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 책망, 회복
(계 2:1-7)
에베소 교회가 어떠한 교회였는지, 그 교회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다. 성경에 세 군데 정도에서 에베소 교회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다. 우선 에베소서, 그리고 사도행전 19장, 20장,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계시록의 말씀이다.
에베소 교회는 소아시아를 대표하는 7개 교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였을 것이다. 소아시아 지역에서 에베소가 가장 큰 도시였고, 인구도 가장 많았으며, 가장 활발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대개 대도시의 교회들이 큰 역할을 감당한다. 에베소 교회도 그 당시 그러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도시의 큰 교회는 그만큼 시련도 많다. 여러 종류의 사람과 여러 사건이 발생하기 때문에,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속담이 있듯이, 교회가 큰 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도 많았을 것이다. 그 중에서, 오늘 말씀을 토대로 추측해 보건데,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다.
오늘 말씀은 이 사건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나라 번역 성경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헬라어 원어를 보면, 2절과 3절은 평행관계로 되어 있다. ‘악한 자들, 곧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처리하기 위해 에베소 교회는 참고(인내), 견디고(용납하지 않았고), 많은 수고에도 불구하고 피곤해 하지 않았다(수고).
네 행위의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용납하지 아니한 것
악한 자들,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처리한 일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교회에 어떠한 일이 발생하면, 교회는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수고와 인내와 견디는 일을 한다. 여기서 ‘게으르지 않다’라는 말의 의미가 참 좋다. 이는 ‘열심히 수고함에도 불구하고 피곤해 하지 않다’는 뜻이다. 우리는 어떠한 일을 하면서 열심히 하다가 곧 그 일에 대하여 피곤해 할 때가 많다. 대개, ‘그만 좀 해라’ 또는 ‘그만 좀 하자’라는 말을 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열심히 수고함에도 피곤해 하지 않는 것’이다. 이 말씀을 대하면서, 많은 반성을 하게 된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칭찬한다. 어떠한 일이 발생했는데,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 수고했고, 인내했고,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수고했음에도, 그것을 피곤해 하지 않았다. 그런데, 주님은 이러한 칭찬을 뒤로하고, 에베소 교회에 책망할 것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책망은 이것이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3절 후반부).
여기서, ‘처음 사랑’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개 우리는 ‘처음 사랑’을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이라고 본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시며, 에베소 교회가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 즉 믿음이 약해졌다는 것을 지적하신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해석도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처음 사랑’은 그들이 그리스도께 헌신할 때의 내적 신앙심을 가리키는 것이라기 보다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서로를 향해 가졌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물론, 그들은 여전히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잘 세워 나가고 있다. 그러나, ‘처음(프로스)’이라는 말은, 그들이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고 있지만, 질과 정도에서 처음 사랑을 따르지 못하는 것을 암시한다. (생명의 삶 Plus, 2010, 11월호, 172쪽).
이들은 왜 서로에 대한 사랑이 식었을까? 아마도, 갈등을 겪으면서 서로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 같다. 아무래도, 사람은 어느 문제로 갈등을 겪으면 관계가 소원해질 수밖에 없다. 분명, 자칭 사도라 하는 자를 추종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그를 악한 자라고 분별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어떠한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바로 그것이 에베소 교회의 문제점이 되었다. 칭찬 받을 만한 교회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자칭 사도’라는 악한 자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생긴 갈등 때문에 교회가 어려움에 처해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참 신비로운 것이다. 교회의 문제는 완전히 예상 못한 곳에서 터진다. ‘자칭 사도’가 원래는 문제인데, 교회를 힘들게 한 것은 ‘자칭 사도’가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하면서 겪은 갈등으로 인한 ‘관계의 소원함’이다.
‘자칭 사도’라하는 악한 자를 처리하는 문제는 굉장히 힘든 문제다. 에베소 교회는 그 문제를 인내와 수고를 통해서 잘 해결했다. 그런데, 그들에게 그 문제를 해결하면서 더 어려운 문제가 발생했다. 관계의 문제다. 이러한 문제는 우리가 여전히 우리의 현실 신앙생활에서 겪고 있는 문제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5절을 보자.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에베소 교회가 당면한, 관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세 단계가 소개되고 있다. 첫째는,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하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다. 대가 문제가 발생하면 우리는 상대방을 비난하는 데는 열을 올리는데,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데는 시간을 보내지 못한다. 관계의 문제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 무엇이 상대방과의 관계를 소원하게 했나’ 등을 살펴보아야 한다.
