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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1.15 한나의 아이
  2. 2018.01.13 도피성의 사회학 1
  3. 2018.01.11 든든한 신앙 공동체 세우기 운동
  4. 2018.01.11 내 삶의 여리고성
  5. 2018.01.04 행복하자
  6. 2018.01.04 시므온과 안나가 만난 예수
  7. 2018.01.04 예수 사건
  8. 2018.01.04 내가 살 집
  9. 2017.12.18 예수가 온다
  10. 2017.12.18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11. 2017.12.12 위로 1
  12. 2017.12.04 기다리는 복
  13. 2017.12.02 하나님이 피난처
  14. 2017.11.28 식상한 예수, 그리스도 1
  15. 2017.11.23 누가 어리석은 자인가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1. 15. 04:27

한나의 아이

(사무엘상 3:1-9)


몇 년 전, ‘미국 최고의 신학자라는 수식어가 붙은 스탠리 하우어워즈 교수가 <한나의 아이>라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회고록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그 책의 서문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나는 스탠리 하우어워즈가 될 의도가 없었다”(한나의 아이, 19, IVP). 자신이 유명하게 될 것을 예측하는 사람은 없다. 적어도 정말 유명해진 사람들은 그렇다. 유명해지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은 저렇게 겸손한 고백을 하지 못한다.

 

그는 서문에서 자신이 회고록을 쓴 이유에 대해서,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라고 밝힌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이 회고록은 에 대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나를 지금의 존재로 만들어 준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를 지금의 내가 될 수밖에 없도록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니까 말이다. 내가 어떻게 결국 스탠리 하우어워즈가 되었는지 알아내려면 하나님이 그 이야기에서 어떤 역할을 하셨는지를 말해야 하는데, 그 생각을 하니 덜컥 겁이 난다”(한나의 아이, p. 22., IVP).

 

어떤 존재가 되는 일은 참 쉽지 않다. 존재가 되려면 끊임 없이 자기 자신과 화해해야 하고, 다른 존재와 교류해야 하며, ‘하나님이라는 절대적 존재를 직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존재의 용기(Courage to be)’라는 용어를 써, 존재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한나에게는 아이(아들)가 한 명 있었다. 쉽게 얻은 아들이 아니었다. 고대사회에서는 흔한 일이듯, 한나의 남편 엘가나에게는 또 한 명의 부인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브닌나였다. 그런데,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었는데,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자식의 존재 여부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던 고대사회에서 자식이 없다는 것은 생명이 끊어진 것과 같은 아픔이었다. 그래서, 자식이 없던 한나는 매일 울었다.

 

한나는 아이가 너무 갖고 싶었다.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전(성막)에 가서,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며 기도했다. 그러면서 한나는 서원했다. 주여 만약 아들을 주시면 그 아이를 주님께 바치겠나이다!” 끈질긴 서원 기도 끝에 한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아이를 얻고, 그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지었고, 서원한대로 그 아이를 하나님께 바쳤다. 사무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 간구해서 얻은 아이라는 뜻이다.

 

한나는 서원한대로 아들 사무엘을 엘리 제사장에게 데려가 하나님께 드린 후, 이렇게 기도한다. 좀 길지만, 중요한 기도이므로, 전체를 읽어본다.

 

"주께서 나의 마음에 기쁨을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이제 나는 주님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있습니다. 원수들 앞에서도 자랑스럽습니다. 주께서 나를 구하셨으므로, 내 기쁨이 큽니다. 주님과 같으신 분은 없습니다. 주님처럼 거룩하신 분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같은 반석은 없습니다.

 

너희는 교만한 말을 늘어 놓지 말아라. 오만한 말을 입 밖에 내지 말아라. 참으로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 하는 일을 저울에 달아 보시는 분이시다.

 

용사들의 활은 꺾이나, 약한 사람들은 강해진다. 한때 넉넉하게 살던 자들은 먹고 살려고 품을 팔지만, 굶주리던 자들은 다시 굶주리지 않는다. 자식을 못 낳던 여인은 일곱이나 낳지만, 아들을 많이 둔 여인은 홀로 남는다.

 

주님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로 내려가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다시 돌아오게도 하신다. 주님은 사람을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유하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신다. 가난한 사람을 티끌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사람을 거름더미에서 들어올리셔서, 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게 하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이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기초는 모두 주님의 것이다. 그분이 땅덩어리를 기초 위에 올려 놓으셨다. 주께서는 성도들의 발걸음을 지켜 주시며, 악인들을 어둠 속에서 멸망시키신다. 사람이 힘으로 이길 수가 없다. 주께 맞서는 자들은 산산이 깨어질 것이다. 하늘에서 벼락으로 그들을 치실 것이다. 주께서 땅 끝까지 심판하시고, 세우신 왕에게 힘을 주시며, 기름부어 세우신 왕에게 승리를 안겨 주실 것이다."

(삼상 2:1-10, 표준새번역)

 

어렵게 얻은 아들을 서원대로 하나님께 바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한나가 주저함 없이 자기의 아이를 하나님께 바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신앙 고백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주께서 나의 마음에 기쁨을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이제 나는 주님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있습니다. 원수들 앞에서도 자랑스럽습니다. 주께서 나를 구하셨으므로, 내 기쁨이 큽니다. 주님과 같으신 분은 없습니다. 주님처럼 거룩하신 분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같은 반석은 없습니다.”

 

아이를 갖는 일로 죽도록 고생한 한나가 얻은 결론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것이었다. 한나의 아이, 사무엘은 다른 방법을 통해서 얻은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간구해서 얻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한나가 자신의 아이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아이도 구원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인생을 맡기는 것만큼 경건하고 보람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1).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는 말과 이어 나오는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했다는 말이 교차한다. 그 시대의 영적 상황을 말해주는 표현이다. 사무엘이 살던 시대는 사사시대 말기였다. 그때는 시대가 혼탁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잘 들리지 않았다.

 

하나님이 말씀을 안 하시는 게 아니라,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 하나님의 말씀이 잘 안 들린 것이다. 그러한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한나의 아이였다. 오늘 말씀은 똑 같은 일이 세 번 반복되어 나온다.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말씀하실 때 사무엘은 그것이 하나님이 부르시는 말씀인지 모르고 엘리 제사장에게 가고, 엘리 제사장도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인 줄 모르고 세 번이나 사무엘을 돌려보낸다.

 

같은 상황을 엘리와 사무엘 두 사람은 동시에 놓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 있어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준다. 엘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못들은 이유는 그의 영혼의 혼탁함 때문이다. 대세사장의 임무를 맡고 있었던 엘리이지만, 그 자리에 어울리는 영성이 그에게는 없었다. 자녀들과 그 자신에게 닥친 비극을 통해 엘리의 영성이 얼마나 엉성했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어느 날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전해준 하나님께 받은 이상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 2:30).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여호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고 경멸했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 앞에서 섬기는 제사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쁜 행실을 해서 제사장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고, 나쁜 행실을 하면, 하나님의 이상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 이게 정말 당연한 말 같지만, 실제로는 쉽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고, 나쁜 행실을 하면서도, 자기가 그렇게 하는 줄 모른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이상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한다. 이 얼마나 모순이고 못된 욕심인가.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 자신의 삶을 망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공동체도 위험에 처하게 만든다.

 

엘리 제사장이 죽게 된 연유가 그렇다. 이스라엘의 평생 숙적,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승리하기 위하여 실로에 있던 하나님의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지고 온다. 그 일을 수행한 이들이 홉니와 비느하스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존중하는 마음도 없으면서 하나님의 언약궤만 자신들 가운데 있으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거라는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전쟁터에서 죽었고, 하나님의 언약궤는 블레셋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 소식을 전령을 통해 전해들은 엘리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다.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고 나쁜 행실을 하면 자기의 삶 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공동체도 위태롭게 한다. 우리는 이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던 이유는 본문이 말하고 있듯이, 그가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 처음에 아이 사무엘이라는 말이 나온다. 사무엘을 아이라고 칭한 것은 사무엘의 나이가 아직 어린 것을 말해주기도 하지만, 그가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나타난 적이 없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조선시대 때, 총각과 어른의 구분은 상투를 틀었느냐 아니냐에 따라 달랐다. 남자가 상투를 트는 때는 결혼할 때이다. 결혼하면 비로소 어른이 되어 상투를 틀었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으면 어른으로서의 상투를 틀지 않았다. 이처럼, 영적인 일도 마찬가지다. 교회를 오래 다니고, 신앙생활을 오래 했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난 적이 없으면 영적인 아이이다. 영적인 아이에 머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스탠리 하우어워즈는 <한나의 아이>라는 자신의 삶에 대한 회고록에서 자신이 어떻게 스탠리 하우어워즈가 되었는지를 담담하게 돌아본다. 그는 자신이 스탠리 하우어워즈가 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분은 하나님이라고 고백을 한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그냥 아이로 머물러 있었겠지만,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는 스탠리 하우어워즈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아이이다. 사무엘은 한나의 아이였고, 세례 요한은 엘리사벳의 아이였고, 예수는 마리아의 아이였다. 그런데, 누군가의 아이였던 사무엘, ‘요한, ‘예수가 누군가의 아이로 머물지 않고, 사무엘이 되고, 요한이 되고, 예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모두 인생의 어느 시점에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에 보면아이 사무엘은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나타나는 경험을 통해서 아이라는 딱지를 떼 내고, 사무엘로 우뚝 선다. 그 이후에 사무엘에게는 더 이상 아이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는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이상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그것을 통하여 성장하고, 자기 백성을 영도하는 사사로, 선지자로, 제사장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우리는 누구인가? 아직까지 누구의 아이인가?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나타났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존중할 것이요, 바른 행실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증언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사무엘의 엄마 한나가 기도를 통해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알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주님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로 내려가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다시 돌아오게도 하신다. 주님은 사람을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유하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신다.”는 것을 고백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사무엘처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면,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귀를 기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한나의 아이는 성장하여,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장성한 사무엘이 되었다. 우리는 어떠한가? 아직도 아이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그리스도인인가?



기도문


주여,

한나의 아이 사무엘이 장성한 사무엘이 되어

주의 말씀을 듣고 거룩한 행실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선한 일꾼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영적으로 성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가는

신실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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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1. 13. 12:08

도피성의 사회학

(여호수아 20:1-9)

 

첫번째 질문: 하나님께서 정하신 도피성은 누구를 위한 제도입니까? (3) 이것은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위한 제도이다. 여기서, ‘부지중에 실수로라는 말과 사람을 죽인 자가 대립하고 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은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으나, ‘부지중에 실수는 법의 보호를 받는다.

 

그런데, 이것이 참 애매한 일이다. ‘부지중에 실수는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 죽인 자가 내가 죽였다라고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요즘 보니 그런 사람들이 더러 있긴 하다. 테러조직들이 그렇다. 특히 IS는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테러의 배후를 자처하고 나선다. 그것은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전략일 뿐이다. 사람은 사람을 죽이면 자신이 죽였다고 하지 않는다. 최초의 살인자, 가인 때부터 그랬다.

 

두번째 질문: 도피자는 누구에게 자기의 사건을 말해야 합니까? (4) 도피자는 도피성 문 어귀에 서서 그 성읍의 장로들에게 자기의 사건을 말해야 한다. 장로들은 그 지역의 어른들을 말한다. 어른이 되는 일은 참 쉽지 않다. 어른은 부지중에 실수사람을 죽인 자라는 대립을 분간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그 둘 사이의 대립을 지혜롭게 분간하지 못하면, 살인자를 불의하게 용납하거나 또는 부지중에 실수로 저지른 일에 불의하게 철퇴를 가할 수 있다.

 

세번째 질문: 도피성이 있는 곳은 각각 어디입니까? (7~8) 도피성은 요단강 서편(가나안땅) 세 곳, 요단강 동편 세 곳, 총 여섯 군데 있다. 요단강 서편의 도피성은 납달리 산지 갈릴리 게데스와 에브라임 산지의 세겜과 유다 산지의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이다. 그리고 요단강 동편의 도피성은 르우벤 지파의 베셀과 갓 지파 중의 길르앗 라몬과 므낫세 지파 중의 바산 골란이다.

 

여호수아에서 도피성 이야기는 각 지파별 기업을 모두 나눈 후에 나온다. 다시 말하자면, 도피성은 땅을 분배하기 전 먼저 떼 놓은 것이 아니라, 땅을 모두 분배하고 그 중에서 다시 선별한 것이다. 받기 전에 떼어 놓는 것은 아까워하지 않을 수 있으나, 받은 후에 다시 내놓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일에 서쪽에서는 납달리 지파, 에브라임 지파, 유다 지파가 참여하고, 동쪽에서는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지파가 참여한다. 물론, 요단강 동편의 지파는 모두 참여한 것과 같다.

 

그들은 그들의 성읍 중 하나를 도피성으로 선뜻 내놓을 수 있었을까? 선정된 성읍은 반발이 없었을까? 이것은 단순히 받은 땅을 다시 내어놓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도피성을 만든 이유는 사회정의를 세우기 위함이다. 더군다나, 그 성은 살인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살인자 앞에 부지중에 실수로라는 수식어가 붙긴 하지만, 자신의 거주지에 살인자를 들이는 일은 쉽지 않다.

 

현대 사회에서도 사람들 사이에서 혐오시설로 분류되어 입주를 꺼리는 것들이 있다. 얼마 전에 한국에서 큰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시설은 발달장애아동학교였다. 입주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 시설이 들어오면 집값이 떨어지고, 자신의 정상아이들이 영향을 받아 교육에 좋지 않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에 대해, 장애아동을 둔 부모들은 무릎을 꿇고 자신의 자녀들이 동등하게 교육받을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고, 장애아동은 혐오스런 존재가 아님을 눈물로 주장했다.

