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8. 11. 26. 15:23

작은 메시아

(사무엘하 23:1-7)

 

오늘은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이다.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은 그리스도 왕 주일이다. 여기에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담겨 있다. 우리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고, 나사렛에서 자랐으며, 갈릴리에서 사역을 하다,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리고 사흘만에 부활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 다시오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우리의 왕으로 고백하고 믿는다.

 

요즘 현대인들에게 그리스도라는 말과, ‘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스도(Christ/크리스토스)’는 헬라어인데 한국말로 음역한 것이다. 구약성경/히브리어에서는 메시아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문자적으로 기름 부음 받은 자(anointed one)’라는 뜻이다. 고대시대에 기름을 붓는 행위는 누군가를 따로 구별해서 어떠한 사명을 맡길 때 하던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기름 부음을 받는 사람은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 이렇게 세 부류였다.

 

오늘 말씀은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 대표적으로 기름 부음 받은 자인 다윗의 마지막 말을 다루고 있다. 1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가 말하노라”(1).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anointed one)이다.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아 왕이 되었다 (높이 세워졌다).

 

이것은 다윗의 자기 정체성이라는 말로 다르게 표현할 수 있다.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고 왕이 된 것은 자기 스스로의 퍼포먼스가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선포이다. 그는 하나님께 특별히 선택된 왕이다. 사무엘서의 이야기는 다윗의 일생을 전하고 있는데, 어찌보면, 사무엘은 신약의 세례 요한과 같은 역할을 한다.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했다면, 사무엘은 다윗의 길을 예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윗 이야기의 특징은 다윗이 원래 왕으로 선택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처음 왕은 베냐민 지파에서 나왔다. 왕권이 세습되던 시대인 것을 감안하면, 처음 왕 사울의 뒤를 잇는 이스라엘의 왕은 그의 아들 요나단이 되거나, 아니면, 베냐민 지파에서 나왔어야 한다.

 

그러나, 다윗은 유다지파 사람이었다. 유다 지파 사람 중에서도 아주 미약한 집안의 사람이었다. 미약한 집안에서도 막내였다. 사무엘이 하나님이 택한 사람에게 기름을 부으러 이새의 집을 찾아갔을 때, 그리고 아버지 이새가 하나님의 계획을 사무엘로부터 들었을 때, 아버지 이새조차도 자기의 막내 아들 다윗이 기름 부음 받은 자가 될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새는 막내 아들을 양치는 들판에 그대로 남겨두고, 다른 형제들만 모아서 사무엘 앞에 세웠다.

 

다윗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성경은 계속해서 다윗의 기름 부음 받음에 대해서 말한다. 이것은 다윗의 자기 정체성이다. 다윗은 스스로 왕이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주셔서 왕으로 선택되었다. 다윗은 한 마디로, ‘기름 부음 받은 자(anointed one)’이다.

 

이러한 다윗의 자기 정체성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기독교 신앙의 기본은 나 스스로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불러 주셨다는 것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교회라 부른다. 교회가 세상의 어느 집단과 다른 이유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의 또다른 기본 중 하나는 이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다윗이 하나님께 기름 부음 받을 자격이 없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부름 받아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그래서 우리를 불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삼아주셨다. 이것을 우리는 은혜(Grace/카리스)’라고 부른다.

 

지금 시대는 이러한 개념도 잘 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 시대는 은혜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하지 않고, ‘자격(qualified)’에 의해서 무엇인가를 수행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실제로 지적한 학자가 있다. 그 유명한 막스 베버이다. 막스 베버는 그 시대에 성직자들이 카리스에 의해서 지명되는 것이 아니라, ‘자격(qualified)’에 의해서 지명되는 것에 대하여 지적했다. 요즘은 다 그렇다. 학교에 입학하는 것도 자격시험을 치른다. 자기의 학교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다는 듯이, 자격을 갖출 것을 요구한다. 요즘 사람들은 대학교를 들어갈 때부터 직장을 얻기까지, 또는 시집장가를 가는 것까지 온갖 자격을 갖추느라 살기 힘들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에까지 들어와 있다. 목사를 청빙할 때 뿐만 아니라, 교회의 직분자들을 세울 때도 자격을 따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교회에서부터 사회에 이르기까지 온통 자격자들만 넘친다. 나는 자격이 되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다는 교만만 넘쳐나고, 자신이 보기에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은 무시하거나 경멸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갑질현상이 일어난다.

 

이러한 시선은 다윗의 아내 미갈의 시선이다. 미갈은 사울 왕의 딸이었다. 미갈은 속으로 자기 자신은 왕비로서 자격이 되는 사람이지만, 다윗은 왕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갈은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다윗 성)으로 운반하면서 춤을 출 때, 그 모습을 보고 마구 비웃었다. (삼하 6)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이 왕 자리에 있으니, 저런 천박한 짓을 하는구나!’ 그러나, 그녀의 그러한 생각이 틀렸음을 하나님께서 알려주셨다. 그녀는 그 벌로 평생 아이를 갖지 못했다. 그녀는 그렇게 외롭게 죽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껏 춤 추었다. 왕임에도 불구하고, 바지가 내려가는 줄도 모르고 춤췄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다윗은 자기 힘으로, 자격이 되어서 왕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그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했다. 그는 은혜로, 하나님에 의해서 기름 부음 받아 왕이 되었다는 것을 가슴 속 깊이 새기며 살았다.

 

자격을 논하는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 철저하게 은혜를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니라, 자격과는 상관 없이,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고 고백하고, 이 은혜를 간직하며 살아가는 자들의 삶은 세상 사람들과 같을 수 없다.

 

성경은 다윗을 이러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3,4).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인가. 다윗은 한마디로, ‘Good King’이었다. 다윗은 어둠을 물리치는 아침 빛 같은 사람이었고, 구름 없는 상쾌한 하늘 같은 사람이었고, 아침 이슬을 머금고 파릇파릇 돋아나는 풀과 같이 생명력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만약, 우리 스스로를 은혜로 구원 받은 자라는 자기 인식, 은혜로 기름 부음 받은 자들, 은혜로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짐을 받아 교회가 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도 다윗처럼, 여호와를 겸손하게 경외하는 사람, 어둠을 물리치고, 연약한 자를 돕고, 정의롭게 일 처리는 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오늘 말씀은 영원한 약속에 대하여 말한다.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5). 사무엘하 7장에 보면, 하나님은 다윗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신다 (다윗언약).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7:16).

 

이 언약은 다윗의 자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서 비롯된 언약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기댄 언약이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자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 언약이 영원한 것처럼, 우리의 구원도 영원하다.

 

다윗 언약이 세워진 뒤, 열왕기서의 말씀을 통해서 전해지는 다윗 왕가의 이야기는 별로 은혜롭지 못하다. 심지어,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열되고,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해서 망한 뒤, 다윗 왕의 후손들은 모두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다. 이것을 보면, 다윗 언약은 무참히 깨진 것 같고, 더 이상 어떠한 희망도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인 것 같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다윗 왕과 맺은 다윗 언약을 끝까지 놓지 않고, 거기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메시아를 보내 구원해 주실 거라는 것을 믿었다는 것이다. 언약은 우리의 자격에 기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기댄 것이기 때문에, 어려울 때, 이렇게 힘을 발휘한다. 다윗 언약을 붙들고 살았던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다시 한 번 경험한다. 그들이 소망하던 메시아가 실제로 이 땅에 왔다.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는 다른 왕들과 같지 않는 신실한, 그 옛날 다윗과 같은, 아니 다윗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참 된 메시아(The Messiah)이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약의 사람이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영원한 언약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니, 다윗처럼, 그리고 다윗의 자손들처럼, 언약의 사람이 되라. 언약의 사람은 주변여건사정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유다 백성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지만,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반드시 구해주실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포로생활하는 가운데서도 감사와 기쁨 가운데 살았다.

 

우리가 언약의 사람인데, 무엇이 두려운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는가. 우리는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아무런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기름 부음 받은 작은 메시아이다. 기름 부음 받은 자는 은혜를 반드시 기억한다. “나는 하나님께 은혜로 선택되었다. 은혜로 구원받았다.” 이 구원의 은혜는 한순간도 나를(우리를) 놓지 않는다.

 

이 고백은 우리의 삶의 내용을 규정한다. 은혜로 기름 부음 받은 작은 메시아로서,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마른 땅의 단비와 같은 사람으로 산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연약한 자를 도우며, 정의롭게 일을 처리한다. 우리는 언약의 사람으로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감사와 기쁨 가운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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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11. 8. 09:41

신앙인의 길과 복

(잠언 3:1-12)

 

아버지(어머니)는 자녀(아들/)를 양육하고 훈련해야 한다. 자식에 대한 양육과 훈련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일은 어리석은 것이다. 현대인들은 자식에 대한 양육과 훈련을 남의 손에 맡기는 일을 너무 손쉽게 생각한다. 잉여의 시간과 재산이 생겨난 덕에 학교 제도가 생겨난 이래로 자녀 교육은 남의 일이 된 듯하다.

 

가장 좋은 교육 기관과 장소는 가정이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가정에서의 교육에 성공하면 사회에서도 성공하지만, 가정에서의 교육이 실패하면 아무리 좋은 학교를 다녀도 사회적 성공을 거두기 쉽지 않다. 물론 부모 밑에서 건강한 가정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성공한 사례가 많다. 그러나, 그들 삶에 속에는 반드시 부모와 같은 역할을 해주는 어떤 존재가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가정 공동체와 교회 공동체는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가정에서 신앙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신앙 교육으로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다. 교회에서 신앙의 언어를 배우긴 하지만, 그 언어를 실제로 쓰는 곳, 그래서 마음에 새기는 곳은 가정이다. 교회에서 배운 신앙의 언어를 가정에서 가족들 간에 쓰지 않으면 그 언어는 우리 안의 모국어 Mother Language’가 되지 못한다. 무엇이든지, 내면화, 모국어가 되지 않은 것은 실제 생활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억지로 기억해내야만 하는 것들은 빠르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잠언서 1장부터 9장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하는 10개의 가르침이 들어 있다. 그 중에서 우리가 함께 살피고 있는 3장의 말씀은 세 번째 담화(가르침)에 해당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한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1). 여기서 법과 명령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아버지가 1인칭 소유격을 붙여 나의 법, 나의 명령이라고 한 것을 보면, 아버지가 인생을 살면서 경험하고 깨달은 것들을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되고, 넓은 의미에서, ‘법과 명령은 모세의 율법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법과 명령을 잊지 말고(기억하고), 지키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위는 아들에게 장수와 평강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에게 이 말은 외계어처럼 들릴 수 있다. 현대인들에게 장수는 의학의 발달로 오는 것이고, 평강은 정치의 안정으로 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앙인은 장수와 평강이 의학이나 정치의 발달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 아버지(하나님)의 법과 명령을 지키는 것으로부터 온다고 믿는다.

 

이러한 이야기가 굉장히 비과학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때, 생명이 의학이나 정치가 만들어내는 어떤 것이 아니라, 생명이 하나님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생각해 볼 때, 그 생명의 장수와 평강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생명에 더해지는 장수와 평강은 하나님에게서 온다. 게다가 평강 없는 장수는 오히려 저주가 될 수 있는데, 현대인은 의학의 도움으로 장수의 복을 누리고 있을지는 몰라도 평강이 자신들 안에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죽지 못해 사는 이들, 평강이 없어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내던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자살한 모녀의 이야기 / 무엇이 그들의 삶을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었을까.) 그러한 것을 볼 때, 장수와 평강은 의학이나 정치에서 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오는 선물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어서 이러한 가르침을 준다. “인자와 진리를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여 네 마음 판에 새기라”(3). 우리는 목에 다이아몬드나 금 같은 보석 거는 것을 좋아한다. 목에 보석을 거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아름다움과 신분을 드러내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목에 보석을 거는 대신, ‘인자와 진리를 걸라고 말한다. 매우 시적인 표현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보석이 목에 걸려 있어도, 그 사람의 목에 걸린 것이 그 사람의 은총과 존귀를 보장해 주지 못한다. 그러나, 목에 인자와 사랑이 걸려 있으면, 그 사람은 은총과 존귀를 선물로 받아 누리게 된다.

 

인자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헤세드이다. 구약성경에서 헤세드는 다양하게 번역된다. ‘인자가 대표적인 예이지만, 이 외에도 사랑, 자비, 긍휼, 선함등으로 번역된다. 더 큰 틀에서는 은혜로 번역할 수 있고, 영어 성경에서는 ‘steadfast love(확고부동한 사랑로 번역되기도 한다.

 

하나님의 헤세드가 없으면, 인간(이스라엘)은 살 수 없다. 그래서 헤세드는 하나님이 언약을 세운 대상자들을 향해 품으시는 사랑의 마음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 언약을 먼저 세우시는 것도 하나님이고, 그 언약을 지킬 수 있도록 이끄시는 것도 하나님이다. 만약 언약을 지키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그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것도 하나님이고, 언약을 다시 지킬 수 있도록 언약을 깬 자들을 심판하시는 것(공의)도 하나님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헤세드(인자)’를 붙들고, 그 헤세드를 자신의 삶 속에 구현하면서 사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은 은총과 존귀이다. 좀 더 단순화시켜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자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을 구현하면서 사는 자들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은총과 존귀를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5절부터 10절까지는 3가지의 명령과 약속이 나오는데, 하나님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가르친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세 단어를 통해 맺어진다. “신뢰, 경외, 공경이 그것이다. 첫째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하나님과 이러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말한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5). 아버지는 아들에게 마음을 다해 여호와를 신뢰하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마음(레브)’은 인간의 생각과 결정(결심)을 만들어 내는 기관을 말한다. 마음은 생각을 만들어 내고, 생각은 행동을 만들어 낸다. 생각과 행동을 만들어 내는 마음을 다해 여호와를 신뢰하라는 말은 생각과 행동의 근거가 나 자신의 명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성경은 이것을 다른 말로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6a)고 표현한다. 히브리어 표현을 풀어서 말자면, 이 말은 너의 모든 길 안에서 그를 인정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지금 을 가고 있다. 그 가는 모든 길 안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얻게 되는 복이 있다.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He will make your paths straight”(6b). ‘지도하다라는 단어는 굽거나 휘어진 것을 곧게 하다라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의 가는 길을 평탄케 해 주신다는 뜻이다. 구불구불한 인생의 길을 곧게 펼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 있다는 것은 매우 큰 깨우침을 준다.

 

우리는 이와 반대의 상황을 출애굽기에서 본다. 출애굽하여 곧게 펴진 길로 가나안 땅까지 며칠 걸리지 않고 갈 수 있었던 이스라엘은 광야 길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 실패하여 가나안으로 향하는 그들의 길이 구불구불해져 40년간이나 광야를 헤맸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앞을 가로 막는 바다가 갈라지고, 바위에서 물이 나온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불평하면 곧았던 길도 구불구불해진다.

