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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9.08 성령, 혹은 성령처럼
  2. 2017.09.07 도전과 응전 1
  3. 2017.09.01 자유 1
  4. 2017.08.24 하나님이 하신 일
  5. 2017.08.15 내 아버지는 농부라 1
  6. 2017.08.11 에바브라 1
  7. 2017.08.02 세화교회로 오세요!
  8. 2017.07.26 미셔널 처치 2
  9. 2017.07.17 사랑의 나눔
  10. 2017.07.17 안 되면 되게 하라 1
  11. 2017.07.01 기쁨에 놀라다 1
  12. 2017.06.25 소통의 능력
  13. 2017.06.24 위로의 힘
  14. 2017.06.15 부활의 신비 1
  15. 2017.06.12 모른 척 돌아서지 말라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9. 8. 07:17

성령, 혹은 성령처럼

(갈라디아서 5:16-26)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공동체에 제기한 질문은 이것이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3:2).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보편적인 질문이다.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자. 우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인가, 아니면 믿음으로인가?

 

이렇게 바꾸어서 물어보자. “여러분은 성령을 받았는가?” 받았으면 왜 받았고, 못 받았으면, 왜 못 받았는가? 성경에 의하면, 성령은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 성령은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신앙고백)으로만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령을 못 받은 이유는 우리에게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과 율법을 착각한다는 것이다.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믿음을 통한 신앙생활을 한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렇게 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율법적인 신앙생활이 가시적이고, 매력적이고,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율법적인 신앙은 기본적으로 자기의 한계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그리고 남들보다 한계 수준이 높은 이들은 남들보다 자기가 신앙이 좋다고 착각하고, 교만해진다. 일례로,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창녀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한 기도에서, 그들은 십일조를 드리고, 금식을 하고, 자신의 한계 상황 안에 있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들이 십일조를 드릴 수 있는 이유는 잉여의 재산이 있어서 그런 것이고, 그들이 금식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잘 먹어서 그런 것이고, 그들이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은 죄를 범하지 않아도 되는 만큼 안전이 확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당시 일반사람들은 십일조를 드릴 수 없을 만큼 생활이 궁핍했고, 금식 하나 안 하나, 평소에 굶는 것을 밥 먹듯이 하기 때문에 금식의 의미가 없을 뿐더러, 금식하다가는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죄를 짓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 없는 불안정한 환경에 내 던져져 있었다.

 

믿음은 분명히 그런 것이 아니다. 믿음은 자신이 정해 놓은 한계 상황에서 바르게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한계 상황을 뛰어 넘는 순종이고 영과의 일치이다.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든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6).

 

믿음을 가지면 성령을 받는다. 이 말은 이제 육체의 소욕대로 살지 않고, 영의 인도대로 살게 된다는 뜻이다.  요한복음 36~8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이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으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이것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니고데모와 대화를 나누던 중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다. 그렇다. 영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영은 어디에 매이지 않는다. 영은 자유롭다. 영은 활발하고, 강인하고, 모험적이다. 영은 생명력이고, 영은 그 어느 것도 잡아 둘 수 없으며, 영은 두려움 없이 모든 것을 감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활발하고, 강인하고, 모험적이다.

 

아브라함이 딱 그렇다. 그는 믿음을 가졌다. 믿음을 가졌더니, 그에게 성령이 왔다.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았다. 그는 활발했고(100세에 아이를 가질 정도로), 강인했고, 모험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자신의 삶의 자리를 떠나 새로운 곳을 향할 줄 알았고, 그는 남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한 일을 감행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 바치려 한 사건이다.

 

율법은 자신의 한계 상황 안에서만 움직이지만, 믿음은 자신의 한계 상황을 벗어나는 것도 감행한다. , 모험을 한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친 사건은 자신의 한계 상황을 벗어난 일이고, 모험이었다. 만약, 아브라함이 자신의 한계 상황에만 갇혀 율법적으로 행했다면, 그는 결코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육체의 소욕에 따라 사는 삶을 너무도 잘 알고 잘 행한다. 우리는 율법적인 신앙을 편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믿음을 통해 선물로 받게 된 성령에 따라 사는 법은 잘 모른다. 우리는 대개, 갈리디아 교회 공동체에게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데선수다.

 

믿음이란, 욕구의 충족 기대가 아니라(~ 될 줄로 믿습니다!),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좁은 길이고, ‘좁은 문이다. 그러나, 그 좁은 길, 좁은 문에 참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그 길, 그 문을 통과하려 들 것이다. (이제 곧 폐기되는 사법시험에 그 동안 수많은 젊은 이들이 매달렸다. 사법시험은 그야말로 좁은 길’, ‘좁은 문이었다. 그런데, 왜 젊은 이들이 거기에 젊음을 바치는 것일까? 그 좁은 길, 좁은 문을 통과하면, 영광스러운 삶이 열릴 거라는 기대 때문이다.)

 

믿음이라는 좁은 길, 좁은 문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율법의 행위라는 노역의 시궁창에 빠지고, 육체의 일이라는 탐닉의 늪빠진다. 노역과 탐닉은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상하게 할 뿐이다.

 

14. 오늘 말씀처럼, 얼마나 많은 이들이 육체의 일을 통해 탐닉의 늪에 빠지고 있는지 우리는 조금만 눈을 떠서 세상을 바라보아도 금새 알 수 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19-21).

 

탐닉의 늪에 빠진다는 것은 그것에 홀려서 정신을 못 차린다는 뜻이다. 갈라디아서에서 나오는 육체의 일은 모두 그들을 홀리는 어떠한 영(spirit)과 관련이 있다. , 그들(이방인들)의 문화를 지배하고 있던 그리스로마신화에 등장하는 신들과 관련되어 있다. 그들이 음행을 하는 이유, 원수 맺는 이유, 분쟁과 시기와 분을 내는 이유, 술 취하는 이유 등, 육체의 일을 행하는 것의 뒤에는 그들을 움직이는 어떠한 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탐닉의 늪에 빠지게 하는, 그래서 위와 같은 육체의 일을 하게 하는 영과를 질적으로 다르다.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은 생명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생명의 열매를 맺는다.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으로 산다. 그래서, 성령으로 행하게 된다. 성령으로 행하는 자는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 성령으로 행하는 자는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령처럼, 모든 한계를 뛰어 넘는 생명력과 강인함과 모험심이 있기 때문이다.

 

바람처럼, 즉 성령처럼 사는 인생만큼 멋진 인생이 어디에 있을까!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소망을 담아 를 하나 지었다. ‘선재(仙在)’ – 신선 선, 있을 재. 신선처럼 사는 존재라는 뜻이다. 나에게는 호가 세 개 있다. 희락당, 사현, 그리고 선재. 그 중 선재는 성령을 가슴에 품은 종말론적인 삶을 지향하고자 하는 나의 신학적, 철학적 사상이 담긴 호이다.

 

성령, 혹은 성령처럼’, 그렇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성령과 일치하여, 그게 힘들면 성령을 흉내라도 내는 삶, 그런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는 삶이 될 것이다. 믿음으로 받은 성령, 그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령의 열매, 생명의 열매를 많이 맺는 믿음의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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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9. 7. 07:49

도전과 응전

(본문: 1:6-14, 2:1-4)


 

(자고 일어났더니, 세상이 난리가 났다. 북한이 제6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미국과 중국을 동시에 압박하는 노림수가 있는 것으로 본다. 1994년 클린턴 정부 때, 북한 선제공격 시나리오가 북한에 급히 날아간 지미 카터 대통령의 중재로 멈춰졌지만, 그때만해도 북한의 핵 무기는 초기 실험단계였다. 그러나, 지금은 북한이 사실상 핵무기를 보유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이제는 최악의 위기까지 치닫고 있는 상황이다. 대한민국이 만난, 최고의 도전이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도전과 응전이다. 이 말은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의 말이다. 토인비 - 그는 문명을 발생·성장·쇠퇴·해체 과정을 거치는 유기체로 파악하고, 이러한 문명이도전에 대한응전으로 탄생한다고 주장했다. 이 방대한 저작에서 그는 인류 역사상 등장했던 다수의 문명들을 비교·분석하는 데 환경보다는 주체적 대응을 중시했다(김호기, 세상을 흔든 사상 70년, 경향신문). 문명의 발생에서 환경이 중요하냐, 주체적 대응이 중요하냐는 지금까지도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한 사항이다.

 

환경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만들어진 고사성어가 있다. “맹모삼천지교” – 맹자의 엄마가 맹자를 좋은 환경에서 교육시키기 위하여 세 번 이사했다는 고사성어다. (묘지 시장 서당) 환경도 중요하고, 주체적 대응도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도전이 다가왔을 때 그에 대하여 어떻게 응전(response)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교회도 발생, 성장, 쇠퇴, 해체의 과정을 거치는 유기체, 그러는 사이에 도전에 응전한 새로운 교회가 생겨난다. 우리 교회에 다가왔던 도전들에 대하여 우리는 지혜롭게 잘 응전하면서 새로워진 교회를 세워나가고 있다.

 

오늘 말씀은 초대교회에 다가온 도전을 그들이 어떻게 응전하여 극복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초대교회의 큰 도전, 주님이 승천하셨다. 승천하셨다는 것은 주님이 하늘로 들려 올려지셨다는 뜻이지만, 실제적인 의미는 주님이 자신들 곁에 더 이상 있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정말 큰 도전이다. 하나님 같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겨진 자식들에게 다가온 도전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엄청난 큰 도전이었다.

 

이들은 이 큰 도전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주님의 말씀대로 함께 모여 기도하며 성령의 간구를 통해서 극복한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이 충만하면, 눈에 보이는 주님은 안 계시지만, 성령을 통하여 주님은 그들과 영원히 함께 계신다.

 

초대교회는 자신들에게 다가온 도전에 적절하게 응전하여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간다.

1) 가룟 유다를 대신한 맛디아 선출 - 뭔가 잘못했을 때, 죄라는 도전이 왔을 때, 회개라는 응전을 통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그러질 못했다. 12명의 사도 중 한 명이 빠진 도전을 초대교회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지혜롭게 극복한다.

2) 경제적 어려움이 왔을 때, 나눔이라는 응전을 통해서 새롭게 일어날 수 있다. (물건을 통용했다.)

 

초대교회가 도전이 올 때 마다 어떻게 응전했는지 아는 일은 우리 인생의 도전을 극복하는 데 굉장한 영감을 준다. 그들은 도전이 왔을 때마다, 이렇게 했다. 모두 함께 모여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 공회에 잡혀 갔을 때, 초대교회에는 또다른 엄청난 도전이 왔다. 그때 그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다 함께 모여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에 힘썼다. 그들은 한 마음으로 모여 기도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도전 중 하나는 신앙의 사유화이다. 신앙이 사적인 영역으로 전락한 데는 경제사회적 구조의 변화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체제때문에 생긴 일이다.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는 시장경제체제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말하는데, 시장경제체제의 가장 큰 요점은 사유재산의 강화이다. 개개인이 원하는 무엇이든 시장에서 구입하여 자기의 사적 소유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체제 하에 있는 우리들은 돈이 없어서 그렇지,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신앙적인 영역에도 영향을 미쳐, 신앙도 사적인 소유의 대상으로 삼는 경향이 굉장히 크다.

 

그렇다 보니, 삶의 어떠한 문제가 생겨서 도전이 올 때, 그 문제를 사적인 신앙의 영역에서 해결하려는 경향이 크다. ,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신앙의 역량으로 도전에 대하여 응전하려고 한다. 그러한 요소는 교회의 공동체성을 허무는 가장 큰 요소 중 하나가 된다. 교회 와서 기도도 하고, 예배도 드리지만, 도전에 응전이 사적인 영역에만 머문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이 필요에 의해서 찾은 종교시설이 되고 만다.

 

그리스도인은 삶에 도전이 발생했을 때, 성령의 간구하심을 통해서 응전하여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그런데, 성경은 성령의 역사를 결코 개인이 사유재산 갖듯, 백화점에서 물건 사듯 그렇게 받거나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성령의 역사는 함께 모여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예배할 때, 기도할 때’, 교회 공동체 위에 내리는 것이다. 시장 경제 체제에 길들여진 현대 기독교인들은 이 점을 놓치고 있다.

 

성령의 역사를 사적인 신앙의 영역으로 떨어뜨리는 것, 이것이 현대 기독교가 겪고 있는 가장 큰 도전 중 하나이다. 우리는 이것에 올바르게 응전해야 한다. “모두 함께 모여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이 말씀을 꼭 기억해야 한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에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 여러분들의 삶에 다가오는 크고 작은 도전들을 여러분의 개인의 신앙의 역량으로만 해결하려 들지 말라. 도전이 다가올 때, 교회공동체와 함께 기도하고 예배하라. 도대체 여러분에게 여러분 옆에 앉아 있는 교우들은 어떤 의미인가? 같은 종교시설을 쓰는 타인인가?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된 지체인가?

 

교회에서 함께 드리는 공적인 예배를 베스킨라빈스 31’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예배는 골라서 먹는 상품이 아니다. 교회의 모든 예배는 공동체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이다. 교회 공동체의 예배에 모두 함께 모여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쓸 때’, 주님께서는 약속하신 성령을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역사를 통해 우리들 가운데 보내주시는 것이고, 우리는 그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우리의 삶에 다가온 도전들에 대하여 올바르게 응전하며 새로운 역사, 새로운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 나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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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9. 1. 11:27

자유

(갈라디아서 5:1-12)


화룡점정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고대 중국 양나라의 장승요라는 화가가 있었는데, 안락사라는 절의 주지스님의 부탁을 받고 그 절에 용을 그리고 마지막에 눈동자를 그려 넣었더니 뇌성벽력과 함께 그 용이 벽을 박차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점정'은 눈동자를 그려 넣는다는 뜻이다.

 

자유는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화룡점정이다. 인간은 자유를 얻는 순간, 하나님처럼 자유로운 영혼이 된다. 자유는 생명의 최고 가치이다. 자유가 없는 생명은 생명이 아니다. 반대로, 생명의 자유를 빼앗거나 억압하는 것은 최고의 죄이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자유를 스스로 박차는 일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

 

성경은 생명과 자유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생명과 자유를 주셨다. 그런데 불과 두 장 뒤에, 인간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생명과 자유를 버리고, 죽음을 선택한 이야기가 나온다. “역사는 생명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와 죽음을 택하는 인간의 의지가 교차되어 나오는 이야기이다”(유진 피터슨, <자유>, 2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53:6). 우리는 오늘도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간다. 거기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다. “네가반드시 죽으리라”( 2:17). 죽음은 어떠한 실체이기도 하지만 어떠한 현실에 대한 충만한 메타포이기도 하다.

 

우리 인간이 너무 죄와 죽음에 절어 있다 보니까, 생명과 자유를 얻어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며 산다. 이 상황은 마치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오랜 감옥 생활 후에 출소한 모건 프리먼이 한 독백과 같다. “이제 허락 받지 않으면 오줌도 안 나온다.” 또한 이 상황은 오랜 세월 동안 애굽의 노예로 살다가, 출애굽했지만, 상황이 불편해지자,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던 노예 근성을 못 벗은 이스라엘 백성과 같다.

