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6. 7. 07:11

성령의 종말론적 귀환

(사도행전 2:1-13)

 

매우 영적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영적이라는 말은 역사의 심층적인 영역을 들여다보는 일을 말한다. 눈에 보이는 것들 너머에는 눈에 안 보이는 영역이 있는데, 거기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거기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 지를 알면, 눈에 보이는 것에 따라 일희일비하며 살지 않게 된다.

 

종교는 표층적 종교가 있고, 심층적 종교가 있다. 표층적 종교는 기복신앙을 기본으로 해서 물질적/육체적 풍요를 갈망하는 선에서 머물지만, 심층적 종교는 그것을 넘어 역사의 심층적인 영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탐구한다. 흔히, 고등종교라 불리는 종교들은 심층적 종교이기 때문에 기복신앙을 넘어 진리를 추구한다. 기독교는 정말 놀라운 심층 종교이다. 하나님은 성경의 증언을 통해서 역사의 심층에서 어떠한 일을 행하고 계신 지 계시(revelation)’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계시에 대한 반응은 둘로 나뉠 수 있다. 본문에서도 드러난다. 성령의 강림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놀라워하는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보고 조롱하는사람이 있다. 그 역사를 보고 놀라워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는다. 왜 이러한 일이 발생하는 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오죽하면, ‘예정(predestination)’이라는 용어를 써서, 그러한 현상을 설명하려 하겠는가.

 

하나님의 큰 일을 듣고, 또는 보고 놀라워하는반응을 보이는 자들에게 큰 복이 임할 것이다. ‘하나님의 큰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 하나님의 큰 일을 일상에서 경험하고 그 하나님의 큰 일을 찬양하고 경배하기 위해서 매주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큰 일을 일상에서 날마다 경험하는 사람의 예배와 그렇지 못한 사람의 예배의 질은 같을 수 없다.

 

우리가 모일 때마다, 하나님의 큰 일을 경험하고 놀라워하는 마음으로, 찬양하는 마음으로, 경배하는 마음으로, 또 그러한 하나님의 큰 일이 우리의 삶 가운데 계속하여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모이는 자들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러면 예배가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차다.

 

오순절이 이르매에서 이르다는 말은 헬라어로 숨플레로오인데, 이는 꽉 차다의 뜻을 지닌다. 누가복음 55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를 굳게 결심하시고”(9:51).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르시기로 결심한 이유를 적고 있다. 예루살렘에 간다는 것은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것을 알고 그 길을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길을 간다. 왜냐하면, ‘승천하실 기약이 차갔기 때문이다.

 

승천은 물리적인 뜻이 아니다. 슈퍼맨이 대기권을 뚫고 저 우주로 날아가는 것과 같은 상상을 하면 안 된다. ‘승천은 예수님이 하늘에 받아들여졌다는 뜻이다. 이러한 표상을 생각해 보면 쉽다. 이무기가 지상에서 천년의 세월을 보내면, 용이 되어 승천한다. 이무기의 승천은 이런 뜻이다. ‘이무기가 이제 하늘에 받아들여졌다.’ 이무기가 땅에서 천년을 보내고 용이 되면 뭐하나? 하늘에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용이 된 들, 헛고생인 것이다.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이 하늘에 받아들여졌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이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매우 신학적인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여기서 아들이라는 말도, 하나님과 그 본질(homo ousious/호모 우시우스)이 같다는 뜻이지, 하나님과 예수님의 생물학적 관계를 규정하는 말이 아니다. ‘승천의 신학적 의미를 잘못 알면, 기독교를 우스운 종교로 만들어 버린다.

 

승천하여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천상의 사역중 첫 번째 사역이 바로 성령을 보내신 일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 그리스도는 첫 번째 사역으로 성령강림의 일을 하셨을까?

 

이 일은 홀연히일어났다. 홀연히는 헬라어 아프노를 번역한 말인데, ‘갑자기, 기대하지도 않았는데의 뜻을 가지고 있다. 성령 강림 사건은 제자들에 의해서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주권적으로 행하신 역사임을 말하는 것이다. 제자가 되면, 제자가 행해야 할 일들에 대한 모든 준비를 제자 스스로 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모든 필요를 채워주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제자로서 사역을 해나갈 때, 우리는 아무런 걱정과 두려움이 필요 없다. 이것은 복음서 전반에 걸쳐 반복하여 전해지는 메시지 중 하나이다.


