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7. 4. 11. 13:46

우리는 어느 행렬에 참여하고 있는가?

(마가복음 11:1-11)

종려주일

 

옛날에는 산불이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요즘 한국 초등학교 미술 시간에는 그러한 그림을 그리는 프로그램이 없겠지만,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미술 시간에 단골로 등장하는 그림(포스터)의 주제가 두 개 있었다. 불조심과 공산당 조심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왜 그 당시 불조심과 공산당 조심에 대한 경각심을 초등학교 학생들에게까지 미술을 통해 교육시켰는지, 그 배경을 너무도 잘 안다. 한국에서 내가 살던 동네에는 우면산이 있었다. 그런데, 심심치 않게 산에 불이 났다. 사람들의 부주의(특별히 담배꽁초)로 인해 불이 나기도 하고, 아이들의 호기심에 불이 나기도 했다. 옛날에는 놀게 별로 없어서 불 장난을 많이 하고 놀았다. 그리고 특별히 겨울이 되면 하늘에서 눈도 내렸지만, 북풍을 타고 내려온 삐라도 하늘에서 엄청 내렸다. 한 겨울, 논두렁 밭두렁에 나가면 눈만 쌓여 있는 게 아니라, 삐라도 여기 저기 많이 흩어져 있어서 그것을 주워 파출소에 가져다 주면 학용품을 주곤 했다.

 

이처럼 어떠한 행동이나 주장에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배경이 존재하는 법이다. 불조심을 강조한 이유는 산불이 많이 났기 때문이고, 공산당 조심을 강조한 이유는 남북으로 갈린 국가의 아픈 역사 때문이다. 그런데, 그림(포스터)에는 그러한 배경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당시를 살던 사람들은 그 (그림)포스터를 보면 그 뒤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모두 알고, 그 그림(포스터)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안다.

 

우리는 고난주간을 맞아 마가복음의 이야기를 들여다 보는데, 마가복음의 이야기가 이렇게 쓰여진 데에는 그 당시의 역사적 배경이 있다. 마가복음의 역사적 배경은 로마제국시대이다.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마가복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 마가복음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그리스도(메시아, 구세주)’로 소개하고 있다.

 

이 진술을 듣는 우리는 아멘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그 당시 마가복음의 이 첫 진술을 들은 로마제국시대의 독자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이미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그리스도, 메시아, 구세주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로마제국의 황제였다. 그 당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여겨졌던 사람은 로마의 황제지 예수가 아니었다. 게다가, 예수는 로마제국의 반역자로서 그들의 형벌인 십자가 형에 처해져 죽임을 당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이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라니, 마가복음의 주장을 들은 로마제국시대의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마가복음은 복음서 중 유일하게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시작으로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이 기록되고 있는데, 마가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은 이러한 순서를 지닌다.

 

* 일요일: “그들이 예루살렘 가까이에, 곧 올리브 산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11 1) – 예루살렘 입성 사건

* 월요일: “이튿날” (11 12) – 성전 정화 사건

* 화요일: “이른 아름에” (11 20) –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의 논쟁 사건

* 수요일: “유월절과 무교절 이틀 전이었다.” (14 1) –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가룟 유다의 모의

* 목요일: “무교절 첫째 날에, 곧 유월절 양을 잡는 날에” (14 12) - 마지막 만찬, 겟세마네 기도, 그리고 체포

* 금요일: “새벽에” (15 1) – 고난과 십자가 죽음

* 토요일과 부활주일: “이레의 첫날 새벽” (16 2) – 침묵과 부활

 

일주일 동안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매일 예배를 드리게 되는데, 그때마다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그 날에 일어났던 일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오늘 지키고 있는 종려주일에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를 보면서 그것이 무슨 의미를 지는지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유대절기로 유월절에 일어난 일이다. 유월절은 오순절(칠칠절)과 초막절(장막절)과 더불어 유대인의 3대 절기(명절) 중 하나이다. ‘성전신학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절기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 순례를 오는 것이 그들의 신앙적 전통이었다. 그들이 성전신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차츰 알게 될 것이다.

 

유월절을 지키러 오는 순례 행렬 가운데, 두 개의 특이한 행렬이 있었다. 하나는 오늘 우리가 말씀에서 본 것처럼, 나귀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행렬이다. 다른 하나는 말씀 가운데 등장하지는 않지만, 그 당시 예루살렘에 살던 모든 이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보다 더 관심 있어 하고 눈 여겨 보았을, 로마 총독(빌라도)의 행렬이다.

 

그 당시 로마 총독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지 않았다. 로마 총독은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60마일 가량 떨어져 있는 가이사랴에 거주했다. 예루살렘은 오래된, 배타적인, 살기 힘든 도시였지만, 가이샤랴는 해변에 건설된 신도시로서 모든 주거 환경이 매우 깨끗하고 좋았다. 그런데, 로마 총독은 유대인의 절기를 맞아 예루살렘이 온 것이다. 왜 왔을까?

 

로마 총독이 유대인들과 함께 유월절 양을 잡고 유월절 식사를 하며 그들의 절기를 지키러 온 것은 아니다. 그의 목적은 완전히 다른 데 있었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많이 몰리는 명절에 혹시라도 일어날지 모르는 폭동을 예방하고 진압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온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군마를 타고, 칼과 창과 방패와 전차로 무장한 로마군단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개선장군처럼 입성한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그것도 나귀의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그러한 예루살렘 입성을 앞에서 뒤에서 따르며 호산나하며 환호하던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함께 그리고 있다. 예수님은 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까?

 

지금은 한국도 자동차 산업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전해서 그렇지 않지만, 2,30년 전만해도 한국의 자동차 산업은 그렇게 발전된 수준이 아니었다. 예전에 한국에는 검소한 차와 럭셔리 차의 대명사가 있었다. 티코와 그랜저이다. 티코는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다.

 

그 당시 오늘 본문을 가지고 이런 설교를 하는 설교자도 있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말을 탄 것이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탄 것은 그랜저를 탄 것이 아니라 티코를 타신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그랜저 타지 말고 티고 타라. 예수님도 티고 타셨는데, 목회자가 그랜저 타면 못쓴다.” (이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아멘했다. 지금 생각하면 바보들의 잔치 같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촛불집회. 그리고 이것은 예언의 성취이고, 참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어떤 왕인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유는 그가 갈릴리를 중심으로 전했던 복음이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스가랴서의 예언을 알아야 무슨 뜻인지 파악할 수 있다.

 

오늘 말씀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구절이 있다. 번역이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3절 말씀이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는 말씀에서,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는 부분이다. 우리 말 성경의 이부분은 이런 뜻인 것처럼 읽힌다. ‘주가 쓰시겠다고 말하면, 나귀 주인이 나귀를 즉시 내어줄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을 영어로 보면 이렇다. “The Lord needs it and will send it back here shortly”(NIV). 영어 성경을 보면 그 뜻이 정확해 진다. “주님께서 나귀를 쓰신 뒤 곧바로 다시 돌려주실 것이다.”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해서, “잠시만 빌려주십시오! 반드시 다시 돌려 드리겠습니다!”는 뜻이다. 옛날에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의문이 있었다. “아니, 어떻게 나귀를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니까 막 내주나그리고 저렇게 남의 나귀를 막 가져다도 되나?” 그리고 이 본문으로 이런 설교를 하는 설교자도 있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할 때 내어드리라. 주님의 것인데, 주님이 마음대로 쓰시겠다고 하는데, 안 내어 드리면 죄다.” 이것 또한 위에서 본 티코와 그랜저 이야기처럼 성경을 오용하는 예이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스가랴서에는 이러한 예언이 나온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9:9). 마태복음은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하게 풀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시온의 딸에게 말하여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온유하시어, 나귀를 타셨으니, 어린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다”( 21:5).

 

중요한 것은 왜 왕이 그렇게 나귀를 타고 오신다고 말하는 것인지를 아는 것이다. 이어지는 스가랴의 말씀은 이렇다. “내가 에브라임에서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며, 전쟁할 때에 쓰는 활도 꺾으려 한다. 그 왕은 이방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그의 다스림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를 것이다”( 9:10).

 

로마 총독과 예수님의 행렬, 이 두 개의 행렬은 대조를 이룬다. 로마 총독의 행렬은 로마제국이 가지고 있는 권력과 영화 그리고 폭력의 과시였고, 예수님의 행렬은 예수님께서 전하고 다니신 복음,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로마제국의 폭력과 완전히 대조되는 평화의 나라이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보면서 사람들은 호산나를 외쳤다. 호산나는 시편 118 25절에 나오는 이 말씀에서 왔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시편 118:25). 히브리어로 호쉬아 나인데, 이는 지금 구원해주소서!’라는 뜻이다.

 

우리도 오늘, 종려주일을 맞아 호산나를 외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외치는 오산나는 어떠한 호산나인가? 혹시 우리가 외치는 호산나는 이러한 호산나가 아닌가? “우리도 로마제국이 가졌던 권력을 가졌으면 좋겠! 우리도 그런 부를 누렸으면 좋겠다! 우리도 다른 이들보다 나은 위치에 올라서서 그들을 아랫사람 부리듯 했으면 좋겠다!”

 

예수님이 목숨을 바쳐 외쳤던 하나님 나라의 평화는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평화는 힘에서 오지 않고, 정의에서 온다. 미가서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4:4). 이러한 일들은 정의와 번영과 안전의 상징이다. 성경에서 정의는 모든 사람이 자기의 땅을 갖는 것이다. 번영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생계를 유지하고도 남을 정도인 상태를 말한다. 안전은 끊임 없는 불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에게 참된 평화가 있는가? 모든 사람이 자기 땅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현재, 한국이나 미국이나 가장 중요한 사회적 문제는 빈부의 격차이다. 통계에 의하면, 미국의 상위 10%가 차지하고 있는 부는 미국 전체 부의 거의 80%이다. 많은 이들이 먹고 사느라 허덕이고 있다. 번영은 먼나라 이웃나라 이야기다. 전쟁과 테러의 소식 끊임 없이 들려온다. 언제 전쟁이 날지 모르고, 언제 테러를 당할지 몰라 불안하기 그지 없다.

 

이러한 불의를 나몰라라 하면서, 다른 이들이 어떻든, 이 사회가 어떠하든 상관하지 않고,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호산나, 주여, 나를 지금 당장 구원해주소서, 형통케 하소서!’라고 외치는 것은 예수님께서 목숨을 바쳐 외쳤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다.

 

성경에서 회개한다는 것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넘어서는 길을 가기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믿는다는 말도, ‘신뢰믿고 맡김의 뜻을 지니고 있다. , ‘복음을 믿으라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와 있다는 소식을 신뢰하고 그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다’. (마커스 보그, 도미닉 크로산, <마지막 일주일>, 57)


우리는 어느 행렬에 참여하고 있는가? 우리는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다 주신 참된 평화를 외치며, 예수님께서 외치신 복음,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고 있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이 부추기는 권력과 폭력의 길을 따르지 말라. 예수님처럼 온유한 마음으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가 되라. 다른 누구, 또는 무엇이 아닌, 오직 참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 자신, 가정, 교회, 그리고 우리가 사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함께 노력하자.

 

무엇보다,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 교회, 오직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피흘리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하나님 나라의 평화가 가득 넘치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한다. 다함께 외쳐보자. ‘호산나!’ 서로 인사 나누자.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우리 평화롭게 지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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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4. 6. 07:16

마라라 하지마라

(출애굽기 15:22-26)

 

쓴물이 단물로 바뀐 이야기이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은 수르 광야를 3일 동안 걸었는데도 물을 얻지 못했다. 물을 찾아 가까스로 도착한 곳이 마라인데, 기쁨도 잠시, 그 물은 써서 먹지 못하는 물이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모세에게 원망한다.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마라라는 말은 물이 쓸 때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인생이 쓸 때도 사용했다. 룻기 1 20절에 보면, 나오미는 자신의 괴로운 인생을 가리켜 마라라고 한다. 나오미의 이름은 뜻은 원래 기쁨인데, 인생에 기쁨이 없고 괴로움만 있었기에 그렇게 불러달라고 한다. 얼마나 인생이 괴로웠으면 그렇게 불러 달라고 했을까. 측은하다.

 

이스라엘의 원망은 측은한 원망이다. 그들의 삶의 환경이 그만큼 어려웠다. 적절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폭동이 일어날 태세다.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하나님은 어떠한 한 나무를 가리키며 그것을 물 속에 던져 넣으라고 말씀해 주신다. 그랬더니, 쓴물이 단물로 바뀌었다. 먹을 수 없는 물이 먹을 수 있는 물로 바뀌었다는 뜻이다. 쓴물이 단물로 바뀌는 것, 이런 것이 능력이고 은혜인 것이다. 반대가 되면 안 된다. 단물을 쓴물로 바꾸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고, 죄악이다.

 

어느 신문에서 이지선과 션이 그만 달려도 되는 나라는 칼럼을 읽었다. 한국의 어린이 사회복지의 현실을 꼬집으며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해야 함을 촉구한 칼럼이었다. 그 칼럼에 의하면, 현재 한국에는 재활과 사회복귀를 위해 치료가 필요한 어린이가 3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에 어린이 재활병원은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 딱 한 군데 밖에 없다고 한다. 그 병원에 들어가서 재활치료를 받으려면 평균 1년을 기다려야 한단다.

 

그 병원의 홍보대사가 이지선과 션인데, 그들은 사람들에게 어린이 재활병원 후원을 홍보하기 위해서 마라톤을 완주했다고 한다. 이지선 씨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교통사고를 당해서 전신화상을 입어 전신 피부이식을 한 상태가 피부에서 땀이 잘 배출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에도 마라톤을 두 번이나 완주했다고 한다. 션은 m 1000원씩 기부하기 위해 42.195Km를 뛰었고, 그래서 총 4,219 5천원을 기부했다고 한다. 칼럼니스트는 이제 이들은 그만 뛰게 하고, 나라가 나서서 어린이재활병원 설립에 힘쓰기를 바란다고 당부한다.

 

쓴물을 단물로 바꾸는 일은 공동체의 과제이다. 우리는 대개 처음부터 단물이 나는 장소를 찾아다니지만, 처음부터 단물이 어디 있는가? 그리고 단물도 잘못 관리하면 쓴물이 되기 십상이다.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쏟아지는 비판 중, ‘교회 쇼핑족에 대한 비판이 많다. 교회 쇼핑족들은 교회 선택의 기준이 신앙적 동기보다는 종교생활을 통해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유익을 누리려는 계산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를 선택할 때, 1) 예배당의 음향과 조명과 영상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는지, 2) 전문가들이 예배나 교회운영에 참여함으로써 쾌적한 예배환경을 제공해주는지, 3) 교회의 부대시설(주차, 건물, 카페, 서점, 식당 등)이 얼마나 편의성을 갖추고 있는지, 4)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 체계적이고 앞서나가는 교육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는지, 5) 사회 중상층 이상의 전문직 종사자들이 성도들 가운데 적절히 존재해서 사회생활에 직간접적으로 도움도 되고 교제권을 만들어두면 여러모로 교양 있는 라이프스타일을 누릴 가능성이 있는지, 6) 다른 교회에 없는 유력한 교육과정이나 훈련과정 등이 있어서 배움의 욕구를 잘 충족시켜주는지 등을 검토한다. (양희송,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 57)

 

교회 쇼핑족들은 자신이 헌신하여 쾌적하고 좋은 환경의 교회를 세워나가려 하지 않고, 힘들이지 않고 이미 쾌적하고 좋은 환경의 교회에 무임승차하려는 얌체족이다. 우리는 누구든지 그러한 얌체족, ‘교회 쇼핑족에 편승할 수 있다. 우리는 물이 써서 못 먹게 된 것만 보고 원망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그 쓴물을 달게 만들 수 있는 어떠한 나무를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고 계신 것을 보지 못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쓴물 한 번 먹고, 그것이 쓰다고 쉽게 원망하지 말라. 이 물이 쓰다고 쉽게 마라라고 하지말라. 그 쓴물을 움켜쥐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해 본 적 있는가? 그 쓴물을 움켜쥐고 하나님께서 단물로 바꾸어 주실 거라는 신실한 믿음을 가져 본 적 있는가? 우리는 너무도 쉽게 쓴물을 포기하고, 단물을 찾아 떠난다. 그런 자에게 어떻게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실 수 있겠는가? 그런 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겠는가? (이것에 대하여 간증할 것이 엄청 많은데, 차츰 기회가 되면 하겠다.)

 

오늘 말씀의 마지막 구절은 나는 너희의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는 말로 끝난다. 그런데, 그 치료의 근거는 이것이다.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이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애굽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라도 내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신다.

