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3. 24. 06:11

보이는 것을 보는 눈

(아모스 5:4-15)

 

아모스서를 보면,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이 생각난다. 원래 제목은 임금님의 새옷The Emperor’s New Clothes’이다. 임금님은 옷에 욕심이 많았는데, 새옷을 맞추기 위해 고용한 재단사가 임금님의 새옷으로 쓸 옷감을 구제불능 바보에게는 안 보이는 옷감이라고 못박아 말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담고 있다.

 

사람들은 구제불능 바보에게는 안 보이는 옷감이라는 말에 자기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게 된다. 왕을 비롯한 신하들은 옷이 눈에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안 보인다고 말하면 구제불능 바보가 될까봐, 그러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게 된다. 왕은 눈에 보이지도 않은 옷을 훌륭하다고 칭찬하고, 신하들은 그 옷을 입은 왕을 칭찬하고, 하녀들은 옷을 입히는 시늉을 하고, 임금은 그 옷을 입는 시늉을 한다.

 

그 거짓을 깨는 것은 어린 아이였다. 임금님의 행차에 모여든 사람들 중에 오직 어린 아이만이 보이는 것을 보는 대로 말할 수 있었다. “임금님이 벌거벗었다!” 아모스는 그 시대의 이 어린이와 같았다. 아모스가 살던 시대는 주전 8세기로, 남유다에서는 여로보암 2세가 북이스라엘에서는 웃시야가 왕으로서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아모스는 남유다 사람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아모스는 남유다에서 활동한 것이 아니라,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다는 것이다.

 

아모스가 활동할 당시, 남유다나 북이스라엘이나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하고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풍요를 누리고 있었을 때였다. 그렇다보니, 눈이 가려 그들의 사회 안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들은 보지 못했다. 위의 동화에 빗대서 말하자면, 그들은 벌거벗은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자신들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비극은 거기서 시작된다.

 

아모스의 고향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18km 정도 떨어진 드고아이다. 거기서 그는 과수원과 양 떼를 소유한 자영업자였다. 아모스는 이사야처럼 왕족도 아니었고, 예레미야처럼 제사장 가문 출신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평범한 소시민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그는 남 유다 출신으로서 북이스라엘을 향하여 예언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북이스라엘에 얼마나 보이는 것을 보는 눈이 없었으면, 남유다에서, 그것도 시골에서 농사짓고 양 치는 농부가 그러한 역할을 맡았겠는가. 그야말로, 아무런 힘 없은 어린 아이를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모스의 예언은 북이스라엘을 향한 예언이다. 그렇다고, 그 당시 남유다가 잘 하고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북이스라엘을 향해서 아모스가 예언을 했지만, 아모스와 동시대의 예언자는 호세아가 있었고, 남유다에서 활동한 선지자는 이사야가 있다. 그 당시 북이스라엘 출신의 예언자는 호세아 밖에 없었다. 다만, 남유다 출신으로서 아모스가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아모스의 예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째는 열방의 심판에 대한 예언이다(1:1-25). 아모스는 북이스라엘 주변의 6개 나라(다메섹, 블레셋, 두로, 에돔, 암몬, 모압)를 향해 예언의 말씀을 전한다. 주변 나라의 심판을 예언하는 이유는 반면교사를 위함이다. 다른 이들에 대한 심판은 나의 의로움이나 안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심판을 받는다는 뜻은 그 심판에 나에게도 똑같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북이스라엘 주변의 여섯 나라에 대한 심판은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서막이다.

 

둘째는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다(2:6-6:14).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을 전하며, 그들이 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가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그들이 애써 눈을 떠서 보지 않고 있는 사회적 불의에 대하여,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외친다. 북이스라엘은 인신매매를 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창녀와 통간하며, 술취함과 탐욕으로 하나님의 법을 조롱했다. 무엇보다 이들의 종교적 위선은 극에 달했다. 이들은 벧엘, 길갈, 브엘세바와 같이 여호와를 찾는 곳으로 알려진 성지를 찾아가는, ‘성지순례를 적극적으로 시행했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호화로운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그들은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않고, 본토에서 나지도 않는 상아를 공수해 여름 별장과 겨울궁을 지으며 호사를 누리며 살았다. 그들은 날마다 범죄를 더하면서도 성전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렸다. 정의(미쉬파트)와 공의(체다카)가 없는 상태에서 드려지는 호화로운 제사는 하나님이 가장 역겹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아모스 선지자는 외쳤다. 이것은 남유다를 향해 예언한 호세아 선지자의 예언과 같기도 하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며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5:22).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6).

