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8. 10. 10. 04:22

사탄의 질문

(욥기 1:1-12)

 

우리는 기본적으로 사탄이라는 말을 들으면, ‘나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은 신약성서 이후의 근대적 개념이다. 구약성서 시대, 또는 구약성서에 나타난 사탄의 개념은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차이가 있다.

 

욥기서에서도 사탄은 어떠한 역할을 감당하는 천상적 인물로 묘사된다. 구약성서에서 사탄은 나쁜 일을 저지르는 못된 존재, 또는 나쁜 짓을 저지르게 하는 배후의 힘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불충한 존재를 찾아내어 기소하는 존재이다. 요즘으로 따지면, 검사(prosecutor)이다. (아주 헷갈리는 질문: 검사는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인가,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인가? 하늘 법정에서 검사와 같은 일을 하는 사탄은 좋은 일을 하는 존재인가, 나쁜 일을 하는 존재인가?)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사탄에 대한 개념을 통해서도 사탄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천상의 법정에서 사탄이 제기하는 질문과 사탄 같은 일(고통)이 제기하는 질문은 똑같다. 사탄(또는 사탄 같은 일(고통))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가? 까닭 없이 사랑할 수 있는가?” 욥기서에서 사탄이 던지는 질문은 이렇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Does Job fear God for nothing?”(9).

 

욥은 왜 하나님을 경외할까? 하나님께 받은 복이 넘치도록 많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할까? 하나님께 받은 복이 하나도 없다면, 욥은 하나님을 경외할까? 이러한 질문은 인생에 있어 가장 깊고 중요한 질문 중 하나이다. 이러한 질문과 함께, 하늘의 법정은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일을 결정한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할 만한(찬양할 만한, 감사할 만한) 일을 하나씩 제거한다.

 

우선 이것부터 이야기하고 싶다. 이러한 일은 절대로 우리 인생 가운데 일어나면 안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욥기서에서 벌어지는 방식으로 우리를 시험하지 않으신다. 욥기서는 실제 사건을 다루는 것이라기 보다는 어떠한 현실을 말하고 있는 문학이다. 이것을 헷갈리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이상한 고정관념을 가지게 된다.

 

그렇다면, 욥기서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어떠한 삶의 통찰을 얻을 수 있을까? 욥기서는 구약성서 시대에 편만했던 (크게) 두 가지 사유방식을 전하고 있다. 첫째는 소유의 개념이다. 지금은 각자의 인격에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자식이 부모의 소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욥기서에 드러난 세상은 자식을 소유로 생각한다. 그래서 하늘법정은 욥을 테스트하기 위하여 자녀와 재산을 몰수한다. 자녀가 욥의 재산인 것처럼 묘사된다. 요즘 시대에는 통용하는 개념이 아니다.

 

둘째, 욥기서에서 드러나고 있는 사유방식은 ‘retribution theology(권선징악 신학)’이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행위에 따라 보상하신다는 개념이다. 악인은 벌을 받고, 의인은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특별히 욥기서는 이 개념에 도전하고 있다. 욥의 비극적인 소식을 듣고 욥을 위로하러 찾아온 욥의 세 친구(엘리비스, 빌닷, 소발)‘retribution theology’를 지닌 전형적인 인물이다. 욥기서는 욥과 이 친구 세명의 대결구조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사탄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우리는 왜 하나님을 경외하는가? 우리는 왜 이 사람을 사랑하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는 대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개 그러한 신앙으로 충만하다. 우리는 늘 받은 복을 세어본다. 그 복을 세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한다. 우리가 이 사람을 사랑하는 이유는 이 사람을 사랑할 만한 이유가 이 사람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유 있는 사랑, 그것을 우리는 에로스라고 부른다.

 

그러나 욥기서의 말씀은 그러한 경외, 그러한 사랑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경외와 사랑의 의미를 전복시킨다. 사탄의 질문은 매우 깊다.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어? 까닭 없이 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라고 묻는다. 우리는 이 질문을 받아 들고, 우리의 신앙, 우리의 사랑, 우리의 인생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나는 왜 하나님을 경외하는가? 나는 왜 이 사람을 사랑하는가? 경외와 사랑의 이유(조건)을 찾으라는 말이 아니라, ‘사랑(경외)’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사색을 해보라는 뜻이다.

 

우리는 뭔가 결핍을 안고 있는 존재를 만나면 불편해 한다. 뭔가 결핍을 안고 있으면 우리는 그를 사랑하지 못한다. 그러면 이렇게 질문해 보자. 그 관계 속에 사랑이 발생하지 못하는 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뭔가 결핍을 안고 있는 그 존재의 잘못인가? 아니면, 결핍을 안고 있는 존재를 사랑하지 못하는 나의 잘못인가? 뭔가 결핍이 있어서 그 존재가 싫은 것은 그 결핍을 안은 존재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를 사랑하지 못하는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 우리가 결핍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로 결핍인가? (장애가 결핍인가? 장애우 시설이 들어서면 땅값/집값이 떨어진다고 그 시설이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결핍을 지닌 존재가 아닌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왜 그러한 고백을 하는가? 메시아에 대한 진술을 하고 있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보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이사야 532). 우리는 정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 메시아를 사랑하는가? (흠모할 만한 것이 없어서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것이다.)

 

우리가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은 우리의 인생이 흠모할 만한 것이 없음에도 그 존재 자체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랑의 능력을 회복해 가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 인생에 있어, 나는 이것을 늙어감의 미학이라고 생각한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늙어간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늙어간다는 것은 삶의 실존에서 진정한 사랑의 능력을 회복해 가는 영적인 여정이다.

 

나이 들어가면 각종 고운 것, 내 마음을 사로잡던 것이 하나씩 사라진다. 그러한 현실을 견디고 받아들이고, 그러한 현실 속에서 여전히 서로의 품위와 인간성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고운 것, 마음을 사로잡는 것을 유지하기 위하여 불로초를 먹고, 최신 테크놀러지의 도움을 받아 매력을 발산하는 것? 아니다. ‘까닭이 없어도 사랑하는 능력을 늘려 나가는 것이다. (100세를 사신 김형석 교수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이를 먹으면 부부간에 젊을 때의 에로틱한 사랑은 없어지고, 인류애만 남는다.)

 

우린 왜 하나님을 경외(사랑)하는가? 우린 왜 이 사람(이웃)을 사랑하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그리고 서로 물어보라. 하나님을 경외(사랑)하는 이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에 대하여 첫째, 둘째, 셋째하면서 명확한 답을 내리기 보다, 그윽한 눈길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오히려 더 명확한 답이 아닐까?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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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