 

요즘 사람들에게 가장 큰 이슈 중 하나는 다이어트이다. 먹는 게 부족했던 시절에는 다이어트라는 말이 없었다. 그때는 (나처럼) 적당히 살이 오른 사람이 최고였다. 그런데, 시절이 변해 먹는 게 풍족하다 보니, 먹는 것을 절제해야 하는 시절이 온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이어트를 한다. 그런데 성공하는 사람은 극소수다. 물론 일시적으로 다이어트에 성공한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곧 요요현상이라는 것이 일어나 다시 살찌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 그럴까?

 

다이어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밥 적게 먹고 운동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습관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진정한 다이어트는 생활습관 자체를 바꾸는 것이지, 일정기간 밥 적게 먹고 운동 많이 한다고 효과를 보지 못한다. 그런데, 일시적으로 밥 적게 먹고 운동 많이 하는 것까지는 할 수 있는데, 생활습관 자체는 바꾸는 일은 죽는 것보다 힘들다. 그래서 대부분 다이어트에 실패하는 것이다.

 

치료의 효과를 보기 위해서 율법을 잘 지켜야 한다는 말은 생활습관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과 똑 같은 말이다. 이것은 거룩한 생활습관이라고 한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병에 안 걸린다는 말을 무슨 주술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 안식일 잘 지키면 병에 안 걸리는가? 병에 걸린 사람은 안식일 잘 안 지켜서 그런가? 아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쉬라는 뜻이다. 안식일은 쉬는 생활습관을 말한다. 쉴 줄 아는 자는 병에 걸리지 않는다. 쉬지 못하는 자는 병에 걸리기 쉽다. 현대인들의 가장 안 좋은 생활습관은 쉴 줄 모른다는 것이다.

 

쉬운 예를 하나 더 들면, 레위기서의 율법에 보면 돼지고기를 먹기 말라는 법이 있다. 돼지가 부정해서 그런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왜 그토록 돼지고기(특별히 삼겹살)를 못 먹어서 안달하는가? 율법에서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고 한 것은 생활습관을 말하는 것이다. 당연하다. 중동지역은 덥다. 더운 지역에서 돼지고기 잘못 먹으면 탈난다. 병에 걸린다. 죽는다. 율법을 지키면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습관이 형성되고 결국 그것 때문에 병에 걸릴 위험이 없어진다.

 

하나님의 말씀은 에 관한 것이지 죽음에 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삶의 습관에 관한 말씀이지, 삶과 동떨어진 뜬 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서로 사랑하면 왜 병에 걸리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서로 미워하고 원수처럼 지내니까 화병에 걸리는 것이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자에게 쓴물이 다가올 틈이 어디 있는가? 그런 자에게는 매일 단물이 밀려 올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삶의 습관을 형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단물이 아니라 쓴물이 밀려 오는 것이다.

 

마라를 쓰다고 원망만 하지 말고, 쓴물을 달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마라를 움켜쥐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보자.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교회의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붙들고 기도해 보고, 그것을 단물로 바꾸기 위해 헌신해 보라.) ‘마라라고 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쓴물을 주지 않으신다. 쓴물도 단물로 바꾸어 주신다. 주님께서는 마라, 쓴물을 단물로 바꾸시기를 원하신다. 쓴물을 단물로 바꾸실 어떠한 나무를 이미 예비해 놓으셨다. 그러니, ‘마라라고 하지 말라. 우리의 삶 가운데 있는 마라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며, 삶의 자리에서 쓴물을 단물로 바꾸며 살아가는 믿음의 자녀가 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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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4. 4. 04:38

부활과 생명과 나사로

(요한복음 11:17-44)

 

예전에 ‘YMCA 야구단이라는 영화를 재미 있게 본 기억이 난다. 김혜수와 송강호가 주연을 했던 영화인데, 구한말, 선교사를 통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일 때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영화이다. (거기에는 지금 대스타가 된, 황정민과 김주혁도 나온다.)

 

기록을 보면, 한국에 YMCA(Young Men Christian Association)가 들어온 것은 대한제국 시대인 1903황성기독교청년회라는 이름으로 들어왔고, 1905년 미국 선교사 질레트에 의해서 YMCA를 통해 한국에 야구가 소개되었다.

(질레트 (Philip Gillett,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는 소위 스포츠 선교를 했던 분이다. 야구 외에도, 1907년에는 한국에 농구도 소개했다. 그리고 스케이트화와 복싱글러브도 한국에 처음 소개했다. 몇 년 후, 한국에서 ‘105’인 사건이 터지자 일본정부에 그것에 대한 부당성을 주장하다 추방당해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미국으로 돌아가 1938, 향년 66세의 나이로 소천한다.)

 

‘YMCA 야구단이라는 영화를 보면 그 당시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인 조선인들(한국 사람들)의 생활을 재미나게 그리고 있는데, 기억에 남는 대표적인 것이 두 세 가지 있다. 하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테니스를 치고 있는 선교사들을 보며 혀를 쯧쯧 차며 하던 양반의 말이다. “저렇게 땀 흘리는 것은 아랫것들이나 시키지…” 다른 하나는 야구할 때 양반과 상놈이 함께 팀을 구성해서 시합을 하는데, 1루수에는 양반이 있었고 유격수에는 상놈이 있었는데, 유격수인 상놈이 1루수인 양반을 향해 던진 공을 1루수인 양반이 이런 말을 하면서 안 받는 것이었다. “상놈이 던진 공을 양반이 어떻게 받나…” 그리고, 양반이 안타를 치고, ‘허허, 양반이 어떻게 뛰나하면서 뒷짐지고 걸어가는 장면도 기억에 남는다.

 

무엇인가 처음 접하게 되었을 때의 반응은 이처럼 낯설고 신기한 법이다. 위에서 언급한 야구와 같이, 복음을 처음 접한 한국인들(조선인들)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 생각해 본다.

 

미국 선교사들은 대개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한국 선교를 갔는데, 19018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한국의 부산에 도착하여 선교활동을 한 윌리암 블래어 선교사가 남긴 그 당시의 기록을 보면 이렇다.

 

“도시에는 오수 처리 시설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오물들이 천천히 흘러서 초록 색깔의 도랑을 이루고 있었다. 소수의 사람들은 깨끗한 옷을 입고 있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러운 흰 옷들을 입고 있었다... 조선은 가난한 나라였다. 전쟁으로 황폐했을 뿐 아니라 정치가 부패했기 때문이었다. 수 세기 동안 왕들과 지방 관리들은 모두 부패해서 백성들을 착취하고 있었다. 건장한 한국 사람들이 국가적인 불행을 슬퍼하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는 동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 우리 나라처럼 가난하고 불행한 나라가 있습니까?' 그들은 지금 가련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게 되었다.” (The Korean Pentecost, pp. 16,24-25).

 

윌리엄 블래어 선교사의 말처럼, ‘가련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은구한말 한국 사람들이 복음을 접했을 때, 그들은 어떠한 생각을 했겠는가? 아마도 눈이 번쩍 뜨였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생전에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그들이 오늘 우리가 읽은 나사로 이야기를 접했다면, 어떠한 반응을 보였겠는가? 예수를 믿으면 천지가 개벽될 거라는 믿음과 희망이 마음 속에 가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은 어떤가? 한국에 복음이 전해진 지 100년이 훨씬 지났고, 복음을 전해준 나라인 미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오늘 우리가 읽은 나사로 이야기는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가? 아마도, 100 여년 전 구한말 한국인들에게 다가왔던 믿음과 희망보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죽은 자가 어떻게 살아나냐?)’라고 의심부터 할 것이고, 무엇보다, 별 관심이 없을 것이다. ‘나사로가 살아나든 말든, 돈다발이나 떨어졌으면 좋겠다.’

 

우리가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나사로 이야기를 처음 시작하는 11 1절의 말씀은 이렇다.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과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일은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다. ‘베다니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베다니교회를 떠올린다. ‘베다니’, 한국말 어감으로도 나쁘지 않다.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에게 베다니는 그렇게 좋은 감정을 불러 오는 이름이 아니었다. ‘베다니의 뜻은 무화과 의 집이라는 뜻과, ‘슬픔의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외곽에 있었던, 요즘 말로 하면 위성도시였다. 한국의 성남 정도를 생각하면 된다. 요즘에는 성남이 엄청 발전했고, 성남 중에는 분당이라는 곳이 생겨 천당 밑에 분당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살기 좋은 곳이 되었지만, 옛날에 성남은 서울에서 밀려난 가난한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이루어서 살던 곳이었다. ‘베다니는 딱 그런 곳이다.

 

마가복음 14장에 보면, 문둥병자 시몬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예수님은 문둥병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계셨고, 그때 한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고 이야기가 나온다. 그 문둥병자 시몬의 이야기의 배경도 베다니이다. , 베다니는 도시에서 밀려난 병자들이 살던 소외된 곳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곳은 죽음이 가득했던 곳이다.

 

목숨이 끊기는 것만 죽음이 아니다. 목숨이 끊기는 것은 궁극적인 죽음이지만, 차라리 목숨이 끊기면 고통이 없지만, 살아 있는 생명에게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주는 죽음의 상태가 즐비하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베다니에 살던 사람들이 느꼈을 사회적 소외의 고통이다. , 사람 대접 받지 못하는 것이다. (아프면, 아픈 것 자체도 힘들지만, 무엇보다 아픈 것 때문에 주변에서 받는 눈총이 더 아픈 법이다. 주변의 아픈 사람들에게 다정하게 대해주고 최선을 다해 돌봐주라.)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지만, 그 당시 병자들이 사회적 죽음을 경험한 이유’, 그리고 그렇게 분리되어 생활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은 곧 죄라는 개념이 때문이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9:2). 이것이 그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병에 대한 전형적인 생각이었다. 병은 죄 때문에 온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하신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9:3). 그리고, 예수님은 그 맹인에게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시고, 그 맹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실로암에 가서 씻고 병이 낫는다. (그리고 눈을 뜨게 된 그가 기뻐서 만든 노래가 바로 이것이다. “어두운 밤에 깜깜한 밤에 새벽을 찾아 떠난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자주 들르셨다는 것, 문둥병자 시몬의 집에서 함께 식사하셨다는 것, 특별히 베다니에 사는 병자였고 결국 그 병 때문에 죽게 된 나사로를 죽은 지 나흘(4)이 지나 다시 살게 해주셨다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자기의 부활을 예언한 사건이기도 하지만,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나사로(Lazarus)’의 뜻은 하나님의 도우심이다. 나사로는 단순히 그 자신만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죽음 가운데 처해진모든 이들을 대표하는 이름이다.

 

우리는 살아 있는가, 죽어 있는가? 다른 말로, 우리는 무엇을 통해 죽음, 사회적 죽음을 맛보며 고통 가운데 사는가? 예수님이 이 시대에 오셨다면, 무엇으로부터의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을까? 우리는 엄청나게 발전된 도시에 살고 있는 것 같으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거대한 베다니’(죽음의 도시, 슬픔의 도시)에서 살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 이유는, 첫째, 우리가 복음에 별다른 반응이 없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일례로,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가운데는 실로 엄청난 선언이 나온다. 이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니리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 (‘아멘이 간절하게 나오지 않는다.)

 

예수님의 이 진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빨리 끝나고 밥이나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엄청난 사건이 나온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이야기이다. “나사로야 나오라!”는 예수님의 큰 소리에, 죽은 지 나흘(4)이나 된 시체가 무덤에서 살아 나온다.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44).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전혀 놀라지 않는다. 이 장면을 들으면서,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거나, 아니면, ‘무슨 좀비냐라고 속으로 웃는다.

 

우리가 거대한 베다니에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세상을 보는 것이다. “박근혜가 구속되면서 세월호가 바닷속에서 올라왔다.” 세월호 이야기가 나오면 가장 많이 나오는 반응이 이것이다. ‘그만 말하라. 지겹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반응할까? 곡을 하여도 왜 함께 울지 않는 걸까?

 

어떤 철학자는 우리가 사는 사회를 피로사회라고 말한다. 한국의 유명한 신경정신과 전문의 이시형 박사는 이런 말도 한다. “24시간 신경이 곤두서 있는 피로 사회 한국, 이런 환경에서는 오히려 암이 안 걸리는 게 이상합니다.”

 

현대인의 사망원인을 분석한 자료를 보면, 1위가 암이다. 건강하게 살다가 수명을 다하여 죽는 이들은 별로 없고, 대부분은 죽을 때 암에 걸려 죽는다. 20-30대 젊은이들의 최고 사망원인은 무엇인지 아는가? 자살이다. 참혹하다. 암 중에서도, 폐암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간암이고, 3위가 위암이다. 사망원인 순서만 놓고 보면, 1위가 암이고, 2위가 심장질환(심장마비(돌연사)이고, 3위가 뇌혈관 질환(중풍병)이다.

 

이 모든 사망원인 뒤에는 거대한 이유가 한 가지 있다. 바로, 스트레스. 스트레스 받으니까, 담배피고, 그래서 폐암에 걸려 죽는다. 스트레스 받으니까 술을 먹는다. 간이 상한다. 그래서 간암에 걸려 죽는다. 스트레스 받으니까 매운 거 많이 먹는다. 그래서 위암에 걸려 죽는다. 스트레스 받으니까, 열 받아서 심장마비로 죽든가, 뇌혈관이 터져 죽는다. 무엇보다, 스트레스 받으니까, 자살해 죽는다. 이게 우리가 사는 사회의 자화상이다.

 

피로사회’, 거대한 베다니에서 사는 현대인들은 모든 것이 지겹다. 왜냐하면, 이미 삶 속에서 매일 같이 죽음과 지옥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온통 스트레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다.’ 남의 기쁨에 감흥이 없다. 남의 슬픔에 감흥이 없다. 모든 게 다 지겨울 뿐이다. 그러니, 배 안에서 305명이나 되는 생명이 몰살 당했는데도, 그 이야기만 나오면, 지겹다고, ‘그만 말하라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자신들도 죽음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극이다. (8살짜리 여자 아이를 죽인 17짜리 고등학생 여자 아이의 진술, ‘꿈 인 줄 알았다’. 자기가 죽음에 처해 있으니, 자기 손에 남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남의 죽음에 감흥이 없는 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을 믿는 자, 그분의 부활과 생명 가운데서 사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 그에게는 생명력이 넘친다. 생기가 넘친다. 생기가 넘치는 자는 피리 소리가 들리면 덩실덩실 춤출 줄 안다. 생기가 넘치는 자는 곡 소리가 나면 함께 슬피 울 줄 안다. 기쁨이 무엇이고, 아픔(슬픔)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나사로인가? 그런데, 우리는 어떤 나사로인가? ‘부활이요 생명이신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사로야 나오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무덤을 박차고 나온 생명을 얻는 나사로인가? 아니면, ‘나사로야 나오라는 말씀을 듣고도 여전히 어두운 무덤에 머물러 있는, 여전히 죽어 있는 나사로인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죽어가는가? 스트레스 받아서, 피곤해서 죽어가는가? 아니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를 지고 죽어 가는가? 윤동주의 시 <십자가>이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무덤을 나온 나사로가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주님,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어떤 나사로입니까?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죽음을 박차고 나온 나사로입니까?

아니면, 여전히 죽음에 머물러 있는 나사로입니까?

우리는 무엇 때문에 죽어가고 있습니까?

부활과 생명의 주님,

복음을 들은 우리들,

더 이상 이 세상이 주는 죽음의 요인 스트레스

머물지 말게 하옵소서.

부활과 생명의 복음의 들은 우리들,

성령의 생기를 입게 하옵소서.

우리의 영혼에 생기가 돌아

무엇이 기쁨인지, 무엇이 아픔인지 분별하여

허락된 십자가를 지고서

함께 기뻐하고, 함께 울 줄 아는

생명력 넘치는 인생을 살게 하옵소서.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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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3. 30. 15:46

거룩과 영광

(레위기 10:1-7)

 

최근 한국고용정보원에서 실시한 직업만족도조사에서 목사가 3위를 기록했다.



판사가 1, 도선사가 2위를 차지했다. 3위인 목사에 이어, 대학교총장이 4, 전기감리기술자가 5, 초등학교 교장이 6, 한의사가 7, 8위가 교수, 원자력공학기술자가 9, 그리고 세무사가 10위를 차지했다.

