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2. 1. 07:45

말씀과 함께 춤을 (Dances with words)

 (느헤미야 8:1-3, 5-6, 8-10)


신앙이 성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신앙 성장이 왜 중요할까? 몸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면역체계를 튼튼하게 하는 것이다. 운동을 하는 이유, 식단을 조절해 건강식을 먹는 이유도 면역체계를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우리 몸에는 매일 같은 엄청난 숫자의 불량세포가 만들어 진다. 그 불량 세포를 잘 퇴치하지 못하면, 그게 암으로 발전해 몸에 치명타를 가한다. 몸에 병이 생기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면역체계의 붕괴 때문이다. 불량 세포가 생성되는 것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면역체계를 튼튼히 해서 불량 세포를 무찌르는 것 뿐이다. 

신앙은 인간의 건강을 지켜주는 가장 강력한 무기 중의 하나이다. 신앙을 가지면 죽은 후에 천국 가는 것만 생각하는 사람은 신앙의 근본을 놓치는 것이다. 지금 내가 여기서 아프고 힘든데, 죽은 후만 생각하면 현재 우리의 생명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지금 여기의 현재를 건강하게 살지 못하는 사람은 죽은 후의 생명도 건강할 수 없다. 현재성을 잃은 신앙은 건강하지 못하다.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는 그의 저서 <삼위일체론>에서 기독교의 핵심교리인 삼위일체론을 논하면서 우리 인간이나 이 세상에 새겨진 삼위일체의 흔적을 추적한다. 삼위일체론은 기독교가 만들어낸 괴상한 교리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삼위일체를 드러내기 때문에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삼위일체론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공헌은 삼위일체론 교리 자체의 발전이라기 보다 그것이 우리의 삶 속에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실천적으로 밝혔다는 데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에서 언급되는 것은 아니지만, 가령, 우리가 건강해 지려면 해야 하는 일도 매우 삼위일체적이다. 유산소 운동, 무산소 운동, 그리고 식단조절(다이어트)의 세 가지 요소가 골고루 섞이지 않으면 신체의 건강을 온전하게 이루기 어렵다. 그런 것처럼, 우리의 영적인 신앙의 성장도 매우 삼위일체적이다. 어떤 것 한 가지만 해서는 안된다. 신앙의 성장도 매우 삼위일체적인데, 말씀과 기도, 그리고 예배의 세 가지 요소가 골고루 섞이지 않으면 신앙의 성장은 묘연하다. 

삼위일체론에서 성부, 성자, 성령을 말하면서 기독교 전통은 성부의 우선성을 늘 강조해 왔다. 성부(아버지 하나님)는 모든 것의 시발점이다. 물론, 이것이 성자와 성령의 종속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논의 매우 복잡하다. 그런 의미에서, 몸의 건강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식단조절이다. 음식이 제일 중요하다. 우리 몸에 들어가는 음식이 엉망이면 아무리 운동을 열심히 해도 소용이 없다. 그런 것처럼, 신앙 성장의 삼위일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이다. 말씀은 곧 음식과 같다. 

우리는 말씀 때문에 기도도 드리게 되는 것이고, 예배도 드리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말씀은 매우 절대적이다. 말씀 없이 기도 드리고 예배 드리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그건 미신이고 타 종교이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말씀의 중요성을 절대 놓치면 안된다.  

무엇이든지 잘 하면 재밌다. 가령, 탁구가 재미 없는 이유는 탁구를 잘 못 치기 때문이다. 골프가 재미 없는 이유도 골프를 잘 못 치기 때문이다. 하고 있는 그것에 대한 깊이가 없으면 별로 재미 없고 흥미가 없는 법이다. 교회 오는 것에 대한 즐거움이 없는 이유는 신앙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개 탁구를 잘 치고 싶어도 탁구를 잘 못 치는 이유, 골프를 잘 못 치는 이유, 교회 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잘 모르는 이유는 어떻게 해야 그것의 깊이로 들어가는 지 잘 몰라서 그렇다.  