 

이러한 사건을 보면서,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보통 사람들은 정의를 자기 자신에게만 적용한다. 보통 사람들에게 정의란 내가 잘 먹고 잘사는 생존이다. 남의 아픔과 고통이 내 땅값을 떨어뜨리면 안된다. 나에게 아픔과 고통은 땅값이 떨어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도피성으로 자신의 성읍을 내놓은 사람들은 정의에 대한 개념을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사실, 도피성은 일종의 감옥이다. 도피성으로 피한 자는 두 가지가 충족될 때까지 도피성을 떠날 수 없었다. 도피성으로 피한 자는 회중들에게 자신의 결백을 입증해야 했고,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나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도피성은 공동체(사회)를 정의롭게 세워 나가고자 하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의 의지이다. 무분별한 피의 복수는 정의로운 사회를 세우지 못하고, 결국 공동체를 허물어 버리기 때문이다. 도피성으로 피한 살인자는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하여 성실하게 살았을 것이고, 도피성의 회중들은 그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을 것이다. 도피성으로 피한다는 것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다. 도피성으로 피하면 죄를 지어도 아무런 해를 당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때로 우리는 도피성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러한 상징에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마치, 죄를 지어도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피하면 아무 죄가 없는 것이 되고 해를 당하지 않고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에게 피한다는 것,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책임을 끝까지 져야 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당신의 피조물들을 끝까지 책임지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가나안 땅을 주시면서 그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을 주신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받았다. 도피성은 그들이 받은 것을 하나님께 다시 돌려드리는 (십일조) 헌금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은 정의를 세우는 일에 쓰여야 한다.

 

도피성의 사회학은 사람을 살리고 사회를 평안케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긴, 하나님의 통치이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맞다면, 하나님께 다시 돌려드리는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모든 것을 통해서 사람을 살리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사회를 평안케 하는 일에 써야 할 것이다.

 

무엇인가를 소비하고 드릴 때 이것이 도피성처럼 사람을 살리고 사회를 평안케 하는 것인지,’ 잠깐만이라도 생각해 보고, 소비하고, 드리고, 행하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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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1. 11. 01:38

든든한 신앙 공동체 세우기 운동

(에스라 8:15-20)

 

오늘은 주현절이다. 공현절이라고도 한다. 교회력은 주현절을 지키며, 성경에 나오는 두 가지 이야기를 묵상한다. 하나는 동방박사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세례 이야기이다. 주현절(Epiphany) 또는 공현절은 예수의 신분(정체)이 세상에 공적(public)으로 드러난 것을 기념한다.

 

별을 보고 찾아온 동방박사 세 사람은 그 때 당시 유대 땅을 다스리던 헤롯대왕을 찾아가 유대인의 왕, 아기 예수가 태어난 곳을 물었다. 그 일로 인해 유대 땅에는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다. 그 소란을 성경은 이렇게 전한다.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2:16).

 

위의 일이 있은 후 오랫동안 예수님의 모습은 드러나지 않다가, 세례 요한이 등장한 후 예수님은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신다. 그 일은 바로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는 이야기이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이런 소리가 들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3:17).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예수님이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서 마귀에게 시험 당하시는 이야기이다.

 

공현’, 즉 공적으로 세상에 드러나는 일은 위험한 일이다. 동방박사 이야기나 예수님의 세례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이 세상에 공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위험한 일이 닥쳤다. 동방박사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애굽으로 몸을 피신해야 했고, 세례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며 그 시험을 감당해야 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대한 위험성을 잘 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감추는 일에 더 신경을 쓴다. 세상은 자기 자신을 공적으로 드러내는 기술보다는 자기 자신을 숨기는 기술을 발전시켜 왔다. 성형수술과 소셜 미디어가 대표적이다. 성형수술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숨기는 기술이다. 오래 전, 김아중이 주연한 영화 <미녀는 괴로워>를 보면, 이야기의 주인공은 뚱뚱하고 못생긴 외모 때문에 힘든 일을 겪자 성형수술을 감행하는데, 그 이후 예뻐진 주인공은 예쁜 외모 뒤에 숨어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좌충우돌한다.

 

셜 미디어도 마찬가지다. 최근 페이스북이 많은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사람들은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같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숨긴다. 거기에 드러나는 삶의 모습은 실제 삶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고, 얼마든지 조작 가능하다. 행복을 연출할 수 있고, 자신의 이력이나 관심사를 조작할 수 있다. 사람들은 소셜 미디어에 올라오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보고 자기 자신과 비교한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의 삶에 실망한다. 심지어, 남과의 비교 때문에 처지를 비관해 자살하는 사람도 있다.

 

자기를 드러내는 일도 위험하지만, 자기 자신을 숨기는 일도 위험하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숨기 일은 위험한 것을 넘어서 비겁한 것이다. 자신의 인생, 그리고 타인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이다. 책임지지 않는 것만큼 위험하고 비겁한 일이 어디 있나.

 

공현은 자기 인생과 이 세상에 대한 책임이다. 연예인처럼 유명해지는 것과 자기를 세상에 공적으로 드러내는 일은 완전 다른 일이다. 유명한 연애인도 자기 자신을 감추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예수님의 공현(주현절)은 자기 인생과 이 세상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드러낸 이야기이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숨기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어, 세상의 죄악과 싸우며, 자기를 드려 이 세상을 구원하셨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과 다른 것 중의 하나는 자기 자신을 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을 공현한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인생과 이 세상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그러한 인생을 살기로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자리가 바로 세례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세상에 공적으로 드러내어 자기 인생과 세상에 대하여 책임지며 살아가겠다고 선언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이다. 그래서 교회는 정의롭고 생동감이 넘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교회(에클레시아)세상으로부터 불러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성경에서 세상은 어둠으로 묘사된다. ‘어둡다는 것은 감춘다는 뜻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감출 때 어두운 곳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자를 빛으로 불러내신다. 하나님에 의해 어둠 속에서 불러내짐을 받고, 이제 빛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이다. 빛 가운데서 사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감추지 못한다. 아니, 감추지 않는다.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하여 책임질 줄 안다.

 

우리가 오늘 함께 읽은 에스라의 말씀은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바벨론이라고 하는 어둠 속에서 부름을 받고 빛 가운데로 나와서 자기의 인생과 세상에 대하여 책임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에스라는 두 번째 포로귀환을 이끈 인물이다. 구체적으로 오늘 이야기는 아닥사스다 왕이 왕위에 있을 때의 이야기인데, 이는 BC 458년을 말한다. 첫 번째 포로귀환은 고레스 칙령에 의해서 BC 538년에 있었는데, 그때 포로귀환을 이끈 인물은 스룹바벨이었다. 2차 포로귀환은 1차 포로귀환이 있은 후, 80년 정도 뒤에 일어난 일이다.

 

80년이라는 세월은 적지 않은 세월이다. 3세대가 지난 세월이다. 3세대 정도면 아무리 포로로 잡혀갔더라도 그 땅에 뿌리를 내리고도 남을 기간이다. 우리도 그렇지만, 2세대인 우리의 자녀들도 한국에 가서 살라고 하면 한국에 가는 것을 꺼려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에스라가 이끄는 제 2차 포로귀한 멤버들은 이미 바벨론 땅에 정착해서 살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부르심과 소망은 단 하나였다. 예루살렘 신앙 공동체의 회복이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돌아가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을 재건하고, 거기에 성전을 다시 지어 하나님과의 언약을 회복한 뒤,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사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이들은 하나님과의 언약대로 든든한 신앙 공동체를 세우고자 했다.

 

에스라는 이 비전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든든한 신앙 공동체를 함께 세울 사람들을 불러모은다. 에스라와 귀환공동체는 아하와 강가에서 삼일 머물면서 일행을 점검한다. 그런데, 에스라는 귀환공동체 가운데 레위인들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들이 귀환하는 이유는 든든한 신앙 공동체를 세우기 위함인데, 제사를 드리며 율법을 가르치는 사명을 맡은 레위인들이 없다는 것은 앙꼬 없는 찐빵과 같은 형국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감춘 레위인들을 본다. 레위인들이 귀환 행렬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는 예루살렘 귀환 시 자신들에게 부과될 과중한 사역의 염려 때문이었다. 어렵고 힘든 일을 감당하는 일은 쉽지 않다. 게다가 이미 정착해서 잘 살고 있는데, 아무리 그곳이 고향이라고 하더라도, 삶의 터전을 옮기는 문제는 쉽지 않다.

 

그래서, 에스라는 귀환공동체 중 학식 있는 사람들을 불러 바벨론 내의 유대인 정착촌인 가시뱌 지방의 족장 잇도에게 보내 예루살렘에서 봉사할 성전 종사자들을 모아 줄 것을 부탁한다. 에스라에게 파송을 받은 명철한 사람(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사람과 가시뱌 지방의 족장 잇도는 분명 레위인들에게 말씀에 근거한 비전을 제시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비전에 마음이 움직인 레위인들은 모두 39명이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레위인들을 따라 나선 220명의 성전 수종자들을 보게 된다. 성경은 그들을 일컬어, ‘느디님이라고 부른다. ‘느디님은 누구일까? 역대상 9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그들의 땅 안에 있는 성읍에 처음으로 거주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느디님 사람들이라”(대상 9:2). 그리고 느헤미야 7장은 포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 신앙공동체를 재건한 사람들 중 느디딤 사람들의 족보를 적고 있다.

 

느디님은 히브리어를 그대로 음역한 것이다. 그 뜻을 직역하면, ‘주어진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레위인들에게 주어진 노예들이었다. 민수기(31:30)에 보면, 전쟁포로의 일부를 레위인들에게 주어 그들의 성전봉사를 돕게 한 일이 있다. 그들은 원래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었지만, 포로나 노예로 이스라엘 민족에 편입되었고, 특별히 레위인들에게 귀속되어 성전 봉사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다. 그들의 운명은 레위인들의 손에 달린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들은 레위인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갈 때 함께 그곳의 포로로 끌려갔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느디님 사람들은 바벨론에서 레위인들의 통제에서 벗어나 얼마든지 자신들만의 삶을 추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레위인들과 함께 성전 봉사하는 일 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레위인들과 함께 성전의 일을 감당하면서 느디님 사람들은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만날 기회를 가졌다. 포로로서, 노예로서 처음에는 자기들이 하는 일의 가치를 잘 몰랐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시편 348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 시편의 말씀처럼, ‘느디님 사람들은 성전에서 봉사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께 피한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해를 맞아서,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신앙 공동체를 든든히 세워 나가고자 한다. 2018,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신 말씀은 에스라 817절의 말씀이다.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섬길 자를 데리고 오라!” 오늘 말씀을 보면, 이 말씀에 응답한 사람들의 숫자가, 레위인들 39명과 느디님 사람들 220, 도합 259명이었다. 거기에 더해,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에스라 8장의 전반부 말씀을 보면, 예루살렘에 가서든든한 신앙 공동체 세우기 운동에 참여하겠다고 나선 제사장과 다윗 자손(왕족)12족장의 자손들의 숫자를 보면, 1,514명이다. 거기에 그들의 부인들과 자녀들까지 합하면, ‘든든한 신앙 공동체 세우기 운동에 참여하겠다고 결심하여 이미 정착한 바벨론의 삶을 뿌리치고 따라나선 사람들의 숫자가 5,000명가량 된다.

 

이들은 바벨론 제국이 주는 안락한 삶에 머물며 그 안에 자기 자신을 숨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에스라를 따라 나섰다. 제사장들이나, 다윗 자손(왕족), 12족장의 자손들, 그리고 바벨론 포로 전에는 전혀 존재감이 었었던 느디님 사람들, 이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바벨론을 떠나 무너진 예루살렘을 다시 세우기 위해 떠난 이유는 단 하나이다.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안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다 안 사람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아 하나님 품에서 살기 원한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세상에 숨어 있지 않고, 자기 모습을 드러내어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하여 책임 있는 자로 살아간다.

 

우리도, 2018년도를 기점으로,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섬길자를 데리고 오라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를 숨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든든한 신앙 공동체 세우기 운동에 참여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것을 에스라 프로젝트라 한다.)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무너진 성벽과 성전을 다시 세운 자들의 이름이 에스라와 느혜미야에 당당하게 기록된 것을 본다. 거기에는 전혀 존재감 없었던 느디님 사람들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마치, 라합과 룻이 예수님의 족보에 당당히 기록된 것과 같은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는 이미 교회이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진실로공현한 그리스도인인가? 우리는 우리 인생과 이 세상에 책임 있는 자로서 살아가고 있는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든든한 신앙 공동체 세우기 운동에 참여하는 신실한 주의 백성들, 자기 자신을 공적으로 드러내어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세화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 부르심에 응답할 때, 우리의 이름이 생명록에 기록될 줄로 믿는다. 아멘.

 


기도문

 

주님, 우리는 동방박사를 통하여, 세례 요한의 세례를 통하여

이 세상에 공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신 주님을 바라보고 찬양합니다.

세상에 공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위험한 일이지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어려움을 모두 이겨내고

자기의 인생과 이 세상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감당하여

십자가 위에서 세상을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살고자 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섬길 자를 데리고 오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든든한 신앙 공동체 세우기 운동에 책임감을 가지고 참여하겠사오니,

우리를 들어 쓰셔서 주의 거룩한 나라를 이루시옵소서.

자기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어

십자가 위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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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1. 11. 01:34

내 삶의 여리고성

(여호수아 6:15-27)

 

유명한 여리고 성 이야기이다. 여리고 성은 가나안 최고(最古)의 성이었다. 가장 오래된 성이었다. 그 성이 무너졌다. 엄청난 일이다.

 

첫 번째 질문: 여리고 성이 무너졌을 때, 산 자는 누구입니까?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 이는 우리가 보낸 사자들을 그가 숨겨 주었음이니라”(17)

è 라합과 그의 가족들은 모두 살았다.

 

두 번째 질문: 여리고 성벽을 무너뜨리는 데에 사용된 도구는 무엇입니까?

이에 백성이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패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20).

è 제사장의 나팔소리에 맞춰 소리지르다! (말씀에 맞춰 행했을 때)

 

세 번째 질문: 여리고 성을 재건하는 자는 어떻게 된다고 하였습니까?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 하였더라”(26).

è 저주를 받을 것 (맏아들과 막내아들을 잃을 것 자손이 중요한 시절에 자손을 잃는 것, 모든 것을 잃는 것)

è 열왕기상 1634절에 보면 (누가 찾아서 읽어보시라),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여리고 성을 재건하려 했던 인물이 나온다. 그의 이름은 히엘이었다. 히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살아계시다!’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이름을 가진 자가, 하나님이 죽은 것처럼 살았다는 뜻이다.

