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1. 17. 10:26

들을 귀

(마가복음 421-29)


오늘 말씀에는 두 가지의 비유가 나온다. 등불비유와 부지중에 자라는 씨 비유다. 앞에서 예수님은 비유를 사용하는 이유를 감추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안 된다.

 

22절 말씀은 번역을 어렵게 했다.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이것을 쉬운 말로 옮겨 보면 이런 뜻이다. “무엇이든지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무엇이든 감추어진 것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조금 역설적이긴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숨겨져 있는 것 같고, 감추어져 있는 것 같으나, 결국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오늘 말씀은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나는 경우를 말한다. 두 문장이 그것을 밝히고 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그리고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이다. ,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귀 없는 사람은 없다. 특별한 문제를 가지고 타고난 사람이 아닌 이상, 모두 귀가 있다. 그런데,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뜻이 무엇인가?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는 무슨 말인지, 잘 이해 안 된다. 쉬운 말로 옮기면 이런 말이다. “너희는 듣는 말을 새겨들으라. Take care what you listen to”. 우리의 일상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건성으로 듣는가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듣는다. 듣더라도 새겨듣지 않는다.

 

기독교 전통의 영성훈련에 기도어린 경청(Prayful listening)”이라는 말이 있다. 영성가들이 한결 같이 강조하는 것은 영성훈련의 처음이자 마지막은 자기의 마음과 귀를 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라고 한다. ‘기도어린 경청이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 기도하는 심정으로 듣는 것을 말한다. 기도어린 경청을 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어떤 이야기를 하면, 자기의 자아를 죽이면서 듣는 것을 말한다. 기도어린 경청이란 것은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이라기보다도, 타자가 오롯이 나에게로 다가 올 수 있도록 나의 전 존재를 온전히 개방하는 것을 말한다. <에큐메니안, <너희가 영성을 아느냐?③> ‘기도어린 경청김오성 목사>

 

성경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말씀에 기도어린 경청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그 당시 최고의 종교지도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권위와 지식에 예수님의 말씀을 비추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계속하여 거부한다. ,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예수님께 온전히 개방하지 못했다.

 

성경에서 말하는 들음은 단순히 귀를 상대방의 입에 가져다 대고 듣는 것이 아니라, 말하고 있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존재를 여는 행위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지금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이것을 그림을 보면서 설명하면 좀 더 잘 이해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다음 그림은 Giovanni Battista Caracciolo(지오반니 바티스타 카라촐로)가 그린 <The Young Saint John in the Wilderness, 광야의 젊은 세례 요한>이다. (그림)



요한복음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the Lamb of God)이로다”(1:29).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다. 이것은 라틴어로 “Ecce Agnus Dei”(Behold the Lamb of God)라고 한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면, 젊은 세례 요한은 “Ecce Agnus Dei”라는 글자가 써 있는 지팡이를 발 앞에 내팽개치고,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 원래 세례 요한의 영성은 이 한마디로 표현된다. “그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30). 세례 요한의 손가락 또는 삶은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존재여야 한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 그림에서는 세례 요한의 손가락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지 않고, 자기 자신을 가리킨다.

 

이것은 배교나 다름없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 그림을 보고 추적하기 쉽지 않지만, 오늘 말씀에 비추어 보면, ‘들음에서 멀어지면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이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열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언제나 자기 자신의 세상에 갇혀 산다. 자기 자신의 세상에 갇혀 사는 자들은 정의와 평화, 사랑과 생명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지 못하고, 그 나라가 자신의 삶에 임하게 되는 것을 기대하지 못한다. 그는 그렇게 멸망 당하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열고 그 나라를 받아들인 자들에게는 구원이 임한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비유는 부지중에 자라는 씨 비유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부지불식 간에 씨에서 싹이 트고 이삭이 나고 곡식이 맺히는 것처럼 부지불식 간에 그 나라를 사모하는 자의 삶 속에서 임한다. 농부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싹이 자라고 열매가 맺는 것은 전적으로 땅의 힘에 달려 있다. 그처럼, 하나님 나라가 그 나라를 사모하는 자들의 삶에 임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만을 사모하게 된다.

 

