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자기 인식
(벧전 2:1-10)
키에르케고르와 동시대에 살았던 덴마크의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주옥 같은 다수의 작품을 세상에 남겼다. 그의 작품은 그의 삶의 반영인 경우가 많은데, 그 중에서 <성냥팔이 소녀>는 가난했던 어머니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쓴 것이고, <눈의 여왕>은 나폴레옹 전투에 참전했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죽자 눈의 여왕이 데려간 것이라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쓴 것이고, <미운 오리 새끼>는 작가 데뷔 후에 그의 출신 때문에 홀대 받던 시절을 생각하며 쓴 작품이다.
안데르센의 동화 중에 <벌거숭이 임금님>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명작이다. 몸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임금님을 백성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환호했지만, 그 중에서 한 아이가 현실을 말한다. “임금님은 벌거벗었다!” 사람들은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고, 바로 본대해도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살지만, 어린 아이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그대로 말할 줄 아는 순진한 마음과 용기를 지녔던 것이다.
<미운 오리 새끼>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명작이다. 한 백조가 오리 알 가운데 섞여 있어 오리들과 같이 태어나고 오리들과 같이 성장했지만, 결국 자기 자신이 오리가 아니라 백조였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기쁨과 자유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오리들 가운데 섞여 오리들에게 구박을 받으며 자란 백조의 서러움이 한 순간에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진실하게 인식하고 있는가. 우리는 백조임에도 불구하고 오리 가운데 섞여서 온갖 구박을 받으며, 신세 한 탄 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성도의 자기 인식은 매우 중요하다. 자기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온전히 인식한 자만 자신의 신분에 걸맞게 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
오리 가운데 섞여 자신이 오리인 줄 잘못 알고 살았던 백조는 어느날 백조들의 모습에 반해, ‘나도 저렇게 우아한 백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그런데, 한 백조가 다가와 오리인 줄 착각하고 있는 백조에게 ‘너는 백조야’라고 말해 주었을 때, 미운 오리새끼는 백조처럼 훨훨 하늘을 날아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
오늘 말씀은 성도, 즉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성도의 자기 인식이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3절)” 나는 돈까스를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맛보았다. 형 친구 만나러 대치동에 따라 갔다가 그때 먹은 돈까스의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래서 중학교/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가장 많이 간 곳이 돈까스 파는 식당이었다. 은광여고 입구, 말죽거리에 있는 ‘뜨라레’라는 곳에서 돈까스를 엄청 먹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큰 아들이 돈까스를 엄청 좋아한다. 그것까지 닮은 게 신기하다. 물론, 지금은 내가 나이 들어서 그런지, 돈까스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무엇인가 맛보아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고 나면, 우리는 그것을 맛보기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 갈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1절a). 주의 인자하심을 맛 본 자들은 더 이상 몹쓸 말과 몹쓸 짓을 하는 세상사람들처럼 살 수 없다. 돈까스를 맛본 아이가 계속 돈까스를 찾듯, ‘주의 인자하심’을 맛 본 사람은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게 되어 있다. 거기에 주의 인자하심이 가득 들어 있기 때문이다.
주의 인자하심이 듬뿍 들은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먹고 자란 성도는 엄마의 젖을 먹고 자라나는 아이들처럼 자란다. 그의 자람은 구원에 이른다. 구원에 이른 자는 이제 신분/정체성이 완전히 바뀐다. 나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뛴다.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말해주기 때문이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다!”(9절).
누군가에게 택함을 받는다는 것을 참 고맙고 신비한 일이다. 나는 동물의 왕국 보는 것을 좋아하는 데, 숫사자들이 암사자에게 택함을 받기 위하여 싸우는 모습을 보면 처절하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하다. 싸움에서 승리한 숫사자만이 암사자에게 택함을 받는데, 싸움에서 진 숫사자는 갑자기 그 위용이 사라지고 쥐구멍으로 들어갈 것 같은 자세와 감정을 보인다. 누군가에게 선택받지 못했다는 것은 참 비참한 일이다.
그런데, 성도는 맹수처럼 싸움에서 이겼기 때문에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 부족하고 연약한 데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받은 것이다. 무려,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왕의 왕이신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다는 것은 참으로 고맙고 신비한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다는 것에 대하여 그렇게 큰 고마움과 신비로움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 사람들은 누군가(사람이나 조직/회사)에게 택함 받으면 엄청 기뻐하고, 택함 받지 못하면 분노를 보이지만, 하나님께 택함 받은 것에 대하여 기뻐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택함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별로 없다.
본인이 또는 자녀가 좋은 학교 /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구원 받은 것처럼 기뻐한다. 그런데, 나를 구원해 주는 것은 좋은 학교나 좋은 직장이 아니다. 그것이 나에게 어떠한 유익을 가져다 줄지, 아무도 모른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인간사는 잠시의 기쁨과 만족을 줄지 모르지만, 그것이 우리의 생명 자체를 구원하지 못한다.
인간사가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그러한 것들을 자랑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택해 주신 그 은혜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을 아는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그러한 것을 자랑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한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9절b).
성도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10절). 이러한 자기 인식이 확실한 성도(그리스도인)는 다른 것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나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고, 나를 긍휼을 입은 자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삶을 산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순간순간, ‘나는 누구인가’를 수없이 물어야 한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께 택함 받은, 왕 같은 제사장이고 거룩한 나라이고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다. 우리는 긍휼을 입은 자들이다. 이러한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자는 결코 세상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살 수 없다. 삶이 힘에 겨워, 비록 처지는 머슴 같을 때가 많아도,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마님’처럼 배짱과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믿음의 자녀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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