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2. 11. 15:55

말씀에 의지하여

(누가복음 5: 1-11)

 

개인적으로 이 말씀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는 말씀이다. 누가복음 54절의 말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아버지가 강화도 길촌교회에서 목회하실 때 그 교회의 장로로 섬기시던 이종필 장로님이 나의 이름을 지어 주셨다. ‘깊을 , 심을 ’. 집안 큰 형님 이름은 일식, 둘째 형님 이름은 이식, 그 순서대로 가다가 내 이름은 사식이가 될 뻔 했는데, 다행히 장로님 덕분에 그 위기를 모면했다.

 

이 이야기는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일어난 일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갈릴리 호수다. 그 지역에 가버나움, 답가(Tabgah), 긴네렛(Chinneret, 또는 게네사렛), 게네사렛 평야, 막달라(Magdala), 디베랴(Tiberias) 등의 마을이 있었는데, 성경에서는 갈릴리 호수를 게네사렛 호수, 또는 디베랴 호수(요한복음 6:1, 21:1)라는 호칭으로도 부른다. 갈릴리 호수가 히브리인들의 악기 긴네렛(하프)을 닮았다 하여, 긴네렛(게네사렛)이라 별명으로 부르는 것이고, 디베랴는 디베리우스 황제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도시인데, 호수 주변 도시 중 가장 큰 도시라 그 이름을 따서 디베랴 호수로 부르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게네사렛 호숫가의 마을 중, 가버나움에서 일어난 일로 추정한다. 가버나움은 마을이라는 뜻의 가파르나훔이 합쳐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나훔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나훔은 위로를 뜻하므로, 풀어서 말하면, 가버나움은 위로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참 따스한 이름이다. 이곳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든다. (나의 기타 이름도 나훔이다. 기타를 치면서 나도 위로 받고, 기타를 치며 부르는 나의 노래(찬양)에 사람들이 위로 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지었다.)

 

위로의 마을인데, 별로 위로되지 못한 일이 발생한다. 어부들이 밤새껏 게네사렛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을 쳤는데 헛탕을 친 것이다. 얼마나 낙심했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터덜터덜 그물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물이 정리되면, 집에 들어가 쉴 참이었다.

 

그러한 때에,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고 계셨다. 정황을 봐서는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한 두 번 온 게 아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미 사람들 사이에서 선생(랍비)’로 통한 것 같다. 그날도 예수님은 시몬의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떼어 띄운 뒤거기에 앉아  무리들을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말씀을 마치시고 문득 시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4).

 

시몬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던 모양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시몬은 예수님의 뜬금없는 소리에 이야기에서처럼 반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5).

 

여기서 시몬이 말하는 말씀이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예수님이 배를 띄우고 무리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직접적인 말씀이다. 예수님이 배를 띄우고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다. 그렇다고, 그 말씀이 고기를 잘 잡는 법에 대한 말씀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촌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어부들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에 시몬은 위로를 받았고, 힘을 얻었고, 예수님의 직접적인 말씀에도 순종할 능력도 생겼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시몬의 행동은 요즘말로 대박이었다. “말씀에 의지하여그물을 내렸는데, 밤새껏 수고해도 잡히지 않던 물고기가 엄청 많이 잡혀 그물이 찢어질 정도였다. 그래서 시몬은 그것을 혼자 감당 못해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거두어 들일 수 있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일이 벌어진 이후의 시몬 베드로의 반응이다. 보통 같으면 고기가 그렇게 많이 잡힌 것을 두고 모두들 신나서 어야디야 좋다!’하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연발 외쳐야 할 것 같은데,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렇게 말한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Go away from me, Lord; I am a sinful man!)”(8). 시몬의 이 반응은 무엇인가?

 

이 짧은 문장에 인간의 실존에 대한 고백과 예수님의 존재에 대한 고백이 집약적으로 들어 있다. 시몬은 예수님을 주님(Lord)’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살면서 주님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많다. 시몬은 어부였으므로, 고기잡는 기술이나 게네사렛 호수 지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그에게 주님이었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주님으로 여기는 바로 그것 때문에, 한 발자국도 못 나간다.

 

만약, 시몬이 자기의 주님을 더 의지했다면, 예수님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예수님에게 핀잔을 주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시몬은 평생 우물안 개구리 / 그모양 그꼴 / 현실에 안주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 우리의 주님인지를 날마다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말씀에 의지하여주님이 아닌 것을 버리고, 참된 주님을 붙들어야 한다. 그러면, 시몬이 경험한 다음의 고백이 우리에게도 터져나올 것이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것은 참으로 진실한 자기 고백이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 자신의 실존을 잘 보지 못한다. 그래서 꼴사납거나 교만하다. 자기에게서 어떠한 죄의 악취가 풍기는 줄도 모르고, 그것을 씻어낼 생각도 못한 채, 주님의 거룩한 피조물들에게 해악을 끼치며 산다.