자기 자신에게 갇혀 있는 자에게 무슨 소망이 있는가? 우물 안 개구리에게 무슨 소망이 있는가? 그러나, 마음을 열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자신의 삶 속에 임하는 소망을 꿈꾼다. 하나님 나라는 종말론적이기도 하지만, 현재적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사역은 그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지금 여기에 임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귀신을 내어쫓고, 죄를 사하시고, 병자를 고쳐주셨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지금 나의 삶에 임하기를 소망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축귀와 용서, 그리고 치유의 역사가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이루어질 것을 기대해야 한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떠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대하는가? 예를 들어, 1) 암 병 환자는 암 병이 없는 몸을 기대할 것이다. 2) 마음이 아픈 자는 눈에 눈물 나는 일이 없는 세상을 기대할 것이다. 3) 가난한 자(돈이 없어 고통 받는 자)는 가난에서 벗어나기를 기대할 것이다(돈 때문에 고통 받지 않았으면 할 것이다). 4) 이런 저런 이유로 차별 받는 자들은 차별 없는 세상을 기대할 것이다. 5) 어린 자식을 잃은 부모는 죽어서라도 그 자식을 다시 만나기를 기대할 것이다. 6) 땀흘려 일군 농작물을 빼앗기는 가난한 농민에게는 자기가 땀흘려 일군 농작물을 누군가에게 빼앗기지 않고 가족들과 배부르게 먹는 것을 기대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것(하나님 나라, 물론 우리의 좁은 생각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지만)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귀 있는 자만 그의 말씀을 듣고 이러한 소망을 품고 살 수 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열어야 한다. 존재를 열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시고, 그 안에서 기대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거라고 하는 기대를 가질 수 있다.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기대하지 않는 것은, 매우 불성실한 태도다.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기대를 품고 희망 가운데 사는 자와 자기 자신에게 갇혀 아무런 기대도 없고 희망을 갖지 못하는 자의 삶은 같을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소망이 가득하길 바라신다. 소망이 가득한 삶, 생명이 가득한 삶의 첫 발걸음은 들을 귀를 갖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도어린 경청을 꼭 실천하고 실현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부지중에 반드시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각자의 삶 속에서 경험하며 사는 신실한 주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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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비스듬히 기대기를 간구하는 기도

(21:5-19)

 

주여, 주께 비스듬히 기대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가 기대어 있는 생명의 토대가 흔들려

우리의 삶도 흔들리고 있나이다.

살아가려면 기대어야 할 것이 많은

연약한 생명이오나,

오직 우리가 영원히 기댈 수 있는 것은

영원하시고 인자하신 주님 밖에 없사오니

주께 비스듬히 기댄 우리를 밀어내지 마시고

우리를 주의 영원한 생명으로 품어 주옵소서.

생명을 위협하는 잔인한 현실을 마주하며

때로는 혼란스럽고

때로는 겁에 질리지만

주의 약속을 말씀을 굳게 붙잡고

거짓 선지자들의 허황된 유혹을 물리치며

영원한 생명의 토대이신 주께

살포시 비스듬히 기대오니,

주여,

그 부드러운 음성으로 속삭여 주옵소서.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주여, 우리는 이 약속의 말씀에 의지하여

인내하고 또 인내하겠사오니,

우리의 영혼을 평온케 하시고

생명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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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듬히

(누가복음 21:5-19)


비스듬히

/ 정현종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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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명은 강인하기도 하지만 연약하다. 생명에는 강인함과 연약함이 동시에 존재한다. 존재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기대는 것이 많다. 의연하게 서 있는 나무도 실은 땅에 기대고 서 있는 것이고,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것이다. 땅이 흔들리면 나무도 흔들리고, 허공이 흔들리면 나무도 흔들린다. 기대고 있는 것이 삐끗하면 생명도 삐끗한다. 그래서 생명은 연약하다.

 

2. 살면서 맑은 날도 있고 흐린 날도 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 보면,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이 참 그렇다. 어느 날은 좋다가도 어느 날은 흐리다. 그럴 때면 마음이 변덕스럽고, 신앙이 변덕스러운 것 같아 스스로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믿는 자라면 언제나 맑은 날만 가득해야 하는데, 흐린 날이 오면 믿음의 연약함 때문에 실망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안 계신가하고 의심이 들기도 한다.

 

3. 오늘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것을 목격하고 박해를 경험하고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향한 희망의 메시지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사역 중이었고, 특별히 헤롯성전을 중심으로 막바지 사역이 한창 중이었다.

 

4.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5).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성전이라 불렸다. 헤롯성전은 로마 황제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받은 헤롯대왕이 유대인의 환심을 사고자 엄청난 시간과 돈을 들여 지은 어머어마한 규모의 성전이었다.

 

5. 헤롯이 그토록 성전 건축에 공을 들인 이유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었다. 오직 정치적 목적만이 존재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는 유대인들이 평생 적으로 생각했던, 에돔(이두매) 출신 정치가였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정치술로 로마의 유력한 정치인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고, 그 세력을 등에 업고 유대 땅을 다스리는 왕으로 인정을 받았다.

 

6. 헤롯성전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통곡의 벽이라 불리는 서쪽 벽만 남아 있는 상태다. 현재 예루살렘에서 빛나고 있는 건물은 무슬림 사원(바위 사원)이다. 헤롯성전은 바로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예언했듯이, 서기 70년경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무너뜨려졌다. 이것은 참으로 허무한 일이었다. 헤롯성전은 BC 20 년경 공사가 시작되어, AD 63 년경 공사가 완료될 정도로 공사 기간이 80여년이나 되었다. 그런데, 완성한지 채 몇 년도 되지 않아,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7. 헤롯성전은 오늘 말씀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처럼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성전 외부 뜰은 한꺼번에 40만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정도의 크기였고, 그 치장이 아름다울 데 그지 없었다. 사실 BC 20년에 시작된 외부 공사는 9년만에 끝났지만, 내부 공사 때문에 공사 기간이 80 여 년이나 흘렀던 것이다.

