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에 일어난 일
(요한복음 1:36-39)
신약성경에는 네 개의 복음서가 있다. 그 중 마태, 마가, 누가를 공관복음서라 부른다. ‘공관’, 즉 보는 관점이 같다는 뜻이다. 네 번째 복음서인 요한복음은 여러모로 세 개의 공관복음서와 보는 관점이 다르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라고 하지 않고, 제 4복음서라고 부른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어린 양’이라고 부른다. 예수를 어린 양에 비유해서 부르는 것은 기독교의 매우 독특한 언어다. 그 근거는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에서 온다. 요한복음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를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칭하며 그를 자신의 제자들에게 소개한다. 여기서 ‘어린 양’은 ‘희생양’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어린 양을 통해서 죄사함 받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의 ‘어린 양’ 개념은 이와 다르다. 요한계시록은 천상의 예수를 ‘어린 양’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묵시문학적 심판자를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예수를 가리켜 ‘어린 양’이라고 부르지만, 거기에는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는 ‘희생양’의 의미와 세상 끝날에 모든 만물을 심판하시는 심판주의 의미를 담아서 부르는 것이다. 둘 다 예수 그리스도의 핵심적인 사역이고 역할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요단강가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지만,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시는 장면이 없다. 그저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가까이 다가설 뿐이다. 요한은 그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에서 내려와 예수님의 위에 머무는 것을 볼 뿐이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비둘기 문양은 성령을 의미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주도적으로 제자들에게 다가서고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부르시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세례 요한의 증언으로 인해 처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생겨난다. 그리고,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불렀을 때 ‘즉시’ 따랐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즉시’ 따르는 게 아니라, 먼저, 예수님과 함께 머무르며 시간을 보내고 싶어한다. 이 상황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다.
세례 요한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예수님을 가리켜 자신의 제자들에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소개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고, 자신이 그렇게 물로 세례를 주는 이유는 자신의 뒤에 와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을 증언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이 바로 ‘그이’라고 소개한다.
스승의 말을 듣고, 세례 요한의 제자 두 명이 예수님에게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다. 여기서의 ‘따라 나섬’은 공관복음에서의 ‘따라 나섬’과 다르다. 공관복음에서의 따라 나섬은 ‘즉시’ 따라 나서는 제자됨이었지만, 요한복음에서의 따라 나섬은 일종의 탐색전이다.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묻는다. “무엇을 구하느냐?” 무슨 이유로, 무엇을 바라면서 자신을 따르는 것인지 물으신 것이다. 이에 대하여 두 제자는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Rabbi, Where are you staying?”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다. 이것은 ‘어디에 사세요? What is your address?’라는 뜻이 아니다. ‘어디에 머무르십니까?’라는 말인데, 여기서 ‘머무르다’로 번역된 ‘메노’는 ‘성령이 예수님에게 머물렀다’라는 곳에 쓰였던 그 동사와 같다. 요한복음에서 ‘메노(머무름)’은 두 인격체의 관계에 사용되는 단어이다. 성령이 예수님에게 머무르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안다. 그러므로, “랍비여 어디에 계시오니이까? 선생님, 어디에 머무르십니까?”라는 질문은 이런 뜻이다. “예수님, 당신은 어떠한 인격체이십니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자신들의 스승 세례 요한을 통해 소개 받은 예수님을 만나, “선생님, 당신은 어떠한 분이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진 두 제자는 예수님의 초대를 받는다. “와서 보아라!” 그 초대에 응한 두 제자는 그날 예수님과 함께 거한다. 여기서도 ‘메노(머무르다)’라는 동사가 쓰인다. 성령이 예수님 위에 머물 때도, 두 제자가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물을 때도, 그리고 예수님의 초청에 응하여 두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거할 때도 모두 ‘메노(머무르다)’라는 동사가 쓰인다. 이렇게, 관계가 형성되고 그 인격과 정체가 드러난다.
본문은 이러한 사건이 일어난 때가 ‘열 시쯤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열 시’는 현재 우리가 쓰는 시간 개념이 아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시간을 우리가 쓰는 시간으로 바꾸려면 더하기 6을 하면 된다. (질문: 예수님은 몇 시에 십자가에서 운명하셨나? 제 9시! 거기에 6을 더하면, 15가 된다. 이를 우리가 쓰는 시간으로 바꾸면, 오후 3시이다.) 그러므로, 10시에 6을 더하면, 16이 되고, 이를 우리가 쓰는 시간으로 바꾸면, 오후 4시가 되는 것이다.
오후 4시. 요즘 말로 하면, 퇴근 시간이다. 하루의 일과를 정리하고 집에 갈 준비를 하는 시간이다. 게다가 유대인들의 시간 개념은 요즘과 달라서, 오후 6시가 되면 또다른 하루의 시작이다. 오후 4시는 집에 들어가 가족들과 식사를 하며 또다른 하루를 맞이해야 할 중요한 시간이다. 그런데 두 제자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 예수와 머무르기로 선택했다. 왜냐하면, 예수님 위에 성령이 머물렀고, 두 제자는 예수님과 머무르며 그분이 어떤 분인가를 알고 싶었고, 그래서 예수님과 머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 대하여 알고 싶으면, 그 사람과 머물러야 한다. 충분한 머무름 없이 그 사람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반칙이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머무르는 것’이다. 영국의 시인 데이비드 존스(David Jones)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이런 말을 남겼다. “문명의 전환기에는 그분을 놓치기 쉽다.” 우리는 거대한 문명의 전환기에 살고 있다. 특별히 과학문명의 발달로 인해 우리의 삶의 형태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그 변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지구의 그 어느 생명체도 그 변화를 따라잡기 버거워 하고 있다. 그래서 존재하기를 포기하는 생명체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이러한 시대에 ‘오후 4시에 일어난 일’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세례 요한의 증언을 통해 예수님을 만났던 두 제자는 오후 4시에 집에 갈 생각을 하기 보다,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알기 위하여 예수님과 머물러 있기를 선택했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하고 있는가? 오후 4시, 예수님과 머물러 있을 시간이 없다고 고개를 저으며 집에 가기 바쁜가? 아니면, 우리도 두 제자처럼, 그분의 제자가 되고자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지 알기 위하여 집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과 머무르기로 결정했는가?
예수님과 머무르기로 선택하여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게 된 두 제자 중 하나였던 안드레는 그 기쁨을 나누고자 가장 먼저 자기의 형 ‘시몬 (베드로)’을 찾아간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어!” 예수님과 머물렀더니, 이제 예수님이 그들 위에 머물게 된 것이다. 성령이 예수님에게 머물러 있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 드러났듯이, 두 제자들 위에 예수님이 머물러 있어 그들이 이제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우리는 무엇과 머무르고 있는가? 내가 지금 머무르고 있는 그것이 나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가? 아마도 그것과 머무르다 보면 그것이 처음에는 구원을 주는 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나의 생명을 헤치고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어느 때까지 그 어리석은 일을 반복하려는가. 이제 그만 우리, 오늘 우리가 목격한, 오후 4시에 일어난 일을 본받아,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머무르기를 바라는 제자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머무르게 되는 구원의 삶을 사는 ‘제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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