 

두 번째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하나님과 이러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말한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7). 이 구절을 보면, ‘지혜경외이 맞물려 있다.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는 사람은 악에 빠지기 쉽다. 인간의 지혜는 선악을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에서 벌어진 일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사람(아담/하와)의 눈에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들에게 어떠한 결과를 가져다 줄 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만약, 처음 사람(아담/하와)이 하나님을 두려워(경외)했다면, 그들은 자신의 지혜를 따라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을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 열매에 눈길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지혜를 따라 행동하는 것은 매우 큰 위험성이 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의 지혜를 따르지 말고,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고 일러준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여 악에서 떠난 삶을 사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이 있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8). 현대인은 비타민을 먹으며 건강한 육체와 생명력 있는 영혼을 얻으려 한다. 그런데, 성경은 건강한 육체와 생명력 있는 영혼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온다고 말한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며 악을 행하는 자의 몸과 영혼이 성 할리 없다. 악을 행하면서 비타민을 열심히 먹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악한 일을 하지 않는 것 자체가, 악한 일에 연루되지 않는 것 자체가 보약이다.

 

세 번째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하나님과 이러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말한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9). 여호와를 공경하는 일은 마음의 문제가 아니고 행동의 문제이다. 성경은 여호와를 공경하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공경하라는 동사는 히브리어 카베드인데, 이는 무겁다, 엄중하다의 의미로서, ‘상대방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최선을 다해 대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처음 익은 열매(레쉬트)’는 시간뿐 아니라 정도에 있어서도 최선의 것을 의미한다. 여호와를 공경하는 것은 최선의 시간과 최선의 물질을 드리는 마음에서 시작된다(생명의 삶 플러스, 20158월호, 181). 공경은 남는 시간, 남은 물질(물건)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최선의 시간, 최선의 물질(물건)을 드리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인들에게 레저가 되어버린 신앙생활을 돌아보게 된다. 하나님께 최고의 시간과 물질을 먼저 드리고 남는 시간에 자신들의 할 일을 하는가, 아니면,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남는 시간에 하나님께 시간과 물질을 드리는가. 다른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자기의 양심은 자신이 지금 하나님을 공경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신앙생활도 양심적으로 해야 한다.

 

상대방이 나를 공경(respect/honor)하는 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상대방이 나에게 최선의 것을 주는지 아닌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나 자신도 상대방을 공경(respect/honor)하고 있다면, 최선의 것 주는 것을 망설이지 않을 것이요, 공경하지 않는다면, 최선의 것 주는 것을 아까워할 것이다. 그리고 대개 공경의 마음은 상대방이 자신을 대하는 것을 보면 안다. 자신의 능력의 한계 내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최선의 것을 주고 받는 관계가 아름다운 것이다.

 

여호와를 공경하면, 즉 최선을 것을 드리면, 받게 되는 복이 있는데, 그것은 풍요의 복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당연한 결과다. 최선의 것을 드리면, 최선의 것이 오기 때문이다. 사람 사이에서도, 서로 최선의 것을 주고 받으면 삶이 풍요로워지는 법이다. 풍요는 진실한 나눔을 통해서 온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한 가지 당부를 하면서 가르침을 맺는다.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11). 여기서 징계로 번역된 히브리어의 무싸르는 여호와께서 연단하시는 신앙의 훈련을 의미한다(생명의 삶 플러스, 181). 사랑한다면 방치할 수 없다. 가는 길이 평탄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훈련해야 한다. 인간이 가는 길은 마냥 평탄하지 만은 않다. 그리고 인간은 어떠한 길이 평탄한 길인지 잘 알지 못한다.

 

훈련과 꾸지람의 가치는 대단한 것이다. 그 가치를 모르는 자는 사랑하는 자(자녀)를 훈련하지 않고 꾸짖지 않아 그를 도탄에 빠트리지만, 그 가치를 아는 자는 사랑하는 자를 훈련하고 꾸짖는다. 사랑은 수동적이거나 소극적이지 않다. 사랑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다. 사랑은 심장을 뛰게 한다. 사랑은 뛰는 심장과 함께 행동한다. 신앙의 길은 외로운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동행하는 길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자체가 복이다.

 

권고/교훈

약속

법과 명령을 지키라 (1)

장수와 평강 (2)

인자와 진리를 붙들라 (3)

은총과 존귀 (4)

여호와를 신뢰하라 (5)

평탄한 인생 (6)

여호와를 경외하라 (7)

전인적인 건강 (8)

여호와를 공경하라 (9)

풍요 (10)

여호와의 징계와 꾸지람 (11)

(아버지) 사랑의 증거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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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11. 8. 05:23

우리는 기억으로 연결된다

(룻기 1:1-21)

 

현대인들이 앓는 병 중 가장 무서운 것 중 하나가 치매이다. 치매는 기억이 지워지는 병이다. 뇌를 다친 환자에게도 치매가 온다. 어떤 이는 기억이 사라지는 현상을 내 머리 속의 지우개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치매는 참 비참한 병이다. 자기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 존재가 존재인 이유는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존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기억할 수 있는 능력 때문이다.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슬픈 일일 뿐만 아니라 생사를 결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가장 멍청한 사람이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가장 못된 사람이 기억을 지우려 하는 사람이다.)

 

치매에 걸리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한 가지 요인만 작용하지 않는다. 그 중에서 노화가 원인이 되기도 한다. 현대인에게 치매병이 많이 발생하는 이유는 현대인의 수명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치매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는 것은 외로움이다. 현대인에게 치매병이 많이 발생하는 또다른 이유는 현대인의 외로움때문이다.

 

외로움은 자유의 가치와 거기서 파생되는 개인주의의 가치가 낳은 부작용이다. 자유와 개인주의는 나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말 좋은 가치고, 최고의 가치 중 하나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자유를 잘 이용하지 못한다. 자신의 자유를 가지고 상대방과 연결되는 데 쓰기보다는 상대방과 단절하는 데 쓴다. 그러다 보니, 외로움이 발생하고, 그 외로움은 기억을 죽인다. 기억이 죽은 존재는 더 이상 존재가 아니게 된다.

 

전도서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도서 12:1-2).

 

시편은 이런 말을 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편 1:1-2). 전도서나 시편이나 지혜서로 불리는 성경책이다. 지혜란 무엇인가?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이다. 악인들과 오만한 자들은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는다. 악인들과 오만한 자들은 하나님과 연결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의인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과 연결되기 위해서 주야로 율법(하나님의 계시)을 묵상한다.

 

룻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룻기 1:1). 여기서 그 땅은 가나안 땅이다. 가나안 땅은 그냥 땅이 아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으로 주신 땅이다. 그 땅은 그냥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땅이다. 그 땅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표지이다.

 

그런데, 나오미의 가족은 그 땅에 흉년이 들자 그 땅을 떠나 모압 땅으로 갔다. 이것은 단순한 이사가 아니다. 그들은 흉년이 일자 그것을 하나님의 부재로 인식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과의 연결을 끊고, 하나님을 떠나 모압(이방땅/이방신)으로 갔다. 그들이 그 땅을 떠났다는 것은 이처럼 단순한 이사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지운 것이다. 이것을 영적 치매라 한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니, 나오미에게 죽음과도 같은 일이 발생한다. , 존재가 망각되고, 존재가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 당시 여인은 스스로 존재를 증명하지 못하고, 남편이나 아들을 통해서 존재를 증명했다. 나오미에게는 남편이 있었고, 아들이 두 명 있었다. 그런데, 나오미는 하나님과 연결되지 못한 상태가 되니, 자신의 존재를 상실하게 된다. 나오미는 모압 땅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는다.

 

육신의 치매가 무서운 것처럼, 영적 치매는 이렇게 무서운 거다. 존재를 망각한 사람은 생존하기 힘들다. 치매가 발생한 노인은 치사율이 높다. 치매 환자에게 발생하는 또다른 어떠한 병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 대개 치매 환자는 사고로 죽는다. 집을 나섰다가 집에 돌아오지 못해 죽고, 어떠한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몰라 죽는다. 그처럼, 나오미도 이제 꼼짝 없이 죽을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런데, 나오미는 어느 날 이런 소식을 듣는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룻기 1:6). 하나님과 단절되어, 존재의 망각 속에서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살았던 나오미에게 복음이 들려졌다. 그래서 그의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나오미는 하나님을 잊고 살았지만, 그러한 나오미의 삶과는 상관 없이,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여전히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는 공동체가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공동체의 중요성을 발견한다. 인류가 생존력을 강화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공동체라는 개념 때문이다. 인간 개체는 생존에 관하여 여러가지 한계를 지니고 있다. 혼자서 오랫동안 생존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인류는 자신과 이질적인 사람(다른 성)과 결혼을 이루는 것이고, 결혼을 통해서 자식을 낳아 가족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공동체의 가장 절대적인 중요성은 공동체가 기억의 저장소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인간 개체가 모든 것을 다 기억할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은 공동체를 이루어서 자기 자신의 기억의 한계를 뛰어 넘는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렇게 생각하면 쉽다. 치매 환자가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자신의 주변에 기억을 잃지 않은 (가족) 공동체가 있기 때문이다.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아버지)가 자식을 기억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자식은 여전히 어머니(아버지)를 기억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은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아버지)를 돌본다.

 

개체 인간은 자기 초월이 일어나지 않으면 생존하기 힘들다. 자기를 초월해서 생존력을 높일 수 있는 이유는 공동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룻기서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보면, 나오미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져 있었지만, 그가 죽지 않고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에게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오미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하나님을 여전히 기억하고, 나오미가 스스로 관계를 끊어냈던 하나님과 여전히 연결되어 살아가던, ‘공동체가 존재했기 때문에, 나오미는 그 공동체에 다시 연결됨을 통해서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다.


현대인들은 (또는 현대 신앙인들은) 컴퓨터의 기억 장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면서도,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 기억 장치인지를 잘 모르는 것 같다. 자신의 작업을 철저하게 기억해 두기 위해서 좋은 기억 장치, 또는 안전한 기억 장치를 확보하는 일에 열심을 내면서, 위기의 상황에서 자신의 생명을 보존시켜 줄 기억 장치인 공동체에 너무 소홀한 것 같다.

 

우리가 배우자에게, 자식들에게 충실해야 하는 이유는 매우 실제적(practical)인 것이다. 우리가 기억을 잃어버렸을 때, 그래서 존재를 망각했을 때, 그래서 생명의 위협에 처했을 때, 우리의 생명을 구원해 줄 존재는 여전히 를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해 주는, , 내가 잃어버린 것을 여전히 간직하고 기억하는 배우자,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회 공동체를 사랑하고 교회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이유는 매우 실제적인 것이다. 우리가 영적 치매에 걸려,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리고, 그래서 존재를 망각하고 불안과 두려움에 처하게 되었을 때, 여전히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과 연결되는 일에 최선을 다 하고 있는 교회 공동체가 있기 때문에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이 약하여 영적 치매에 걸렸어도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이유는 공동체 덕분이다.

 

공동체는 개인의 초월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초월 없이 인간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초월이 없으면 우리는 개인에 파묻혀 죽는다. 초월이 일어나지 않고 개인에 파묻히는 현상이 바로 외로움이다. 그래서 현대인은 외로움 때문에 치매에 걸리고, 자기 존재의 상실로 인해 죽음에 처하게 된다. 아주 비참하게.

 

그러한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 우리는 기억으로 연결된다. 나의 기억이 흐릿하다 할지라도, 공동체 안에 있는 한, 나의 기억이 아닌, 공동체의 기억을 통해 우리는 생명을 보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공동체를 소중하게 여기자. 그 공동체가 때로는 나를 괴롭게 하는 것 같고, 나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 같지만, 그래서 귀찮고 떠나고 싶을 때가 있지만, 그래도 결정적일 때, 즉 내가 기억을 잃었을 때, 나의 생명을 보존해주고 다시 소생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공동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최선을 다해 가정 공동체와 교회 공동체를 지켜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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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10. 29. 16:40

21세기 종교개혁

(로마서 1:17, 창세기 3:1-7)

 

종교개혁 기념 주일이다. 작년에는 종교개혁 500주년이라고 온 개신교회가 각 종 기념 행사를 하고, 언론이 특집 기사를 싣는 등, 엄청난 종교개혁 붐이 불더니, 어째 일년만에 종교개혁의 열기가 어디론가 사라진 것 같다. 세상이야 어쨌든, 우리는 교회력 대로 중교개혁 기념 주일을 지키면서 우리의 삶의 자리를 돌아보려 한다.

 

500년 전 종교개혁은 사람들 사이에 일어난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노력이었다. 그 중에 핵심이 되는 세 가지 가치가 ‘sola fide(오직 믿음)’, ‘sola scriptura(오직 성경)’, 그리고 만인제사장론이였다. 이 세 개의 종교개혁 핵심 가치가 가져온 사회적 파장은 대단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오직 믿음이라는 가치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오직 믿음의 가치를 통해 개인주의가 발전했다. ‘믿음은 개인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양심의 작용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지만, 그 은혜에 응답하는 것은 개인의 양심이다. , 구원이 일방통로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상호협력이 필요한 어떤 것이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믿음은 인간을 하나님에게서 떼어놓는다. 대개 사람들은 믿음을 행위와 대립적인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구원을 논할 때, 우리는 행위로 구원 받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받는 거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지만, 믿음을 행위와 대립적으로 설명하는 이러한 구원론은 오직 믿음이라는 가치가 몰고온 사회적 파장을 잘못 파악하는 것이다.

 

오직 믿음이라는 가치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독립적인 주체의식을 갖게 하는 개인(person)의 발견에 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개인은 가족에게 예속된 존재고, 교회에 예속된 존재이고, 무엇보다 신(하나님)에게 예속된 존재였다. 어딘가에 예속된 존재에게는 자유가 없다. 종교개혁 이후부터자유는 인격(개인)을 예속시키는 어떠한 힘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게 된다. 해방되어야 할 힘에는 신(하나님)도 포함된다. 이것을 다른 말로 세속화라고 한다. 그래서 세속화라는 말이 나쁜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세속화가 없었다면, 우리는 현재 개인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살지 못할 것이다.

 

오직 믿음이라 종교개혁의 가치에서 시작된 개인의 발견은 이러한 구호로 재구성되고 있다. “내 인생은 나의 것!”, “Love yourself!” (BTS가 표방하는 가치는 결국 따져 들어가면 종교개혁 정신에서 온 것이다). 루터는 그의 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굉장히 역설적인 말을 한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지극히 자유로운 주인이며,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을 위하여 봉사하는 지극히 충성스러운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종속된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은 자유인이면서 종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존재의 동시성이라고 볼 수 있다. (루터의 신학은 동시성이다. “의인이면서 죄인”)

 

인간 존재의 동시성을 아는 일은 굉장히 중요하다. 우리는 자유를 가졌지만, 그 자유를 가지고 절대적으로 종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의인이면서 죄인인 인간 존재는 자기 자신의 자유를 깨닫는 순간 그 자유를 이웃에게 향하여 쓰지 못한다. 대개 자유는 자기 자신에게 머물고 만다. 여기서 인류 역사의 비극이 시작된다. 다른 말로 표현자면, 자유는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탐욕에 머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자유가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탐욕에 머무는 데 일조한 것이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윤을 남길 수 있는 시장이다. 시장은 크고 많을수록 좋다. 가장 좋은 시장은 인구가 많고, 그 인구 개개인 자체가 시장이 되는 것이다. 그래야 상품을 최대한 많이 팔 수 있기 때문이다. (전화기를 한 가정 당 한 대 파는 것과, 각 개개인에게 파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좋은 시장인가?)

