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8. 8. 3. 15:44

: 마음의 초상

(야고보서 3:1-12)

 

야고보서는 믿음와 행함의 관계에 대하여 말한다. 그 관계란, ‘믿는 바 대로 행하라, 또는 믿는 바 대로 살라라는 뜻이다. 행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믿고 있는 지 알 수 있다.

 

야고보서가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특별히 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주장의 일관성을 생각해 볼 때, 말은 믿음과 큰 상관관계를 지니기 때문이다. 저명한 철학자인 에머슨은 이러한 말을 한 적이 있다. “말도 행동이고 행동도 말의 일종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말은 행동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행함의 관계와 믿음과 말함의 관계는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말에 관한 여러 격언을 알고 있다. 그 중에서 고개를 끄덕일 만한 것들을 몇 개만 보면, 다음과 같다.

1) 죽마고우도 말 한마디에 갈라진다

2) 가루는 칠수록 고와지고 말은 할수록 거칠어진다

3) 말 많은 집은 장 맛도 쓰다

4) 살은 쏘고 주워도 말은 하고 못 줍는다

5) 말은 행동의 거울이다

6) 혀 아래 도끼 들었다

7) 입과 혀라는 것은 화와 근심의 문이요, 몸을 죽이는 도끼와 같다. – 명심보감

 

티베트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말이란 토끼와 같이 부드러울수록 좋다.” 말에 대한 이러저러한 속담이나, 그리고 야고보서에서 신앙생활에 있어 말조심을 특별히 강조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잘 보여준다. 약간 길지만, 중요한 부분이므로 인용해 본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정치적 동물이다.… 어째서 인간이 다른 모든 동물들, 그리고 꿀벌이나 군집 생활을 하는 다른 동물들보다 한층 더 정치적인가 하는 점도 분명하다.… 동물들 중에서 언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오로지 인간뿐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소리라면 그것은 기쁨이나 괴로움을 표시하는 징표이기 때문에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언어는 유리한 것이나 해로운 것, 따라서 올바른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점, 즉 선, , 올바름, 사악함 등에 대해서 지각을 가진다는 점이 다른 동물에 비해서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정이나 국가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선, 악 등에 관한 공통된 지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의해서이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정치적 동물이다라는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인간은 공동체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뜻이다. 인간이 공동체를 떠나서 살 수 없는 두 가지 이유 중, 첫째는 생존 때문이고, 둘째는 인간의 인간 됨 때문이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다.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자급자족할 수 없다. 서로 돕지 않고서는 살아남기 힘들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 자기 혼자 장 봐서 자기 혼자 밥 먹고 살 수 있으니, 혼자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시장의 구조 때문에 그런 것이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살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또한 사람은 공동체 내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되어간다. 위의 글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주장하는 바, 언어는 인간의 고유 능력이다. 혼자 사는 사람에게는 언어나 의사소통, 또는 윤리적 실천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인간은 그러한 능력을 고유하게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므로 사람이 공동체 내에서 성장하지 않고 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사람으로서의 자기 실현을 할 수 없게 된다.

 

말을 한다는 것은 인간의 자기 실현이다. 그런데, 그 말은 반드시 공동체를 세우는 덕스러운 말이어야 한다. 말은 공동체를 세워야지 무너뜨리면 안 된다. 공동체가 무너지면 자기 자신도 더 이상 사람으로서의 자아 실현을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통찰을 신앙에 적용해 보면, 신앙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서 하는 것이다. 신앙인의 자아 실현(이것을 성서적 용어로 표현하면 구원인데)은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하며, 그것은 인간의 고유 능력인 언어와 의사소통, 그리고 윤리적 실천이 원활하게 이루질 때 충만해진다.

 

쉽게 말해서, 야고보서가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공동체를 세우기도 하고, 허물기도 하는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기 때문이다.

 

야고보서는 충고한다.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선생이 되면 말을 많이 해야 하는데, 말을 많이 하다보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말실수를 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선생(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말을 할 때 지혜가 있어야 하고 절제가 있어야 하며 덕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말 하기 전에 그 입을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반드시 해야 한다.

 

야고보서가 말하는 온전한 사람(perfect man)’은 소위 많이 배우고, 집안 좋고, 외모가 뛰어난 사람이 아니다. 야고보서가 말하는 온전한 사람말에 실수가 없는 자이다(2).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간과한다. 그러다 보니, 학력을 높이는 일에, 돈을 많이 버는 일에, 외모를 가꾸는 일에 시간과 물질을 투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은 우리가 성경에서 말하는 온전한 사람’,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이다.


야고보서는 말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세 가지를 예로 든다. (horse)과 배와 불이 그것이다. 말을 타기 위해서 사람들은 말의 입에 재갈을 물려 말을 조정한다. 배를 움직이는 것은 작은 키이다. 혀도 작지만 인생 전체를 세울 수도 있고 망칠 수도 있다. 작은 불이 온 산을 태운다. 그처럼 작은 혀가 온 몸을 더럽힐 수도 있고 온 몸을 불사를 수도 있다.

 

야고보서는 혀 아래 도끼 들었다는 말과 같은 말을 한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8). 우리는 온갖 동물을 길들여, 그것을 통해서 이익을 얻고 산다. 지금은 환경단체의 맹렬한 비판 때문에 없어졌지만, 씨월드에 샤무 쇼(Shamu Show)가 있었다. 우리는 바다에서 가장 상위에 있는 포식자인 범고래(Killer Whale)를 길들여 쇼를 만드는 위대한 인간이지만, 정작 자기 혀를 길들이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이기도 하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음을 깨닫고,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하며, 형제자매(이웃)를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그런데, 믿음으로 산다고 아버지를 찬송하면서, 어떻게 나와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형제자매(이웃)을 저주 할 수 있는가. 한 입에서, 어떻게 찬송과 저주가 동시에 나올 수 있는가. 자연의 샘물은 한 구멍에서 단 물과 쓴 물을 동시에 내지 않는다. 무화과나무는 무화과 열매를 맺고, 포도나무는 포도 열매를 맺는다.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정말 대단한 능력이 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동시에 나온다.

 

그것은 자연보다 뛰어나다는 증거일까, 아니면 자연보다 못하다는 증거일까. 아마도, 자연보다 못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우리는 샘물보다 못하고, 무화과나무, 또는 포도나무보다 못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보다 뛰어난 존재가 되기보다는, 그저 자연(하나님의 피조물)으로 돌아가야 한다.

 

말은 마음의 초상이다” (J. 레이).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없다. 그러나, 방법이 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의 생김새를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자이다. 그리스도인은 비록 외모는 자기 자신이지만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바로 말에 있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다. “인간은 입이 하나 귀가 둘이 있다. 이는 말하기보다 듣기를 두 배 더하라는 뜻이다.” 결국 이 말도, ‘말조심하라’, ‘필요한 말만 하라는 뜻이다. 야고보서는 말한다. ‘믿는 바 대로 행하라, 믿는 바 대로 살라.’ 우리가 믿는 바는 말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말은 마음의 초상이요, 마음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말에 실수가 없는 자온전한 사람(perfect man)’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마음에 품고,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자기의 혀에 마땅히 굴레를 씌울 줄 아는 믿음의 자녀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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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