 

8.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남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유대인 신앙의 특징은 성전신앙이다. 그들은 성전에 기대어 살았다. 왜냐하면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이미 성전과 관련된 민족의 크나큰 아픔이 있었다. BC 587년 바벨론에 의해 솔로몬 성전이 파괴된 것이 그것이다. 그들은 그러한 민족적 트라우마를 지니고 살았다. 그런데, 그 일이 또 벌어진 것이다.

 

9. 유대인들에게 있어 성전의 파괴는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이미 그것을 한 차례 경험한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들도 어떠한 재해가 임하면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10. 2004년도에 인도양에서 쓰나미(지진해일)가 발생하여 인도네시아와 태국 등지에서 23만 여 명이 생명을 잃은 사건이 발생했다. 그 당시 한국의 어느 설교자는 그 사건을 우상이 판 치는 동남아시아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하여 사람들의 뭇매를 맞은 적이 있다. 2005년도 뉴올리언즈를 덮쳤던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뉴올리언즈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설교한 미국과 오스트리엘리아의 설교자도 있었다. 이렇듯, 기독교인들은 자연재해든, 질병이든, 개인이나 가정에 나쁜 일이 벌어지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쉽게 말하는 경향이 있다.

 

11. 재해가 발생하면, (신앙인이든 아니든) 사람들은 불안해지는 법이다. 마음이 극도로 약해지고, 정신적인 패닉이 온다. 거짓 선지자는 그 틈을 파고 든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거짓 선지자를 섣부르게 따라 나선 것 때문에 더 심한 멸망의 길을 걷는다. (요즘 한국사회의 최고 핫 이슈인 박근혜 대통령과 비선실세 최순실의 관계가 바로 이런 관계다. 엄마 아버지를 잃고 그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박근혜에게 교묘하게 다가선 것이 최태민이라는 사람이고, 그의 거짓 예언에 속아 더 심한 멸망의 길을 걸은 사람이 박근혜이다. 자신만 망한 것이 아니라, 온 국민을 도탄에 빠뜨렸다.)

 

12. <유대 전쟁사>를 쓴 유대인 출신의 유명한 로마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였던 요세푸스는 헤롯성전이 로마의 침략을 받기 전 거짓 선지자들이 판을 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전쟁의 소문에 불안해 하던 유대인들에게 그 거짓 선지자들은 성전으로 피신을 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거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요세푸스는 그들의 메시지를 듣고 성전으로 몸을 피했다가 티투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단에 의해 무참히 죽어간 유대인들의 슬픈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13.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그것을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따르지 말라”(8). 재해 뿐만이 아니라, 신변에 힘들고 어려운 일이 발생하면, 또는 꼭 이루어졌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 또는 욕망이 생기면 사람들의 마음은 갈대처럼 흔들리는 법이다. 사탄, 또는 사기꾼들, 또는 거짓 선지자들은 그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마음을 적당한 타이밍에 꿰차고 들어오는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

 

14. 대한민국에서 점집이 가장 많은 곳이 어디인지 아는가? 강남이다. 욕심 많은 부자들의 욕망 때문이다. 점집이 가장 잘 되는 시기는 법조인들(,검사)의 승진 심사를 앞둔 시점과 입시를 앞둔 시점이다. 그리고 점집을 간절하게 찾는 모든 사람들은 신변에 힘들고 어려운 일이 발생한 사람들이다.

(한국 다녀와서 표정이 밝아진 어느 교인의 이야기 목사님, 점쟁이가 그러는데, 내년부터 좋은 일이 있을 거래요~).

 

15.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선 자연재해나, 신변에 일어나는 어려운 일들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각하는 못된 습관부터 버려야 한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주님으로 신실하게 섬겼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의 신변에 일어나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16. 오늘 말씀은 그들이 처했던 상황을 매우 아포칼립틱(묵시적, 무시무시한 언어)하게 전하고 있다. 우선, 성전이 무너진다고 한다. 그리고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가 있으리라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 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 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라고 말한다.

 

17.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만약 이런 게 심판이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거든 너희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이러한 일이 발생하거든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라 되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고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신다.

 

18. 그렇다. 우리의 주변, 또는 우리의 삶에서 발생하는 때로는 이해 안 되는 힘들고 어려운 일’, 우리의 생명에 위협을 가하는 일들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증거가 되는 일이다. 우리는 그러한 일이 발생했을 때 두려워 하거나 무서워 하거나 정신을 놓으면 안 된다. 나쁜 일(안 좋은 일, 힘든 일)이 생겨도 두려워하거나, 거짓 선지자들을 따라 가지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그것을 불평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어려움은 내가 믿는 바를 증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19.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박해는 불평의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믿는 바를 증언할 수 있는 기회였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박해를 당하며 하나님, 내가 하나님을 이렇게 간절히 믿는 데 왜 이러한 박해를 당하게 하세요?’라고 불평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박해 앞에서 그들이 믿는 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다른 어떤 것에 기댄 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20. 우리가 매일 같이 경험하는 세상은 악하고 불의하다. 한국의 정치상황이나, 미국의 정치상황, 이렇게 크고 거창한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소소한 일상에서 경험하는 일들은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불의하고 악한 것들로 즐비하다. 그러면서 우리는 무심코 이런 생각을 한다. “하나님이 계신데, 세상이 왜 이렇게 악해? 세상 살기 정말 힘드네. 먹고 살기 왜 이렇게 힘드냐!”