 

루터가 발견한 오직 믿음이라는 가치는 좋은 것이다. 정말 좋은 것이다. 자유는 인간성의 핵심이다. 인간성은 곧 자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100% 주어진 자유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에 있다. 루터는 그 자유를 통해 사랑의 완성을 이루기 원했다. 그게 곧 구원이다. 그런데, 인간의 죄성은 자유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자유는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탐욕으로 나아갔다. 그래서 500년 전의 종교개혁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었지만, 500년이 지난 21세기의 종교개혁은 또다른 도전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21세기에 종교개혁을 말하는가? 500년 전 사람들에게는 자유가 없었다. 권력을 잡은 자들이 종교를 이용하여 모든 사람들의 자유를 구속했다. 교회의 허락 없이 함부로 구원 받지 못했다. (이는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40년 간의 수감생활을 마친 모건 프리먼이 그로서리에 취직해서 한 독백과 같다. “이젠 허락을 받지 않으면 오줌도 안 나온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겐 자유가 있다. 요즘 구원 받는 데 교회의 허락을 받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우리는 각자의 양심에 따라, 믿음의 고백에 따라 구원받는다고 믿는 시대에 살기 때문에, 교회 공동체가 느슨할 수밖에 없다. (여러분들의 구원에 교회가, 목사가 간섭하면,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나? 가족관계도, 인간관계도 다 마찬가지 세상이 되었다. 부모 자식 간에도 간섭하는 거 싫어한다. 젊은이와 노인 간에도 간섭하는 거 싫어한다. 자신의 인생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믿음에 따라 결정하는 게 자유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종교개혁의 오직 믿음의 가치가 인간의 내면에 자유를 가져다 주었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인간의 죄성이 그 자유를 견디질 못했다. 그래서 인간은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탐욕으로 나아갔다. 그 탐욕이 이제는 인간 스스로를 죽게 만들고 있다. 이것은 내면적인 문제라기 보다, 외면적인 문제다. 탐욕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망쳐 놓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인간의 삶의 터전인 지구 자체를 망쳐 놓았다.

 

현재 가장 중요한 화두는 생태이다. 생태파괴가 너무 심해서, 순식간에 식량부족 현상(식량문제로폭동이 일어날 거라 본다)이 오고, 자연재해의 폭발적 증가로 인해서 온 생명체가 위협을 받는다. 산불 나면 인간 피해 현황만 파악한 기사를 보지만, 산불 때문에 죽은 자연생명(식물/동물)이 얼마나 많은가. 쓰나미나, 허리케인, 태풍이 들이치면 인간 피해 현황만 파악하지만, 그것 때문에 피해를 보는 자연생명(식물/동물)은 아예 관심 밖의 일일 뿐이다. 그런데, 생태계 파괴는 결국 인간에게 화살이 되어 돌아와 인간을 죽인다.

 

얼마전 인도네시아의 술라웨시섬에 지진과 쓰나미가 강타해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런데, 학자들은 그곳에 그렇게 큰 피해가 온 이유에 대해서 사라진 맹그로브 숲을 지목했다. 동남아시아 등 전 세계 열대·아열대 해안에서 생장하는 식물 맹그로브는 뛰어난 이산화탄소 흡수 능력뿐 아니라 해안 지반을 지지하고 수질을 맑게 유지해 멸종위기종의 서식지라고 한다. 학자들에 의하면, 맹그로브 숲이 망가지지 않았다면 그 지역의 피해는 훨씬 적었을 거라고 한다.

 

그런데, 왜 그 좋은 맹그로브 숲이 사라졌을까? 가장 큰 이유는새우. 천연 영양분이 많은 맹그로브 숲은 새우 양식의 최적 장소라고 한다. 새우 중에서 특별히 블랙타이거 새우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데, 그것을 양식해서 팔면 큰 수입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여러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새우 양식을 위해서 맹그로브 숲을 마구 훼손하고 있다고 하고, 이 추세라면 머지 않아 맹그로브 숲이 완전히 사라질 거라 한다. 그런데, 맹그로브 숲을 복원하는데, 최소 226년이 걸린다고 한다.

 

새우를 먹고 싶은 인간의 탐욕과 돈을 벌고 싶은 인간의 탐욕이 만나 벌이는 생태계 파괴의 현장이다. 새우 먹고 싶은 자유와 돈 벌고 싶은 자유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 자유가 우리의 삶의 자리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게 우리 인간이다. 이 탐욕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얼마전 멋진 소식이 들려왔다. 네덜란드의 한 청년이 해양 플라스틱 쓰레기를 청소하는 장치를 발명해서, 북태평양 미국과 하와이 사이에 있는 플라스틱 쓰레기 섬에 쌓인 쓰레기를 치우기 시작했다는 소식이었다

(동영상, https://tv.kakao.com/channel/1506/cliplink/391705896)

 

21세기의 종교개혁은 더 이상 사상이나 이념, 또는 신학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그러한 것도 계속하여 정의롭게 재구성해 나가야 하지만). 21세기의 종교개혁은 실천에 관한 것이다. 탐욕이 망쳐 놓는 삶의 자리(생태) 기독교 공동체가 삶의 방식(생활 방식)을 전환함으로써 생명의 길을 열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탐욕을 줄이고, 공동의 삶(나눔의 삶)을 살까. 어떻게 하면 자연을 착취하는 삶의 형태가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살까. 어떻게 하면 거주의 변화(도시 à 마을(걸어서 모든 일을 할 수 있거나, 자전거로 해결할 수 있는 거리), 생산의 변화(대량생산 à 필요생산), 소비의 변화(대량소비 à 필요소비)를 이끌어 낼 수 있을까 고민하고 개혁하는 것이 우리에게 당면한 절실한 과제이다.

 

종교개혁이, 기독교가 인간에게 자유를 가져다 주었듯이, 이제 기독교가 21세기의 종교개혁을 통해서 새로운 공동체를 제시하고 우리의 삶의 터전(생태)을 지키는 데 공헌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교회 공동체(기독교)의 존재 이유는 점점 희박해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기도의 정의도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기도는 말이 아니라 실천이다. 왜냐하면, 행동을 절실하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정적인 신앙에서 동적인 신앙으로의 변화 필요하다. 주님, ‘환경파괴를 막아주세요!’라고 하는 게 기도가 아니라, 타이거새우를 안 먹는 게(또는 덜 먹는게) 기도 자체다. ‘주님, 환경파괴를 막아주세요!’라고 하는 게 기도가 아니라, 플라스틱 소비량을 조금씩 줄여 나가는 게 기도 자체다.

 

우리는 이제, 로마서에서 창세기의 신앙, 로마서의 종교개혁에서 창세기의 종교개혁으로 나아가야 한다. 너무도 중요한 일이지만, 쉬운 일도 아니라, 일일이 다 설명하고 강조할 수 없어, 그 모든 간절한 마음을 담아 시 한편으로 말씀을 마치려고 한다.

 

봄 셔츠

(이원)

 

당신의 봄 셔츠를 구하고 싶습니다

사랑을 만져 본 팔이 들어갈 곳이 두 군데

맹목이 나타날 곳이 한 군데 뚫려 있어야 하고

색은 푸르고

일정하지 않은 바느질 자국이 그대로 보이면 했습니다

 

봄 셔츠를 구하고 싶었습니다

차돌을 닮은 첫 번째 단추와

새알을 닮은 두 번째 단추와

위장을 모르는 세 번째 단추와

전력(全力)만 아는 네 번째 단추와

잘 돌아왔다는 인사의 다섯 번째 단추가

 

눈동자처럼 끼워지는 셔츠

 

들어갈 구멍이 보이지 않아도

사명감으로 달린 여섯 번째 단추가

심장과 겹쳐지는 곳에 주머니가

숨어서 빛나고 있는

셔츠를 입고

 

사라진 새들의 흔적인 하늘

아래에서

셔츠 밖으로 나온

당신의 손은 무엇을 할 수 있나요

 

목에서 얼굴이 뻗어나가며,

보라는 것입니다

 

굳지 않은 피로 만든 단추.

우리의 셔츠 가장 안쪽에 달려 있는

 

사랑하는 여러분, “사라진 새들의 흔적인 하늘 아래에서 셔츠 밖으로 나온 우리의 손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고민하면서 세상을 개혁해 나가는 주님의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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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10. 10. 04:22

사탄의 질문

(욥기 1:1-12)

 

우리는 기본적으로 사탄이라는 말을 들으면, ‘나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은 신약성서 이후의 근대적 개념이다. 구약성서 시대, 또는 구약성서에 나타난 사탄의 개념은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차이가 있다.

 

욥기서에서도 사탄은 어떠한 역할을 감당하는 천상적 인물로 묘사된다. 구약성서에서 사탄은 나쁜 일을 저지르는 못된 존재, 또는 나쁜 짓을 저지르게 하는 배후의 힘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불충한 존재를 찾아내어 기소하는 존재이다. 요즘으로 따지면, 검사(prosecutor)이다. (아주 헷갈리는 질문: 검사는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인가,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인가? 하늘 법정에서 검사와 같은 일을 하는 사탄은 좋은 일을 하는 존재인가, 나쁜 일을 하는 존재인가?)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사탄에 대한 개념을 통해서도 사탄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천상의 법정에서 사탄이 제기하는 질문과 사탄 같은 일(고통)이 제기하는 질문은 똑같다. 사탄(또는 사탄 같은 일(고통))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가? 까닭 없이 사랑할 수 있는가?” 욥기서에서 사탄이 던지는 질문은 이렇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Does Job fear God for nothing?”(9).

 

욥은 왜 하나님을 경외할까? 하나님께 받은 복이 넘치도록 많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할까? 하나님께 받은 복이 하나도 없다면, 욥은 하나님을 경외할까? 이러한 질문은 인생에 있어 가장 깊고 중요한 질문 중 하나이다. 이러한 질문과 함께, 하늘의 법정은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일을 결정한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할 만한(찬양할 만한, 감사할 만한) 일을 하나씩 제거한다.

 

우선 이것부터 이야기하고 싶다. 이러한 일은 절대로 우리 인생 가운데 일어나면 안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욥기서에서 벌어지는 방식으로 우리를 시험하지 않으신다. 욥기서는 실제 사건을 다루는 것이라기 보다는 어떠한 현실을 말하고 있는 문학이다. 이것을 헷갈리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이상한 고정관념을 가지게 된다.

 

그렇다면, 욥기서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어떠한 삶의 통찰을 얻을 수 있을까? 욥기서는 구약성서 시대에 편만했던 (크게) 두 가지 사유방식을 전하고 있다. 첫째는 소유의 개념이다. 지금은 각자의 인격에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자식이 부모의 소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욥기서에 드러난 세상은 자식을 소유로 생각한다. 그래서 하늘법정은 욥을 테스트하기 위하여 자녀와 재산을 몰수한다. 자녀가 욥의 재산인 것처럼 묘사된다. 요즘 시대에는 통용하는 개념이 아니다.

 

둘째, 욥기서에서 드러나고 있는 사유방식은 ‘retribution theology(권선징악 신학)’이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행위에 따라 보상하신다는 개념이다. 악인은 벌을 받고, 의인은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특별히 욥기서는 이 개념에 도전하고 있다. 욥의 비극적인 소식을 듣고 욥을 위로하러 찾아온 욥의 세 친구(엘리비스, 빌닷, 소발)‘retribution theology’를 지닌 전형적인 인물이다. 욥기서는 욥과 이 친구 세명의 대결구조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사탄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우리는 왜 하나님을 경외하는가? 우리는 왜 이 사람을 사랑하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는 대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개 그러한 신앙으로 충만하다. 우리는 늘 받은 복을 세어본다. 그 복을 세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한다. 우리가 이 사람을 사랑하는 이유는 이 사람을 사랑할 만한 이유가 이 사람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유 있는 사랑, 그것을 우리는 에로스라고 부른다.

 

그러나 욥기서의 말씀은 그러한 경외, 그러한 사랑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경외와 사랑의 의미를 전복시킨다. 사탄의 질문은 매우 깊다.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어? 까닭 없이 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라고 묻는다. 우리는 이 질문을 받아 들고, 우리의 신앙, 우리의 사랑, 우리의 인생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나는 왜 하나님을 경외하는가? 나는 왜 이 사람을 사랑하는가? 경외와 사랑의 이유(조건)을 찾으라는 말이 아니라, ‘사랑(경외)’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사색을 해보라는 뜻이다.

 

우리는 뭔가 결핍을 안고 있는 존재를 만나면 불편해 한다. 뭔가 결핍을 안고 있으면 우리는 그를 사랑하지 못한다. 그러면 이렇게 질문해 보자. 그 관계 속에 사랑이 발생하지 못하는 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뭔가 결핍을 안고 있는 그 존재의 잘못인가? 아니면, 결핍을 안고 있는 존재를 사랑하지 못하는 나의 잘못인가? 뭔가 결핍이 있어서 그 존재가 싫은 것은 그 결핍을 안은 존재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를 사랑하지 못하는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 우리가 결핍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로 결핍인가? (장애가 결핍인가? 장애우 시설이 들어서면 땅값/집값이 떨어진다고 그 시설이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결핍을 지닌 존재가 아닌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왜 그러한 고백을 하는가? 메시아에 대한 진술을 하고 있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보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이사야 532). 우리는 정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 메시아를 사랑하는가? (흠모할 만한 것이 없어서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것이다.)

 

우리가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은 우리의 인생이 흠모할 만한 것이 없음에도 그 존재 자체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랑의 능력을 회복해 가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 인생에 있어, 나는 이것을 늙어감의 미학이라고 생각한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늙어간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늙어간다는 것은 삶의 실존에서 진정한 사랑의 능력을 회복해 가는 영적인 여정이다.

 

나이 들어가면 각종 고운 것, 내 마음을 사로잡던 것이 하나씩 사라진다. 그러한 현실을 견디고 받아들이고, 그러한 현실 속에서 여전히 서로의 품위와 인간성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고운 것, 마음을 사로잡는 것을 유지하기 위하여 불로초를 먹고, 최신 테크놀러지의 도움을 받아 매력을 발산하는 것? 아니다. ‘까닭이 없어도 사랑하는 능력을 늘려 나가는 것이다. (100세를 사신 김형석 교수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이를 먹으면 부부간에 젊을 때의 에로틱한 사랑은 없어지고, 인류애만 남는다.)

 

우린 왜 하나님을 경외(사랑)하는가? 우린 왜 이 사람(이웃)을 사랑하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그리고 서로 물어보라. 하나님을 경외(사랑)하는 이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에 대하여 첫째, 둘째, 셋째하면서 명확한 답을 내리기 보다, 그윽한 눈길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오히려 더 명확한 답이 아닐까?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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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10. 4. 13:51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시편 75:1-10)

 

역대상 15장은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이야기를 전한다. 그 일을 진행하면서 찬양대를 이끈 세 명의 인물이 있는데, 헤만, 아삽, 에단이 그들이다. 교회 전통은 시편에 나오는 아삽의 시’ (시편 50, 시편 73-83)를 지은 자가, 바로 다윗과 함께 언약궤를 옮기는 일에 헌신했던 아삽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의 특징은 감사와 예언 신탁이 어우러진 혼합 형태의 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를 통해 우리가 나누어야 할 말씀은 그들이 감사하는 이유가 무엇이고, 그들이 받은 신탁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것이다.