 

우리는 자유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렇다 보니, 자유를 얻었음에도 자유를 누리며 살 줄 몰라 이전으로 되돌아가려고 한다. 성경의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약속하시고, 복을 주셨다. 이제 그들의 자손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복을 누리면서, 믿음으로 살면 된다. 그런데, 그들은 어느덧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하나님의 부르심과 약속과 복을 잃어버리고, 애굽이 부과한 일을 통해 그들이 주는 고기와 밥과 국을 받아 먹으며 산다.

 

이제 그들은 일하며 사는 법은 알지만, 믿음으로 사는 법은 잊어버렸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 나라에 살지 않고, 애굽에 살았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우리도 일하며 사는 법은 알지만, 믿음으로 사는 법은 잘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약속과 복을 믿지 못하고, 세상이 주는 고기국과 밥을 얻어 먹으려고 그들이 기획하고 요구하는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예처럼 일하며 산다.

 

갈라디아서는 자유의 서신이라 불린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만 봐도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이 얼마나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1).

 

우리는 흔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고백한다. 구원은 해방의 의미를 담고 있다.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무엇인가로부터 해방시키셨다는 뜻이다. 그 결과 우리는 자유를 누린다. ,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자유이다.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행위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선물은 자유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죽음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인간은 자꾸 죽음을 택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죽음에서 해방시켜 생명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 인간은 살아갈 수 없다. “우리가 (생명을 누리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행동(구원) 때문이지, 우리의 의지나 마음가짐이나 정치적 행동이나 지성 때문이 아니다”(유진 피터슨, <자유>, 29).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중 하나는 건지다(exaireo)’이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구속행위를 표현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어디에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권세로부터 구속받는 것을 의미한다”(유진 피터슨, 33). 건지심근본적인 건지심이다. 이것은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님이 의도하신 창조 세계와 예정된 구원으로부터 분리시킨 죄로부터의 구속이다”(유진 피터슨 33).

 

하나님의 이 건지시는 은혜 (구원)’가 없다면, 우리에게는 그 어떠한 생명이나 자유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모든 활동 이전에는 먼저 하나님의 건지시는 은혜가 존재한다. 이것을 알고 감사하는 것이 신앙인이다. (밥을 먹을 때도, 일 할 때도, 차를 타고 어디 갈 때도, 휴식을 취할 때도, 잠을 잘 때도그래서 우리는 매순 간 그 일을 하기 전에 기도하고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굳건하게 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유는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유를 지키지 못하고 자꾸 보장된 안전과 바꾸려 한다.

 

갈라디아 교회의 교인들도 그랬다. 그들에게 위협이 된 이단사설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할례의 요구였다. 쉽게 얘기해서, 구원 받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이단사설이 갈라디아 교회의 교인들을 괴롭혔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복음을 버리고 할례를 받았다. 그것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엄중한 경고를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굳건하게 서라라고 한다. 우리는 복음 위에 굳건하게 서 있는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사랑으로써 역사는 믿음이지, 할례가 아니다. ‘보상이라는 제도에 절어 있는 인간은 사랑으로써 역사는 믿음’, 즉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로 모른다. 그런 사람들은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을 즐겁게 또는 기쁘게 한 결과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는 순간, 우리에게서 떠나가는 것은 자유이다. 그렇지 않은가?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잘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 자체가 우리를 얽매이게 한다. 거기에는 자유가 없다. 그 순간 우리는 그저 구원에 볼모 잡힌 노예가 되고 만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이단사설에 대하여 강력하게 규탄을 한다. 우리가 순화된 언어와 순화된 감정으로 읽어서 그렇지 사도바울의 원래 표현은 매우 거칠다.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12). 이것은 이러한 배경을 지니고 있다. 갈라디아는 이교도들의 지역이다. 그곳에는 퀘벨레-아티스라는 종교의식과 거세를 한 사제들이 활동을 왕성한 했다. 위의 구절은 이런 뜻이다. “할례를 가지고 여러분을 선동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자기의 그 지체(성기)를 잘라버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지키는 일에 이렇게 단호했다는 뜻이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굳건하게 지키며살고 있는가? 우리가 얻는 자유는 공짜 즉 은혜로 받은 것이지만, 결코 값싼 것이 아니다. 우리의 자유는 그리스도의 피 값이다.

 

키에르케고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천재는 우리에게 그 자신의 광채를 발산하고, 사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발산한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손으로 얻은 사유재산을 굳건하게 지키는 데는 천재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사도인가?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인가?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굳건하게 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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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8. 24. 04:02

하나님이 하신 일

(창세기 45 1~8절)


 

신파극이라고 있다. – (구파극 가부끼): 한일합방 이후 1910년 대에 일본에서 수입돼 유행했던 연극의 일종이다. 신파극의 소재는 가정비극과 사극이 주조를 이루었다. 이 시기의 대표작은 흥행에 크게 성공한 임선규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이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일제 강점기에 큰 인기를 모은 한국의 신파극이다.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오빠의 학비를 벌기 위해 기생이 된 홍도가 부잣집 아들인 광호를 만나 결혼하게 되지만, 결국 남편에게서 버림을 받고 남편의 약혼녀까지 살해한 뒤 순사가 된 오빠에게 잡혀가게 된다. 흔히 〈홍도야 울지마라〉로 불린다. 

 

원로가수 故 김영춘 씨가 부른 <홍도야 울지마라>는 한국 가요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노래이다. 이서구 작사 / 김준영 작곡의 이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1.    사랑을 팔고 사는 꽃바람 속에

 너 혼자 지키려는 순정의 등불

 홍도야 울지마라 오빠가 있다

 아내의 나갈 길을 너는 지켜라.

 

2.    구름에 싸인 달을 너는 보았지

 세상은 구름이요 홍도는 달빛

 하늘이 믿으시는 네 사랑에는

 구름을 걷어주는 바람이 분다.

 

3.    홍도야 울지마라 굳세게 살자

 진흙에 핀 꽃에도 향기는 높다

 네 마음 네 행실만 높게 가지면

 즐겁게 웃을 날이 찾아 오리라.


<홍도야 울지마라>를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요셉과 관련하여 노래를 이렇게 개사해 보았다. 제목은 <요셉아 울지마라>이다.

 

1. 사랑을 팔고 사는 꽃바람 속에

  너 혼자 지키려는 신앙의 등불

  요셉아 울지마라 주님이 있다

  신앙인의 나갈 길을 너는 지켜라.

 

2. 구름에 싸인 달을 너는 보았지

  세상은 구름이요 요셉은 달빛

  하늘이 믿으시는 네 신앙에는

  구름을 걷어주는 바람이 분다.

 

3. 요셉아 울지마라 굳세게 살자

  진흙에 핀 꽃에도 향기는 높다

  네 마음 네 행실만 높게 가지면

  즐겁게 웃을 날이 찾아 오리라.

 

홍도와 요셉 간에는 차이가 있다. 홍도의 인생은 비극으로 끝나지만, 요셉의 인생은 은혜로 끝난다. 홍도는 노래의 바람대로 살지 못했다. 그녀는 결국 자기 손으로 끝내 인생의 비극을 만들어 내고 만다. 하지만, 요셉은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

 

노래의 가사 중에 가장 가슴에 와 닿는 부분은 3절이다. “홍도야 울지마라 굳세게 살자 진흙에 핀 꽃에도 향기는 높다 네 마음 네 행실만 높게 가지면 즐겁게 웃을 날이 찾아 오리라.” 이 노래의 가사가 일제시대 때 지어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여기에는 현실에 대한 저항의 의미가 분명 담겨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나라를 빼앗기고 힘겹게 살던 한민족에게 <홍도야 울지마라>의 노래는 결심과 희망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래, 지금은 이렇게 힘들지만, 눈물을 닦고 굳세게 살아야지! 삶이 힘들고 어렵다고 마음 가짐과 몸 가짐을 흐트러뜨리면 안 돼지! 마음을 높게 갖고, 행실을 바르게 하면, 언젠가 즐겁게 웃을 날이 올 거야! 그래 힘을 내자!” 이러면서 힘들고 어려운 마음을 다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다잡아도 인생의 질곡을 견디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홍도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요셉은 정말 이렇게 살았다. 형들(가족)의 버림을 받고 노예로 팔려 갔으면서도 마음과 행실을 지키며 살았다. 울지 않았다. 신앙인의 갈 길을 갔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의 가는 길에 낀 구름을 바람으로 걷어 주셨다.

 

요셉이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가 더하신다는 뜻이다. 창세기 3024절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다.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이것은 요셉의 엄마 라헬이 한 말이다.

 

장자권 사건으로 인해 삼촌 라반의 집으로 몸을 피신한 야곱은 삼촌 라반의 둘째 딸 라헬을 사랑하게 된다. 라헬을 아내로 맞이 하기 위해 7년을 하루 같이 일한다. 그런데, 삼촌 라반은 야곱의 노동력을 착취하고자 라헬을 아내로 맞으려면 7년을 더 일해야 한다고 말한다. 야곱은 라헬에 대한 사랑 하나로 7년을 더 버틴다. 그리고 결국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는 듯 했다. 그런데, 삼촌 라반은 야곱과 라헬의 첫날 밤 술수를 쓴다. 라헬 대신 그의 첫째 딸 레아를 들여보낸 것이다. 그렇게 야곱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레아를 아내로 맞이한다. 그런 후에, 삼촌 라반은 야곱이 사랑한 라헬을 야곱의 아내로 준다.  

 

1이제 야곱의 아내가 된 두 자매는 자식을 통해 경쟁하게 된다. 그런데, 레아가 아들을 넷이나 낳는 동안 라헬은 한 명의 자식도 낳지 못한다. 그래서 라헬은 자신의 몸종 빌하를 남편에게 주어 자식을 둘 낳게 한다. 그것에 시샘을 한 레아도 자신의 몸종 실바를 남편에게 주어 자식을 둘 낳게 한다. 그 이후 레아는 아들을 둘 더 낳는다. 이렇게 언니 레아와의 치열한 경쟁의 끝자락에 얻는 자식이 바로 요셉이다.


요셉이 라헬과 라헬을 사랑한 야곱에게 얼마나 귀한 자식이었겠는가! 그리고 라헬이 사랑하는 남편 야곱에게 자식을 더 안겨주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컸으면 어렵게 낳은 자식의 이름을 요셉이라고 지었겠는가! ‘주님, 아이를 더 낳게 해주세요! 더 해주세요!’

 

야곱에게 요셉은 아픈 자식이다. 엄마 라헬의 바람대로 라헬은 그 이후에 자식 한 명을 더 얻는다. 그런데, 그 자식을 낳다가 죽고 만다. 그가 바로 야곱의 막내 아들 베냐민이다. 엄마가 죽는 바람에 요셉은 형들의 틈에서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엄마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외롭게 자랐다.

 

우리는 흔히 요셉을 꿈 꾸는 자라고 부른다. 요셉은 혼자서 공상을 많이 했다. 그래서 꿈도 많이 꿨다. 왜 요셉이 혼자서 공상하고, 꿈을 꾸었겠는가? 형들이 놀아주지 않아서이다. 요즘 말로 하면, 요셉은 왕따였다. 아버지 야곱이 그러한 요셉의 처지를 몰랐을 리 없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이 안쓰러워 요셉에게 특별한 사랑을 베풀어 준다. 다른 자식들은 그냥 일반 옷 입힐 때, 요셉에게는 색동옷을 입혔다. 사실, 이러한 모습이 요셉을 더 힘들게 만들었다.

 

요셉은 형들과 친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어느 날 꾼 꿈 이야기를 형들에게 했다. “형님들, 내가 이런 꿈을 꾸었어요!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었는데 내 단은 일어서고 형님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했어요!” “이런 꿈도 꾸었어요!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을 했어요!” 그런데, 요셉의 꿈 이야기를 좋게 받아들인 형제들이 없었다. 꿈 이야기를 듣고 형들은 요셉에 대한 미움만 키워갔다.

 

모든 범죄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미움은 마침내 사고를 친다. 들판에서 양떼를 돌보고 있던 어느 날, 형들은 아버지 심부름을 온 요셉을 음모를 꾸며 죽이려 한다. 그때 아버지 야곱에게 큰 죄를 범한 맏형 르우벤과 마음이 따스했던 넷째 형 유다의 만류가 없었다면 요셉은 음모에 말려 죽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불행 중 다행으로 목숨만은 건져 요셉은 애굽의 노예로 팔려간다.

 

러셀 크로우가 주연한 <글레디에이터>라는 영화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그 당시 노예로 팔려간 사람들의 삶은 짐승 이하의 삶을 살았다. 애굽의 노예로 팔려간 요셉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요셉은 처음에 애굽의 장군 보디발에게 팔려갔고, 거기에서 험한 일을 겪고(보디발 아내의 유혹과 모함), 감옥에 갇힌다. 요셉에게는 아무런 인권이 없었다.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안개 속에 갇힌 인생이었다. 꿈을 꾸었지만, 그 꿈을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이 아무것도 없었다.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마음과 행실을 높게 갖는 것외에는 없었다.

 

위의 개사한 노래 <요셉아 울지마라>하늘이 믿으시는 네 신앙에는 구름을 걷어주는 바람이 분다.’ 가사처럼,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인생에 낀 구름을 걷어 주신다. 그리고, 그는 애굽의 총리 대신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리고 수많은 일들이 있었고, 수많은 시간이 흐른 뒤, 숱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결국 그토록 그리워하던, 그토록 갈망하던 형들(가족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오늘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눈물 나는 신파극장면 중의 하나이다. 이것이 드라마로 만들어졌다면,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장면일 것이다. 형들은 가뭄에 목숨을 구걸하러 애굽에 왔고, 요셉을 그곳에서 만나게 될 거라는 것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요셉이 애굽의 노예로 살다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요셉은 형들에게 자기 자신을 밝힌다. “나는 요셉이라!” 오늘 말씀 가운데서도, 자기 자신을 밝힌 요셉을 보면서 형들은 너무 놀라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요셉의 고백은 평범한 사람의 고백이 아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5, 8).

 

요셉의 고백은 한 마디로 이것이다. “하나님이 하셨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그렇게 죽도록 고생해 놓고, 자신들을 이 궁지에 몰아놓은 장본인들(형들)을 앞에 두고, 그들을 오히려 위로하며 그들의 죄책을 지워주며,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선포할 수 있는 요셉의 신앙은 전무후무할 정도이다.

 

우리의 인생은 때로, 아니, 자주, “하나님이 하셨다!”라고 고백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롭다. 요즘 한국에서 어떠한 장군의 갑질 논란이 한창인데, 장군 운전병(공관병)을 한 나로서 군대에 대한 나의 기억을 여기에 꺼내 놓고 싶다.

