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귀, 겉옷, 돌
(눅 19:28-40)
종려주일이다. 종려주일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간 사건을 기억하는 시간이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1절). 여기서 ‘이 말씀’은 무엇인가? 열 므나의 비유이다. 열 므나 비유는 무엇에 대한 이야기인가?
므나는 헬라의 화폐 단위이다. 우리가 잘 아는 데나리온 단위로 바꾸면, 한 므나는 100 데나리온이다. 한 데나리온은 장정의 하루 품 삯이다. 한 므나는 장정의 100일 치 품삯에 해당한다. 한 므나는 적지 않은 돈이다. 므나 이야기는 달란트 비유와 비슷하지만, 므나 비유 이야기의 핵심은 왕권의 인정에 대한 것이다.
므나의 비유에서 ‘그 백성들’이 한 귀인의 왕 됨을 원하지 않는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의 왕 됨을 원하지 않고, 그의 왕 됨을 거부할 것에 대한 예견이다. 예수님은 므나의 비유를 통해서 사람들이 당신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갈등이 극에 달해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예견을 하면서도, 예루살렘으로 ‘앞서서’ 가신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아들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참 아이러니 한 것이다. 이 아이러니한 사건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기 전, 베다니와 벳바게에 이르러 한 나귀를 준비한다. 예수님이 그냥 걸어 들어가지 않고 나귀를 타고 들어가는 것은 스가랴 9장 9절의 예언에 기초한 것이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금의환향이라는 말이 있다. 금색 옷을 걸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큰 성공을 이룬 뒤에 멋진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오는 사람을 일컬어 ‘금의환향’한다고 한다. 대개 그 당시 금의환향은 전쟁에서 이기고 개선문을 통해서 돌아오는 장수들의 몫이었다. 그들은 나귀 새끼를 타지 않고, 말을 타고 왔다. 말은 전쟁의 승리를 말한다. 그러나, 나귀 새끼는 평화를 말한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금의환향과 거리가 있다.
우리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을 기억할 때, 사람들의 환호를 떠올린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 21:9). ‘호산나’라는 말은 ‘주여,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호산나는 ‘주님, 지금 당장 우리를 구원해주세요!’라는 탄식이다.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의 본문은 ‘호산나’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호산나는 히브리말이기 때문에, 누가복음의 청중인 이방인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이방인들이 잘 알아듣도록, ‘호산나’라는 말을 빼고,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라는 말을 쓴다.
종려주일에 외치는 이 찬송의 핵심은 “예수가 왕이다!”라는 선포이다. 이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그렇지 않고 거부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 우리 앞에 놓여지는 것이다. 그 당시, 자기 자신을 왕이라고 칭하는 사람은 모두 처형을 당했다. 로마제국에 대한 정치적 반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무리 중에 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조심할 것을 당부한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왕’이라고 부르는 것을 조심하고, 그러한 용어를 쓰지 않도록 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그러한 말에 이렇게 대답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40절). 예수님이 ‘왕’이라는 사실은 숨길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이 인정한다고 예수님이 왕이 되고, 그들이 인정 안 한다고 왕이 안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왕이시다. 그 선포를 받아들이든지, 거부하든지, 그것은 그 선포를 듣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앞서 므나의 비유 이야기에서 예견했듯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이것은 종려주일 이후 전개되는 고난주간과 성금요일 사건을 통해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지금도 선택지를 우리 앞에 던져 놓는다. “예수님은 왕이시다!” 우리는 그 선포 앞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왕권을 선포하는 ‘미미한 존재들’에 대해서 보려고 한다. 우선, 나귀 새끼를 보자.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나귀 새끼를 통해서 예수님의 왕권이 드러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말을 타고 개선장군처럼 팡파르를 울리며 성에 들어오는 사람에게 시선을 주겠지만, 예수님은 말을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셨다.
이 보잘것없는 존재인 나귀 새끼가 예수의 왕권을 드러내 주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 나귀에게 주목한 한 노래가 있다. “행복한 나귀”라는 노래이다. 노래의 가사를 보면 이렇다.