 

우선, 이 시편은 감사로 시작한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1a). ‘감사하다라는 단어가 두 번 반복된다. ‘감사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야다인데, 문법적으로 사역 능동(히필) 완료형으로 되어 있다. , 시인은 하나님께 감사하고자 하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표현하고 있다. 마지못해, 의무적으로 감사하는 것과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는 간절한 감사는 그 의미가 다르다.

 

왜 시인은 하나님께 그렇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것일까? 감사의 이유가 무엇일까? 시인은 두 가지에 대하여 감사한다. 첫째는 주의 이름이 가깝기 때문이고, 둘째는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을 전파하기 때문이다.

 

우선, ‘주의 이름이 가깝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 알아보자. 이름은 존재를 대변한다. 사람은 이름이 없으면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시고 아담을 통하여 온갖 창조물의 이름을 정하게 하신다. 이것은 아담에게 단순히 작명소를 차려서 이름을 지어주라는 뜻이 아니다. 아담에게 이름을 짓게 하신 것은 아담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물에 대한 인식을 갖게 만드신 것이다. 이름을 통하여 인식하지 못하면, 사람은 그것에 대하여 없는 것 취급하는 불의를 저지르게 된다.

 

인식한다는 것은 상대방(사물)을 마음에 들인다는 것인데, 사람은 일단 마음에 들어온 것을 함부로 하지 못한다. 함부로 한다는 것은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뜻이고, 함부로 하기 위해 사람은 때로 상대방(사물)을 마음에 일부러 들이지 않는다. 이것은 큰 죄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통해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셨는데, 사람은 상대방(사물)에 대하여 (하나도 빠짐 없이) 이름을 부르며 그 상대방을 마음에 들여야 한다.

 

이름은 존재를 대변하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성전에 두시겠다고 말씀하셨다. , 성전에서 드리는 제의(제사, 예배)를 통하여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마음 속에 들이게 된다. 하나님은 먼 곳에 계신 분이 아니라, 성전에 계신 분이고,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때, 즉 하나님의 이름을 대면할 때,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자신의 가장 가까운 곳, 마음에 모시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가깝게 존재하시는 분이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둘째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이한 일들을 증언하는 것에 대한 감사를 살펴보자. “신학이란 하나님의 자기계시 속에 담긴 것들을 사후 숙고하는과정이다”(알리스터 맥그래스, <신학이란 무엇인가>, 610). 예배는 하나님이 자기 계시를 통해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구원의 일들에 대하여 놀라움을 표현하는 것이다. 시인은 정확히 그러한 현상을 표현하고 있다. ‘기이한 일이란 사람의 이성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뜻한다. (그렇다고 이성을 무시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일은 이성으로 다 파악할 수 없다. 그래서 이성을 가진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다른 말로, 신앙의 신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루신 신앙의 신비를 보면서, 감사 외에 다른 것을 할 수 없다.

 

종합해 보자면, 시인이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는 첫째, 하나님을 가까이서 만날 수 있다는 것과 둘째,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행하신 신앙의 신비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사모하는 존재가 가까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오늘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일하고 계신데, 그 구원의 일, 신앙의 신비를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일들을 놓아두고 감사하지 않을 수 있는가.

 

2절에서부터 이제 시의 분위기는 예언 신탁으로 바뀐다. 신탁의 내용은 이것이다. “내가 시간을 정해 바르게 심판하리라!”(우리말 성경). 그러면서 하나님은 자신이 심판할 수 있는 자격을 말씀하시는데, 하나님이 심판하실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땅의 기초를 세우신 분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심판주도 되신다.

 

4절과 5절은 심판의 대상에 대한 신탁이다. 4절과 5절에 등장하는 낱말을 보면, ‘오만한 자들’, 악인들’, ‘’, ‘너희 뿔’, ‘교만한 목등이 있다. 여기서 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의 카렌인데, ‘, 능력, 권세, 위엄을 상징한다. 그래서 뿔을 들다라는 말은 교만의 시적 표현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와 오만한 자를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신탁이 선포되었다 하더라도, 그 신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하나님의 신탁이 선포되었을 때 교만하고 오만한 자들은 하나님의 신탁을 무시하겠지만, 어떠한 자들은 하나님의 신탁에 대하여 올바로 반응하며 그 신탁을 받아들인다. 성경은 그러한 자들을 일컬어 의인이라고 한다.

 

6-8절은 선포된 하나님의 신탁에 대한 시인의 반응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신탁을 경홀히 여기지 않고 준엄하게 받아들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신앙 고백한다.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7). 이것은 굉장한 고백이다. 그래서 이것은 의인의 고백이라 부를 수 있다. 이러한 고백을 하는 것이 왜 중요하고, 왜 이러한 고백을 하는 자들을 의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위에서 심판의 신탁이 선포된 대상은 교만한 자와 오만한 자라고 했다. ‘교만한 자와 오만한 자의 특징은 스스로 자기를 높인다는 데 있다. 그들은 자기를 스스로 높이고, 자기 보다 낮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무시하고 경멸한다. 그러한 일을 시인은 뿔을 든다라고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성격은 누군가를 낮추시고 누군가를 높이시는 데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서술이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의 높고 낮음에 대한 서술이 아니다. 우리는 이것을 굉장히 헷갈려 하고 오해한다. 누군가를 낮추고, 누군가를 높이는 일에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누군가를 높이는 일과 누군가를 낮추는 일은 예정과도 같다. , 우리가 존재하기도 전에 하나님은 누군가를 높이고 누군가를 낮추는 일을 정해 놓으셨다는 뜻이다.

 

시인이 높임낮춤의 근원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이유는 누군가 높아지고 누군가 낮아지는 일에 인간의 의, 또는 인간의 공덕이 들어설 자리를 철저하게 차단하기 위함이다. 누군가 높아졌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무엇인가를 잘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다. 누군가 낮아졌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무엇인가를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다. (높아지면 뭐하나, 타락해서 나쁜 일만 하게 되지, 낮아지는 게 오히려 복이다.)

 

그러므로, 높아진 사람은 자신의 높아짐을 자랑할 필요도 자랑할 수도 없고, 자신의 높아짐을 생각하며 자신보다 낮은 사람을 무시하거나 경멸할 수 있는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높아진 사람은 그저 자신의 높아짐에 대하여 신앙의 신비로 여기며 감사할 뿐이다.

 

또한 낮아진 사람은 자신의 낮아짐을 자신의 탓인 양 자책할 필요가 없고, 자신의 낮아짐을 생각하며 자신보다 높은 사람에게 굽실거릴 이유가 없다. 낮아진 사람은 그저 자신의 낮아짐에 대하여 신앙의 신비로 여기며 감사할 뿐이다. (욥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그가 그렇게 낮아진 것은 죄 때문이라고 친구들을 욥을 다그치지만, 욥은 끝까지, 자신이 낮아진 이유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욥은 왜 그러한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 나중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자신의 주권을 말씀하실 뿐이다.)

 

교만과 오만은 높아진 자나 낮아진 자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높아진 자가 자기 자신의 의로움 때문에 높아진 것이라 생각하며 자기 스스로를 높이면 그는 교만하고 오만한 자인 것이다. 그러한 자는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즉 그러한 생각은 옳지 못하다는 뜻이다. 낮아진 자가 자기 자신의 죄악 때문에 낮아진 것이 생각하며 자기 스스로 자책에 빠지고 우울해 하면 그는 교만하고 오만한 자인 것이다. 그러한 자는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즉 그러한 생각은 옳지 못하다는 뜻이다.

 

이러한 심판은 매우 준엄한 것이다. 우리는 올바르지 못한 생각으로 인해 자기 자신을 오만하고 교만한 자로 만들면 안 된다. 그래서, 8절에서 시인은 말하기를 여호와의 손에는 한 잔이 있는데 그 잔에는 여러가지가 섞여 거품이 나는 포도주가 가득 담겨 있다고 고백한다. 구약성경에서 은 하나님의 진노를 표현할 때 쓰이는 말이다. 높아짐과 낮아짐을 스스로 정하는 교만하고 오만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 진노가 반드시 임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누가 심판하시는가?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 하나님이 누구는 낮추시고 누구는 높이신다. ,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뿔을 높이 들지 말아야 한다. 우리 뿔(, 능력, 권세, 위엄)을 들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뿔이 들렸다고 스스로 교만하거나 오만하지 말아야 하고, 우리의 뿔을 들어 주신 하나님께 오로지 감사해야 한다. 또한, 뿔이 들리지 않았다고 스스로 좌절하여 교만하거나 오만하지 말아야 하고, 우리 뿔을 들어주지 않으신 하나님께 오로지 감사해야 한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낮아진 것인지 높아진 것인지 판단할 능력이 없다. 우리가 보기에 낮아진 것 같으나 실은 높아진 것일 수 있고, 우리가 보기에 높아진 것 같으니 실은 낮아진 것일 수 있다. 낮아짐과 높아짐은 오직 하나님만 판단하실 수 있고,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높아짐과 낮아짐에 마음을 두지 말고, 오직,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 마음을 두어야 한다. 그게 의인이다. 그런 자의 뿔은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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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10. 1. 12:11

혀의 올바른 사용

(야고보서 5:13-20)


야고보의 이름은 구약의 야곱에서 왔다. 야고보는 야곱의 헬라어식 표기이다.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 중 가정 먼저 순교한 사람은 야고보이다(12:2). 이 일은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해서 AD 44년경 일어났다.

 

성경에는 크게 네 명의 야고보가 나온다. 한 명은 방금 위에서 언급한, 최초의 순교자였던,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10:2)이고, 또다른 12 제자 중 한 명인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10:3)이다. 그리고, 마리아와 글로바의 아들들 가운데 손아래인 야보고(15:40, 16:1, 19:25)과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6:3)이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의 형제는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 이렇게 네 명이었다(6:3). 그렇다면 성경의 한 책인 야고보서는 누가 쓴 것일까? 교회 전통은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쓴 것이라고 본다. 야고보는 야고보서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자기 소개에 군더더기가 없다. 이 말은 그 당시 교회 공동체는 야고보가 누구인지 잘 알았고, 그의 권위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울은 자기 자신을 장황하게 소개할 때가 많다. 왜냐하면,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고,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가장 큰 영향력 있는 지도자는 누구였을까? 우리는 흔히 베드로나 바울이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지도자였을 거라고 추측하지만, 실제로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지도자는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였다. 그 정황은 사도행전 15장에 잘 드러나 있다. 이방인 기독교인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의 중요한 의제를 놓고 토론한 후, 그 결론을 말하고 선포하는 과정에서 야고보의 역할이 그곳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야고보서는 굉장히 율법적(실천적)이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에서 야고보서 만큼 수난을 많이 겪은 성경을 찾아보기도 힘들다. 특별히 마르틴 루터의 야고보서에 대한 공격은 유명하다. 루터는 야고보서를 일컬어, ‘지푸라기 서신이라 부르며, ‘성경의 정경에서 빼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야고보서는 그만큼 실제적인 실천 지침서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비하한 루터는 야고보서를 오해한 것이고,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약간 모자란 듯 보인다. (이 주제는 복잡한 논의이니, 여기서는 생략한다.)

 

야고보서의 핵심구절은 이것이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1:22-24) 그러면서, 야고보서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2:17).

 

야고보서의 신학(또는 철학)은 마태복음의 신학(또는 철학)과 같다. 마태복음의 핵심구절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0-21).

 

여기서 나더러 주여 주여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믿음을 가리킨다. 그런데, 구원 받은 자의 삶은 그것으로 부족하다고 한다. 믿음은 곧 실천을 동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믿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은 굉장히 준엄한 선포이다. 우리는 성경의 이러한 가르침, 사도의 이러한 가르침을 너무도 쉽게 잃어버리고 산다.

 

야고보서에서 가장 큰 지면을 할애하여 서술하는 주제는 /에 관한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을 예쁘게 하는 일은 단순한 교양이 아니다. ‘혀의 올바른 사용은 교양이 아니라, 복음을 통하여,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피조물(새 인류 / 그리스도의 후예)이 된 결과이다. 이렇게 말해보자.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메시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 즉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인류라는 것을 어떻게 나타나 보일 수 있을까? 야고보서는 단연 혀의 올바른 사용에 있다고 말한다.

 

야고보서는 그것을 3장에서 논하고 있는데, 몸 중에서 혀는 작은 지체이지만 그것이 잘못 쓰일 경우 어떠한 파괴력을 지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3:6). 우리 몸에 있는 것 중에, 우리를 더럽힐 수 있는 유일한 것이 혀이다. 혀는 공든 탑을 무너지게 할 뿐 아니라, 혀는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릴 수 있다. 혀는 가히, 현대 무기의 최고라 일컬는 수소폭탄과 같다.

 

또한, 야고보서는 우리의 몸 전체 중에 유일하게 길들일 수 없는 지체가 라고 말한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3:8).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혀의 올바른 사용에 대하여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례로, 우리가 예수를 주님으로, 우리의 구세주로 고백한 뒤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힘써 살펴야 할 것은 무엇일까? 교회? 이웃? 발걸음? 손길? 표정? 아니다. 바로 혀이다.

 

우리가 혀를 어디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가? 야고보서는 이렇게 말한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4:11). 우리는 남을 비방하고 판단하는데 혀를 가장 많이 쓴다. (기승전,남편비방 / 기승전,아내비방/ 기승전,자식비방/ 기승전,이웃비방)

 

그렇다면,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데 혀를 쓰는 것이 왜 잘못일까? 기독교인은 어떠한 일을 상식적으로, 또는 도덕적으로 생각하는 데서만 그치면 안 된다. 기독교인은 어떠한 일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 어떠한 일이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사고하고 행동할 줄 알아야 한다.

 

야고보서도 혀의 올바른 사용에 대하여 상식적인, 또는 도덕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야고보서는 혀의 올바른 사용을 신학적으로 말한다.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4:11b-12).

 

야고보서는 선포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다! 그 한 분은 누구인가? 하나님! , 야고보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혀를 사용할 때, 남을 판단하고 비방하는 방식으로 사용하면, 그것을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교만 또는 죄악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나의 비방의 대상이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비방하는 나 자신이 심판을 받고 만다. 이런 비극이 어디에 있나.

 

그렇다면, 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우리가 오늘 읽은 말씀이 바로 그것에 대한 것이다. 혀의 올바른 사용은 이렇다.

1)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고난 당할 때, 우리는 대개 혀를 가지고 기도하지 않는다. 불평한다. 고난 당하는 자를 볼 때, 우리는 대개 혀를 가지고 기도해 주지 않는다. ‘쌤통이다하며 고소해 한다.

2) “너희 중에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즐거운 일이 있을 때, 우리는 대개 혀를 가지고 찬송하지 않는다. 자랑한다. 즐거워 하는 자를 볼 때, 우리는 대개 혀를 가지고 시기 질투한다.

3)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병 들었을 때, 우리는 대개 혀를 가지고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지 않는다. 쉬쉬한다. 병든 자를 볼 때, 우리는 대개 혀를 가지 기도하지 않는다. 혀를 무관심하게 놓아둔다.

4)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우리는 우리의 혀로 서로의 죄를 고백하는 데 서툴다. 우리는 우리의 혀를 가지고 죄에 대하여 변명하기에 바쁘다.

