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꽃 - 기도
(이사야 37:15-20 / 누가복음 11:1-4)
지난 몇 주간, 기독교 베이직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기독교인이 되면 구별되는 네 가지의 요소가 삶에 들어온다. 세례(예수 사건의 휘말림) / 성경(휘말림의 의미와 결과가 무엇인지) / 성찬례(환대와 감사의 향연), 그리고 오늘은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의 기도에 의하여 우리의 기도 또한 바뀐다.
지난 한 주간 미국의 뉴스에서는 이 한 가지 사건을 집중보도했다. 바로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사건이다. 50년전(1969년 7월 20일), 인류 최초로 달 탐사에 성공했다. (1969년 생은 50살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폴로 11호를 통해 달에 간 우주인은 세 명이다. Neil Armstrong, Michael Collins, 그리고 Buzz Aldrin가 그들이다. 모두 1930년 생이다. 이 중에서 ‘닐 암스트롱’이 가장 유명하다. 그런데, 닐 암스트롱은 세상을 떠났고, 나머지 두 사람은 생존해 있다.
잘 안 알려져 있지만, 달에서 처음 읽은 성경 구절은 요한복음 15장 5절과 시편 8편 3-4절이다.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시편 8:3-4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나중에 Buzz Aldrin이 아폴로 11호 달 탐사 회고록에서 밝혀 세상에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Aldrin 달 착륙 후 휴스턴의 지시를 기다리는 동안, 준비해 간 성만찬을 거행했다. 그러면서 위의 두 성경 구절을 낭독했다. Aldrin은 휴스턴의 나사 근처에 있는 Webster Presbyterian Church의 장로였다. 그는 그 교회의 목사와 의논한 후 빵과 포도주를 달에 가지고 가서, 그곳에서 혼자 성찬식을 집례했다. 중요한 순간에 그렇게 경건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게 참 대단한 것이다. (우리가 아폴로 11호의 달 탐사 사진 중, 달 표면의 발자국이 바로 Aldrin의 것이다.) 이러한 경건한 신앙인이 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물론 그가 이후에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그 순간만은 매우 경건했다.) 우리는 우리의 경건한 신앙을 어떻게 표현하며 살아가는가?
5. 현재 과학기술의 꽃은 우주탐사이다. 우주탐사의 발전은 그 나라의 과학기술의 수준을 보여준다. 냉전 시대에 우주탐사를 통해서 미국과 소련은 과학기술의 우위를 다투었다. 중국이 얼마 전에 달 탐사를 했고, 인도도 달 탐사에 역량을 쏟아 붓고 있다. 미국은 현재 화성탐사를 진행 중이다. 화성에 대한 데이터는 이미 많이 확보된 상태이고, 곧 유인 우주선을 보내 화성을 탐사할 계획이다.
그렇다면, 신앙의 꽃은 무엇인가? 바로 기도이다. 우주탐사가 한 나라의 과학기술의 질적 역량을 보여주듯, 기도는 한 사람의 신앙의 질적 역량을 보여준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세례를 통해 시작된 신앙의 여정은 기도에 다다라 꽃을 피운다. 한 나무가 아름다운 것은 꽃을 피우기 때문인데, 우리가 기도라는 꽃을 피울 때,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비로소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이 된다.
기독교 역사와 신학을 통해서도 그 사실이 계속 증거되고 있다. 우리가 아는 기독교 신학의 대가들은 모두 그들의 마지막 신학 여정으로 ‘기도’를 지목했고, 기도를 통해서 그들의 신학 여정을 마무리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기도의 성숙이다”(로완 윌리엄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97쪽). 왜냐하면, “기도가 자라는 것은 그리스도교적 인간성이 무르익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로완 윌리엄스, 97쪽).
어떻게 보면, 기도는 모든 사람들이 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기도’라는 행위는 모두 같지만,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의 기도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기도를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예수 사건에 휘말린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기도가 자기 자신 안에서 일어나도록 한다. 즉, 기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제자들이 기도하는 법을 몰라서 가르쳐 달라고 한 것을 아닐 것이다. 그들의 삶이 예수 안에서 새롭게 거듭나고 있었기에, 그들의 기도 또한 그 안에서 새롭게 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늘 외우는 ‘주의 기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보기 위해, 우선 히스기야의 기도를 보자.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윗 왕 외에 히스기야 왕 만큼 경건한 신앙인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의 기도가 얼마나 경건한가. 그는 앗수르 침공으로 나라가 백척간두 사이에 놓인 상황에서 간절하게 기도를 드린다. 그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만국에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사 37:16).