 

평가 항목은 △발전 가능성, △급여만족도, △직업 지속성, △근무조건, △사회적 평판(자녀에게 직업을 권유), △수행직무만족도 였다고 한다. 사실, 이 뉴스를 접하고 걱정부터 든다. 젊은이들이 직업을 선택할 때 직업만족도만 보고 목사 되기를 선택하게 될까 봐 서다. ‘직업만족도직업선호도는 다르다. 목사가 직업만족도에서는 수위를 차지했을 지 모르나, 목사는 여전히 선호 직업이 아니다. 옛날에 우리 어머니가 이발사 다음에 목사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 기억난다. 그만큼 목사는 직업 선호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아직까지 목사를 구약의 제사장과 같다고 생각하는 구태의연한 목회자들이 있지만, 목사가 구약의 제사장과 같다고 볼 수 없다. 왜 다른 지 모르는 목회자는 공부가 부족하거나, 자기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의 하는 일이 거슬러 올라가면 구약의 제사장과 맞닿아 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늘 말씀을 보면, 제사장적 기원을 가지고 있는 목사가 되는 일이 그렇게 낭만적이거나 선호할 대상이 못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으로서 하기에 불가능한 일을 감당해야 하는 패러독스적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요즘 목회자들에게는 설교가 굉장히 중요한 임무로 여겨지는데,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로 추앙되고 있는 칼 바르트에 의하면, 설교는 불가능한 일을 하는 것이다.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낼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불가능한 것을 해야만 하는 숙명이 목사에게 주어졌다. 그래서 목사는 어쩌면 시시포스 신화의 주인공, 시시포스와 같은 운명에 처해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령하여 아론과 그의 자손들을 제사장으로 성별하여 세우라고 하신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아론과 그의 자손들을 성별하여 제사장으로 세운다. 성별 받아 제사장으로 세움 받은 아론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따라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한다. 레위기 9장은 아론의 첫 제사장 직무를 기록하고 있다.

 

아론의 첫 제사장 직무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9장은 이렇게 끝난다.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를 지르며 엎드렸더라”( 9:23-24).

 

그런데, 이어지는 10장의 이야기, 우리들이 오늘 함께 읽은 이야기에서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 전개된다. 아론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다: 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 그 중에서 첫째와 둘째인 나답과 아비후가 대제사장 아론의 감독하에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한다. 게다가 이들은 모세와 아론을 따라 시내산에 올라갔던 인물들이다( 24). 그런데, 그들은 결정적인 실수를 범한다. 그들의 실수는 이것이었다.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1).

 

이어지는 이야기는 이것 때문에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이다. 문제가 된 것은 그들이 다른 불을 향로에 담아 분향한 것 때문이었다. 성경의 이러한 광경을 보고도 직업만족도 3라서 목사를 직업으로 선택하는 젊은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답과 아비후를 죽음에 처하게 한 다른 불은 무엇일까?

 

다른 불에서 다른의 히브리어는 자르이다. 이는 이상한, 다른, 생소한, 낯선이라는 뜻을 갖는다. 이 단어의 복수형인 자림이방인으로 번역된다. 영어로는 ‘strange, unauthorized, unholy’ 등으로 번역한다. 그러므로, ‘다른 불하나님이 지정하시지 않은 불, 출처를 알 수 없는 불, 다른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로부터 온 불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호와의 율법을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었을 그들(나답과 아비후)이 이렇게 다른 불을 가져다 분향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의 이야기 속에는 그에 대한 설명이 안 나온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씀에서 유추해 볼 수는 있다. (우리가 읽은 본문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분향단 사건 때문에 나답과 아비후가 죽는 사건이 있은 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론에게 모세를 거치지 않고 직접 이런 말씀을 하신다.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 10:9).

 

이러한 규례가 바로 언급되는 것을 미루어 짐작해 보건 데, 나답과 아비후는 회막에 들어갈 때 술 취한 상태였던 것 같다. 여기서 포도주나 독주(포도 외에 다른 것으로 담근 술)를 마신 것 자체가 죄에 해당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술 취한 것이 불러온 결과이다. 그들은 술 취한 것 때문에 자기들의 맡은 바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지 못했다. 이런 말이 있다. “의사가 통풍을 앓고, 공사 감독은 눈이 하나뿐이고, 변호사가 검사처럼 행동하는 지방에 사는 것은 불행하다.” 자기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지 못하는 일은 불행한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거룩영광에 대해서 진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거룩이란 무엇인가? 영광이란 무엇인가? 오늘 말씀에서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다.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3).

 

거룩과 영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시는 존재 방식이다. ,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할 때 거룩하게 경험하고 영광스럽게 경험한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하면 영광스러운 존재가 된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하지 못해서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지 못하고, 죽음에 처해졌다. , 하나님의 거룩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영광, 생명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룩과 영광은 구원론의 구약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왜 중요한 지, 이렇게 생각해 보자. 이 세상에서 우리가 영광을 받는 방식은 무엇인가? 다른 말로 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나는 살아 있어라고 느끼게 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돈과 자식과 출세이다. 세상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지 한다. 왜 그런가? 그것이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식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지 한다. 왜 그런가? 그것이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출세하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지 한다. 왜 그런가? 그것이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들은 돈과 자식과 출세를 통해서 영광을 받을 때, 살아 있다고 느낀다. 그게 생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위해서 무슨 짓이든지 한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안한다.

 

이것은 욥기서의 통찰이기도 하다. “우리는 왜 하나님을 믿는가? 섬기는가?”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항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1:9-11).

 

사탄의 요지는 이것이다. 욥이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이유는 하나님 자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해서 돈과 자식과 출세를 얻고 그것을 통하여 영광을 받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욥이 살아 있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의 돈과 자식과 출세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은 욥에게서 돈과 자식과 출세를 모두 걷어 가신다. 그런데, 욥이 그것 때문에 죽었는가? 욥의 아내가 욥에게 종용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욕하고죽었는가? 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돈과 자식과 출세를 다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으로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1:21-22).

 

,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이지, 우리가 추구하는 돈과 자식과 출세가 아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이지, 우리가 추구하는 돈과 자식과 출세가 아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야 한다. 우리에게 진실로 생명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세상을 좇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세상에서 생각하는 영광, 생명을 얻기 위하여 돈과 자식과 출세를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다 하면서, 참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하기 위하여 우리는 아무 것도 안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히려, ‘돈과 자식과 출세를 위하여 하나님(신앙)을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늘 말씀에 보면,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등장한다. 나답과 아비후가 죽었다. 그들의 가족들, 아버지 아론과 그들의 형제인 엘르아살과 이다말, 그리고 그들의 작은 아버지인 모세가 그들의 죽음을 직면하여 가슴 아파하며 그들의 장례를 치러 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죽은 이들을 위하여 장례를 치르거나 가슴 아파하지 말라고 하신다. “너희는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가 죽음을 면하고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침을 면하게 하라”(6).

 

리고, 그들에게 명령하시기를, “여호와의 관유가 너희에게 있은즉 너희는 회막 문에 나가지 말라 (7)”라고 하신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해서, “너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안에 머물라는 뜻과 같다. 무엇이 우리에게 참 생명을 가져다 주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귀한 말씀이다.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주는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닌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토록 거룩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11:45).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 안에 머물기 위하여,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나도 거룩하기 위하여 무슨 짓이든지 하는 믿음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한다. 왜냐하면,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고, 궁극적인 생명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기 때문이다.

 

(목사는 직업만족도 3이기 때문에 선택해야 할 직업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가까이서 경험하게 될 영광스러운 자리라는 은혜, 그리고 불가능한 일을 수행해야 하는 어려움을 기꺼이 직면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선택 할 수 있는 직업이다. 그러니, 부디, 젊은이들은 세상이 말하는 직업만족도에 혹하여 목사라는 직업을 선택하지 말 것을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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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3. 23. 09:13

여호와 닛시

(승리는 어떻게 오는가?)

(출애굽기 17:8-16)

 

여호와 닛시는 여호와는 나의 깃발(the Lord is my banner)’이라는 뜻이다.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이긴 후, 모세가 제단을 세우는데, 거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모세는 그것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 위해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기념하기를 원했다.

 

이 전투는 르비딤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르비딤에 장막을 쳤는데, 문제는 그곳에 물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에게 거칠게 항의했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 문제로 모세와 크게 다투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7:2-3).

 

모세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을 치라고 말씀하신다. 모세는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반석을 치고, 반석에서는 물이 터져 나온다. 그래서 르비딤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는 이름으로도 불렀다. ‘시험, 다툼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광야를 지나며 이렇게 끊임없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다툼을 일으켰다. 그냥 대충 봐도 별로 은혜롭지 못한 상황이다. 계속되는 시험과 다툼은 결국 가데스 바네아 사건에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어진다. 시험과 다툼을 일삼은 출애굽 1세대는 광야에서 모두 죽게 되고, 가나안 땅에 결국 들어가지 못하는 심판을 받는다.

 

물이 없던 르비딤에 물이 생겼다. 사막의 물은 금보다 귀한 것이라 주변에서 이것을 가만히 놓아둘 리가 없다. 오늘 말씀 8절은 그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아말렉이 쳐들어 왔다. 당연히, 물이 나는 르비딤을 차지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전쟁 방식이 흥미롭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싸우라 명하고, 자신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산에 올라가겠다고 말한다. 매우 독특한 전쟁 방식이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명령대로 사람들을 선발하여 아말렉과의 전투에 임하고, 모세는 아론과 훌과 함께 전쟁 상황을 지켜볼 수 있는 산 위에 올라 전쟁을 관망하며 하나님의 지팡이를 높이 들고 기도한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전쟁의 판도가 모세의 손이 들려 있는지 내려가 있는지에 따라 달라졌다는 것이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11).

 

그 상황을 곁에서 지켜보던 아론과 훌이 좋은 방책을 낸다. 모세가 계속하여 팔을 들고 있을 수 없게 되자 그들은 돌을 가져다 모세를 앉히고 자신들이 각각 한쪽 팔을 붙잡고 모세의 팔이 내려오지 않게 붙들어 준다. 그리하여 결국 여호수아는 아말렉을 무찌른다.

 

여호와 닛시승리를 상징한다. 전쟁터에서 깃발은 지휘관이 그곳에 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깃발이 하늘 높이 치솟아 있는 한, 병사들은 죽을 힘을 다해 싸운다. 그러나, 깃발이 쓰러지면 지휘관이 죽었거나 적에게 잡힌 줄로 알고 싸움을 포기하게 된다. 모세는 자신이 하나님의 지팡이를 높이 들고 있는 것을 전쟁터에 나간 이스라엘 군대에게 보여줌으로써 전쟁의 지휘관이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상수이다. 이 상수와 함께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변수가 있다. 그 변수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승리할 수 있을까? 승리는 어떻게 오는 것일까?

 

논어 이인편 15장에 다음과 같은 공자와 증삼의 대화가 나온다.


子曰參乎! 吾道一以貫之.” 曾子曰.” 子出.

자왈삼호! 오도일이관지.” 증자왈.” 자출.

 

門人問曰何謂也?” 曾子曰夫子之道, 忠恕而已矣.”

문인문왈하위야?” 증자왈부자지도, 충서이이의.”


뜻을 풀이하면 이렇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증삼), 나의 도는 하나로 꿰뚫는다.”

증자가 말했다. “맞습니다.”

공자께서 나가시자 문인들이 물었다. “무엇을 말씀하신 겁니까?”

증자가 말했다.

선생님의 도는 충()(성심성의를 다하는 마음)과 서()(남을 배려하는 마음)일 뿐이구나!”

(논어, 김원중 옮김, 글항아리, 87)

 

오늘 말씀에서 배울 수 있는 승리의 비결은 논어에서 나오는 충과 서로 풀이할 수 있을 것 같다. 종합해 보면, 승리의 비결은 세 가지이다. 1)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 2) 성심성의를 다하는 마음, 3) 남을 배려하는 마음. 이 중에서 1번은 상수이고, 2번과 3번은 변수이다. 1번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 상수이고, 2번과 3번은 우리가 하는 일이라 변수이다.

 

맛사 또는 므리바 물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광야의 이스라엘은 이 부족했다. ,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는 것을 성심성의 다해믿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계속 시험했고, 모세와 더불어 다투었다.

 

그러나,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높이 드는 행위를 통해서 전쟁에 임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을 보이도록 도왔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여호와의 깃발이 높이 올려 있는 동안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것은 상수이다. 이 상수를 성심성의를 다해믿는 것이 이다. 우리에게는 이 있는가? 그야말로 충심을 다해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우리가 우리 삶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종류의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는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성심성의를 다해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목에도 걸고, 귀에도 걸고, 집에도 걸고, 차에도 걸고 다니는 이유는 장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기 위함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팡이이다. 갈보리 산 위에 십자가가 세워진 이상,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들은 을 다해, ‘성심성의를 다해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또 한 가지, 승리를 위해 중요한 변수는 ()’이다. 이것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다. 여호수아는 모세를 배려했다. 나이 든 모세가 나가서 싸우는 것보다 한 창 젊은 여호수아가 나가서 싸우는 게 맞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배려한다. 여호수아를 혼자 전장에 보내고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모세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가지고 전쟁터가 잘 보이는 산에 올라 그것을 높이 들고 기도하며 여호수아와 함께 했다.

 

아론과 훌은 모세를 배려했다. 모세가 아론과 훌에게 돌을 가져오라고 명령한 것이 아니다. 아론과 훌이 모세의 옆에서 딴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아론과 훌은 모세 곁에서 모세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고,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모세의 손이 올라가 있으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모세의 손이 내려가면 이스라엘이 지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늙은 모세의 손이 얼마나 오랫동안 올라갈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아론과 훌은 지혜를 발휘한다. ‘하나님의 지팡이를 든 모세의 손이 계속 높이 들려 있게끔 하기 위하여 그들은 돌을 가져다 모세를 앉히고, 모세의 손을 양쪽에서 붙든다.

 

사실, 우리가 ()’까지는 잘 할 수 있다. 그런데, ‘()’까지는 잘 못한다. 자기를 위해 기도하고, 자신을 위해 누군가 기도해 주기를 바라면서도, 정작 자기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의 삶을 돌보는 데는 어려워하고 힘들어 한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삶을 돌아보자. 삶의 여러 가지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우리들은 언제나 말씀 안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 승리를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그 세 가지 중, 하나는 상수이고, 다른 두 개는 변수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것은 상수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수도 우리가 충으로, ‘성심성의를 다해믿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믿지 않으면 입에서 불평과 불만만 나오고, 결국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인해 오는 복을 누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상수가 상수되게 하는 것은 결국 이다. 우리가 성심성의를 다해 그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가장 잘 못하기 때문에 신경을 더 써야 하는 것이 바로 ()’이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그것이다. 나는 이 시대에 우리의 인생을 승리로 이끄는 데 있어 가장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이것을 너무도 자주 간과해 버리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아론과 훌이 되어 주어야 한다. 특별히 공동체(가정 공동체, 교회공동체)는 서로가 서로에게 아론과 훌이 되어주지 못하면 세워져 가기 힘들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는 마음과 남을 배려하는 마음은 반드시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1) 여호와 닛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2) 성심성의를 다해 믿읍시다.

3) 서로가 서로에게 아론과 훌이 되어 줍시다.

4) 승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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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3. 20. 02:05

홍해를 건너라

(출애굽기 14:10-25)

 

Perhaps Love

(John Denver)


Perhaps love is like a resting place, a shelter from the storm.

아마도 사랑은 쉼터와 같은 거에요. 폭풍으로부터 지켜주는 은신처 같은 것.

 

It exists to give you comfort. It is there to keep you warm.

그것은 당신에게 평안을 주기 위해 존재해요. 당신을 따뜻하게 해주려고 있는 거죠.

 

And in those times of trouble when you are most alone,

그리고 당신이 가장 외로울 때, 그 힘든 시간들 속에서,

 

the memory of love will bring you home.

사랑의 기억은 당신을 집으로 데려올거에요(편안하게 해준다는 의미)

 

Perhaps love is like a window, perhaps an open door.

아마도 사랑은 창문과 같아요, 아마도 열린 문과도 같죠.

 

It invites you to come closer. It wants to show you more.

당신을 더 가까이 오도록 초대해요. 당신에 더 많은 것을 보여주길 원하죠.

 

And even if you lose yourself and don't know what to do,

그리고 당신이 헤매고 무엇을 할지 모른다고 할 지라도,

 

the memory of love will see you through.

사랑의 기억은 당신을 도와줄거에요.

(어느 웹사이트에서 퍼옴)


* 'Perhaps Love'를 부른 존 덴버는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가까운 관광명소 '몬터레이(Monterey)'에서 경비행기를 타다가 추락해서 죽었다. 예전 같으면 그가 죽은 장소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겠으나, 이곳으로 이사오고 나니 그의 죽음이 특별해 보였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출애굽 사건’, ‘홍해를 건넌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알게 된 중요한 사건이다. 그들은 애굽에서 430년간 살면서 집(home, 고향)을 잃었고, 자기 자신을 잃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고단했다. 삶이 고단한 사람일수록 히스테리가 많고, 울부짖음이 많다. 그들의 애굽의 삶은 참으로 어려웠다.

 

사람은 충분한 안식을 누리지 못하면 고단해지고, 포악해진다. 인간은 충분한 안식을 누리지 못하면 악에 노출될 위험성이 매우 커진다. 섬머타임에 대한 연구 중에, 한 시간 잠을 덜 잔 것 때문에 판사들이나 의사들이 판결의 형량을 더 구형하거나 수술할 때 실수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에 대한 연구가 있다. 충분한 안식을 취하지 못하면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악한 일에 연루될 가능성이 크다.