 

이것을 종합해 보면, 혀의 올바른 사용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기도, 찬송, 죄의 고백이다. 야고보서는 혀가 올바로 사용될 때 나타나는 능력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라”(16). 여기서 의인은 혀를 올바로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도 있다. 야고보서는 엘리야를 예로 들어 그 능력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17). 이것은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야고보서는 엘리야가 매우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닌, 우리와 다른 별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연약하고 두려워하고 자기 목숨을 위해 도망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혀를 올바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혀의 올바른 사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성경책은 시편이다. 시편은 탄식시로 가득 차 있다. 다윗은 살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엄청난 죽음의 위협과 비방, 억울한 일을 당했다. 그러나, 그는 그 사람들에 대하여 자신의 혀를 가지고 비방과 판단을 하지 않는다. 다윗은 주님 앞에 나아와 자신의 혀를 가지고 그 상황을 탄식한다. , 그는 힘들고 어려울 때, 억울하고 속상할 때, 자신을 힘들고 어렵게 만든 사람, 억울하고 속상하게 만든 사람을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 재판관이 되어 비방하고 판단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혀를 올바로 사용하여 하나님 앞에 엎드려 탄식의 기도를 드렸다. 그렇게 올바르게 혀를 사용할 줄 알았던 다윗에게 내린 하나님의 복은 우리 모두가 다 잘 아는 바이다.

 

혀의 올바른 사용은 교양이 아니다. 교양 있는 사람처럼 혀를 사용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혀를 사용하라. 우리의 혀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그리스도인은 혀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데쓰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혀를 기도하고 찬송하고 죄를 고백하는 데 사용한다. 그리고, 그럴 때, 혀는 단순한 몸의 한 지체에 머물지 않고, 하늘의 보좌를 움직이는 엄청난 위력을 지닌, 거룩한 능력이 된다.

 

비를 못 오게도 하고, 비를 내리게도 할 만한, 가공할 능력의 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사는지 생각해 보자. 사도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가 혀를 올바로 사용한다면, 우리도 엘리야처럼 큰 능력을 행하는 주님의 종이 될 것이다. 우리 몸에 그러한 능력을 지는 지체가 있다는 것이 너무 신기하지 않는가? 그 신비로운 능력의 세계를 일상에 경험하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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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9. 22. 13:33

칭찬, 책망, 회복

(계 2:1-7)

 

에베소 교회가 어떠한 교회였는지, 그 교회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다. 성경에 세 군데 정도에서 에베소 교회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다. 우선 에베소서, 그리고 사도행전 19, 20,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계시록의 말씀이다.

 

에베소 교회는 소아시아를 대표하는 7개 교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였을 것이다. 소아시아 지역에서 에베소가 가장 큰 도시였고, 인구도 가장 많았으며, 가장 활발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대개 대도시의 교회들이 큰 역할을 감당한다. 에베소 교회도 그 당시 그러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도시의 큰 교회는 그만큼 시련도 많다. 여러 종류의 사람과 여러 사건이 발생하기 때문에,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속담이 있듯이, 교회가 큰 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도 많았을 것이다. 그 중에서, 오늘 말씀을 토대로 추측해 보건데,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다.

 

오늘 말씀은 이 사건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나라 번역 성경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헬라어 원어를 보면, 2절과 3절은 평행관계로 되어 있다. ‘악한 자들, 곧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처리하기 위해 에베소 교회는 참고(인내), 견디고(용납하지 않았고), 많은 수고에도 불구하고 피곤해 하지 않았다(수고).

 

네 행위의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용납하지 아니한 것

악한 자들,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처리한 일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교회에 어떠한 일이 발생하면, 교회는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수고와 인내와 견디는 일을 한다. 여기서 게으르지 않다라는 말의 의미가 참 좋다. 이는 열심히 수고함에도 불구하고 피곤해 하지 않다는 뜻이다. 우리는 어떠한 일을 하면서 열심히 하다가 곧 그 일에 대하여 피곤해 할 때가 많다. 대개, ‘그만 좀 해라또는 그만 좀 하자라는 말을 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열심히 수고함에도 피곤해 하지 않는 것이다. 이 말씀을 대하면서, 많은 반성을 하게 된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칭찬한다. 어떠한 일이 발생했는데,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 수고했고, 인내했고,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수고했음에도, 그것을 피곤해 하지 않았다. 그런데, 주님은 이러한 칭찬을 뒤로하고, 에베소 교회에 책망할 것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책망은 이것이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3절 후반부).

 

여기서, ‘처음 사랑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개 우리는 처음 사랑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이라고 본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시며, 에베소 교회가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 즉 믿음이 약해졌다는 것을 지적하신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해석도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처음 사랑은 그들이 그리스도께 헌신할 때의 내적 신앙심을 가리키는 것이라기 보다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서로를 향해 가졌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물론, 그들은 여전히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잘 세워 나가고 있다. 그러나, ‘처음(프로스)’이라는 말은, 그들이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고 있지만, 질과 정도에서 처음 사랑을 따르지 못하는 것을 암시한다. (생명의 삶 Plus, 2010, 11월호, 172).

 

이들은 왜 서로에 대한 사랑이 식었을까? 아마도, 갈등을 겪으면서 서로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 같다. 아무래도, 사람은 어느 문제로 갈등을 겪으면 관계가 소원해질 수밖에 없다. 분명, 자칭 사도라 하는 자를 추종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그를 악한 자라고 분별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어떠한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바로 그것이 에베소 교회의 문제점이 되었다. 칭찬 받을 만한 교회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자칭 사도라는 악한 자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생긴 갈등 때문에 교회가 어려움에 처해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참 신비로운 것이다. 교회의 문제는 완전히 예상 못한 곳에서 터진다. ‘자칭 사도가 원래는 문제인데, 교회를 힘들게 한 것은 자칭 사도가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하면서 겪은 갈등으로 인한 관계의 소원함이다.

 

자칭 사도라하는 악한 자를 처리하는 문제는 굉장히 힘든 문제다. 에베소 교회는 그 문제를 인내와 수고를 통해서 잘 해결했다. 그런데, 그들에게 그 문제를 해결하면서 더 어려운 문제가 발생했다. 관계의 문제다. 이러한 문제는 우리가 여전히 우리의 현실 신앙생활에서 겪고 있는 문제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5절을 보자.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에베소 교회가 당면한, 관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세 단계가 소개되고 있다. 첫째는,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하는 것이다. ,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다. 대가 문제가 발생하면 우리는 상대방을 비난하는 데는 열을 올리는데,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데는 시간을 보내지 못한다. 관계의 문제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 무엇이 상대방과의 관계를 소원하게 했나등을 살펴보아야 한다.

 

둘째는, ‘회개하는 것이다. 어떤 일(또는 문제를 해결하는데)을 하는 데 있어서, 사람들은 흔히 수고와 인내를 잘 한다. 그런데, 오히려 회개하는 일을 잘 못한다. 이것도 이런 뜻이다. ‘자칭 사도라 하는 악한 자를 비난하는 데는 수고와 인내를 아끼지 않을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의 악한 모습을 회개하는 일에 사람들은 보통 매우 인색하다.

 

셋째는, ‘처음 행위를 가지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오른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대라, 소송을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 하거든 겉옷까지 내어주어라,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가 주어라의 말씀의 실천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까지는 하지만, 이 마지막 단계는 때려 죽여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주님은 지금 에베소 교회에게 이 어려운 일을 명령하고 계신다.

 

다른 이에 대하여 비난하고 책망하는 일에 대비하여,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일, 회개하는 일, 그리고 처음 사랑한 것처럼 다시 사랑하는 일은 매우, 정말로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지금 주님께서는 이 어려운 일을 에베소 교회에 명령하고 계신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5절 후반부).

 

관계의 회복이 안 되면, 교회를 없애 버리겠다는 말씀이다. 굉장한 긴장요소이다. 사실, 오늘 말씀에서 가장 귀담아 들어야 하는 말씀은 이 말씀이다.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하여 가장 긴장해야 한다. 그런데, 대개 사람들은 이러한 말씀을 들으면 긴장하지 않는다. 그냥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래서,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춘 교회가 한 둘이 아니다.

 

우리는 교회가 없어지는 것을 별로 애통해 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교회가 없어지면, 다른 교회 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 하나 하나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절실한 생각은 안 한다. 우리는 교회가 없어질지 언정, 나 자신을 돌아보는 일, 회개하는 일, 특별히,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사실, 이것이 가장 큰 교만이고 불신앙이다. ?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자기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처음 사랑,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처음 사랑을 회복하셨다.

 

내 몸이 지금 암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데, 그 암을 그냥 놓아둘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리고, 그 암은 용기와 겸손만 있으면 없앨 수 있는데, 용기를 못 낼 사람, 자기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놓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는 말씀에 긴장하지 않고, 그 말씀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 말씀을 돌이키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지 않기 때문에, 이 땅의 수많은 교회들이 어려움을 겪다가 그 자취를 감추는 것이다. (주님의 몸인 교회가 어떻게 되든, 자기 감정이 가장 중요한 사람 때문에 주님의 몸된 교회는 시련을 겪다가 사라진다.)

 

주님은 우리를 칭찬하시고, 책망도 하시지만, 주님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회복이다.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얼마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나의 자존심이 더 귀한가, 아니면, 주님의 명령이 더 귀한가. 나의 자존심을 지키면, 나는 자존심을 지켰을 지 몰라도, 교회 공동체가 무너지고, 그리고, 그 자존심이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오늘 말씀대로,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나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고, 처음 사랑을 회복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살리면, 주님은 이러한 약속을 주신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7).

 

무엇이 진짜 우리에게 유익인가 생각해 보자.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신앙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십자가 위에 자기 자신을 내어줌으로 하나님과의 사랑을 회복시킨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고, 처음 사랑을 회복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주님의 사랑이 살아 있는 교회, 그 사랑이 충만한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한다. 이것은 복음을 믿는 신앙의 일이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한 믿음의 일이요,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는 구원의 일이다. 날마다 이러한 결단이, 교회를 살리는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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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9. 17. 13:55

우주적 비전

(에베소서 1:3-14)

 

2017년 아마존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신경끄기의 기술(The Subtle Art of Not Giving a F*ck: A Counterintuitive Approach to Living a Good Life)이라는 책이고 한다. 왜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을까? 그것은 사람들이 신경끄기를 못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재밌는 문장이 이 책에 나온다. “모든 자기계발서는 쓰레기다.” 그러면서 저자는 이 책이 자기계발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재미있는 모순이 숨어 있다.

 

기원전 6세기경 살았던 철학자 에피메니데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 문제는 에피메니데스도 크레타인이었다는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초대교회 사역자는? 언젠가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다. 기억하시는 분? 크레타 섬에서 목회한 훌륭한 목회자: 디도)

 

저자는 이 책이 다른 자기계발서와 다르다는 것을 어필하지만, 결국 이 책도 자기계발서 중 하나일 뿐이다. 제목을 보면 세상만사에 대해 신경을 꺼야 할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신경 쓸 대상을 선별해야 한다는 것이 주제다.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정말 중요한 가치에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신경 써야할 좋은 가치를 지닌 일과 신경을 꺼야 할 나쁜 가치의 기준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좋은 가치는 1) 현실에 바탕을 두고 2) 사회에 이로우며 3) 직접 통제할 수 있다.

나쁜 가치는 1) 미신적이고 2) 사회에 해로우며 3) 직접 통제할 수 없다. (109)

 

신경끄기의 기술이 인생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저자는 두 남자의 대조적인 삶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1) 우선 그는 데이브 머스테인의 인생을 소개한다. 그는 락밴드에서 퇴출당하여, 분노에 휩싸이게 되는데, 락밴드에서 퇴출당한 후 스스로 새로운 밴드를 결성한다. 그가 새로 만든 락밴드는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메가데스(Megadeth)라는 밴드였다. 그의 음반은 세계적으로 25백만장이나 팔렸고, 그는 역사상 가장 성공한 기타리스트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평생 불행하다고 느꼈다. 그를 퇴출한 락밴드는 메탈리카였다. 이 락밴드는 전세계적으로 18천만장의 음반을 판매한 전설적인 락밴드이다. 데이브 머스테인은 2003년 인터뷰에서 자신을 실패자라고 생각하며, 엄청난 성공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메탈리카에서 쫓겨난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2) 1962, 잉글랜드 리버풀에서 비슷한 일이 오래전에 있었다. 세계적인 music band, 비틀즈에서 있었던 일이다.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이 중에 링고 스타가 드러머다. 그런데, 원래 비틀즈가 공식적으로 결성되기 전, 그 그룹의 드러머는 피트 베스트였다. 그러나, 베스트는 위의 머스테인처럼 밴드에서 퇴출당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베스트는 우울증에 걸려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고, 머스테인처럼 성공적인 밴드를 만들지도 못했다. 그러나, 몇 년 후, 인터뷰를 통해서 베스트는 머스테인과 사뭇 다른 이야기를 한다.

자신이 만약 계속 비틀즈의 멤버였다면, 지금처럼 행복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한다. 비틀즈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으며, 그 과정에서 돈이나 명성보다 사랑스러운 가족에 더 행복을 느꼈다고 한다. , 자기의 삶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그 일에 대하여 신경을 쓴 피트 베스트는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 나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행복하게 사려면, 더 많이 신경 쓸 게 아니라, 더 적게 신경 써야 한다고 한다고. 그러나,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불필요하게 너무나 많은 것에 신경을 쓰며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그러면서 저자는 굉장히 의미심장한 예화를 하나 든다.

 

어떤 노인이 물건을 사러 갔는데, 그 노인이 계산원에게 500원짜리 쿠폰을 안 받아 준다며 화를 냈다는 것이다. ? 그 노인에게는 지금 그 쿠폰보다 더 신경 쓸 일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누군가의 말 한 마디, 불쾌한 행동에 신경을 쓰고 있다면,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자신에게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며 넘어갈 것이다. “기분 나쁘다. 그러나, 그거 신경 쓸 시간이 없다.” 그리고 잊어버린다. 그리고 지금 나에게 더 중요한 일에 신경을 쓸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원할수록 결핍을 느낀다. 새로운 물건을 사고 싶을수록 가난해 보이고, 멋있어 보이고 싶을수록 실제의 외모와 상관없이 자신이 못 생겨 보이는 법이다. 더 사랑받기를 열망할수록 더 외로워질 뿐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더 원하거나 신경 쓸 것이 아니라, 결핍을 받아들이고, 우리를 정말로 행복하게 해주는 것, 더 중요한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사람은 어디에 가치를 두고 사느냐에 따라서, 그 도량이 달라진다. 에베소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우리는 가치를 어디에다가 두고 살아야 하는지를 배운다. (이렇게 중요한 것은 성경공부하는 분들만 알면 안 되고, 되도록이면 많은 이들, 모든 교회 식구들이 알아야 한다. 그래서, 중요한 이야기들은 다시 한 번 공유하려고 한다.)

 

우리가 오늘 봉독한 말씀은 찬미문이다. 사도 바울은 지금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도들에게 신령한 복을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신령한 복4가지이다. 4가지 복은 다음과 같다. “선택, 예정, 구속, 그리고 하나님께서 비밀을 알려주심”. 이 중에서, 선택, 예정, 구속은 이미 우리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네 번째 신령한 복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비밀은 그리스도 안에 숨겨져 있었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비밀이 드러났다. 그 비밀은 이것이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만물)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통일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아나케팔라이오오이다. 이것은 사물을 한 데 모은다는 뜻이다. , 만물을, 만물의 중심인 그리스도 안에 모아서 그의 주권 아래 굴복하게 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을 뜻한다.