 

내 안에 있는 여리고 성에 대하여 말해보자. 최고로 오래된 것 오래된 나쁜 습관, 오래된 불순종.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성이 무너지면, 우리의 삶이 무너질까봐.

 

그러나, 그러한 걱정을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위의 히엘처럼 하나님이 죽은 것처럼 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있는 여리고 성을 무너뜨려도 우리의 삶은 안전하다. 죽지 않는다. 구원 받는다. 더 잘 된다.

 

우리는 그것을 라합에게서 본다. 라합이 구원 받은 이유가 무엇인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처럼 행동했기 때문이다. 유대인이면서 하나님이 죽은 것처럼 행동했던 히엘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처럼 사느냐, 아니냐가 중요하다.

 

약속의 하나님을 믿고, 내 삶의 여리고 성을 무너뜨려야 한다. 그러면, 구원 받는다. 우리의 영혼과 몸을 서서히 죽이는 오랜 나쁜 습관이나 오래된 불순종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내 안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방법도 중요하다. 우리는 우리 안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 인간적인 결심으로 한다. “그래, 올 해부터는 이거 안 할거야. 또는 그래, 올 해부터는 이거 할거야.” 그런데, 얼마 못 가서, 그러한 결심들이 희미해지고, 여리고 성이 내 안에 그대로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면, 절망만 깊어질 뿐이다. ‘나는 역시 안 돼.’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 사용한 도구는 결심이 아니라, 말씀과 순종이다. 그들은 여리고 성을 무너뜨려야지이렇게 결심하고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그 말씀에 순종해서, 엿새 동안은 하루에 한 바퀴씩 조용히 돌고, 마지막 칠일 째는 일곱바퀴 돌면서, 마지막에 제사장의 나팔 소리에 맞춰 함성을 질렀다.

 

내 삶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을 만나는 일이다.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앞에 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들은 그 성을 어떻게 무너뜨릴 지 몰라, 우왕좌왕했을 것이다. 또는 그들의 계략과 힘으로 무너뜨리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했을 것이다.

 

이것은 다음 성이었던, 아이 성 사건에서 드러나는 일이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만나고, 그 말씀대로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아이 성을 무너뜨리러 나갔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만나고 가지 않았다. 그들은 그냥 나갔다가, 엄청난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고 나가서 아이성을 무너뜨리는 것을 본다.

 

내 삶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열망은 누구나 있다. 그것이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열망은 있으되,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은 없지 않은가.

 

새해 첫 주간을 보내면서, 우리는 올 한 해, 이랬으면 좋겠다, 저랬으면 좋겠다, 하는 소망을 가지고 시작했다. 그러나, 그렇게 우리 삶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기 바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만나지 못하면, 라합처럼 구원 받지 못할 뿐더러, 여리고 성이 무너지기는커녕, 아이성처럼 도리어 나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

 

이 점을 명심했으면 좋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삶에 있는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열망을 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이 더 간절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면, 그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삶에 있는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더 큰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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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1. 4. 08:52

행복하자

(요한 1 3:13-24)

송구영신예배


1938년부터 하버드 대학에서 [어른의 성장에 관한 연구]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거의 80년 동안 진행된 이 연구에서 밝혀내고자 한 것은, 무엇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가이다. 결론은 이것이다. “질 좋은 관계가 행복을 불러온다.”

 

이 연구를 지위하는 월딩거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우리가 찾아낸 결론은, 자신의 인간관계에 제일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 그리고 남들과 연결관계가 강한 사람, 그 사람의 몸과 마음에 깊게 연결된 사람이 더더욱 오래 건강을 유지했습니다.”

 

질 좋은 인간관계라는 개념에 대해 정의에 관해서도, 윌딩거 교수는 당신이 믿을 수 있으며, 당신이 당신다울 수 있는 인간관계가 그러하다.”고 말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당신이 비난받는 기분을 느끼지 않고, 당신이 언제든지, 상대가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인간관계라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인간관계는, 가족이거나, 연인일 수도 있고, 친구와의 우정일 수도 있다.

 

그 프로젝트에서는 돈과 명예와 행복의 상관 관계에 대해서도 연구를 했는데, 결론적으로 돈과 명예는 일종의 장막이나 연막의 역할만 할 뿐 행복의 조건이 아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돈과 명예가 있으면 더 행복하거나 남들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가 될 거라는 생각을 갖는다. 그러나 실제로 인생에서 돈과 명예는 새로운 인간관계는 가져올지언정, 그들 중 대부분은 결코 진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위해 돈과 명예를 추구하지만, 그와 연결된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진정한 애정은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바로 사랑이 질 좋은 관계를 만들어 낸다. 도식은 이렇다. 사랑 à 질 좋은 관계 à 행복한 삶. 쉬워 보이는데, 왜 우리는 행복하지 못할까? 질 좋은 관계를 만들어 내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위의 연구에서 말하기를 질 좋은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진실함과 친절함, 인내심, 그리고 친밀감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영국인이 세익스피어 다음으로 사랑하는 영국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영국의 여성 작가, 제인 오스틴이 쓴 <오만과 편견 Pride and Prejudice>이라는 소설이 있다. 지금 다시 읽으면 어떨지 모르겠는데, 예전 20대 때에 이 책을 읽을 때는 좀 지루했었다. 이 책의 원제목은 <첫인상>이었다. 한 남자(다시)와 한 여자(엘리자베스)가 서로가 서로에게 받은 첫인상 때문에 서로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다가, 결국 서로의 가치를 발견하고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이다.

 

여자는 남자가 오만하다고 생각했고, 남자는 여자가 자신을 편견을 가지고 본다고 생각했다. 오만과 편견은 서로에 대하여 오해를 갖게 만들고, 관계의 평행선을 긋게 만든다. 그들이 서로 사랑을 나누게 되는 것은 남자가 자신의 오만을 인정하고, 여자가 자신의 편견을 벗어던지기로 한 순간부터이다. 이 말은 이러한 것을 뜻한다.

 

편견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고, 오만은 누군가가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든다. (고전 결박을 풀다, 154)

 

질 좋은 인간관계를 만드는 데 첫 번째로 방해 요소가 되는 것은, 위의 소설이 말하고 있듯이, ‘오만과 편견이다. 오만은 내가 남보다 약간 잘난 요소가 있으면 남을 깔보는 것이다. 소설 <오만과 편견>에서 남자가 오만했던 이유는 남자는 귀족이었고, 여자는 귀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편견은 자기와 다른 요소가 있으면 마음에서 밀어내는 것을 말한다. 소설 <오만과 편견>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편견을 가진 이유는 남자가 자신과 다른 신분을 가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 자신도 모르게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오만과 편견을 발견한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행복의 조건인 질 좋은 인간관계를 만드는데 큰 해가 되는 것을 안다면, 어떻게서라도 내 안에 있는 오만과 편견을 조금씩 깨 나가는 게 좋다.

 

오늘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다. 성경의 말씀은 정말 아름답다. 이보다 아름다운 말씀이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14). 사랑하지 않으면, 죽은 자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얼마나 죽은 자처럼 사는가. 끔찍하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서로를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며 산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15). 사람을 죽이는 것만 살인이 아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살인이다. 그러니, 우리는 얼마나 살인자로, 흉악범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16).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고,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은 신앙과 정비례한다. 신앙이 좋다는 것은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고, 사랑이 많다는 것을 말한다. 신앙이 좋다면서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주님을 기만하는 것이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18). 나는 이 말씀을 사모한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를 실천하기 위해서, 결혼 7년 주년 때, 꽃다발이나 선물대신 생명보험을 들어서 집사람에게 주었다. 그랬더니, 너무 좋아했다. 우리 집사람은 매일 나에게 이런 말을 한다. 정말 나를 사랑하면, 이불부터 개라고. 말과 혀로는 하늘의 별도 수백 개 따다 주지만, 행함과 진실함으로는 설거지 한 번 안 하는 게 남편들의 형편이다.

 

우리는 모두 행복을 꿈꾼다. 한국에 자이언티라는 가수가 있다. 목사님 아들이다. Zion은 시온을 말하고, T는 십자가를 가리킨다. 자이언티는 시온(예루살렘, 골고다)의 십자가라는 뜻이다. 목사님 아들답게 이름도 복음적이다. 어머니가 목사이고, 아버지는 택시기사이다. 아버지를 생각하며 만든 <양화대교>라는 노래가 있다. 정말 유명한 노래이다. 가사가 이렇다.

 

[Verse 1]

우리 집에는 매일 나 홀로 있었지

아버지는 택시드라이버

어디냐고 여쭤보면 항상 "양화대교"

 

[Verse 2]

아침이면 머리맡에 놓인

별사탕에 라면땅에

새벽마다 퇴근하신 아버지

주머니를 기다리던

어린 날의 나를 기억하네

엄마 아빠 두 누나

나는 막둥이, 귀염둥이

그 날의 나를 기억하네

기억하네

 

[Hook 1]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그래 그래

 

[Verse 3]

내가 돈을 버네, 돈을 다 버네

"엄마 백원만" 했었는데

우리 엄마 아빠, 또 강아지도

이젠 나를 바라보네

전화가 오네, 내 어머니네

뚜루루루 "아들 잘 지내니?"

어디냐고 물어보는 말에

나 양화대교 "양화대교"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그래 그래행복하자. 우리 모두의 소망이다.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 하버드 프로젝트나,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나,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한일서의 말씀이나,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일관되게 말하고 있다.

사랑하라.

 

윤동주 시인이 자신의 시 십자가에서 예수를 이렇게 표현했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 예수가 괴로웠던 이유는 십자가에 달렸기 때문이고, 예수가 행복했던 이유는 그가 모든 인류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가 십자가에 달린 이유는 사랑 때문이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23). 사랑하는 일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인 일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계명(명령)이다. 사랑하는 일이 우리의 계명이라는 뜻은 우리 인생의 최고의 목적은 행복이라는 뜻이다.

 

이 도식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랑 à 질 좋은 관계 à 행복한 삶. 나는 새로운 해를 맞아 여러분과 하나님 앞에서 선언한다. 나는 사랑하라는 계명을 힘써 지킬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행복한 삶을 원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계명, 사랑하는 일을 성실히 행하는 자에게, 행복의 은혜를 부어주실 줄 믿는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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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1. 4. 08:51

시므온과 안나가 만난 예수

(누가복음 2:20-40)


마지막 주일이다. 공교롭게도 마지막 주일과 마지막 날이 겹쳤다. 달력은 마지막 날을 가리키지만, 교회력은 성탄절 후 첫 번째 주일이다. 성탄절 후 첫 번째 주일이라는 뜻은, 우리는 아직도 성탄절기를 보내고 있다는 뜻이다. 성탄절은 25일 하루만 지키고 마는 행사가 아니라, 우리의 삶, 우리의 시간에 새겨진 도장같은 것이라는 뜻이다.

 

언젠가부터 성탄절이 되면 한국에서는 타종교에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라는 현수막을 거는 현상이 생겼다. 그리스도인들도 아무렇지도 않게, “성탄을 축하합니다.”라는 말을 쓴다. 그러면서, “예수님, 생일 축하해요.”라며,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른다. 이것은 성탄절에 대한 명백한 오해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기독교인들이 1225일을 성탄절(Christmas)’로 지키는 이유는 그날 예수님이 탄생했기 때문이 아니다. ‘성탄절은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이다. 기독교 중에서도 다른 전통에 서 있는 동방정교회 같은 경우는 1225일이 아니라, 16일이 성탄절이다. 우리가 쓰는 달력은 1582년 그레고리오 교황이 만든 그레고리 달력이다.

 

로마제국의 전통을 계승한 가톨릭이나 개신교가 쓰는 달력과 비잔틴 전통을 이은 동방정교회가 쓰는 달력은 다르다. 전통에 따라 계산법이 달라, 현재 가톨릭이나 개신교는 1225일을 성탄절로 지키고 있지만, 동방정교회는 16일을 성탄절로 지키고 있다. 우리는 성탄절을 이미 보냈지만, 동방정교회 입장에서는 아직 성탄절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날짜를 가지고 싸우지 않는다. 교회의 전통마다 성탄절의 날짜가 다른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또 그렇게 다르기 때문에 성탄절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짚어 보게 되는 것이다.

 

초대교회부터 성탄절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복음서보다 먼저 쓰여진 (바울) 서신서에는 예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다. 서신서가 관심을 갖는 것은 오직 예수의 십자가(죽음)와 부활, 그리고 재림이다. 이 말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의 탄생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단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이단은 영지주의자였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은 실제 육신을 가진 분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로서 잠시 이 땅에 왔다 하늘로 다시 올라간 존재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기독교의 핵심 전통 교리로 누구나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성육신에 대하여 부정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한다.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 이것을 부정하면,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니다.그런데, 영지주의자들은 성육신을 부정했다. ‘성탄절 이야기성육신을 부정하는 자들에 대한 정통 기독교의 대응이다.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시다!”

 

입장에서, 타종교가 성탄절에 내거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라는 문구는 복음의 왜곡이다. 예수님의 탄생은 여느 인간이 탄생한 것처럼 축하 받을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 없이 예수님의 탄생 축하운운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 신성모독이다. (물론 그러한 일은 다종교 사회에서 종교 간의 평화를 위해서 필요한 몸부림이기도 하다.)

 

오늘 복음서의 이야기는 예수의 탄생 이야기가 신앙고백이라는 것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오늘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구약에 제시된 제사법을 잘 알아야 한다. 유대인들은 아들을 낳으면 팔일 째 되는 날 할례의식을 행했다. 율법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첫 (남자) 자식과 동물의 첫 수컷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살기 위해서는 대속이 필요했다 (13:2, 11-15, 8:16-17).

 

그러한 의식의 역사적, 신학적 근거는 출애굽 사건 때 일어난 유월절 사건이다. 출애굽 당시 열 번째 재앙은 애굽의 모든 사람이나 짐승의 장자(첫 새끼)를 죽이는 재앙이었는데, 유월절 양의 피를 문지방에 바름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장자와 첫 새끼들은 모두 구원 받는다.

