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려면
(딤전 4:6-16)
디모데전후서의 말씀은 성경공부 고급반에서 다루면 참 좋은 성경이다. 구원은 한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가야 하는 길’이기 때문에 본문에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조언하고 있는 것처럼 ‘전념’해야 한다. 물론, 무엇이든 인스턴트처럼 단 순간에 이루는 것을 좋아하는, 그리고 그러한 것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에게는 별로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구원은 ‘길’이지, 한 순간의 성취가 아니다.
요즘, 교회 쇠퇴의 원인을 여러 군데서 찾을 수 있지만, 그 중 한 가지는 교회가 구원을 너무 ‘한 순간의 성취’로만 가르치고, 구원을 ‘길’로 제시하는 데 게을리하고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것에 가장 오용된 신학 개념이 루터의 ‘칭의’ 개념이다.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믿음만 있으면 구원이 완성되고 성취되는 것처럼 오해되고 오용되어 왔다.
그러나, 루터가 ‘칭의’ 개념을 쓰는 이유는 그 당시 가톨릭의 잘못된 가르침과 교권(교황권)에 대한 반발과 오류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루터 당시 구원은 ‘교회와 교황의 허락’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졌다. 게다가, 구원은 교회와 교황이 제시하는 어떠한 행동을 잘 따르면 주어지는 것처럼 여겨졌다. 대표적인 예가 ‘면벌부’이다. 그 당시 교회는 교회에서 판매하는 면벌부를 사면 구원이 임하는 것처럼 가르쳤다.
루터의 ‘칭의’ 개념은 그 당시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루터는 이렇게 외쳤던 것이다. “교권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구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구원은 하나님의 배타적 은혜에 의한 선물이지, 중간의 누군가가, 즉 교회가 조작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는 뜻이다.
정말로 훌륭한 가르침이다. 바울의 모든 서신서에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도, 심지어 복음서에서도 등장하는 ‘경고’이지만, 초대교회부터 현재까지 교회는 계속하여 ‘거짓 교사와 거짓 교훈’에 몸살을 알아 왔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것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디모데는 지금 에베소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그런데, 에베소교회에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 거짓 교훈을 전하고 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 거짓 교사들과 거짓 교훈에 맞서 ‘참된 복음/선한 가르침’을 전하라고, 그들과 맞서 싸워 진리를 지켜내라고 격려하고 있다.
지금도 교회가 어려움을 겪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교회 내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과 그들의 거짓 가르침 때문이다. 적이 교회 바깥에 있지 않고,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어려움은 해결하는 게 쉽지 않다.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을 선한 교사로 위장하여 선량한 교인들을 꾀해 자신의 탐욕을 채우며 이득을 취하고 있다. 문제는 교회의 구성원들이 그러한 거짓 교사들과 그들의 거짓 가르침을 분별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많은 교회에서 선한 교사들과 선한 가르침이 거짓 교사들과 거짓 가르침에 의해 도리어 핍박을 당하고 내몰림을 당하기도 한다. 비극이다.
이러한 사태를 바라보며, 우리가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것은 구원이란 한 순간의 성취가 아니라 ‘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대개 세 단계를 가지는 것으로 여겨진다. 칭의(justification)-성화(sanctification)-영화(glorification)가 그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루터에 의해서 ‘칭의’ 개념에는 익숙하나, 성화와 영화의 개념에는 익숙하지 않다. 특별히 한국 개신교가 그렇다. 여기서 칭의는 구원의 주도권(initiatives)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주도권은 구원의 완성, 완전한 구원인 ‘영화’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이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믿음으로 시작된 구원은 성숙하는 단계(성화)를 거쳐, 구원의 완성이 영화에 이른다. 여기서 또 조심해야 할 것은 이 세 단계가 뚝뚝 끊어져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길(way)이다. 인간의 언어가 가지는 한계상, 인간의 인식이 가지는 한계상, 그렇게 세 단계로 나누어 부르는 것뿐이다.
구원이란 지난한 길(순례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기에 위험하기도 하고 필요한 것도 많다. 무엇보다 성령의 도우심과 동료 그리스도인들(fellow Christians)이 없으면 그 길을 완주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길을 끝까지 잘 가기 위해서 성령의 도우심을 날마다 간구하며,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사랑으로 하나가 되려는 것이다.
본문에 등장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란 ‘교회 일 열심히 하는 자’를 말한다기 보다는 ‘그 길을 끝까지 성실하게 걸어가는 자’를 말한다. 우리는 대개 교회의 일꾼을 오해한다. 교회의 직분을 맡아서 교회의 행정이 잘 돌아가고, 교회의 양적 성장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을 ‘교회의 일꾼’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교회의 일꾼에 대한 매우 얕은 이해이고, 건강하지 못한 이해이다. 교회의 일꾼을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교회의 일꾼이 교회 일을 하다가 탈진하거나 시험에 드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일꾼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에서도 벗어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는 자’이다. 즉, ‘그 길’을 끝까지 완주하여, 칭의로 시작한 구원의 길을 성화를 거쳐 영화에 이르기까지 성실하게 걸어가는 자이다.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려면, 다음의 세 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첫째,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려면, 말씀으로 양육 받아야 한다. 좋은 일꾼은 ‘믿음의 말씀’과 ‘좋은 교훈’으로 만들어진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성경에 대한 관심과 깊은 이해가 없으면 좋은 일꾼으로 성장하는 게 불가능하다. 이는 갓난아이들이 엄마 젖을 먹지 않으면 성장하기는 커녕 죽을 수밖에 없는 이치와 같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갓난아기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이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여기서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라고 표현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위에서 말했듯이, 교회에는 거짓 교사들과 거짓 가르침이 동시에 들어와 있다. 복음서에 말하는 알곡과 가라지가 논밭에 함께 자라는 것과 같다. 알곡을 지키겠다고 가라지를 다 뽑아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가라지 뽑아내려다 알곡까지 다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라지에 대한 심판은 말씀에서처럼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심판에 맡길 수 밖에 없다. 안타깝고 억울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좋은 일꾼이 되는 것은 가라지는 견디는 ‘인내’가 필요하고, 가라지를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가라지 때문에 가던 길을 멈추면 결국 가라지만 좋은 거다. 가라지 때문에 가던 길을 멈추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 가라지는 그냥 놓아두고,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며, 성경이 전하는 진리의 선한 가르침(복음)을 힘써 배워야 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되려면, 경건의 연단을 즐겨야 한다. '연단하다'는 헬라어 ‘귐나조’의 번역인데, 이는 운동선수처럼 연단을 좋아하고 즐기는 것을 말한다. 운동 선수가 자신이 하는 운동을 잘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그리고 자기가 하는 운동을 즐기는 것을 연상하면 된다. 그리고, 여기서 ‘연단’은 헬라어 ‘유세베이아’의 번역인데, ‘유’는 ‘좋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세베이아’는 ‘두려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유세베이아’는 ‘좋은 두려움’, 바람직한 두려움’을 뜻한다.