 

만물의 통일이란, 결국, 죄와 타락으로 분열과 무질서와 혼돈에 빠진 만물을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함께 모아, 완전한 질서와 조화와 아름다움의 상태로 회복하는 종말론적이며 우주적인 구원을 가리킨다. 성경에서 제시하고 있는 구원은 단순히 개인적인 구원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의 눈을 우주로 돌리게 한다.

 

자기 자신의 구원에만 관심을 둔 사람은 위에서 이야기한 한 노인의 이야기처럼, 자기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에만 신경을 쓰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일어나는 어떠한 일 때문에 일희일비하며 말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비밀을 그리스도 안에서 공유하게 된 그리스도인은 구원에 대한 관심을 자기 자신의 구원에서 우주적인 구원으로 시선을 돌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 자신에서 벌어지는 어떠한 일에 너무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해야 할 더 큰 일이 있고, 더 중요한 가치가 있으며, 더 큰 뜻이 있기 때문이다.

 

“Overview Effect”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인식의 변화를 일컫는 말이다. 이 말은Frank White가 고안한 것인데, 그는 그의 책에서 지구를 떠나 우주를 탐험한 우주인들의 경험을 전하면서, 그들이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며 어떻게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는지를 말하고 있다.

 

우주에 나가서 지구를 봤더니, 지구는 굉장히 작고, 종잇장처럼 얇은 대기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굉장히 연약한 행성에 불과하더라는 것이다. 우주에서 보니까, 나라들 사이의 국경도 안 보이고, 사람들을 갈라서게 하는 갈등도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고, 이 연약한 푸른색 한 점에 불과한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 지구인들이 모두 협력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분명해지더라는 것이다.

 

성경을 진지하게 들여다 보면,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데, 그 하나님께서 아주 신비로운 일을 벌이시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알려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통일할 비전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다. 이것을 우주적 비전, 우주적 구원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비전을 함께 공유하여, 그 비전에 동참하는 자들이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과 함께 우주적 비전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내 삶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들 때문에 시간이나 물질, 또는 감정을 낭비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물론, 그것 때문에 잠시 기분이 나쁘거나 가던 길을 멈추어 서야할 때도 있겠지만, 우리는 이내 훌훌 털어버리고, 우리의 가던 길, 더 큰 비전을 이루기 위한 행보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의 생명과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들이 있는가? 잠시 멈추어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어진, 하나님의 우주적 비전을 한 번 생각해 보라. 그 우주적 비전 속에서 그 일들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통일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디에다가 마음을 쓰고, 어디에다가 신경을 쓰고 살아가는가?

 

Let it go. It’s OK. 그냥 떨쳐버리시라. 괜찮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과 함께 우주적 비전을 품은 그리스도인이다. 우주를 품은 사람의 마음은 우주처럼 넓기 때문에, 그 도량이 다르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조화롭고, 아름답게 하실 것이다. 그 소망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우주적 비전을 품은 주님의 자녀가 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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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9. 17. 13:52

사랑의 신비

(요한일서 4:7-16)

 

오늘 말씀에는 요한신학의 핵심이 나온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7-8). 여기서 주목해야 할 진술은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문장이다. 헬라어로 아가페 에크 투 쎄우라한다.

 

요한의 서신에는 에크 투 쎄우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에크라는 전치사는 영어의 ‘of 또는 from’을 나타낸다. 이는 소속이나 기원을 나타내는 전치사이다. 그래서 요한일서 46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라고 할 때, 이는 우리 인간 존재의 출처나 근본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인데,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고 그로 인해 존재한다는 정체성을 갖게 된다.

 

인간 존재의 기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라는 성찰은 아주아주 오래된 것이다. 모든 학문의 발전은 이 성찰로부터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철학자는 기본적으로 신학자이다. 신학자는 기본적으로 철학자이다. 철학이란 인간 존재를 규명하는 학문인데, 인간 존재를 규명하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이라는 존재를 상정하지 않고서는 규정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아주 옛날부터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정의 내릴 때, 인생은 존재의 기원을 찾아 가는 순례인데, 그 순례의 끝에는 언제나 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구원은 한 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인생의 여정이라고 하는 것이다. 구원은 자기 존재의 기원을 찾아 떠나는 순례의 여정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구원의 완성은 자기 존재의 기원인 신과 다시 연합하는 상태, 바로 그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얼마나 성실하게 행하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 존재의 기원인 하나님께로 날마다 가까이 가고 있는가. 우리의 인생의 방향은 어디로 향해 있는가.

 

요한은 아주 신비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도 에크라는 전치사를 쓰고 있는데, 이는 사랑의 출처와 기원이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요한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랑의 출처와 기원이 하나님인만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의 출처와 기원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확증할 뿐 아니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안다라는 말은 헬라어의 그노스인데, ‘안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아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기독교 전통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영지주의는 영어로 ‘Gnosticism’이라고 하는데, ‘영지라는 말은 아는 힘을 말한다. ,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구원은 아는 것에서 온다. 안다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라, 구원을 가져올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현대과학은, 어떻게 보면, 현대판 영지주의라고 할 수 있다. 과학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데카르트의 철학을 따라, 이 세상 모든 것의 원리를 파헤쳐 알려고 한다. 아는 힘이 지금의 문명을 만들었다. 아는 힘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문명을 이루지 못하고, 소위 말하는 미개속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아는 힘때문에 가장 눈부시게 발전한 분야 중 하나가 의학이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육체를 알기 원했다. 그래서 지금의 의학발전을 이루었다. 아는 것을 통해서 질병을 하나씩 극복해 왔고, 지금도 사람들은 아는 힘을 통해서 더 많은 질병들을 정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아는 힘이 마냥 낭만적이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 ‘아는 힘때문에 인간은 환경을 파괴했으며, 생명을 오히려 헤치기도 한다.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지구온난화문제는 인간의 아는 힘때문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2차 대전 당시 유대인들이 600만명이나 죽은 이유도,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도, 그것으로 인해 죽어 나간 수많은 생명들도 모두 인간의 아는 힘때문이다.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드러났다고 말한다. 그것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힘이 되는데,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사건을 통해서 일어났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이다. 이것이 신비인 이유는 그 사랑의 깊이와 이유를 우리가 다 알지 못하거니와, 그가 보이신 사랑은 인간의 눈에 모순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 중 가장 공격이 심한 것은 이 진술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10).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도 이상하고, 상식적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화목제물로 내놓았다는 것 자체가 이해 안가는 행동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매우 인간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일 뿐이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보았을 때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세상에 보내신 것은 일종의 살인행위로 밖에 안 보이겠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신비 그 자체이다.

 

화목제물(힐라스모스)’이라는 말은 영어로 ‘propitiation’을 쓴다. 영어 ‘propitiation’은 라틴어 ‘propitiare’에서 왔는데, 그 뜻은 ‘appease’이다. 이것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favor(호의, 좋은 마음)’를 다시 얻는 행위를 말한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것은 ‘favor(호의, 좋은 마음)’이다. 서로에게 좋은 마음이 없으면, 아무리 예뻐도, 아무리 잘 생겼어도, 아무리 부자여도, 아무리 성격이 좋아도, 아무리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리 바른 행동을 해도, 상대방과 관계를 이어 나갈 수 없다.

 

살면서 만나는 사람 중에, 괜히 싫은 사람이 있다. 괜히 싫은 사람 곁에는 가기도 싫고, 그 사람과 말을 섞고 싶지도 않다. 좋은 마음이 없으면, 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어떠한 선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좋은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때려 죽여도억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화목제물(propitiation)로 그의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은 굉장한 것을 의미한다. 우선, 하나님이 그 화목제물을 통해 우리에게 좋은 마음을 가지시고, 그 좋은 마음을 잃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호의()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도 그 화목제물을 통해 하나님을 좋은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다. 우리는 그 화목제물을 통해, 우리 인생에 어떠한 일이 닥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그 화목제물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호의를 가질 수 있다. , 요한이 말하듯이,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자신 때문이 아니라 그 화목제물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좋은 일이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독생자, 우리에게 화목제물로 주신 그 분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을 말해주는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랑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 가치가 엄청나다. 왜냐하면, 사랑의 출처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사랑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고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신적인 능력이다. 아니, 사랑은 하나님 자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화목제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으면, 이상하게 호의롭지 못한 사람에게도 좋은 마음을 갖게 된다. 우리는 그 능력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사랑하지 아니하면, 그는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다. 화목제물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것은 이미 우리가 좋은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뜻이다. 누군가에게 좋은 마음이 없거든, 그 사람을 생각하기 이전에, 우리의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 화목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좋은 마음이 생기면, 어렵지 않게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은 감정의 문제(Psychological한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Theological한문제)이다. 사랑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다. 사랑하는 순간, 우리는 믿음 안에 거하는 것이요, 사랑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에게 가 닿는 것이다. 하나님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순간, 무엇보다 우리는 구원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랑보다 신비로운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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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톨이, 나그네, 원수 (outsider, stranger, enemy)

(마가복음 7:24-37)

 

마가복음 7장의 말씀은 긴장감 넘치는 대립을 다루고 있다. 71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을 먹는 것을 보았더라.” 위생을 중요시하는 요즘 시대에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지 않고 먹는 행위는 미개해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음식을 먹기 전 손을 씻지 않는 행위는 장로들의 전통을 무시하는,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 따져 물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5).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을 드러내며, 그들의 질문의 가증함을 드러내신다.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한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6-7).

 

예수님은 그들이 어떻게 위선적으로 살아가는지 조목조목 따지시며 그들의 위선을 말씀으로 반박하신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으로 그들을 반박하는 것을 넘어서, 그들의 위선을 보란듯이 고발하는 행동을 취하신다. 그 행동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다.

 

장로들의 전통과의 대결을 소위 정결논쟁이라고 부른다. 정결법은 레위기서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법 중 하나이다. 정결법이 중요한 이유는 정결하지 못하면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만복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은혜를 받지 못한다는 것은 곧 죽음에 처해지는 것과 같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정결한 상태를 유지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제단으로 나아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자기 자신을 정결하게 하여,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의 복을 받겠다는 마음가짐은 참 좋은 것이다. 여러분은 오늘 주님 앞에 나올 때, 어떤 모습으로 나왔는가? 정결하게 하고 왔는가? 여러분의 몸과 마음이 하나님의 복을 넉넉히 받을 수 있을 만큼 정결한가? 하나님의 복을 받는데, 양심의 거리낌이 없는가?

 

한자어 중에 목욕재계(沐浴齋戒)’라는 말이 있다. 머리감을 목(), 미역감을 욕(), 가지런할 재(), 경계할 계()이다. ‘머리를 감고 몸을 씻어 깨끗이 하고, 부정(不淨)을 피하여 마음을 가다듬는다는 뜻이다. 주님 앞에 나올 때 이렇게 하고 나오신 분이 있는가? 우리가 목욕까지는 못할지라도, ‘재계하는 마음을 가지고 오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는 지금 주님께만 집중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인가? 우리의 마음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오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부정한 것을 정결하게 하시는 이야기이다. 장로들의 전통 논쟁(정결 논쟁)을 끝내신 예수님은 그곳을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간다. 그곳에 도착한 예수님은 한 집에 들어가서 아무도 모르게 머물고 싶어하셨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 중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 왔다.

 

이어지는 예수님과 그 여인의 대화는 듣기 좀 민망하다. 우선 그 여인은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는 헬라인이였고, 수로보니게 족속 여인이었다. 유대인이 아닌 사람이, 그리고 여인이 예수님에게 다가와 말을 붙이는 것은 그 당시 통념 상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더군다나, 성경이 그가 헬라인이고 수로보니게 여인이라고 그의 출신을 정확하게 적고 있는 이유는 그녀의 부정함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녀는 이스라엘 영토와 모세의 율법 바깥에 사는 아웃사이더(외톨이, 이방인)였고, 대대로 이스라엘을 괴롭힌 원수 나라의 자손이었다. 이러한 원수 같은 사람이, 그것도 여인이 예수님에게 다가와 말을 건네는 것을 넘어, 도움을 간청하는 일은 정상적인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럴까?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는 거칠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간청한다. “우리 딸에게 붙어 있는 귀신을 쫓아내 주세요!” 예수님이 대답한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7). 어느 나라 말이든 자가 들어가면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지금 예수님은 그녀를 일컬어 라고 하고 있다.

 

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멈추지 않는다. 그것도 사랑하는 자식의 문제인데, 중간에 포기하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기 자신이 라는 것을 인정한다. ‘나는 부정한 여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8). 이 말에, 예수님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신다.

 

이야기의 배경은 두로에서 시돈, 그리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로 바뀐다. 그것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데리고 온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만난다. 상황은 좀 다르지만, 이 사람도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아웃사이더이다. 이 사람은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사람이라 사람들과 소통을 못하여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자였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고쳐 주신다.

 

그 사람을 고치는 방법이 약간 민망하다. 고침의 방법은 이렇다.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신다. 그러면서 이렇게 외치신다. “에바다!”(34). 에바다의 뜻은 열리라(be opened)’는 뜻이다. 그랬더니, 그 사람의 병이 낫는다.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35). 이 말은 단순히 그의 육신이 온전해졌다는 것을 넘어서, 그가 더 이상 외톨이로 살지 않고 공동체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정결논쟁(장로들의 전통)과 부정한 사람들과 접촉하여 그들의 부정함을 온전케 해 주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으로서(교회가)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어떠한 사역을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많은 통찰을 준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지경(우리 교회의 지경)을 어떻게 넓혀 나가고 있는가?

 

금융자본주의 체제 하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지경을 넓히는 일은 대개 경제의 규모를 늘려 나가는 것으로 이해되고 다가온다. 그리고, 지경을 넓히는 것을 땅, 공간의 개념으로만 이해한다. 특별히 교회는 선교를 생각할 때, 성경에 나오는 다음 두 구절을 떠올린다. 하나는 마태복음에서 온 말씀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18-20). 다른 하나는 사도행전에서 온 말씀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8).

 

교회는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사명으로 받아들이면서, 지경을 넓혀나가는데, 그때 교회 공동체는 주로 영토적인 개념에서 사명을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에 불타, 선교의 방향을 우리가 사는 지역을 넘어서, 외국(타지)으로 향한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지경을 넓혀 나가고,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있어, 놓치지 말아야 중요한 영역, 지경을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외톨이, 나그네, 원수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영토의 개념(공간의 개념)이 아니라, ‘관계의 개념이다. 내가 지금 내 삶에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이 장로들의 전통을 위선이라고 비난하는 이유는 그들이 정결법을 들이대며,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외톨이, 나그네, 원수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정결이지, ‘사람, 생명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정결법을 통해서 사람을 소외시키고, 생명을 죽였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정결법을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정결법의 핵심은 생명에 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 정결을 유지하여 생명을 지키는 것, 이것이 정결법의 핵심이다. 그러나, 장로들의 전통을 외친 외식하는 자들정결법을 통하여 오히려 사람들을 외톨이로 만들고, 나그네로 만들고, 원수로 만들어서 그들을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밀어냄으로써 사람들을 죽였다.