둘째는, ‘회개하는 것’이다. 어떤 일(또는 문제를 해결하는데)을 하는 데 있어서, 사람들은 흔히 수고와 인내를 잘 한다. 그런데, 오히려 회개하는 일을 잘 못한다. 이것도 이런 뜻이다. ‘자칭 사도라 하는 악한 자를 비난하는 데는 수고와 인내를 아끼지 않을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의 악한 모습을 회개하는 일에 사람들은 보통 매우 인색하다.
셋째는, ‘처음 행위를 가지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오른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대라, 소송을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 하거든 겉옷까지 내어주어라,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가 주어라’의 말씀의 실천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까지는 하지만, 이 마지막 단계는 때려 죽여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주님은 지금 에베소 교회에게 이 어려운 일을 명령하고 계신다.
다른 이에 대하여 비난하고 책망하는 일에 대비하여,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일, 회개하는 일, 그리고 처음 사랑한 것처럼 다시 사랑하는 일은 매우, 정말로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지금 주님께서는 이 어려운 일을 에베소 교회에 명령하고 계신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5절 후반부).
관계의 회복이 안 되면, 교회를 없애 버리겠다는 말씀이다. 굉장한 긴장요소이다. 사실, 오늘 말씀에서 가장 귀담아 들어야 하는 말씀은 이 말씀이다.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하여 가장 긴장해야 한다. 그런데, 대개 사람들은 이러한 말씀을 들으면 긴장하지 않는다. 그냥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래서,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춘 교회가 한 둘이 아니다.
우리는 교회가 없어지는 것을 별로 애통해 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교회가 없어지면, 다른 교회 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 하나 하나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절실한 생각은 안 한다. 우리는 교회가 없어질지 언정, 나 자신을 돌아보는 일, 회개하는 일, 특별히,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사실, 이것이 가장 큰 교만이고 불신앙이다. 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자기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처음 사랑,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처음 사랑을 회복하셨다.
내 몸이 지금 암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데, 그 암을 그냥 놓아둘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리고, 그 암은 용기와 겸손만 있으면 없앨 수 있는데, 용기를 못 낼 사람, 자기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놓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는 말씀에 긴장하지 않고, 그 말씀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 말씀을 돌이키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지 않기 때문에, 이 땅의 수많은 교회들이 어려움을 겪다가 그 자취를 감추는 것이다. (주님의 몸인 교회가 어떻게 되든, 자기 감정이 가장 중요한 사람 때문에 주님의 몸된 교회는 시련을 겪다가 사라진다.)
주님은 우리를 칭찬하시고, 책망도 하시지만, 주님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회복’이다.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얼마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나의 자존심이 더 귀한가, 아니면, 주님의 명령이 더 귀한가. 나의 자존심을 지키면, 나는 자존심을 지켰을 지 몰라도, 교회 공동체가 무너지고, 그리고, 그 자존심이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오늘 말씀대로,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나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고, 처음 사랑을 회복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살리면, 주님은 이러한 약속을 주신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7절).
무엇이 진짜 우리에게 유익인가 생각해 보자.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신앙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십자가 위에 자기 자신을 내어줌으로 하나님과의 사랑을 회복시킨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고, 처음 사랑을 회복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주님의 사랑이 살아 있는 교회, 그 사랑이 충만한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한다. 이것은 복음을 믿는 신앙의 일이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한 믿음의 일이요,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는 구원의 일이다. 날마다 이러한 결단이, 교회를 살리는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0) | 2018.10.04 |
---|---|
혀의 올바른 사용 (0) | 2018.10.01 |
우주적 비전 (0) | 2018.09.17 |
사랑의 신비 (1) | 2018.09.17 |
외톨이, 나그네, 원수 (1) | 2018.09.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