 

그리고, 또 하나 등장하는 의식은 정결예식이다. 정결예식은 레위기 12장에 나오는데, 모든 산모는 아이를 낳은 후 산혈로부터 깨끗해지지 않으면 성전에 접근하거나 성물에 접촉할 수 없다. 산모는 일정 기간이 지나 성막으로 가서 제사장에게 1년된 양 한마리와 비둘기 한 마리, 혹은 형편이 어려우면 비둘기 두 마리로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는 것을 통해서 정결케 되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의 말씀에는 할례와 정결예식 두 가지가 동시에 이뤄지는 것으로 나온다. 특별히 요셉과 마리아가 정결예식을 드리기 위해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했다는 것을 보면, 그들의 살림이 넉넉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예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는 율법대로 성전에서 할례와 정결예식을 행하기 위하여 성전으로 갔다. 그런데, 성경은 그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27). ‘성경의 감동에 이끌려 성전에 들어선 아기 예수는 그곳에서 두 사람을 만난다. 한 명은 시므온이고, 다른 한 명은 안나이다.

 

시므온과 안나가 마침 예식을 행하기 위하여 성전에 들어간 아기 예수를 만난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이다. 성경은 시므온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1) 그는 의롭고 경건했다. 2)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다. 3) 성령께서 그 위에 계셨다. 한 마디로, 시므온은 성령의 임재를 통해 성숙한 신앙과 종말론적 신앙을 유지한 신앙인이었다. (생명의 삶 플러스, 20171월호, 262)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안고 하나님께 이렇게 찬송한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시는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29-32).

(이 말씀은 내가 성찬식 후에 기도드릴 때 사용하는 기도문 문구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으며, 구원을 눈으로 본다.)

 

그리고, 이어서 아기 예수를 알아본 두 번째 인물이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안나다. 안나는 시므온과 다른 방식으로 소개되고 있다. 안나는 여자 선지자였고, 아셀 지파 출신이고, 나이가 많았다. (과부가 되고 84세가 되었더라. 과부가 된 지 84년이 되었거나, 나이가 84세이다. 어느 것이든, 그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많은 나이다.) 그리고 안나는 성전에 머물면서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했다. 그러한 안나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한다.” 안나는 아기 예수가 누구인지 드러냈다. 예수는 그리스도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서 아기 예수와 조우한 시므온과 안나의 입술을 통해서 아기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신앙고백을 한다. ‘아기 예수는 모든 이를 속량할 구원자, 즉 메시아이시다.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왔다. 그러니, 우리는 기뻐하고 감사하며 찬양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성경이 전하는 예수의 탄생 이야기이다.

 

시므온과 안나가 만난 예수는 구원자, 메시야, 그리스도였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를 누구로 만나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는 무엇, 또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는 무슨 소망을 가지고 있는가? 성탄절기를 보내면서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들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쓴 <세계의 수도 The Capital of the World>라는 단편 소설이 있다. 거기에 보면, 탕자처럼 집 나간 아들과 그를 애타게 찾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들을 찾을 수 없자, 아버지는 신문에 한 줄 광고를 낸다. “파코야,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가.” 아버지는 신문광고대로 아들이 몬타나 호텔에 나와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곳에 갔다. 그런데,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호텔 앞에는 파코라는 이름을 가진 800명의 청년이 모여 있었던 것이다.


스페인에서 파코는 매우 흔한 이름이다. 그 광고를 보고 800명이나 모여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아버지의 용서를 받고, 아버지와 화해하고, 위로받고 평안 가운데 살고 싶은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인간은 누구나, 용서 받고, 화해하고, 위로 받고, 평안 가운데 살기를 바란다. 우리는 모두 파코이다. 시므온과 안나도 그랬다. 그런데, 그들은 일생이 다 가도록, 그 어느 것에서 참된 위로를 받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며, 인내하고 인내하며 모진 세월을 견디며 살았다.

 

그런데, 그들은 주님의 약속대로 죽기 전에 하나님의 위로(구원)’를 만났다. 그 위로(구원)는 바로, 아기 예수였다. 참된 위로와 구원을 만난 시므온은 마침내 평안 가운데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29). 그리고 안나는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을 만난 뒤, 그 위로와 평안을 기다리는 모든 자들에게 전한다.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38).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탄절기를 보낸다. 성탄절기, 그리고 성탄절기가 자리잡고 있는 연말에 우리는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감사하기도 하고 후회하기도 한다. 그 두 가지의 감정을 뒤섞어, 먹고 마시며 논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시므온과 안나의 삶에 대해서 묵상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의롭고 경건하게, 성숙한 신앙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며 살았던 시므온.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겼던 안나. 그들의 신앙을 보면서, 우리의 신앙은 어떠한 신앙인지 돌아보야 한다.

 

우리도 시므온처럼 그리고 안나처럼 성숙한 신앙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며 살면, 아기 예수의 탄생이 여느 한 인간의 축하 받아야 할 탄생이 아니라, 그것을 훨씬 넘어선,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는 위로와 구원의 성취라는 것을 깨달아, 우리도 시므온과 안나처럼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나이다!”라고 고백하며, 살든지 죽든지,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다.


시므온과 안나의 신앙으로 함께 고백해 보자.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나이다!” 아멘.

 


기도문

 

주여,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성탄절기에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시므온과 안나의 경건한 신앙과

종말론적 신앙을 본 받아,

우리도 그들처럼 이렇게 신앙고백합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나이다!”

위로를 기다리는 자에게

구원을 기다리는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안겨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눈으로 본 위로와 구원을

세상에 전하며 사는

신실한 주의 종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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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1. 4. 08:45

예수 사건

(마태복음 1:18-25)

 

사건은 시간 속에 일어난 일을 말한다. 사건은 시간에 몸 담고 있는 모든 존재에게 영향을 미친다. 모든 사건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건이 벌어지기 전과 사건이 벌어진 후의 삶은 같을 수 없다. 사람은 특히 사건을 통해 인생이 바뀐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탄생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다. 만약 예수의 탄생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면, 복음서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에 대해서 전하는 바울 서신은 예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 서신에는 예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다. 거기에는 모두 예수의 십자가(죽음)와 부활, 그리고 다시 오심에 대한 이야기만 있다.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예수의 탄생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 같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관점에서 그의 탄생을 조명하기 시작했다. 그것에 대한 이야기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누군가 예수의 탄생에 대한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누군가 당신은 어떻게 해서 이 땅에 태어나게 되었소?’라고 물으면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사람들은 처음부터 누군가의 탄생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의 업적과 죽음을 돌아보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탄생에 관심을 갖게 된다.

 

예수의 탄생에는 아주 특별한 이야기가 삽입된다. 보통 생명이 잉태되는 과정과는 다르다. 보통은 남녀가 결혼하여 동침을 해서 생명을 잉태하게 되지만, 예수는 남녀의 동침 없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 성경의 내용 중 가장 곤혹스러운 내용이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과학시대에 이러한 이야기는 잘못 얘기했다가는 사기꾼이 되기 십상이다.

 

예수의 탄생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존재는 성령이다. 주의 사자(천사)가 요셉의 꿈에 현몽하여 이렇게 말한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20).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된사람이다. 이게 무엇을 말하는가?

 

예수 사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지극하신 역사라는 뜻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을 때, 그리고 부활할 때만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예수는 하나님의 뜻에 안에 있었다는 뜻이다.

 

늘 말씀은예수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세 가지를 말해 준다. 첫째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에서 드러난다. 예수는 예수아(죠쉬아), 즉 여호수아와 뜻이 같다. ‘여호와(하나님)는 구원이시다!’ 우리는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다시 인식하게 된다. 하나님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구약성경에서도 계속 들려지는 이야기다. 특별히, 출애굽 사건은 그것을 극명히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십계명에서도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이유로,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기 위함이 제시된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은 아주 실제적인 것이었다.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 그들의 하나님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선포한다. 성경의 죄는 실정법적인 죄라기보다는 신학적인 죄이다. ,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말해지는 죄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신데, 우리가 죄를 지었다는 뜻은 우리가 생명으로부터 멀어졌다는 뜻이다. 지금도 우리는 생명에서 멀어져, 죽음의 일만 하며 산다.

 

구원이란, 죽음의 일을 하는 나쁜 놈이 예수를 믿으면, 그 사람의 도덕적 상태와 상관없이 그 사람을 천국으로 옮겨준다는 뜻이 아니다. 구원이란 죽음의 일을 하던 존재가 생명의 일을 하는 존재로 변화된다는 뜻이다. 어떻게? 예수를 믿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믿음의 존재와 일치를 이룬다는 뜻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삶과 일치된 삶을 산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예수처럼 십자가를 질뿐 아니라, 예수처럼 죽게 되고, 예수처럼 부활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면, 예수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우게 되는 것이고, 우리가 고난을 받으나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처럼 한나님께 의인으로 인정받아, 반드시 부활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예수 사건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진다는 것을 말해 준다. 예수 사건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생명이란 원래 그렇다.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는 생명 사건이란 없다. 패스트푸드 점에서 하는 것처럼, 자판기에서 뽑는 것처럼,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는다.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소쩍새는 봄부터 울어 댄다. 가을이 되어야 비로소 국화꽃은 핀다.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렇게 조바심 낼 필요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은 인내이다. 그래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가장 마지막에 인내가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기다림(인내)는 지루하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셋째로, 예수 사건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누가 나와 함께 하는지를 아는 것에 따라서 인생은 달라진다. 하나님은 예수와 함께 하셨다. 그가 죽을 때만 아니라, 그가 태어날 때도 하나님은 예수와 함께 하셨다. 예수 사건은 우리가 누구와 함께 있는지를 알려준다. 아무리 어두운 인생의 터널을 지날 지라도 두려워하지 말 것은, 다윗이 고백한 대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의 삶을 지키시기 때문이다.

 

예수의 탄생과 삶과, 죽음과 부활은 사건이다. 그 사건을 경험한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에 대한 이야기가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생명으로 인도되었음을,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믿음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 참된 평안이 넘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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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1. 4. 08:35

내가 살 집

(삼하 7:1-12)


다윗의 이야기를 보면,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모했는지 알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사랑은 아가서에 등장하는 여인의 마음 같다. 어떤 대상에 대한 열망과 사모는 아름다움을 낳는다.

 

본문 앞 이야기는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는 이야기이다.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때,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 앞에서 춤추며 찬양했다. 이 일을 두고 다윗의 부인 미갈은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 일로 인해 미갈은 평생 자식을 갖지 못하는 벌을 받았다.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 앞에서 열심을 내는 일은 귀한 일이다. 그러한 일을 못마땅하게 여기면 안된다. 미갈이 다윗과 함께 하나님의 법궤 앞에서 춤추며 찬양했다면 미갈의 운명은 바뀌었을 것이다. 아마도, 미갈에게서 난 자식이 다윗을 이어 왕위를 굳건하게 이어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다윗의 열심에 대한 미갈의 비웃음 때문이었다. 안타깝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한다.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1). 공간적 배경은 예루살렘이다. 이 말은 예루살렘에 평화가 깃들었다는 뜻이다. 참 감격스러운 말이다. 예루살렘에 평화가 깃든 적이 있었는가?

 

지금도 예루살렘은 평화롭지 못하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선언 때문에 세상이 시끄럽다. 유엔 회원국들이 모여 트럼프 대통령의 예루살렘 지위 결정에 대한 철회를 요구하며 찬반 투표를 했고, 압도적인 표차이로, 트럼프 대통령의 선언을 거부했다. 향후 국제정세가 어떻게 될지, 우려된다.

 

예루살렘의 지위에 대한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보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당연히 이스라엘의 영토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역사를 보면,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영토로 인정된 역사는 그렇게 길지 않다. 예루살렘은 고대로부터 누구나 탐내는 전략적 요충지였고, 그곳을 놓아두고 많은 나라들이 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1948년 이스라엘 정부가 세워지기 전까지 오랜 세월동안 예루살렘은 주인 없는 땅이었다.

 

지금까지도 국제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그만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라는 뜻) 예루살렘을 하나님의 도성으로 세운 장본인이 바로 다윗이다. 그리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가져왔다. 그때 다윗은 이런 생각을 한다. “하나님께 집을 지어드렸으면 좋겠다!”

 

그가 이러한 생각을 한 이유는 양심의 가책 때문인 것 같다. 자신은 백향목으로 지은 궁전에 사는데, 하나님의 궤는 여전히 장막(텐트) 안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선지자 나단을 불러 자신의 속 이야기를 털어 놓는다.

 

그런데, 이야기의 전개를 보면, 다윗의 생각이 그렇게 좋은 생각만은 아닌 것 같다. 우선, 이런 질문부터 해보자. 하나님께 집이 필요한가? 많은 사람들은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사람들은 교회당 건물이 하나님의 집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굉장히 위험하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편재성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편재성이란, 하나님은 어디에든 임재하신다는 뜻이다. 그런데, 성전, 또는 교회로 하나님의 임재를 가두어 놓으면, 사람들은 성전, 또는 교회에서만 하나님을 섬길 뿐, 그 바깥 삶의 영역에서는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성전에 가두어놓고,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만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러한 잘못과 착각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대표적인 예를 아모스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5:21-23).

 

오늘 말씀을 보면, 다윗이 나단 선지자를 불러,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며 여호와께 집을 지어드려야겠다고 했을 때, 하나님은 다윗에게 이렇게 되물으신다.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5). 만약 하나님이 다윗의 계획을 긍정하셨다면, 이렇게 되묻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저 다윗이 계획을 칭찬하셨을 것이다. “아이고, 고맙구나.”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에게 자신이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시던 날부터 이제까지 건축된 성전에 거하지 않고 장막과 성막 안에 거했던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느 지파에게도 자신을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라고 지시한 적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다윗 같은 신앙인이라 할지라도, 지금 본문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윗이 하는 실수를 범할 수 있다.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한다는 부담감 또는 자책감, 그리고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것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집을 짓는 것은 다윗이 아니라,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사무엘하 7장은 소위, 다윗 언약이 세워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다윗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을 영원히 견고케 하시겠다는 약속이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 언약에 대한 신탁을 내리시는데, 하나님은 다윗에게 세 가지를 약속하신다. 다윗의 집, 다윗의 나라, 그리고 다윗의 왕위에 대한 약속이 그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가지를 영원히 보전하시고, 영원히 견고하게 만들겠다고 약속하신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다윗 언약이 중요한 이유는 이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대림절 네번째 주일을 맞아, 사무엘하의 말씀과 함께 읽어야 하는 말씀은 누가복음이다. 누가복음 1장에는 가브리엘 천사가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한다.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니리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는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1:30-33).

