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3. 12. 07:17

망각과 기억 사이 

Between forgetting and remembering

(본문: 신명기 26:1-11)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가 삶을 살면서 생존을 위해서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나는 이라고 생각한다. 술 취한 자와 치매 걸린 자의 차이가 무엇인가? 둘 다 정신 없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둘의 차이는, 술 취한 자는 집을 잘 찾아 온다는 것이고 치매 걸린 자는 집을 찾아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게 참 신비한 일이다. 술 취함의 망각과 치매의 망각이 다르다는 뜻이다.

 

기억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성을 지켜주는 근본적인 요소이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기억은 그들의 정체성을 이룬다. 만약에 개인이든, 공동체든 기억이 없으면, 즉 망각하면, 그 존재는 상실되고 줄어든다. 알츠하이머(치매) 병이 무서운 이유가 여기 있다. 망각은 존재 자체를 바꾸어 놓는다.

 

신앙은 궁극적으로 기억을 확장시키고 공고히 하는 일이다. 신앙 공동체는 같은 기억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다. 기억이 같다는 것은, , 그들의 삶의 스토리가 같고 공유된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지켜주는 가장 든든한 울타리가 된다. 가족들끼리도 각자의 삶의 스토리가 다르거나, 자기 정체성을 이루는 신앙의 스토리가 다르면, 그 유대관계가 느슨해진다. 유대관계가 느슨해진다는 것은 그 사이에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신명기는 기억의 정치학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처음부터 끝까지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신명기는 듀테노미온이라 번역한 70인역을 따라서, 영어로는 Deuteronomy라 부르고, 그것을 따라서 한국어 성경은 신명기라는 이름을 붙였다. 여기서 자는 두 번째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풀어서 말하면, 신명기는 두 번째 율법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신명기는 앞의 책, 출애굽기와 레위기, 그리고 민수기에서 이미 말해진 율법을 다시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명기는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두고 있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가 하는 설교의 모음집 같은 것인데, 모세가 그들에게 똑 같은 율법을 다시 가르치는 이유는, 우리가 알다시피, 출애굽 1세대는 여호수아와 갈렙만 남고 모두 광야에서 죽었고 현재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두고 있는 자들은 출애굽 2세대이기 때문이다. , 이들은 시내산 경험이 없는 자들이거나 그 당시 너무 어려 시내산 경험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학교 교과목 중 가장 중요한 교과목은 무엇일까? 영수? 아니다. 국어와 역사교육이다. 입시교육 측면에서는 영어와 수학을 가장 중요한 과목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체성의 측면에서는 국어와 역사교육이 가장 중요하다. 일제시대를 생각해 보라. 일제 시대 때 일본인들이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문화말살 정책을 쓸 때, 그들이 학교 교과목 중 영어와 수학을 없애지 않았다. 그들은 한국말을 못 쓰게 하고, 한국의 역사를 가르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우리가 한국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된 것도 영어와 수학을 배우면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국어와 역사를 배우면서 형성된 것이다.

 

모세는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둔 출애굽 2세대들에게 핵심적인 역사를 가르친다. 그것은 그들의 정체성을 형성해 주는 핵심적인 그들의 이야기이다. 그것이 5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이다. 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5a). 여기서 모세는 이스라엘을 히브리 사람이라 그러지 않고 아람 사람이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스라엘은 야곱에게 주어진 이름이다. 원래, 아브라함은 아람 땅에 속한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이주해 온 이민자이다. 그리고, 야곱 또한 형 에서를 피해 밧단 아람(하란)의 삼촌 라반의 집에 머물며 가족을 일구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것을 이야기하며 자신들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 불렀다.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이들은 가나안에서 살다,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그때 그들은 그곳에서 마이너리티(소수자)로 살았다. 이민자/마이너리티로 산다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마이너리티(minority)란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보호 받지 못하고 바깥으로 내몰린 존재를 말한다. 그러한 자들이 번성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이들이 고백하고 있듯이, 그들은 애굽에서 마이너리티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크고 강하게 번성한 민족이 되었다.


이게, 참 아이러니한 거다.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핍박한 이유는 그들이 마이너리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번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학대하며 괴롭혔고, 그들에게 중노동을 시켰다. 이스라엘 백성은 고통 가운데서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그런데,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응답하셔서 그들을 고통과 신고와 압제 가운데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 구원하셨다. 그래서 이제, 이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이 기억하는 그들의 정체성이다. 이것은 이들이 여기까지 오게 된 삶의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순한 삶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 형식으로 되어 있는 신앙고백이다. 이 신앙고백이 이들의 기억이고, 이 기억이 이들의 정체성이다. 이러한 삶의 이야기를 잊어버리면, 이들은 신앙고백을 잊어버리는 것이고, 신앙고백이 없다는 것은 기억을 잃어버리는 것이고, 기억이 없다는 것은 이들의 정체성은 흐려지고, 그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야기, 신앙고백, 기억, 이러한 자기 정체성에 대한 훈련이 왜 중요할까? 모세가 반복적으로, 정말로 지겹도록 반복해서 이야기의 형태로 신앙고백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친 이유는 그것이 그들의 삶에 성패를 가르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신명기 사관이라는 것이 있다. 모세오경이 현재 우리가 보는 형태로 편집된 시기는 바벨론 포로기 때다. 신명기 사관의 핵심은 역사의 반성이다.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이 왜 어쩌다 이렇게 나라가 망해서 이방 나라(바벨론)의 포로로 끌려 왔을까에 대한 반성이 신명기 사관의 핵심이다.