 

나는 김영삼 정권 때 (문민정부) 군생활을 했다. 평소에 군대를 가면 장군 운전병을 하고 싶다고 소망하고 기도했는데, 소망대로 육군본부 작전처장 운전병(공관병)을 했다. 군생활 당시, 국군의 날 행사를 계룡대(육해공군 본부)에서 했다. 국군의 날 행사를 지위하는 장군을 제병지휘관이라고 한다. 제병지휘관은 실세 중 한 명이 맡게 되어 있다. 그때 제병지휘관을 맡은 장군은 육군본부 감찰감 이영대 장군이었다. 그런데, 제병지휘관을 맡아 국군의 날 행사를 준비하던 중, 이영대 장군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췌장암이 발견된 것이다. 그래서 급히 췌장암을 치료하러 미국에 갔다.

 

국군의 날이 다가오고 있어, 병가를 낸 이영대 장군을 대신 할 제병지휘관을 급하게 새로 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9군단 부군단장을 하던 이남신 장군을 급하게 제병지휘관에 임명했다. 9군단 부군단장은 투 스타로서 옷을 벗는 사람이 가는 자리다. 한가한 장군이라 급하게 제병지휘관 자리를 맡긴 것이다. 아무튼, 이남신 장군은 땜빵으로 제병지휘관 자리를 맡아, 국군의 날 행사를 치른 것이다.

 

그런데, 국군의 날 행사를 준비하고 치르는 동안 췌장암을 치료하러 미국에 간 이영대 장군은 그만 죽고 만다. 이영대 장군이 죽자 육군본부 감찰감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 그때 국군의 날 행사를 잘 치른 이남신 장군이 별세한 이영대 장군의 후임으로 육군본부 감찰감 자리에 온다. 인생 역전이다.

 

그때 운전병이 9군단에서 함께 왔다. 운전병에게 이남신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운전병이 정말 괴로워했던 것은, 장군을 모시고 매일 같이 새벽기도에 가는 것이었다. 운전병이 못 일어 나면, 운전병을 깨우지 않고, 장군 본인 혼자 차를 몰고 새벽기도를 다닐 정도로 신앙에 열심인 장군이었다.

 

이남신 장군은 요직인 육본 감찰감 자리에서 진급을 하여, 기무사령관으로 간다. 그러는 사이에 정권이 바뀌었다. 김영삼 정권에서 김대중 정권으로. 이남신 장군은 호남 출신이다. 그래서 그 이후, 이남신 장군은 3군 사령관을 거쳐, 합참의장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그야말로 인생역전이다. 투 스타에서 옷 벗는 9군단 부군단장 자리에 있다가, 우연히 땜빵으로 제병지휘관을 역임하고, 어부지리로 육본 감찰감 자리에 오르고, 그 이후, 정권이 바뀌어 합참의장까지 지내게 된 것은 그야말로 미스터리다내가 아는 한, 그는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기도생활을 열심히 했던 사람이다.

 

내가 지금 기도 열심히 하면 인생역전 된다는 기복적이고 세속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부흥회 같은 데 가면, 여기까지만 이야기한다. 그러나, 우리 교회 가족들이니까 좀 더 이야기 한다. 그러면 이영대 장군은 어떤 사람이었겠는가? 절에 다니던 사람이었겠는가? 교회 안 다니던 사람이었겠는가? 아니다. 이영대 장군도 이남신 장군 못지않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장군이다. 이영대 장군 운전병도 이영대 장군이 매일 같이 새벽기도 가는 것 때문에 힘들어했다. 그러면 뭔가?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하나님께서 하신다. 그러니, 요셉처럼 하나님께 인생을 맡기는 삶을 살자. 마음과 행실을 높게 갖자. 그러면, 우리의 입술에서도, 감사와 찬송 가운데,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고백이 흘러 나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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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8. 15. 14:07

내 아버지는 농부라

(요한복음 15:1-8)

 

얼마전 나파 밸리(Napa Valley)에 다녀왔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지척에 있는 지 몰랐다. 요즘 대중들 사이에서는 포도주 마시는 일이 유행이지만, 개인적으로 포도주든 무엇인든 술 마시는 일에 관심이 없다 보니, 지척에 세계적인 포도주 생산지를 놓아두고도 별 관심이 없었다.

 

성경에는 포도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오늘 말씀도 포도나무에 비유한 말씀이다. 이러한 비유를 좀 더 잘 이해하려면, 포도원에 한 번 가서 포도나무와 가지, 그리고 열매의 상관관계를 유심히 살펴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일컬어 참포도나무라고 한다. 자신을 참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참포도나무가 아닌 것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참포도나무라는 말은 예레미야서 221절의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 됨이냐”.

 

예레미야의 말씀은 이스라엘에 대한 책망이다. 이스라엘은 포도나무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딱 붙어 있어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할 참포도나무 가지인데, 어느덧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이방신에게 딱 붙어 악한 가지가 되어 악한 열매를 맺었다.

 

예수님은 또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는 농부라.’ 우리나라 말로 농부라고 번역했지만, 영어로는 ‘vinedresser’이다. , ‘포도원지기이다. 나는 농부라는 말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더 정겹고, 의미가 더 확실하게 다가온다.


요즘은 농경사회가 아니라, 농부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하다. “農者之天下之大本(농자지천하지대본, 농부가 천하의 근본이다.)”이라는 말이 있다. 지금은 제 4차 산업혁명의 시대라 일컬어지고 있지만, 그래서 IT 산업 또는 AI 산업이 대세를 이루고 있어, 우리 사는 이곳 실리콘밸리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지만, 여전히, ‘농자지천하지대본은 유요한 말이다.

 

나는 강남에서 자랐다. 그런데, 내 어린 시절의 강남, 특별히 내가 성장한 우면산 일대 말죽거리 주변은 논밭이었다. 지금도 어린 시절 논두렁 밭두렁, 그리고 야산(우면산)을 뛰어다니던 일이 눈에 선하다. 요즘 아이들은 생일 때 피자 먹고 놀이기구 타고 게임을 하지만, 우리는 그때 생일 때 모여서 밥, 미역국, 잡채 같은 거 먹고, 밖에 나가서 자치기 하면서 놀았다

 

농번기가 되면 동네 아저씨 아줌마들이 바빠졌는데, 친구들과 논두렁에 가서 올챙이 같은 거 잡고 놀다가, 새참 먹을 때 되면 함께 둘러 앉아 새참을 얻어 먹었다. 그리고 동네 농부 아저씨가 태워주는 경운기(딸딸이)는 최고의 놀이기구였다. 한 여름 땡 볕에 벼가 자라고, 장마가 오면 논두렁이 한강물처럼 넘치고, 장마를 이겨내고 가을이 오면 곱게 머리숙인 벼를 수확했다. 그때 등장하는 어린이들의 놀이기구는 탈곡기이다. 그리고, 겨울이 오면 논에 수북이 쌓인, 탈곡을 마친 볖집들을 이용해 본부라는 것을 만들어 그 속에 들어가 놀았다. 지금 생각하면 먼지가 엄청 났을 텐데, 그때는 그렇게 놀아도 비염에 걸리지 않았다.

 

농부가 해야 할 일은 엄청 많다. 곡식을 자라게 하는 일은 참으로 고단한 일이다. 요즘 사람들은 흔히 하던 일이 잘 안 되면, ‘다 때려 치우고 시골에 내려가서 농사나 짓겠다고 말한다. 농사를 우습게 보는 발언인데, 그러한 발언을 하며 농사 지으러 내려간 사람이 있다면, 얼마 안 돼서 후회하며 다시 도시로 상경할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도 보면, 농부이신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 두 가지 나온다. 가지치기와 가지를 깨끗하게 하는 일이다. 농부 아버지는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를 잘라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이 맺게 하기 위해 깨끗하게 하신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요즘 회사에서 성과를 내는 직원은 더 밀어주고, 성과가 없는 직원은 정리해고 하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그게 아니다.

 

3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 졌다!” 예수님께서 열매 맺지 않는 가지는 잘라버린다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과장법과 강조법을 써 말씀을 듣는 제자들의 마음 자세를 환기시키기 위함이다. 우리도 아이들을 훈육할 때 이런 말을 쓴다. ‘너 또 그러면 맴매 맞을 줄 알아!’ 여기서의 강조는 때리는 것에 있지 않고, ‘아이가 말을 잘 듣는 것에 있다. 위의 말씀은 마찬가지 원리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선포를 믿고 감사한다. “너희는 이미 깨끗하여졌다! (You are already clean!)” 같이 해 보자. “나는 깨끗하다!” 내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아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뚜렷한 사람일수록 인생을 값지게 산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흐릿하면, 그때 인생은 방황하게 된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이미 깨끗하여졌다!”

 

농부이신 아버지의 할 일은 가지치기와 가지를 깨끗하게 하시는 일이지만, 우리의 할 일은 깨끗함을 유지하는 일이다. 홈리스피플을 가까이서 만나면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인가? 냄새이다. 그들의 몸에서는 왜 그렇게 냄새가 날까? 씻지 않아서이다. 몸을 깨끗이 씻는 일도 쉽지 않다. 몸의 청결은 건강과 직결되기 때문에 소홀히 할 수 없다. 우리의 일과를 돌아보라. 빼먹지 않고 하는 일 중에 씻는 일은 반드시 들어간다.

 

오늘 말씀의 논리를 보면, 깨끗해진 그리스도인이 그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하여 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생기는 결과가 있는데,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그 열매는 사랑과 기쁨의 열매이다.

 

재독철학자 한병철이 쓴 <피로사회>라는 책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 상태로 치닫고 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관조적인(사색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것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인간 성격 교정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한병철, <피로사회>, 36).

 

이 말은 철학자 한병철이 직접 말한 것이 아니라, 프리드리히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요즘 철학자들이 현대사회를 바라보며 가장 염려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과잉활동이다. 요즘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활동을 하다 보니,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사색의 삶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자기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은 실제로 버나드 쇼가 자신의 묘비명에 쓴 이 문구를 자신의 묘비명에 새겨 넣어야 할지도 모른다. “내 우물쭈물하다가 이럴 줄 알았다.”

 

사실, 농부가 과잉활동’, 즉 일을 많이 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그렇지 않다. 농부는 해야 할 일만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은 기다림으로 보낸다. 농부는 파종할 시기를 기다리고, 비를 기다리고, 수확을 기다리고, 겨울이 지나기를 기다린다. 농부는 기다리는 동안 땅을 돌아보고 하늘을 바라보고 자기를 돌아본다. 그래서 농부는 겸손하고 간절하다.

 

내가 좋아하는 김경주 시인의 <인형증후군 전말기>라는 시에 이러한 구절이 나온다. “나는 간지럼을 타지 않는다. 밖에서 나를 웃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밖에서 간지럼을 타서 웃는 웃음은 참 웃음이 아니다. 그 웃음은 간지럼이 그치면 그냥 그쳐 버리고 말 웃음이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들은 심각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요즘 TV에서 가장 뜨는 프로그램은 예능 프로그램이다. 가장 인기 있는 연애인도 예능 프로그램을 하는 연애인이다. 요즘 사람들이 예능에 목매는 이유는 예능이 자신들의 삭막한 인생에 간지럼의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누가 간지럼을 태워주지 않으면, 웃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능을 보며 간지럼을 타 웃고 싶은 현대인들의 모습은 처량하기까지 하다.


내 아버지는 농부라”. 이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는 어떻게 들려오는 지 모르겠다. 나의 마음에는 내 아버지가 농부이시니 나도 농부가 되어야지라고 들려온다. , 반드시 해야 할 일만 하고, ‘과잉활동에서 벗어나, 땅도 돌아보고, 하늘도 쳐다보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농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5). ‘거한다는 것은 머무른다는 뜻이다. 머무른다는 것은 어떠한 공간과 어떠한 시간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우리는 몸의 건강을 지키기 위하여 매일같이 거르지 않고, ‘씻는 일에 머무른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이미 깨끗해진우리가 그 깨끗함을 유지하며, 사랑과 기쁨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 즉 머무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한 번 돌아보자. 우리는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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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8. 11. 09:35

에바브라

(골로새서 1:1-8)

축구 좋아하는 사람은 박지성의 맨유 절친 에브라를 안다. 그 에브라를 생각하면, ‘에바브라라는 이름을 쉽게 기억할 수 있다.

 

성경에는 에바브라와 비슷한 이름이 나온다. ‘에바브로디도이다. 물리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이렇게 이름이 비슷하고 헷갈리는 이유는 헬라어를 우리 나라 말로 번역해서 그렇다. 에바브라는 ‘ephabras(에바브라스)’이고, ‘에바브로디도‘ephabrotitus(에바브로티투스)’이다. 완전히 다른 인물이다.

 

어느 곳에나 일꾼이 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교회의 일꾼이다. [오직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하니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보낸 것들을 받았으므로 내가 풍족한데 이것은 달콤한 냄새의 향기요 받으실 만한 희생물이며 [하나님]을 매우 기쁘게 한 것이니라.]( 4:18)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이다. 옥에 갇혀 있는 바울이 쓴 빌립보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가져다 준 인물이 에바브로디도이다. 그리고, 빌립보교회는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옥에 갇혀 있는 바울이 쓸 물건들을 공급해 주었다. 덕분에 바울은 감옥 생활을 잘 이겨낼 수 있었다.

 

어려운 상황을 잘 이겨낼 수 있는 것은 도움의 손길 때문이다. 서로의 어려움을 돌보는 사이가 되기를 바란다. 사도행전에서도 사람들이 성령을 받으니까 벌어진 일 들 가운데 하나가 그런 것이다.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며…”( 2:44-45).

 

에바브로디도에바브라디도가 합쳐진 말로 잘못 아는 사람이 있다. 아니다. ‘에바브로디도는 그냥 고유한 이름이다. ‘디도라는 사람은 다른 인물이다. ‘디도는 그리스 사람인데, 바울의 또다른 동역자로서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갔던 인물이기도하고( 2:1), 무엇보다 그는 고린도와 크레타 섬에서 사역했으며, 바울의 편지를 고린도에 전달한 사람이기도 하다. 신약성경에서 꼼꼼히 성경을 넘기지 않으면 존재가 있는지도 모르고 넘어가게 되는 두 개의 서신서가 있다. 첫째는 빌레몬서이고, 둘째가 디도서이다. 빌레몬서는 1장이고, 디도서는 3장인데, 짧은 3장이다. 그래서 존재가 확인되지 못할 때가 많다. 디도서의 주인공이, 바로 디도이다. 디도는 크레타(그레데) 섬에서도 목회를 하며 복음을 전했는데, 아주 쉽지 않은 지역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바울의 동역자 중 가장 힘든 곳에서 목회한 사람이 디도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크레타 섬 사람들의 나쁜 습성 때문이다. 크레타 섬 사람들의 가장 나쁜 습성은 거짓말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디도서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 이 증언이 참되도다”( 1:12-13).

 

그런 크레타 섬에서 목회한 디도 (목사님)에 비하면, 내 목회 환경은 양반이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물론, 공사다망하셔서 우리가 한 자리에 다 모이기 힘들기는 하지만). (공사다망이란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이 많아서 바쁘다는 뜻인데, 이렇게 쓰이기도 한다.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이 많아서 바쁘면, 다 망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내가 이 일을 왜 하는 지잠시 멈추어 서서 성찰하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는 뜻이다. 주일을 지키는 일이 그런 시간이 되길 소망한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에바브라는 골로새 사역자이다.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은 소아시아와 지중해 지역의 여러 곳을 다니며 많은 교회를 세웠지만,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니다. 골로새 교회는 에바브라가 세운 교회다.

