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심판하신다
(시편 75:1-10)
역대상 15장은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이야기를 전한다. 그 일을 진행하면서 찬양대를 이끈 세 명의 인물이 있는데, 헤만, 아삽, 에단이 그들이다. 교회 전통은 시편에 나오는 ‘아삽의 시’ (시편 50편, 시편 73-83편)를 지은 자가, 바로 다윗과 함께 언약궤를 옮기는 일에 헌신했던 ‘아삽’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의 특징은 감사와 예언 신탁이 어우러진 혼합 형태의 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를 통해 우리가 나누어야 할 말씀은 그들이 감사하는 이유가 무엇이고, 그들이 받은 신탁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것이다.
우선, 이 시편은 감사로 시작한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1절a). ‘감사하다’라는 단어가 두 번 반복된다. ‘감사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야다’인데, 문법적으로 사역 능동(히필) 완료형으로 되어 있다. 즉, 시인은 하나님께 감사하고자 하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표현하고 있다. 마지못해, 의무적으로 감사하는 것과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는 간절한 감사는 그 의미가 다르다.
왜 시인은 하나님께 그렇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것일까? 감사의 이유가 무엇일까? 시인은 두 가지에 대하여 감사한다. 첫째는 주의 이름이 가깝기 때문이고, 둘째는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을 전파하기 때문이다.
우선, ‘주의 이름이 가깝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 알아보자. 이름은 존재를 대변한다. 사람은 이름이 없으면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시고 아담을 통하여 온갖 창조물의 이름을 정하게 하신다. 이것은 아담에게 단순히 작명소를 차려서 이름을 지어주라는 뜻이 아니다. 아담에게 이름을 짓게 하신 것은 아담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물에 대한 인식을 갖게 만드신 것이다. 이름을 통하여 인식하지 못하면, 사람은 그것에 대하여 없는 것 취급하는 불의를 저지르게 된다.
인식한다는 것은 상대방(사물)을 마음에 들인다는 것인데, 사람은 일단 마음에 들어온 것을 함부로 하지 못한다. 함부로 한다는 것은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뜻이고, 함부로 하기 위해 사람은 때로 상대방(사물)을 마음에 일부러 들이지 않는다. 이것은 큰 죄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통해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셨는데, 사람은 상대방(사물)에 대하여 (하나도 빠짐 없이) 이름을 부르며 그 상대방을 마음에 들여야 한다.
이름은 존재를 대변하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성전에 두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즉, 성전에서 드리는 제의(제사, 예배)를 통하여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마음 속에 들이게 된다. 하나님은 먼 곳에 계신 분이 아니라, 성전에 계신 분이고,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때, 즉 하나님의 이름을 대면할 때,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자신의 가장 가까운 곳, 마음에 모시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가깝게 존재하시는 분이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둘째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이한 일들’을 증언하는 것에 대한 감사를 살펴보자. “신학이란 하나님의 자기계시 속에 담긴 것들을 ‘사후 숙고하는’ 과정이다”(알리스터 맥그래스, <신학이란 무엇인가>, 610쪽). 예배는 하나님이 자기 계시를 통해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구원의 일들에 대하여 놀라움을 표현하는 것이다. 시인은 정확히 그러한 현상을 표현하고 있다. ‘기이한 일’이란 ‘사람의 이성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뜻한다. (그렇다고 이성을 무시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일은 이성으로 다 파악할 수 없다. 그래서 이성을 가진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다른 말로, 신앙의 신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루신 신앙의 신비를 보면서, 감사 외에 다른 것을 할 수 없다.
종합해 보자면, 시인이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는 첫째, 하나님을 가까이서 만날 수 있다는 것과 둘째,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행하신 신앙의 신비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사모하는 존재가 가까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오늘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일하고 계신데, 그 구원의 일, 신앙의 신비를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일들을 놓아두고 감사하지 않을 수 있는가.
2절에서부터 이제 시의 분위기는 예언 신탁으로 바뀐다. 신탁의 내용은 이것이다. “내가 시간을 정해 바르게 심판하리라!”(우리말 성경). 그러면서 하나님은 자신이 심판할 수 있는 자격을 말씀하시는데, 하나님이 심판하실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땅의 기초를 세우신 분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심판주도 되신다.
4절과 5절은 심판의 대상에 대한 신탁이다. 4절과 5절에 등장하는 낱말을 보면, ‘오만한 자들’, 악인들’, ‘뿔’, ‘너희 뿔’, ‘교만한 목’ 등이 있다. 여기서 ‘뿔’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의 ‘카렌’인데, ‘힘, 능력, 권세, 위엄’을 상징한다. 그래서 ‘뿔을 들다’라는 말은 ‘교만의 시적 표현’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와 오만한 자’를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신탁이 선포되었다 하더라도, 그 신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하나님의 신탁이 선포되었을 때 교만하고 오만한 자들은 하나님의 신탁을 무시하겠지만, 어떠한 자들은 하나님의 신탁에 대하여 올바로 반응하며 그 신탁을 받아들인다. 성경은 그러한 자들을 일컬어 ‘의인’이라고 한다.