탁구를 잘 치려면, 골프를 잘 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의 전문 분야가 아니라 잘 모르니까, 그것은 그 분야의 전문가에게 문의하기를 바라고, 나는 신앙에 대한 이야기만 하려한다. 말씀과 신앙의 성장은 정비례한다. 말씀이 얼마큼 내 삶에 실제적으로 들어와 있느냐에 따라서 신앙의 깊이가 달라진다.  

내 삶에 들어와 있다는 게 무슨 뜻인가? 이렇게 생각해 보자. 우리가 어떠한 노래를 좋아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 노래가 왜 좋은가? 예를 들어서, 나는 김원중의 <바위섬>이라는 노래를 좋아한다.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섬 인적 없던 이곳에 세상 사람들 하나 둘 모여 들더니 어느 밤 폭풍우에 휘말려 모두 사라지고 남은 것은 바위섬과 흰 파도라네…” 물론 노래 가사도 좋고 멜로디도 좋다. 하지만, 내가 이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 노래를 통한 내 삶의 아름다운 기억 때문이다. 

중학교 3학년 때, 학교에서 단체로 문경새재에 있는 유스호스텔로 수련회를 간 적이 있다. 그때 각 학급에서 대표로 몇 명씩 나와 전교생 앞에서 장기자랑을 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 나는 우리 반 대표로 나가 김원중의 <바위섬>을 불렀다. 그 노래를 전교생 앞에서 부른 후, 나는 전교생에게 일약 스타가 되었다. (고등학교 때도 동일한 일이 있었는데, 그건 더 드라마틱 해서, 다른 때 이야기 하겠다.) 

우리가 어떠한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노래가 단순히 가사와 멜로디가 좋아서가 아니다. 삶의 한 순간을 그 노래와 함께 보냈고, 그 노래를 부르면 그 노래가 가져다 주는 행복한 기억 때문에 그렇다. 그 노래는 내 삶에 들어와 있는 거다. 마찬가지다. 말씀이 내 삶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은 삶의 한 순간을 그 말씀과 함께 보냈고, 그 말씀이 나에게 힘이 되어 주었으며, 그 말씀을 읽으면(외우면/들으면) 그 말씀이 가져다 주는 행복한 기억이 있다. 그럴 때, 말씀은 내 삶에 들어와 있는 거다. 

느헤미야의 본문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생활을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발생한 일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1). 눈물나는 장면이다.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뜻이다. 원래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들이 돌아온 고향은 사실 이들이 직접 살던 곳은 아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은 근 70년간 지속되었기 때문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향한 사람들은 처음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후손들이다.  

이민생활을 70년 정도 하면, 대개 3세대가 지난다. 70년 정도 되면, 그곳에서 이미 삶의 터전을 닦았고, 폐허가 된 고향(그것도 자신들의 직접적인 고향도 아닌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을 것이다. 물론, 고레스 칙령에 의해서 시작된 이스라엘 사람들의 예루살렘 귀환 프로젝트에 모든 사람들이 참여한 것은 아니다. 그들 중에는 그냥 바벨론에 남아서 여생을 보내려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누가 바벨론을 떠나서 스룹바벨을 따라, 느헤미야를 따라, 에스라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귀환했을까? 누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한 사람들, 하나님 말씀 속에 담긴 비전과 그 사랑을 잊지 않은 사람들이 귀환했다. 그들은 고향으로 귀환 한 뒤, 7개월이 지나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서 집회를 가졌다. 그때, 에스라가 한 일은 모세의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 앞에서 읽은 것이었다.  

그 순간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눈 앞에서)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5). 귀한 사람이 오면 앉아서 맞이하는 사람은 없다. 일어나지 않으면 그 사람보다 자신이 더 높은 사람이거나 그 사람을 별로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행동이 마음을 보여준다. 모든 백성이 책(하나님의 말씀)을 펼 때 일어났다. 그들이 말씀을 귀하게 생각했다는 뜻이다.  

그 이후에, 에스라가 말씀을 전한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8). 그 이후, 백성들의 행동이 감동적이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 지라”(9a). 이들은 왜 울었을까? 말씀이 한 편의 노래처럼 아름답게 들려와서? 아니다. 그 말씀이 그들의 삶에 이미 들어와 있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포로생활하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붙들었다. 에스라가 말씀을 낭독하고 그 뜻을 풀어주었을 때, 그들은 그 말씀을 붙들고 눈물로 기도하던 그때가 생각났다. 처절했던 시절의 자신들을 붙들어 주었던 그 말씀을 듣고, 울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나.  