다시 말해, ‘경건’이란 ‘하나님에 대하여 갖는 좋은 두려움, 바람직한 두려움’을 말한다. 우리는 평소에 이것을 연단, 훈련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에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사는가? 대개 우리는 두려움을 가질 때 좋은 두려움, 바람직한 두려움 보다는 나쁜 두려움, 어두운 두려움을 갖는다. 그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범죄한다. 대개 사람들이 엉뚱한 죄를 범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다. 자기 삶이 어떻게 될까바, 두려워서 엉뚱한 말과 행동을 한다. 그래서 남에게 상처를 주고 이웃의 삶을 파괴한다.
‘경건’이란 좋은 두려움, 바람직한 두려움을 하나님께 대하여 갖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고 지키신다는 믿음, 즉 경건한 신앙을 갖는다면, 눈에 앞에 보이는 이익을 위해서 범죄를 저지르거나, 엉뚱한 말과 행동으로 남에게 상처 주고 이웃의 삶을 파괴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바울은 경건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허탄한 신화’에 대하여 디모데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사람들은 경건을 연단하기 보다, 허탄한 신화를 좋아한다. 성공과 출세와 부와 명예에 관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사모하고 연단한다. 결국, 사람들이 ‘성공, 출세, 부, 명예’에 대한 허탄한 신화를 꿈꾸는 이유도 결국 ‘경건’을 사모하지 않아서,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보다 다른 것을 두려워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허탄한 신화를 꿈꾸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경건하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가지고 인내하며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길 바라신다. 경건의 연단은 범사에 유익하다. 결국 유익을 주지도 못하고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하는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의 연단을 즐기는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다.
마지막 세 번째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려면, 오직 소망을 주님께만 두어야 한다. 소망은 내적 기쁨의 원천이다. 성경이 말하는 기쁨은 일순간의 쾌락이 아니라 꺼지지 않는 불과 같은 내적 에너지이다. 그 기쁨은 소망에서 온다. 즉, 우리가 소망을 어디에다가 두고 있는지에 따라서 기쁨이 일시적이냐 영원하냐가 갈린다.
현대인들의 기쁨은 매우 짧다. 냄비와 같다. 일시에 기뻤다, 일시에 기쁘지 않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정신적 장애가 심하다. 조울과 우울을 짧은 시간에 왔다 갔다 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일을 하거나 어떠한 것을 관람할 때만 기쁘고, 뒤돌아서면 기쁘지 않다. 참 애처롭다. 그들이 소망을 너무 감각적인 눈 앞에 있는 것에만 두기 때문이다.
이렇게 물어보면 좋겠다. ‘인생의 낙이 어디에 있는가?’ 보통, 사람들은 소망을 자식(가족/아내나 남편에게 두는 사람은 별로 없다.)에게 두거나, 재물에게 두거나, 건강에게 두거나, 친구에게 둔다. 또는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생활에 둔다. 물론, 이러한 것에 소망을 두는 것이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위에서 열거한 소망들이 모두 유한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식에게 소망을 두었다가 자식이 잘 되지 못하면 기쁨(낙)을 잃어버리고, 재물에 두었다가 재물이 사라지면 기쁨을 잃어버리고, 건강에 두었다가 건강을 잃어버리면 기쁨을 잃어버리고, 친구에게 두었다가 친구가 떠나면 기쁨을 잃어버린다.
소망을 주님께 둔다는 것은 길을 가는 동안 길 위에서 만나는 어떠한 것에 소망을 두는 게 아니라, 가는 길의 끝에 있는, 구원의 완성이신 주님께 소망을 둔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망을 주님께 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은 그 길을 걸어가다 낙망하거나 머무르지 않고, 항상 기뻐하며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거짓 교사들의 거짓 가르침에 맞서서 많은 것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우선, 구원에 대한 개념부터 바꾸어야 한다. 구원은 일순간의 성취가 아니라,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고 동료 그리스도인(공동체)가 필요한 것이다. 그 길은 멀고 험한 길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은 교회의 직분을 맡아서 교회의 행정이 잘 돌아가고, 교회의 양적 성장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이라는 개념보다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는 자’, 즉, ‘그 길’을 끝까지 완주하여, 칭의로 시작한 구원의 길을 성화를 거쳐 영화에 이르기까지 성실하게 걸어가는 자라는 개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은 말씀으로 양육을 받고, 경건의 연단을 즐기며, 오직 소망을 주님께만 둔다. 그래야 그 길을 잘 걸어가서 구원의 완성을 이루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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