 

21.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생명을 기댄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생각의 전환을 가져와야 한다. ‘왜 하나님이 계신데, 이렇게 세상이 악해?’가 아니라, ‘세상은 이렇게 악하지만, 하나님이 계셔서 다행이야가 우리의 희망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22.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우리는 실제로 어디에 생명을 기대고 있는가?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것? 정치? 가족? ? (건강)? 순실이? 이러한 것들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것들이다.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며진 헤롯성전도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졌다. 임금과 집권자들이 박해자로 어느 순간 돌아설지 모른다.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우리를 죽이고 넘겨 준다. (건강)도 예전 같지 않다. 더군다나, 그토록 믿고 의지했던 순실이도 구속되고 말았다.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 생명을 기대어 살고 있는가?

 

23.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우리는 누구에게 말 못할 어려움을 안고 산다. 그것 때문에 실제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산다. 그것이 어떠한 것이 되었든,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새로운 힘과 소망을 얻는 역사가 있기를 바란다. 여러분이 현재 삶의 자리에서 겪는 어려움이 여러분에게 도리어 여러분이 믿는 바에 대한 증거의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24.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이런 말을 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5:1-4).

 

25. 오늘 말씀도 같은 것을 증거하고 있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19). 환난(생명의 위협을 받는 일들) 중에서 우리가 구원 받는 방법은 인내하는 것이다. 이 인내는 무조건 아무 생각 없이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의지한 인내이다. 오늘 말씀 가운데서는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다. 위에서 살펴본 로마서에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다는 약속의 말씀이 있다. 우리는 이 약속의 말씀에 의지해서, 환난 가운데서도 인내할 수 있는 것이다.

 

26. 특별히, 로마서의 말씀 중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에서 우리 말로 연단으로 번역된 것은 영어로 ‘character’이다. 환난은 인내를 만들어 내고, 인내는 ‘character’를 만들어 낸다. ‘Character’는 우리 말로 성격, 성품, 인격, 신분등의 뜻을 갖는다. , 어떻게 인내하는 가를 보면 그 사람의 성격, 성품, 인격, 신분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환난 중에도 오히려 기뻐하며 인내하는 그리스도의 성격, 성품, 인격, 신분은 분명 소망을 잃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부활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어떤 것에 생명을 기대어 살지 않고, 영원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께 생명을 기대어 살기 때문이다.

 

27. 내가 좋아하는 폴란드의 시인, 노벨문학상 수상자, 쉼보르스카의 시 <지도>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지도가 좋다. 거짓을 말하니까. 잔인한 진실과 마주할 기회를 허용치 않으니까.” 이 시는 쉼보르스카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쓴 시라고 한다. 삶의 마지막, 그는 지도를 펼쳐놓고 세상을 들여다 보았던 것 같다. 그러면서 그 동안 살아오면서 겪었던 삶의 회한들을 떠올렸던 것 같다. 인생의 굴곡과 질곡이 없는 이들에게서 나올 수 없는 고백이다. "나는 지도가 좋다. 거짓을 말하니까."

 

28. 우리는 날마다 '잔인한 진실'을 마주하며 산다. 너무 잔인해서 어떤 이는 눈을 감아버리고, 어떤 이는 딴청을 피우고, 어떤 이는 스스로 생명을 마감하기도 한다. 혹시, '잔인한 진실' 때문에 삶이 힘들고 어렵거든 쉼보르스카처럼 지도를 펼쳐놓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그가 이 시의 다른 곳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듯이, 세상은 사실 별개 아닐 수 있으니까. "밀림은 나무 몇 그루로 표시되어 있어 그 속에서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29. 혹시, 삶의 현실 앞에서 여러 가지 일로 (사업(직장) 때문에, 가정 때문에, 자녀 때문에, 질병 때문에, 정치 때문에, 또는 순실이 때문에) 힘들고 어두운 터널을 건너고 있는 분이 있다면, 삶의 지도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눈 앞에 펼쳐놓기 바란다. 그리고 그분께 살포시 비스듬히기대어 보시라.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토대이신 우리 주님께서 비스듬히기대어 있는 바로 당신(여러분)에게 위로와 사랑이 가득한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렇게 속삭여 주실 것이다.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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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1. 9. 02:55

우리는 성도입니다

(하박국 2:1-4)

 

교회력이라는 게 있다. 교회력에 의하면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25번째 주일이기도 하지만, ‘만성절(All Saints Sunday)’이기도 하다. 교회력은 단순히 교회의 행사력이 아니다. 교회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에 들어가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영성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충만해야 한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교회를 이렇게 정의한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1:23). 이처럼 교회는 그리스도가 충만해야 한다. 다른 것이 충만해서는 안 된다. 오직, 교회는 그리스도가 충만해야 한다.

