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떡, 영생
(요한복음 6:51-58)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성경을 읽으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성경은 왜 기록되었을까? 사도들(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기록한 이유는 ‘예수가 누구인가’를 증언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또는 비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가 누구인지 이해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이 직접 기록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사도들이 기록했다. 사도란 누구인가?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직접 선택된 사람들을 가리킨다. 우리는 흔히 그들을 열 두 사도라고 부른다. 그리고, 나중에 바울 자신도 ‘다메섹 사건’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직접 선택된 사도라고 주장한다.
사도의 직접적인 뜻은 히브리어의 ‘샬리에’와 같다. 즉, 영어로는 messenger의 뜻을 가지고 있다. 구약의 선지자와 같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사도는 사적인 신분을 가지지 않고, 공적인 신분을 가진다. 그가 사도가 된 것은 자기 자신의 뜻이나 의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게 선택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을 ‘공직자’라고 부른 것과 같다. 공직자는 스스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선택하여 뽑아주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공직자가 법에 의해 어떠한 권위를 가지듯, 사도는 성령의 법에 의해 어떠한 권위를 갖는다. 사도는 교회를 세우고 다스리는 권위가 있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말하고)하고 기록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의 법에 의해 부여된 권위를 통해서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다스렸으며,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했다. 우리는 현재 그들이 기록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읽고 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는 예수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한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I am the living bread that came down from heaven. If anyone eats of this bread, he will live forever.)”(51절).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의 중요 단어와 그들의 관계를 볼 수 있다. 그것은 예수, 떡, 그리고 영생이다.
우선 분명한 것은, 사도는 예수를 구약(출애굽기)에 나오는 ‘만나’와 연결시킨다는 것이다. 만나는 ‘먹거리’였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날 때, 그 광야에서 죽지 않고 살아 남을 수 있도록 한 것은 하나님께서 매일 같이 하늘에서 내려 주신 ‘만나’였다. 구약성경에서도 명시되고 있는 바, 만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었고, 그것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렸다.
사도가 예수를 만나와 연결시켜 설명하는 것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말할 때, 우선적으로 ‘예수는 생명이다’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먹을 때만’ 가능하다. 그래서 사도는 예수를 ‘먹는 것, 떡’이라고 명시한 뒤, 그것을 ‘먹으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쉽게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그 정황이 52절에 나온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이러한 오해가 실제 한국 기독교 역사에도 있었다. 기독교가 한국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 이런 소문이 파다했다. “야소교인들은 사람의 살과 피를 먹는 식인종이다.” 지금 생각하면 웃긴 얘기지만,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반응이나, 한국 기독교의 초기 시기의 반응이나, 또한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 모르는 현대인들의 반응이나, 다르지 않다. 어떻게 살과 피를 먹을 수 있나? 그리고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초대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예수님을 먹는 것이 생명이라는 것을 실천하고 증언하기 위해서 ‘성찬식’을 발전시킨다. 성찬식에서 쓰이는 빵과 포도주는 성찬을 위한 기도를 드리는 순간 더 이상 빵과 포도주가 아니라, 예수의 살과 피가 된다. 그래서 초대교회부터 성찬식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복음’을 전하는 핵심 전례가 되었다. 성찬식에서 우리는 빵과 포도주를 받아 먹는 게 아니라, 예수의 살과 피를 받아 먹는 것이다. 왜? 그것이 우리를 ‘영생’에 이르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영생’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잘 모르거나, 오해한다는 것이다. 대개 영생은 영어로 ‘eternal life’라고 한다. 생명(life)에 ‘eternal’이라는 게 붙어서 ‘영원한 생명’이라고 번역한다. ‘eternal’은 헬라어 원어로 ‘eis ton aiona’이다. 사도가 이 단어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보이는 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죽은 이후의 ‘영원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또는 ‘죽은 후 천국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영원’을 미래적인 사건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도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것이다.
‘Eternal, eis ton aiona’의 의미는 ‘신적인’이라는 의미이다. ‘영원’은 미래적인 사건이 아니라, 현재적인 사건이다. 즉, ‘영생하리라’는 ‘죽은 후 영원히 살 것이다’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생명을 살 것이다’라는 뜻이다. 사도가 말하고 싶은 것을 자기 마음대로 이해한 사람과 사도가 말하고 싶은 것을 온전히 이해한 사람의 삶은 같을 수 없다.
‘영생’을 미래에 일어날 사건으로 생각하는 사람, ‘죽은 후 천국에 가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에게서 벌어지는 일은 ‘현실부정’이다. 그들에게 현실은 악한 것이고, 현실은 벗어나야 하는 것이고, 현실은 가치 없는 것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현실의 일에 대하여 등한시하고, 죽은 후에 천국가는 일만 생각한다.