 

배제(exclusion)는 사회적 살인이다. (살인은 육신 바깥에서부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즉 육신 안에서부터 일어난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또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러한 사회적 살인을 저지르며 살아갈 때가 많다. 또는 그러한 사회적 살인을 당하면서 살아갈 때가 많다. 이러한 상황이야 말로, 예수님이 정결논쟁을 벌이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즉 외식하는 자들에게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고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의 생명의 법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삶의 지경을 넓힌다는 것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은, 경제의 측면, 영토(공간)의 측면에서만 생각하면 안 된다. 그것은 반드시 관계의 측면에서도 살펴 보아야 한다. 나는 누군가를 외톨이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누군가를 나그네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닌다. 나는 누군가를 원수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단절이 오면, 아무리 많은 돈을 가졌어도, 아무리 넓은 땅을 소유했어도, 그의 삶의 지경은 좁디 좁고 답답할 뿐이다. 그러므로, 삶의 지경을 넓힌다는 것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은 우선적으로 관계의 측면부터 시작해야 한다. 단절된 관계를 터 나갈 때, 우리의 삶의 지경은 넓어지는 것이고, 선교가 확장되는 것이다.

 

스스로, 외톨이가 되지 말고, 나그네가 되지 말고, 누군가의 원수로 남아 있지 말라. 누군가를 외톨이 만들지 말고, 나그네로 놓아두지 말며, 원수 삼지 말라. 상대방이 처럼 느껴지더라도 에게 은혜를 베푸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상대방에게 욕을 퍼붓는 삶에서 은혜를 베푸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라. 관계의 문이 열리도록, 주님께서 외치셨던 에바다를 외치며 기도하라.

 

가정에, 직장에, 교회 공동체에, 그리고 이 사회에 외톨이, 나그네, 원수가 없도록 서로가 서로에게 관계의 문을 열리게 하는 것이 삶의 지경을 넓히는 것이요,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라는 것을 마음에 품고, 부자되는 것보다, 땅을 소유하는 것보다 훨씬 훨씬 어려운, 사람을 얻는 일에 성공과 기쁨이 있게 해달라고, ‘수로보니게 여인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정결케 하신 우리 주님께 간구하는 믿음이 자녀들이 되자.

 

기도문

 

주님,

우리의 삶의 지경을 넓혀 주옵소서.

선교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지경을 넓혀나갈 때,

경제의 측면과 영토의 측면에서만 머물지 말게 하시고,

주변을 돌아보며 관계의 측면을 세심하게 돌아보게 하셔서,

외톨이, 나그네, 원수가

친구와 공동체의 일원으로 변하는

놀라운 은혜가 임하게 하옵소서.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주님이 하셨사오니,

그 능력 받아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는 믿음의 자녀인 줄로 믿사오니,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버리고,

에바다’, 관계의 문이 열리게 하셔서

주 안에서 서로 사랑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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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9. 6. 16:05

사람은 가도 사랑은 남는다

(요한일서 4:7-11)

 장례예배


요즘 한국에서 죽음학 전도사로 열심히 활동하시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정채현 교수라고 있다. 죽음에 관해서 몇 권의 책도 출간하신 분인데, 그분이 그렇게 죽음학 전도사로 활동하게 된 계기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깨달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의사의 일상은 환자를 돌보는 것이고, 돌보던 환자의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 일이 매일 같이 반복되면, 어느 누구든 그 일에 대하여 둔감하게 되어 있다. 정채현 교수도 그랬다. 매일 같이 죽음을 목도하는데, 그 죽음이 전혀 자기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은 것으로 여겼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죽음이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나의 일이라는 깨달음이 생겼다. 그때부터 가까이에서 보는 죽음을 관찰하고, 누구든지 겪게 되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연구해서, 강연도 하고, 책도 출간하면서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도 올 해 초, 방광암 진단을 받고, 실제로 닥친 죽음을 감당하려고 준비 중이라고 한다.

 

죽음은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죽음이 코 앞에 닥치는 그 순간까지, 죽음을 남의 일로만 생각할 뿐, 나의 일로 생각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그것도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매일 같이 죽음의 공포 속에 살아가면, 어떻게 인생을 정상적으로 살 수 있겠는가. 죽음의 공포를 견딜 육신과 정신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도 목사로서 장례식을 많이 집례하면서, 어느 날 갑자기 위에서 이야기한 정채현 교수와 같은 깨달음이 온 적이 있다. 그때 집례한 장례식은 젊은 사람의 장례식이었다. 달리기 모금 행사에 나갔다가, 자동차에 치여 죽은, 교회 할머니의 딸이었는데, 관 속에 곱게 누워 있었다. 예배 드리는 내내, 관속에서 미동조차 안 하고, 예배가 끝난 후,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는 데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몸은 저렇게 멀쩡한데, 무엇이 저 사람과 나의 생을 가르고 있는가. 그러면서, 어느 날, 내가 저곳에 저렇게 누워 있고, 누군가가 나의 장례식을 집례하겠지, 라는 생각이 마음 속 깊이 들어왔다. 그때부터 죽음이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고, 나의 일처럼 여겨졌다. 그러는 순간,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 사람의 죽음을 바라보면, 한 사람의 인생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이미지가 있다. 나는 김행삼 집사님을 생각하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 조르바가 생각난다. 김행삼 집사님과 함께 한 세월이 2년 정도밖에 안 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김행삼 집사님이 나에게 보여준 인생의 가치는 자유와 평화였다.

 

자유와 평화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들의 특징은 유머감각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김행삼 집사님은 유머감각이 뛰어난 분이셨다. 몇 달 전,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찾아 뵈었는데, 그때 마침 사돈이신 이정헌 집사님도 일반병원 입원 후 호스피스 병원에 머무실 때였다. 그때 마침, 함께 사는 며느리(이은주 집사)에 대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때 며느리 칭찬을 한참 하시더니,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 며느리가 아버지랑 시아버지랑 둘 다 병석에 누워 있는데, 여기 왔다, 저기 갔다, 여기 저기를 오가면서 힘들텐데도, 성격이 좋아서, 살이 안 빠져.” 그러면서 웃으셨다.

 

또 몇 주 전, 잠시 코마 상태에 빠져 사경을 헤매신 때가 있었다. 그때 모두가 아버지 돌아가시는 줄 알고, 긴장하면서 기도했다. 그런데 다행히 코마 상태에서 깨어나셔서 눈을 뜨시고, 걱정돼서 찾아온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마침, 이진주 자매가 문병을 갔었다. 김행삼 집사님은 그때 이진주 자매를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 아직 안 죽었다.” 그러면서 웃으셨다.

 

김행삼 집사님은 저를 만날 때마다 미소를 지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목사님,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겠지만, 소신껏 하세요.” 어르신이 젊은 목회자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려 하시거나, 지루한 옛 이야기를 늘어 놓지 않으시고, 언제나 미소로 대하시며 소신껏 하라고 격려해 주셨다.

 

<그리스인 조르바>에 보면, 조르바가 들려주는 어떤 노인의 이야기가 있다. 그 노인은 세상을 자유롭게, 그리고 평화롭게 산 노인인데, 그 노인이 세상을 떠나기 전, 동네를 돌면서 만난 젊은 처자를 붙잡고 이렇게 말한다. “.. 내가 너처럼 고운 아이를 두고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니…” 자유와 평화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이 세상을 긍정하지, 부정하지 않는다. 자유와 평화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향유하고 나누어 줄줄 알기 때문에, 언제나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한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말씀은 교회의 장로, 즉 나이가 지긋하신 한 할아버지가 젊은이들에게 주는 사랑의 교훈이다. 나이가 지긋이 든 요한은 교회 공동체를 향해, 때로는 Dear Children(나의 자녀들아, 소자야)이라 부르고, 때로는 Dear Friends(나의 친구들이여, 사랑하는 이들이여)라고 부르면서,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준다.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

 

성경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하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다양한 시각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요한이 경험한, 요한의 눈에 들어온, 요한의 입술로 고백되는 하나님(예수님)사랑이시다. 요한이 깨달은 비밀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을 알게 되고, 사랑할 때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이 말하는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고, 그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우리가 살았고,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사람은 가도 사랑은 남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신 후, 부활, 승천하셔서 이곳에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지만, 우리가 사랑할 때 그 사랑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아버지(할아버지)를 떠나보내는 유가족 여러분! 그리고 친지, 친구,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자유와 평화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시며 여러분을 미소로 대하시며 사랑하신 김행삼 집사님을 기억하시려는가? 누군가를 기억하는 방법 중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특별히, 유가족들에게 전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을 생각하면서, 서로 사랑하시라. 교회에 출석하여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서로 사랑할 때, 그리스도가 여러분 가운데 함께 계시며,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셨던 아버지, 할아버지가 여러분 가운데 함께 계실 것이다.

<
그리스인 조르바>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학교의 꼬마 친구가 이렇게 물었다. “너희 할아버지는 어떻게 돌아가셨는데?” 그래서, ‘(화자, 그리스인 조르바의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사람)’는 할아버지에 대하여 이러한 신화를 만들어 낸다.

 

우리 할아버지는 흰 수염을 날리던 분으로 고무신을 신고 다니셨지. 어느 날 할아버지는 우리 집 지붕에서 펄쩍 뛰어 오르셨는데, 떨어져 땅에 닿자마자 공처럼 튀었지. 차차 더 높게 튀어 우리 집보다 더 높게 튀시더니 드디어 구름 속으로 사라지셨어. 우리 할아버지는 이렇게 돌아가셨단다.”
(
그리스인 조르바, 105)

 

여러분이 서로 사랑하면, 할아버지의 자유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전염되어, 이러한 유먹감각을 가지고, 이 세상을 여유롭게, 평화롭게, 자유롭게, 그리고, 미소를 잃지 않으며, 살아가게 될 거라 믿는다. “사람은 가도 사랑은 남는다.” 김행삼 집사님은 가셨지만, 그분의 사랑은 우리 가슴에 영원히 남을 거라 믿는다.


기도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이제 육신의 삶을 끝내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故 김행삼 집사님을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서게 하여 주사, 눈물도, 죽음도, 생존경쟁도 없는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하옵소서.

믿는 자의 소망이 되시는 주님, 어리석은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높고 크신 섭리를 다 깨닫지 못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영생의 소망으로,

이 땅에서의 유혹과 환난을 이겨 내며,

끝까지 믿음을 지키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오늘 고인과의 이 땅에서의 마지막 예배를 함께 드리면서

나누었던 말씀처럼,

서로 사랑하는 가족,

서로 사랑하는 친구,

서로 사랑하는 교회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사,

그 사랑 안에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며,

그 사랑 안에서 영원히 기억될 김행삼 집사님을 마음에 품고,

사람은 이제 가지만, 그 사랑은 우리 마음에 영원할 것을 기대하며,

고인을 편히 보내드리게 하옵소서.

이제, 아버지, 할아버지 없이 살아갈 유가족들을 긍휼히 여겨 주사,

담대한 마음을 갖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며 살아가는 믿음의 가정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여서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이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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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9. 3. 19:31

쉬타후 라코디쉬 발루후 후

(아가서 2:8-13)


 

교회에는 교회력(Church Calendar)이 있다. 세상에서 쓰는 달력은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통해 만들어 내는 시간과 계절의 차이를 반영하여 만들었지만, 교회에서 쓰는 교회력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과 사역을 기억하고 찬양하기 위하여 만들었다.

The Church has a Church Calendar. The calendar used in the world reflects the difference in time and season that the earth produces through rotation and revolution, but the church Calendar was created to remember and praise the nature and ministry of the Triune God.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 교회의 교회력은 끊임없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기억하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과 사역을 알아가며, 그 본질에 다가서서 그 사역에 동참하려 한다.

We believe in the Father, the Son, the Holy Spirit, which is the Triune God. The church calendar constantly remember the Triune God, and know the essence and ministry of the Triune God to join in the Triune God's ministry.

 

오늘은 창조절 첫 번째 주일이다. 창조절은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만드는 이 지구와 온 우주를 돌아보는 절기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사역을 기억하고 찬양하는 절기를 중심으로, 성령을 기억하고 찬양하는 절기,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성부)를 기억하고 찬양하는 절기를 발전시켜 왔다.

Today is the first Sunday of the season of Creation. The season of Creation is a season to remember God the Creator and to look around this earth and all the universe that God makes. The church has developed a feast to remember and praise the Holy Spirit and to remember and praise the Creator God, focusing on the feast of remembering and praising the essence and ministry of Jesus Christ.

 

절기는 단순히 성자가 누구인지, 성령이 누구인지, 성부가 누구인지에만 초점을 맞추는 시간이 아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그분이 누구인지를 질문하면서 동시에, 우리 인간은 누구인지를 묻는다.

The season is not just a focus on who the Son is, who the Holy Spirit is, who the Father is. We throw a question about the Triune God and who we are at the same time.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하여 동시에 묻는 이유는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온전히 알 때 완성되고, 우리의 존재 완성이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교에서 랍비의 가르침은 인간을 가리켜 쉬타후 라코디쉬 발루후 후라고 부른다. 이는 하나님과 함께 창조과업을 이루는 사람이란 의미이다.

The reason we ask about God and ourselves at the same time is that our existence is completed when we fully know who God is and our perfection is the purpose of God's salvation. So the rabbinical teaching in Judaism refers to the human being as 'shitahu lakodish baluhu hu '. It means 'a person who works with God in the work of creation'

 

우리는 오늘, ‘Song of Songs 또는 Song of Solomon’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노래를 함께 읽었다. 이 노래에는 연인의 사랑, 그 사랑이 뿜어 내는 아름다움, 그리고, 그 아름다움과 지극히 잘 어울리는 자연의 향기로움이 담겨 있다. 사랑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 주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랑은 사람과 자연을 연결시켜 주며, 온 세상이 온통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을 깨닫게 하고 보이게 해 준다. 한 마디로 사랑은 우리의 영안(마음의 눈)을 활짝 열어 준다.

Today we read a beautiful song called 'Song of Songs or Song of Solomon'. This song contains the love of the lover, the beauty of the love, and the fragrance of the nature that goes well with its beauty. Love is not just to connect people and reveal their beauty, but to connect people with nature and to make us realize that the whole world is full of beauty. In a word, love opens the eyes of our spirit (eyes of the heart) wide.

 

요즘 들어 세계 교회는 창조절의 중요성을 점점 더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우리의 어머니 지구가 그 생명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가 병약하거나 죽으면 어린 자식들이 살아남기 힘들 듯, 어머니 지구가 생명력을 잃어가면서 지구 이에 사는 모든 생명체의 생명이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

Nowadays the world church is increasingly emphasizing the importance of the season of the Creation. It is because our Mother Earth, which God has given us, is gradually losing its vitality. The life of every living creature in the earth is seriously threatened by the loss of the mother earth's vitality, as it is difficult for young children to survive when their mothers are dying.

 

얼마 전 모 언론사를 통해북극 최후의 빙하가 무너졌다라는 제목의 뉴스가 있었다. 그린랜드 북쪽 지역 그리고 캐나다 북쪽 지역, 대륙하고 맞닿아 있는 지역에서는 대륙이 차갑기 때문에 빙하가 잘 녹지 않는데, 그 지역의 빙하마저 녹았다는 것이다. 이곳의 빙하는 2만 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있었을 때 형성된 빙하이고, 여름 절기 동안 한 번도 녹은 적이 없는데, 이곳의 빙하가 녹았다는 것이다.