 

절대적인 거룩함(완전함/위대함/숭고함)을 경험하고 나면 자기 존재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깨닫게 되기 때문에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렇게 경험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 앞에 엎드릴 수 밖에 없었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었고, 예수님께 자기를 떠나 달라고간구할 수 밖에 없었고,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경험이 있는가?

 

이러한 경험을 한 사람의 삶은 그 이전의 삶과 같을 수가 없다. 두 가지 면에서 그렇다. 첫째,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을 소명으로 받아들인다. 이 경험이 있기 전 시몬은 어부의 일을 그냥 자신의 개인적인 직업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절대적인 경험을 한 후, 그는 자신의 일이 단순히 개인적인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서 드러난다.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10). 병행구는 마가복음에 더 자세히 나온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1:17).

 

그냥 단순한 어부(물고기를 잡는 사람)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삶이 변한다. 이것은 이제 시몬이 물고기 잡는 일을 포기하고 다른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의 직업의 본질이 바뀌었다는 뜻이다. 그의 직업 자체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사용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다. 삶 자체가 소명이 되었다는 뜻이다. 소명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삶을 판단한다는 뜻”(정용섭)이다. 그리고 소명을 갖게 된 자는 자신이 하는 일을 돈의 교환가치로 여기지 않는다.

 

우리가 가진 직업은 무엇인가? 우리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돈을 벌기 위해서 일하는가, 아니면, 소명으로 일하는가. 단순히 직업으로서 일을 하면 스스로 벌어먹기 위해서 힘들고 어렵겠지만, 소명으로서 일을 하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거룩한 일이 되므로, 공중의 새도, 들판의 들꽃도 먹이고 입히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실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삶의 극적인 전환은 말씀에 의지하여행한 시몬 베드로의 두려운 경험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둘째로, 이러한 두려운 경험을 한 이들의 삶은 가벼워지고 더 값어치 있어진다. 왜냐하면, 불필요한 것들, 값어치 없는 것들을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경험한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업자(친구)인 야고보와 요한은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랐다”(11). 이러한 삶의 자세는 마태복음 13장에서도 볼 수 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그 밭을 사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 그 밭을 산다.

 

우리 아이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많이 한다. 아이들이 지금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장난감이다. 특별히 레고를 좋아한다. 멋진 레고를 보면 사달라고 조른다. 그리고 집에서 레고를 가지고 놀다, 조그만 피스 하나 가지고, 형제끼리 짐승처럼 싸운다. 그 모습을 보면 부모의 마음은 무엇인가. ‘, 정말 소중한 것 가지고 싸우는구나.’, 그러면서 그들을 응원하는가? 아니다.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나오고 때로는 한심하다. 그래서 부모는 아이들을 혼낸다.

 

우리가 지금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 없으면 죽을 것 같아서 집착하는 그 모든 것들이 절대적인 경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시몬 베드로에게 어부질은 그에게 전부였다. 그가 가지고 있는 배, 그가 가지고 있는 그물 등 그 모든 것들이 그에게는 절대적인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절대적인 경험(또다른 세상에 대한 경험)을 하고 나니 그는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랐다.

 

지난 화요일, 아침에 출근하면서 행복했다. 앞산(미션픽) 꼭대기에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꼭 알프스에 온 기분이었다. 그래서 사진을 찍어 여러 사람과 행복을 나누었다. 그러면서 이러한 문구를 썼다.

 

밤새 추웠지만, 비가 왔다. 그건 땅에 가까운 세상에서 일어난 일이다. 하늘에 가까운 세상에서는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우리는 어디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는가.

 

그렇다. 우리는 어디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는가. 같은 세상을 살지만, 땅에 가까운 삶을 사는 사람과 하늘에 가까운 삶을 사는 사람의 경험은 같을 수 없다. 같은 게 하늘에 내리는 것 같지만, 땅에 가까이 사는 사람은 비를 경험하지만 하늘에 가까이 사는 사람은 눈을 경험한다.

 

우리는 무엇에 의지해서 사는가. 내가 주님이라고 생각하는 그것? 나의 입에 풀칠해주게 하는 그것? 밤새껏 수고해 보아도 실망만 안겨주는 그것을 내려놓고, 우리도 시몬 베드로처럼 말씀에 의지하여살아보면 어떨까? 그러면, 우리도 시몬 베드로처럼 절대적인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그 이전과는 다르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소명으로 다가올 것이고,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고 거룩한 삶을 사는 행복한 인생이 될 것이다.

 

말씀에 의지하여이 기도를 나누며 마치려고 한다.


주님, 내가 하는 이 일이 거짓되거나 악한 일이 아니라, 진실하고 정결한 일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할 때, 내가 하는 그 일을 통하여 주님을 보게 되고, 주님을 더욱더 깊이 알게 될 줄 믿습니다. 아멘.”

 

내가 하는 모든 일이, 그냥 하는 일이 아니라, 소명이 되려면, 말씀에 의지한 이러한 기도가 입술에서 끊이지 않아야 한다. ‘말씀에 의지하여살기로 결단하는 여러분에게, 가버나움에 내린 주님의 위로가 영원토록 함께 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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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