 

한국에는 차례라는 풍습이 있다. 고조부까지 4대의 신주를 모셔 놓고, 음식을 정성스럽게 차려 드리는 풍습이다. 차례를 지내는 과정 중 합문이라는 것이 있는데, 조상님이 식사를 할 수 있는 시간이다. 참사자들(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은 제청 밖으로 나가고 문을 닫거나, 제상 앞에 병풍을 가린 후 모두 엎드린다. 그러면 조상님들이 차려 놓은 음식을 먹는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조상님들께 차례를 지내는 이유는 조상님들의 영혼을 잘 달래주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야 조상님들이 살아 있는 자손들의 만사를 잘 돌봐주어 모든 일이 형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원래 제사는 한 달에 두 번, 초하루와 보름에 드렸고, 설날이나 추석 등 명절 때마다 드렸다. 물론 요즘은 명절 때만 차례를 드리는 풍습으로 바뀌었지만, 옛날에 종갓집 며느리는 제사상 준비하느라 인생을 모두 보낼 정도였다.

 

우리 나라뿐만이 아니라, 세계 어느 문명이든 돌아가신 조상들에 대한 예법이 존재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켈트어 문화권(오늘날의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지역)에서 지켰던 삼하인(Samhain)이 그것이다. 고대 켈트인들의 달력에 의하면, 새해는 111일에 시작한다. 그리고 새해를 시작하면서 어둠의 6개월이 전개되는데, 바로 이 때 영적인 존재들이 땅으로 내려와 활발하게 활동한다고 생각했다. 죽은 조상의 영혼이 다시 집을 찾아오는 날이라고도 생각했다. 이들이 심술을 부릴 수도 있기 때문에 이들의 비위를 맞추거나 막아낼 방법들도 고안해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1031일날 지키는 할로윈의 유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말이 할로윈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할로윈 데이할렐루야 데이’ (우리교회에서는 Saints Night)라고 바꿔 부르며 그날을 지킨다. 그런데, ‘할로윈은 세속적인 언어가 아니고 매우 기독교적인 용어이다. 켈트어로 할로우(Hallow)성인(Saint)을 가리킨다. 여기에 전야라는 뜻의 ‘eve’가 붙어서 할로윈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할로윈이란 크리스마스 이브처럼 무엇인가를 기리는 날의 전야제라는 뜻을 담고 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리는 전야제를 갖는다. 분위기가 최고조다. 할로윈은 성인들을 기리는 전야제를 갖는다. 물론 전야제이기 때문에 분위기 최고이다.

 

기독교인들은 켈트족에게 복음을 전한 뒤, 영적인 존재나 죽은 조상들을 기리는 삼하인이라는 풍습을 받아들여, 그날을 기독교의 성인들을 기념하는 날로 삼아 할로윈을 만들었다. 그것이 7세기와 8세기에 걸쳐서 생겨난 기독교의 전통인 만성절(All Saints Day)’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만성절 예배를 드리며 그와 연관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것이 워낙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낯선 켈트문화와 연관된 기독교 전통이다 보니, 한국교회에는 생소한 기독교 절기일 뿐이다. 그래도 우리는 미국에 살고 있다 보니, 한인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이해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할로윈 데이를 맞아 사람들이 기괴한 데코레이션과 기괴한 분장을 하는 것은, 그날의 분위기를 형상화시킨 것이다. 유령 또는 우리 말로 귀신을 표현할 때 우리는 흔히 기괴한 상상을 하게 된다. 기괴한 분장과 함께 각 집을 돌아다니며 ‘Trick or Treat’을 말하는 것은, ‘맛 있는 거 주지 않으면 장난칠거야라고 하는 것인데, ‘영혼을 달래주지 않으면 네 인생에 장난칠거야라는 영적인 존재의 위협이 담겨 있다. 물론 지금은 그러한 미신적인 요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재미로 그렇게 할 뿐이다.

 

할로윈(만성절)도 성탄절처럼 세속화되었다. 할로윈을 맞아 장사치들은 한 몫 챙기려는 마음만 있지, 할로윈(만성절)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그와 관련된 프랙티스(practice)에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은 할로윈을 단순히 재미로만 보낼 것이 아니라, 원래의 의미에 충실해서 기독교의 성인을 기리는 엄숙함을 보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세속에 휩쓸리면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세속을 거슬러 신앙의 가치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

 

성인의 규정은 기독교 전통(가톨릭, 정교회, 개신교)마다 다르다. 우리는 개신교회이기 때문에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성인(Saint)’ 또는 성도라고 부른다. 그래서 우리는 만성절을 지킬 때에 과거와 현재의 모든 크리스천들을 기념한다.

 

감리교 전통에서는 성인(聖人)들뿐 아니라 그 교회에서 돌아가신 분들 역시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로 지키기도 한다. 할로윈으로부터 시작되는 만성절은 이 땅을 걸어간 믿음의 선조들, 지금도 순교의 길을 걷고 있는 모든 성도의 삶을 기념하며 격려하는 날이다.

