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3. 5. 07:47

영광과 자유

(고린도후서 3:12-4:2)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17). 주는 영이시다. 주의 영이 계신 곳이 있다. 그곳에는 자유가 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우주보다 크고 무겁다. 이 문장의 핵심 단어는 주의 영과 자유이다. 주의 영은 성령을 말하고, 자유는 주의 영의 속성을 말한다. 성령은 자유이시다. 성령이 우리 안에, 우리가 성령 안에 거하면, 우리에게는 자유가 넘친다.

 

자유. 자유는 인간성의 가장 기본이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자유가 없다면 그 존재는 불쌍한 존재이다. 1995년 멜 깁슨이 만든 <Brave Heart>의 마지막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스코틀랜드의 독립전쟁의 영웅 윌리엄 월레스의 삶을 바탕으로 만든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의 이 한 마디에로 영화의 메시지를 전한다. “Freedom!”

 

자유가 아니면 나에게 죽음을 달라! (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1775323일 미국 의회에서 한 말이다.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앞두고 한 말이다. 결국 미국은 177674일에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전쟁을 개시한다. 그 첫 포문을 연 곳이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에 있는 ‘Fort Sumter’이다.

 

자유에 대한 문구 중, 가장 마음에 다가오는 문구는 T.S. 엘리엇이 말한 이것이다. “자유란 감옥과는 다른 종류의 고통이다.” 참으로 멋진 통찰이다. 인간은 자유 때문에 행복을 누리지만, 자유 때문에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내가 최애하는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이런 말을 한다. “자유를 가진 인간은 필연적으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묻고 싶다. “여러분에게는 자유가 있는가? 여러분에게 온 자유는 누구를 통해서 온 자유인가? 그리고, 그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사도 바울은 자신이 누리는 자유를 구약의 모세에 빗대어 말하고 있다. 출애굽기 34장에 보면, 모세가 두 번째 돌판(십계명)을 받아 산에서 내려오는 장면이 있다. 성경은 그때의 장면을 이렇게 이야기 한다.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34:29).

 

요즘 사람들은 얼굴에 광채를 내기 위해서 피부과에 가서 관리를 받지만, 하나님을 대면하고 온 모세는 피부과에 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 요즘 사람들은 얼굴에 광채가 나는 사람을 보면 부러워하지만, 모세 시대의 사람들은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것을 보고 두려워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모세가 아론과 회중을 모은 뒤, 그들과 대화를 했다. 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자신이 받은 두 돌판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아론을 통하여 모세는 자신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모세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다.”(34:33).

 

모세는 왜 자신의 광채나는 얼굴을 가렸을까? 사도 바울은 그 사건에 대하여 말하며, 자신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누리고 있는 영광에 대한 증언을 하고 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모세가 수건으로 자기의 얼굴을 가린 이유는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라고 말한다. 모세의 얼굴의 영광은 지속되지 못하였다. 출애굽기의 마지막 장(40)은 그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40:34-35).

 

모세는 사라져가는 영광을 가려야만 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모세와는 달리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게 된 영광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더 큰 영광이므로 모세와 같이 가리개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것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을 지닌 사람들의 차이이고, 옛 사람과 새 사람의 차이이다. 옛 언약 안에 있었던 유대인들은 여전히 모세의 수건을 쓰고 모세의 언약이 유일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의 눈은 모세의 수건으로 아직 가려져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언약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모세의 수건이 필요하지 않다. 그리스도인이 받은 영광은 곧 없어질 영광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영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16).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옛 언약 안에 있던 자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던 자유가 없었거나, 간헐적으로 주어졌다. 얼굴에 광채가 나던 모세조차도 회막(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 하나님을 만나는 곳)에 들어가지 못하는 때가 있었다. 그러나, 새 언약 안에 있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느 때든지 하나님께 나아는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이다.

 

문제는 이 자유를 우리가 실제적으로 느끼지 못한다고 하는 것과, 이 자유의 소중함을 모른다는 것, 그리고 이 자유를 잘못 사용하는 것, 또한 이 자유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17).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예수의 영, 즉 성령으로부터 온 자유이다. 이 자유는 우리에게 상상도 못할 일들을 가져다 주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자유는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자유를 준 것이다.

 

요즘 한국 사람들은 여행의 자유를 만끽하며 산다. 다른 분야에서는 무역 흑자가 많으나, 관광 산업에서는 적자가 발생한다. 한국으로 관광을 오는 사람보다 외국으로 관광을 나가는 한국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여행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된 것은 불과 25년 여전이다. 1992년 김영삼 문민정부가 들어오고 나서, 여행의 자유의 길이 열렸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국외의 여행은 아무나 가지 못했다. 여행 허가서 받기가 매우 까다로웠다.

 

불과 25년 밖에 안 되었는데, 우리들은 그 자유를 만끽한다. 지구 방방곡곡을 누비며 여행하면서 만들어낸 이야기, 만들어진 이야기를 SNS에 올리며 삶을 나누고 행복해 한다. 현재 SNS에서 가장 인기 있는 블로그는 여행, 맛집에 대한 것이다. 그만큼 사람들이 여행의 자유를 통해 행복을 만끽하고 싶다는 소망이 담겨 있다. 물론, 거기에 대한 부작용도 있다. 그러한 형편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여행은 고통으로 다가온다. 실제로,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의 한 관광 코스에는 이런 문구가 붙어 있다. “당신들의 호화로운 여행이 우리들에게는 고통입니다.” 우리는 남에게 고통을 줄 정도로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최고의 자유를 잘 누리고 있는가? 자유가 없던 시절,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마음대로 나가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크고 좋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 언제든지 나아갈 수 있는 자유!

 

우리는 이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있는가? 사도 바울은 말한다. 이 자유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은 낙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자유를 누리는 자들은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낸다.(4:1-2).

 

어려운 일이 있거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언제든지 하나님께 나아가 그 어려움을 쏟아 놓을 수 있는데, 왜 우리는 함부로 낙심하는가? 우리는 하나님 앞에까지 언제든지 나아갈 수 있는 참된 자유를 지녔는데, 왜 부끄러운 일을 행하며 속이는 삶을 사는가? 만약,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진리를 나타내지 않고, 함부로 낙심하며 산다면, 우리는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자유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낙심하지 말라. 이 마음에 주의 영이 있는 자, 그래서 이 마음에 자유가 있는 자는, 무엇보다 낙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 안에 있는 자유를 가장 고귀하게 쓰는데, 그 자유를 통해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하나님과 만나서 창조되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들을 세상에 내어 놓는다.

 

우리의 삶은 아름답고 영광스럽다.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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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