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8. 9. 17. 13:52

사랑의 신비

(요한일서 4:7-16)

 

오늘 말씀에는 요한신학의 핵심이 나온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7-8). 여기서 주목해야 할 진술은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문장이다. 헬라어로 아가페 에크 투 쎄우라한다.

 

요한의 서신에는 에크 투 쎄우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에크라는 전치사는 영어의 ‘of 또는 from’을 나타낸다. 이는 소속이나 기원을 나타내는 전치사이다. 그래서 요한일서 46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라고 할 때, 이는 우리 인간 존재의 출처나 근본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인데,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고 그로 인해 존재한다는 정체성을 갖게 된다.

 

인간 존재의 기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라는 성찰은 아주아주 오래된 것이다. 모든 학문의 발전은 이 성찰로부터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철학자는 기본적으로 신학자이다. 신학자는 기본적으로 철학자이다. 철학이란 인간 존재를 규명하는 학문인데, 인간 존재를 규명하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이라는 존재를 상정하지 않고서는 규정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아주 옛날부터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정의 내릴 때, 인생은 존재의 기원을 찾아 가는 순례인데, 그 순례의 끝에는 언제나 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구원은 한 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인생의 여정이라고 하는 것이다. 구원은 자기 존재의 기원을 찾아 떠나는 순례의 여정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구원의 완성은 자기 존재의 기원인 신과 다시 연합하는 상태, 바로 그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얼마나 성실하게 행하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 존재의 기원인 하나님께로 날마다 가까이 가고 있는가. 우리의 인생의 방향은 어디로 향해 있는가.

 

요한은 아주 신비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도 에크라는 전치사를 쓰고 있는데, 이는 사랑의 출처와 기원이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요한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랑의 출처와 기원이 하나님인만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의 출처와 기원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확증할 뿐 아니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안다라는 말은 헬라어의 그노스인데, ‘안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아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기독교 전통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영지주의는 영어로 ‘Gnosticism’이라고 하는데, ‘영지라는 말은 아는 힘을 말한다. ,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구원은 아는 것에서 온다. 안다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라, 구원을 가져올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현대과학은, 어떻게 보면, 현대판 영지주의라고 할 수 있다. 과학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데카르트의 철학을 따라, 이 세상 모든 것의 원리를 파헤쳐 알려고 한다. 아는 힘이 지금의 문명을 만들었다. 아는 힘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문명을 이루지 못하고, 소위 말하는 미개속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아는 힘때문에 가장 눈부시게 발전한 분야 중 하나가 의학이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육체를 알기 원했다. 그래서 지금의 의학발전을 이루었다. 아는 것을 통해서 질병을 하나씩 극복해 왔고, 지금도 사람들은 아는 힘을 통해서 더 많은 질병들을 정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아는 힘이 마냥 낭만적이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 ‘아는 힘때문에 인간은 환경을 파괴했으며, 생명을 오히려 헤치기도 한다.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지구온난화문제는 인간의 아는 힘때문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2차 대전 당시 유대인들이 600만명이나 죽은 이유도,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도, 그것으로 인해 죽어 나간 수많은 생명들도 모두 인간의 아는 힘때문이다.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드러났다고 말한다. 그것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힘이 되는데,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사건을 통해서 일어났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이다. 이것이 신비인 이유는 그 사랑의 깊이와 이유를 우리가 다 알지 못하거니와, 그가 보이신 사랑은 인간의 눈에 모순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 중 가장 공격이 심한 것은 이 진술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10).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도 이상하고, 상식적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화목제물로 내놓았다는 것 자체가 이해 안가는 행동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매우 인간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일 뿐이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보았을 때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세상에 보내신 것은 일종의 살인행위로 밖에 안 보이겠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신비 그 자체이다.

 

화목제물(힐라스모스)’이라는 말은 영어로 ‘propitiation’을 쓴다. 영어 ‘propitiation’은 라틴어 ‘propitiare’에서 왔는데, 그 뜻은 ‘appease’이다. 이것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favor(호의, 좋은 마음)’를 다시 얻는 행위를 말한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것은 ‘favor(호의, 좋은 마음)’이다. 서로에게 좋은 마음이 없으면, 아무리 예뻐도, 아무리 잘 생겼어도, 아무리 부자여도, 아무리 성격이 좋아도, 아무리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리 바른 행동을 해도, 상대방과 관계를 이어 나갈 수 없다.

 

살면서 만나는 사람 중에, 괜히 싫은 사람이 있다. 괜히 싫은 사람 곁에는 가기도 싫고, 그 사람과 말을 섞고 싶지도 않다. 좋은 마음이 없으면, 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어떠한 선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좋은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때려 죽여도억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화목제물(propitiation)로 그의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은 굉장한 것을 의미한다. 우선, 하나님이 그 화목제물을 통해 우리에게 좋은 마음을 가지시고, 그 좋은 마음을 잃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호의()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도 그 화목제물을 통해 하나님을 좋은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다. 우리는 그 화목제물을 통해, 우리 인생에 어떠한 일이 닥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그 화목제물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호의를 가질 수 있다. , 요한이 말하듯이,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자신 때문이 아니라 그 화목제물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좋은 일이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독생자, 우리에게 화목제물로 주신 그 분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을 말해주는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랑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 가치가 엄청나다. 왜냐하면, 사랑의 출처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사랑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고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신적인 능력이다. 아니, 사랑은 하나님 자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화목제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으면, 이상하게 호의롭지 못한 사람에게도 좋은 마음을 갖게 된다. 우리는 그 능력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사랑하지 아니하면, 그는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다. 화목제물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것은 이미 우리가 좋은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뜻이다. 누군가에게 좋은 마음이 없거든, 그 사람을 생각하기 이전에, 우리의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 화목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좋은 마음이 생기면, 어렵지 않게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은 감정의 문제(Psychological한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Theological한문제)이다. 사랑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다. 사랑하는 순간, 우리는 믿음 안에 거하는 것이요, 사랑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에게 가 닿는 것이다. 하나님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순간, 무엇보다 우리는 구원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랑보다 신비로운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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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