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공부
(고린도전서 15:12-20)
부활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기독교인에게 있어, 아니, 인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고린도전서 15장은 기독교의 부활 이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본문 중 하나이다. 복음서는 일어난 일을 서술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보여줄 뿐이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도 서술의 방식으로 보여줄 뿐이지, 부활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나 신학적 사색을 하지 않는다.
부활에 대한 신학적 사색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일어난다. 부활 사건이 발생한 후, 사람들은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려고 노력했다는 뜻이다. 역사란, 신학이란, 신앙이란, 발생한 일에 대한 서술이자 사색이다. 이러한 사색의 능력은 인간 고유의 능력이다.
아프리카 초원의 동물들은 발생한 일에 대해서 서술하고 사색하지 않는다. 물론 동물에게도 본능이라는 게 있어서 어떠한 일이 발생하면 거기에 반응하고 고통스러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고통은 본능적인 고통이지, 사색적인(영적인) 고통은 아니다.
인간은 사건이 발생하면 그 사건에 대한 서술을 하고, 그 사건을 사색한다. 그 사색이 인간을 고뇌에 빠지게 하고, 아픔을 겪게 하고, 슬픔에 젖게 한다. 그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삶의 질은 달라진다. 그 사건은 인간 존재를 규정해준다. 어떠한 사건이 발생하면, 인간은 ‘이게 뭐지’라고 질문하면서 그 발생한 사건에 대한 사색에 잠기게 된다. 그 과정은 참 고통스러운 과정이기도 하다.
부활은 ‘예수’에게 발생한 사건이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나한테 발생한 일도 아닌데, 그게 왜 중요하지? 그것에 대해서 왜 내가 사색해야 하지?’ 이해 가능한 반응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반응이 맞는 것은 아니다.
가령 이렇게 생각해 보자. 어떤 이에게 ‘죽음’이 발생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사람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인가? 어떤 사람에게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 발생한 일을 안타까워한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인가? 이 세상에는 우리에게 직접 발생하지 않아 경험해 보지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들어 경험하는 것들이 있다.
그러한 일을 들으면서 ‘그 일이 나에게 발생하지 않았다고, 나는 그러한 일을 겪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큰 착각은 없다.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은 바로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지닌 일이다. 우리가 함께 기도한 ‘박준혁 군’의 일을 우리는 뉴스를 통해서 접했다. 그랜드 캐니언에서 발을 헛짚어 낭떠러지로 떨어져 크게 다친 뉴스를 접하고 우리는 안타까워 하지만, 그 일이 나에게 일어날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이게 인간이 갖는 한계성이고 위험성이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사색이 깊어지면, 영성이 깊어지면, 한 가지 깨닫게 되는 분명한 사실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지닌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얼마만큼 피부로 깨닫느냐가 우리의 영성을 가른다.
사람은 참 가벼운 존재다. 그렇게 수많은, 아니, 이 땅에서 살던 과거의 모든 사람이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죽음의 현실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지금 바로 내 눈 앞에서 죽음이 발생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죽음과 상관 없는 존재인 것처럼 산다. 이 얼마나 가벼운 인간의 실존인가.
성경의 증언, 기독교의 증언은 매우 생소한 현실(충분한 가능성)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부활이다. 인류가 이 땅에 존재한 이래로 ‘부활’을 경험한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밖에 없다. 마치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병 중, 유일하게 경험한 희귀병 환자와 같다. 그래서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부활을 경험한 사람은 예수 밖에 없다. 그리고, 부활한 이를 경험한 이들도 예수의 제자들(게바, 열두 제자, 오백여 형제, 야고보, 모든 사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바울, 고전 15:5-8) 외에는 없다.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는 자들은 부활을 직접 경험한 자들이 아니다. 그래서 사실 그들도 부활이 뭔지 정확히 잘 모른다. 그렇다고 부활을 직접 경험한 예수님이 당신이 경험한 부활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해 주신 것도 아니다. 그렇다 보니, 성경의 부활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엉성해 보이고, 잘 이해가 안 되고,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부활은 무엇인가? 이것은 부활한 자를 경험한(부활을 직접 경험한 자들이 아닌) 자들, 즉 사도들과 예수의 제자들이 열심을 다해 이해하려고 노력한 경험이고 현실이다. 부활에 대한 이들의 피나는 사색이 도달한 결론 중의 하나가 본문에 잘 나타나 있다. ‘몸의 부활(nekros, a corpse)’이다.