 

정의(미쉬파트)는 법률적인 정의를 말한다. 법정에서 공성정과 사회정의를 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억울한 자가 없도록 만드는 것이 정의이다. 억울한 자가 하소연을 하면 그 억울함을 들어줘서 정의를 세워야 하는데, 그들은 그들의 억울함을 쓴 쑥으로 바꾸었다(7). 재판을 공정하게 하지 않고, 힘 있는 자들 편에서 재판을 왜곡하고, 힘 없는 자들의 눈에 피눈물 나게 했다.

 

공의(체다카)는 인간관계에서 보여야 할 적합한 태도를 말한다. 아모스는 그것에 대한 대표적인 예로, ‘힘 없는 자를 밟고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둔 것을 제시하고 있다(11). 여기서 밀(바르)은 거래용 농산물을 말한다. 소작인들에게 벌금을 받거나 빌려준 곡식에 대하여 과중한 세를 받는 행위를 꼬집는 말이다. 지배층은 거짓된 재판으로 의인을 학대하고,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의 예배를 받지 않으시며, 그들이 그렇게 모은 재산으로 공들여 지은 집에서 살지 못하게 하시며, 아름답게 가꾼 포도원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겠다고 선포하신다.

 

셋째로, 북이스라엘이 지금 어떠한 벌거벗은 상태에 있는지를 드러낸 다음, 아모스는 다섯가지 환상(1) 메뚜기 환상, 2) 불 환상, 3) 다림줄 환상, 4) 여름 과일 한 광주리 환상, 5) 벧엘 성전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선포한다(7:1-9:10). 아모스는 이러한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것에 대하여 그 마음을 돌이켜 주시길 간구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간청을 거부하며 심판을 준비하신다.

 

특별히, 가장 가슴 아픈 대목은 네 번째 환상에서 볼 수 있다. 네 번째 환상인 여름 과일 한 광주리환상은 기근에 대한 심판을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근보다 더 심각한 재앙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8:11).

 

이것은 하나님의 침묵과 부재에 대한 말씀이다.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지만, 결국 얻지 못하고 쓰러질 것이다. 기근 때문에 양식이 없어, 물이 없어, 배고파 죽고, 목말라 죽는 것이 아니라, 기근에서 살려 달라고 하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하나님께서 외면하시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사실, 기근은 큰 문제가 아니다. 창세기의 말씀이나, 민수기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기근의 때에, 양식이 없어 고생하고, 물이 없어 고생할 때, 그의 백성들에게 양식을 주시고, 물을 주셔서 살려 주셨다. 더 큰 문제는 기근의 때에,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의 침묵과 부재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 심판이 북이스라엘에게 임한다고 하니, 얼마나 섬뜩한 심판인가.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세간의 헛된 말에 속아, 보이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척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주님이 전도 나갔다, 승리하고 기쁨으로 돌아온 제자들을 향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10:23). 우리는 우리가 벌거벗은 것을 감추기 위해서, 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보이는 것을 보고, 그것을 고백하며, 돌아서면 될 텐데, 그렇지 못하고,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다고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면서,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아모스는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속은 썩은 북이스라엘의 벌거벗은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그들이 살 수 있는 길을 말해준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6). 정의와 공의가 없는 예배는 여호와를 찾는 게 아니다. 다른 말로 하면, “너희가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라”(14), 그리고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니라”(15)이다. ‘어린 아이와 같이 보이는 것을 보는 눈을 가진 자는 악이 무엇인지 보이고, 선이 무엇인지 보일 것이다. 그러면, 그 보이는 대로 행하면 된다. 그게 여호와를 찾는 길이고, 그게 생명을 얻는 길이다.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는 자의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신다. 그러한 자는 어느 상황에 있든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에서 구원하셔서, 그 삶을 복되게 하신다. 보이는 것을 보는 눈을 가진, 복된 인생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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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