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8. 10. 1. 12:11

혀의 올바른 사용

(야고보서 5:13-20)


야고보의 이름은 구약의 야곱에서 왔다. 야고보는 야곱의 헬라어식 표기이다.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 중 가정 먼저 순교한 사람은 야고보이다(12:2). 이 일은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해서 AD 44년경 일어났다.

 

성경에는 크게 네 명의 야고보가 나온다. 한 명은 방금 위에서 언급한, 최초의 순교자였던,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10:2)이고, 또다른 12 제자 중 한 명인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10:3)이다. 그리고, 마리아와 글로바의 아들들 가운데 손아래인 야보고(15:40, 16:1, 19:25)과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6:3)이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의 형제는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 이렇게 네 명이었다(6:3). 그렇다면 성경의 한 책인 야고보서는 누가 쓴 것일까? 교회 전통은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쓴 것이라고 본다. 야고보는 야고보서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자기 소개에 군더더기가 없다. 이 말은 그 당시 교회 공동체는 야고보가 누구인지 잘 알았고, 그의 권위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울은 자기 자신을 장황하게 소개할 때가 많다. 왜냐하면,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고,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가장 큰 영향력 있는 지도자는 누구였을까? 우리는 흔히 베드로나 바울이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지도자였을 거라고 추측하지만, 실제로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지도자는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였다. 그 정황은 사도행전 15장에 잘 드러나 있다. 이방인 기독교인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의 중요한 의제를 놓고 토론한 후, 그 결론을 말하고 선포하는 과정에서 야고보의 역할이 그곳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야고보서는 굉장히 율법적(실천적)이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에서 야고보서 만큼 수난을 많이 겪은 성경을 찾아보기도 힘들다. 특별히 마르틴 루터의 야고보서에 대한 공격은 유명하다. 루터는 야고보서를 일컬어, ‘지푸라기 서신이라 부르며, ‘성경의 정경에서 빼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야고보서는 그만큼 실제적인 실천 지침서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비하한 루터는 야고보서를 오해한 것이고,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약간 모자란 듯 보인다. (이 주제는 복잡한 논의이니, 여기서는 생략한다.)

 

야고보서의 핵심구절은 이것이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1:22-24) 그러면서, 야고보서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2:17).

 

야고보서의 신학(또는 철학)은 마태복음의 신학(또는 철학)과 같다. 마태복음의 핵심구절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0-21).

 

여기서 나더러 주여 주여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믿음을 가리킨다. 그런데, 구원 받은 자의 삶은 그것으로 부족하다고 한다. 믿음은 곧 실천을 동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믿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은 굉장히 준엄한 선포이다. 우리는 성경의 이러한 가르침, 사도의 이러한 가르침을 너무도 쉽게 잃어버리고 산다.

 

야고보서에서 가장 큰 지면을 할애하여 서술하는 주제는 /에 관한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을 예쁘게 하는 일은 단순한 교양이 아니다. ‘혀의 올바른 사용은 교양이 아니라, 복음을 통하여,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피조물(새 인류 / 그리스도의 후예)이 된 결과이다. 이렇게 말해보자.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메시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 즉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인류라는 것을 어떻게 나타나 보일 수 있을까? 야고보서는 단연 혀의 올바른 사용에 있다고 말한다.

 

야고보서는 그것을 3장에서 논하고 있는데, 몸 중에서 혀는 작은 지체이지만 그것이 잘못 쓰일 경우 어떠한 파괴력을 지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3:6). 우리 몸에 있는 것 중에, 우리를 더럽힐 수 있는 유일한 것이 혀이다. 혀는 공든 탑을 무너지게 할 뿐 아니라, 혀는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릴 수 있다. 혀는 가히, 현대 무기의 최고라 일컬는 수소폭탄과 같다.

 

또한, 야고보서는 우리의 몸 전체 중에 유일하게 길들일 수 없는 지체가 라고 말한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3:8).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혀의 올바른 사용에 대하여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례로, 우리가 예수를 주님으로, 우리의 구세주로 고백한 뒤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힘써 살펴야 할 것은 무엇일까? 교회? 이웃? 발걸음? 손길? 표정? 아니다. 바로 혀이다.