마태복음 10:19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누가복음 12:11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천상의 사역의 결과로 성령이 임했다. 여기서 임하다는 동사는 헬라어의 에카씨센인데, ‘앉히다’, ‘왕국을 주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성령의 임재는 우리의 삶의 주도권을 성령님께 내어드리게 되는 상황을 묘사한다.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이들은 이제 성령의 통치를 받는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신학적으로 굉장한 의미를 지닌다.

 

예수 그리스도의 천상의 사역을 통한 성령의 통치는 창세기의 기사와 연결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6:3). 이 창세기의 말씀은 인간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근본적인 심판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근심은 깊어만 간다. 그래서 창세기의 말씀은 이어서 이런 기사를 전한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6:5-6).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가 바로 노아의 홍수 이야기이다. 인간의 죄는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영을 떠나게 만들었다. 죄가 가득한 인간의 마음에 거룩한 하나님의 영은 머물 수 없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니 인간은 육신만 남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영원히 살지 못하고 겨우 살아야 120년을 사는 존재로 하락하고 말았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 떠난 인간의 처참한 현실을 말해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승천하여 천상의 보좌에서 하나님과 함께 온 우주를 다스리시게 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하나님의 영을 다시 인간과 연합하게 하시는 것이었다. 성령이 임했다고 할 때, ‘에카씨센은 구약에서 주로 왕이나 하나님이 통치 보좌에 앉는 것을 나타내는데, 성령께서 각 사람 위에 좌정하셨다는 것은 이제 성령이 각 사람을 통치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것은, 성령의 종말론적 귀환을 말한다. 인간의 죄 때문에 철회되었던 성령의 통치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다시 회복된 것이다.

 

종말은 피조세계의 파멸이 아니라, 피조세계의 완성이다. 하나님은 역사의 심층에서 피조세계의 완성, 즉 구원을 이루어 가고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그 큰일을 지금 그리스도인을 통하여 세상에 드러내고 계시다(revelation).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역사의 심층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드러내고, 하나님께서 역사의 종말에 어떠한 위대한 일을 행하실 지 알려주고 계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종말의 선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종말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앞당겨서 사는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을 통하여 세상에 소망을 전하신다. 종말의 때에 우리는 파멸당하는 것이 아니라, 잃었던 성령의 임재를 다시 얻게 되어 하나님의 영(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영원히 누리며 살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역사의 심층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위대한 일들을 미리 알고 그 영광을 지금 여기에서 누리는 사람들이다.

 

성령의 신적 통치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나타났던 현상은 언어의 상실이었다. 바벨탑 사건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죄로 인해 성령의 신적 통치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언어의 혼잡으로 인해 하나님의 큰일 말하는 것을 상실해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옳은 대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여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죽이는 악한 일들만 하며 살아갔다.

 

그러나, 성령 강림 사건은 바벨탑 사건과 정반대의 사건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받아 역사의 역전을 경험하고, 언어의 혼잡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천상의 사역을 통해, 성령의 종말론적 귀환이 이루어졌다. 이 기이한 일에 마음을 열어 성령에게 자기의 보좌를 내어주는 이들은 놀라움과 기쁨 가운데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겠지만, 성령의 종말론적 귀환에 여전히 마음을 닫는 자들은 본문에 등장하는 어떠한 부류들처럼 제자들이 새술에 취했다고 오해하며 조롱할 것이다.

 

역사의 심층에서 벌어지는 이 놀랍고 위대한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의 통치(그리스도의 통치/성령의 통치)를 거부하고 자기 삶의 물질적/육체적 풍요만 바라며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세워나가느라 힘들고 어렵게 사는가, 아니면, 성령의 종말론적 귀환에 삶을 내어드리고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성령께 삶을 내어 맡기고 평안과 기쁨 가운데 살아가는가?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제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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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