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양육하게 하라
(디도서 2:1-15)
불교에 삼독((三毒)이라는 게 있다. 탐진치가 그것인데, 탐욕(貪慾)과 진에(瞋恚)와 우치(愚癡), 곧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을 말한다. 신실한 불자인가 아닌가를 판가름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이것은 불교에서만 적용되는 윤리가 아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고등종교에서는 모두 탐진치가 신실함의 기준이 된다.
디도서는 크레타섬에서 목회하고 있던 목회자 디도에게 바울이 보낸 편지이다. (물론 학계에서는 이 서신을 바울의 저작이라고 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 서신이 신약성경에 들어온 이유는 교회에 참된 교훈을 주기 때문이다. 그만큼, 바울이 직접 쓴 편지가 아니어도, 바울이 디도에게 써서 보낸 편지라 생각해도 무방하다.)
크레타섬에서 목회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곳의 주민들이 원래 쉽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 이 증언이 참되도다”(딛 1:12-13a). 여기에 더해서 크레타섬 교회에는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 그들을 현혹시키고 있었다. 거짓 교사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명백한 거짓 교사가 있는가 하면, 잘 드러나지 않는 거짓 교사들이 있다.
바울은 거짓 교사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마땅하지 아니한 것을 가르쳐 가정들을 온통 무너뜨리는도다”(딛 1:11). 거짓 교사들의 내적 동기는 복음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아니라 ‘이익’이다.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이 그들의 내적 동기이다. 욕심에 휩쓸리면 ‘마땅하지 아니한 것들’을 가르쳐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결국 문제를 일으키는데, 바깥으로 드러나는 가장 큰 문제는 가정 파괴이다. 물론 이것은 곧 교회 공동체를 힘들게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디도는 거짓 교사에 맞서 ‘구원을 주시는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안고 크레타섬에서 목회하는 중이다. 얼마나 힘겨운 싸움이었을까, 짐작이 간다. 본문에서 바울은 그러한 거짓 교사에 맞서 ‘바른 교훈’을 전해야 하는 디도에게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들’을 가르칠 것을 주문한다.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크레타섬 교회 공동체에게 아주 실제적인 교훈이 전달된다.
교훈은 다섯 부류로 나뉘어 전달된다. 늙은 남자, 늙은 여자, 젊은 여자, 젊은 남자, 그리고 종들에게 각자의 위치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이 주어진다. 각 부류에게 전달된 교훈의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우리는 그 구체적인 교훈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복음의 원리를 먼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즉 그리스도인들이 구체적인 가르침 아래서 살아가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복음 때문이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대속) 자신을 주신 이유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본문은 그것을 이렇게 증거한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4절).
십자가의 사역은 어떠한 효력을 발생시키는데, 거기에는 죄사함의 효력이 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피흘리심으로 우리를 모든 불법에서 속량하시고, 우리를 새사람 되게 하신다. 즉, 우리는 더 이상 죄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죄와 상관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음과 같은 새사람을 창조한다.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 복음은 우리를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한다.
본문의 말씀대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나서 우리는 그 은혜로 양육 받아,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양육하도록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삶을 살 때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삶에 대한 구체적인 교훈은 우선 늙은 남자들에게 주어진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양육을 받으면 늙은 남자들은 어떠한 선한 사람이 되는가. 기본적으로 늙은 남자들은 절제력을 키워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양육을 받는다는 것은 절제력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다른 이들에게 충고를 들을 기회가 적다. 어릴 때는 잘못을 하면 부모에게 질책을 듣겠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남자들에게 충고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주변에서 점점 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절제력이 약해진다. 그래서 남자들은 나이가 들수록 자유분방한 삶을 살게 되고 자기 생각대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갈 위험을 안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디도에게 늙은 남자들에게 이것을 가르치라고 말한다.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신중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하고”(2절).
두 번째로 늙은 여자들에게 교훈이 주어진다. 여기서 ‘이와 같이’라는 말로, 늙은 여자들도 늙은 남자들과 함께 거룩한 행실을 해야 하는 것을 말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나이 든 여자들이 쉽게 범할 수 있는 ‘남에게 대한 안 좋은 말 하는 것’에 대한 교훈을 준다. 나이가 많아지면 타인을 판단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서게 되는데, 늙은 여자들이 남을 험담할 위험에 빠지게 되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특별히 술에 취하면 그러한 일이 발생할 위험이 높으니, 술에 취해 주사를 부리지 않을 것을 당부하고 있다.
