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8. 9. 03:37

포이에마

(에베소서 2:1-10)

 

포이에마는 작품이라는 뜻이다. 10절을 다시 풀어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인데, 어떠한 작품이냐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작품이다. 우리는 아무렇게나 지으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으심을 받았다. 우리의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은 필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spirit / 정신)에 의해서 살아가게 되었다는 뜻이다. 어떻게 그러한 일이 가능한가?

 

본문은 기독교의 근본 진리를 말하고 있다. 가장 깊은 인간론이고, 가장 깊은 구원론이다. 기독교의 인간론은 구원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본문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명시적으로 선포한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1). 여기서 기독교 인간론의 기본적인 명제가 제시된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은 존재였다. ‘허물과 죄는 기본적으로 완전하지(holy) 못한 상태를 가리킨다. (이해를 돕기 위해) 구원을 합격점으로 생각해 보자면, 100점을 맞아야 구원을 받는데, 허물과 죄, 100점에 모자라기 때문에 구원 받지 못한 비참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3절까지 전개되는 기독교 인간론의 핵심은 인간의 비참한 존재에 관한 것이다.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좀비를 생각해 보라)은 공중 권세 잡은 자들에게 조종을 당하는 삶을 살고, 불순종의 아들의 영에 사로잡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며, 온갖 불의한 일에 연루되어, 결국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된다.

 

여기서 본질상이라는 말을 좀 더 살펴보자. 본질상(휘시스)이라는 말은 태생으로 결정된 조건이나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유전자보다 더 깊이 새겨져 있는 본질을 말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하는 존재이다. 허물과 죄로 인해 구원 받을 만한 존재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본질이 바뀌어지지 않는 한, 인간은 영원히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이러한 질문이 든다. 이것은 마치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던졌던 질문과 같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한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3). 이에 대해 니고데모는 이런 질문을 한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니까?”(3:4). 이러한 질문처럼,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본질을 바꿀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러한 질문을 던질 줄 아는 자가 소위 가난한 자이다. 자기 존재의 비참한 실존을 볼 수 있는 자가 가난한 자이다. 물질이 없는 자가 가난한 자가 아니다. 물질이 많은 자가 부자가 아니다. 자기 존재의 비참한 실존을 발견하고 그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지?”라고 질문을 던질 줄 아는 자가 가난한 자이다. 이 가난의 영성은 우리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영성 중 하나이다. 우리는 우리 존재의 곤궁함을 늘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올 수 있다.

 

우리가 본질상진노의 자녀라는 것은 구원을 점수로 말해 100이라고 하면, 우리의 힘으로(노력으로)는 절대로 100점에 도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본질을 바꿀 수 없다. 우리의 본질을 우리의 힘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인간성의 상실이다. 여기서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논쟁이 시작된다. 펠라기우스는 우리의 본질을 우리가 바꿀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셨다는 주장을 펴는 것이고, 어거스틴은 우리가 우리의 본질을 우리의 힘으로 바꿀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우리의 본질이 바뀐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두 사람의 주장 중, 기독교 전통은 어거스틴의 주장을 옳다고 판단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의 직접 원인이지, 간접 원인이 아니다. 펠라기우스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간접 원인이고, 어거스틴에게 은혜는 직접 원인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직접 선물이지, 간접 선물이 아니다. 펠라기우스에게 구원은 하나님의 간접 선물이고, 어거스틴에게 구원은 하나님의 직접 선물이다.

 

펠라기우스의 생각이 이단으로 정죄되고 어거스틴의 생각이 정통으로 인정 받은 이유는 기독교 구원론의 독특한 변증법 때문이다. 기독교 구원론은 기독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고 있다.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이해하기 복잡하다고, 또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다고 마구 떼어내서는 안 된다. 진리는 단순하지 않다. 신비는 단순하지 않다. 그렇다고 복잡하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 존재가 그것을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뜻이다.

 

기독교 구원론은 인간 개인에게 직접 작용하지 않는다. 펠라기우스의 오류는 이것이다.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 개인에게 적용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인간 개인이 노력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구원에 무의미해진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나타난 구원의 경륜을 말하고 있지, 인간 개개인에 직접 임한 구원을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구원은 무엇인가? 본문은 이렇게 답한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5-6). 여기서 계속 제시되는 단어는 함께이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신비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적이 없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적이 없고, 그리스도와 함께 승천하여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문은 우리가 그렇게 되었다고 말한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한가?

 

예수 그리스도는 혼자 십자가에 달리셨고, 혼자 부활을 경험했으며, 또한 혼자 승천하여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으셨다. 그런데 언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는가?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의 대표자(맏아들, 맏형, 새아담)로서 모든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대속의 깊은 의미를 알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대속은 단순히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싸구려 신앙이 아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구원이 언제 일어나는가? 우리는 언제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데, 그 본질이 바뀌어 구원 받은 복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가?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고 그와 함께 하늘에 앉게 되는 것은 오직 그와 연합할 때 일어난다. 이 순간이 믿음의 순간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한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고, 그와 함께 부활하며, 그와 함께 승천하여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는다. ‘대속은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맡겨 놓고, 인간은 아무 것도 안 해도 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속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함께 부활하고 승천하여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도록 이끌어 주는 마중물이다.

 

기독교 인간론의 완성은 구원에 있다. 인간은 본질상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을 비참함 가운데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그러한 긍휼하심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본질을 바꾸어 주기 원하시는데, 그 방식이 매우 신비롭다. 기독교의 구원론은 기독론 안에서 발생한다. ,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다. 이것은 아주 신비로운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다. 인간에게 직접 은혜를 주어 자신들의 힘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방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구원의 창조에 집중하게 하는 방식으로 구원을 이루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구원의 창조에 집중할 때, 그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고 승천하여 하나님의 오른 편에 앉게 된다. , 이 말은 우리의 존재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에서 그 본질이 바뀌어 본질상 축복의 자녀로 바뀌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작품(포이에마)’로 거듭나게 된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작품(포이에마)로 탄생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하는 존재가 된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는 악한 일을 일삼겠지만, 이제 본질상 축복의 자녀는 선한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본질이 선하게 바뀌었는데, 선한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는가. 나는 이 사실이 너무 기쁘고 가슴 벅차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