 

반대의 연구 결과도 있다. 삶에 너무 긴장이 없으면 인간은 악에 노출될 가능성이 커진다. 이런 명언도 있다. “한가한 머리를 악마의 일터”. 적당한 스트레스를 가지고 사는 것이 오히려 건강에 좋다고 한다. 실제로, 바닷가에서 잡은 고기를 도시로 옮길 때 싱싱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 바다고기의 천적을 수조에 함께 집어 넣고 올 때 생선들이 최고의 싱싱함을 유지한다는 말도 있다.

 

인간은 사랑(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하고 기억하느냐에 따라서 삶의 질이 달라진다. 우리(인간생명)는 살면서 절대자, 하나님, 절대 사랑을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경험하게 되는데, 그때의 경험이 평생 떠나지 않는다. 이스라엘에게 출애굽 경험, 홍해를 건넌 경험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 경험이었다.

 

그들은 오랜 세월 애굽에서 살면서 외로웠다. 그리고 그들은 점점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몰랐다. 오늘 말씀은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열 가지 재앙의 기적을 통해, 모세를 따라 나서긴 했는데, 뒤에서 애굽 군대가 따라 오자 이스라엘은 두려워 떤다. 그들은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러면서 모세에게 원망한다. “우리를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11-12).

 

어떻게 이런 생각과 말을 할 수 있나, 성경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나무라기는 쉽지만, 이것은 사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삶이 힘들고 어려워지면, 또는 믿음이 약해지면 다른 사람의 생각과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생각과 이야기이다.

 

우리는 안식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토록 안식을 중요하게 생각하신 것일까? 십계명 중에, 4계명에 들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안식을 중요하게 생각하신다. 안식이 도대체 무엇인가?

 

안식이란 단순히 쉬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다. 인간생명에게 본질은 하나님과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안식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것, 하나님의 품에 안 기는 것,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을 말한다. , 안식이란 믿음의 회복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430년 간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에게 가장 부족했던 것은 안식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부족했다. 다른 말로, 그들은 하나님과의 사랑에서 멀어졌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믿음이 약해졌다. 믿음이 약해진,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전형적인 말을 오늘 이스라엘은 모세와 하나님 앞에서 하고 있다.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안식이 부족했던 이스라엘, 하나님과 사랑을 깊이 나누지 못한 이스라엘, 믿음이 없는 이스라엘에게 모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를 가르친다.

 

우선, 하나님과 함께 있는 한,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 귀에 쟁쟁히 들리는 선포가 되기를 바란다.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건, 두려워하지 말라.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움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반복하여 이런 말을 한다.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13, 14).

 

사실, ‘가만히 있는 것은 우리가 제일 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나름대로 기도신학을 가지고 있는데, 내가 깨달은 기도신학은 가만히 있는 것이다. , 기도는 가만히 있는 것이다. 어렵고 힘든 일, 속상한 일, 억울한 일, 힘에 부치는 일이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인가 하기를 그치고, 오히려 가만히 있어야 한다. “나는 가만히 있으려고 기도한다.”

 

생각해 보라. 뒤에서 애굽 군대가 쫓아온다. 이스라엘이 자기 손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쫓아오는 군대와 맞서 싸웠다면 그들은 홍해 앞에서 전멸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애굽 군대와 맞서 싸우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너는 것을 원하셨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길을 내어 주신다. 이스라엘은 막혀 있는 홍해 바다를 보면서 두려워 떨었을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홍해를 가르셨다.

 

홍해를 가른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할렐루야!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가르신 홍해를 건너면 되는 것이다. “When you are most alone. The memory of love will bring you home. And even if you lose yourself. And don't know what to. The memory of love will see you through” 힘들고 외로울 때,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을 기억하시라. 자기 자신을 잃은 것 같고,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할 때, 하나님을 기억하시라.

 

그리고, 사랑하는 여러분! 홍해를 건너시라.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가만히 계시라. 충분한 안식을 취하시라. , 하나님과 깊은 사랑을 나누시라. 믿음에 믿음을 더하시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열어 주신 홍해를 건너시라. 여러분 앞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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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3. 13. 15:41

믿음의 사람 갈렙과 옷니엘

(여호수아 15:13-19)

 

1. 오늘 말씀은 갈렙의 헤브론 정복 활동을 기록하고 있다. 갈렙의 이야기는 크게 세군 데 나온다.


1) 가데스 바네아 (민수기 14) – 각 지파별로 한 명씩 선출하여 하나님이 예비하신 가나안 땅에 미리 가서 정탐하는 임무를 행한 사건

 

2) 정복전쟁 1 ( 14) – 땅을 분배할 때 여호수아에게 가데스 바네아 사건과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갈렙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행해 달라는 요청 –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12) – 이것은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성취이고, 다른 이들이 차지하기 힘든 땅, 아낙 자손이 자치하고 있던 곳을 자신이 정복해서 취하겠다는 믿음의 결단이었다.

 

3) 그리고 오늘 말씀이다. ( 15)

 

2. 갈렙은 헤브론의 세 장수 (세새, 아히만, 달래)를 무찌르고 드빌을 정복하려고 한다. 드빌은 헤브론의 남쪽에 있던 성읍이었다. 갈렙은 이미 나이가 85세가 된 노익장이었다. 갈렙은 헤브론을 자치하느라 이미 기력을 다 소진한 듯싶다. 그래서 갈렙은 자기 대신에 드빌을 정복하는 자에게 자신의 딸 악사를 주겠다고 공언한다.

 

3. 이와 비슷한 대표적인 예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에게서 볼 수 있다. 이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해 살아가면서 주변의 여러 나라 때문에 많은 고통을 당하는데, 그 중에서 블레셋이라는 나라가 이스라엘을 가장 심하게 괴롭혔다. 그들의 괴롭힘이 오죽 심했으면 이스라엘이 사무엘에게 우리도 블레셋처럼(또는 다른 이방 나라처럼) 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탄원했겠는가. 그래서 뽑힌 왕이 사울이었다. , 사울 왕은 블레셋의 핍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고자 뽑힌 왕이었다.

 

4. 그런데 그 임무가 순탄치 않았다. 특별히 어느 날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거인 장수 골리앗의 출현으로 인해 온 이스라엘이 진멸 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울 왕은 방을 내고, 골리앗을 죽이는 자에게 세 가지를 약속한다.


1) 많은 재물을 주겠다

2) 사위를 삼겠다

3) 세금을 면제해 주겠다

 

4. 이 사건을 통해 혜성처럼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이 다윗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쟁터에 나가 있던 형들에게 아버지(이세)의 심부름을 갔다가 이스라엘을 능멸하는 골리앗을 보고 물매 돌 하나로 그를 물리쳐 순식간에 국가적 영웅이 된 인물이다.

 

5. 갈렙의 입장에서 다윗과 같이 자신의 임무를 대신 수행해준 인물이 오늘 말씀에 등장한다. 그는 갈렙의 조카(동생의 아들) 옷니엘이었다. 옷니엘은 갈렙을 대신하여 드빌을 정복한다. 그것으로 헤브론 정복을 마무리 짓게 된다.

 

6. 오늘 말씀 15-19절은 컴퓨터의 Copy & Paste 기능을 사용하여 그렇게 한 듯이, 사사기 1:11-15에서 그대로 반복된다. 여호수아의 말씀은 사사기와 함께 보아야 하고, 사사기는 룻기와 함께 보아야 한다. 그래야 그 당시 이스라엘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고, ‘춘추전국시대와 같이 혼란한 그 시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돌보시고 이끌어 가시는지 알 수 있다.

 

7. 여호수아서에 등장하는 갈렙과 사사기에 다시 등장하게 되는 옷니엘에게는 공통점이 많다. 갈렙도 믿음의 사람이고, 옷니엘도 믿음의 사람인데, 이 두 사람에게 공통점이 많다는 것은 믿음의 사람에게는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이 두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우리 자신이 얼마큼이나 믿음의 사람인가, 우리가 믿음의 사람으로 제대로 성장하고 있는가를 살펴 볼 수 있는 좋은 표본이 된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크게 다섯 가지이다.

 

8. 첫째,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심(선택)을 받는다.


1) 갈렙: 민수기 14장의 가데스 바네아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갈렙은 정탐꾼으로 부르심(선택)을 받는다.

 

2) 옷니엘: 사사기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옷니엘은 사사로 부르심(선택)을 받는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3:9)

 

3) 우리: 부르심을 받았는가? ‘소명은 그리스도인(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데 첫번째 단추와 같다. 소명의 확신만큼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게 된다. 사무엘은 엘리의 문하생으로 있을 때 아직도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잘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엘리 제사장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무엘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스라엘을 어떻게 이끄는지, 우리는 사무엘상의 말씀을 통해서 확인하게 된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 된다.

 

9. 두번째,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한다.


1) 갈렙: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여 가나안 땅을 정탐했고, 정탐의 임무를 하나님의 뜻대로 잘 수행하였다. 여호수아서 14장에서 갈렙은 자신이 하나님께 어떻게 순종했는지 이렇게 간증한다.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보고하였고”(14:7),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다”(14:8). 그리고 그는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 정복전쟁에 참여한다.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2) 옷니엘: 사사기 말씀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옷니엘을 이야기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 3:10). 옷니엘은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 순종하여 나가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 싸워 이긴다.

 

3) 우리: 주님이 부르실 때, ‘아멘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역사는 주님의 부르심에 아멘한 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10. 셋째, 그들은 문제 해결자였다. (문제를 만드는 사람(troublemaker)가 아니었다.)


1) 갈렙: 여호수아서 14장에서 갈렙은 여호수아에게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라고 요청하는데, 그것은 내 땅 내놔!’라는 탐욕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이들이 정복하기 힘들어 하는, 즉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어하는 것을 자신이 해결하겠다는 신앙적 결단이었다.

 

2) 옷니엘: 옷니엘은 갈렙이 힘에 부쳐 해결하기 힘든 일, 드빌을 정복하는 일을 해결했다. 사사기에 보면, 옷니엘은 사사로 부르심을 받고 순종하여, 이스라엘이 해결하기 힘든 일, 메소보다미아 구산 리사다임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냈다.

 

3)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이유는 세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문제(problem)’를 해결하라고 부르신다. 그 문제가 구원(하나님의 은혜)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4) 밀알봉사: 장애를 가진 사람과 그들의 가족들을 돌보는 일에 부르심을 받은 사역자가 있다. 사람들은 보통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 자체가 문제(problem)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장애를 고쳐보려고 의학기술의 발달을 기대한다. 그러나, 정말 문제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이들을 바라보는 비장애인들의 태도와 시각이다. 어떠한 장애가 없는 사람들이 다수이기 때문에 어떠한 장애를 가진 소수의 사람들을 장애인이라고 보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생각이다. 정말 장애인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을 자신과 다르다고 무시하고 깔보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보통 장애인 사역을 하는 분들의 사역은 그들을 돌보는 일도 하지만, 무엇보다 보통 사람들의 시각을 바꾸는 사역이 훨씬 더 중요하고 힘든 사역이다.

 

5) 한국의 정치 상황을 통한 묵상 대통령 탄핵: 대통령은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인가, 문제를 만드는 사람인가? 우리가 대통령을 뽑는 이유는 그 사람이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를 잘 해결해 줄 거라는 기대 때문이다.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인용한 판결문을 보면, 헌법을 수호하며 사회의 문제(정경유착, 사익취득, 빈부격차)를 바로 잡아야 할 위치에 있는 대통령이 오히려 헌법을 어기며(지킬 의지 없이) 문제를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판시하고 있다.


6) 우리도 인생을 살며, 똑 같은 실수를 범할 수 있다. 현재 탄핵된 대통령에게 가장 자주, 크게 지적되었던 문제가 불통이었다. 자기 세계에 갇혀 있으면 안된다. 자기 자신을 자주 깨야 한다.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 인생을 행복하지 못하게 하고, 공동체(가정, 교회)를 힘들게 하고, 악이 고개를 들게 하는 문제들을 면밀히 관찰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7)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제대로 잘 하고 있는 것인지, 늘 걱정한다. 내가 목회를 잘 하고 있는 것일까? 복음은 제대로 전하고 있는 것일까? 설교는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나는 공부를 손에서 놓치 못한다. 공부는 단순히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자기 성찰이고 현자와의 대화이다.

 

8) 애플의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한 말 중에 가장 유명한 말은 이것이다. “Stay hungry”.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것을 다 잘하고 있다고 교만하지 말라는 말이다. 늘 부족한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주변과의 소통을 통해 배고픈(부족한) 자기 자신을 채워 나가라는 뜻이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사랑으로 보듬어 주시고, 꾸짖어 주시라.)

 

9) 믿음의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다.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늘 겸손함을 잃지 말고, 소통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11. 넷째,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다.


1) 갈렙: 그는 장수의 복을 받았다. 그리고 약속대로 땅을 받았다.

 

2) 옷니엘: 그는 약속대로 갈렙의 딸 악사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리고 유다의 남방 네겝 땅과 그곳에 있는 윗샘물과 아랫샘물을 선물로 받았다.

 

3) 우리: 우리는 어떠한 복을 받았는가? 받은 복을 세어보라.

 

12. 마지막 다섯 번째로, 그들은 복을 베푸는 자였다. 그들은 받기만 한 것이 아니라 베풀었다. 다른 말로 해서, 그들은 베풀 복이 있었다. ‘복 있는 사람이란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도 있지만, 다른 이에게 베풀 복이 충만한 사람이라는 뜻이 더 강하다.

 

1) 갈렙: 딸 악사가 옷니엘에게 시집가면서 아빠인 갈렙에게 요청한다. “복을 주소서!” 복이란 생명을 살리고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 갈렙은 자신의 딸과 사위 옷니엘에게 밭과 샘물을 주어 그들의 생명()을 풍성하게 한다.

 

2) 옷니엘: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이방 나라를 물리치고, 40년 동안 이스라엘에 평화를 가져다 준다. 옷니엘은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을 풍성하게 한다.

 

3) 우리: “덕불고 필유린이라는 한자성어가 있다. LA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고사성어와 신앙이라는 글을 연재한 적이 있다. (LA에서 유명하다.) 내가 참 좋아하는 한자성어이다.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는 뜻이다. 복을 베푸는 자는 결코 외롭지 않다. 주변에 사람들이 끊이질 않기 때문이다.

 

12. 우리는 믿음의 사람인가?

1) 하나님께 부르심(선택)을 받았는가

2)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있는가

3)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가

4) 복을 받았는가

5) 복을 베풀고 있는가

 

13. 날마다 묵상하며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는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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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3. 9. 06:51

아그네스의 기도

(벧전 5:7 / 4:6-7)

 

지난 수요일, 재의 수요일 예배를 시작으로 우리는 사순절에 들어섰다. 재의 수요일 예배를 통해 우리는 너희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사순절 동안 세 가지에 힘쓰기로 했다. 그것은 기도와 절제와 선한 일(사랑의 일)이다.

 

사순절 동안 우리는 왜 이 세 가지 일에 힘써야 하는가? 오늘은 우리가 힘써야 할 세 가지 일 중, 기도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제목을 아그네스의 기도라고 붙인 것은 미학적인 의미 때문이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알아보려고 하는 핵심 내용은 기도란 무엇인가?’이다.

 

아그네스의 기도라는 제목을 듣고 기도하는 아그네스라는 노래를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노래의 가사 중 이런 내용이 있다. “어차피 인생은 바람인 걸 / 누구나 날리는 꽃잎인 걸이 노래의 가사도 너희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는 말씀과 의미적인 면에서는 다르지 않다. 그만큼 누구나 인간은 인생을 덧없음으로 인식한다는 뜻이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김세화이다. 또다른 곡, ‘야생화’ – ‘난 한적한 들에 핀 꽃,… 나를 돌보는 사람 없지만 나 웃으며 피었다네, 음율의 쇼팽의 야상곡 같다)

 

어느 기사에서 매력적인 사람이 갖춘 몇 가지 요소들을 본 적이 있다. 6가지 정도를 기억하는데, ‘(내면의 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겸손, 따뜻함, 너그러움, 다정함, 그리고 침착함이 그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매력적인 신앙인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매력적인 신앙인은 어떠한 요소들을 갖추고 있을까? 단연 기도의 능력을 갖춘 자가 매력적인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기도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최근 미국에서 ‘War Room’이라는 영화가 상영된 적이 있다. 종교 영화임에도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극장에서 관람한 관계로 적지 않은 수입을 올린 영화이다. 조지아에서 목회할 때, ‘문화의 밤이라고, 함께 모여 영화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국제시장볼 때 모두 눈물을 훔치며 본 기억이 있다. ‘War Room’을 볼 때도 많이 은혜 받고 도전 받았다. 예술적인 측면에서는 별로 큰 점수를 못 받은 영화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기도에 대한 많은 영감과 도전을 준 영화이다.

