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hû (만-후) - Manna (만나)
(출애굽기 16:2-4, 9-15)
출애굽기에서 홍해를 건너는 이야기는 14장에 나온다. 열 가지 재앙을 통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출애굽 시키실 것에 대한 의지를 전하시고, 마지막 열 번째 재앙 때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푸신 후, 결국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다.
어딘가에 묶여 있던 곳 (유형이든 무형이든)에서 빠져나오는 일은 쉽지 않다. 강력한 저항에 부딪힐 뿐 아니라, 자신의 목숨에도 큰 위협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반드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고 따르는 것 만이 살 길이다.
이스라엘은 어렵사리 출애굽하여 길을 나섰다. 그러나, 그 뒤에서 애굽 군대가 쫓아왔다. 그러한 상황에서 망연자실할 만한 일이 발생한다. 길 앞에 바다(홍해)가 놓여 있었다. 꼼짝없이 죽었구나, 생각한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홍해를 가르신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예상치 못한 도우심에 힘입어 무사히 출애굽에 성공한다.
출애굽 사건의 긴박함을 전하는 14장이 끝나고, 이스라엘은 ‘이제 살았구나’ 안도의 한 숨을 쉰다. 그리고 입술에서 저절로 찬송이 나왔다.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의 입에서는 ‘감사와 찬양’이 저절로 나오는 법이다. 모세와 이스라엘의 감사와 찬양의 시가 15장에 나온다. 모세와 남자들만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니라, 미리암과 여인들도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부른다. 그야말로 모든 이스라엘이 ‘이제는 살았구나’하며 안도의 한 숨을 쉬며 기뻐했다.
그런데, 그 기쁨도 잠시.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이 들어선 곳은 수르 광야라는 곳이었다. 광야에 이르자, 그들의 입에서 나오던 감사와 찬양의 노래는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그 입에서 ‘원망’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수르 광야의 ‘마라’라는 곳에 이르러 그곳에서 쉬면서 물을 마셨는데, 그 물이 써서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향하여 원망했다.
그리고, 장면은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출애굽기 16장으로 넘어간다. 그들은 오아시스가 있던 엘림을 떠나, 신 광야로 들어선다. 그때가 출애굽을 한지 45일쯤 된 때였다. 이스라엘은 그곳에서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또다시 원망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원망을 직접 들어보자.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3절).
우리는 흔히 이렇게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실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철 없다 거나, 나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잘못된 생각이다. 힘들고 어려울 때 원망(탄식)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정말 나쁜 것은 힘들고 어려운 데도 (주님 앞에 나아와) 원망(탄식)하지 않는 것이다! 성경은 원망과 탄식을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연약한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일종의 권리 또는 의무 같은 것이다.
왜 우리는 어렵고 힘든 일이 있는데, 원망(탄식)을 하지 않는가? 성경은 온갖 원망(탄식)으로 가득 차 있다. 대표적인 성경이 시편이다. 시편은 원망(탄식)으로 가득 차 있다. 또한 누가복음 18장을 보면,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실 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며, 과부와 재판장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과부는 원한이 있어 재판장에게 매일 같이 나아가 재판장에게 자신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조른다. 결국 재판장은 의로워서 과부의 원한을 풀어준 것이 아니라, 매일 같이 찾아오는 과부가 귀찮아서 그의 원한을 풀어준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눅 18:7-8).
힘들어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것을 마음에 담고 있으며 속앓이 하지 말고, 주님 앞에 나아와 원망을 늘어 놓으라. 그 문제가 풀릴 때까지 주님 앞에 나아와서 원망을 늘어놓으라. 괜찮다. 주님 앞에 원망을 늘어 놓는 일은 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이다. 주님께서 속히 우리의 원망에 응답해 주실 것이다.
(돈이 필요한가? 은행 찾아가지 말고, 주님 앞에 원망을 늘어 놓으라. 몸이 아픈가? 병원만 가지 말고, 주님 앞에 원망을 늘어 놓으라. 마음이 아픈가? 상담사나 친구만 찾아가지 말고, 주님 앞에 원망을 늘어 놓아라. 속상한 일 있는가? 엄한 사람한테 화풀이하지 말고, 주님 앞에 원망을 늘어 놓아라. 나는 우리 교회가 원망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으면 좋겠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거든, 차라리 나를 찾아와서 원망을 늘어놓아라. 그리고 함께, 주님께 나아가 그 원망을 늘어 놓아보자. 주님께서 긍휼히 여겨 주시지 않겠는가. 나는 우리 교회가 너무 점잖고 조용한 것이 마음 아프다. 교회 의자를 너무 뽀송뽀송 하게 놓아두지 말고, 교회 의자를 눈물로 적시라. 그런 교회가 좋은 교회, 그런 교회가 하나님이 긍휼하게 여기시는 교회가 아니겠는가.)
4절 말씀을 보라. 광야에서 물이 없어 원망하고, 먹을 게 없어 원망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벌을 내리시는 게 아니라, 그들의 원망을 들으시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내려 주신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4절). 하나님은 우리의 원망을 꾸짖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원망에 응답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면, 원망이 전혀 문제가 아니라면, 무엇이 진짜 문제인가? 이스라엘에게 무엇이 문제였는지, 우리에게 무엇이 문제인지는 다음 구절에 나온다. 하나님은 그들의 원망에 응답하셔서 그들에게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려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4절).
하나님이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려 주시며’ 그들에게 내리신 명령은 이것이었다.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게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16절). 그리고 이어서 이런 명령을 내리신다.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19절).