 

우리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성도라고 부른다. ‘성도라는 말에는 신실한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성도신실한 그리스도인을 일컫는 말이다. 구약의 언어(히브리어)로 이들을 하시딤(hasidim)’이라고 부르는데, 하시딤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헤세드(hesed)’에서 왔다. 헤세드는 영어로 ‘steadfast love’라고 하는데, 우리말로는 인자라고 번역한다. ‘성도(Saint, 하시딤)’란 인자하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물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분의 성품을 닮아간다는 뜻인데, 특별히 인자(헤세드)’의 성품을 닮는 것이다.

 

인자란 신실한 사랑’, ‘변함없는 사랑을 말한다. 하나님이 인자하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실신하시고 변함이 없으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 신실하고 변함없으신 사랑을 궁극적으로 보여주신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그런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향한 우리의 믿음이 신실하고 변함없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성경에서는 신실하고 변함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을 일컬어 의인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도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고 말한다.


우리는 성도를 단순히 교회 다니는 사람을 일컫고, 의인은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정도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성인)’의인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이해하는 성도의인과 다른 차원을 나타낸다. 우리는 이것을 깨달아 알아, 요즘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보편적인 성도의인의 의미와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의인의 거리감을 좁혀나가야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의인지복적인 존재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지복이란 궁극적인 복에 이른 사람을 일컫는 말인데, 인간에게 궁극적인 복이란 하나님을 직접 보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의인은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 믿음의 조상들은 모두 지복을 받은 사람들로 묘사된다. 모세 같은 사람을 생각하면 된다. 시내산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다. 사무엘도 엘리의 문하생으로 있으면서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다.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이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우리는 성경의 증언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신약시대로 넘어와서 구약의 성도의인의 개념은 그대로 이어진다.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성도의인이라고 부르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직접 대면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누구 때문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30).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본 자는 아버지 하나님을 본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뒤, 예수님을 주님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구세주로 고백했기 때문에 이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을 성도의인이라고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사람, 즉 성도답게, 의인답게 살았다.

 

현재 우리의 모습을 한 번 돌아 보자. 예수를 믿는 자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을 일컬어 성도의인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성경에서 증언되고 있는 하나님의 직접 대면한, 즉 예수를 믿는 성도의인의 삶과 많은 거리감이 존재하는 것 같다. 다른 것이 세속화가 아니라, 이것이 가장 궁극적이고 가슴 아픈 세속화이다.

 

22. 이 거리감을 좁히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신앙은 귀신놀이가 아니다. 신앙은 교양도 아니다. 죽은 조상님들에게 차례 지내는 것 같은 미신적인 풍습도 아니다. 신앙은 신적인 존재를 통하여 세속적 이익을 취해보려는 얄팍한 처세술도 아니다. 신앙이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려는 거룩한 행위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 즉 인자를 경험하고 그것을 내 것으로 삼아, 거룩한 삶을 살려고 하는 생명의 몸짓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는 거룩하고 신비로운 행위이다.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을 직접 대면했기 때문에 우리는 성도또는 의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성도란 하나님을 직접 대면했기 때문에, 그야말로 인자한 삶을 사는 존재입니다. 신실하고 변함없는 삶을 사는 존재이다.

 

만성절 주일(All Saints Sunday)을 맞아, 우리는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가를 다시 한 번 돌아봐야 한다. 우리는 성도(Saint)’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실하고 변함없으신, 즉 인자하신 하나님과 직접 대면한 사람들이다. 그것을 내가 얼마나 실제적으로 느끼고 깨닫는가가 다를 뿐이지, 예수를 믿는다면, 우리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분명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사람들이다. 그야말로 최고의 복, ‘지복을 받은 사람이다.

 

못 봤는데, 봤다고 우기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봤는데 본 줄도 모르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직접 대면했다. 문제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어리석은 자로 살면 안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10:23b). 그리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대면한 복된 자이므로, 복된 인생을 살아야 한다.

 

만성절 주일(All Saints Sunday)’을 지키는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지복이 다시 한 번 넘치길 축원한다. 우리는 만성절을 맞아 서로가 서로를 축하해 주고, 복을 빌어 주고, 격려해 주어야 한다. ‘성도의 삶이, ‘의인의 삶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서로에게 복을 빌어주자. “우리는 성도입니다.” “당신을 축복합니다!” “믿음으로 삽시다!” “복된 인생을 삽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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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1. 3. 17:02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비유 - 수수께끼)

(마가복음 4:1-20)


지금까지 (3장까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은 주로 질병을 치유하고 귀신을 내어쫓는 이적을 통해서 전해졌다. 그것 때문에 바알세불 논쟁까지 벌어졌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사역을 음해하는 세력들이 예수님을 바알세불의 수하로 몰아간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왜 어떤 이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어떤 이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거부하는 것일까? 이제 예수님은 치유와 이적을 넘어 가르침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신다.

 

오늘 말씀은 마가복음에 나오는 첫 번째 비유의 말씀이다. 이 첫 번째 비유는 앞으로 전개되는 예수님의 가르침, 특별히 비유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전제 역할을 한다. 비유(parable)는 감추는 효과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효과도 있다. 그리고 비유의 중요한 기능은 기존의 지식과 전통을 전복(뒤집어 엎는 것)시키는 것이다.