 

최근 작성된 시간 사용에 대한 통계를 보니, 한국 사람들이 어떻게 시간을 쓰고 있는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한국인은 잠을 보통 8시간 잔다고 한다. 밥을 2시간 먹고, 노동을 4-5시간 한다고 한다. 그리고 여가시간은 5시간이고, 남자는 가사노동을 39분하고, 여자는 3시간 25분 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중에서 눈에 띄는 항목이 있었다. 독서에 관한 것이었다. 한국인은 보통 하루에 얼마큼 독서를 하는지 아는가? 평균 6분이다. 작년 통계에 의하면, 한국인은 가정 당 일년 평균 1권의 책도 구입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어떤 나라는 일년에 17 패러그래프(문단) 읽는 나라도 있다. 여러분은?)

 

나는 매력적인 그리스도인인가?’ ‘나는 얼마나 기도생활을 하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자. 기도를 하다 보면, 기도의 양도 중요한 것 같다. 어떤 통계를 보니, 미국 목회자들은 하루 평균 20분 정도 기도하는데 반해, 한국목회자들은 하루 평균 1시간 정도 기도를 한다. 그리고 2012년 한국 기독교인의 평균 기도시간은 24분으로 밝혀졌다. 물론 이것은 통계이기 때문에, 실제와 다를 수 있다. 더 많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덜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애제자 셋을 데리시고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기도하실 때에 몇 시간을 기도하신 줄 아는가? 그 이야기를 전하는 복음서에 보면 세 제자들과 따로 떨어져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와서 그들이 기도하지 않고 졸고 있는 것을 보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14:37-38).


예수님은 이렇게 세 번 제자들에게 오신다. 그것을 계산해 보면,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3시간 기도하신 것 같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최소 기도 시간은 1시간이신 것 같다. 물론 매일 3시간 내지 1시간씩 기도하면 좋지만, 적어도, 중요한 일을 앞두고 그 정도 기도하는 것은 신앙의 양심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러나, 무조건 기도 시간을 채우려고 앉아 있는 것은 참으로 무의미하다. 의미를 모르면 지루한 법이다. 기도가 무엇인지, 왜 기도가 중요한 것인지, 알고 나면 기도하지 말라고 해도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기도란 무엇인가?

 

성경에 나오는 기도에 관한 구절을 모두 찾은 뒤, 그 구절에서 말하는 기도의 의미를 간추려 보면, 다음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기도는 믿음이다. 이것은 매력적인 사람의 요소 중 내면의 힘과 일맥상통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11:24). 이 말씀에 보면, ‘믿으라고 한다. 믿음은 내면의 힘이다. 어떠한 신념도 없는 사람만큼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기도는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넘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과, 우리를 위해 하고 계신 일,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실 일을 믿는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행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 없이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아니라, 이방인의 기도일 뿐이다.

 

둘째, 기도는 간구이다. 기도는 겸손한 마음이다.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7:7-8). 주께서 말씀하신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이것은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다. 실존의 문제이다. 우리의 필요를,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주시길 주님께 왜 간구하지 않는가? 다른 사람에게 구하면 구걸이지만, 아버지께 구하면 사랑이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다른 사람인가, 아버지인가?

 

셋째, 기도는 감사이다. 기도는 따뜻한 마음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기도는 항상 기뻐하는 마음,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간다. 내 삶이 기쁘고, 감사가 넘치는 삶인지 아닌지 아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기도생활을 보면 안다. 한탄만 하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께 기도하고 있는가?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매력적이듯이, 기쁨과 감사 가운데 기도하는 자가 매력적인 신앙인이다.

 

넷째, 기도는 용서이다. 기도는 너그러운 마음, 다정한 마음이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어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11:25). /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2).

 

기도 가운데 일어나는 용서의 역사는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용서에는 두 가지 용서가 있다. ‘구하는 용서와 해주는 용서가 그것이다. 우리는 대개 기도하면서 용서를 구한다. ‘주님, 잘못했어요. 죄송합니다.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기도할 때 우리는 주님께만 죄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 누군가 나 때문에 마음이 아픈 사람이 있다면, 기도하며 바로 그 사람에게도 용서를 구한다.

 

또한, 기도하며 나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해 준다. 대개 사람들은 이것을 잘하지 못한다. 자기가 한 잘못은 용서해 주기를 바라면서, 남이 자기에게 잘못한 일은 절대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주님, 저에게 나쁜 짓을 한 그 죽일 놈을 벌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지, ‘주님, 저에게 바쁜 짓을 한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매일 외우는 주기도문에서 보듯이, 주님이 원하시는 용서는 우리가 하기 더 어려운 용서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했듯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지 못하면서, 주님께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뻔뻔한 일이다.

 

다섯째, 기도는 책임이다. 기도는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는 것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라”(삼상 12:23). 이것은 사무엘이 선지자와 사사의 직위에서 물러나면서(즉 은퇴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말이다. 성경 등장하는 믿음의 선조들은 모두 사무엘만큼 책임감이 투철했다. 책임감 있는 지도자는 기도한다. 책임감 있는 신앙인은 사명(교회를 위해서 세상을 향해서)을 위해서 기도한다. 책임감 있는 부모는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한다. 자기 인생에 책임감 있는 사람은 자기의 인생을 위해서 기도한다. 기도는 책임감의 지표다.

 

나는 목회자 자녀이고 나 자신이 목회자라 세상적인 기준에서 보면 가난한 자이고,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것은 신앙의 유산 밖에는 없지만, 인생이 힘들 때 힘이 되는 것은 언제든지 나를 위해 기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시던 부모님의 책임감이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빨간 밍크 담요 깔고 밤새껏 기도하시던 엄마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제 엄마는 너무 늙으셔서 젊으실 때 하던 대로 그렇게 기도하지 못하시지만, 아직 비교적 젊으신 장모님은 요즘도 하루도 거르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무슨 일 있을 때는 금식기도원 가서 몇 일을 금식하시며 기도하신다.

 

기도는 종교행사나 자기 탐욕의 수단이 아니다. 기도를 종교행사나 자기 탐욕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자들은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해도 소용 없다. 그런 자가 기도하면 뭐하는가, 기도하고 나서도 탐욕의 눈길이 치솟는데.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니다. 기도는 삶 속에서 매순간 하나님께 의지하고 삶을 맡기는 믿음이고, 주님만 바라보는 순결이고, 주 안에서 누리는 감사이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러한 충고를 한 적이 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에게서 돌아서라!”(딤후 3:5). 이 시간, 나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 드리고 싶다. “기도의 모양은 있으나, 기도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에게서 돌아서십시오!”

 

초대교회 교부였던 암브로시우스의 기록에 보면, ‘아그네스라 불리는 처녀가 있었다. 291,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칙령을 내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다. 그 시대를 살던 아름다운 아그네스는 많은 남성들로부터 청혼을 받았다. 그러나, 아그네스는 하나님께 동정을 지키기로 서원했다. 아그네스를 사모하던 많은 남성들 중, 로마제독 셈프로니우스는 아그네스에게 사랑을 거절 당하자 앙갚음을 하기 위해 아그네스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폭로하고 그를 처형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처녀를 처형하면 안 되는 법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아그네스를 발가벗겨 매음굴로 보내 버린다. 아그네스는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데, 머리카락이 자라서 벗겨진 몸을 가려주고, 그녀에게 손대려고 하는 자의 눈이 머는 일이 발생했다. 그 후, 그녀를 화형에 처하려고 했으나 장작에 불이 붙지 않고, 불 속에 던졌으나 불꽃이 양쪽으로 갈라져 그의 몸이 상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목이 베어 순교를 당했다고 한다.

 

나에게는 기도에 대하여 이러한 모토가 있다. “하나님 앞에서 울고, 사람 앞에서는 웃자.” 속상한 일, 억울한 일, 힘든 일이 있거든, 모두 주님께 가지고 와서, 그 앞에서 울면서 기도하라. 그리고 사람 앞에서는 웃으라. 반대로 하면 안 된다. 사람 앞에서 속상한 일, 억울한 일, 힘든 일을 토로하면 원수만 된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토로하면 위로를 받는다.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무엇보다 기도의 능력이 회복되었으면 좋겠다. “기도의 모양은 있으나, 기도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에게서 돌아서십시오.” 그리고, 기도의 능력을 믿고, 기도의 능력을 회복하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4:6-7).

 

 

기도

주님, 이 시간 결단합니다. 기도의 모양은 있으나, 기도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에게서 돌아서서, 기도의 능력을 믿고 주님께 기도하는 신실한, 매력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겠나이다. 기도는 믿음이고, 간구이고, 감사이고, 용서이고, 책임인 줄로 믿사오니, 기도의 능력을 믿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를 만나 주시고, 우리의 모든 간구에 응답해 주옵소서. 우리에게 기도의 본을 보이시고,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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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3. 3. 02:34

재의 겸손

(창세기 3:19, 시편 49:11)

 

우리의 생명은 기대는 데가 많다. 그렇다 보니, 기대고 있는 것이 맑으면 우리도 맑고, 흐리면 우리도 흐리게 된다. 직장인은 직장에 기대고 있는데, 직장이 잘 되면 좋은데, 직장이 잘 안 되면 힘들다. 부모는 자식에게 기대고 있는데, 자식이 잘 되면 좋고, 자식이 힘들면 참 마음이 안 좋다. 자식들은 부모가 잘 되면 좋은데, 힘들면 덩달아 힘들다. 한마디로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라, 어딘가에 기대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이다.

 

오늘 재의 수요일 예배를 시작으로 들어서게 되는 사순절은 무엇보다 인간 자신의 존재를 마음 속 깊이 깨닫는 절기이다. 예전에 애틀란타에서 신학교를 다닐 때 스탠리 하우어워즈의 책 'Dispatches from the Front'를 들여다 본 적이 있다. 내용은 잘 기억 안 나지만, 책 제목은 아직까지도 머리 속에 큰 반향으로 남아 있다. 'The front'는 전장의 최전선을 말한다. 그 단어를 보면서 나의 위치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나는 신앙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장수가 아니었던가!

 

신앙의 최전선에서 전쟁같은 삶을 사는 것은 쉽지 않다. 매일의 삶이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긴장의 연속이고, 지혜와 인내 없이는 살아남기 힘든 영적 싸움이 목을 조여온다.

 

나는 늘 내가 최전선에 선 장수로서 잘 싸우고 있는 것인지 자기성찰하는 데 시간을 많이 보낸다. 성찰 중에 부족한 것이 발견되면 스스로 의기소침해지기도 하고 스스로를 쥐어 박기도 한다. 그러나 잘 싸우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교만하지 않고 겸손함을 잃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나는 사도 바울의 이 충고를 늘 묵상한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이다. 사순절이 되면 고민하게 된다. 어떻게 해야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인 싸움을 각자 삶의 자리에서 잘 수행해 낼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까? 그리고, 나 자신의 삶의 자리도 생각하게 된다.

 

매년 다시 돌아오는 식상한 사순절이 아닌, 인생 가운데 단 한 번 뿐인 사순절을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까? 나는 내 인생에 마흔 네 번째 사순절을 맞는 게 아니라, 처음 맞이하는 사순절이라는 생각을 가진다. 이러한 마음 가짐을 가지는 것부터 시작해야 우리에게 '도둑'처럼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며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는 창세기의 말씀과 "사람들이 땅을 차지하여 제 이름으로 등기를 해 두었어도 그들의 영원한 집, 그들이 영원히 머물 곳은 오직 무덤뿐이다!" (시편 49:11, 표준새번역)라는 시편의 말씀 앞에서, 숙연히, 겸손한 마음으로 다음의 세 가지에 힘쓰면 좋겠다.

 

첫째로, 기도에 힘쓰면 좋겠다. 기도야 말로 어딘가에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인간 존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겸손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기도를 어떠한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기도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에 기대는 겸손의 자세이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 기도하지 않아도, 나에게 무슨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기도하지 않고 밥 먹어도 소화 잘 된다. 그것은 기도가 필요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은혜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내가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에게 임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만 임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일차 목적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려는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의 노력과 상관 없이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일차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기도를 우리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일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8:26).

 

기도는 철저하게 겸손의 표현이어야 한다. 한 줌의 재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인간 존재, 어딘가에 기대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인간 존재는 결코 교만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자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깊이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 많이 한다는 것은 어떠한 능력이 많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더욱더 겸손하다는 것의 표현인 것이다. 기도는 능력의 깊이가 될 수 없다. 모든 능력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신앙의 깊이인데, 신앙의 깊이는 곧 겸손의 깊이이다.

 

둘째로, 절제에 힘쓰면 좋겠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절제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하나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인내)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5:22-23).

 

로마서 8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니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8:5-6). 고린도전서 9장에는 이런 말씀도 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5).

 

여기서 한 가지 경계해야 할 것은, ‘절제를 생각하면 단순히 도덕적인 일을 떠올리는 것에 그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순절에 절제하기를, 그저 술담배를 덜하고, 인터넷을 덜하고, 드라마 같은 거 안 보고, 밥 먹는 거 안 하는 것 정도를 생각한다. 이것은 절제를 매우 오해하고, 매우 소극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절제는 그런 것이 아니다. 위의 말씀에서 보듯이, 절제는 매우 적극적인 일이다. 절제는 생명에 대한 적극적인 갈망이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는 말씀처럼, 절제란 사망에 이르게 하는 육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버리고, 생명과 평안에 이르게 하는 영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체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빌립보서 4장에 있는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을 참 좋아한다.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여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4:8). 영어로 보면 더 쉽다. “brothers and sisters, whatever is true, whatever is noble, whatever is right, whatever is pure, whatever is lovely, whatever is admirable—if anything is excellent or praiseworthy—think about such things.”

 

절제는 뭔가를 안 하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이처럼 참된 생명, 참된 진리를 위해 적극적으로 뭔가는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사순절에 우리가 마지막으로 힘써야 할 선한 일(사랑의 행위)’로 이어진다.

 

성경과 기독교 전통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선한 행위를 통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에 의해 은혜로 임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이다. 이 말을 바꾸어서 말하면, 도덕적 인간이 구원 받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인간이 구원 받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선한 행위는 도덕적 인간이 되기 위한 인간적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응답인 것이다. 다음의 은혜 갚은 까치처럼:

 

한 선비가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으로 가는 길이었다. 산을 넘는 중에 유독 까치소리가 시끄러워 가보니 거대한 구렁이 한 마리가 새끼 까치들을 노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선비는 가지고 있던 활로 구렁이를 쏴 죽여 버린다. 이후 날이 저물지만 주막 하나 없는 첩첩 산중에서 어찌 밤을 보낼까 고민했는데 불빛을 발견하고 가니 왠 오두막이 하나 있었다. 젊은 아낙네가 지키고 있는 오두막에 선비는 하루 묵기로 한다. 하루 종일 걷느라 피곤해서 아낙이 차려준 밥을 먹고 선비는 잠에 든다. 근데 뭔가가 몸을 조이는게 아닌가? 눈을 뜨니 낮에 죽인 구렁이와 같은 거대한 구렁이가 자신을 칭칭 감고 있는데, ‘어찌 이러냐고 묻자 구렁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가 낮에 쏴 죽인 구렁이는 나의 서방님이다! 나는 너를 죽여 서방님의 원수를 갚을 것이다!”

 

꼼짝 없이 죽게 된 선비가 살려줄 것을 간청하자 구렁이는 날이 새기 전, 이 절의 종루의 종이 3번 울린다면 네놈을 살려주겠다고 한다. 점점 날은 밝아 오는데 종이 울릴 기미는 없고, 선비가 이젠 끝이라고 생각한 그때 종이 크게 올린다. 잠시 후 또 다시 크게 울리고, 마지막으로 한번 더 크게 종이 울린다. 약속은 약속이니 구렁이는 선비를 풀어주고 사라진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선비는 감사하며 종루로 올라가본다.

 

그런데, 종루 바닥에는 수십 마리의 까치들이 머리가 깨친 채로 처참하게 죽어 있었으며 종에는 까치들의 피가 흥건했는데 이는 선비가 구해준 까치 새끼의 부모가 동료들을 동원해 있는 힘껏 종을 머리로 들이받아 소리를 낸 것이었다. 선비는 까치들을 고이 묻어주고 다시 한양길에 오른다.

 

나는 개인적으로 시편의 이 말씀을 늘 마음에 두고 산다. "사람들이 땅을 차지하여 제 이름으로 등기를 해 두었어도 그들의 영원한 집, 그들이 영원히 머물 곳은 오직 무덤뿐이다!" (시편 49:11, 표준새번역) 이 땅 위에서 썩어지고 영원하지 못할 것을 소유하느라 몸과 마음을 쓴 들, 그것이 무슨 위로와 유익이 되겠는가. 어차피 티끌로 돌아가 흙과 더불어 영원히 살게 될 운명이니, 차라리 흙과 친해지는 연습을 해 두는 것이 위로와 유익이 될 것이다.