가령, 지난 셀라 수요찬양예배 때 함께 나누었던 이사야서의 말씀을 생각해 보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41:10). 이 말씀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이 전해주신 위로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붙들고 힘을 냈던 사람이, 어려운 시절을 지나고 이 말씀을 듣게 되었을 때, 안 울 사람이 어디 있나.


말씀을 들으면 눈물이 나는가? 말씀을 들으며 눈물이 나면, 그 말씀이 내 삶에 들어와 있는 거다. 그것은 내가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살았다는 증거이다. 그것이 말씀이 내 삶에 들어오게 하는 과정이다. 말씀을 늘 읽거나 들으면, 그리고 그 말씀을 외우면, 삶의 어떠한 순간에 그 말씀이 나를 붙들어 준다. 그때 말씀은 내 삶 안으로 들어온다. 이러한 경험이 없으면, 말씀은 내 삶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내 삶 바깥의 이방인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말씀과 신앙의 성장은 정비례한다. 신앙이란 내 삶을 지켜주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나의 의지와 상관 없이 생기는 삶의 나쁜 세포를 무찔러 주는 삶의 면역체계이다. 신앙은 지옥에서 우리를 건져주는 빛이다. 그래서 신앙의 성장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삶의 필수요소다. 그리고 신앙의 성장은 말씀이 내 삶에 얼마나 들어와 있느냐에 달려 있다. 살면 살수록 말씀의 어휘가 늘어나야 한다. 우리는 어떠한가? 

심보선의 실어증이라는 시가 있다.  

나이가 들수록 어휘력이 줄어든다 

언어학에서 말하는 인접적 자의성의 규칙에 따라 평소 잘 쓰지 않는 단어들을 훈련 삼아 적어보았다 

배짱, 베짱이

사슬, 사슴

측백나무, 측면

언니, 어금니

,

마음껏, 힘껏

벨라, 지오 

윤동주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생각할 때 다른 단어들도 숙고했을 것이다 

, , 안개, , 구름 ……. 같은 것들 

버려진 단어들을 생각하며 고개를 숙이는 사람이 있다 

시인이 아니라도 그런 사람이 있다 

TV에 나오는 낱말 맞히기 게임에서 하나도 맞히지 못했다 

철없던 시절엔 실어증에 걸리고 싶을 때가 있었는데 

오늘에서야 소원이 이루어졌다 

약을 먹는데 옆집 문 여는 소리가 들린다 

살려달라고 외치고 싶어도 말이 안 나온다 

ㅡ 심보선의 시집 <오늘은 잘 모르겠어>  

날마다 말씀의 어휘가 늘어나야 한다. 만약 말씀의 어휘가 줄어들어, 실어증에 걸리면, 위기의 순간에 살려달라고 외치고 싶어도 말이 안 나온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처럼, 사탄에게 시험을 당할 때 말씀으로 물리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말씀의 어휘가 충분하지 않으면, 말씀이 나의 삶 안으로 들어와 있지 않으면, 위기의 때에 그것을 물리칠 수 있는 말씀이 갑자기 튀어나오지 않는다.  

나의 삶에 말씀의 어휘가 충분한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것은 위에서 보았듯이, 그 말씀을 들으면(읽으면) 삶의 기억이 소환되어 눈가 눈물이 맺히느냐 아니냐를 보면 알 수 있다. 말씀을 통해 눈물을 흘려본 사람이 에스라의 말처럼 근심하지 않고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기쁨은 눈물의 열매다.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10b). 

말씀과 함께 춤을! 포로생활에서 귀환하여 무너진 예루살렘을 재건하려 애쓰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뻐하며 춤을 출 수 있었다.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라!”(10a). 말씀을 붙들고 울어본 사람만이 말씀 안에서 춤 출 수 있다. 말씀을 붙들고 울라. 그리고 그 말씀이 삶 속에 들어오게 하라. 그러면, 말씀과 함께 춤을 추게 될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건강이고, 행복이고,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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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