 

비유는 대학에서 한 학기 강의를 해도 부족한, 심원한 주제이다. <비유의 위력>이나 <어두운 간격>, 이런 책을 함께 읽으며 공부하면 참 좋은데, 그게 쉽지 않다 (적당한 때에 기회가 있을 것이다). 비유는 Metaphor(은유)Narrative(이야기)가 합쳐진 형태의 이야기이다. , 뭔가 감추어져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을 이야기의 형식으로 말해서, 그것이 드러나고, 전복시키는 문학 형식이다.

 

비유는 일종의 수수께끼와 같다. 인생도 어떻게 보면 수수께끼의 일종이다. 우리는 어릴 적에 친구들과 수수께끼를 하며 놀았다. 아이들 세계에서는 수수께끼가 가벼운 놀이일지 몰라도, 실제 인생에서 수수께끼는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를 담보한 지식과 무지사이의 투쟁이다.

 

그리스의 위대한 비극작가 소포클레스가 쓴 [오이디푸스 왕]이라는 비극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비극작품을 최고의 작품이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는 테베로 들어가는 관문에서 인간의 머리를 한 사자인 스핑크스를 만난다. 테베로 들어가는 모든 사람은 스핑크스와 한 판 겨루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수수께끼를 푸는 일이었다.

 

스핑크스는 테베로 들어가는 모든 사람에게 이와 같은 수수께끼를 냈다. “아침에는 네 발로 걷고 오후에는 두 발로 걷다가 밤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은 무엇이냐?” 이 수수께끼의 답은 무엇인가? 중요한 것은 이 수수께끼를 맞히면 목숨을 건지게 되고, 이 수수께끼를 맞히지 못하면 죽는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수수께끼는 인생에서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를 쥐고 있는 중요한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에 이렇게 답한다. “사람이다. 어려서는 네 손과 네 발로 기어다니며, 어른이 되어서는 두 다리로 걸어다니고, 늙어서는 지팡이에 의지해서 걷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에 대한 정답을 말했다. 그 순간 스핑크스는 스스로 죽고, 오이디푸스는 안전하게 테베에 입성하게 된다.

 

구약성경 중 사시기에도 생사를 가르는 중대한 수수께끼를 둘러싼 이야기가 나온다. 바로 삼손 이야기이다. 삼손은 블레셋의 딤나 여인과의 결혼 잔치에서 잔치 자리에 함께 한 30여명의 친구들에게 수수께끼를 낸다. 그러면서 자기가 낸 수수께끼를 맞히면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삼손은 반대로 수수께끼를 못 맞히면 똑 같은 것을 자신에게 줄 것을 요구한다. 삼손이 그들에게 낸 수수께끼는 이런 것이었다.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불행하게도 아무도 삼손이 낸 수수께끼를 못 맞힌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은 블레셋 여인인 삼손의 아내(딤나 여인)를 협박하여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올 것을 요구한다. 삼손의 아내는 울면서 수수께끼의 답을 알려달라고 삼손에게 구걸하고, 삼손은 가엾은 마음에 그 답을 아내에게 알려준다.

 

삼손의 아내를 협박하여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낸 블레셋 친구들은 잔치가 끝나기 전 삼손에게 수수께끼의 답을 이렇게 말한다.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 이 답을 들은 삼손은 자신이 아내에게 속은 줄 알고 분노하여 아스글론에 내려가 블레셋 사람 30명을 쳐죽이고, 그들에게 옷을 빼앗아 수수께끼의 답을 맞춘 블레셋 친구들에게 주고, 또한 그 블레셋 아내도 버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이처럼, 수수께끼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고 생사가 왔다 갔다 하는 중요한 삶의 질문이다.

 

예수님의 비유는 이러한 기능을 한다. ,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인간에게 수수께끼를 내시는 것이다. 그것을 맞히면 천국에 들어가지만, 그것을 못 맞히면 천국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11).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수수께끼와 같다. 수수께끼와 같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온전히 반응하는 자만이 하나님 나라를 삶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다.

 

오늘 말씀 중, 12절 말씀은 세심한 주의를 요구하는 말씀이다. 잘못 이해하면 매우 배타적인 말씀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특별히 한국말 성경은 이것을 조금 애매모호하게, 잘못 번역한 듯싶다. 영어성경을 보면 12절 말씀이 전하고 싶은 뜻이 좀 더 잘 드러난다.