 

흙과 친해진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겸손해 진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사순절을 맞아, 사순절을 보내면서 하나님 앞에 티끌과 같이, 재와 같이, 흙과 같이 겸손하여서 기도와 절제와 선한 일에 힘쓴다면, 어느덧 눈 앞에 부활의 주님이 나를 구원하러 와 계실 거라 믿는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사순절 되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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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2. 27. 18:21

주님의 변모와 우리의 변모

(베드로후서 1:16-21)

 

오늘은 주님의 산상 변모 주일이다. 오늘로 주현절(세상에 그리스도께서 드러나신 것을 기억하는 절기)이 끝나고, 수요일에 있는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을 시작으로 우리는 사순절기에 들어선다.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팔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저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를 보면 우리가 어떠한 사람인지 안다.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주님의 산상 변모 사건은 마태, 마가, 누가의 공관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는 주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서, 그곳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난 것을 전한다. 그 이야기에 보면, 주님께서 세 명의 제자들 앞에서 변형되었는데,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인자 논쟁가운데서 벌어진 일이다. 사람들이 예수를 세례 요한이다, 엘리야다, 예레미야다, 하는 가운데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신다. 그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대답을 하여 칭찬을 받는다. 그러한 인자 논쟁, 예수가 누구냐?”라는 질문 가운데서 벌어진 사건이 바로 산상 변모 사건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정황은 산상 변모 사건이 일어나고 있을 그 때에, 산 아래에서는 다른 제자들이 누군가 데리고 온 어떤 사람의 간질병 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해 헤매고 있었다.

 

주님의 산상 변모 사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1) 예수님이 변형되셨다(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는 것과 2) 변형된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대화를 나누셨다는 것과 3) 그 광경을 본 제자들이 그곳에 초막 셋을 짓고 그냥 머물러 있기를 바랐다는 것과 4) 그러는 사이 갑자기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아라는 음성이 들렸다는 것과 5) 제자들이 두려워 떨고 있을 때 그들을 안심시키고 다시 산에서 내려와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예수가 누구냐?’라는 인자 논쟁에서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 예수는 그리스도다(메시아다)’라는 증언이 펼쳐진다. 그런데, 산상 변모 사건에서 보이는 예수의 모습과 이사야서에서 증거하는 메시야의 모습은 매우 대조적이다. 산상 변모 사건에서의 예수님은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옷에서 빛이 났지만, 이사야서에서의 메시아는 주 앞에서 자라나는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53:2)라고 전한다.

 

이사야서에서 전하는 메시야의 모습에 비하면, 산상 변모 사건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변화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므로, 산상 변모 사건에서의 예수는 어떠한 예수인지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이사야에서의 메시야는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이다. 그러나, 산상 변모 사건에서의 예수는 부활의 예수이다. 부활의 예수는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눈다. 모세는 율법을 의미하고, 엘리야는 예언을 의미한다.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본다.

 

부활의 예수의 모습을 목격했을 때 제자들은 그곳에 머물러 있기를 바랐다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그곳에 초막 셋을 짓고 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그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제자들을 데리고 다시 산을 내려와 일상으로 돌아오셨다.

 

산에서 내려와 마주한 그들의 일상은 녹록치 않았다. 간질병 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해 제자들은 쩔쩔 맸다.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시자, 간질병 들린 아이를 둔 아버지는 예수님께 와서 자신의 아들을 고쳐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면서 아픈 아이를 제자들에게 데려갔지만 소용 없었다고 하소연한다. 그 말을 들은 예수님은 겨자씨 믿음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른 장면으로 옮겨갈 필요가 있다. 그것은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이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령이 오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밤낮으로 예배하며 기도했다.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1:14). 이럴 때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깨닫아 알아야 한다. 자신도, 가정도, 교회 공동체도 모두 그렇다. 마음은 공부하고 싶은데 몸은 노는데 가 있으면 안된다. 가정도 부부가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야 자녀들도 잘 키우고, 가정에 복이 임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성도 한 명 한 명이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야 교회가 부흥되는 법이다.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합시다!)

 

그 전까지 우리가 본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두려움에 떨며 도망치는 비겁한 자들의 모습이었다. 다른 말로 해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더불어 같이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주님이 약속한 성령을 받은 뒤, 완전히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


예수의 죽음 앞에서 자신들도 죽을까봐 두려워 떨며 도망치고 숨던 제자들은, 성령 받은 뒤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사도행전 214절은 그 정황을 이렇게 증거한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참으로 놀라운 변화이다.

 

우리가 읽은 베드로후서의 증언을 보면, 제자들은 산상 변모 사건이 일어났을 때만해도 거기에서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깨닫지 못한 듯 하다. 그런데,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그 이전에 있었던 산상 변모 사건에서의 예수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깨달은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담대한 마음으로 성경의 예언을 전한다고 증거한다.

 

산상 변모 사건에서 일어난 주님의 변모는 이상한 사건이 아니라, 부활하실 주님을 미리 보여주신 하나님의 예언이었다. 예수님이 변모하여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신 것은 예수님께서 바로 율법의 완성이요 예언의 성취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함이었다.

 

구약의 증언에 따르면, 율법은 단순히 하나님의 법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을 말한다. 예수께서 율법의 완성이라는 뜻은 그 분이 바로 구원의 길이라는 뜻이다. 구약의 예언은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다. 예수께서 예언의 성취라는 뜻은 그가 바로 오실 메시아라는 뜻이다. 그것을 제자들은 산상 변모 사건에서 보았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확증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두려움 없이 증거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의 변모는 그가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그는 베드로의 고백대로, ‘그리스도(메시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제자들은 변모하신 예수님을 보았을 때 산에 그냥 머물러 살기를 바랐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데리고 할 일 많은 세상(일상)으로 내려오셨다.

 

그렇다면 예수가 누구인지 안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우리는 주님의 산상 변모 사건을 목격한 세 명의 제자들처럼 그냥 이곳에 머물며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려는세상에 무관심한 사람들인가? 그럴 수 없다. 그것은 부활의 주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니다.

 

주님은 그들을 산에서 할 일 많은 세상(일상)으로 데리고 내려가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약속하셨다.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괜찮으니, 그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임재,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세상에 알리라고, 사명을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믿게 된 모든 이들을 예언하는 자로 부르신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증거한다.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19). 성경의 예언은 점쟁이들이 하는 예언과 다르다. 사람들은 자신의 앞날이 궁금하여, 어떻게 하면 자신의 삶에 출세길이 열릴까 하고 점쟁이를 찾는다. 한국에서 점집이 가장 많은 곳은 충청도 산 골이 아니다. 한국에서 가장 부자가 많다고 하는 서울의 강남구, 서초구에 점집이 가장 많다.

 

성경의 예언은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미 성취하신 일을 말한다.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이 증거하는 더 확실한 예언이다. 그 예언은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다. 우리는 모두, 이 예언을 선포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는 그리스도인이다.

 

여러분, 변하고 싶지 않은가?(여러분, 변하고 싶죠?) 그래서 우리는 소소하게, 헤어스타일도 바꾸고, 예쁜 옷도 사고, 여행도 가고, 어떠한 일이든 변화를 구하며 한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에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순종할 때 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주님은 우리를 모두 예언자로 부르신다. 그 예언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미 성취하신 일이다. 그렇게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 초대교회 제자들의 삶은 그 이전의 삶과 너무도 대조적으로 드라마틱하게 변했다. 위에서 보았듯이, 그들은 죽음이 두려워 꽁꽁 숨어 있었는데, 그들은 더 이상 죽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그 예언을 전한다.

 

사도 베드로는 오늘 말씀에서 이렇게 증거한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21). 그러므로, 우리의 변모는 성령의 감동하심에서 온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모여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예배하며 기도했던 제자들에게 불같이 내려 주셨던 그 성령, 바로 그 성령을 받을 때 우리는 변모하여, ‘예언의 일을 감당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된다.

 

우리는 성령을 날마다 기다리는 자들이다. 우리는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의 예언을 전하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사랑을 이루셨는지,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 받은 우리들의 삶이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다운지를 세상에 증언하는, 우리는 모두 예언자들이다. (당신은 그리스도께 부르심을 받은 예언자입니다. 우리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성령 받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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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2. 23. 09:04

나는 걷는다

(창세기 5:21-24)

 

나는 다시 길을 떠났고, 조금 가다가 멈춰서 휴식을 취했다.

눈을 들어보니, 거북이 한 마리가 비탈길

위쪽에서 둥그런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안녕, 친구여. 미리 말해두지만,

난 너와 경주하지는 않을 거야.

- 베르나르 올리비에 <나는 걷는다> 중에서

 

오늘 말씀은 아담의 계보(족보)를 말하는 중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아담의 계보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그 특징을 파악하려면 창세기 4장의 내용을 언급해야 한다.

 

창세기 4장은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 얻은 그의 자녀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죄가 들어온 후, 아담, 즉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고단해졌는지 알 수 있다. 먹고 살기 위해, 인정 받기 위해 사람은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다.

 

고단한 삶을 살았는데 인정 받지 못하면 사람의 마음은 악해진다. 독일의 대 철학자 헤겔은 일찍이 이러한 삶의 모습을 인정투쟁이라고 명명했다. 헤겔은 인간들 사이의 모든 갈등이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인정 욕망을 충족시킴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확립한다고 봤다.

 

그런 측면에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보면, 가인은 인정투쟁의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 아벨을 죽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사람들 사이에 있는 인정투쟁이 매우 나쁜 것으로 인식될 수 있지만, 위르겐 하버마스의 제자이며 그의 뒤를 이어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이끌고 있는 악셀 호네트는 인정투쟁을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자 자기 긍정의 좋은 심리적 조건으로 본다.


가인과 아벨 사건 이후, 가인은 저주 받고 추방당해 떠돌이(나그네)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은 그의 인생에 새겨진 주홍글씨였다. 형별의 가혹함을 호소한 가인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셔서 누구든지 가인을 죽이는 사람은 일곱 배로 복수를 당할 것이다는 표식을 주신다. 그리고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게 된다.

 

창세기 416절 이하의 말씀은 가인이 놋 땅에서 꾸린 가정 이야기가 나온다. 가인은 결혼하여 애를 낳는데, 에녹이라 칭하고, 성을 쌓은 후 아들의 이름을 붙여 에녹 성이라 부른다. 가인의 아들 에녹은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에녹과 다른 인물이다. ‘에녹의 뜻은 시작하는 자, 봉헌된 자이다.

 

가인의 족보는 우울한 이야기로 끝난다. 가인의 6대손 라멕의 악하고 음란하며 잔인한 삶이 펼쳐진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4:23-24).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아담이 가인과 아벨을 떠나보낸 후 세번 째 자식을 낳는 이야기이다. 아담의 세 번째 아들의 이름은 이다. 셋째 아들이어서 이 아니다. 히브리어의 ‘Seth’를 우리 말로 옮긴 것이다. 그 이름의 뜻은 임명하다이다. 그리고 은 에노스를 낳는데, 에노스 때에 이르러 비로소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부른다.

 

5장에서 시작되는 아담의 계보에는 가인과 아벨의 이름이 빠져 있다. 이것이 5장에 등장하는 아담의 계보의 첫 번째 특징이다. 앞서 보았듯이, ‘은 하나님께서 주신 다른 씨인데, 아담의 계보는 아담에서 곧바로 으로 건너 뛴다. ‘다른 씨를 통해서 다른 세상을 열어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려는 것 같다.

 

그리고 아담의 계보의 또다른 특징은 일정한 패턴으로 계보가 소개된다는 것이다. 그 패턴을 이루는 동사가 세 개 있다. “낳았다.” “살았다.” 그리고 죽었다.”이다. 특히, “죽었더라는 말은 217절에서 아담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아담의 계보에서 이 패턴이 깨지는 부분이 있다. 그곳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에녹의 삶을 소개하는 부분이다. 낳고, 사는 부분까지는 같다. 그러나 죽었다는 부분이 다르다. 에녹에게는 죽었다는 표현 대신에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는 표현이 쓰인다.

 

우리는 흔히 성경에서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두 명을 말할 때, 에녹과 엘리야를 꼽는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증거하고 있는 곳은 해당 인물이 등장하는 성경이 아니라 신약성경의 히브리서이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11:5).

 

이것은 죽음에 대한 완곡한 표현인가? 아니면 실제로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우리가 만일 호사가들이라면 여기에 관심을 두겠지만, 우리는 믿는 자들이기에 우리의 관심은 다른 데 있어야 한다. 창세기 기자는 왜 에녹에게 죽었다는 표현 대신에 다른 표현을 써서 그의 마지막을 말하고 있는가?

 

아담의 계보 중, 에녹에 이르러 시선을 머물게 되는 표현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표현이다. 우리 말로는 동행이라고 옮겼지만, 영어 성경은 히브리어 할라크의 본 뜻을 그대로 옮겨, ‘Enoch walked with God’이라고 쓴다. 히브리어 할라크는 구약성경에서 무려 1,562번이나 나온다.

 

할라크는 기본적으로 걷다, 가다의 뜻을 갖고 있다. 그리고 할라크는 어떤 말과 함께 쓰이느냐 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다양하게 변하는 동사이다. 그런데, 특별히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표현은 아담의 계보가 나오기 전 이야기와 비교해서 읽어야 한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는 뜻이다. ‘함께 걷는다는 굉장히 시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함께 걷다는 굉장히 신앙적인 표현이다.

 

어린시절(학창시절)을 생각해 보면 참 많이 걸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는 말죽거리에 있는 언주초등학교(5학년 2학기 때 양재초등학교가 생겨서 그곳으로 집단 전학을 가서 양재초등학교를 1회로 졸었했다.)를 다녔는데, 그때는 차비로 오락을 하거나 떡볶이나 순대 같은 거 사 먹고 말죽거리에서 우면동 집까지 걸어갔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으니까 집까지 걸어가려면 족히 1시간 30분 정도는 걸어야 했다. 중고등학교 때에는 친구들과 강남역에서 놀다가 집까지 걸어갔다. 그렇게 수도 없이 걸어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힘들거나 시간이 길다고 느끼지 못했다.

 

목적이 같지 않거나, 마음이 맞지 않으면 함께 걸을 수 없다.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거니셨다는 말이 나온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오실 때를 표현하는 말로 할라크를 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오신다. 그런데, 창세기 3장과 4장의 이야기를 보면 오시는 하나님을 나가 맞이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없고, 모두들 자기들이 가고 싶은 데로 가는 이야기들만 나온다.

 

아담은 하나님이 오셨는데, 심지어 숨는다. 가인은 하나님이 오셨는데,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해서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온다. 그리고 가인은 하나님과 동행하기는커녕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서 산다. 그의 6대손 라멕은 아예 대놓고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고 악한 짓만 일삼는다.

 

그러는 중에,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다. 이것만큼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가 어디 있는가? ‘아담의 계보이후 나오는 이야기도 모두 사람들의 죄악이 얼마나 세상이 뿌리 깊게 퍼져나갔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노아 때에 가서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한의인이라고 소개된다.

 

실제로, ‘걷는 행위는 참으로 신비로운 것이다. 고속도로를 한 번 걸어본 적 있는가? 걸어가면 빠르게 지나가며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인다. 차 안은 안락하고 편리하지만 걸어서 가는 고속도로는 엄청난 소음 때문에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걸으면서 보는 세상과 무언가를 타고 빠르게 지나며 보는 세상은 완전히 다르다.

 

우리 아이들이 조금 더 크면 가장 해 보고 싶은 것이 아이들과 함께 스페인의 산티아고 길을 걷는 것이다. 서두에 소개했던 <나는 걷는다>의 기행문을 쓴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비행청소년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자는 목적으로 쇠이유(Seuil)’라는 단체를 설립하여, 그들과 함께 걷는 것을 통해 인생을 알아가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그 책에는 이런 말도 등장한다. “존재 자체가 일종의 행군 아니던가.”

 

위에서 나는 함께 걷는다는 말이 굉장히 시적이고 신앙적인 표현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몇 마디의 말로 정의 내리기 보다는 그냥 각자의 상상력에 맡겨 두는 게 훨씬 풍요로울 거라 생각한다. 다만 한 가지, 우리는 실제로 너무 걷지 않는다. 운동 삼아 약간 걸을 뿐, 어떠한 것을 하기 위하여, 어떠한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하여 걷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렇다 보니, 우리 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잘 깨닫지 못한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만약 여러분이 오늘 예배를 드리러 오기 위해서 30분이든 1시간이든 걸어서 왔다면, 바로 이 시간 이렇게 예배 드리며 하나님 만나는 시간이, 그리고 이 예배를 함께 드리는 지체들이 얼마나 소중하게 다가오겠는가!

