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톨이, 나그네, 원수 (outsider, stranger, enemy)
(마가복음 7:24-37)
마가복음 7장의 말씀은 긴장감 넘치는 대립을 다루고 있다. 7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을 먹는 것을 보았더라.” 위생을 중요시하는 요즘 시대에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지 않고 먹는 행위는 미개해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음식을 먹기 전 손을 씻지 않는 행위는 ‘장로들의 전통’을 무시하는,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 따져 물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5절).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을 드러내며, 그들의 질문의 가증함을 드러내신다.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한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6-7).
예수님은 그들이 어떻게 위선적으로 살아가는지 조목조목 따지시며 그들의 위선을 말씀으로 반박하신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으로 그들을 반박하는 것을 넘어서, 그들의 위선을 보란듯이 고발하는 행동을 취하신다. 그 행동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다.
‘장로들의 전통’과의 대결을 소위 ‘정결논쟁’이라고 부른다. 정결법은 레위기서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법 중 하나이다. 정결법이 중요한 이유는 정결하지 못하면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만복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은혜를 받지 못한다는 것은 곧 죽음에 처해지는 것과 같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정결한 상태를 유지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제단으로 나아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자기 자신을 정결하게 하여,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의 복을 받겠다는 마음가짐은 참 좋은 것이다. 여러분은 오늘 주님 앞에 나올 때, 어떤 모습으로 나왔는가? 정결하게 하고 왔는가? 여러분의 몸과 마음이 하나님의 복을 넉넉히 받을 수 있을 만큼 정결한가? 하나님의 복을 받는데, 양심의 거리낌이 없는가?
한자어 중에 ‘목욕재계(沐浴齋戒)’라는 말이 있다. 머리감을 목(沐), 미역감을 욕(浴), 가지런할 재(齋), 경계할 계(戒)이다. ‘머리를 감고 몸을 씻어 깨끗이 하고, 부정(不淨)을 피하여 마음을 가다듬는다’는 뜻이다. 주님 앞에 나올 때 이렇게 하고 나오신 분이 있는가? 우리가 ‘목욕’까지는 못할지라도, ‘재계’하는 마음을 가지고 오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는 지금 ‘주님께만 집중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인가? 우리의 마음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오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부정한 것을 정결하게 하시는 이야기이다. 장로들의 전통 논쟁(정결 논쟁)을 끝내신 예수님은 그곳을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간다. 그곳에 도착한 예수님은 한 집에 들어가서 아무도 모르게 머물고 싶어하셨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 중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 왔다.
이어지는 예수님과 그 여인의 대화는 듣기 좀 민망하다. 우선 그 여인은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는 헬라인이였고, 수로보니게 족속 여인이었다. 유대인이 아닌 사람이, 그리고 여인이 예수님에게 다가와 말을 붙이는 것은 그 당시 통념 상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더군다나, 성경이 그가 헬라인이고 수로보니게 여인이라고 그의 출신을 정확하게 적고 있는 이유는 그녀의 부정함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녀는 이스라엘 영토와 모세의 율법 바깥에 사는 아웃사이더(외톨이, 이방인)였고, 대대로 이스라엘을 괴롭힌 원수 나라의 자손이었다. 이러한 원수 같은 사람이, 그것도 여인이 예수님에게 다가와 말을 건네는 것을 넘어, 도움을 간청하는 일은 정상적인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럴까?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는 거칠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간청한다. “우리 딸에게 붙어 있는 귀신을 쫓아내 주세요!” 예수님이 대답한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7절). 어느 나라 말이든 ‘개’자가 들어가면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지금 예수님은 그녀를 일컬어 ‘개’라고 하고 있다.
‘개’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멈추지 않는다. 그것도 사랑하는 자식의 문제인데, 중간에 포기하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기 자신이 ‘개’라는 것을 인정한다. ‘나는 부정한 여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8절). 이 말에, 예수님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신다.
이야기의 배경은 두로에서 시돈, 그리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로 바뀐다. 그것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데리고 온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만난다. 상황은 좀 다르지만, 이 사람도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아웃사이더이다. 이 사람은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사람이라 사람들과 소통을 못하여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자였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고쳐 주신다.
그 사람을 고치는 방법이 약간 민망하다. 고침의 방법은 이렇다.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신다. 그러면서 이렇게 외치신다. “에바다!”(34절). 에바다의 뜻은 ‘열리라(be opened)’는 뜻이다. 그랬더니, 그 사람의 병이 낫는다.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35절). 이 말은 단순히 그의 육신이 온전해졌다는 것을 넘어서, 그가 더 이상 외톨이로 살지 않고 공동체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정결논쟁(장로들의 전통)과 부정한 사람들과 접촉하여 그들의 부정함을 온전케 해 주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으로서(교회가)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어떠한 사역을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많은 통찰을 준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지경(우리 교회의 지경)을 어떻게 넓혀 나가고 있는가?