 

우리가 하나님의 집을 지어드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집을 지어주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어주시는 집은 이런 집이다.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삼하 7:11). 이러한 집을 지어주시겠다는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

 

편히 쉴 수 있는 집이 있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었더라도 편히 쉴 수 있는 집이 있으면, 그곳에서 평안히 쉬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을 헤쳐나갈 수 있는 새로운 힘을 얻는다.

 

하나님께서 영원하고 견고한 집을 지어주시겠다고 다윗에게 주신 약속, 그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는데, 그 약속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은 믿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가 누리게 된다는 뜻이다.

 

여러분은 어떠한 집에 살고 있는가? 내가 사는 집은 내가 내 힘으로 지은 백향목 집이 아니라, 내가 살 집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약속, 그리고 그 약속의 성취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어진 영원하고 견고한 집이다. 내가 살 집은 좀과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지 못하는 곳이다.


오늘 날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으니, 우리의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평안히 쉴 집을 건축해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잠시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영원하고 견고한 집을 받아들자. 우리 모두 그 집에서 평화롭게 영원히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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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2. 18. 15:53

예수가 온다

(요한복음 1:19-28)

 

2005년도에 출간된 <보랏빛 소가 온다>라는 마케팅 책이 있다. 마케팅 분야에서 반향을 일으킨 책인데, 그 책을 보면, 현대 사회에서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Remarkable”한 기업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Remarkable”두드러지게 눈에 띈다는 뜻이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책 제목이 그것을 말해준다. “Purple cow”, 보랏빛 소를 본 적 있는가? 아마도 소 무리 속에 보랏빛을 띈 소가 있으면, 말 그대로 두드러지게 눈에 띌것이다. 무한 경쟁 사회에 살고 있는 기업, 또는 개인은 어떻게 해서든 ‘remarkable’한 존재가 되려고 안간힘을 쓴다. ‘Remarkable’한 존재가 되면 살아남지만, 그렇지 않으면 도태된다.

 

‘Remarkable’한 존재에 대한 갈망 뒤에는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러한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기뻐하지 못하고, 희망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한 마디로 인생이 순간순간 지옥 같다고 느낀다.

 

아라비안나이트라는 책에 보면, ‘세헤라자데라는 여인이 나온다. 그 여인의 임무는 왕을 즐겁게 하는 것이었다. 만약 왕을 즐겁게 하지 못하면 다음 날 그 여인은 다른 사람들처럼 죽음에 처해질 것이다. ‘세헤라자데에게 밤이 오는 것은 죽음과의 사투였다. “왕을 즐겁게 하지 못하면 죽는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천일야화는 세헤라자데가 죽음과 사투를 벌이며 지어낸 재미난 이야기이다. 천일동안 세헤라자데의 인생은 얼마나 지옥같았을까. 재밌는 이야기를 지어내면서도 그에겐 기쁨이 없었을 것이다.

 

우리도 살면서, ‘그 날’, 또는 그 시점’, ‘그 사람을 기다리며 가슴 졸인 기억이 있을 것이다. 특별히 남자들은 대개 군대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하루 중 가장 공포스러운 시간은 점호시간이다.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예전에 점호시간은 무엇 하나 꼬투리 잡아 얼차려하는 시간이었다. 가장 힘든 얼차려 중 하는 원상폭격(대가리박기)’이다. 강도를 높이기 위해 치약 뚜껑을 머리에 놓아두기도 한다. 남자들에게 점호시간이 오는 것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오늘 말씀은 무엇인가 오는이야기이다. 한국인의 마음 속에 있는 기본적인 기다림은 통일에 대한 것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그런데, 유대인들 마음 속에 있는 기본적인 기다림메시아였다. 오늘 말씀에서도 보면, 유대인들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 이렇게 묻는다. “네가 누구냐?” 이 말은 단순히 그 사람의 신분을 묻는 게 아니다. 이것은 네가 메시아냐?’라고 묻는 것이다.

 

그들의 질문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던 요한은 단호하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는 네가 누구냐에 대한 치열한 공방이다. 물로 세례를 주는 요한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어하는 유대인들과 자신이 누구인지를 숨기지 않고 고백하는 요한의 대화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준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메시아를 갈망한다. 누군가 와서 나를 구원해 주었으면 좋겠다. 요즘 사람들이 끊임없이 엔터테인먼트를 갈망하는 이유는 누군가 나를 웃겨주었으면 좋겠다는 갈망 때문이다. 내 안에서 웃을거리를 찾을 수가 없으니, 밖에서라도 찾고 싶은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 <범죄도시>라는 영화가 히트를 쳤다. 영화에서 주연으로 나온 마동석은 그 영화를 통해서 최고의 스타가 되었다. (마동석은 내가 살던 컬럼버스 조지아의 컬럼버스주립대학교를 나왔다. 나랑 동향사람이다.) 그런데, 그 영화를 보면 내용이 별거 없다. 아주 흔한 영화소재다. 강력반 형사들이 조직폭력배들을 소탕하는 영화다. 그런데, 왜 그 흔한 이야기에 사람들은 열광할까?

 

그게 바로 메시아니즘의 한 단편이다. 사람들은 힘 센 누군가가 나와서 자신들의 삶을 구원해 주기를 갈망한다. 영화에서 마동석은 천하무적 강력반 형사로 나오는데, 사람들은 메시아같은 마동석에 자신들의 갈망을 투영해 대리 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범죄도시>같은 평범한 영화가 큰 인기를 끈 것을 보면, 요즘 한국 사람들의 마음 상태가 어떤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바벨론 포로 사건이 있은 후, 그들의 삶은 매우 고단했다. 옛날 다윗왕조 때와 같은 찬란한 왕조를 세우지 못하고, 그저 명맥만 유지하며 근근이 살아갔다. 누군가 와서 자신들을 이 지긋지긋한 인생을 구원해 주기를 바랬다. 그래서 그들은 세례 요한에게 집요하게 묻는 것이다. “네가 누구냐?”

 

메시야의 출현에 대한 열망이 강한 사람일수록 인생이 위험하다. 사기꾼의 출현은 바로 그때 일어난다. 사기꾼은 상대방의 메시아니즘을 적절하게 이용할 줄 안다. 사실, 사기꾼이 수완이 좋아서 사기를 치는 것이라기 보다는 당하는 사람의 인생이 절박하기 때문에 사기꾼의 농간이 통하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메시아를 갈망하는 유대인들을 상대로 사기를 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는 메시아가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밝힌다. 이러한 마음을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정직이고 신앙이다. 사람들은 쉽게 메시아를 갈망할 뿐 아니라, 쉽게 자기 자신을 메시아로 둔갑시킨다. 이러한 심리를 가장 잘 이용하는 사업이 할리우드이다. 요즘 미국의 영화 산업은 끊임없이 히어로를 생산해 내고, 판타지를 만들어낸다. ‘할리우드의 영화산업이 계속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것은 현대인들의 심리가 어떠한 상태인지 말해주는 것이다.

 

요한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이렇게 진술한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23). 요한은 자기 자신을 어떠한 존재로도 표현하지 않고, 자기를 소리로 말한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자기 자신을 달이 아닌 손가락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손가락은 달을 가리킬 뿐, 달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손가락이라고 말한 요한은 필연적으로 증언(소리)’할 수밖에 없다.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며, 진짜 메시아를 예비하는 광야의 소리라고 자신을 소개한 뒤, 메시아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한다.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26, 27). 요한이 증거하는 내 뒤에 오시는 그이는 누구인가? 성경은 그를 가리켜, “예수라고 말한다. , 메시야가 온다. 그의 이름은 예수이다. 이를 합하면 이러한 문장이 된다. “예수가 온다!”

 

대림절 세 번째 주일을 맞아 우리가 읽은 복음서의 말씀과 함께 읽어야 하는 구약의 말씀은 이사야서 61장이다. 이사야서 61장은 누가복음의 말씀에 다시 등장한다. 회당에 간 예수님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낭독한 뒤, 그 말씀이 자신에게서 이루어졌다고 선포한다. 그 말씀은 다음과 같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사야 61:1-3)

 

성경은 온통 메시아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성경 속에서 메시아를 발견하지 못하면, 그것은 성경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신약성경은 성경의 메시아가 바로나사렛 예수라고 증언한다. 그리스도인은 그 증언이 참된 증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 말은, 우리는 우리의 운명(인생, , 생명)을 다른 무엇이 아니라, 메시아이신 예수에게서 건 사람들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요즘 기업이나 요즘 사람들은 ‘remarkable’한 존재가 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어떠한 기쁨도, 희망도, 감사도 없다. 그들의 삶의 목적은 그저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존재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비참한 인생인가. 자기 자신을 눈에 띄는 존재로 서게 하려면 얼마나 치열한 경쟁을 펼쳐야 하고, 얼마나 인생을 거기에 소모할 것이며, 성공하더라도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힘들 것이며, 실패하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다른 삶을 산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remarkable’한 존재를 만들기 위해서 피곤한 인생을 살 필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예수에게 걸었기 때문이다. 대림절 세 번째 주일에 함께 봐야할 서신서의 말씀은 데살로니가 전서 5장의 말씀이다. 그 말씀은 바로 이것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특별히 데살로니가전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성경이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전제로 깔고 있다. 메시아가 올 것이다. 메시아가 왔다. 메시아가 다시 올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기본 전제이다. 이것이 없으면, 그 무엇도 말이 안 된다.

 

아무런 이유도 없는데, 억지로 기뻐하거나 소망하거나 감사할 수 없다. 아무런 이유도 없는데 막 기쁘거나 싱글벙글한 사람은 교회 오면 안 되고 병원에 가 봐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병원에 가지 않고 교회에 온 것은 우리에게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소망하고) 범사에 감사하는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밑도 끝도 없이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그러는 게 아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메시아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걸어 둔 메시아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렇다. 예수가 온다. 예수는 오고 계실 뿐 아니라, 이미 오신 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뻐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희망(기도)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할 수 밖에 없다. 기뻐하고 감사하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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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2. 18. 15:48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시편 62:1-12)

 

성경의 풀네임은 성경전서라고 한다. 앞의 두 글자만 따서 성경이라 부르기도 하고, 첫 자와 마지막 자를 따서 성서라고 부르기도 한다. ‘성경이든, ‘성서든 모두 성경전서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성경이라는 말을 고집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성서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마치, ‘성경성서가 따로 있는 듯이 말이다. 그것은 성경전서에 대한 큰 오해다.
(
한국 교회는 기독교예수교로 크게 나뉘었다는, 웃픈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 교회는 그리스도와 예수가 서로 싸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도 답답해서 그것 때문이라도 빨리 오실 듯 하다.)

 

동양문화에서 ()’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사서삼경(四書三經)은 유교의 교육 및 교양 서적으로, 유교 교육의 가장 핵심적인 책이다. 사서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말하고, 삼경은 "시경", "서경", "역경"을 말한다. 삼경에 "춘추" "예기"를 합해 오경이라 부르고, 합해서 사서오경이라 부른다.(위키백과)

 

종교개혁을 통해 탄생한 개신교는 성경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한다. 그래서 발전한 것이 성경공부이다. 성경공부를 안 하는 개신교회는 교회가 아닐 정도이다. 개신교회는 성경에 죽고 성경에 산다. 그런데, 성경공부가 발전하면서 잃어버린 전통이 있다.

 

요즘엔 성경공부를 하면서 눈으로 읽으며 밑을 그어가면서 성경을 읽는다. 그러다,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나오면 노트를 한다. 그런데, 원래 경은 소리를 내어 낭독하는경전이다. 성경을 읽을 때는 소리 내어 낭독하는 것이 좋다. 예로부터 경전은 그렇게 하면서 마음에 새겼다.

 

구규(九竅)라는 것이 있다. 사람 몸에 있는 9개의 구멍을 말한다. , , , , 그리고 항문과 요도가 그것이다. 눈으로 읽으면 2개의 구멍만 작동하지만, 낭독을 하면 7개의 구멍이 작동한다. ()경은 그렇게 사람 몸의 온 규(구멍)을 작동시켜 뇌와 온 몸에 파동을 전달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은 몸을 흔들면서 암송해야 한다. 성경이 산문체가 아닌 운문체로 여전히 보존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학자는 낭독과 암송, 그리고 흔들며 읽은 습관이 사라진 것 때문에 교회가 말씀을 잃고 굳어져버렸다고 말하기도 한다. (옥성득 교수의 블로그, 성경 독서법)

 

오늘 말씀 같은 경우도 그냥 눈으로 읽고, 읽으면서 마음에 와 닿은 구절에 밑줄만 친다면, 오늘 말씀이 가진 위력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한다. 실제로, 몸을 흔들며 이 말씀을 큰 소리로 낭독하면 그 울림이 완전히 다르다. 마음에 뜨거움과 확신이 스며든다. 눈물이 나고 힘이 난다. 하나님이 먼 곳에 계신 분이 아니라, 바로 지금 나와 함께 계시며 나의 울부짖음을 옆에서 들어주시는 분처럼 느껴진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얼마나 힘 있는 말씀인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영혼은 가만히 있지 못한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영혼은 자기 자신을 어쩌지 못해 바람 맞는 갈대처럼 흔들어 댄다. 그럴 때, 갈대처럼 흔들리는 영혼을 향해, 큰 소리로 이 말씀을 낭독하면, 영혼이 잠잠해지지 않을 수 없다. 영혼이 이 말씀을 듣고 순종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돌비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심비에 새기는 것이다. 심비는 마음 속에 있는 비석이다. 오장육부에 말씀이 새겨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심비에 말씀을 새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위에서 말한대로, 암송과 낭독이다. 말씀이 심비에 새겨져야 힘들고 어려운 일이 찾아와도 갈대처럼 흔들리지 않고, 잠잠히 하나님만 바랄 수 있다.