 

에베소라는 곳이 있다. 이 곳은 바울이 소아시아지역 복음을 위한 전초기지로 삼은 곳이다. 에바브라는 이곳에서 사도 바울에게 제자훈련을 받고, 고향(골로새)으로 돌아가 교회를 세운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뿐만 아니라, 인근지역인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도 복음을 전한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을 통해, 사도 바울은 에바브라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 마음이 오늘 말씀에 담겨 있다. “(에바브라)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7, 8).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 “성령 안에 있는 자”, 이러한 칭찬을 듣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에바브라를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으로, ‘성령 안에 있는 자로 인정한다.

 

위에서 소개한 에바브로디도, ‘디도, ‘에바브라는 모두 이방인이다. 유대인의 성경인 구약을 아는 자들도 아니고, 유대인의 율법을 아는 자들도 아니고, 유대인의 메시아 사상을 아는 자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오직,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들은 자들이었다. 이들은 복음을 듣고, 예수를 그리스도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들의 모든 삶을 바친 사람들이다.

 

복음에는 능력이 있다. 로마서에 이런 말씀이 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17).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능력이다. 그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복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능력이 나타난다.

어떤 에너지, 알 수 없는 힘이 우리의 인생을 일으키고 새롭게 한다.

 

복음의 능력이 아니고서, 어떻게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교회와 옥에 갇힌 사도 바울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하며 빌립보교회와 사도 바울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었겠는가. 복음의 능력이 아니고서, 어떻게 디도가 크데타 섬 같이 목회 하기 어려운 곳에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복음의 능력이 아니고서, 어떻게 에바브라가 자신의 고향 골로새에 교회를 개척하고, 그것도 모자라 주변 지역인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 교회를 개척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우리들이 복음을 듣고, 그 능력에 사로잡힌 이 시대의 에바브로디도, 디도, 에바브라인 줄로 믿는다. 우리가 바로 복음의 능력에 사로잡혀, 성도의 쓸 것을 힘써 공급하고, 어려운 상대이지만 좌절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며, 성령 안에서 신실한 일꾼이 되어 전도하고 선교하며 교회를 개척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믿음의 자녀인 줄로 믿는다. 우리 모두, 이 시대의 에바브로디도, 디도, 에바브라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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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8. 2. 06:57

세화교회로 오세요!

(요한복음 1:43~49)

 

오늘 말씀은 이전 단락의 말씀과 쌍을 이루는 말씀이다. 이전 단락의 말씀은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을 다루고 있다. 거기에 보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소개하고 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유대교 전통에서 어린 양심판자를 의미하기도 하고, ‘희생양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린 양 앞에 세상 죄를 지고 가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을 보면, 이 어린 양은 희생양, 속죄양의 뜻으로 쓰이는 것 같다.

 

레위기에 등장하는 제사법을 보면, 속죄로 쓰이는 어린 양은 아무 것이나 가져다 쓸 수 없다. ‘흠 없고 티가 없어야한다. 우리가 흔히 을 생각하면 순진하고 힘이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어린 양이 힘이 없어서 희생양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나쁜 사람들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힘 없는 사람을 희생양삼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어린 양은 힘 없는 양이 아니라 온전하고 순전한 양, 즉 죄가 없는양을 말한다.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와 다른 한 제자는 스승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에게 접근한다. 자신에게 접근하는 세례 요한의 두 제자를 보고 예수님은 묻는다. “무엇을 구하느냐?” 그랬더니, 이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묻는다. “어디 계시오니이까?” 그랬더니, 예수님은 그들에게 와서 보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보기에는 조금 생뚱맞은 대화이다. 제자들이 질문한 어디 계시오니이까?”는 처음 사람을 만났을 때 나누는 대화의 일종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어디 사세요?” “, ~ 프리몬트 살아요!” “한 번 와 보실래요?” 이것은 우리가 고대 유대인들의 대화방식을 알지 못해서 벌어지는 해프닝이다. (케익 사고 초 41개 달라고 했는데, 41개 초를 받은 이야기 문화가 달라서 벌어진 해프닝)

 

여기서 어디 계시오니이까?”라는 질문은 어디 사세요?’의 뜻이 아니라, ‘어떤 인격체인지를 묻는 말이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그 사람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와서 보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합니까? 그러면 와서 나와 함께 사귐을 가져보시오!”

 

안드레와 다른 제자는 예수님의 초대를 받고,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인격체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 깨달음에 대한 고백은 안드레가 자신의 형제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드러난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그렇다. 예수님의 존재는 구원자이다. 그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다.

 

그리고 나오는 이야기가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말씀이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나다나엘을 전도하는 이야기이다.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의 동향 사람이다. 그들은 벳새다에 살았다. (여기서 성경을 잘 아시는 분은 의문을 품을 것이다. 마가복음에 보면, 베드로의 집은 가버나움에 있는 것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것인가? 아마도, 베드로는 벳새다에 살다 가버나움으로 이사했던 것 같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찾아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45). 그랬더니, 나다나엘의 반응이 시큰둥하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46). 우리는 이 말을 보고, 나다나엘이 굉장히 시니컬하고 재수없는 사람인 것처럼 오해한다.

 

그런데, 우리의 그런 오해와는 전혀 상관 없이, 나다나엘은 굉장히 신실한 사람이다. 빌립이 애초부터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를 운운하며 예수님을 나다나엘에게 소개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말한 것도 이유가 있다. 나다나엘은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진지하게 토라를 공부하고 묵상한 사람이었다. 그 증거가 뒤에, 즉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무화과 나무 아래서 보았다라고 말씀하신 것에서도 드러난다.

 

옛날에는 요즘처럼 도서관이 있어서 시원한 데 앉아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 있지 않았다. 두루마리 형태로 되어 있는 토라(율법책, 창출레민신 또는 히브리바이블)도 매우 비싸서 아무나 구해서 볼 수 있는 물건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당시 랍비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토라를 공부하기 가장 좋은 장소로 무화과 나무 아래가 소개되고 있다. (옛날에 연애하기 좋은 장소로 어디 있었는가? ‘물래방앗간’,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도 실제로 물레방앗간에서 연애를 하셨단다.)

 

빌립은 나다나엘이 평소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 보는 토라에 맞추어 메시아인 나사렛 예수를 소개했던 것이고, 나다나엘은 평소에 자신이 공부한 것에 비추어 나사렛에서는 메시아가 나올 수 없다. 즉 메시아와 나사렛은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인다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것이다.

 

그랬더니,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말한다. “와서 보라! Come and see!” 나다나엘에게 빌립은 믿을 만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빌립의 제안에 나다나엘은 응하여, 그는 나사렛 예수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자신을 만나러 오는 나다나엘을 본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이렇게 평가한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47).

 

이렇게 말하는 예수님을 보고, 나다나엘은 묻는다. “나를 아시나이까?”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48). 예수님이 빌립을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평가한 이유는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열심히 토라를 공부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나다나엘은 비로소 이렇게 고백한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

 

전도지와 전도용품이 도착했다. 전도지의 첫 문구는 세화교회로 오세요!”이다. 예수님이 요한의 두 제자에게 와서 보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와서 보라라고 말했던 것처럼, 우리도 누군가에게 세화교회로 오세요!”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위에서 요한은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했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이것은 이런 뜻이라고 했다. “당신은 어떠한 분입니까?” 우리가 사람들에게 세화교회로 오세요!”하고 교회를 소개할 때, 그들은 똑같이 물을 것이다. “세화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이럴 때 여러분은 세화교회(우리교회)’를 어떻게 소개하실 것입니까? (“우리 교회는 프리몬트에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이렇게 말할까? “프리몬트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얼마 전 출간된 한국교회실태조사보고에 의하면, 노방전도는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100명 중 한 명 있을까 말까, 노방전도에 의해서 교회에 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면, 누가 전도를 할 때 전도가 가장 잘 될까? 가족이나 친척, 그리고 친구이다. 오늘 말씀도 그렇지 않은가. 스승이, 친구가 예수님을 전할 때 관심을 가졌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족이나, 친척, 또는 친구에게 예수님을, 또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얼마나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있는가?

 

사실,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소개하려면, 그 무엇에 대하여 내가 먼저 확신이 있어야 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교회를 소개하려면, 현재 자신이 다니고 있는 교회에 대하여 확신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여러 사람이 똑 같은 물건을 팔 때,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파는 물건을 살까? 당연히, 확신을 가지고 물건을 파는 사람의 물건을 살 것이다. 자동차를 사러 갔는데, 자동차 딜러가, 자신이 파는 차의 특징과 기능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다른 자동차 브랜드와의 차별성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동차 파는 것에 대해서 확신도 없으면, 그 차를 사고 싶겠는가?

 

세화교회로 오세요!”에 자신감이 넘치기를 소망한다. 우리 교회는 교회이름을 이야기하면서 복음을 전하기에 참 좋다. “우리 교회의 이름은 요한복음 316절의 말씀을 두 자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그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와 화해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담은 이름입니다. 세화에는 하나님이 세상과 화해하셨다는 복음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가진 비전들은 물론 여느 교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우리교회는 하늘에서 뚝떨어진 괴상한 교회가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한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왜 그러한 비전을 갖느냐이다. 우리는 예배하는 공동체이다. “예배는 사랑의 언어입니다. 오직 사랑(예배)를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왜 예배를 드리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까!

 

우리는 선교하는 공동체이다. “복음 전하는 일은 교회의 존재이유이고 사명입니다. 우리는 세상 끝 날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을 사모합니다.”

 

우리는 배우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배우는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배움을 통해서 하나님과 소통하고 세상과 소통하고 세대 간에 소통합니다.”

 

우리는 친교하는 공동체이다. “공동체를 상실한 문화 속에서, 인간성을 왜곡하는 장벽들과 맞서, 우리는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게 헌신합니다.”

 

우리는 봉사하는 공동체이다. “우리는 봉사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받아들여졌고, 이해받았고, 사랑받았다는 것을 기뻐하며 감사합니다.” 우리가 섬길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받아들여졌고, 이해받았고, 사랑받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했다. “그대는 단 한 가지 / 짤막한 계명을 받았습니다. / 사랑하십시오. / 그리고 그대 마음대로 하십시오. / 침묵하려거든 사랑으로 침묵하십시오. / 말을 하려거든 사랑으로 말을 하십시오. / 바로잡아 주려거든 사랑으로 바로잡아 주십시오. / 용서 하려거든 사랑으로 용서 하십시오. / 마음 깊은 곳에 사랑의 뿌리를 내리십시오. / 이 뿌리에서는 선한 것 말고는 그 무엇도 나올 수 없습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어거스틴의 명언이다. 이 어거스틴의 명언은 성경의 말씀을 자신의 말로 옮긴 것이다. 요한복음 13 3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나는 이것을 늘 마음 속에 품고 산다. 나는 사실, 목회하면서 어떠한 일을 하기보다, ‘사랑하려고한다. 어떤 일 하는 것은 차라리 쉽다. 그런데, 사랑하는 일은 오히려 어렵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사랑하는 일외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까?

 

세화교회로 오세요!”에 자신감이 실릴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없어야 한다. 교회 와서 어떤 일을 하지 말고, 사랑하는 일에 전념해 보라. 함께 예배 드리는 동료 교우를 사랑하라. 교회를 사랑하라. 그러면, 우리교회는 쉼과 우정과 회복이 있는 교회가 분명히 될 것이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가 있는 교회가 틀림없이 될 것이다.

 

쉼과 우정과 회복이 있는 세화교회로 오세요!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가 있는 세화교회로 오세요! 이것이 우리의 간증이요, 이것이 우리의 외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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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7. 26. 16:43

미셔널 처치 (Missional Church)

(사도행전 1:8 / 벧전 2:9)

 

한인이민교회사는 크게 세 곳에서 비롯된다. 모두 구한말 일제시대와 관련된다. 첫째는 일본, 둘째는 중국, 셋째는 미국이다. 일본에서는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한국인교회가 생겼는데, 그들의 도쿄 2.8 독립선언이 한국 본토의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리고, 중국의 상하이와 북간도에 한국인 교회가 생겼고, 미국에서는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에 한국인 교회가 생겼다.

 

어렵고 힘든 시절, 한인이민교회는 한국인들의 정신적인 고향이 되었고, 이민자들은 교회에 모여 예배 드리고, 친교를 나누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고, 고국의 미래를 위해 기도했으며 자신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왔다.

 

이런 저런 이유로 고향을 떠나 타국에 흩어져 나그네처럼 사는 사람들을 디아스포라라고 한다. 바울의 선교는 모두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향한 것이었다. 바울은 이방인의 지역 어디를 가든, 유대교 회당에 들러 복음을 전했고,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사도 바울의 서신서 뿐만 아니라, 베드로전후서도 디아스포라를 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우리가 함께 나눈 다음 말씀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요즘은 별로 그렇지 않지만, 옛날만해도 고국을 떠난 사람들은 일종의 사연들을 지니고 있었다. 가난, 정치적 환경 등 때문에 고향을 떠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피해의식, 소외감, 좌절감 등이 존재했다. 성경에는 디아스포라에게 주는 메시지가 많다. 대표적으로 구약에는 에스겔서가 있고, 신약에 나오는 서신서들을 대부분은 디아스포라에게 주는 메시지이다. 그 메시지의 핵심은 나그네 생활 속에 놀라운 하늘의 비밀이 있다는 것이다.

 

실의와 절망에 빠져 있는 디아스포라의 입장에서 베드로 전서의 말씀을 다시 들어보라. 우선 디아스포라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선포를 들어보라. “여러분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들어보라. “여러분이 지금 이렇게 나그네 되어 살아가는 것은 이 어려운 환경에서(어두운 데서) 여러분을 부르셔서 하늘의 놀라운 비밀(기이한 빛)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디아스포라 교회, 우리 이민교회가 살고 번성하는 길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이 복음대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복음)’을 선포하는 데 있다.