금융자본주의 체제 하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지경을 넓히는 일은 대개 ‘경제의 규모를 늘려 나가는 것’으로 이해되고 다가온다. 그리고, 지경을 넓히는 것을 땅, 공간의 개념으로만 이해한다. 특별히 교회는 선교를 생각할 때, 성경에 나오는 다음 두 구절을 떠올린다. 하나는 마태복음에서 온 말씀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8-20). 다른 하나는 사도행전에서 온 말씀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교회는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사명으로 받아들이면서, 지경을 넓혀나가는데, 그때 교회 공동체는 주로 영토적인 개념에서 사명을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에 불타, 선교의 방향을 우리가 사는 지역을 넘어서, 외국(타지)으로 향한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지경을 넓혀 나가고,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있어, 놓치지 말아야 중요한 영역, 지경을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외톨이, 나그네, 원수’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영토의 개념(공간의 개념)이 아니라, ‘관계’의 개념이다. 내가 지금 내 삶에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이 장로들의 전통을 위선이라고 비난하는 이유는 그들이 ‘정결법’을 들이대며,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외톨이, 나그네, 원수’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정결’이지, ‘사람, 생명’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정결법을 통해서 사람을 소외시키고, 생명을 죽였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정결법’을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정결법의 핵심은 ‘생명’에 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 정결을 유지하여 생명을 지키는 것, 이것이 정결법의 핵심이다. 그러나, 장로들의 전통을 외친 ‘외식하는 자들’은 ‘정결법’을 통하여 오히려 사람들을 외톨이로 만들고, 나그네로 만들고, 원수로 만들어서 그들을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밀어냄으로써 사람들을 죽였다.
배제(exclusion)는 사회적 살인이다. (살인은 육신 바깥에서부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즉 육신 안에서부터 일어난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또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러한 사회적 살인을 저지르며 살아갈 때가 많다. 또는 그러한 사회적 살인을 당하면서 살아갈 때가 많다. 이러한 상황이야 말로, 예수님이 ‘정결논쟁’을 벌이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즉 외식하는 자들에게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고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의 생명의 법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삶의 지경을 넓힌다는 것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은, 경제의 측면, 영토(공간)의 측면에서만 생각하면 안 된다. 그것은 반드시 관계의 측면에서도 살펴 보아야 한다. 나는 누군가를 외톨이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누군가를 나그네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닌다. 나는 누군가를 원수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단절이 오면, 아무리 많은 돈을 가졌어도, 아무리 넓은 땅을 소유했어도, 그의 삶의 지경은 좁디 좁고 답답할 뿐이다. 그러므로, 삶의 지경을 넓힌다는 것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은 우선적으로 관계의 측면부터 시작해야 한다. 단절된 관계를 터 나갈 때, 우리의 삶의 지경은 넓어지는 것이고, 선교가 확장되는 것이다.
스스로, 외톨이가 되지 말고, 나그네가 되지 말고, 누군가의 원수로 남아 있지 말라. 누군가를 외톨이 만들지 말고, 나그네로 놓아두지 말며, 원수 삼지 말라. 상대방이 ‘개’처럼 느껴지더라도 ‘개’에게 은혜를 베푸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상대방에게 욕을 퍼붓는 삶에서 은혜를 베푸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라. 관계의 문이 열리도록, 주님께서 외치셨던 ‘에바다’를 외치며 기도하라.
가정에, 직장에, 교회 공동체에, 그리고 이 사회에 ‘외톨이, 나그네, 원수’가 없도록 서로가 서로에게 관계의 문을 열리게 하는 것이 삶의 지경을 넓히는 것이요,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라는 것을 마음에 품고, 부자되는 것보다, 땅을 소유하는 것보다 훨씬 훨씬 어려운, 사람을 얻는 일에 성공과 기쁨이 있게 해달라고, ‘수로보니게 여인’과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정결케 하신 우리 주님께 간구하는 믿음이 자녀들이 되자.
기도문
주님,
우리의 삶의 지경을 넓혀 주옵소서.
선교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지경을 넓혀나갈 때,
경제의 측면과 영토의 측면에서만 머물지 말게 하시고,
주변을 돌아보며 관계의 측면을 세심하게 돌아보게 하셔서,
외톨이, 나그네, 원수가
친구와 공동체의 일원으로 변하는
놀라운 은혜가 임하게 하옵소서.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주님이 하셨사오니,
그 능력 받아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는 믿음의 자녀인 줄로 믿사오니,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버리고,
‘에바다’, 관계의 문이 열리게 하셔서
주 안에서 서로 사랑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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