩 줄여 나가는 게 기도 자체다.

 

우리는 이제, 로마서에서 창세기의 신앙, 로마서의 종교개혁에서 창세기의 종교개혁으로 나아가야 한다. 너무도 중요한 일이지만, 쉬운 일도 아니라, 일일이 다 설명하고 강조할 수 없어, 그 모든 간절한 마음을 담아 시 한편으로 말씀을 마치려고 한다.

 

봄 셔츠

(이원)

 

당신의 봄 셔츠를 구하고 싶습니다

사랑을 만져 본 팔이 들어갈 곳이 두 군데

맹목이 나타날 곳이 한 군데 뚫려 있어야 하고

색은 푸르고

일정하지 않은 바느질 자국이 그대로 보이면 했습니다

 

봄 셔츠를 구하고 싶었습니다

차돌을 닮은 첫 번째 단추와

새알을 닮은 두 번째 단추와

위장을 모르는 세 번째 단추와

전력(全力)만 아는 네 번째 단추와

잘 돌아왔다는 인사의 다섯 번째 단추가

 

눈동자처럼 끼워지는 셔츠

 

들어갈 구멍이 보이지 않아도

사명감으로 달린 여섯 번째 단추가

심장과 겹쳐지는 곳에 주머니가

숨어서 빛나고 있는

셔츠를 입고

 

사라진 새들의 흔적인 하늘

아래에서

셔츠 밖으로 나온

당신의 손은 무엇을 할 수 있나요

 

목에서 얼굴이 뻗어나가며,

보라는 것입니다

 

굳지 않은 피로 만든 단추.

우리의 셔츠 가장 안쪽에 달려 있는

 

사랑하는 여러분, “사라진 새들의 흔적인 하늘 아래에서 셔츠 밖으로 나온 우리의 손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고민하면서 세상을 개혁해 나가는 주님의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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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