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도적 회심 경험
(사도행전 9:1-9)
5월 24일은 웨슬리회심기념일이다. 그래서 한국 감리교회에서는 이 주간에 각 지방별로 웨슬리회심기념집회를 여는 곳이 많다. 나는 한국을 떠나 미국에 오기 전까지, 거의 매년, 특별한 일이 없으면 ‘서초지방’에서 열리는 웨슬리회심기념집회에 참석했다.
장로교 출신인 아내는 이러한 감리교의 풍경이 낯설었던 모양이다. 장로교는 장 칼뱅의 신학을 바탕으로 세워진 교단이기 때문에, 장 칼뱅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장 칼뱅의 회심을 기념하기 위해서 교단 차원에서 그러한 집회를 열지 않는다. 그러나, 감리교는 웨슬리의 회심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러한 차이점이 낯설었던 것이다.
감리교회가 웨슬리의 회심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그의 회심일에 그것을 기념하여 집회를 여는 이유는 웨슬리의 사역이 회심 경험 후에 드라마틱하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1738년 5월 24일 저녁, 그의 나이 35살이던 때, 그는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한 모라비안 교회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했다가 다음과 같은 회심을 경험한다.
“저녁에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한 신도회에 참석하였는데 거기에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8시 45분 경에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일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I felt my heart strangely warmed).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으며,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만을 믿고 있음과, 내 죄를 아니 내 죄까지를 다 거두어 가시고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얻었다."
‘회심’이라고 하는 주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이다. ‘회심’의 경험은 그 사람의 삶을 완전히 구분해 주기 때문이다. 회심 전과, 회심 후의 삶은 같을 수 없다. 회심 전에는 안 보이던 것이, 회심 후에는 보이기 때문이다. ‘회심’은 정말 신비한 일이다.
성경의 인물 중, ‘회심 사건’의 대표적인 인물은 사울(바울)이다. 그의 회심은 너무 강력하여, 사도행전에 무려 세 번이나 언급된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사울(바울)의 회심을 중요하게 다룬다. 그의 눈에 그 사건이 진기하게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현대인들은 성경을 ‘거룩한 마음’을 가지고 보기 때문에, 사울이 변하여 사도 바울이 된 것에 대한 그의 회심 이야기에 큰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울이 사도 바울로 거듭나기까지의 회심 이야기는 매우 기이하다.
스데반 사건(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 사건) 이후에,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흩어졌다’. 사도들 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을 떠났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유대의 다른 지역, 사마리아와 이방지역에까지 흩어지게 되었다.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은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박해 사건(스데반의 죽음)이 오히려 복음을 전하게 되는 역전을 일으켰다. 하나님은 늘 이렇게 일하신다. 그러니,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고 낙망하고 절망할 필요 없다.
누가가 사울의 회심을 세 번에 걸쳐서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가 생각하기에 ‘가장 회심할 가능성이 적었던 인물’이 회심을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된 게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행하신 일이라고 밖에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사울은 초대교회의 가장 강력한 ‘적’이었다. 그는 유대교 체계에 대하여 빈틈없는 이론과 확신을 가진 사람이었고, 더불어 의지적 결단력과 실행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이런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사람은 이기기 힘들다.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이유는 굉장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다. 그가 보기에 예수는 국가반란죄(유대교의 측면에서 봐도, 로마제국의 측면에서 봐도)로 사형 당한 죄수에 불과하다. 그러한 자를 메시아로 믿으며 추종하는 자들은 그의 눈에 광신자로 밖에 안 보였고, 유대교의 체계를 허무는 불한당으로 보였다.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 체계의 바이러스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살기등등하게 박해한 이유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너무도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의 박해는 단순히 개인적인 열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는 그의 신앙을 실천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유대교 체계 내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박멸해야 할 적으로 간주했다. 그런 마음에 의해서 그에게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사람을 죽였다. 그리스도인을 죽이면서 그는 아무런 죄책을 느끼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을 죽이는 일은 의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사울의 열심은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 아니, 유대교 지도자들은 사울의 그러한 열심을 이용해서 그리스도인들을 박멸하기 원했다. 그러던 차에, 사울은 대제사장으로부터 이방 지역에 있는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받아, 이방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박멸할 생각으로 우선 다메섹을 택한다. 다메섹에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포진해 있다는 첩보를 접한 것 같다.