Not long ago, there was news in the media, titled 'The Arctic' s Last Glacier Has Fallen '. In northern Greenland and northern Canada, where the continent is in contact, the continents are cold, so the glaciers do not melt well, and the glaciers in the area have melted. The glacier here is a glacier that was formed 20,000 years ago when it was the last Ice Age and never melted during the summer season, and the glacier here has started to be melted.

 

지금 세상은 두 가지 문제로 고통 받고 있다. 하나는 불평등(일부 소수의 사람들만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먹고 사는 문제에 큰 어려움을 겪는 것)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지구온난화의 문제이다. 이것을 그림 언어로 표현해 보면 이런 것이다. 엄마의 자궁 속에 있는 태아가 영양공급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생명에 위협을 받고 있는 것(불평등)과 동시에 엄마가 병약해져서 엄마가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Now the world is suffering from two problems. One is the problem of inequality (with the exception of a handful of people and the rest of us eating and living) and the other is global warming. It can be described this way. The fetus in the mother 's uterus is threatened with life because it does not receive nutrition properly (Inequality), and at the same time the mother is dying because the mother is getting weak(Global Warming.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일을 하고 계실지, 그리고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과 더불어 어떤 일들을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자각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 우리는 ‘쉬타후 라코디쉬 발루후 후('shitahu lakodish baluhu hu)’이다. 우리는하나님과 함께 창조과업을 이루는 사람이다.

In this world, we can not help but think what God the Creator is doing, and what we should do with God the Creator. So we must have an awareness of who we are. We are 'shitahu lakodish baluhu hu'. We are 'those who work with God in the work of creation'.

 

세상은 지금 하나님의 창조와 그 창조 과업을 함께 이루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무시한 대가로 죽음의 문화, 억압의 문화, 지배의 문화 속에서 고통 당하고 있다. 아름다움을 훼손하는 일은 악마나 하는 짓이다. 악마가 아름다운 것을 훼손하는 이유는, 악마는 사랑을 모르고, 사랑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The world is now suffering from the culture of death, the culture of oppression, and the culture of domination in exchange for neglecting to know the identity of God as the creator and know who we are as 'those who work with God in the work of creation'. To undermine beauty is the evil thing. The reason the devil damages the beautiful is because the devil does not know love or is not able to love.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아가서가 성경에 들어 있는 이유는, 아가서에서 노래하고 있는 연인의 사랑과 아름다움이 곧 하나님과 사람(피조물) 사이에 있어야할 사랑과 아름다움을 그림언어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The Song of Songs, which never has the word "God", is contained in the Bible, because the love and beauty of the lover singing in Song of Songs is the metaphor of love and beauty that must be between God and human.

 

다른 말로 표현해서, 지금 이렇게 인간이 자연을 마구 훼손하면서 지구온난화를 초래하고 고통당하는 이유는 결국 인간이 사랑의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으면, 상대방은 파괴와 훼손, 착취의 대상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사랑이 없으니, 세상의 아름다움은 점점 훼손되고 파괴되어, 점점 껍데기만 남게 되는 것이다.

In other words, the reason why human beings now damage the nature and cause global warming and suffering because humans have lost the power of love in the end. Without love, the other is only seen as an object of destruction, and exploitation. Because there is no love, the beauty of the world is getting destroyed, and only the shell remains.

 

사랑이 생명을 살린다. 사랑은 생명 속에 들어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한다. 사랑을 통해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면 생명은 그것을 향유하며 지키게 되지, 파괴하거나 훼손하지 않는다.

Love saves lives. Love makes you discover the beauty in life. When we discover beauty through love, life does not destroy or damages it, but does enjoy and keep it.

 

우리는 누구인가? ‘쉬타후 라코디쉬 발루후 후’, ‘하나님과 함께 창조과업을 이루는 사람인가? 아니면, 사랑을 모르고, 사랑할 줄 몰라,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해 파괴와 훼손을 일삼는 악마의 친구인가? 악마(같은 사람)은 파괴와 훼손, 그리고 착취를 통해 죽음의 문화, 억압의 문화, 지배의 문화를 만들어내어 생명체에게 고통을 가하지만, ‘하나님과 함께 창조과업을 이루는거룩한 사람은 사랑을 통해 생명체(피조물)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생명을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어 놓는다.

Who are we? Are we 'shitahu Lakodish Baluhu hu'? 'Is the man who works with God in His Creation'? Or a friend of the devil who does not know love, is not able to love, so cannot find beauty, and destroys it? The devil creates the culture of death, the culture of oppression, and the culture of domination through destruction, and exploitation, and causes suffering to life, but the holy human being, who works with God in His Creation, finds beauty in life (creature) and gives oneself out to enrich the life.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쏟으신 그 거룩한 사랑으로 인하여 구원 받은 새로운 피조물이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다. 우리가 그것을 고백하고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계속하여 하나님과 함께 창조과업을 이루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 지 기도하고 고민하여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간구하는 사랑이 흘러 넘치는 아름다운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주님이 주신 사랑의 능력으로 상대방의 아름다움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발견하여 그 생명을 더 풍성케 하는 주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기를 소망한다.

We are a new creation saved by the holy love poured out on the cross, and God's holy people. If we are Christians who confess it and believe in it, we must be a beautiful, full of love, praying for God's mercy, praying and thinking about what to do in order to achieve 'the work of creation with God.' I hope we try to be a holy child of the Lord who constantly finds out the beauty of our neighbors and nature with the power of the Lord's love and enrich the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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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9. 2. 15:48

Jesus, Marriage, Freedom

(John 8:31-36)


As a pastor, one of the greatest privileges is that I can share the happiness and sorrows together as it happens. In one's life, marriage is a big turning point in life, and I am very happy to be here with you. Especially, I am really happy to officiate the marriage service of Mr. Francisco who is one of my best friends, and Ms. Monica, who is one of my greatest co-workers of the kingdom of God.

Christian weddings have a special aspect. The image of the bridegroom and the bride is not only an image used to express God and Israel in the Bible but also an image used to express the relationship between Jesus Christ and the church. Marriage is holy and has a special meaning. This wedding service is not just for the two, but it is also the time to renew the wedding of everyone who is attending this ceremony.

Today's wedding service is a holy time to look back at your own marriage. While remembering the excitement, promise, the eyes of love, God's grace and love from the wedding ceremony, you need to recall the meaning of your marriage. Under the guidance of the Holy Spirit, I hope that such a work will be at this time.

Among the verses that we read today, there is a verse that we are very familiar with, one that refreshes our hearts. "You wi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will set you free"(32). Including this verse, there are many instances of the word ‘freedom' in the passage. What is freedom? How can we get freedom? 

To be "free", does not mean simply that one is not bound or tied to any obligation. The things that give freedom to people are not liberation and separation but affiliation belonging. A state that is not connected to anything raises fear and anxiety. 'Fri', which is the roof of the Indian-Germanic languages such as frei, friede, and freund, means 'to love'. So, to be free means to belong to a friend or lover. Human beings feel freedom in the relationship of love and friendship. Freedom is the most archetypical relational vocabulary. There is no freedom without a support. (Byung-Cheol Han, The Fragrance of Time, pp.61~62)        

In today's words, the reason why Jesus said to people that if you stay in the Word, you will truly become his disciples, 'you wi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will set you free', is that because they are now misplaced to be bound. People want to belong to somewhere(or someone) in order to dispel fear and anxiety. However, fear and anxiety are so strong that they cannot tell whether they belong to the truth or not. In such a situation, a tragedy arises.

Jesus wants to free those who have tied themselves to the wrong, and to bind them back to the truth. The truth is Jesus Christ, whom we confess as the Lord. Since we are bound to the truth of Jesus Christ and we belong to Him, we are free. The apostle who is tied to Jesus and most strongly expresses belonging is Paul. Paul introduces himself as a slave of Jesus Christ whenever he introduces himself.

We often think that a slave is not free. But, rather, the Apostle Paul calls himself a slave of Christ. Why would the Apostle Paul speak of his own identity through the metaphor of 'slave', which would not fit with freedom? The apostle Paul knew what 'freedom' means. He wanted to say that the more you are bound to Jesus Christ, the truth itself, the more you can be a free man. That is why he speaks of himself as a 'slave' of Christ.

Marriage is the task of binding ‘me’ to the other. Marriage is a human activity that brings more freedom than any other activities. The Apostle Paul says this in Galatians. "You, my brothers, were called to be free. But do not use your freedom to indulge the sinful nature; rather, serve one another as a slave in love" (Gal. 5:13). Marriage is a work of binding one another. And in order to confirm the bondage of one another in their real life, they try to be a slave one another. So, the husband insists on the wife's body, and the wife insists on the husband's body. Marriage is "declaring that I am no longer mine, but my partner."

Christians enjoy true freedom because they belong to, and are bound to Jesus Christ, the Truth. Like apostle Paul, we declare ourselves to be   'a slave of Christ'. We do not fear binding one another through marriage. Rather, we are delighted and joyful because we know what freedom is in Christ. We belong to Christ and are bound together. Just as Jesus freed the Church, the Bridegroom and the bride may believe that each would be a slave to one another, driving out the fear and anxiety, and enjoy the true freedom.                                

Through this marriage, I would like to express my heartfelt congratulations to both of you, who will give one another as a slave in order to get real freedom. There will be no fear because you are bound to one another. There will be no anxiety because you will always be on each other's side no matter what happens.           

Today, this time, I am truly grateful that Jesus Christ is giving freedom to these two through marriage, and to all of us who are attending and celebrating this wedding. I believe that Christ is restoring freedom that we have forgotten. We thank God who has made us belong and bind one another through marriage in the love of Christ. Through marriage, I hope we could be renewed to be children of faith who experience and enjoy the true freedom that the Lord has brought to us.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9. 2. 15:29

예수, 결혼, 자유

(요한복음 8:31-36)

 

목회자의 가장 큰 특권 중 하나는 한 사람의 희로애락을 가장 가까이서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결혼은 엄청난 인생의 사건이고 전환점이다. 그 중요한 순간을 함께 할 수 있어 감사하고 기쁘다. 특별히, 평소에 가깝게 지내는 김 원장님과 우리 교회의 가장 큰 일꾼(자랑) 중 한 분인 이영주 집사님의 결혼식 주례를 맡게 되어 특별히 감사하다.

 

기독교인의 결혼식은 특별한 면이 있다. 신랑과 신부의 이미지는 성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빗대어 표현할 때 쓰는 이미지일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표현할 때도 쓰는 이미지이다. 그만큼 결혼은 거룩한 것이고,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별히, 이 결혼식은 이 두 분만의 결혼식이 아니라, 이 결혼식에 참석한 모든 분들의 결혼식을 Renewal(갱신)하는 시간이다.

 

기독교인의 결혼식은 단순히 결혼 당사자의 결혼식을 축하하는 자리, 그 뜻을 넘어서 나의 결혼생활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거룩한 시간이다. 결혼식 할 때의 그 설렘, 그리고 다짐, 또한 예물반지를 주고 받을 때의 그 사랑의 눈빛, 나를 응원해 주는 지인들의 축하를 받으며 내딛었던 결혼생활의 첫 발, 그리고, 결혼예식을 통해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등을 기억하면서, 결혼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시간이다.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그러한 역사가 이 시간에 있기를 소망한다.

 

오늘 봉독한 말씀 가운데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고, 또한 우리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말씀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32). 이 말씀을 포함해서,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말씀 가운데는 자유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자유란 무엇일까? 그리고 자유는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것일까?

 

현대인에게 가장 오염된 단어(현대인들이 오해하고 있는 말) 중 하나는 자유가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자유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건, 어딘가에 전혀 속박되어 있지 않은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결혼을 하면, 남자(남편)가 여자(아내)에게, 여자(아내)가 남자(남편)에게 속박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유를 빼앗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또는 자유에 대한 이해가 오염되었기 때문에 생겨난 생각에 불과하다.

 

자유롭다는 것은 단순히 구속되어 있지 않거나 의무에 묶여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유를 주는 것은 해방이나 이탈이 아니라 편입과 소속이다. 그 무엇에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상태는 공포와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자유롭다(frei), 평화(friede), 친구(freund)와 같은 표현의 인도게르만어 어원인 'fri' '사랑하다'라는 뜻이다.그러니까 자유롭다는 것은 본래 '친구나 연인에게 속해 있는'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바로 사랑과 우정의 관계 속에서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묶여 있지 않음으로 해서가 아니라 묶여 있음으로 해서 자유로워진다. 자유는 가장 전형적인 관계적 어휘다. 받침대 없이는 자유도 없다. (한병철 <시간의 향기 >, 61~62쪽)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 안에 거하면 참으로 당신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될 것이다,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뜻은, 곧 그들이 지금 어딘가에 잘못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공포와 불안을 떨쳐 버리기 위하여 어딘가에 속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공포와 불안이 너무 강해서, 자신이 속해 있는 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런 상황에서 비극이 생겨난다.

 

예수님은 자신을 잘못된 것에 묶어 놓은 사람들을 해방시켜, 진리에 다시 묶어 놓으려 하신다. 그 진리는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묶여 있기 때문에, 그분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자유롭다. 예수님에게 묶여 있다, 속해 있다는 것을 가장 강력하게 표현한 사도는바울이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소개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한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a slave은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오히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slave이라고 말한다. 자유와 어울리지 않을 법한 ‘slave’이라는 메타포를 통해서 자기 자신의 신분을 말하고 있는 사도 바울은 도대체 왜 그런 표현을 쓸까?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자유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단단히 묶여 있을수록 참 자유인이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는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slave’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혼은 나를 상대방에게 묶는 작업이다. 결혼은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 자유를 가져다 주는 인간 활동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런 말을 한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사로 종 노릇하라”(5:13). 결혼은 서로가 서로에게 묶는 작업이고, 서로가 서로에게 묶여 있다는 것을 실생활에서 확인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종노릇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의 육신를 주장하고, 아내는 남편의 육신을 주장한다. 결혼은 나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고, 상대방의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참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고 묶여 있기 때문에 참 자유를 누린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까지 선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고 묶여 있기 때문에 얻는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에, 결혼을 통하여 사랑 안에서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속하고 묶이는 일을 두려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고 즐거워 한다. 신랑이신 예수님이 신부인 교회를 자유롭게 하신 것처럼, 남편과 아내는 서로가 서로에게 종노릇 하며, 공포와 불안을 몰아내고, 참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을 믿기 때문이다.

 

이 결혼을 통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자기 자신을 내어주어 참 자유를 얻게 되실, 두 분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속하고 묶여 있는데, 이제 무엇이 두렵겠는가. 무슨 일이 벌어져도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이 생겼는데, 이제 무엇이 두렵겠는가.

 

오늘 이 시간, 참으로 감사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혼을 통하여 이 두 분에게 자유를 주시고, 이 결혼식에 참석하여 두 분의 결혼식을 축하하는 우리 모두에게, 그리스도께서, 잊고 살았던 자유를 되찾게 해 주신 것이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결혼을 통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고 묶이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결혼을 통하여, 주님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참 자유를 경험하고 누리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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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