이것은 그당시 획기적인 주장이었다.(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에 보통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은 ‘영혼의 부활’이었다. 특별히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깊게 받은 헬라문화에 몸담고 있던 사람들에게 몸의 부활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영혼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좋은 것이었다. 죽음을 통해서 영혼은 감옥과 같은 몸을 벗어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생각은 현재까지도 기독교 신앙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 몸은 타락한 것이어서 벗어나야 할 것으로 취급되고, 영혼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은 대표적인 기독교의 이단이다. 이것을 이원론이라고 한다. 기독교는 ‘물질적인 것을 반대하고 영적인 것만 참되다고 생각하는 이원론적인 세계관’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그것이 바로 ‘몸의 부활’이다.
몸을 부정하는 이원론적인 이단 사상이 기독교에 얼마나 깊숙이 들어와 있는지, 부활을 고백하는 신앙인들도 아무렇지도 않게 이 세상을 부정하는 일들을 손쉽게 한다. 이러한 것에 대한 대표적인 찬양으로 이런 게 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저 하늘에 있네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이게 굉장히 은혜스러운 찬양 같지만, 실은 굉장히 위험한 찬양이기도 하다. 몸을 부정하고, 이 세상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몸을 부정하고, 이 세상을 부정하는 생각을 지닌 자들은 몸을 하찮게 여기고 이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생명을 우습게 여긴다.
기독교 역사에서 실제로 이러한 일들이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몸(육신의 일)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은 부도덕을 불러온다. 몸은 어차피 썩어 없어질 것이고, 타락한 것이고, 벗어 던져야 할 것이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니골라당의 행위였다. 도덕무용론, 또는 율법무용론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이러한 생각에 젖어 있는 자들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불의한 이들에 대하여 눈을 감는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불의한 일들은 어차피 죄악된 세상에서 발생하는 당연한 결과일 뿐 개선해야 하고 새롭게 해야 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영혼의 부활을 말하는 종교가 아니라 몸의 부활(영혼의 부활 포함 / 전인적인 부활)을 말하는 종교이다. 몸의 부활을 말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몸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 세상의 불의를 가만 놓아두지 않는다. 우리의 몸, 이 세상은 파괴되어 없어져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이 놓여 있는, 우리의 생명을 담고 있는 ‘엄마의 자궁’과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우리의 생명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생명은 몸에 있다. 이것은 몸에 병이 들어 죽음으로 치닫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절실하게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다. 그 중 한 명이 몇 년 전 암으로 죽은 안석모 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 상담학)이다. 그의 마지막 6개월의 인생 여정, 암투병의 여정을 담은 <욥을 위한 변명>에는 이러한 구절이 있다.
질병으로 얻는 최대의 부차적 소득이란 무엇인가? “나는 몸”이라는 사실이다. 예수님도 몸을 가지신 존재였다는 사실의 확인이다. 몸을 통하지 않는 진실은 거품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이다. 오, 주님, 몸이 생명입니다. 몸이 진실입니다. 몸이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안석모, <욥을 위한 변명>, 65쪽
몸은 벗어나야 할 장막, 썩어 없어질 것, 타락한 것이 아니라, 몸은 생명 자체이다. 이것을 절절히 깨달은 사람은 절대로 몸(자기 몸이든, 남의 몸이든)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몸을 가진 인격을 절대로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그 몸이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정상’(이것만큼 불의한 정의도 없다/누가 누구를 정상, 비정상, 장애, 비장애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을 벗어난 것이라도, 그 몸은 생명 그 자체이고, 경외스러운 것이고, 안석모 교수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하나님 자체이다. 생명이 곧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몸이 생명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몸 바깥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우리의 생명이 몸 바깥의 다른 것에 깃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몸 바깥에 있는 것에 마음을 두고 사는가. 마치,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면 생명이 없는 것인 양. 그러는 사이, 정작 생명이 깃든 몸은 상해가고, 결국 몸의 죽음과 함께 생명은 사라진다.
부활이 무엇인지를 아는 일은 죽음 공부이고 생명 공부다. 부활은 단순히 기독교의 종교적 교리의 선언이 아니다. 부활이 무엇인지 아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삶의 질은 하늘과 땅 차이다. 부활이 무엇인지 알려고 평생 힘썼던 사도 바울과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의 삶을 보라. 그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했다. 죽음도 그들을 두렵게 하지 못했다. 부활의 현실 앞에서 죽음은 전혀 죽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활은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하나님의 생명의 깊이)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깊은 공부가 필요하다. 기독교인의 삶의 여정은 이것을 공부하는 여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활은 단번에 알 수 있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깊음의 정수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할 것인가? 부활을 공부하자. 부활을 아는 자,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부활을 경험한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본받아 (0) | 2019.02.28 |
---|---|
먼저 보냄 받은 자 (0) | 2019.02.25 |
말씀에 의지하여 (0) | 2019.02.11 |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 보는거야 (김복동 할머니를 추모하며) (0) | 2019.02.04 |
말씀과 함께 춤을 (0) | 2019.0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