세 번째로 젊은 여자들에게 교훈이 주어진다. 이 교훈의 특징은 바울이 디도에게 젊은 여자들을 직접 가르칠 것을 명하지 않고, 늙은 여자들로 하여금 젊은 여자들을 가르치도록 권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디도가 젊은 목회자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젊은 사역자가 젊은 여자들을 가르칠 때 빠질 수 있는 유혹이나 오해를 피하게 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그래서 젊은 여자들에 대한 가르침은 경험 많은 늙은 여자들이 하도록 위임하고 있다. 여기서 늙은 여자들의 책임이 막중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늙은 여자들은 젊은 여자들에게 본이 되기 위해서라도 ‘선할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
젊은 여자들에게 주어진 교훈은 이렇다. 아주 명시적으로 쉽게 나와 있다. 첫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해야 한다. 다른 일 때문에 가족에 대한 우선순위를 놓치지 말라는 뜻이다. 둘째, 집안일을 소홀히 여기기 말고 신중하고 순전한 태도 잘 처리해야 한다. 셋째, 남편을 무시하지 말고 복종하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젊은 여자들에 대한 교훈이 가정에 집중되는 것을 보면, 위에서 말했듯이,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젊은 여자들이 가정에 소홀하게 되고, 그로 인해 가정이 파괴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젊은 여자가 거짓 교사의 꾀임에 넘어가면 가정 파탄은 우스운 일이다. 그렇게 되면, 바울이 우려하고 있듯이, 불신자들에게 교회를 무시하거나 손가락질할 빌미를 주게 되는 것이다.
네 번째로 젊은 남자들에게 교훈이 주어진다. 여기서도 ‘이와 같이’라는 말을 통해서 젊은 여자에게 주어진 교훈이 젊은 남자들에게도 동일한 것을 말한다. 한 마디로 젊은 남자들도 가정에 충실하라는 뜻이다. 거짓 교사의 가르침에 현혹되어 가정 파탄에 이르는 것을 옳지 못하다. 다만, 젊은 남자들에게 주는 교훈의 특이한 점은 바울이 디도에게 이들의 본이 될 것을 주문하고 있다는 것이다.
젊은 목회자 디도는 젊은 남자들에 대한 교훈을 직접 책임져야 한다. 그래서 선한 일에 본을 보이고, 가르침에 있어서도 본이 되는 정도를 걸어야 한다. 특별히 거짓 교사가 그러하듯 가르침을 이익의 도구로 삼아서는 안 된다. 아무래도, 젊은 목회자 디도는 젊은 남자들과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디도가 젊은 남자들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많이 끼치게 되었을 것이고, 그러한 상황에서 디도가 본을 보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교훈이 되었을 것이다.
마지막 다섯 번째 교훈은 종들에게 주어진다. 그 당시 가정은 부모와 자녀와 종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였다. 나이 많은 사람들과 젊은 사람들, 자녀들, 그리고 종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바울이 노예계급의 존재를 질타하지 않는 것은 그가 불의해서가 아니다. 사회적 체계는 쉽게 바뀌는 게 아니다. 다만 그 사회적 체계 안에서 현실적인 평등과 자유, 그리고 정의를 추구해 나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지금도 우리는 자본주의 체계 내에 살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불평등의 문제를 고스란히 안고 산다.
다만, 종들에게 주는 교훈이 요즘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올 지는 미지수다. 왜냐하면 요즘 시대는 종들은 없고 모두 상전만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자기에게 적용하고자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각자 알아서 판단하기를 바란다.
바울은 교회 공동체를 다섯 부류로 나누어서 구체적인 교훈을 주고 있지만, 그 교훈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미덕이 중심하고 있다. 하나는 절제이고, 다른 하나는 인내이다. 모든 부류를 막론하고, 이 두 가지의 미덕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이것만 기억하면 된다. 우리가 절제해야 하는 이유는 이 세상의 정욕과 경건하지 못한 모습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양육을 받아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무엇보다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절제는 우리 삶의 전반에 걸쳐 두루두루 필요한 그리스도인의 미덕이다. 특별히 온갖 욕망을 부추기는 이 시대에 절제의 미덕은 더더욱 필요하다. 아래의 글은 얼마전 내가 했던 단상이다.
오늘날은,
뭔가를 먹기보다 먹지 않는 게 생명이 더 풍성해지고,
뭔가를 하기보다 하지 않는 게 생명을 더 풍성하게 한다.
뭔가 하기를 부추기는 시대,
뭔가를 하지 않는 저항의 영성이 필요하다.
우리가 인내해야 하는 이유는 소망 때문이다. 우리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서 드러날 것을 믿는 자들이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소망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이 소망이 있기 때문에 인내해야 하는 것이고, 이 소망 때문에 절제를 하더라도 손해보는 게 없는 것이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양육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인내하며 살아간다. 마지막 날에 우리에게 부어질 하나님의 영광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귀한 것이고,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양육을 받아, 두 가지, 절제와 인내의 미덕 가운데 살아간다면, 마지막 구절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듯이, 누구에게도 업신여김을 받지 않게 될 것이다. 무엇이 우리를 양육하도록 우리를 내어주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양육하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는 자이다. 그 양육은 우리에게 절제와 인내의 미덕을 가져온다. 절제와 인내의 미덕 안에서 선한 일에 열심히 힘쓰면, 그 어느 누구도 우리를 얕잡아 보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업신여기지 않을 것이다. 절제와 인내의 미덕으로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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