 

오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9절이다. 9절 말씀은 사람은 어떠한 존재인가를 깊이 가르쳐 준다. “,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9). 한국어 성경은 이 부분을 정확하게 번역하지 못했다. 이 부분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이렇다. “Lowborn men are but a breath, the highborn are but a lie, if weighed on a balance, they are nothing; together they are only a breath”(NIV). 번역하면 이렇다. “태생이 천한 사람도 입김이고, 지체 높게 태어난 사람도 거짓이다. 그들을 저울에 달아보면,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 모두 하나의 입김에 불과하다.”(사역).

 

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모두 입김보다 가벼운존재이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 가난한 사람은 특별히 설명하지 않아도 이 말씀이 마음 속에 들어와 박힌다. 그래서 가난한 자가 복음을 더 잘 받아 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10절 말씀을 보면, 이 말씀은 가난한 자보다는 부유한 자들에게 던지는 경고의 메시지인 듯 하다.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10). ‘포악, 탈취이러한 단어는 부유한 자가 가진 권력(power)’를 말한다. 대개 권력을 쥐면, 사람은 자신이 어떠한 위대한 존재인 줄로 착각하여 자기 자신을 의지한다.

(얼마전 발표된 뇌과학자들의 보고서에 의하면, 권력을 가진 자들은 뇌파가 달라지고, 무엇보다 공감능력이 떨어진다고 한다. 공감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 의지한다는 뜻이다.)

 

고대시대는 태생이 비천한 자와 태생이 고귀한 자의 구분이 명확했기 때문에, 이러한 말씀이 그들의 귀에 더 잘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처럼 태생의 구분이 없어진 시대와 우리처럼 선진국에서 평균이상의 삶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씀이 잘 안 들릴 수도 있다.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더욱더 암송하고 낭독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자기가 구원이고 피난처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자칭 메시아가 즐비한 이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구원이고 피난처로 삼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가 가장 명확하게 들어야 하는 말씀은 8절의 말씀이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8). 그리고 셀라가 나온다. 충분히 멈추어 서서 새겨 들어야 하는 말씀이라는 뜻이다.


이 부분은 영어 성경으로 보면 이렇다. “Trust in him at all times, O people, pour out your heart to him, for God is our refuge.”(8). 모든 시간, 언제든지, 시시때때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놓으라는 말씀이다. “주 예수께 네 마음을 쏟아 놓으라!”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자. 우리는 어디에 우리의 마음을 쏟아 놓고 있는가. 우리는 어디에 우리의 마음을 토하고 있는가. 우리의 영혼이 바람 맞는 갈대처럼 흔들리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쏟아 놓지 못하기 때문은 아닌가. 자꾸 다른 것에 마음을 쏟아 놓으니, 우리의 영혼이 잠잠하지 못하고 아우성치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영혼에 큰 소리로 외쳐보자.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나의 영혼아 마음을 주님께 쏟아 놓으라! 하나님만이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시라! 권능이 하나님께 있도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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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2. 12. 08:58

위로

(이사야 40:1-11)


우리는 대림절을 보내고 있다.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다. 여러분은 무엇을 기다리는가? 대림절을 보내면서도 각자 기다림의 내용은 다를 수 있다. 어떤 이는 건강의 회복을 기다리고, 어떤 이는 자녀를 기다리고, 어떤 이는 합격(입학, 입사)을 기다리고, 어떤 이는 당첨을 기다리고, 특별히 아이들은 산타 할아버지를 기다린다. 우리는 각자 처한 상황에서 가장 절박한 것을 기다린다. 물론 그 절박한 것이 실제로 삶에 유익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른다.

 

오늘 말씀은 위로하라는 명령으로 시작한다. 이 말씀은 바벨론 포로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이 강력한 말씀을 들으면서도 가슴에 와 닿지 않는 것은 우리가 포로 생활에 놓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포로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를 뿐더러, 포로가 되고 싶은 사람도 없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지금 포로생활을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감사하고 만족하며 산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그리스도인들은 대림절을 보내면서 메시아를 기다린다.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우리가 메시아를 기다리는 이유는 그가 우리에게 복음(기쁜 소식)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복음(기쁜 소식)을 들었고, 믿는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실제로 우리의 삶의 내용을 들여다 보면, 복음을 안 들은 사람처럼 살아간다.

 

이것은 도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성경이 증거하는 복음은 구원의 길에 대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전까지 구원의 길은 묘연했다. 무엇이 구원의 길인지에 대하여 명확히 몰랐다. 그나마 유대인들은 율법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그 율법을 잘 지키면 구원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율법이 자기 의를 증진시킨다는 데 있다. 율법을 지키다보니까, 율법을 지킨 자기 의가자기를 구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은 율법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복음서에서 대표적으로 등장하는 사람들이 바리새파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시장 어귀에서 서서 크게 기도했다. “주여, 저는 율법을 잘 지키지 않는 저들(세리와 창녀)과 같지 않습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이것은 부자가 가난한 자를 경멸하는 것과 같고, 권력을 쥔 자가 권력 없는 자를 경멸하는 것과 같고, 많이 배운 자가 못 배운 자를 경멸하는 것과 같고, 좋은 직장(직업)을 가진 자가 그렇지 못한 자를 경멸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율법은 구원에 이르는 강력한 길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새로운 구원의 길을 여셨다. 아니, 새롭다기 보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인정하시는 올바른 구원의 길을 여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구원의 길은 자기 의(업적 의)’가 아니라, 믿음이다.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사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이면서도 믿음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는지를 알 수 있다. 믿음은 칭의를 말한다. 칭의란 어떠한 업적을 쌓아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과는 상관 없이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에서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은 여전히 자기 의(업적 의)’의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 세상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 구원 받아야 할 이유를 스스로 증명하라고 요구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끊임없이 평가를 받아야 하고, 그 평가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쓴다. 고등학생들은 수능평가를 받는다. 그 평가의 결과를 통해서 갈 수 있는 대학이 정해진다. 고등학생들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코피 터지도록 공부한다. 그 일에 성공한 학생은 기뻐하지만, 그 일에 실패한 학생은 실망하거나 심지어 자살까지 한다.

 

대학을 입학 한 후에 청년들은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스펙을 쌓는다. 자기를 증명하지 못하면 원하는 직장, 선망의 대상인 회사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래서 청년들은 청춘을 반납하고 스펙을 쌓느라 여념이 없다.


요즘 청년들은 결혼을 포기한다. 단순히 혼자 사는 게 편하고 좋아서가 아니다. 결혼을 하려면 남자는 여자에게, 여자는 남자에게 평가를 받아 합격해야 하는데, 서로가 가지고 있는 평가 기준을 넘어서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결혼정보 회사가 분류한 등급을 보면, 그 평가기준에 인간은 없고 외모, 학력, 직장, 집안 등스펙만 있다. 그러한 평가기준을 뛰어넘어 행복한 결혼에 도달할만한 청춘이 얼마나 될까.

 

삶의 곳곳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의(업적의)’를 통해 구원에 이를 것을 요구 받는다. 그리고, 우리는 평가기준을 통과해서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한다. 자기의(업적의)가 증명되어서 구원에 이르면,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을 도와주셨다고, 자신을 구원해 주셨다고 기뻐하며, 그런 하나님의 위로를 칭송한다.

(10여년 전에 실제로 그러한 말을 하는 모 방송사 여자 아나운서의 신앙고백을 본 적이 있다. 몇 천 대 1의 경쟁을 뚫고, 당당하게 메이저 방송사의 아나운서가 된 그녀는 그 당시 사랑의 교회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셨다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이루어주신다고, 하나님은 살아계시다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간증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이 포로생활 하고 있는 자들에게 주시는 위로가 무엇인지 보라. 포로생활을 하면서 그 포로생활을 잘 견디고 이기라고 거짓 위로를 주지 않으신다. 예를 들자면, 미국의 흑인노예 제도가 있었을 당시, 흑인노예가 편만했던 미국 남부지역(특히, 조지아, 앨러바마)의 목사들은 주일 설교를 할 때, 흑인노예들에게 주인을 잘 섬기면 하나님께서 복 주실 것이라고 위로했다. 이것이 위로인가?

 

흑인노예들에게 진짜 위로는 노예제도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고, 그들이 다른 사람들(백인들)과 평등한 인간대우를 받는 것이다. 이처럼,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에게 위로란 포로생활을 잘 하면 하나님께서 복 주실 것이라는 말씀이 위로가 아니라, 포로생활 자체를 끝내는 것이 위로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러한 참된 위로가 선포되고 있다.

 

우리가 이 대림절에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거짓 위로를 주시는 분이 아니라, 참된 위로를 주시는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자기의(업적의)’가 아니라, ‘칭의(은혜로 구원 받는다!’를 선포하시고, 그 길을 여신 분이다. 그 분의 선포는 이 세상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는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 보라고 인생을 피곤하게 만드는 이 세상의 시스템에 대한 부정인 동시에, 우리를 참 자유케 하는 기쁜 소식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깊은 죄, 원죄는 자기 집중이다. ‘자기 집중이란 자기 스스로를 세상에 증명하려는 습성을 말한다. 자기의 존재 가치, 구원의 이유를 끊임없이 증명하느라 피곤한 삶을 산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공부해야 하고, 열심히 일해야 하고, 무엇이든지 우리는 열심히 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지쳐 있다. 우리는 나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잔인한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포로생활을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착각이다.

 

복음은 자기를 증명해야 하는 이 세상에서 자기를 잘 증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짜 위로가 아니다. 복음은 새로운 나라(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포이다. 하나님 나라는 자기를 증명하느라 생명을 피곤하게 할 필요가 없는 나라이다. 오늘 말씀은 그러한 하나님 나라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11).

 

이사야는 하나님을 젖먹이는 어머니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엄마를 찾는 이유는, 세상과는 달리, 엄마 앞에서는 나 자신을 증명하느라 애쓸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엄마 품을 그리워 하는 것이고, ‘엄마라는 말만 들어도 위로가 되는 것이다.

 

평가기준을 정해 놓고 그 기준에 맞는 존재인지 아닌지 스스로 증명해 보라고 끊임없이 요구하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느라 지치고 피곤한 여러분! 자의든 타의든, ‘자기의(업적의)’에 사로잡혀 포로생활을 하느라 죽을 것같이 지치고 힘든 여러분! 오늘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을 들으시라.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날에는, 우리는 더 이상 우리를 증명하느라 지치고 힘들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 받은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이다. 그러니, 삶의 자리에서 스스로를 증명하느라너무 생명을 소진하지 마시라. 스스로 증명하라고 상대방을 다그치지도 마시라. 그저 사랑으로 감싸주시라. 은혜로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의 위로를 날마다 묵상하시라. 특별히 교회에서 스스로를 증명하느라 너무 힘들어하지 마시라. 있는 모습 그대로,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며 격려하고 위로하시라.

 

마지막으로, 최근 만난 멋진 문장 하나를 여러분과 나누며 말씀을 마치려 한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힘으로는 닫지 못하는 문이 하나씩 있는데

마침내 그 문을 닫아줄 사람이 오고 있다.”

(이병률 시, ‘사람이 온다중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고 계신다.



기도문


주님, 우리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느라 너무 힘든 우리들,

세상의 요구에 스스로 증명하느라 생명을 소진하여 

피곤하고 지친 우리들,

하지만,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고 참된 위로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고 계시기 때문입다.

더이상 우리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

더이상 스스로를 증명하느라 생명을 탈진시키지 않아도 되는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가져다 주실 그리스도를 기다립니다.

어서 오셔서 우리에게 참된 평안과 위로를 주옵소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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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2. 4. 15:18

기다리는 복

(마가복음 13:24-37)

 

새로운 교회력이 시작되었다. 교회력은 대림절(Advent)로부터 시작된다. 기독교 신앙의 독특한 점은 기다림이 근본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희망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희망의 종교라고 말한다.

 

우리는 기다린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기다린다. 그 순간을 재림(파루시아)’이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말은 단순히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완성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사랑과 의는 매우 부분적이고 완전하지 못하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사도 바울이 사던 시대의 거울은 청동거울이었기 때문에 지금의 거울처럼 형상을 온전히 비추지 못했다. 그래서 희미하게 보였다. 우리는 그처럼,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의를 희미하게 경험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시는 날에 우리는 사랑과 의를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보는 것처럼, 전체를 모두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쩌다보니기독교인이 되었다. 기독교인이 된 이상, 우리는 기다리는 사람들이 되었다. 이것은 우리의 운명이다. 각 사람마다 기독교인이 된 경위가 다 다르다. 어떤 이는 태어날 때부터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도 있고, 어떤 이는 어릴 적에 우연히 교회를 다니게 된 사람도 있고, 어떤 이는 누군가의 전도로, 누군가는 스스로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도 있다. 누군가를 결혼을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된 경우도 있다.

 

교회에 몸을 담게 된 경위가 어찌되었든, 오늘 말씀을 보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경위는 매우 독특한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오늘 말씀은 성전파괴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바벨론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에 유대인들은 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성전이 파괴되었고, 왜 자신들이 포로가 되었는지에 대한 신학적 반성을 했다. 그때 그들이 내린 결론은 한 마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했기 때문이다라는 것이었다.

 

그 이후, 유대인 신앙공동체는 포로에서 귀환하여 스룹바벨 성전이라 불리는 자그마한 성전을 건축한 뒤, 그들의 신앙공동체를 회복하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며 살았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피어난 희망은 메시아의 도래였다.

 

스룹바벨 성전은 파괴되지 않고, 오히려 헤롯대왕에 의해서 흡수되어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매우 거대한 성전으로 거듭났다. 그런데, AD 70년경, 그 거대한 성전은 로마군대에 의해서 파괴되고 만다. 오늘 말씀에서는 그 성전파괴사건을 환란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성전이 또다시 파괴되면서 그 사건을 놓아두고 신학적 분석이 들어갔다. 왜 성전이 파괴되었을까? 이번에는 바벨론에 의해 파괴되었을 때와는 다른 해석이 들어갔다. 소위, 헤롯성전은 유대인들의 메시아 거부 때문에 일어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이다. 마가복음 본문은 지금 그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가 형성되면서 굉장히 중요한 해석의 틀이었다.