 

오늘은 7 10일부터 12일까지 있었던 나바호 인디언 선교에 대한 보고를 하면서, 선교적 비전을 공유했으면 한다. (사진)

 

1) 가는 길 - Bastow에서 잤어야 하는데, 놓쳐버려 새벽 2시에 Motel 도착

2) Flagstaff에서 40분 더 들어간 곳, 주소가 없는 곳에 교회가 있음

3) Gray Mountain Bible Church - 나바호인디언교회 중 가장 오래된 교회

                             - 현재 미국 교회들 대부분 철수 (반감때문)

                             - 한인선교사들이 주로 선교 담당

                             - 40만명 중 1%가 기독교인 (4천명 정도)

4) 나바호 인디언들과의 만남 - 아이들 (자녀들을 많이 낳는 편)

                            - 모두 영어권 (나바호 언어는 더 이상 전수 안됨)

                            - 윈드토크라는 영화에 나오듯, 나바호 인디언의

                              언어 덕분에 2차대전 승리로 이끔(암호해독 불가)

-      장애아동 비율이 높음 (약물 복용 후유증, 근친 등)

-      나바호 인디언 대모 (97): 100에이커 기부(선교목적)

-      나바호 인디언 집 방문 사막 한 가운데 있음 / 띄엄띄엄 / 물과 전기 부족으로 고통 당함

-      물이 부족하여 말이 더위에 타 죽어 있는 장면

5) 선교센터 건축 중 - 3년 째 물과 전기 공급 안 되고 있는 중

                    - 연방정부에서 허가를 안 내줌

                    - 여러 가지 내부 사정(정치적 사정)이 있겠지만,

                      생활에 기본적인 물과 전기가 공급이 안 되어 고통 받음

 

강평회 하는 데, 함께 사역한 남자 집사님이 이러한 컴플레인을 하셨다. “우리가 이렇게 와서 애써서 선교를 하는 데, 이들에게는 전혀 감사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이 어떠한 효과의 의미를 가지는 지 잘 모르겠다.”

 

이에 대해 선교사님이 이런 대답을 하셨다. “여러분들은 아주 짧게 왔다 가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뿌린 작은 씨앗이 어떻게 자라나는 지 잘 인식을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매일 곁에서 지켜보는 나의 눈에는 선교활동를 통해 조금씩 변화되어 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니, 자신감을 가지고 선교활동을 하시라.”

 

감리교신학대학교의 교회사를 가르치는 이덕주 교수가 쓴 <한국교회 처음 이야기>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일화가 있다. 데이비스라는 호주 선교사가 있었다. 그는 조선 선교를 호소하는 영국성공회 울프 선교사의 글을 읽고 감동을 받아, 조선 선교를 결심한다. 그런데, 영국성공회의 후원을 받지 못하게 되자, 빅토리아 주의 장로교회로 적을 옮겨 목사 안수를 받은 후, 교인들과 주변 친지들의 도움을 받아, 1889 10월 조선으로 선교를 온다.


그는 서울에서 다섯 달 동안 한국어 공부를 한 뒤, 1890 3 14, 선교 목적지인 부산을 향한다. 그는 조선인 어학선생과 짐꾼을 대동하고, 수원과 공주를 거쳐 추풍령 고개를 넘어, 1 5백리를 걸어서, 스무 날에 걸쳐 부산에 도착한다. 그런데, 그는 무리한 여행으로 인해 천연두에 걸리고 폐렴까지 걸려 마지막 닷새 동안 아무 것도 못 먹는다. 그런 상태에서 데이비스는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던 게일 선교사의 집에 도착한다. 그때가 4 4일 금요일 저녁이었다. 게일은 데이비스의 위독한 상황을 눈치채고 곧바로 일본인 병원에 입원시켰으나, 다음 날 그만 죽고 만다.

 

도착하자 마자 죽을 선교 여행을 뭣 하러 가냐고, 말할 수도 있다. 도착하자 마자 죽은 데이비스가 무슨 선교의 결실을 맺은 게 있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데이비스의 죽음의 소식이 그의 누나를 통해서 호주에 전해졌고, 그 소식은 호주장로교인들의 마음을 움직였으며, 그들은 그때부터 선교비를 모금했고, 호주장로교회는 적극적으로 조선 선교를 착수했으며, 결국 그 후로 1년 뒤, 매케이, 멘지스, 포셋, 페리 등으로 구성된 개척 선교단이 부산에 도착한다. 그렇게, 부산선교는 시작된 것이다.

 

우리가 읽은 말씀처럼, 선교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사명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네슬리 뉴비긴이라고, 영국의 유명한 선교사, 선교학자가 있다. 이분이 주창한 유명한 선교학적 용어가 있다. “Missio Dei”라는 말이다. 우리 나라 말로는하나님의 선교라고 번역한다. 이 말이 생기게 된 배경은 네슬리 뉴비긴의 선교활동 경험에서 비롯됐다. 뉴비긴은 주로 동남아시아지역 즉, 말레이지아, 인도네시아 등을 선교했는데, 그는 그곳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우리는 흔히, 선교지에 가면, 우리의 선교활동을 통해서 선교가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네슬리 뉴비긴은 말레이지아, 인도네이아 등지에서 자신들의 선교 이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그곳에서 선교하고 계신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그저 하나님이 먼저 하고 계신 선교에 동참할 뿐이었다는 고백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다. 선교는 우리의 사명이지만, 선교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다. 선교는 이미 선교를 그곳에서 시작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행위이다. 선교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는 가장 신비로운 일이다. 그러므로, 미셔널 처치(선교적 교회)가 된다는 것은 선교비 지출을 많이 하고, 선교지에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고, 선교를 많이 다니는 교회가 아니라, 이미 그곳에서 선교를 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가까이서 만나는 교회이다.

 

선교는 교회의 이벤트가 될 수 없다. 선교는 하나님과의 만남이고 하나님과의 교제이고 하나님과의 연합이다. 선교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일이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발견하는 일이다. 선교는 교회의 존재 근거이다. 교회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 안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친교 안에 있지 못하면, 그것을 어떻게 교회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교회의 부흥은 다른 데서 오면 안 된다. 교회의 부흥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 그 자체이다. 우리 교회가 미셔널 처치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고, 교회가 교회되고, 교회의 참된 부흥을 위해서이다. 우리 모두, 미셔널 처치로 거듭나는 역사를 통해, 하나님을 깊이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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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7. 17. 01:54

사랑의 나눔

(룻기 4:7-15)


몬터레이 수족관에서 가져온 사진 바닷새 위장에서 꺼낸 물건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

저러한 쓰레기를 버리면서 그 누구도 나쁜 생각을 품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이거 버리면 새가 먹겠지.. 낄낄”, 이런 생각하며 쓰레기를 버린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하다. 귀중한 생명을 빼앗아가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에는 생각과 배려가 들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무심코 던진 말, 행동이 누군가(또는 무엇)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

 

성경은 온통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왜 성경은 그렇게 사랑에 대해서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가? 왜냐하면, 사랑의 나눔이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은 생명이다.

 

생명은 약탈이고, 자기주장이다. 그렇다 보니, 자기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가진 존재는 약탈하고 자기주장을 펼친다. 그것이 갈등의 원인이 되고, 죄를 낳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자기 생명을 지키기 위한 약탈이나 자기주장을 넘어서는, 더불어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는 나눔이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생명은 필연적으로 약탈이고 자기 주장이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더불어 함께 나누며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그것의 가능성을 보여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자기를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대한 사랑은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가장 감동적인 휴먼드라마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한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기도원에 들어가 소나무 한 그루를 뽑으려 한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깊은 절망과 고독 가운데로 자기 자신을 밀어 넣는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다 부질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가? 바로, 사랑의 나눔이다.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사랑을 나누는 방식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어떠한 방식이든 두 가지를 거치게 되어 있다. 사랑의 나눔에는 나의 시간과 수고(노동력)가 들어간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정서(감정)가 들어간다. 사랑의 나눔에는 반드시 마음(Heart)’이 들어간다.

 

건강한 사람인지 아닌지, 건강한 교회인지 아닌지를 보려면, 사랑의 나눔을 어떻게 하는지 보면 안다. 건강하지 못한 존재는 무엇인가 채우려고만한다. 그러나, 반대로 건강한 존재는 무엇인가 나누려한다.

 

우리 교회에서 밀알 봉사도 하고, 홈리스 봉사도 하는데, 이러한 일들은 참으로 귀한 일들이다. 복지국가에 살다 보니, 이러한 봉사를 하는 데 많은 에너지가 드는 것도 아니다. 2년쯤 된 것 같은데, 어느 신문사에 이런 기고문을 낸 적이 있다. 복지국가에서의 사랑의 나눔이란 어떤 기관에 찾아가서 봉사하는 것도 사랑의 나눔이겠지만, 무엇보다, 세금을 성실하게 내는 것도 사랑의 나눔이라는 주장의 글이었다. 그 글을 잃고 많은 분들이 공감했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한국의 복지는 아직까지 부족한 면이 많다. 일손이 부족해서 봉사자들의 도움의 손길이 절실한 곳이 많다. 미국으로 오기 전, 교회 청년들과 봉사자들을 데리고 한사랑마을이라는 곳으로 봉사를 정기적으로 갔다. 첫날 가서 있었던 일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한사랑마을은 중복장애자들을 돌보는 기관이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기 혼자 무엇인가를 할 수 없는 아이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밥도 먹여줘야 하고, 목욕도 시켜줘야 하고, 대소변도 받아줘야 한다. 그중에 기억에 남는 친구가 있다. 김동문. 어떻게 되었는지, 정말 궁금하다. 가자마자 그 친구랑 친해졌는데, 화장실 쪽에서 헝아헝아부르는 소리가 나서 가보니, 똥을 푸지게 싸 놓았다. 그 똥 다 치워주고, 씻겨주고, 밥도 먹여주었다.

 

사랑의 나눔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의 나눔을 멈추지 않고, 힘써 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곳에,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사랑의 나눔이 대표적인 방식 중 하나가, ‘기업 무를 자였다. 남편이나 아들이 모두 죽은 여인네들은 그 당시 살아갈 길이 없었다. 그러나, ‘기업 무를 자라는 율법을 통해서 그들은 생명을 유지할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기업 무를 자를 시행해야 할 당사자가 그것을 시행하느냐 마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갈리는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 보듯이, 보아스는 기업 무를 자의 율법(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하게 시행하는 것을 본다. 절차를 지키며 신속하게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인 기업 무를 자의 사랑의 나눔을 시행한다. 보아스의 사랑의 나눔으로 인해 실질적인 혜택을 입은 자들은 룻과 나오미이다. 그러나, 보아스의 사랑의 나눔에는 놀라운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룻기는 족보로 끝난다. 그 족보의 마지막을 보면 이렇다.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룻기 4:21-22). 보아스의 사랑의 나눔 가운데 결국 다윗 왕이 태어난다. 우리가 알다시피, 다윗 왕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다. 보아스의 사랑의 나눔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계신 것을 본다.


(예화) 

1880 년 여름 미국 메릴랜드에서 있었던 일이다. 가가호호 방문해서 물건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가난한 고학생 젊은이가 있었다. 그렇게 온종일 방문판매를 다녔기 때문에 저녁 무렵에는 온몸이 지칠대로 지쳤고 배도 고팠다. 하지만 주머니에는 다임(10센트) 동전 하나밖에 없었다. 그 돈으로는 뭘 사먹을 수도 없었다. '다음 집에 가서는 먹을 것을 좀 달라고 해야지.' 젊은이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계십니까?"

현관 문을 두드리자 어여쁜 소녀가 나왔다.

부끄러움이 많은 젊은이는 차마 배고프다는 말은 못 하고 물 한 잔만 달라고 했다. 그러나 소녀는 젊은이가 배가 고프다는 사실을 알았고, 큰 잔 가득 우유를 담아 왔다. 젊은이는 그 우유를 단숨에 마셨다. 그러자 온몸에서 새로운 힘이 나는듯 했다. "우유값으로 얼마를 주면 될까요?" 소녀는 이렇게 답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우리 엄마는 남에게 친절을 베풀면서 돈을 받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이 말에 큰 깨우침을 얻은 젊은이는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했다.

그동안 공부하면서 학비 마련이 너무 힘들어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했던 젊은이는 그날 우유 한 잔의 배려로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는 새로운 힘을 얻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흘렀다.

성인이 된 소녀는 그만 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 도시의 병원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중병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그래서 큰 도시에서 전문의를 모셔와야만 했다. 그 의사의 이름은 하워드 켈리, 소녀에게 우유 한 잔을 얻어 마신 바로 그 젊은이였다. 켈리 박사는 환자를 보고 단번에 그 소녀임을 눈치챘다. 그리고 모든 정성과 의술을 동원해 그녀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정성이 통했던 것인지 중병임에도 마침내 치료에 성공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여인은 퇴원을 앞두고 치료비 청구서를 받았다. 비용이 엄청나게 나올것이라 걱정하며 청구서 봉투를 뜯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우유 한 잔으로 모두 지불되었음." 이 하워드 켈리는 미국 존스홉킨스병원 설립자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실제로, 보아스의 사랑의 나눔 덕분에 룻을 통하여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았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그 혈통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 예수 그리스도(하나님)께서 계신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우리 교회에서 앞으로 더 많은 사랑의 나눔이 있기를 소망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사랑의 나눔을 풍성하게 해나가는 일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그리스도(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믿고, 우리 교회에 앞으로 더 많은 사랑의 나눔이 있게 해달라는 소망을 담아, 이 찬양을 함께 부르자.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예수님께서 계시도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성령님께서 계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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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7. 17. 01:47

안 되면 되게 하라

(룻기 3: 1-13)


나는 초등학교 때 보이스카웃트(Boy Scout)와 아람단(한국 청소년 연맹, Korea Youth Association) 단원이었다. 보이스카웃트는 미국에서 건너온 청소년 단체이지만, 아람단은 한국 자생 청소년 단체이다(초등학생은 아람단, 중학생은 누리단, 고등학생은 한별단으로 부른다). 4학년때는 보이스카웃트 단원이었지만, 5,6학년 때는 아람단 단원이었다.

 

6학년 때 아람단 행사 중 특전사를 방문한 적이 있다. 김포 쪽에 있는 제 3공수여단이었든데, 그곳에 도착해서 인상 깊었던 구호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안 되면 되게 하라라는 구호였다. 그 문구를 보고 어린 나이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고, 지금까지도 그것이 나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가 않는다.

 

안 되는 일을 어떻게 되게 할 수 있을까? 요즘엔 한국에서 대학교를 가려면, 다음의 네 가지가 필요하다는 말이 떠돈다. 첫째, 할아버지의 경제력, 둘째, 엄마의 정보력, 셋째, 동생의 희생, 넷째, 아빠의 무관심. 이것이 맞아 떨어지면, 한국에서 아이는 원하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고 한다. (아빠의 무관심이 안 되는 일을 되게 하는 요건 중 하나라고 하니, 아내분들은 잘 명심하시라.)

 

인생을 어느 정도 산 지금, 나는 안 되면 되게 하라는 말을 이렇게 이해한다. ‘도전은 아름다운 것이다. 도전하는 데는 전략이 필요하다. 최선을 다한 후에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겸허하게 받아 들이라.’ 우리는 안 된다고 말하기 전에, 무엇이든지 도전해 보는 강인한 정신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많은 문제들이 우리의 삶 가운데 즐비하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은 나오미와 룻이 기업무를 자인 보아스가 자기의 책임을 다하도록 도전하는 이야기이다. 나오미가 엄마라면, 룻은 딸(며느리이긴 하지만)이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성공하려면 엄마의 정보력은 필수다. 그리고 자녀의 노력 또한 필수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보듯이, 룻은 이방 여인이라 베들레헴에서의 삶이 돌아가는 사정에 어두운 반면, ()엄마 나오미의 정보력은 장난이 아니다. 나오미는 그곳의 경제 돌아가는 일과 문화, 인간 관계까지 모두 꿰뚫고 있다. 그리고 룻은 () 엄마가 말씀하는 대로 순종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제 그들은 안 되는 일을 되게 하는 일을 꾸민다.