히스기야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철저하게 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시고,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우리도 하는 고백이다. 그런데, 예수의 기도는 이와 매우 다르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 이러한 예수의 기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이것은 기도의 혁명이다. 예수님의 기도 이전에, 그 누구도 기도를 시작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예수의 기도 안에서 ‘아버지’에게 기도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기독교의 신학 교사들(교부들)은 하나 같이 기도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다. 그 중에서 254년경 박해를 받고 순교한 오리게네스(Origen)라는 교부가 있다. 그도 기도에 대한 책을 저술했는데, 기도에 관한 그의 질문 가운데 하나는 이것이었다. “우리가 구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아신다면 왜 번거롭게 기도해야 하는가?” 굉장히 재미나는 질문이다. 우리도 자주 던지는 질문이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드는 질문들은 거의 모두 이미 기독교 역사에서 던져졌던 질문들이다. 우리가 그러한 질문이 던져졌고, 그에 대한 답이 주어졌다는 것을 모를 뿐이다. (그 많은 문헌을 일일이 다 확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오리게네스는 거기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답했을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하고 행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당연히 아시지만, 우리가 그리 하기로 결심한 것들을 통해 당신의 목적을 이루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일으키거나 치유나 화해를 이루거나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꾸려고 하실 경우, 여러분의 기도가 그 일을 일으키는 일련의 원인에 포함되도록 선택하십니다”(로완 윌리엄, 102쪽).
조금 다른 말로 위 대답을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우리가 어떠한 일을 할 때 ‘주체적’으로 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어떠한 일이든, 하나님은 그 일을 혼자서 이루실 수 있다. 그렇게 해도 우리는 할 말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소외시키기 원하지 않으신다. 이것은 굉장히 따스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람이 외로움을 죽어갈 때 나타나는 현상은 ‘소외’이다. 사람은 소외 당할 때 가장 비참함을 겪는다. 누군가를 소외시키는 행위는 가장 비인간적인 행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떠한 일을 행하시든 우리를 소외시키지 않으신다. 우리가 그 일의 주체가 되게 하셔서,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신다. 얼마나 따스한 하나님의 마음인가.
예수의 기도 안에서 우리가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소외되지 아니하고 하나님 안에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며, 그와 같이, 우리도 다른 이들을 소외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갖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이 왜 어지럽고 힘든가? 왜 이렇게 다툼이 많은가? 모두 ‘소외’ 때문이다. 누군가를 소외하려는 사람과 그 소외 당함에 분노하는 사람들 가운데 다툼이 일어난다.
일본이 일으키는 무역 분쟁의 내용은 결국 한국을 소외시키는 전략이다. 거기에 분노한 한국도 그들과 같이 ‘불매운동’을 통해서 일본을 소외시키려 한다. 이렇게 소외가 난무하면 결국 다툼만 늘어갈 뿐이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도 모두 누군가를 소외시키는 발언이다. 난민 출신 국회의원들에게 ‘자기의 원래 나라로 돌아가라’라고 하는 발언은 부적절하다. 그들을 소외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기도 안에서 ‘아버지’께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소외’에 동참하면, 그들은 기도를 잘못 배운 것이다. 아니, 그들은 예수의 기도 안에서 기도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예수의 기도 안에서 저 멀리 있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곁에, 나와 함께 계시며, 나를 소외시키지 않고 품어 안으신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제사장’의 기도를 드리며, 제사장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예수의 기도 안에서 이 세상의 고통과 곤경을 하나님의 마음 한 가운데로 가져간다. 그래서 예수의 기도 안에서 드리는 기도는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평화를 이룰 수 밖에 없다.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은 기도를 통해서 그리스도교적 인간성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무르익게 끔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일하신다. 하나님의 일에 우리를 동참하게 하신다. 우리를 소외시키지 않고, 우리가 그 일의 주체가 되게 하신다. 그래서 기쁨을 주신다. 반대로, 기도를 안 안다는 것은 기도를 안 하는 것을 통해서 상대방을 소외시키겠다는 불경한 마음이다. (넌 내 삶의 바깥에 있어. 그러니 나는 너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꺼야!)
우리가 예수의 기도 안에서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삶 속에서 어느 누구도 소외시키면 안 된다. 특별히 가족 간에 서로를 소외시키지 말라. 남편은 기도를 통해 자기 자신이 하려는 일에 아내를 동참시키고, 아내는 기도를 통해 자신이 하려는 일을 동참시키라. 그렇게 부부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부부 간에 서로 모르는 영역이 있으면 안 된다.
교회 공동체에서도 기도 제목을 계속 나누는 이유는 그 일을 잘 이루기 위한 주술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교회의 일에서 소외시키지 않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일의 주체로 초청하기 위함이다. 교회의 일은 성령이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모두 믿는 바이다. 그런데, 성령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일하신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그 일이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일이요, 우리에게 기쁨이 되기 위함이다.
신앙의 꽃은 기도이다. 기도가 활짝 필 때, 그리스도인은 가장 아름답다.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은 기도를 향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의 기도 안에서 우리의 존재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도 안에서만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의 꽃을 활짝 피워내는 주님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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