 

하나님과 함께 걸으시라. ‘걷는다는 것이 주는 풍성한 의미 안에 머무시라. 하나님과 함께 걷는 자의 삶은 풍성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걷는 자의 삶은 죽음을 맛 볼 겨를이 없다. 하나님은 분명 에녹처럼 그를 데려가시기 때문이다. 천국은 어느 찬양에서처럼 구원 열차타고 가는 곳이 아니라, 주님과 동행해서, 즉 주님과 걸어서 가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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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2. 13. 17:13

가까운 말씀

(신명기 30:11-20)

 

내가 살던 조지아 컬럼버스 근처에는 미국의 제 39대 대통령, 지미 카터의 생가가 있다. 언젠가 주일학교 여름성경학교 프로그램의 하나로 아이들과 함께 그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거기에 가면 한 가지 생각 밖에 안 든다. “정말 개천에서 용났네.”

 

거기는 아직까지 시골이다. 지미 카터 생가를 가면 그의 삶에 대하여 여러 가지 장식과 스토리가 전시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의 학창시절에 관한 것이다.

 

우선, 교장은 학생들에게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서 많이 강조했다고 한다. 그 교장의 이름은 Julia Coleman인데, 그는 이런 말을 했단다. “Readers make Leaders.” 굉장히 훌륭한 표현이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지도자가 된다.’ 뭐 이 정도의 뜻이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학생들에게 한 말 중 지미 카터를감동시켰다는 말이 벽에 새겨져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었다. “Always do your best, someday one of you may grow up to become president.” ‘언제든지 최선을 다해라, 그러면 언젠가 너희 중 누군가는 자라서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도의 뜻이다.

 

나는 이 문장을 보는 순간 머리가했다. 내 일찍이 미국에 살면서 한국의 많은 문화가 얼마나 미국으로부터 수입된 것인가를 깨달았는데, ‘장래 희망: 대통령이라는 것까지수입된문화였는지를 몰랐다.

 

지미 카터 대통령의 어린 시절, 그네들의 장래 희망은대통령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한 정서가 한국 땅으로 건너왔고, 1948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한 이래로 대통령이 뽑혔고,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제일의 장래 희망은 그때부터대통령이 된 것이다.

 

미국에서는 그런 분위기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우리는 초등학생 시절 (1970, 1980년대) 꼭 읽어야 하는 필독서에 단연 위인전기가 들어갔다.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서는 어떠한 위인처럼 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다. 돌이켜 보면, 나는 그 때 어떠한 위인에게도 마음이 끌리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그저 아버지가 가장 좋았고, 커서 아버지처럼 되고 싶었다. 나는 지금도 아버지처럼, ‘아버지가 된 것에 대하여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그리고 아버지처럼 목회하고 있는 것에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아버지처럼 아이들에게 사랑을 듬뿍 주는 아버지가 되고 싶은 게 꿈이고, 아버지처럼 사랑의 목회자가 되고 싶은 게 꿈이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나에게 해주셨던 말씀이나, 또는 아버지가 보여주셨던 행동이나 모습을 떠올리면서 삶을 살아가려고 애쓴다. 누구든지, 마음 속 깊이 남아 있는 사람의 말과 행동은 기억에 남고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러한 영향력을 끼치던 훌륭한 인물, 영도자가 있다. 그가 바로 모세이다. 구약성경을 보면,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인물이 두 명 있다. 한 명은 모세이고, 다른 한 명은 다윗이다. 이 둘 중에서, 모세에게 훨씬 더 많은 지면이 할애된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그리고 여호수아에서 간접적으로 모세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뿐 만이 아니다. 신약에서 모세는 예수님과 비교되는 인물로 등장한다. 마태복음 같은 곳에서는 예수가 누구냐를 논증할 때 모세를 들어서 비교한다. 이는 모세에게 익숙한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어떠한 인물인지를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함이다. 모세가 애굽의 종살이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영도자인 것처럼, 예수는 죄(죽음)의 종살이에서 인류을 구원한 영도자라는 뜻이다. 이는 예수가 궁극적인 구원자라는 뜻이다. 아마도, 2천 년 당시 유대인들은 모세와 예수를 비교한 복음서를 마음 깊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 모세는 죽음을 앞두고, 자기 생명보다 사랑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신 당부의 말씀을 전한다. 상상컨데, 전하는 자의 마음도 절절했고, 듣는 자의 마음도 절절했을 것이다. 사실, 말씀은 이렇게 선포되고 받아야 한다. 절절한 마음으로 전하고, 절절한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그래야, 생명의 말씀이 우리 삶 가운데서 생명을 꽃 피우게 된다.

 

모세가 사랑하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전하는 말씀은 이제 곧 들어가게 될, 가나안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가르침이다. 모세는 두 가지 삶이 있다고 말한다. “생명과 복의 삶, 그리고 사망과 화의 삶. 이 둘 중, 어느 삶을 살고 싶으신가? 당연히 생명과 복의 삶이다. ‘사망과 화의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지금 모세는 이 두 가지 삶 중에서 너희가살고 싶은 삶을 택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생명과 복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절절한 마음으로 그 삶을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사실, 모세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하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생명과 복을 주기 위하여 애쓴 것 밖에 없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모든 말씀은 이스라엘이 생명과 복을 얻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 전부이다.

 

출애굽기부터, 신명기까지 생명과 복을 얻기 위한 삶의 가르침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핵심 말씀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 말씀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16절 전반부). 그러면 생명과 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 말한다.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여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라”(16절 후반부).

 

이 말씀은 이미 신명기의 핵심 말씀이라고 하는 64절에서도 나오는 말씀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토요일 새벽기도회 때 함께 나누는) 여호수아서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모세를 통하여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 또는 그들의 아버지, 그들의 지도자(영도자) 모세가 절절히 전해준 말씀을 어떻게 지키고 순종하여 생명과 복을 얻는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여호수아서를 계속 들여다 봤지만, 거기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말씀이 있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라는 말씀이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전쟁을 수행하고, 땅을 분배한다. 여기에서 벗어난 적이 딱 한 번 있다. 그게 바로, 아이성 전투다. 말씀에서 벗어나 행동한 아간때문에 온 이스라엘에게 사망과 화가 미쳤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교훈 삼아, 이전보다 더욱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가나안 땅 정복전쟁을 수행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된다.

 

모세는 사랑하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의 율법(명령)을 지키는 것은 어려운 것도 아니고, 먼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하늘에 있어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가서 가져와야 할 것도 아니고, 바다에 있어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우리에게 가져와야 할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가까이에 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담긴 말씀이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14).

 

어떠한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 또는 바다처럼 멀리에 있는가? 아니면 입과 마음처럼 가까운 곳에 있는가? 모세의 이 당부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로 우리 입에 있고 마음에 있다는 뜻이 아닐 것이다. 모세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 입에 그리고 마음에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신영복 선생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깝게 있어야 한다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입과 마음에 두어야 한다는 뜻은 바로 이런 것이다.

 

중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라고 한다. 한 젊은 남녀가 서로 사랑하다, 남자가 직장 때문에 멀리 떠났다고 한다. 그 둘은 서로의 애달픈 마음을 전하고자 매일매일 서로가 서로에게 편지를 썼다. 그런데, 서로의 편지를 매일같이 전해주던 우체부가 있었는데, 그 사람은 총각이었다. 결국, 이 여인은 누구와 결혼했는지 아는가? 멀리 떠난 애인이 아니라, 매일 본 우체부 총각과 결혼했다고 한다.

 

가까움이란 이런 것이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에 있는가? 저 하늘에 있는가? 저 바다에 있는가? 아니면, 여러분 가까이, 입과 마음에 있는가? 그 말씀을 매일 같이 만나는가?

 

매일, 가까이 하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분 말마따나, 우리들, 얼마나 서로 자주 보는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보고, 교회생활 열심히 하시는 분들은 적어도 일주일에 세 번은 본다. (이곳에 이사 와서, 뉴비전에 있는 내 친구는 두 번밖에 못 봤다.) 남들이 보면, 이런 말 할 정도다. ‘니네 사귀냐?’ 그렇다. 우리는 사귀는 사이다. 누구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귀는 사이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사귐이라고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귐이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라고 한다.

 

우리가 이렇게 자주 만나서 무슨 일을 하는가? 교회는 뭐 하는 곳인가? 싸우는 일? 미워하는 일? 먹는 일? 아니다. 교회는 사랑하는 일을 하는 곳이다. 오늘 말씀처럼, 우리는 모여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을 한다. 우리는 모여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일을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려고 모인 것이다. (내가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는 지 아시나 모르겠어요!)

 

나는 부교역자를 맞을 때 한 가지만 당부한다. ‘맡은 일 열심히 해주세요!’ 이런 말 안 한다. ‘전도사님, 저를 사랑해 주세요. 교회를 사랑해 주세요!’ 저도 전도사님을 사랑할게요!’

 

성경에서 모세를 보니까, 무슨 을 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 백성을 사랑한 사람이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보니까 무슨 일을 하신 분이 아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 백성을 사랑한 분이다. 그렇다 보니, 모세는 출애굽 역사를 이룬 것이고, 그렇다 보니,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린 것이다. 출애굽 역사, 십자가, 그것은 사랑이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말씀이 입에 있고 마음에 있다는 것, 말씀이 가까이 있다는 것, 그래서 생명과 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은 뜻과 맘과 힘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는 교회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게 되는 데, 이것이 교회의 어떠한 일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모은 사랑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먼저 세상을 떠난 가룟 유다의 자리를 메우기 위하여, 새로운 사도 한 명을 뽑는 이야기가 나온다. 두 명이 후보에 오르는데, 한 명은 요셉(유스도)이고 다른 한 명은 맛디아였다. 그들은 기도했고, 제비를 뽑았는데, 맛디아가 뽑혔다. 이들은 이 일을 기뻐하고 즐거워했다. 안 뽑힌 요셉이 기분 나빠서 깽판을 치거나, 요셉을 지지했던 사람들이 기분 나빠서 깽판을 친 일이 없다. 왜 그랬을까? 맛디아가 뽑힌 것은 성령의 역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게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고, 사랑이다. 우리도 우리가 얼마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주님의 제자들인지 오늘 회의를 통해서 보여주자. 주께서 우리에게 생명과 복을 더해 주시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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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2. 10. 17:16

장자의 명분과 복

(창세기 28:10-22)

 

(퀴즈: 야곱 이야기는 창세기 몇 장부터 시작되는가? 쉽게 외우는 방법은?) 창세기는 네 명의 족장(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크게 나누면, 창세기는 아브라함과 야곱의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창세기의 50장 중 반은 아브라함 이야기, 반은 야곱 이야기이다(야곱 이야기는 그래서 창세기 25장부터 시작된다.).

 

조지프 캠벨의 신화 이론에 따르면,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 이야기는 일정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비범한 탄생, 갈등, 떠남, 성장, 되돌아옴. 야곱 이야기는 전형적인 신화적 영웅의 서사 구조를 담고 있다.

 

야곱은 쌍둥이로 태어났다. 그런데, 그의 탄생은 범상치 않았다. 그의 태생에는 특별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25:23). 이 말씀을 듣고 태어난 야곱은 쌍둥이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야곱이 된 것이다. (발꿈치를 잡았다.)

 

에서와 야곱의 성장과정을 보면, 성향 상 우두머리(장자)는 에서가 되어야 하는 게 맞다. 에서는 장성해서 익숙한 사냥꾼이 되었고, 야곱은 조용한 성격이어서 그냥 집에서 어머니를 도와드리는 일을 했다. 아버지 이삭은 장자 에서를 사랑했고, 어머니 리브가는 유약해 보이는 야곱을 사랑했다.

 

에서와 야곱의 갈등은 보이지 않게 시작된다. 하루는 사냥에서 집으로 돌아온 에서가 너무 배가 고파서 야곱의 떡과 팥죽을 요구한다. 야곱은 평소에 자신이 쌍둥이 동생으로서 장자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이 있었나 보다. 그래서 야곱은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만든 떡과 밭죽을 에서의 장자권을 사는 데 쓴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25:32). 그리고, 이어지는 진술은 이렇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25:34).

(우리는 인동 장씨인데, 우리 집에는 족보가 없다. 할머니께서 백령도에서 피난 나오시면서 가지고 다니기 힘들다시며 족보 없는 이에게 파셨다고 한다. 그래서 초등학교 4학년 때 사회 시간에 족보 조사해 오는 숙제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우리는 그냥 인동 장씨, 예수파로 써가라 하셔서 그렇게 숙제를 해 간 적이 있다.)

 

그 이후에, 에서와 야곱의 삶을 보면, 점점 격차가 벌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2634절과 35절 두 절에 에서의 결혼 이야기가 나오는데, 참 안타까운 장면이 나온다. 에서는 이방인 아내들을 맞이한다.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이것이 안타까운 일이라는 것을 성경 기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26:34-35).

 

에서의 이방인 아내들이 왜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을까?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당연히, 에서의 이방인 아내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몰랐을 것이고, 자신들이 섬기던 신을 그대로 섬겼을 것이다. 가정에서 신앙적인 충돌이 일어났을 것이다.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싸움이다.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는 안 겪어 본 사람은 모른다.

 

그리고, 드디어, 갈등이 증폭된다. 이삭이 나이가 많아 죽을 날을 얼마 안 놓아두고 마지막으로 축복을 해주려 한다. 이 축복은 일반 축복과 달리, ‘유언이고 상속이다. 요즘도 부모가 죽기 전에 유언과 상속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초미의 관심을 두고 싸움 하는 집안이 심심치 않게 있다. 부모에게 를 더 많이 물려 받기 위해서 자녀들이 경쟁한다. 그래서 노인들 사이에서는 죽을 때까지 절대로 자식들에게 먼저 재산을 물려주지 말라고 한다. 그래야 자식들이 끝까지 잘한다고 한다.


에서와 야곱 사이에도 아버지의 축복을 두고 경쟁이 벌어진다. 우리가 다 알다시피, 승자는 야곱이었다. 야곱은 변장을 하여, 형 에서에게 내릴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챈다. 아버지 이삭이 내린 축복은 이것이다.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만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27:27-29).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의 말씀이다. 우리가 그렇게 갈망하는 물질과 명예와 형통의 복이 이 말씀에 다 들어 있다. 자녀들에게 물질을 직접 주지 말고 (줘 받자 탕진하거나 싸움 할 가능성이 크다), 날마다 이 말씀을 주면 좋다. 인간은 복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이라고 베푼 것이 나중에 큰 문제를 발생시키는 근심으로 변질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그야말로 복이 된다. (오늘 밤, 자녀들에게 이 복을 빌어주고 주무시라.)

 

기회를 놓친 에서에게는 이런 축복의 말씀이 주어진다.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27:39-40). 참으로 안타까운 축복이다. 에서의 주소는 척박 시 척박 구 척박 동이다. 칼을 믿고 살아야 하고, 아우를 섬기며 살아야 하니, 그 삶이 얼마나 고단하겠는가.

 

이렇게, 에서의 말 대로, 야곱은 형 에서를 속여 형에게서 두 가지를 빼앗아 간다. 장자의 명분과 복. “에서가 이르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하지 아니하나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27:36).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매우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이상하지 않는가? (나만 이상한가?) 야곱이 에서에게서 빼앗은 것은 장자의 명분과 복이다. 장자의 명분과 복은 실물이 아니다. 야곱에 에서에게서 실제로(실물로는)는 빼앗아 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이 사건 이후, 더 어려워진 것은 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야곱이다.

 

야곱은 이 일 때문에 고향을 떠나야 했다. 고향을 떠나는 일이 쉬운가? 집 떠나면 고생이다. (이민자인 우리가 그 누구보다 더 잘 알지 않는가? 우리가 여기서 살아남으려고 얼마나 힘들게 사는가? 서로 위로해 주라. 충청도 사투리로, 고생이 많아유~) 야곱은 고향 브엘세바를 떠나 한 번도 가본 적도 없고 만나 적도 없는 하란 땅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친다.

 

장자의 명분과 복을 차지한 야곱과 그것을 빼앗긴 에서의 삶이 어떻게 다른 지 보자. 대표적인 예로 결혼 문제를 보라. 이삭은 야곱에게 가나안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왜 그런지는 위에서 언급했다. 야곱은 아버지의 당부를 지킨다. 그런데, 에서는 지키지 않는다. 이 문제 때문에 고민이 많았던 에서는 아버지를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한다. 그래서 그는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의 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 한다.

 

야곱은 계속 말씀 위에, 복 위에 있고, 에서는 계속 거기서 벗어난다. 결정적으로 오늘 말씀을 보면, 야곱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을 만난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13). 그리고 하나님께 받은 약속은 땅과 자손의 복, 그리고 언제나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래서, 야곱은 하나님을 만난 바로 그곳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 칭하고, 거기에서 제단을 쌓는다. 예배 드렸다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서원한다. 서원이란 하나님과의 신실한 약속을 말한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20-22).