 

나오미는 룻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1). 무슨 말인가? 룻에게 필요한 안식할 곳은 결혼을 말한다. 그 당시, 여인이 안식할 곳은 결혼하는 일 외에는 딱히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방 여인이고 과부인 룻이 결혼하는 게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위의 표현대로, 그들에게 결혼은 안 되는 일이었다.

 

대단한 정보력을 지닌 나오미는 룻이 어떻게 행동을 취해야 할지 상세하게 알려준다. 무엇보다 작전 개시일은 타작마당이 끝나고 먹고 마시기를 다 한 날이다. , 추수하고 기분 좋은 날을 택한 것이다. 이것은 정말 지혜이다. 사람들은 마음이 넉넉해져 있을 때 어떠한 부탁이든지 들어주는 법이다. 복음서에 나오는 나쁜 일을 저지르는 헤로디아도 헤롯의 기분을 좋게 만든 다음에 세례 요한의 목을 구했을 때, 그 목적을 이룬 것을 본다.

 

요즘은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대인데, 소통의 능력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 일이다. 목적을 이루려면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 게 중요하다. (자녀들은 잘 들으라. 엄마 아빠에게 무조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달라고 조르지 말고, 엄마 아빠의 기분을 좋게 만든 후에 원하는 것을 제시하라. 그러면, 반드시 부모님은 여러분의 말을 들어줄 것이다.)

 

나오미의 계획은 엄청 치밀하다. 보라.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3,4).

 

밀당이라는 말이 있다. 연애할 때, 남자와 여자가 서로 밀고 당겨서 연애를 성공적으로 이끌 때 쓰는 전략을 말한다. 밀당이 여기에 정확하게 적용된다. 나오미는 룻에게 이르기를 타작마당에서 잔치가 벌어지는 동안 보아스에게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 보아스는 당연히 어떤 생각을 갖겠는가? ‘룻이 안보이네. 어디에 있지? 이렇게 좋은 날, 안 보이네.’하면서 궁금증을 유발할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일 때 확실하게 대시하는 것이다.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이게 보통 대담한 작전이 아니다. 잘못하다가는 결혼은 커녕 그마저 어렵게 돌아온 베들레헴에서 쫓겨날 수 있는 상황이다. 보아스가 어떻게 반응할 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언제나 도전에는 위험(Risk)이 따르는 법이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면 안된다. 해가 쬐일 때 풀을 말려야 한다(Make hay while the sunshine). 기회가 왔을 때 확실히 밀어 붙여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거룩한 러브 스토리를 본다. 8절에 보면, 보아스와 룻이라는 말 대신에, ‘한 남자()’한 여인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한 남자와 한 여인의 거룩한 사랑 이야기는 한 밤 중에 누움누움사이에서 발생한다. 너무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다. 누웠던 한 남자는 자기 발치에 누워 있는 한 여인을 발견한다. ‘누구냐?’라는 한 남자의 질문에, 한 여인은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9).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한국소설이 있다. 그 소설에 나오는 한 구절은 표현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한국말 교재에 단골로 등장할 뿐 아니라,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배우는 외국인들에게도 많이 알려져 있다. 이 부분이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 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공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나는 룻의 대답이 이효석 소설에 나오는 표현만큼이나 아름다운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옷자락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나프날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단어는 새끼를 보호하는 독수리의 모습을 묘사할 때( 32:11), 하나님의 보호의 행위를 비유적으로 표현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시편 17:8, 36:7, 57:1, 61:4, 63:7, 91:4) (생명의 삶 Plus, 룻기, 67).

 

그리고 룻기서 2 12절에 보면, 보아스가 룻을 처음 만났을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 보호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보아스의 말을 인용한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라는 룻의 말은 이제 보아스 당신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나를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라는 선언인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인가!

 

치밀한 계획과 과감한 도전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지,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본다. 나오미와 룻에게 불가능해 보이던 결혼이라는 문제가 이들의 치밀한 계획과 과감한 도전 가운데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 우리는 가슴 떨리면서 보게 된다.

 

이제, 나오미와 룻 측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그야말로, 진인사대천명의 시간이 왔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우리의 삶에는 많은 문제들이 놓여 있다. 그 문제들 앞에서 넋 놓고 앉아 있을 수 없다. 나오미와 룻은 자신의 삶의 문제를 앞에 놓아두고, ‘보아스가 기업무를 자이니 그가 알아서 문제를 해결해 주겠지라며 넋 놓고 앉아 있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모험을 감행했다. 그들은 그들의 도전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가 임재할 것을 믿었다. 과감하게 모험을 감행한 룻에게 보아스가 한 첫 번째 말은 이것이다.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우리가 우리 삶에 놓여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도우실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무슨 최선을 다해서 어떠한 일을 감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동일한 음성을 들려 주실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안 되는 일이 되는 역사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일어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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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7. 1. 08:27

기쁨에 놀라다 (Surprised by Joy)

(요한복음 15:1-11)


성경의 어느 구절을 보면, 주일학교 때 불렀던 어린이 찬송가의 한 구절이 생각날 때가 많다. 오늘 말씀은 이 찬송가를 생각나게 한다. <예수님의 생명의>라는 곡이다.

 

1) 예수님은 생명의 참 포도나무 / 아버지는 포도원 농부시니 / 가지들아 열매를 맺지 않으면 / 아낌 없이 찍어서 던지시리라

2) 포도나무 가지는 우리들이니 / 살아 있는 원줄기 주님께 붙어 / 잎도 피고 꽃 피워 열매를 맺자 / 주렁주렁 소담한 포도 송이를

3) 사랑하는 가지야 내 안에 있어 / 무엇이나 원하면 이뤄 주리니 / 씩씩하게 자라고 높이 뻗어서 / 하늘 나라 열매를 많이 맺어라

 

C. S. 루이스라는 분이 있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로 불리는 분이다. 이 분이 지은 책 중에 가장 유명한 책은 얼마 전에 영화로 만들어진 <나니아 연대기>이다. 원래 소설 작가는 아니지만, <반지의 제왕>을 지은 톨킨의 영향으로 기독교 변증을 위한 판타지 소설을 짓기도 했다. (톨킨에게 혹평을 받기도 했다.)

 

요즘 미국의 팀 켈러 목사를 21세기 미국의 C. S. 루이스라고 부르는 매체도 있는데, 내가 보기엔, 별로 어울리는 별명은 아닌 것 같다. C. S. 루이스가 인정할지 잘 모르겠다. 팀 켈러 목사도 훌륭한 목회자인 것은 분명하나, C. S. 루이스에 견줄 만 한가에 대해서는 확신이 안 선다.

 

C. S. 루이스가 쓴 <Surprised by Joy, 예기치 못한 기쁨>이라는 책이 있다. 그 책은 자신이 무신론자에서 기독교인으로 어떻게 회심했는지에 대한 것을 담담하게 기록한 책이다. 그 책에서 그가 기독교를 떠나 헤맨 이유를 기쁨의 상실 때문인 것으로 표현하고 있고, 결국 기쁨을 찾아서 기독교로 되돌아 오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기쁨을 상실한 인생만큼 불행한 인생이 없다. 우리의 인생 여정은 기쁨의 갈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기쁨을 얻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한다. 그리고, 기쁨을 얻을 때 보람을 느끼고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산다. 사실, 우리가 이렇게 예배 드리는 것도 결국에는 기쁨을 얻기 위한 것 아니겠는가! 예배가 우리에게 기쁨이 되기 때문에 예배에 나오는 것이다. 예배가 기쁨이 되지 못하는 이에게 예배는 곤욕스러운 시간일 뿐이다.

 

루이스가 신앙을 잃어버리게 된 계기는 비관적인 삶 때문이었다. 어려서 엄마를 잃고, 아버지의 우울증세가 가족을 괴롭혔고, 기형적 관절병으로 인해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기쁨을 잃었고, 신앙을 저버리게 되었다.

 

기쁨이 없다고, 기쁨을 추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기쁨을 잃어버린 이들은 더 간절하게 기쁨을 갈구한다. 그러다 보니, 그것이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기쁨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올바른 기쁨의 길을 가지 않고, 결국 쾌락의 길로 들어서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린다.

 

쾌락과 기쁨은 다르다. 쾌락은 뭔가 반짝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 같으나, 결국 육체와 정신, 그리고 영혼을 망가뜨린다. 일종의 늪과 같다. 빠지면 헤어 나오기 정말 힘들다. 쾌락은 그것 자체에 몰두하게 하고, 그것 자체가 우상이 되게 한다. 돈의 쾌락에 빠진 이들은 돈이 우상이 된다.

 

그러나, 기쁨은 무엇인가 숭고한 것을 바라 보게 한다. 거기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의미를 깨닫고 기쁨의 원천을 바라 보게 한다. 무엇인가에서 참 기쁨을 발견하는 순간 기쁨은 이렇게 속삭인다. “난 네가 찾는 그것이 아니야. 난 그것을 상기시키는 존재일 뿐이야. , 보라고! 내가 무엇을 상기시키지?”

 

<예기치 못한 기쁨>에 대한 북리뷰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루이스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기쁨을 추적했을 때, 기쁨은 그에게서 벗어나고 허무한 느낌의 흔적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루이스가 기쁨을 향한 집착을 놓으면서 하나님께로 가까이 갔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품에서 루이스가 내려놓았던 삶의 기쁨과 소망과 평안까지도 선물로 주셨다.”(장경철 _ 서울여대 기독교학과 교수) 

 

C. S. 루이스의 대표작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기쁨과 능력과 평화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그것을 가진 존재에게 가까이 가야 하며, 나아가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아무에게나 나눠 주시는 상품 같은 게 아니다. 실재의 중심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능력과 아름다움의 거대한 분수이다. 그 분수에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은 물보라에 젖을 것이고, 다가가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메마른 상태에 머물 것이다. 하나님과 연합한 사람이 어떻게 영원히 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과 분리된 사람이 어떻게 시들어 죽지 않을 수 있겠는가?”

 

C. S. 루이스의 경험과 설명은 오늘 말씀에 대한 주석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왜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어야 하는가? 예수님은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이것을 너희이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인생이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기쁨을 찾아 헤맨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참 기쁨이 있으려면, 참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매우 실존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참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어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말이다.

 

혹시, 삶의 기쁨이 없어 사는 게 재미 없는 분이 있다면, 자신의 인생을 곰곰이 돌아보시라. 지금 내가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단단히 붙어 있는가, 아니면 살짝 붙어 있는가, 아니면 거기서 떨어져 나와 있는가. 기쁨은 우리가 생산해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오늘 말씀에서처럼, 그리고 C. S. 루이스의 고백처럼 기쁨은 참포도나무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기쁨 자체에 집착하거나, 기쁨을 찾아 헤매는 것 자체가 참으로 허망한 일이다. 기쁨은 신기루이고, 기쁨은 우리의 능력 바깥에 있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쁨을 향한 욕심을 내려 놓고, 기쁨의 원천이시고, 기쁨의 수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참포도나무이신 그분과의 깊은 사귐 가운데 거하면, 그분의 기쁨이 우리에게 수여 되어, 어느덧 우리 안에 기쁨이 충만하게 되어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기쁨 충만한 삶 사시는 믿음의 자녀가 되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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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6. 25. 04:38

소통의 능력

(여호수아 22:10-34)

 

대개 인간관계가 깨지는 가장 큰 원인은 소통의 부재 때문이다. “인간관계는 육체적, 정신적, 영적, 집약 노동이다.” 인간관계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간다. 그래서 일 중에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가장 힘들다.

 

얼마 전 미국 남침례회 국제선교이사회에서 선교사가 선교지를 떠나는 이유에 대하여 분석한 적이 있다. 그곳의 고위 보좌관 폴 아킨은 보고서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선교사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가장 큰 이유는 재정 부족, 질병, 테러, 향수병이 아니다. 심지어는 결실이나 복음에 대한 반응이 없어서도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가장 큰 이유는 다른 선교사들과의 갈등 때문이다.”


사람들은 보통 재정과 질병과 테러에 대비를 잘 한다. 향수병을 극복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준비를 한다. 하는 일에 대하여 결실을 맺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런데, 정작 그런 것들을 하느라 소통의 능력에 대해서는 소홀히 한다. 결국 소홀하게 준비한 곳에서 일이 터지고 만다. 

 

오늘 본문에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보고 되고 있다. 가나안(요단 서편)에 대한 땅 분배 후, 이제 정복 전쟁을 마친 요단 동편의 세 지파 반(르우벤, , 므낫세 반)은 여호수아의 축복을 받으며 자기들의 거처(요단 동편)로 돌아가면서 요단 강 가에 제단을 쌓는다. 그들이 쌓은 제단은 제법 컸기 때문에 멀리서도 사람들이 금방 알아보았고, 그들이 쌓은 제단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요단 서편의 지파들 사이에 퍼졌다.

 

그런데, 문제는 요단 서편의 지파들은 요단 동편의 지파들이 쌓은 제단에 대하여 오해했다는 데 있다. 그들은 그 제단이 우상숭배를 위한 제단이라고 오해했다. 그래서 요단 서편의 지파들은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며 비느하스를 대표로 한 진상조사단을 꾸려 요단 동편 지파들에게 파견한다.

 

요단 동편 지파들이 쌓은 제단에 대하여 요단 서편의 지파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그들이 겪는 두 가지의 일 때문이었다. 하나는 바알 브올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아간 사건이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숭배의 죄를 저지른 그 두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은 적지 않는 타격을 입은 경험이 있다. 바알 브올 사건 때문에 수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고, 아간 사건 때문에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쓰라린 패배를 맛보아야 만 했다. 그들은 그러한 끔찍한 경험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고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적인 민감성은 우리도 충분히 숙지하고 배워야 할 점이다. 죄의 무서움을 모르는 자는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죄는 단순히 못된 짓이 아니라 생명을 파괴하는 우상숭배이다. 우상숭배는 단순히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다른 것을 섬기는 게 아니라, 온 천하보다 귀하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을 헤치는 일이다. 아무리 작은 생명이라도 그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자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이다.

 

비느하스를 대표로 하는 진상조사단은 요단 동편 지파들에게 이르러 그들이 거기에 제단을 쌓은 이유에 대하여 조사를 시작한다. 그들은 바알 브올 사건과 아간 사건을 언급하며 하나님이 정하신 제단 이외의 제단을 쌓아 제사를 드리는 것은 명백한 우상숭배라는 것을 확인시면서, “만일 요단 동편의 소유지가 이방 종교의 영향을 받는 곳이라면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요단 동편 땅으로 건너와서 소유지를 나누어 가지고 함께 살자고 제안한다.

 

이에 대해 요단 동편의 지파들은 요단 서편 지파들이 가지고 있는 오해를 풀기 위하여 자신들이 그렇게 제단을 쌓은 정당한 이유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가 결코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다음의 말로 시작한다.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 , 엘로힘, 여호와! 그리고 자신들이 제단을 쌓음으로 우상숭배 한 것이라면,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지 마시고, 천벌을 내리시라고 말한다. 그만큼 자신들의 행위에는 아무런 우상숭배의 의도가 없다는 것을 천명하는 것이다.