 

우리가 혀를 어디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가? 야고보서는 이렇게 말한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4:11). 우리는 남을 비방하고 판단하는데 혀를 가장 많이 쓴다. (기승전,남편비방 / 기승전,아내비방/ 기승전,자식비방/ 기승전,이웃비방)

 

그렇다면,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데 혀를 쓰는 것이 왜 잘못일까? 기독교인은 어떠한 일을 상식적으로, 또는 도덕적으로 생각하는 데서만 그치면 안 된다. 기독교인은 어떠한 일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 어떠한 일이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사고하고 행동할 줄 알아야 한다.

 

야고보서도 혀의 올바른 사용에 대하여 상식적인, 또는 도덕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야고보서는 혀의 올바른 사용을 신학적으로 말한다.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4:11b-12).

 

야고보서는 선포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다! 그 한 분은 누구인가? 하나님! , 야고보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혀를 사용할 때, 남을 판단하고 비방하는 방식으로 사용하면, 그것을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교만 또는 죄악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나의 비방의 대상이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비방하는 나 자신이 심판을 받고 만다. 이런 비극이 어디에 있나.

 

그렇다면, 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우리가 오늘 읽은 말씀이 바로 그것에 대한 것이다. 혀의 올바른 사용은 이렇다.

1)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고난 당할 때, 우리는 대개 혀를 가지고 기도하지 않는다. 불평한다. 고난 당하는 자를 볼 때, 우리는 대개 혀를 가지고 기도해 주지 않는다. ‘쌤통이다하며 고소해 한다.

2) “너희 중에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즐거운 일이 있을 때, 우리는 대개 혀를 가지고 찬송하지 않는다. 자랑한다. 즐거워 하는 자를 볼 때, 우리는 대개 혀를 가지고 시기 질투한다.

3)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병 들었을 때, 우리는 대개 혀를 가지고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지 않는다. 쉬쉬한다. 병든 자를 볼 때, 우리는 대개 혀를 가지 기도하지 않는다. 혀를 무관심하게 놓아둔다.

4)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우리는 우리의 혀로 서로의 죄를 고백하는 데 서툴다. 우리는 우리의 혀를 가지고 죄에 대하여 변명하기에 바쁘다.

 

이것을 종합해 보면, 혀의 올바른 사용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기도, 찬송, 죄의 고백이다. 야고보서는 혀가 올바로 사용될 때 나타나는 능력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라”(16). 여기서 의인은 혀를 올바로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도 있다. 야고보서는 엘리야를 예로 들어 그 능력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17). 이것은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야고보서는 엘리야가 매우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닌, 우리와 다른 별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연약하고 두려워하고 자기 목숨을 위해 도망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혀를 올바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혀의 올바른 사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성경책은 시편이다. 시편은 탄식시로 가득 차 있다. 다윗은 살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엄청난 죽음의 위협과 비방, 억울한 일을 당했다. 그러나, 그는 그 사람들에 대하여 자신의 혀를 가지고 비방과 판단을 하지 않는다. 다윗은 주님 앞에 나아와 자신의 혀를 가지고 그 상황을 탄식한다. , 그는 힘들고 어려울 때, 억울하고 속상할 때, 자신을 힘들고 어렵게 만든 사람, 억울하고 속상하게 만든 사람을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 재판관이 되어 비방하고 판단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혀를 올바로 사용하여 하나님 앞에 엎드려 탄식의 기도를 드렸다. 그렇게 올바르게 혀를 사용할 줄 알았던 다윗에게 내린 하나님의 복은 우리 모두가 다 잘 아는 바이다.

 

혀의 올바른 사용은 교양이 아니다. 교양 있는 사람처럼 혀를 사용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혀를 사용하라. 우리의 혀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그리스도인은 혀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데쓰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혀를 기도하고 찬송하고 죄를 고백하는 데 사용한다. 그리고, 그럴 때, 혀는 단순한 몸의 한 지체에 머물지 않고, 하늘의 보좌를 움직이는 엄청난 위력을 지닌, 거룩한 능력이 된다.

 

비를 못 오게도 하고, 비를 내리게도 할 만한, 가공할 능력의 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사는지 생각해 보자. 사도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가 혀를 올바로 사용한다면, 우리도 엘리야처럼 큰 능력을 행하는 주님의 종이 될 것이다. 우리 몸에 그러한 능력을 지는 지체가 있다는 것이 너무 신기하지 않는가? 그 신비로운 능력의 세계를 일상에 경험하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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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