이러한 명령을 주신 후,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하늘에서 양식을 비와 같이’ 내리신다. 그것의 이름은 무엇인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만나’이다. 만나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잘 못한 일, 또는 우리가 잘 못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우선, 하나님은 그들에게 약속을 지켜,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보내 그들에게 고기를 먹게 하시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내리게 하고, 그 이슬이 마른 후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은 것’이 놓이게 하신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이 그것이 무엇인지 못 알아보았다는 것이다. 15절을 보면 그들은 서로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만나의 히브리어는 ‘man-hû 만-후’이다. ‘man’은 ‘from’이라는 뜻이고, ‘hû’는 ‘he or it’이다. 히브리학자들은 ‘man-hû’가 ‘what is it?’ 이라고 번역된 것에 대해서는 이집트어의 영향이 컸을 거라고 말한다. 그들은 지금 이집트(애굽)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중에는 ‘잡다한 족속’ 즉, 이집트 사람들도 많이 섞여 있었다. 이집트어로 ‘man’은 ‘what’이다. 그리고 ‘hû’는 ‘it’이다. 그래서 ‘man-hû’는 ‘what is it?’이라고 번역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히브리어로는 명확히 다르게 번역될 수 있다. 위에서 말했듯이, ‘‘man’은 ‘from’이라는 뜻이고, ‘hû’는 ‘he or it’의 뜻이기 때문에, 이른 번역하면, ‘From Him’이 된다. 여기서 ‘Him’은 누구를 가리키겠나? 당연히 여호와 하나님이다. 즉,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이 그것을 몰랐다는 것이다. 이것이 누구에게서 온 것인 지 그들은 몰랐다. 모세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먹을 것’을 비 같이 내려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 줄 몰랐다. 그래서 그들이 “이것이 무엇이냐 (what is it?)”이라고 물었을 때, 모세는 그들에게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고, 콕 짚어서 이야기를 해 준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원망을 해서 하나님께서 그 원망을 들으시고 우리에게 응답을 해 주셨는데, 그래서 지금 내 삶 가운데 ‘만나’가 지천에 널려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으로 내려 주신 ‘만나’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문제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원망을 원망으로 머물게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원망을 감사와 찬송으로 바꾸어 주신다. 문제는 우리의 원망을 들으시고 그 원망을 감사와 찬송을 바꾸어 주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내려 주신 ‘만나’를 우리가 몰라보고, 여전히 원망하며 산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이것 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내려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뒤,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만나’를 거두는 법에 대하여 지침을 내리신다. 그 지침은 간단하다. 각자 먹을 만큼만 거두고, 절대로 내일을 위하여, 또는 필요 이상으로 먹기 위하여 남겨두지 말라는 것이었다. 왜? 하나님은 만나를 오늘만 내리실 것이 아니라, 그들이 광야의 여정을 마치는 동안, 매일 같이, 성실하게 내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내일을 위하여, 더 많이 먹으려고, 만나를 불필요하게 모은다. 그러자,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가? 그 만나에서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다. 그들은 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만나를 더 거두어들였을까? 그 이유는,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약속하셨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4절).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거두어 들이면서 서로 이렇게 속삭였을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 그분이 어떤 분인 줄 알고 우리가 믿냐? 이 만나가 내일 또 내리리라는 법이 어디에 있어? 이 광야 한 가운데서… 나는 못 믿겠어! 그러니, 나는 내일을 위하여, 그리고 내 배를 더 부르게 하기 위하여 모을 수 있는 한 많이 모을거야!.
이처럼, ‘만나(만후)’는 믿는 자에게는 ‘From Him,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뜻이 되지만, 믿지 못하는 자에게는 ‘What is it?, 이게 뭐야?’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2천 년 전, 유대 땅에서도 똑같이 반복되었다.
요한복음은 6장에서 예수님을 만나와 대비해서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증거한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48-5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광야에서 내렸던 만나와 비교될 수 없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의 떡’이다. 그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만-후, From Him) 생명의 떡이라는 것을 안 자들은 그 분을 따랐다. 그 분을 믿었다. 그래서 그분의 제자가 되어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그러나, 그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명의 떡인지 몰라보고, 그분에게 ‘만-후, What is it? 이게 뭐야?’라고 한 사람들은 그 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man-hû 만-후’, 지금 여러분 주변에 주님께서 놓아주신 ‘만나’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알아보고 있는가? (배우자, 자녀, 교회, 목회자, 친구, 직장, 동료 등, 이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내려 주신, ‘하나님으로부터 온’ 만나인가, 아니면, 어디서 온지 모르는 ‘이게 뭐야?’의 만나인가. 혹시, 원망스러운 것이 있거든, 그 원망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와서 하라. 그러면, 주님께서 그것이 무엇인지, 밝히 알려주실 것이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은 원망을 감사와 찬송으로 바꾸어 기쁨으로 살고 있는가? 여러분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온 생명의 떡’이라는 것을 알고, 그분의 살과 피를 먹으며, 그 안에서 영원한 생명, 구원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가? 주님은 우리의 원망(탄식, 기도)를 들으시고, 반드시, ‘만나’를 내려 주시는 신실한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여러분, 두려워하지 말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으라.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 주신,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평안히 가라.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 떡, 영생 (0) | 2018.08.13 |
---|---|
성도의 자기 인식 (0) | 2018.08.10 |
말: 마음의 초상 (0) | 2018.08.03 |
오벧에돔은 왜 복을 받았을까? (0) | 2018.07.17 |
파레시아 (0) | 2018.0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