주님 저는
그 행복한 나귀 되고 싶어요
묶여 있는 저를 풀어 주세요
세상의 욕심에,
죄에, 나 자신에
묶여 있는 저를 풀어 주세요
그리고 주님을 섬기게 하세요
주님을 등에 업고 살게 하세요
그러면 세상은 나를 보지 않고
내 등에 업힌 주님을 보게 되겠죠
주님 저는
그 행복한 나귀 되고 싶어요
예수님의 왕권을 드러내 주는 것이 또 있다. 겉옷이다. 예수님의 왕권을 인정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님을 나귀에 태웠을 뿐 아니라, 예수님이 가실 때 자신들의 겉옷을 길에 폈다. 그들은 안장을 준비한 것도 아니고, 화려한 레드 카펫을 준비한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들이 입고 있던 겉옷을 펴서 예수님의 왕권을 인정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왕권을 드러내 주는 것은 ‘돌들의 외침’이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땅 바닥의 돌들도 예수님의 왕권을 인정하고 외치는데, 하물며 우리들이 예수님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고 몰라본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왕권을 선포한다는 것을 무엇을 말하는가? 예수님의 왕권은 무엇인가? 우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선포한다는 것은 우리가 다른 것에 속해 있는 게 아니라, 예수님에게 속해 있는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세례도, 예배도 모두 그것에 대한 고백이다. 주님, 우리는 당신의 것입니다.
왕의 일차적인 의무는 자기에게 속한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다. 출애굽 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주변 나라들(특히 블레셋)의 괴롭힘 때문에 힘들어 했고, 그들은 사무엘을 통하여 하나님께 ‘왕’을 요구했다. 그래서 뽑힌 왕이 사울 왕이다. 사울 왕은 살아 있는 동안 왕으로서 자기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특별히 블레셋과 힘써 싸웠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왕으로서 자기 백성을 힘껏 보호한 왕으로 칭송 받는 유일한 왕은 다윗 왕 뿐이다. 다른 왕들은 자기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고, 오히려 백성을 유린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이르러, 성을 보시고 우신다. 그들의 앞날을 보았기 때문이다. 자기의 앞날에 어려움 닥칠 것을 안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피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백성들은 자기의 앞날에 닥칠 일을 알지 못했고, 무엇보다 지금 여기에 와 있는 자기들의 진정한 왕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성전을 오히려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자기들의 왕이 지금 여기에 와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들은 왕 앞에 엎드려 구원해 달라고 간구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들은 마땅히 간구해야 할 구원은 간구하지 않고, 왕이 와 있는 것을 알아보지도 못했고, 그저, 자기들의 이익을 취하기 위하여 성전조차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어둠에 있으면, 보살핌을 받는 날(구원)을 알지 못한다. 어둠에 있으면, 지금 여기에 와 계신 왕을 알아보지 못한다. 오히려, 그 왕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다. 구원을 희망하면서, 구원자(왕)를 십자가에 매다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한 자는 종려주일이 백번을 지나가도, 부활주일이 백번을 지나가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 여기에 그 어리석음을 나타내는 시 한 편이 있다.
물이 들어오는 해변에 아이들이 있다
신이여 아이들을 버리소서
세상이 이미 아이들을 버렸습니다
못 박힐 순결한 손이 필요 없나이다
집채만 한 파도가 아이들을 삼켰다 어둠이 하는 일을 어둠은 끝내 알지 못하므로
당분간 종려주일은 없을 것이므로
ㅡ 이원 시집 <사랑은 탄생하라>의 시 ‘검은 모래’의 일부
‘어둠이 하는 일을 어둠은 끝내 알지 못한다’는 구절이 인상적이다. 매우 신학적이다. 어둠 속에 함께 있는 한, 어둠이 하는 일은 알 수 없다. 어둠의 일을 알려면, 빛으로 나아와야 한다. 요한복음은 그것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요한복음의 그리스도는 어둠의 존재를 빛의 존재로 탈바꿈시켜주는 빛 그 자체이다. 어둠 속에 있으면서 종려주일을 수백 번 맞으면 무엇하는가. 어둠 속에 있으면서 부활주일을 수백 번 맞으면 무엇하는가. 어둠 속에서 하는 일은 의로워 보이더라도 결국 어둠의 일일 뿐이다. 빛으로 나와야 한다. 빛으로 나오면, 맞이하는 하루하루가 모두, 종려주일이고 부활주일이다.
우리는 종려주일을 맞이하면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만난다. 지금 그 분이 우리 앞을 지나고 있다. 우리를 그분을 누구라고 고백하는가? 그는 우리의 왕이신가? 그렇다면, 우리의 겉옷을 벗어 그분을 경배하자. 그리고, 외치자.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지금 나귀 타고 우리 앞을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왕으로 알아보지 못하면, 우리에게 종려주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종려주일이 의미가 없으므로, 부활주일도 우리에게 구원의 날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선포하고 찬양하는 자에게 종려주일은 구원을 간구하는 날이요, 부활주일은 구원이 임한 복된 날이 될 것이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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