 

그러면, 요단 동편 지파들은 왜 요단 강 가에 제단을 쌓은 것인가? 그것은 번제를 위함이 아니요, 다른 제사를 위함도 아니요, 오직, “요단 서편의 후손들로 하여금 요단 동편 사람들을 하나님의 약속과 무관한 자들로 업신여기거나 무시하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만든 일종의 증거물이라고 말한다. 요단 동편 지파들이 그 제단을 통해 확인 받고 싶어하는 것은 요단 서편 사람들(가나안땅에 들어간 사람들)이나 요단 동편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 안에서 한 식구요 공동체라는 것이었다.

 

인간관계를 헤치는 가장 나쁜 요소는 분리(separation)’배척(exclusion)’이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악마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사람이 사람을 분리하고 배척할 때이다. 분리와 배척이 일어 나면, 상대방은 더 이상 자신과 같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짐승 대하듯 상대방에 대한 존엄성을 상실한다. 사람은 사람에게 결코 못된 짓을 못한다. 양심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방이 더 이상 존엄성을 갖춘 나와 같은 인간이 아니게 될 때, 사람은 사람에게 못된 짓을 서슴지 않고 저지른다.

 

범죄는 무엇보다도 인간성의 상실이고 존엄성의 상실이다. 그 현장에 생명도 없고 인간도 없다. 그저 흉악한 죄만 있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구원은 단순히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는 차원의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은 무엇보다 상실된 인간성, 상실된 생명의 되찾음이다. 인간성과 생명이 상실되어 있는데, 그 상태로 천국으로 이동해 보았자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그곳에서도 상실된 인간성과 생명 때문에 분리와 배척이 일어나게 될 텐데! 구원은 존재의 변화이지 장소의 이동이 아니다. 

 

구원은 더 이상의 인간성 상실이나 존엄성 상실, 즉 생명의 상실이 없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자는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의 인간성이나 존엄성, 즉 생명을 상실하지 않고, 다른 이(이웃, 타자)의 인간성이나 존엄성, 즉 생명을 헤치지 않는다. 구원 받은 자는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고, 다른 이의 생명을 사랑한다.

 

소통은 단순히 서로의 말을 교환하는 행위가 아니다. 소통은 서로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이다. 소통은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서로 기뻐하고 잘 지내는 것이다.

 

요단 동편 지파들의 해명을 들은 요단 서편 지파들은 그들의 해명을 이해하고 기뻐했다. 요단 동편 지파들의 해명대로 그것은 그들의 생명을 헤치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 안에서 서로 한 형제 자매임을 확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러한 오해가 발생하기 전에 요단 동편 지파들이 요단 서편의 지파들과 좀 더 적극적으로 소통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한 우려를 여호수아나 비느하스, 즉 지도자들에게 적극 알리고, 그것에 대한 대책을 함께 강구해 나갔다면, 이렇게 불필요한 오해와 일촉즉발의 상황은 아예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상대방이 자기의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잘 모르는 법이다. 한 번 오해가 생기면 그것을 푸는 일은 괴롭고 힘들다. 그러므로, 오해를 만들지 않도록 자기가 가진 생각을 상대방에게 적극적으로 그리고 지혜롭게 알리는 일은 관계를 부드럽게 풍성하게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삶의 능력 중 하나이다. 소통의 능력을 키워 인간관계가 가져다 주는 풍요로움을 더욱더 누리고 살아가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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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6. 24. 08:21

위로의 힘

(룻기 2:1-13)

룻기 3

 

1.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않아도 좋다.

가슴이 아프면 아픈채로,

바람이 불면 고개를 높이 쳐들어서 날리는 아득한 미소.

어디엔가 있을 나의 반쪽을 위해 헤매이던 숱한 방황의 날들.

태어나면서 이미 누군가가 정해져있다면,

이제는 그를 만나고싶다. – 서정윤

 

2.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 도종환

 

3. 오늘 말씀을 읽으며 이런 시들이 생각났다. 청소년, 청년 시절, 이러한 시들을 접했을 때, 그 시들은 흔들리는 영혼에 많은 위로가 되었다. 나는 지금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하루에 3편 이상의 시를 읽는다. 그것이 내가 정해 놓은 하루의 목표 중 하나이다. 대학교 다닐 때, 엄마에게 하루에 5천원씩 용돈을 받아서 다녔는데, 하루에 1천원씩 아껴서 한 권에 5천원이던 시집을 일주일에 한 권씩 사서 읽었다 (지금은 시집 1권도 8천원에서 1만원 한다).

 

4. 스무 살 때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으며 책에서 눈을 못 떼던 시절도 생각난다. 베르테르의 눈을 통해서 그려지는 여인 로테의 모습은 꿈에서나 볼 수 있는 천사의 모습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롯데그룹의 신격호 회장도 젊은 시절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으며 나와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그는 그 소설을 읽은 뒤, 자신이 창업하려는 회사의 이름을 롯데로 정할 정도였다.

 

5. 심리학에서 베르테르 효과라는 것이 있다. 유명인이 죽으면 따라 죽는 사회적 문제를 지칭하는 말이다. 괴테 당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소설이 발표된 직후, 베르테르처럼 이루지 못한 사랑을 비관하여 자살하는 젊은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이후, 그러한 사회적 현상을 베르테르 효과라고 부른다.

 

6. 오늘 말씀을 읽으며 미소 짓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인생을 반드시 돌아보아야 하는, 세상과 소통 못하고 사는 사람이다. 소통이 잘 안 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소통이 잘 안 되는 사람은 계절의 변화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한다. 소통을 잘 하는 사람은 계절이 바뀌면, 꽃을 보면서 ~ 이쁘다!’고 감탄사를 날릴 줄 안다. 그러나, 소통을 못하는 사람은 계절을 두 가지로 구분하고 만다. ‘덥다, 춥다’. 더 심한 사람은 더워 죽것다. 추워 죽것다.’ 모든 말에 죽것다를 붙인다. 그리고, 둘째, 소통이 잘 안 되는 사람은 유머가 없어진다. 이런 것이 잘 안 되는 사람은 자신이 지금 인생을 잘 살고 있는지, 자신의 인생을 진지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7. 룻과 보아스의 운명적인 만남을 보라. 너무 가슴 설레지 않는가. 오늘 말씀은 나오미가 남편도 잃고 아들도 모두 잃었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1). 사람은 힘들어서 죽지 않는다. 외로워서 죽는다.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사람을 외롭게 하는 것이다.

 

8. 얼마 전, 인터넷 신문에서 가슴 아픈 사진과 기사를 봤다. 태국 방콕에서 일어난 일인데, 주인이 자신을 버리고 이사간 줄도 모르고 한 달 째 빈집 대문 앞에서 대문을 굳게 지키고 있는 개의 사진과 기사였다. 얼마나 충직한지, 차가 자기 앞에 다가와도 비키지 않고, 누군가 집 앞을 서성이면 매섭게 짖어 댔다고 한다.

 

9. 누군가를 외롭게 두지 말라. 사람은 힘들어서 죽지 않는다. 외로워서 죽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외롭게 두지 않으신다. 오죽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이겠는가. ‘임마누엘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가끔 우리를 힘들게 하긴 하시지만, 우리를 결코 외롭게 두지는 않으신다.

 

10. 외로움은 좋지 못하다. 창세기에도 보면, 하나님이 아담에게 돕는 배필인 하와를 지어주시게 된 이유가 이렇게 나온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2:18). 사람에게 가장 안 좋은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외로움이다. 요즘 현대 사회의 가장 큰 사회적 문제 중 하나가 무엇인가? 고독사이다. 이것은 사회적 죽음이고, 사회적 살인이다.

 

11.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뜻을 지나고 있다. 특별히 우리처럼 이민사회에서 교회 공동체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나오미와 룻에게 희망이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혼자가 아니라,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 보아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유력한 자가 되어주어야 한다.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오늘 말씀에는 룻과 보아스가 서로에게 호감을 갖게 되는 일화들이 소개된다.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 얼마 떨어진 밭으로 시찰을 나온다. 그런데, 보아스는 일하는 일꾼들에게 잔소리부터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복을 빌어주는 일부터 한다. 보아스는 일꾼들에게 이렇게 복을 빈다.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아도나이 임마켐)” 이에 반응하여, 일꾼들은 보아스에게 이렇게 복을 빈다.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예바레케카 아도나이).

 

13. 그리고 나서, 보아스가 밭에 도착한 후 사환에게 던진 첫 번째 질문은 밭에서 이삭을 줍고 있던 룻에 대한 것이었다. “이는 누구의 소녀냐?” 이것은 이는 누구에게 속한 상태냐라고 묻는 것이다. 결혼했냐 안 했냐는 뜻이다. 이것은 보아스의 룻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다. 관심 없는 사람에게는 이런 질문을 안 한다. 결혼했든 말든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심이 있으면, 결혼 여부가 먼저 궁금한 법이다.

 

14. 그런데, 보아스의 질문에 대한 사환의 대답이 굉장히 호의적이다. 우선 룻의 신상을 말한다. ‘그녀는 모압 소녀입니다.’ 그리고 룻의 성품에 대한 인상을 소개한다.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7). 한마디로, 룻의 성실함에 대한 서술이다.

 

15. 룻과 보아스와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된다. 룻은 보아스의 따스함을 보았고, 보아스의 룻의 성실함을 보았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배려가 시작된다. 보아스는 룻에게 이렇게 배려한다.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한다.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녀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보아스의 호의에 룻은 목이 메어 이렇게 화답한다.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든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10).

 

16. 요즘 사회기사면에 심심치 않게 신고려장에 대한 기사가 뜬다. 얼마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슬하에 2 3녀를 둔 80대 여성 김모 씨는 사회적ㆍ경제적으로 완전히 고립됐다. 막내아들을 따라 필리핀에 갔지만 곧 홀로 남겨졌다. 사업이 부진해 생활고에 시달리던 아들은 다른 형제들에게어머니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쳐 장례비용을 받아냈다. 정신적 충격을 받은 김씨는 뇌출혈로 쓰러졌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치매 증상까지 나타났다. 아들은 쇠약해진 노부모를 필리핀의 한 모텔에 유기하고 도망갔다.”

 

17. 보아스가 룻을 쫓아낸다고 한들 뭐라고 할 상황이 아니다. 이방 여인이라고 무시하고, 자기 밭에서 쫓아내고, 물도 자기가 길어다 먹게 하고, 등 보아스가 룻을 학대할 수 있는 건수는 얼마든지 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얼마든지 이렇게 갑질 할 수 있다. 그런데, 보아스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보아스가 룻에게 갑질을 하지 않고, 호의를 베푼 결정적인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18. “남편이 죽은 후 당신이 시어머니에게 한 일에 대해 모두 들었소. 당신의 부모와 고향을 떠나 알지도 못하는 민족과 함께 살려고 온 것 말이오. 여호와께서 당신의 행실에 대해 갚아 주실 것이오. 당신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날개 아래 보호받으러 왔으니 그분께서 당신에게 넉넉히 갚아 주실 것이오.”(11, 12).

 

19. 보아스는 무엇보다 신앙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룻의 인생에 벌어진 일을 세상의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즉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보아스는 룻에게 하나님으로부터의 보답과 온전한 상이 있기를 바랐다. ‘온전한 상에서 상은 품삯과 같은 의미다. , 행위에 상응하는 대가라는 뜻이다.(생명의 삶 플러스, 룻기, 48)

 

20. 룻이 한 행동은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 보호 받으러 온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룻은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 숨기 위해, 안식처를 찾기 위해 왔다. 룻은 모압 땅에서 다른 남편을 만나 위로 받으려 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날개 아래에서 안식처를 찾고자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온 것이다.

 

21. 사람은 힘들어서 죽지 않는다. 사람은 위로를 받지 못하면 죽는다. 시편이 계속해서 고백하는 것은 이것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시편 119:50). 위로란, 살아갈 힘을 다시 얻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는가? 나오미와 룻이 모든 것을 잃고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 인생의 기쁨을 되찾은 이유는 보아스를 통한 하나님의 위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위로는 사람을 살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21. 험한 세상, 우리는 하나님께서 서로가 서로를 보듬어 주라고, 서로에게 주신 돕는 배필이다. 사람은 힘들어서 죽지 않는다. 외로워서 죽는다. 사람은 힘들어서 죽지 않는다. 위로를 받지 못해서 죽는다. 남자는 여자가 웃어줄 때 위로를 받는다. 여자는 남자가 자신의 소소한 말(잔소리로 들리는 말)에 귀 기울여 줄 때 위로를 받는다. 남자는 예쁜 여자를 좋아하지 않고, 웃어주는 여자를 좋아한다. 여자는 성공한 남자를 좋아하지 않고, 소소한 말에 귀 기울여 주는 남자를 좋아한다. 주님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주자. 당신의 위로가 생명을 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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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6. 15. 15:18

부활의 신비

(요한복음 11:17-27)


미국은 (종교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기 때문에 이단이라는 개념이 별로 없다. 한국교회의 교단에서는 이단대책연구소같은 것이 있지만, 미국의 기독교 교단에는 그런 것이 없다. ‘자유라는 것이 참으로 좋은 것이고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데 가장 필수적인 요소 중의 하나이긴 한데, 한 사람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자유와 충돌을 낳으면 해결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현재 우리가 흔히 이단이라고 부르는 교단은 대부분 미국에서 생겨났다. 그 중에서도 몰몬교,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 등이 유명하다. 특별히, 여호와의 증인 같은 경우는 그 규모가 크고 조직적이다. 이들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성경을 자신들의 경전으로 받든다. 그런데, 왜 이들은 이단이라고 불릴까?

 

기독교 전통은 삼위일체 신학을 발전시켰다. 기독교는 예수를 성자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예수는 하나님과 동일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기독교 교리의 기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begotten son)로 부른다. 그리고, 양태론을 믿는다. , 예수는 완전 하나님이시고, 완전 인간이라는 뜻이다(vere homo, vere deus).

 

이단은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을 다르게 말하는 데서 시작된다. 여호와의 증인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 같으나, 그 뜻이 다르다.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첫 피조물로 본다. 그리고, 첫 피조물인 예수를 십자가에서 희생시켜서 구원을 이루었다고 본다. 그들은 하나님과 예수(성자)를 동일본질로 보지 않는다. 그 사이에 구별이 존재한다. 그리고 성경을 매우 문자적으로 해석한다. 그것을 근본주의자라고 부른다. 그래서 그들은 병역도 거부하고, 헌혈도 거부한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단논쟁은 끊이질 않았고, 끝나지 않았다. 사실, 문자로 기록된 성경이 생겨나게 된 계기도 이단논쟁 때문이다. 예수에 대하여 다르게 전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대표적인 그룹이 영지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의 인성을 부정했다. 예수가 이 땅에 임한 것은 가짜 육신을 입은 것이라 주장했다. 그것을 가현설이라고 한다. 그것과의 논쟁의 결과가 요한복음이다. 요한복음은 그래서 예수의 부활을 매우 육신적으로 그린다. 요한복음의 예수님은 도마에게 손가락을 넣어 보라고 한다든지( 20:27),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 제자들이 잡은 생선을 함께 잡수시기도 한다( 21:12).