 

신명기 사관에서 말하는 멸망의 이유는, 바로 기억의 망각 때문이다. 그들은 어느덧 자신들의 이야기, 자신들의 신앙고백, 자신들의 기억을 잃어버리고, 즉 망각하고, 그 자리에 다른 이야기, 다른 신앙고백, 다른 기억을 채우기 시작했다. 구약성경의 열왕기상하와 선지서들은 그 비극의 망각의 역사를 보여준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이렇게 하라는 모세의 가르침을 어느덧 망각하면서, 그 자리를 다른 것으로 채웠다. 자신의 기억을 잃은 이스라엘의 결과는 무엇인가? 바로 멸망이었다. 아주 비극적인 멸망이었다.

 

모세가 이야기, 신앙고백, 기억을 강조하며 그들에게 그것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할 수 있는 아주 실천적인 방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우리가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이다. 첫째, 토지의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 그것을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가지고 가는 것이다. 어떠한 사람은 이 말씀을 표본 삼아, 첫 직장에서 받은 월급을 교회의 헌금으로 드리기도 한다. 참 좋은 뜻이다.

 

그러나, 신앙고백, 기억을 실천적으로 하는 방법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소산의 맏물을 하나님께 바치면서 이야기 형태로 된 신앙고백을 하는 것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계속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하고 신앙 고백하고 기억하는 일이 그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예배의 핵심이다. 찬송과 기도와 말씀과 성찬만은 모두 기억에 관한 일이다.

 

여기까지는 무리 없이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이것도 쉬운 것은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수고를 통하여 거둔 소산의 맏물을 주님께 드리는 일도 쉽지 않고, 게다가 예배를 성실하게 참석하는 일도 쉽지 않다. 무엇보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에게 이것을 잘 전수하고 있는가? 나의 경우는 부모님께 참으로 감사하는 것은 부모님의 신앙교육을 통해 이러한 것이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몸에 베었다는 것이다.

 

보이스카우트나 아람단 활동을 할 때, 대개 주일에 활동을 할 때가 많다. 기억에 남는 활동은 제2 땅굴을 방문한 것과 제 1공수 여단을 방문한 것이다. 모두 주일에 했던 활동이다. 그런데, 그러한 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 부모님은 나를 주일 새벽기도에 반드시 데리고 가셨다. 그리고, 새벽 기도회를 통해 주님께 먼저 예배를 드리고, 주일 활동 하는 것을 축복해 주셨다. 이것은 지금도 내 삶의 원천이고, 우리 아이들 신앙교육의 원리이기도 하다.

 

우리 교회에는 주일 아침 새벽기도회가 없지만, 대신에 수요예배도 있고, 토요일 새벽기도회도 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말씀에 의지해서, 여러분에게 권면하고 싶은 것은, 만약 주일에 어떠한 활동 때문에 주일예배에 못 나오게 될 것 같거든, 수요예배나 토요일 새벽 기도회에 나와서 신앙고백을 통해 기억하는 일을 반드시 하고, 활동을 하시라. 신앙고백과 기억이 줄어들고 거기에 다른 활동과 기억이 들어서는 것은 그만큼 나의 존재와 생명이 줄어드는 것이다. 이것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기를 소망한다.

 

첫 소산을 주님께 드리며, 신앙고백(예배) 하는 일은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는 데 있어서 매우 필수적인 일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모세는 이 두 가지에 한 가지를 더 말한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잘 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이 말씀에 담겨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11).

 

이것은 자신의 힘으로 얻은 소산물(재물)을 사사롭게 쓰지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이것은 사회 정의에 관한 이야기이다. 특별히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것을 잘 하지 못한다. 현대 사회의 개인의 개념과 자유의 개념에는 ‘property(사유재산)’의 개념이 함께 들어가 있다. 우리는 사유재산의 개념을 오해한다. ‘내가 번 돈 내 맘대로 써도 된다정도로 말이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이 바로 사회정의였다. , 그들은 자신들에게 속한 소산(재산/property)’를 자신의 향락과 사치를 위해서 너무도 사사롭게 사용했다. 그것이 그들이 패망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라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 대목에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얻게 되는 소산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것인데, 그것은 자신들의 마음대로 사사롭게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사로움을 자유로 착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소산(재물)은 사사롭게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라고 주신 것이다. 특별히, 모세는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의 기억으로부터 오는 신앙고백의 절정이다. 이스라엘은 애굽에 있을 때, 그곳에 거류하는 (alien/minority)’이었다. 그 고통의 기억, 그 고통의 부르짖음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셨다. 그렇게 구원 받은 자들이 자신들과 똑 같은 처지에 있는, 자기들 가운데 있는 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은 죄 중의 죄이다. 재산(property)을 사사롭게 쓰지 않고 공적으로, 정의롭게(사회정의) 쓰는 것에 대한 공부와 묵상이 필요한 시대이다.

 

나라가 망해, 비참한 삶 가운데 있었던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스스로 물었다. 왜 우리가 이렇게 멸망하였는가? 그들의 결론은 이것이었다. 기억하지 못하고 망각했기 때문이다. 기억하는 일은 생명을 얻는 길이고, 망각하는 일은 멸망하는 길이다. 이 망각과 기억 사이에서 우리는 어느 길을 걷고 있는가.

 

첫 소산을 주님께 드리기, 예배하며 신앙고백 하기, 그리고 주님이 주신 소산(재물)을 공동체(특별히 사회적 약자)와 나누기는 우리가 망각에 빠져 멸망으로 가지 아니하고, 기억하여 생명을 얻는 축복의 삶이다. 망각과 기억 사이, 여러분은 멸망의 길을 가고 있는가, 생명의 길을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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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