 

위대한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많은 명언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인간으로서 가장 위대한 도전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극복을 위한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야곱은 형 에서에게서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복을 받았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야곱이 장자의 명분과 복을 받았다고 해서, 그가 저절로 장자가 되고, 복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장자와 복은 소망이고 약속이다. 야곱에게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믿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서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야곱의 위대함은 조지프 캠벨의 말 대로, 자기 자신을 변화시킨 것에 있다. 야곱은 원래 장자가 아니었고, 복을 받을 위치에 있던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장자와 복에 대한 소망과 약속을 받고, 그것을 이루어 갔다. 차남으로 태어났고, 유약했고, 엄마 치마폭에서만 놀았던 야곱은 성경의 인물 중 가장 입지전적한 인물이 되었다. 그가 소망대로 장자와 복을 일구어 낸 것은 물론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며 그 소망을 이루어 주시리라는 믿음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야곱이 받았던 약속과 소망을 똑같이 받은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는 여러 민족, 여러 사람 중에 장자이며, 하나님의 복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다. 우리가 이렇게 주께 나아와 예배 드리는 이유는 야곱처럼 장자의 명분과 복을 믿기 때문이며, 힘들고 어렵지만, 그 약속과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멈추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장자의 명분과 복이 여러분에게 임한 줄로 믿는다. 이것이 우리 교회에 임한 줄로 믿는다. 약속과 소망의 말씀을 붙들고, 그 약속과 소망이 성취되는 그날까지 서로 지치지 않게 격려하며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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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2. 6. 13:54

소금과 빛과 의

(마태복음 5:13-20)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백미라고 불린다. 지금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인류의 삶 곳곳에 베어 있어 그 가르침의 놀라움이 많이 퇴색되어 있지만, 그 당시 예수님의 가르침은 굉장히 낯선 것이었다. 사실, 지금도 많이 들어봐서 낯섦이 덜 할 뿐, 예수님의 가르침이 우리의 삶에서 실제로 적용되는 일은 쉽지 않다.

 

일례로, 산상수훈의 첫 가르침은 에 관한 것이데, 지금도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과 우리들이 생각하는 복 사이에 많은 차이를 보게 된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1) 심령이 가난한 자, 2) 애통하는 자, 3) 온유한 자,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5) 긍휼히 여기는 자, 6) 마음이 청결한 자, 7) 화평하게 하는 자, 8)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이다.

 

유교사상 아래 있는 동양국가에는 오복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 장수하는 것, 2) (): 물질적으로 넉넉하게 사는 것, 3) 강령(康寧):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한 것, 4) 유호덕(攸好德): 도덕 지키기를 좋아하는 것, 5) 고종명(考終命): 제 명대로 살다가 편히 죽는 것이다. 이 중에서도 하면 대개 두 가지를 꼽는다. 물질적 부와 건강이다. 그래서, 우리는 새해를 맞아 세배를 할 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하면서 서로 물질적 부와 건강을 빌어주는 덕담을 주고 받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보면,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복(행복)에 대하여 세 가지를 말한다. 명예, 자식, 외모가 그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여전히 유교사상이나 서양의 헬라철학사상에 얼마나 물들어 있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 대로, 요즘 세상에서 5) 긍휼히 여기는 자, 6) 마음이 청결한 자, 7) 화평하게 하는 자 같은 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바보취급 받는다. 요즘 세상은 자신의 행복 또는 성공을 위하여 다른 사람에 대해 인정사정 안 봐주고,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괴테의 파우스트에서처럼 악마에게 영혼까지 팔아 먹는다.

 

이런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고, 묵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께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인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등에 업고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을 기복 신앙이라고 한다. 물론 절대자에 대한 기복을 전혀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기복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우선적으로 알아야만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와 떼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소망이 없고 모르는 자는 결코 1) 심령이 가난한 자, 2) 애통하는 자, 3) 온유한 자,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5) 긍휼히 여기는 자, 6) 마음이 청결한 자, 7) 화평하게 하는 자, 8)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 나라를 발견한 자는 참된 복,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쳐 주신 복을 사모할 수 밖에 없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의 키워드는 세 가지이다. “소금, , 이다. 예수님은 너희는’ ‘소금, , 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모두 어떤 현실을 가르쳐 주는 메타포이다. 우리는 빛과 소금에 대하여 많이 들었다. 그런데, 정말로 빛과 소금이 무엇을 뜻하는 지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고민해 보지 않는다. 왜 예수님은, 또는 성경의 저자는 소금과 빛이라는 메타포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아이텐티티(정체성)를 말하는 것일까?

 

먼저 소금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보자. 성경에서 소금에 대한 이야기는 출애굽기와레위기에 처음 등장한다. 우선 각각의 말씀을 보자.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 30:35)”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2:13).

 

출애굽기 30장은 성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곳이다. 성막(지성소, 성소, 바깥뜰) 중 성소에는 분향단을 설치하게 되어 있는데, 하나님은 그때 향을 만들고 그것에소금을 쳐서 성결하게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소금은 일차적으로 성결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된다.

 

레위기 2장은 5개의 제사(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중 소제를 설명하는 부분인데, 소제(Grain Offering)는 곡식을 빻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말한다. 소제를 드릴 때는 소제물에 다른 첨가물(누룩이나 꿀)을 넣으면 안 되고, 반드시 소금을 넣어야 한다.

 

누룩은 실제보다 부풀리는 데 사용된다. 꿀은 달콤하지만 불에 타면 이상한 냄새가 난다. 누룩은 자기과시, 과장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꿀은 달콤하지만 시험이 오면 악취를 내는 것을 말할 수 있다. 불에 타면 유향처럼 향기를 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꼭 이렇게 해석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번제는 일차적으로 죄 사함을 위해 드려지는 제사이다. 그런데, 소제에는 죄 사함의 의미가 없다. 소제는 다른 제사와 더불어 함께 드려지는 게 일반적인데, 왜 그러냐면, 소제는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이 믿음으로 신실하게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안에서 살아가겠다는 다짐의 제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제에는 다른 무엇이 아닌 소금이 들어가는 것이다. 소금은 불변성, 방부성, 영원성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신실함(변함없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소금 언약이라고 부른다. 소금 언약을 말하는 성경의 대표적인 구절은 두 군데이다. 첫째는 민수기 1819절 말씀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18:19). 둘째는 역대하 135절 말씀이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대하 13:5).

 

신실함(변함없음)은 인간의 속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말씀하실 때, 하나님 나라에 들어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는 신실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두 번째로, 빛에 대하여 이야기 해보자. 이 말씀은 이 단어 때문에 굉장히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착한 행실이 그것이다. 여기서 착한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칼로스인데, 이는 착한 또는 선한이라고 번역한다. 여기서는 착한 행실로 번역했지만, 요한복음 1011절에서는 선한 목자라고 번역한다.

 

착한 또는 선한은 매우 신학적인 용어이다. , ‘착한 행실은 사람들 보기에 착한 행실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착한 행실을 말한다. 일례로,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애를 태우신다. 이게 요즘 계산법으로는 안 맞는 수지타산이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착한 행실이 아니라, ‘멍청한 행실이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착한 행실이다. ? 한 사람이 생명이 온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한 생명쯤은 헌신짝처럼 보는 세상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하나님의 마음이다.

 

세상의 이 된다는 것은 남들(사람들) 보기에 착한 사람 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라는 단어 또한 하나님 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메타포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이러한 모습, ‘소금과 빛의 삶을 한 마디로 말하는 것이 라는 단어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그 의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0).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씀이 우리가 잘하는 율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말씀이다.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신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는 외적인 의즉 외형주의에 그쳤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는 내적인 의이다. 예를 들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잘 지켰다. 그런데, 그들은 외형적으로만 그 말씀을 지켰다. 살인만 안 했지, 마음 속에는 미움이 가득했다. 물론, 살인을 외형적으로 하지 않는 것 자체도 중요하다. 그러나, 마음에서는 미워 죽겠는데, 마음으로는 백 번도 더 죽였는데, 살인만 안 하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살인만 안 했지, 그 앞에서 또는 안 보는 데서 상대방에 대하여 라가(Raka, 심한 모욕을 주는 욕)’라고 하며,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만큼 힘든 일이 없다. 남을 미워하면 죽음의 감옥에 갇히는 것이다. 자유를 빼앗기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미움으로부터의 자유를 선포하시는 것이다.

 

무디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있다. “100명 중 1명은 성경을 읽고, 99명은 그리스도인을 읽는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성경의 증언으로 그들이 이끌리겠지만, 세상 사람들은 대개 우리들,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소금과 빛과 의를 세상에 보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이런 말씀을 듣고, 스트레스가 확 밀려오는 지 모르겠다. 사실, 이것은 육신으로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성령으로서는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born again)’이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의 신실성,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자가 되는 일은 어렵다. 불가능하다. 그러나, 거듭난 자는 매우 자연스럽게 소금과 빛과 의를 세상에 보일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자(born again)는 미움에 사로 잡히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자는 정욕에 사로 잡히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자는 원수까지도 사랑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영원하신, 그리고 신실하신, 참된 복이시고 행복이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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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2. 3. 19:35

아브라함과 가나안 땅

(창세기 12:1-9)

 

창세기 11장은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하란 땅에서 죽는 것으로 끝난다. 데라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다.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이다. 그 중에서 하란은 롯을 낳았는데, 하란은 아버지 데라보다 일찍, 우르에서 죽었다.

 

데라의 둘째 아들 나홀은 우르에 남고자 했던 것 같다. 데라는 아브라함과 아버지 없는 손자 롯을 데리고 우르를 떠나 하란 땅으로 간다. 성경은 데라와 그의 가족이 겪은 인간적인 감정을 자세하게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같은 인간으로서 미루어 짐작하건데, 자식을 잃은 상심이 매우 컸던 것 같다. 그 이유는 데라가 우르를 떠나 정착하게 된 곳을 하란이라고 이름 붙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데라가 우르를 떠나 원래 가고자 했던 곳은 가나안이었다. 그런데,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 하란 땅에 머물러 살게 된다. 기록에 의하면, 하란 땅은 우르와 함께 달을 숭배하던 지역으로 유명하다. 데라가 우상을 숭배하던 하란에 그의 가족과 함께 거주했다는 기록은 그의 어두운 영적 상태를 보여준다. (두란노 주석 참조)

 

11장의 아브라함 가족 이야기는 한 가지 사실을 더 알려준다. “사래는 임신을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11:30). 먼저 죽은 데라의 셋째 자식 하란에게는 아들 하나와 딸 둘(밀가, 이스가)이 있었다. 그런데, 장남인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향년 205세에 하란 땅에서 생을 마감한다. 아마도, 먼저 죽은 막내 아들을 그리며 죽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란 땅을 떠나지 않았던 것일 거다.

 

12장에 들어서면, 이야기의 초점이 아브라함에게로 옮겨간다. 어느 날,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12:1).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떠나.. 가라이다. 이는 너 스스로 가라”, “너 자신을 위해 가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의 떠남은 자발적인 동시에, 그 자신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순종이라는 것을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순종은 하나님을 위한 희생으로 잘못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순종은 하나님을 위한 희생이 아니라, 나를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아브라함이 떠나야 하는 곳은 세 가지로 표현된다. “너의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 그리고 그가 도착해야 할 목적지는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표현된다. 떠나야 할 것은 확실한데, 도착해야 할 곳은 불분명해 보인다.

 

사실, 이게 함정이다. 인간의 심리는 확실한 것에 거하고자 한다. 보장된 유익을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에게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은 보장된 유익이고, 확실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떠나, 불분명한 곳, “하나님이 보여 줄 땅으로 떠나야 한다.

 

그런데, 그의 떠남은 보장된 모든 유익에서 떠나는 것, 손해 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순종은 그런 것이 아니다. 순종은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세 가지를 약속하신다.

1) 큰 나라를 만들어 주겠다.

2) 너에게 복을 주고 너의 이름을 크게 하겠다.

3) 네가 복덩어리가 되고, 복의 통로가 될 것이다.

 

첫번째 약속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사래)가 불임 상태에서 주어진 약속이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데리고 하란 땅을 떠난 이유는 두 가지 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동생의 아들이라 큰 아버지인 자신이 돌봐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다. 둘째는 자식이 없는 자신의 가정에 조카 롯을 아들 삼기 위함이다. 아마, 이 둘 다 이유였을 것이다. 나중에 보면, 아브라함을 아들이 계속 안 생기자 롯을 실제로 자신의 유업 이을 자로 삼으려 한다.

 

그러므로, ‘떠나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은 모든 유익을 버리는 손해가 아니라 오히려 아브라함에게는 이익이다. 순종해서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가면 거기에서 많은 자식을 얻어 큰 나라를 이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과 관련된 약속을 해주시면서 이런 말씀을 해 주신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3). 이것은 아브라함의 교만의 요소가 아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들으면 교만해지기 십상이다. ‘나 건드려봐! 하나님이 가만히 안 놓아둘 거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

 

이 말씀은 복과 저주의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이 친히 아브라함을 보호하시겠다는 뜻이다. 이후의 전개되는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어떻게 지키시는 지 보게 된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 애굽으로 피신했을 때, 애굽 왕 바로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아리따움에 반해 그녀를 취하려고 했던 사건이 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가정을 보호하시기 위하여 바로의 집에 큰 재앙을 내려 그 위기를 모면하게 하신다. 위기만 모면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많은 재물을 얻어 가나안 땅으로 복귀하도록 복을 내리신다.

 

순종은 하나님과의 거래(Deal, 또는 Business)가 아니다. 순종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고 믿음이다. 순종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기뻐함이다. 오늘 말씀에서 가장 핵심 포인트는 4절과 5절 말씀에 있다. 먼저 5절 말씀을 보면 이렇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라함은 일단 떠났다. 하나님은 그가 떠날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다.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이 그것이다. 그는 그곳을 떠났다. 이것만 해도 정말 잘 한 것이다.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우리는 떠나는 것 조차도 못한다. 죄가 관영한 곳에 머물며 영혼이 죽어가는 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못 떠난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아버지가 우울하게 죽어간 곳, 그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곳 하란을 마침내 떠났다.

 

그런데, 문제는 떠난 아브라함이 어떤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느냐 이다. 데라가 가족을 데리고 우르를 떠날 때 그의 목적지는 원래 가나안이었다. 그런데, 그는 도중에 자신의 어두운 영적 상태와 어울리는 하란에 그만 주저 앉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제시하신 목적지,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은 가나안 땅이었다.

 

신앙인은 이 구절을 보며 마음이 조마조마해야 한다. 과연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보여 줄 땅, 최종 목적지인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을까? 5절은 이렇게 전한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사실, 여기에서 박수와 아멘이 쏟아져야 한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사도 바울에 복음을 듣고서 그리스도에게 회심했던 갈라디아 사람들이 다시 율법의 행위로 돌아서려는 것을 보며 이렇게 꾸짖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3:2-3). 그러면서 아브라함을 증거 삼아 이야기 한다.

 

우리 자신에게 한 번 물어보자. 우리가 마땅히 떠나야 할 곳은 어디이고, 도착해야 할 하나님이 보여 주신 곳()’은 어디인가? 성경은 일차적으로 공동체에 주신 말씀이다. 그래서 공동체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우리 교회가 마땅히 떠나야 할 곳은 어디이고, 반드시 도착해야 할하나님이 보여 주신 곳은 어디인가?

 

우리 교회 공동체가 마땅히 떠나야 할 곳은 너무도 자명하다. 지난 몇 년 간 교회를 아프게 하고 병들게 했던 과거의 시간에서 떠나야 한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성령을 떠난 육체의 일을 이렇게 말한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5:19-21).

 

물론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분명 회개해야 할 일도 있겠지만, 사도 바울이 열거한 육체의 일 중, 많은 것들을 겪으면서도 이렇게 교회 공동체를 지키신 분들은 참 대단하신 분들이다. 여러분들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시라. 그 어려움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살려 했던 수많은 날들을 돌아보며 스스로 대견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라.

 

교회 공동체가 왜 어려움을 겪는가? 교회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우리는 어디에서 떠나야 하는가? 교회를 떠나면 되는가? 주님의 몸인 교회를 왜 떠나는가? 우리가 떠나야 할 것은 교회가 아니라, 육신의 일이다. 교회에서 잘 발생하는 육신의 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 등과 같은 것에서 떠나야 한다. 교회 공동체를 힘들게 하는 육신의 일을 떠날 생각은 안 하고, 교회를 떠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이제, 우리는 떠나야 한다. 과거의 그 어려웠던 시간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가나안 땅으로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성령으로 시작한 일, 육체로 마칠 수 없다. 갈라디아에서 제시하고 있는 가나안 땅’, 즉 성령의 열매는 이렇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받았느니라”( 5:22-24).

 

우리는 아브라함이다. 우리는 아브라함 공동체이다. 하나님은 그 옛날 아브라함에게 떠나라”, 그리고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래서 그곳에서 새롭게 시작하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떠나라, 그리고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성령으로 시작한 일, 끝까지 성령으로 마치는 은혜가 우리 교회, 아브라함 공동체에 임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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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