6-8절은 선포된 하나님의 신탁에 대한 시인의 반응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신탁을 경홀히 여기지 않고 준엄하게 받아들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신앙 고백한다.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7절). 이것은 굉장한 고백이다. 그래서 이것은 ‘의인’의 고백이라 부를 수 있다. 이러한 고백을 하는 것이 왜 중요하고, 왜 이러한 고백을 하는 자들을 의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위에서 심판의 신탁이 선포된 대상은 ‘교만한 자와 오만한 자’라고 했다. ‘교만한 자와 오만한 자’의 특징은 스스로 자기를 높인다는 데 있다. 그들은 자기를 스스로 높이고, 자기 보다 낮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무시하고 경멸한다. 그러한 일을 시인은 ‘뿔을 든다’라고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성격은 ‘누군가를 낮추시고 누군가를 높이시는 데’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서술이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의 높고 낮음에 대한 서술이 아니다. 우리는 이것을 굉장히 헷갈려 하고 오해한다. 누군가를 낮추고, 누군가를 높이는 일에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누군가를 높이는 일과 누군가를 낮추는 일은 ‘예정’과도 같다. 즉, 우리가 존재하기도 전에 하나님은 누군가를 높이고 누군가를 낮추는 일을 정해 놓으셨다는 뜻이다.
시인이 ‘높임’과 ‘낮춤’의 근원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이유는 누군가 높아지고 누군가 낮아지는 일에 ‘인간의 의, 또는 인간의 공덕’이 들어설 자리를 철저하게 차단하기 위함이다. 누군가 높아졌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무엇인가를 잘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다. 누군가 낮아졌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무엇인가를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다. (높아지면 뭐하나, 타락해서 나쁜 일만 하게 되지, 낮아지는 게 오히려 복이다.)
그러므로, 높아진 사람은 자신의 높아짐을 자랑할 필요도 자랑할 수도 없고, 자신의 높아짐을 생각하며 자신보다 낮은 사람을 무시하거나 경멸할 수 있는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높아진 사람은 그저 자신의 높아짐에 대하여 ‘신앙의 신비’로 여기며 감사할 뿐이다.
또한 낮아진 사람은 자신의 낮아짐을 자신의 탓인 양 자책할 필요가 없고, 자신의 낮아짐을 생각하며 자신보다 높은 사람에게 굽실거릴 이유가 없다. 낮아진 사람은 그저 자신의 낮아짐에 대하여 ‘신앙의 신비’로 여기며 감사할 뿐이다. (욥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그가 그렇게 낮아진 것은 죄 때문이라고 친구들을 욥을 다그치지만, 욥은 끝까지, 자신이 낮아진 이유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욥은 왜 그러한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 나중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자신의 주권을 말씀하실 뿐이다.)
‘교만과 오만’은 높아진 자나 낮아진 자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높아진 자가 ‘자기 자신의 의로움 때문에 높아진 것’이라 생각하며 자기 스스로를 높이면 그는 교만하고 오만한 자인 것이다. 그러한 자는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즉 그러한 생각은 옳지 못하다는 뜻이다. 낮아진 자가 ‘자기 자신의 죄악 때문에 낮아진 것’이 생각하며 자기 스스로 자책에 빠지고 우울해 하면 그는 교만하고 오만한 자인 것이다. 그러한 자는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즉 그러한 생각은 옳지 못하다는 뜻이다.
이러한 심판은 매우 준엄한 것이다. 우리는 올바르지 못한 생각으로 인해 자기 자신을 오만하고 교만한 자로 만들면 안 된다. 그래서, 8절에서 시인은 말하기를 ‘여호와의 손에는 한 잔이 있는데 그 잔에는 여러가지가 섞여 거품이 나는 포도주가 가득 담겨 있다’고 고백한다. 구약성경에서 ‘잔’은 하나님의 진노를 표현할 때 쓰이는 말이다. 높아짐과 낮아짐을 스스로 정하는 교만하고 오만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 진노가 반드시 임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누가 심판하시는가?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즉, 하나님이 누구는 낮추시고 누구는 높이신다. 즉,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뿔을 높이 들지 말아야 한다. 우리 뿔(힘, 능력, 권세, 위엄)을 들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뿔이 들렸다고 스스로 교만하거나 오만하지 말아야 하고, 우리의 뿔을 들어 주신 하나님께 오로지 감사해야 한다. 또한, 뿔이 들리지 않았다고 스스로 좌절하여 교만하거나 오만하지 말아야 하고, 우리 뿔을 들어주지 않으신 하나님께 오로지 감사해야 한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낮아진 것인지 높아진 것인지 판단할 능력이 없다. 우리가 보기에 낮아진 것 같으나 실은 높아진 것일 수 있고, 우리가 보기에 높아진 것 같으니 실은 낮아진 것일 수 있다. 낮아짐과 높아짐은 오직 하나님만 판단하실 수 있고,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높아짐과 낮아짐에 마음을 두지 말고, 오직,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 마음을 두어야 한다. 그게 의인이다. 그런 자의 뿔은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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