 

오늘 말씀은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가장 중요하고 궁극적인 복음을 전하고 있다. 스토리의 배경은 베다니의 삼남매,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그의 오라비 나사로의 가족사이다.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곳, 베다니에 살던 삼남매에게 어려운 일이 닥쳤다. 가장인 오라비 나사로가 죽은 것이다. 부모님 이야기가 안 나오는 것을 보면, 부모는 일찍 세상을 떠난 것 같고, 남자인 나사로가 가장으로서 이 가정을 꾸려 나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 나사로가 죽는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이 와서 죽어가는 나사로를 치유해 주시길 원했다. 그런데, 그들의 소망과는 달리 예수님은 늦게 도착했고, 그 사이 나사로는 죽어서 무덤에 누인지 사흘(3)이나 지났다. 이젠 아무런 소망도 없다. 죽음을 그냥 받아들이고, 오라비 나사로가 없는 삶을 계획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이렇게 소망도 없고, 죽음과 불안, 공포만이 맴도는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22절에 흥미로운 진술이 등장한다. 마르다가 한 말이다.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I know that even now God will give you whatever you ask).” 이것은 나사로를 살려주세요!’라는 의미보다는 이제 나사로가 죽었으니, 그에 대한 대책을 세워주세요!’라는 의미로 보인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마르다가 가장 바랄 만한 것을 말씀하신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23). 그런데, 마르다는 그 말에 대하여 이렇게 대꾸한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지금 당장 살아나지는 못할지라도, 마지막 날에 모든 이들이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는 뜻이다.

 

마르다의 (부족한) 고백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것은 단순히 마르다에게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마르다와 같이 죽음을 맛볼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던지는 보편적인 질문이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는가?

 

이것은 굉장히, 아니 가장 중요한 진술이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부활과 생명으로 소개하고 있다. 영어로,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라고 표현한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부활하게 될 사람들 중의 한 명이거나, 생명을 부여 받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부활이고 생명이라고 선포한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가 믿는 복음이다.

 

예수님이 곧 부활이고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있는 곳에 곧 부활과 생명이 있다. 예수님이 곧 부활이고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는 곧 부활과 생명을 얻는다.

 

부활은 무엇인가?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완성을 말한다. 부활과 생명은 같은 것이다.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부활과 생명이다. 다른 말로, 부활과 생명이 우리 인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이 곧 부활과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희망인 이유는 그분을 통해서 우리는 생명의 완성을 알고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생명을 완성하고 성취할 수 없다. 하나님 외에, 생명을 완성하고 성취할 수 있다고 꼬드기는 모든 것을 우상이라고 부른다. 생명을 완성하고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것을 바라보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생명을 완성하고 성취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사랑이다. 생명을 완성하고 성취해 나가는 자에게는 사랑이 풍성해진다. 생명이 풍성해진다. 생명을 향한 사랑이 풍성해진다. 생명의 완성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과 합일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생명의 완성과 성취는 사랑의 완성과 성취와 동의어이다.

 

그러나, 세상을 보라. 우리가 목격하는 사랑과 생명의 풍성함은 매우 적고,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죄악이 충만하다. 몇 일 전(6 12) 한국에서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했다. 경남 양산에서 줄에 매달려 아파트 청소 작업을 하고 있던 인부가 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추락사를 했다. 사건을 조사해 보니, 청소하며 틀어 놓았던 음악소리가 시끄럽다는 이유로 아파트 주민 한 명이 옥상에 올라가서 청소부의 생명줄인 밧줄을 칼로 끊는 바람에 청소부는 곧바로 추락해 죽었다. 안타까운 것은 죽은 청소부가 다섯 남매를 둔 가장이었다는 것이다. 이제 그 가정은 어떻게 살아가나?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이해와 사랑은 온 데 간 데 없고, 악만 남은 것 같다. 왜 그럴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줄 재물이나 그들의 삶을 빛나게 해줄 명예가 아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들이 생명의 완성이고 성취인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면, 그래서 그들 안에 생명과 사랑이 풍성했다면, 죽음의 죄악이 그곳에 있었겠는가.

 

지난 주 토요일에 있었던 결혼예배 때도 잠깐 언급했지만, 팀 켈러 목사는 <탕부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하나님을 탕부라고 말한다. ‘Prodigal’이라는 말은 ‘제멋대로 군다라는 뜻이 아니라, ‘무모할 정도로 씀씀이가 헤프다라는 뜻이다. 하나도 남김없이 다 쓴다는 의미이다(탕부 하나님, 20). 누가복음 15장에서 아버지는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랑을 무모할 정도로 씀씀이가 헤프게’, ‘하나도 남김없이 다 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기의 생명도 아끼지 않으실 만큼 사랑을 아끼지 않으시고 다 내어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생명의 완성을 향하여 생명을 성취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생명의 풍성함, 곧 사랑이 넘친다. 다른 것은 다 말릴 수 있어도, 사랑은 못 말린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신비를 바로 지금, 우리의 몸에, 우리의 삶에 지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산다. 그 심장은 사랑의 심장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완성하고 성취하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소망한다. 생명의 풍성함, 사랑의 풍성함을 이기지 못하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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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6. 12. 16:37

모른 척 돌아서지 말라

룻기 2

(룻기 1:15-22)


J. Crew가 경영난에 빠졌다는 기사를 읽었다. 기사의 헤드라인은 "속도·가격이 더 중요해졌는데 제품·디자인 고집하다 뒤처져"라고 써 있었다. 이 기사가 안타까운 것은 J. Crew를 경영난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 다름 아닌 미국 패션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밀러드 드렉슬러이기 때문이다.

 

드렉슬러는 미국 패션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이유는 그의 손을 거친 패션 브랜드는 모두 성공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즐겨 이용하는 패션 브랜드 모두가 그의 경영을 통해서 대중적 인지도를 높였다. (GAP), 올드네이비(Old Navy), 바나나 리퍼블릭(Banana Republic), 메이드웰(Made Well) 등이 그의 통해 성공을 이룬 브랜드이다.

 

《혁신기업의 딜레마》라는 책을 써서 유명해진 클레이튼 크리스텐슨(Clayton M. Christensen) 하버드 경영대학원 석좌교수는현재 고객의 요구를 충족하는 데만 초점을 맞추는 현직 CEO는 새로운 변화의 도래를 감지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은 J. Crew의 경영자 밀러드 드렉슬러가 현재 고객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만 머물다가 새로운 변화의 도래를 감지하지 못해 실패했다는 뜻이다.

 

나오미에게는 당면한 문제가 있었다. 자기 자신도 먹고 살아야 하고, 두 며느리의 살 길도 열어주어야 했다. 그런데, 그 당시 여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나오미는 자신의 현실을 돌아보며 결단을 내린다. 자신은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고, 며느리들에게는 그들의 백성과 그들의 신들에게로돌아가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었다.

 

시어머니 나오미의 결정에 대하여 두 며느리는 각각 다른 반응을 보인다. 물론 처음에는 오르바나 룻이나 어머니를 따라 나서겠다고 말하지만, 결국 오르바는 자기의 백성(모압)과 신들에게로 돌아가고, 룻만이 끝까지 시어머니를 따라 나선다. 룻의 결심은 16절과 17절 두 절에 걸쳐 장엄하게 표현된다.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보잘것없는 이방여인, 과부 룻의 신앙고백이다. 이 고백이 없었다면, 룻은 오르바처럼 어쩌면 이름만 거론될 뿐, 아니, 이름조차도 거론되지 못하고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에 당당하게 그의 이름이 거론되고, 그의 고백이 기록된 이유는 바로 이 신앙고백 때문이다. 나는 이 고백이 바로, 현재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닌, 새로운 변화의 도래를 감지한 룻의 뛰어난(남다른) 영성이라고 생각한다.

 

룻이 처한 현재 상황에서 누가 보아도 타당한 결정은 무엇이겠는가? 그도 오르바처럼 자기 살 길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남편을 잃고, 아무도 자기를 책임져 줄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그도 오르바처럼 자기 백성과 자기 신들에게 돌아가 나머지 인생을 보람 있게 보내려는 살 길을 찾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그런데, 룻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나섰다. 우리가 위에서 함께 읽은 신앙고백과 함께. 룻의 결정은 이러한 싯구를 생각나게 한다.

 

모른 척 돌아서 가면

가시밭 길 걷지 않아도 되었으련만

당신은 어찌하여

푸른 목숨 잘라내는

그 길을 택하셨습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모른 척 돌아가지 않고자신의 현실을 맞닥뜨리는 또 다른 인물을 만난다. 바로 나오미이다. 나오미는 룻과 함께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들이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온 동네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온 나오미를 보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이가 나오미냐!”

 

고향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 나오미를 거론하며 수군거리는 것을 듣고, 나오미는 고향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였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20, 21).

 

나오미의 뜻은 기쁨이다. 그런데, 그의 인생은 그의 이름처럼 기쁨이 없었다. 이제 그의 인생은 그야말로 마라가 되었다. ‘마라, 괴로움이라는 뜻이다. 약간 희극적인 표현을 섞자면, 나오미는 인생의 쓴 맛을 본 것이다.

 

그러나, 나오미는 인생의 쓴 맛을 보았으면서도 위와 같은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나오미를 남다른 인생으로 만들어준 위대한 고백이다. 나오미는 모른 척, 하나님을 부정할 수도 있었다. 사람들이 수군거릴 때 남의 말 삼일 가는 법이니까, 못들은 척, 그런 일 없었던 척 지나갈 수도 있었다. 또는 화를 내며 하나님을 오히려 욕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직시하고, ‘인생의 쓴 맛을 보게 하신 하나님을 고백한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예전에 켄 블렌차드가 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책이 유행한 적이 있다. 이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올랜도 씨월드에 가서 본 샤무쇼(Killer Whale Show)’이다. 그는 그 포악하고 육중한 범고래가 수준 높은 재주를 부리는 이유는 사육사의 칭찬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한다며, 칭찬이 사람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책이며 통찰력이었지만, 지금은 칭찬이 한 사람이 인생을 변화시킨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게다가 샤무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환경단체들의 노력 덕분에 범고래는 다시 자신들의 고향인 바다로 되돌아 갔다. 칭찬이라는 빌미로 범고래의 인생이 망가지는 일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

 

얼마 전 한국의 EBS에서 '학교란 무엇인가-칭찬의 역효과'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다. 거기에 보면, 칭찬이 아이들에게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서 증명하고 있다. 어린 학생들의 기억력을 평가하는 실험에서 '잘한다, 똑똑하다'라는 칭찬을 들은 아이들은 감독자가 밖으로 나가자 부정행위를 했지만, '노력했구나,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는구나'와 같은 말을 들은 아이들은 커닝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방송에서 소개한 현명한 칭찬 방법은 결과보다 과정을 칭찬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결과에 대한 칭찬은 '다음에도 잘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이어지고 아이들 자신을 스스로 평가의 잣대에 갇히게 한다는 것이었다. 일례로, '예쁘다'라는 칭찬은 외모 관리에 대한 압박으로 느껴져 그 안에 갇히게 된다는 것이다.

 

스탠퍼드대학교 심리학과 캐럴 드웩 교수는 "(칭찬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차라리 열심히 하지 않고 좋지 않은 결과를 받은 다음 사람들로부터 '쟤는 정말 천재인데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런 거지. 열심히 하면 잘할 거야'라는 평가를 받으려 한다"고 지적한다. '칭찬의 역효과'에 대해 연구해온 교육심리학자 알피 콘(Alfie Kohn) 박사 역시 '칭찬은 아이를 변화시킬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아이를 올바르게 성장하게 하기 위해서는 '칭찬 스티커' 따위의 외재적 동기가 아닌 스스로 즐길 수 있게 만드는 내재적 동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신앙에 대하여서도 한 번 적용하여 생각해 보자. “쟤는 원래 신앙이 좋은데, 열심히 안 해서 그래?” 이게 말이 되는가? 원래 공부를 잘하는 데 열심히 안 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공부를 못하는 것이다. 원래 신앙이 좋은 데 열심히 안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신앙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기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위에서 지적하듯이, 외적인 동기가 아니라 내적인 동기이다.

 

우리는 이것을 나오미에게서 배운다. 나오미는 자기를 기만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의 삶을 정확하게 직시했다. 자신의 상황을 모른 척 돌아서지 않았다. 인생을 바꾸기 위한 가장 중요한 첫걸음은 현실부정이 아니라, 현실직시이다. 현실직시 없이는 삶을 변화시키는 가장 근본적인 원동력인 내적 동기는 절대 생기기 않는다.

 

그러면서 나는 신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본다. 신앙이란 누군가 신랄하게 비판했던 현실을 회피하게 만드는 아편이 아니다. 진짜 신앙은 현실을 회피하게 만들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요즘은 다른 능력보다 인간력을 중요시 한다. ‘인간력이란 사람과 사귈 수 있는 능력이다.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사람과 사귀는 것이다. 회사생활을 하면서, 일이 힘든가? 아니다.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 때문에 힘들다. 교회생활에서 무엇이 힘든가? 내가 목회를 하면서 듣는 가장 많은 토로는 교회에서 사람들과 사귀는 것이 힘들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사람과 사귀는 게 어려운가? 아니면 하나님과 사귀는 게 어려운가? 사람과 사귀는 능력을 인간력이라 한다면, 하나님과 사귀는 능력은 영력이라고 한다. ‘인간력영력, 어떤 게 더 어려운가? 많은 분들이 사람과 사귀는 게 더 어렵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실은 하나님과 사귀는 일이 더 어렵다. 훨씬.

 

나오미를 보라. 비통한 고백을 하고 있다. 하나님이 자기를 쳤다고 한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이라고 고백한다. 인생의 쓴 맛을 다른 누구 때문에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생의 쓴 맛을 보게 하셨다고 고백한다. 이런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것이 쉬운가? 어떠한 사람이 자신에게 인생의 쓴 맛을 보게 했다면, 우리는 십중팔구 그 사람과 원수가 된다. 그런데, 나오미는 인생의 쓴 맛을 안겨준 하나님을 원수삼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희망으로 생각한다. 그가 왜 베들레헴에 돌아왔는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가장 사귀기 어려운 존재는 영적 존재인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어려운 것을 해내는 사람은 그보다 쉬운 것을 문제 없이 잘 해내는 법이다. 하나님은 현실을 회피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게, 현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이끄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현재의 당면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거기에 갇혀 있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미래를 여시는 분이다.

 

가장 어려운 사귐의 대상인 하나님을 붙든 나오미와 룻, 별다른 능력이 없었지만, 다른 어떠한 능력보다 영력(하나님과 사귀는 능력)’에서 남다른 능력을 보였던 나오미와 룻에게 열리는 미래를 보라.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그들의 미래의 서막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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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