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결혼, 자유
(요한복음 8:31-36)
목회자의 가장 큰 특권 중 하나는 한 사람의 희로애락을 가장 가까이서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결혼은 엄청난 인생의 사건이고 전환점이다. 그 중요한 순간을 함께 할 수 있어 감사하고 기쁘다. 특별히, 평소에 가깝게 지내는 김 원장님과 우리 교회의 가장 큰 일꾼(자랑) 중 한 분인 이영주 집사님의 결혼식 주례를 맡게 되어 특별히 감사하다.
기독교인의 결혼식은 특별한 면이 있다. 신랑과 신부의 이미지는 성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빗대어 표현할 때 쓰는 이미지일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표현할 때도 쓰는 이미지이다. 그만큼 결혼은 거룩한 것이고,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별히, 이 결혼식은 이 두 분만의 결혼식이 아니라, 이 결혼식에 참석한 모든 분들의 결혼식을 Renewal(갱신)하는 시간이다.
기독교인의 결혼식은 단순히 결혼 당사자의 결혼식을 축하하는 자리, 그 뜻을 넘어서 나의 결혼생활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거룩한 시간이다. 결혼식 할 때의 그 설렘, 그리고 다짐, 또한 예물반지를 주고 받을 때의 그 사랑의 눈빛, 나를 응원해 주는 지인들의 축하를 받으며 내딛었던 결혼생활의 첫 발, 그리고, 결혼예식을 통해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등을 기억하면서, 결혼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시간이다.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그러한 역사가 이 시간에 있기를 소망한다.
오늘 봉독한 말씀 가운데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고, 또한 우리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말씀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32절). 이 말씀을 포함해서,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말씀 가운데는 ‘자유’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자유란 무엇일까? 그리고 자유는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것일까?
현대인에게 가장 오염된 단어(현대인들이 오해하고 있는 말) 중 하나는 ‘자유’가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자유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건, 어딘가에 전혀 속박되어 있지 않은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결혼을 하면, 남자(남편)가 여자(아내)에게, 여자(아내)가 남자(남편)에게 속박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유를 빼앗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또는 자유에 대한 이해가 오염되었기 때문에 생겨난 생각에 불과하다.
자유롭다는 것은 단순히 구속되어 있지 않거나 의무에 묶여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유를 주는 것은 해방이나 이탈이 아니라 편입과 소속이다. 그 무엇에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상태는 공포와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자유롭다(frei), 평화(friede), 친구(freund)와 같은 표현의 인도게르만어 어원인 'fri'는 '사랑하다'라는 뜻이다.그러니까 자유롭다는 것은 본래 '친구나 연인에게 속해 있는'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바로 사랑과 우정의 관계 속에서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묶여 있지 않음으로 해서가 아니라 묶여 있음으로 해서 자유로워진다. 자유는 가장 전형적인 관계적 어휘다. 받침대 없이는 자유도 없다. (한병철 <시간의 향기 >, 61~62쪽)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 안에 거하면 참으로 당신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될 것이다,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뜻은, 곧 그들이 지금 어딘가에 잘못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공포와 불안을 떨쳐 버리기 위하여 어딘가에 속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공포와 불안이 너무 강해서, 자신이 속해 있는 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런 상황에서 비극이 생겨난다.
예수님은 자신을 잘못된 것에 묶어 놓은 사람들을 해방시켜, 진리에 다시 묶어 놓으려 하신다. 그 진리는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묶여 있기 때문에, 그분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자유롭다. 예수님에게 묶여 있다, 속해 있다는 것을 가장 강력하게 표현한 사도는 ‘바울’이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소개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한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a slave은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오히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slave이라고 말한다. 자유와 어울리지 않을 법한 ‘slave’이라는 메타포를 통해서 자기 자신의 신분을 말하고 있는 사도 바울은 도대체 왜 그런 표현을 쓸까?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 ‘자유’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단단히 묶여 있을수록 참 자유인이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는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slave’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혼은 나를 상대방에게 묶는 작업이다. 결혼은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 자유를 가져다 주는 인간 활동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런 말을 한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사로 종 노릇하라”(갈 5:13). 결혼은 서로가 서로에게 묶는 작업이고, 서로가 서로에게 묶여 있다는 것을 실생활에서 확인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종노릇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의 육신를 주장하고, 아내는 남편의 육신을 주장한다. 결혼은 “나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고, 상대방의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참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고 묶여 있기 때문에 참 자유를 누린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까지 선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고 묶여 있기 때문에 얻는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에, 결혼을 통하여 사랑 안에서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속하고 묶이는 일을 ‘두려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고 즐거워 한다. 신랑이신 예수님이 신부인 교회를 자유롭게 하신 것처럼, 남편과 아내는 서로가 서로에게 종노릇 하며, 공포와 불안을 몰아내고, 참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을 믿기 때문이다.
이 결혼을 통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자기 자신을 내어주어 참 자유를 얻게 되실, 두 분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속하고 묶여 있는데, 이제 무엇이 두렵겠는가. 무슨 일이 벌어져도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이 생겼는데, 이제 무엇이 두렵겠는가.
오늘 이 시간, 참으로 감사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혼을 통하여 이 두 분에게 자유를 주시고, 이 결혼식에 참석하여 두 분의 결혼식을 축하하는 우리 모두에게, 그리스도께서, 잊고 살았던 자유를 되찾게 해 주신 것이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결혼을 통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고 묶이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결혼을 통하여, 주님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참 자유를 경험하고 누리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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