그는 무장한 군인들을 대동하고 다메섹으로 향했다. 살기등등하여 다메섹에 거의 다다랐을 때, 신비로운 사건이 발생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다”(3절). 하나님을 경외하던 사울은 그 빛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비춰오는 하나님의 빛이었다. 그래서 그는 땅에 엎드린다. 엎드림은 하나님의 임재에 반응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엎드리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런데, 이러한 음성이 들려왔다.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4절). 이게 참 이상한 문구이다. 사울은 그가 생각하는 ‘주(/Lord, 하나님)’를 박해한 적이 없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을 뿐이고, 그리스도인들이 따르던 예수는 이미 십자가에서 처단되었다. 사울은 어리둥절하여 묻는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Who are You, Lord?”(5절). 그런데, 정말 청천벽력 같은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5절).
사울은 자신 앞에 빛으로 나타나신 분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 다윗의 하나님, 이사야의 하나님, 다니엘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예수와 동일시 되고 있고, 더나아가, 그 예수는 그가 핍박하던 교회와 동일시 되고 있다. 이것은 엄청난 충격이다. 정말,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시되고, 교회와 동일시 된다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한 사울의 일은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한 일이 되는 것이다.
이 압도적 회심의 경험 후에, 사울은 살기등등한 가장 힘 센 자에서, 주변 사람의 도움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가장 약한 사람이 된다. 그리고, 사울이 의지하던 ‘함께 가던 사람들(군인들)’은 그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이지 않아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을” 뿐이다(7절). 가장 약한 자가 된 사울에게 힘이 되어 준 것은 성령 밖에 없다.
그의 압도적인 회심 경험은 곧 죽음의 체험과 같았다. 그는 3일동안 아무 것도 보지 못했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 회심의 가장 핵심적인 속성은 죽음 경험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경험이 발생한다. 이 경험은 인간이 조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것은 성령에 의해서만 발생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렇게 압도적인 회심 경험을 한 그리스도인은 이전의 삶과 같은 삶을 살 수 없다. 죽은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지 않으면, 그 죽음을 이길 수 없다. 그러므로, 회심의 경험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회심을 경험하고 나면, 세 가지가 바뀐다. 첫째는 신념이 바뀐다. 사울의 회심에서도 드러난다. 유대교의 시각에서 십자가를 바라보았던 사울은 십자가를 거리끼는 것으로 생각했다.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명기 21장). 그러나, 회심하고 나서, 그는 십자가에 대한 신념을 완전히 바꾸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회심을 경험하고 나면, 둘째, 소속이 바뀐다. 사울은 유대인 공동체 소속이었다. 그래서 그는 산헤드린 공회의 지령을 받아 그리스도인들을 살기등등하게 핍박했다. 그러나, 사울은 회심 후에 예수에게 소속된다. 그래서 그는 예수의 손과 발이 되어 예수의 뜻에 따라 산다. 세번째로, 행동양식이 바뀐다. 회심 전, 그는 살기등등했다. 그러나 회심 후, 그의 삶과 글에 드러나듯이, 그는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되었다.
기독교의 위기는 회심의 위기에서 비롯된다. 회심의 경험이 없으니,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공동체를 너무 쉽게 생각한다. 회심의 경험이 없으니, 오직 자기 신념 가운데만 여전히 살고, 회심의 경험이 없으니, 예수에게 소속되지 못하고 예수의 손과 발이 되지 못하고, 세상의 것을 좇아가며 세상의 손과 발이 되어 온갖 불의한 일을 여전히 지으며 산다. 회심의 경험이 없으니, 행동양식을 바꾸지 못하고, 분노와 혈기 속에서 산다. 사랑이 없다. 자기의 것을 내어주지 못한다. ‘Live in’ 하기만 하고, ‘Live out’ 하지 못한다.
회심은 내가 조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회심을 안 했는데, 회심했다고 말하는 것은 영적 사기다. 회심은 단 번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평생에 걸쳐 일어나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나는 회심하였는가. 나의 회심은 오늘도 일어나고 있는가. 나는 회심이 날마다 일어나길 간구하고 있는가. 주님은 회심한 자를 통해 일하신다. 회심이 일어난 그리스도의 사람에게 참 생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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