 

대인들은 자신들이 대망하던 메시아를 거부했다. 그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헤롯성전을 로마군대의 손을 빌어 없애시고, 새로운 성전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온 세상에 계시하시며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이방인)을 모으신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경위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유대인들의 메시아 거부에 있다. 어쩌면 우리는 유대인을 만나면, 예수를 메시아로 믿지 않은 것에 대하여 감사의 인사를 건네야 할지 모른다. 유대인들을 미워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해 하며 친절히 대해주라. 그들 덕분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될 수 있었다. (이것을 히틀러가 알았다면, 홀로코스트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심도 깊게 다루고 있는 주제 중 하나이다. (오늘은 그 주제를 설교하는 자리가 아니므로 간단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유대인의 불신을 통해 모든 이방인들을 구원하신 후, 다시 유대인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주장이다. 나도 그렇게 믿는다. 하나님은 결코 어느 누구 하나, 어떤 민족이든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는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 일에 동참하기를 쉬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은 참으로 신비롭다. 유대인의 불신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되어,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재림(파루시아)를 기다리면서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않았다면,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불쌍한가. 기다림, 희망이 없는 사람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죽은 자처럼 살지 않고, 산 자처럼 산다.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절망하지 않고, 산 자처럼 산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무의미하게 살거나, 시간을 하릴없이 흘려 보내지 않고,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임한다는 것을 믿고, 기다리는 삶, 희망의 삶을 산다.

 

그리스도의 재림(파루시아)는 부지불식 간에 이루어진다. 오늘 말씀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른지, 밤중일른지, 닭 울 때일른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35). 고대 사회에서 떠났던 사람이 되돌아 오는 시점이, 저물 때, 밤중, 닭 울 때, 새벽 등의 시간은 마땅한 시간이 아니다. 그런 때 온다는 것은 언제 올지 모른다는 것에 대한 강조이고 수사적 표현이다.


그러므로, 기다리는 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깨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깨어 있으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고 있다. 우리는 깨어 있는가? 깨어 있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어 신앙생활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서로가 서로를 깨워 주기 위해서이다. “저 좀 깨워 주세요!”

 

성경에는 깨어 있으라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사도 바울도 이 말을 쓰고 있는데, 특별히 에베소서에 보면 술 취하지 말라는 말과 더불어 깨어 있으라는 말을 쓴다. 그 당시 술에 취한다는 것은 단순히 술을 많이 마신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 당시 술은 디오니소스(바쿠스) 신을 섬기는 행위였다. 그러므로, 술 취한다는 것은 잡신의 스피릿을 내 안에 들이는 일이었다.

 

깨어 있으라!”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혼란케 하는 나쁜 영을 물리치고, 우리의 영혼을 온전히 흠 없이 보존하시는 성령을 사모하라는 뜻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다. 우리의 영은 어떠한 영인가? 우리는 깨어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어떠한 잡신에게 내어주고 있는가? 요즘은 모두가 spirit of money에 사로 잡힌 듯하다.

 

나는 골드러쉬 주(Gold Rush State)인 캘리포니아에 이사와서 그것을 더 강력히 경험하고 느낀다. 모든 게 다 돈이다. 그런데, 교회가 좋은 것은 교회는 세상의 스피릿과 반대로 흐른다. 세상은 봉사를 하면 돈을 받는데, 교회는 돈을 내고 봉사한다. 이것은 매우 이 세상을 전복시키는 행위이고, 이 세상의 spirit을 거부하는 그리스도의 spirit의 실천이다.

 

우리가 세상의 spirit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면서 살아가는 이유는 깨어 있기위함이다. 세상의 스피릿으로 우리의 영혼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스피릿, 성령으로 채우기 위함이다. 그래야, 우리가 그리스도의 재림(파루시아)를 놓치지 않고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참으로 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기다린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깨어 있을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주님의 백성이 되자.

 

 

기도

 

희망의 주님,

우리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주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실 완전한 사랑과 의를 믿습니다.

지금 우리는 희미하게, 그리고 부분적으로 주님의 사랑과 의를 경험하고 실천하고 있지만,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의를 완전히 경험하고 실천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들,

깨어 있는 일에 실패하지 않도록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일에 더욱더 힘쓰게 하옵소서.

우리의 구원이시고 희망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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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2. 2. 09:23

하나님이 피난처

(시편 461-11절)

 

시편 46편은 세 연으로 나뉜다. 연을 나누는 일을 셀라가 한다. 셀라는 잠시 멈추어 듣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쉼없이, 질주하듯이 들으면 안 되고, 들으면서 잠시 멈추어 마음에 새기며 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광고, 정보(commercial, information)’가 아니라,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셀라는 단순히 잠시 멈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히 내 마음에 새겨질 때까지 충분히 멈추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숙지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에 처해질 수 있다. 얼마 전, 유럽에서 번지 점프를 하려던 여자 청년이 도우미의 말을 잘 못 알아듣는 바람에 추락사 한 일이 있었다. “No”“Now”로 알아 들어서 그러한 사고가 발생했다고 한다. 긴장하니까, 의사소통이 서로 잘 안 된 것이다.

 

사실, 우리는 어렵고 괴로운 일이 닥치면 긴장하게 되어 의사소통이 잘 안 될 때가 많다. 그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데,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울수록 셀라의 정신을 반드시 숙지해야 한다.

 

시편 46편의 말씀은 많은 이들에게 힘을 주는 말씀이다. 실제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으면(이외의 시편의 말씀들도 마찬가지) 큰 힘이 된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이다. 마르틴 루터는 처음부터 종교개혁을 하려고 마음 먹고 95개조 반박문을 만든 것은 아니다. 그런데, 사회적 분위기가 종교개혁을 갈망했고, 그의 95개조 반박문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 당시 유럽은 교황, 그리고 기독교가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던 상황이라 교황의 권위에 도전을 하고, 다른 사상을 이야기하여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면 교회권력에 의해 처형되던 시대였다.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당겨지고 난 뒤, 마르틴 루터는 죽음의 위협 앞에 놓여 있었다. 종교개혁의 뜻에 동참한 힘 있는 제후들이 없었다면, 마르틴 루터는 위클리프 같은 그의 선배들처럼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시편 46편이 유명한 이유는 마르틴 루터가 이 시편을 바탕으로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찬송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루터는 죽음의 위협 가운데서 시편을 통해서 위로를 받았다. 그는 성서학자로서 시편에 대한 주석을 썼는데, 아마도 그는 학문적으로 주석을 쓸 때와는 다른 느낌으로 시편 46편에 근거한 찬송가를 지었을 것이다. (큰 환란 가운데 있으면, 말씀이 주는 위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말씀에는 참으로 능력이 있다!)

 

시편을 지어 신앙을 고백했던 사람들이 처한 상황은 매우 혹독했다. 시편 46편에 나타난 그들의 혹독한 상황은 크게 두 가지이다. 자연재해와 전쟁이 그것이다. 지금도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속수무책이다. 지진이나 해일, 그리고 운석과의 충돌 등은 지구의 생명체를 엄청나게 위협한다. 과학의 발달은 그러한 위협으로부터 생명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도 전쟁의 위협은 세계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불감증 때문에 그렇지,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전쟁의 위협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이다. 어제도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해서 전 세계가 발각 뒤집혔다. 특별히 미국이 북한의 제재 수위를 높이고 있다. 미국 전역이 북한 미사일의 사정권 안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자연재해나 전쟁은 누구 한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거나, 피해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인간이 겪는 재앙 중 최악의 재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최악의 상황에서도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이것은 엄청난 신앙고백이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을 견인해 주는 견인차와 같은 신앙고백이다.

 

오늘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피난처라고 고백하는 신앙 가운데, 하나님이 행하시는 두 가지의 일을 볼 수 있다. 첫째는 5절 말씀에 나온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마르틴 루터도 자신이 지은 찬송가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돌로 쌓은 성이 성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가 성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고백이다. 우리는 흔히 돌로 든든한 성을 쌓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러면서, 하나님 자체가 성(, fortress)이신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5절 말씀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어떤 이는 이것을 적용하여, 새벽기도의 중요성을 말하기도 한다. 새벽에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는 논리다. 물론, 그렇게 적용해도 은혜되는 말씀이나, 하나님께서 새벽에도우신다는 말의 뜻은 하나님의 도우심의 신비를 나타내는 말이다. 새벽은 생명이 고요하게 잠자는 시간이다. 그리고, 새로운 날이 오기 바로 직전의 기대감이 최고조에 이른 시간이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은 언제 키가 크는가? 절대로 낮에 활동할 때 눈에 보이게 크지 않는다. 키는 잠 잘 때, 아무도 인식하지 못할 때 큰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그런 것이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온다. 그렇기 때문에, 성장기의 아이들이 내 키가 클까를 걱정하지 않고 잠 자리에 드는 것처럼, 신앙인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올까’, 걱정하지 않는다. 자고 일어난 아이의 키가 부지불식 간에 큰 것처럼,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도우신다. 하나님은 새벽에우리를 도우신다!

 

그리고, 10절 말씀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막막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가장 잘 하지 못하는 것은 가만히 있는 것이다. 우리는 뭔가 하기 위해 분주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가만히 있기를 바라신다. 성경에는 가만히 있으라는 이야기가 곳곳에서 울려 퍼진다. 그것도 아주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말이다.

 

열왕기하 19장에 보면 히스기야 왕 때 있었던 이야기가 나온다. 남유다는 끊임없이 앗수르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끝내 앗수르의 산헤립 왕은 그의 부하 장수 랍사게를 보내 예루살렘을 공격하는데, 그 일 때문에 히스기야는 어려움을 당하고, 랍사게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데까지 이른다. 전쟁의 위협 앞에 히스기야와 남유다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히스기야 시대 때 활동했던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기야와 남유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앗수르 왕의 신복에게 들은 바 나를 모욕하는 말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한 영을 그의 속에 두어 그로 소문을 듣고 그의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그의 본국에서 그에게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왕하 19:6-7). 이어지는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신다. 랍사게의 군대는 물러가고, 앗수르의 왕 산헤립은 본국으로 돌아가 시해당한다.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 앞에 이르렀지만 홍해에 막혔고, 뒤에서는 애굽의 군사가 쫓아오는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하게 됐다. 앞으로 가면 물에 빠져 죽고, 뒤로 가면 애굽 군대의 칼에 죽는 상황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이렇게 외친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14:13). 그리고 벌어진 일은 이렇다. 홍해가 갈라졌고, 이스라엘은 그곳을 건넜고, 애굽 군대는 홍해에 의해 무력화되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스라엘이 한 일은 말 그대로,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우리의 무능력을 드러내는 말도, 무기력을 드러내는 말도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기대지 않고, 하나님 자체가 성이신 것을 보지 못하고, 우리 스스로 우리의 안전을 위해서 성을 쌓는데 모든 힘을 쏟아 붙는다. 그러한 일은 우리가 현실에서 매일 목격하는 일이다. 각 나라와 각 개인이 (power)’를 얻기 위하여 얼마나 자신의 인생을 소진하는가. 대표적인 강대국, 미국, 중국, 러시아는 서로 군비경쟁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요즘은 북한이 그 경쟁에 뛰어들어 핵탄투와 그것을 실어 나르는 미사일을 개발하는 데 여념이 없다.

 

세상은, 국가나 개인이나 할 것 없이, 자신들의 안전을 스스로 보장하기 위하여 정치, 경제, 군사(, power)을 키우느라 여념이 없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조차도 자신들이 힘을 키우는데, 하나님이 도와 주실 것을 간구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하나님 자체가 성이시고 힘이시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아무리 들어도 그것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셀라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편 46편이 엄중하게 선포하는 말씀은 이것이다.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그가 땅을 황무지로 만드셨도다 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도다”(7,8). , , 수레, 이것은 고대 전쟁터에서 가장 무서운 무기였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것을 무력화시키신다는 것이다. , 그러한 것이 그들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각 나라는, 각 개인은 자신들을 지켜줄, , , 수레를 만드는 데 여념이 없다. 전투기, 항공모함, 핵미사일, 이런 것을 하나님께서 꺾으신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꺾으실 것을 왜 만들고 있는가? 우리 모두가 다 쓸데 없는 일에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피난처시다. 이 신앙을 가장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실천했던 성경의 인물 중 하나는 에스라이다. 에스라서 821-23절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그 때에 내가 아하와 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하나님)에게 간구하였으니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8:21-23).

 

에스라는 페르시아(바사)의 아닥사스다 왕 때의 인물인데, 2차 예루살렘 귀환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자기 백성을 데리고 바벨론(페르시아)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면서, 아닥사스다 왕에게 신앙고백을 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이니 귀환할 때에 혹시 모를 적군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줄 보병과 마병이 필요 없다고.

 

보통 사람 같으면 왕에게 자신들의 보호를 요청하며 보병과 마병을 함께 보내달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에스라는 그렇게 하지 않고, 그리고 자신이 신앙고백한 대로 하나님을 의지하였으므로, 보병과 마병을 요청하지 않았다. 대신에, 에스라는 귀환하는 백성들과 함께 금식하며 기도했다.

 

우리는 말로는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라고 하면서, 얼마나 많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피난처를 구비하면서 사는가. ‘비 오지 말게 해 주세요’, 기도하러 오면서 우리는 반드시 우산을 챙긴다. 우리 신앙의 웃픈현실이다.

 

하나님이 피난처이시다. 이것이 우리 귀에 들려야 한다. ‘셀라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삶의 현실이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토대여야 한다. ‘새벽에도우시는 하나님, 구원을 주지 못하는 엉뚱한 데 삶을 허비하지 말고가만히 있어하나님의 도우심(구원)을 실제 삶에서 경험하며 사는 신실한 주의 백성이 되기 원하시는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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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1. 28. 09:20

식상한 예수, 그리스도

(누가복음 17:11-19)


옛날 아버지께서 목회하실 때, 교인 중에 목사가 설교를 시작하면 고개를 숙이고 주보에 낙서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왜 그랬을까? 그 사람이 그러한 행동을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주보에 나온 성경본문과 제목만 보면, 목사가 무슨 설교를 할지 다 안다고 생각해서이다.

 

우리가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교회를 조금 오래 다닌 사람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다.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에 의해 깨끗함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 한 명만 예수님께 돌아와 영광과 감사를 표현한 이야기이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본문을 읽으면서 다 아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경계를 낮췄을 지 모른다.