대개 이러한 유혹에 빠지는 일은 현실 세계에서 고통을 겪거나, 영혼의 고독, 영혼의 굶주림과 갈증을 심하게 겪는 이들에게 나타난다. 사기꾼이 속여 먹기 가장 좋은 사람은 누구인가? 절실한 사람이다. 건강이 나빠 고통 당하는 이들에게 가장 속여 먹기 좋은 것은 약장사이다. 약장사는 ‘이 약을 먹으면 병이 금방 나을 수 있다’고 속인다. 영혼이 곤고한 사람들은 이단에 쉽게 빠진다. 그래서 그들은 가정과 직장, 친구들을 버리고, 즉 현실을 부정하고, 영생을 보장하는 그 집단에 들어가서 산다.
삶의 여러 가지 문제가 절실할수록 조심해야 한다. 평소에는 시덥지 않게 보이던 것도, 절실한 상황이 오면 그것이 나의 생명을 구원해줄 것처럼 왜곡되어서 보이는 법이다. 쉬운 예로, 평소에는 ‘로또 전광판’이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으면 ‘로또 전광판’이 강력한 유혹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로또를 사는 데 열광한다.
삶의 문제가 절실할수록, 가장 좋은 솔루션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삶의 문제가 절실할수록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주님 앞에 나아와 엎드려 기도만 하는 것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그리고, 평소에 건전하고 선한 공동체에 속해서 그들과 사귐을 가지며 그들에게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신뢰를 쌓아야 한다. (내가 우스겟소리 같이 한 이야기를 잘 기억해 두라. “교회는 집 가까운 곳에 있는 데를 다니는 게 아니라, 성경에서 가까운 곳을 다녀야 한다.”)
사도가 말하는 영생은 미래적인 의미가 아니라, 현재적인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으면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면서 살게 된다는 뜻이다. 지금 여기에서 생명의 충만함을 누리게 된다는 뜻이다. 지금 여기에서 영혼의 고독, 영혼의 굶주림과 갈증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에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줄 아는 능력이 생긴다는 뜻이다.
사도가 말하는 ‘eternal’의 속성은 무엇인가?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사도(적 공동체)는 ‘요한 사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요한 사도(적 공동체)에서 말하는 ‘eternal’, 즉 하나님의 속성은 ‘사랑’이다. 그래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그러므로 예수라는 ‘만나’, 생명의 떡을 먹는 자는 ‘하나님의 생명’에 접근하게 되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랑의 능력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이런 통찰이 있다.
사랑의 역사(work of love)
언제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타자(상대방, 또는 사물)를 착취하지 않게 될까? 온갖 착취가 행해지고 있는 이 세상에서 어떠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분명 이 세상과는 다른 '착취가 없는 세상'이다. 착취가 자취를 감출 때는 사랑이 지배할 때뿐이다. 그리스도로 온전히 옷 입는다는 것은 그의 사랑이 우리의 삶의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삶의 방식이란 '사랑의 역사(work of love)'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히 임하는 종말에는 이 세상의 모든 불의한 착취가 사라지겠으나, 종말을 기다리며 사는 우리들이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는 일에 힘써 그 나라를 미리 맛보는 것 외에, 우리에게 어떠한 희망이 존재하겠는가.
사랑하는 일을 멈추느니, 차라리 나에게 죽음을 달라.
(장준식)
사랑의 능력을 가진 자, 사랑의 능력을 회복한 자는 현실을 도피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가진 자는 영혼의 고독, 영혼의 굶주림과 갈증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사랑은 결핍이 아니라 넘침이고 나눔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마음에 충만한 자는 가정을 버리고 떠나지 않고 가정을 사랑으로 잘 섬긴다. 사랑이 마음에 충만한 자는 세상에 무관심하지 않고 세상의 아픔과 고통을 바라보며 공감할 줄 알고, 그 아픔과 고통을 해결하기 위하여 무엇이라도 헌신하려 한다. 사랑이 마음에 충만한 자는 자기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다른 이를 착취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이의 결핍을 채워주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어준다.
우리는 사도의 가르침을 온전히 받고 있는가. 우리는 사도가 증언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깨닫고 있는가. 예수는 생명의 떡이다. 그 떡을 먹으면 영생을 얻는다. 그 영생이란 죽은 후 가는 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누리게 되는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을 말한다.
어느 누가 주는 소위 ‘생명의 떡’을 먹었더니, 가정에 소홀하게 되고, 가정을 버리게 되고, 세상의 고통에 무관심하게 되고, 세상과 담을 쌓고 살게 되던가? 그것은 사이비가 주는 떡이다. 그리고, 지금 당신의 영혼은 곤고한 것이다. 그러니, 그 떡을 토해내라. 그리고 자신의 영혼의 곤고함을 위해서 기도하라.
사도가 주는 생명의 떡은 사랑의 능력을 갖게 해주고, 사랑의 능력을 회복시켜 준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가정을 위해, 교회를 위해, 세상을 위해, 즉, 이웃을 위해 나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게 한다. 생명이 풍성하기 때문이다. 내 안에 나누어 줄 사랑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사도가 주는 생명의 떡을 먹으라. 참 생명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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