 

옛날 같았으면 그러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인격이 없는 사람, 또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발달한 뇌과학에 의하면, 식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그렇게 반응하는 것은 그 사람의 믿음과 인격의 문제라기보다, 뇌의 메커니즘의 반영이기 때문에 그 사람을 비난만 할 수 없다.

 

우리 뇌에는 신경세포라 불리는 뉴런이 있다. 뉴런은 어떠한 신호에 반응을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두 가지의 행동을 한다. 반응을 보이는 것을 ‘fire’라고 한다. 뇌 과학에는 헵의 학습법칙이라는 용어가 있는데, 이것은 뇌 안의 신경세포는 경험을 학습한다라는 것을 말한다.

 

뉴런(신경세포)은 경험한 것, 즉 아는 것에 반응한다. 사람은 모르는 이야기를 하면 지루해 한다. 찬양 예배 드릴 때, 아는 찬양이 나올 때 즐거운가, 아니면 모르는 찬양이 나올 때 즐거운가? 영어로 설교를 들을 때 은혜 받는가, 아니면 한국어로 설교를 들을 때 은혜 받는가? 우리는 아는 것에 반응한다. 일단, 설교 시간이 재미 있으려면 성경을 알아야 한다. 성경의 내용을 잘 모르면 아무리 훌륭한 설교를 해도 아무런 은혜를 받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뇌 과학에서 밝혀낸 뉴런의 메커니즘을 보면, 뇌는 일차적으로 경험한 것, 아는 것에 반응하지만, 반대로 같은 것을 계속 경험하면 지루해 한다. 뇌의 신경세포도 굉장히 게을러서, 똑 같은 것을 반복해서 경험하면 반응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위에서 말한, 교회를 오래 다녔거나, 성경을 많이 읽어서 성경의 내용을 잘 안다고 스스로 생각한 사람의 돌발적인 행동은 그 사람의 인격이나 믿음의 문제라기보다 뇌의 메커니즘에 의한 반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심리학계에서 심리학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세계 3대 심리학자가 있다. 지그문트프로이트, 카를 융, 그리고 알프레드 아들러가 그들이다. 이 중에서 프로이트와 아들러는 개인심리학에 대해서 주로 연구했지만, 융은 집단심리학 분야를 개척했다. 나는 융의 집단심리학 측면에서 뇌과학의 결과를 적용해 보고자 한다.

 

융은 개인의 마음 뿐만 아니라, 집단적으로 형성된 집단 무의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한 사람의 행동을 분석하려면 개인의 역사 뿐만 아니라, 집단의 역사도 반드시 분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개인에게는 집단적으로 형성된 심리적 메커니즘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를 통하여 발전된 학문이 신화학, 민속학, 문화인류학이다.

(심리학 이야기를 들으면서, 좀 아시는 분은 흥미롭지만, 잘 모르시는 분은 뭐래하면서 흥미를 잃으셨을 것이다. 그게 뇌의 메커니즘이다.)

 

나는 요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집단적으로 뇌의 메커니즘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에게 흥미를 잃었다고 생각한다. 왜 그럴까?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서?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 자주 들어서 지루해진 것이다. 위에서 말한대로, 뇌는 똑 같은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으면 지루해 한다. 반응하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 교회 다니는 사람들, 또는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을 들으면 반응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짜증까지 낸다.

 

한국의 선교 초기나, 한창 기독교가 부흥 할 때, 거리에 나가서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Jesus loves you!”라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이렇게 반응했다. “? 내 남편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또는, 나는 우리 부모님께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는데, 예수라는 분이 나를 사랑한다고?”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가졌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구원 받은 단 한 사람의 나병환자처럼 반응했다.

 

그런데, 요즘 나가서 누군가에게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Jesus loves you!”라는 말을 건네보라. 그러면, 그들은 뭐래하면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 뿐더러, 짜증내거나, ‘너나 잘하세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누구도 온 마음을 다해서, 기쁨이 가득하여, 누군가에게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것을 말하는 그리스도인이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우리도 그렇고 그들도 그렇고, 모두, 예수의 이름을 식상해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예수라는 이름, 성경이라는 용어, 그리고 이곳저곳에서 설교를 하도 많이 들어서, 우리가 성경을 잘 알고 있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매우 잘 안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요즘 기독교인들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이것이다.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교회를 오래 다녔거나, 교회를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상관 없이, 성경을 잘 안다고 스스로 착각할 뿐이지 실제로는 성경 지식이 매우 낮다는 것이다. (몇 년 전 바나그룹에서 미국 성서공회와 공동으로 실시한 조사 의하면, 미국 가정들 88퍼센트가 성경을 적어도 하나 이상 갖고 있다고 한다. 미국 사람들 중 82퍼센트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성경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작 43퍼센트의 미국 사람들만이 성경의 처음 다섯 권(모세 오경)의 이름을 다 맞추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이 식상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것은 뉴런의 착각이다. 뇌의 메커니즘을 너무 믿지 말라. 우리의 뇌는 예수의 이름을 하도 많이 들어서 식상한 것이라고 신호를 보내고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정말 예수의 이름은 식상한 것인가?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너무 식상하게 여겨 열 명의 나병환자들처럼 행동하지 못한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이 거주하는 곳을 지나칠 때,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이렇게 소리 높여 외쳤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불쌍히 여기기는 하는가? ‘불쌍히 여겨달라는 절규는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고백이다(정용섭).

 

우리는 어떠한가? 살면서 어떠한 어려움을 만났을 때, 주님 앞에 나아와,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 높여 주의 이름을 부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자비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고백을 간절하게 하는가? 인터넷 뒤져보고, 관련 전문가를 만나서 조언을 받는 등, 우리는 다른 궁리부터 하지 않는가?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너무 식상하게 여겨 고침 받은 나머지 아홉 명의 나병환자들처럼 행동한다. 열 명 중 한 명은 자신이 고침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고, 가던 길을 되돌아 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 꿇고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영광은 하나님께 집중한다는 뜻이고, 감사는 주변을 돌아본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 집중하고, 주변을 돌아보면서 사는가? 그저 자기 자신의 삶에만 몰두하며 사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지금 너무도 권태로운 신앙의 시대를 살고 있다. 권태로우니까, 자극적인 것을 찾아 이 설교 저 설교 듣고, 이 교회 저 교회를 다닌다. 그런데, 그러한 임기응변식 신앙으로는 이미 식상해져 버린 예수의 이름을 새롭게 경험하지 못한다.

 

뇌는 새로운 것을 경험할 때, 즐거움, 쾌감을 느낀다고 한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은 하도 많이 들어서 예수의 이름을 지루한 것이라고 잘못 전달하고 있는 뉴런의 착각을 깨뜨리고, 예수의 이름을 새로운 것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뉴런의 신경체계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뉴런에 의해서 축적된 교만을 버려야 한다. 그 동안 우리가 잘 알고 있었다고 착각한 예수의 이름을 새롭게 알기 위하여 이 외침부터 새롭게 배워야 한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고, 실제로 성경을 함께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그렇게,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활짝 열어 놓을 때, 아침마다 새로우신 주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할 줄로 믿는다. 우리 모두 함께 외쳐보자.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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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1. 23. 10:23

누가 어리석은 자인가

(눅 12: 13-21)

 

오늘 이야기는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형과의 재산분할에 대한 분쟁 해결을 부탁한 일에서 촉발된다. 그 부탁을 예수님이 들어주셨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 분쟁을 통해, 그 형제들에게 하신 말씀은 이것이다. “삼가 모든 탐심(All kinds of Greed)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15).

 

'탐심’으로 번역된 헬라어플레오넥시아’(πλεονεξα)욕심을 내는 것,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 것, 더 가지려고 애쓰는 사람, 탐욕스러운이라는 뜻을 가진플레오넥테스’(πλεονκτης)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탐심, 탐욕, 강탈, 사기, 욕심, 더 가지려는 탐욕의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그리고플레오넥테스’(πλεονκτης)양이 더 많은, 질이 더 좋은, 우수한, 더 탁월함, 더욱 위대한, 더욱 긴, 더 큰 부분의 뜻을 가진플레이온’(πλεων)붙잡다, 소유하다, 잡다, 자각하다, 고수하다, 매달리다, 간직하다, 보관하다의 뜻을 가진에코’(χω)의 합성어에서 유래된 단어이다.(김준남)

 

탐심에 대한 경계를 말씀하신 뒤, 예수님은 한 부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그리 고 그 부자는 어리석은 자라는 호칭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이 이야기를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라고 부른다.

 

그는 왜 어리석은 것일까? 이 이야기를 단순히 탐심’, 그리고 재물에 대한 욕심등의 이야기로 보면 안 된다. 위에서 본 것처럼, 탐심은 질이 더 좋은, 우수한, 더 탁월함, 더욱 위대한, 더욱 긴, 더 큰 부분을 의미하는 단어 플레이온이 들어가 있다. 사실, 우리는 이것을 소망하면서 산다. 물건을 하나 사더라도 질이 더 좋고 우수하고 더 탁월한 것을 사고 싶지, 질 나쁘고 형편 없는 물건을 사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어리석은 부자라고 말하면서도, 우리의 삶의 지향은 그 어리석은 부자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그와 똑 같은 삶의 방식 가운데 살면서 그를 욕하는 것은 눈가리고 아옹하는 것또는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도 그렇게 탐욕스럽게살면서, 왜 아닌 척하는가? 곡식의 소출이 풍성하면 더 큰 곳간을 지어야 하고, 곳간이 가득 차면 평안한 것이 우리 인간의 삶이다. 모든 사람이 다 그것을 소망하며 산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는 자꾸 근대 자본주의의 시각에서 성경을 해석하려는 습관이 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시장의 개념도 12세기에나 형성된 것이고, 자본의 개념도 근대의 개념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부자는 요즘 말하는 부자와 개념이 다르다. 요즘 부자는 자본가라고 불리지만, 성경의 부자는 굶지 않는 자에 불과하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탐심에 대한 지적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이 아니어도 어디에서든지 볼 수 있는 인간의 덕목이다. 탐심이 많으면 좋지 못하다는 것은 인생을 조금 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굳이 성경에서 말하지 않아도 된다. 성경은 상식을 말하는 게 아니라, 상식 너머의 진리를 밝힌다.

 

오늘 말씀은 구원에 대한 이야기이다. 탐심이 구원을 방해한다. 그래서 탐심을 경계해야 한다. 탐심이 작동하는 방식은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창세기에 보면,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때도 탐심이 작동한다. 탐심은 구원을 자기 힘으로 이루려고 하는 자기 구원의 욕망이다.

 

우리는 모두 그러한 욕망이 꿈틀대는 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자유라는 말로 포장하고, 삶의 구원을 위한 개인의 노력을 최고의 가치로 부추기는 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는 개인이 노력한 만큼 소출을 쌓아 놓는 것을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무엇이든지 그 분배가 노력에 비례할 때는 정의롭다고 생각하지만, 반비례할 때는 불의하다고 생각하며 폭동을 일으킨다.

 

오늘 말씀은 그러한 우리의 생각을 전복시키는 말씀이다. 부자는 자신이 소출이 많아 곳간을 크게 짓고, 큰 곳간을 가득 채운 것에 만족하며,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19). 부자의 만족은 다른 만족이 아니라, 스스로 구원을 확보했다는 데서 오는 만족이다.

 

우리도 그렇게 산다. 스스로 노력하여 얻은 직장, , 자동차, 각종 재산들, 등을 보면서 우리는 만족해 한다. 그러면서, 나름대로의 감사를 (하나님)’에게 드린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스스로 노력하여 얻는 것들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 안심하며 살아간다. 우리의 삶의 토대가 여전히 소유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아주 기가막힌 반전이 일어난다. 부자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20). 원래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논리상 맞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네 소출을 도로 찾으리니 그래도 네가 평안하겠느냐?”

 

, 위의 두 가지 말씀 중, 우리는 어떠한 말씀에 더 분노할까? ‘네 영혼을 도로 찾을 것이다!’일까, 아니면, ‘네 소출을 도로 찾을 것이다!’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아마도 모든 사람들)네 소출을 도로 찾을 것이다!’라는 말씀에 더 분노할 것이다. 왜 그럴까? 탐심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확보한 구원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누가 어리석은 자인가? ‘네 영혼을 도로 찾을 것이다!’에 분노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자일까, 아니면, ‘네 소출을 도로 찾을 것이다!’에 분노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자일까? 후자가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후자처럼 산다. ,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스스로 확보하느라, 힘들고 어렵게 산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구원을 확보할 수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부자가 어리석은 자여라는 호칭을 들은 이유는 그가 스스로 구원을 확보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서 만족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이 단순히 구원은 하나님께 있으니, 하나님을 잘 믿으라는 뻔한 설교인가? 그렇지 않다.

 

구원을 스스로 확보한, 부자와 같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별로 없다. (요즘 불평등의 문제는 최고로 심각하다.)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은 구원을 스스로 확보하기 위해서 수많은 염려 가운데 살아간다. 삶에 걱정 근심이 끊이지 않는다. “예수 믿어서 구원 받았다라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근심 걱정 가운데 살아간다. 왜 그럴까? 우리는 여전히 스스로 노력하여 확보한 소출을 구원의 토대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부자에 이어 나오는 말씀은 이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12:22-23). 그러면서 예수님은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28)라는 말씀을 하신다.

 

세상은 어리석은 부자처럼 살라고 말한다. 자기의 구원은 자기 스스로 확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게 정의라고 말한다. 그래서, 세상은 자기 스스로 구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근심과 염려 가운데 치열한 경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런데, 성경은 자기 스스로 구원을 확보하는 일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한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목숨과 몸을 위한 염려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평강 안에 머물라고 말한다.

 

누가 어리석은 자일까? 말씀에 등장하는 부자같은 자가 어리석은 자일까? 아니면, ‘까마귀처럼, ‘백합화처럼, ‘들풀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어리석은 자일까?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부자처럼 살아도 어리석은 자이고, ‘까마귀나 백합화, 들풀처럼 살아도 어리석은 자이다. 우리는 어떤 어리석은 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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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