 

So that while seeing, they may see and not perceive,

and while hearing, they may hear and not understand,

otherwise they might return and be forgiven. (NASB)

 

They may indeed look, but not perceive,

and may indeed listen, but not understand;

so that they may not turn again and be forgiven. (NRSV)

 

한국어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비유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하시는 이유는 보아도 알지 못하게 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 매우 배타적인 진술로 들린다. 사람들이 구원 받지 못하게 하도록 알지 못하게 하고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린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12절 말씀의 뜻이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풀어서 설명하면, ‘그들이 보았어도 인식을 하지 못하고, 들었어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렇지 않고, 그들이 보고 인식했다면, 들은 뒤 이해했다면, 그들은 분명 돌아와서 용서를 받았을 것이다라는 뜻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중요한 것은 만약 우리가 보았다면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고, 들었다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인식하고 이해한다면 우리는 분명 하나님께 돌아와 용서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성경의 이야기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이다. 탕자는 아버지와 함께 한 집에서 살 때 아버지의 사랑을 보았으면서도 인식하지 못했고 들었으면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뿌리치고 자신의 재산을 챙겨 먼 나라로 떠났다. 그런데, 그는 먼 나라에서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인생의 바닥을 경험했을 때, 불현듯 아버지의 사랑을 인식하고 이해했다. 그래서 그가 한 일은 회개와 더불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의 집에 돌아와 이전과는 다른 인식과 이해를 가지고 아버지의 사랑을 보고 듣는다.

 

하나님의 말씀(하나님 나라 복음)을 들었을 때, 그것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일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흥미와 무관심의 문제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 , ‘구원 받느냐 아니냐의 중차대한 기로에 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식(perceive)하고 이해(understand)하는 일은 우리의 태도와 행동을 결정짓는다. 예수님의 사역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현상처럼, 그리고 탕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인식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곁은 떠나고 아버지 집을 떠난다. 그러나, 인식하고 이해한 사람들은 예수님 곁에 남아 있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일상생활(신앙생활, 그리스도인에게는 일상생활이 곧 신앙생활이다)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던져주시는 수수께끼를 잘 풀어야 한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수수께끼에 시험에 들면 안 된다. 그것은 스핑크스에게 잡아 먹혀 결국 테베에 입성하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수수께끼를 잘 풀어 생명을 얻어야 한다. 생명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시험에 들어 스핑크스에게 잡아 먹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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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1. 1. 14:30

엎드림

(여호수아 7:1-10)


오늘 말씀은 여리고 성 전투에 이은 아이 성 전투 이야기이다. 여리고 성 전투와 아이 성 전투 이야기는 동전의 양면 같은 이야기이지만 그 결과는 매우 다르다. 그래서, “라는 질문을 불러 일으킨다.

 

여리고 성 전투는 이 노래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여호수아 성을 쳤네 여리고 여리고 여리고

여호수아 성을 쳤네 여리고 성이 무너졌도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6일 동안 매일 한 바퀴씩 여리고 성 주위를 돌았고, 마지막 7일 째 7곱 바퀴를 돈 뒤, 나팔 소리가 나면 모든 백성이 큰 함성 소리를 질렀다. 마지막 7일째 내려진, 하나님의 명령은 다음 세 가지였다.

 

1)    제사장들의 나팔 부는 소리가 들리면 큰 소리로 외치라

2)    라합과 그 가족을 살려주라

3)    전리품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다’ (헤렘법)

 

외양적으로 보면, 여리고 성 전투는 완벽한 것처럼 보인다. 여리고 성 전투를 전하고 있는 6장 말씀은 이렇게 끝난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하시니 여호수아의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6:27).

 

그런데, 아이 성 전투를 전하고 있는 7장 말씀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7:1).

 

아직 아이 성 전투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아이 성 전투 이야기를 읽는 독자들은 아이 성 전투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게 된다. 아이 성 전투가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사실, 이 부분은 스토리 기법의 전문 용어로 서스펜스라고 한다. 연극이나 영화에서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사용되는 기법인데, 이야기 속 등장인물 중 적어도 한 명 이상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관객에게 누설될 때 아이러니가 발생하고, 그로 인해서 서스펜스가 형성된다. 이는 모두가 감춰져 있는 그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인식) 서스펜스가 발생하여 스토리에 몰입한 관객들은 가슴 졸이며 지켜보도록 만드는 강력한 도구다.

 

영화 감독 중, 서스펜스의 대가로 불리는 이가 있다. 알프레도 히치콕이다. 히치콕이 어느 강연에서 서스팬스와 서프라이즈의 차이를 명쾌하게 설명하여 정의 내린 적이 있다. 우리가 사소한 잡담을 나누며 앉아 있는 식탁 밑에 폭탄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다가 갑자기 쾅 하고 폭탄이 터지면 관객들은 깜짝 놀라게 된다. 이것은 서프라이즈다. 아무도 모르다가 갑자기 어떤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스펜스는 이와 다르다. 누군가 폭탄을 설치하는 장면을 관객들에게 미리 보여 주었다면, 관객들은 폭탄이 언제 터질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면서 사소한 장면에도 몰입하게 된다. [김정희, 스토리텔링이란 무엇인가, 52쪽]

 

아이 성 전투 이야기를 다 안다고 생각하며 설렁설렁 말씀을 듣지 말고, 서스펜스 기법에 몰두해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말씀을 들어보시라. 특별히 라는 질문을 마음 속에 품는 게 중요하다. 왜 아이 성 전투는 이렇게 허무한 결과를 가져왔는가?

 

아이 성 전투는 여리고 성 전투와는 매우 대조적이다. 여리고 성 전투나 아이 성 전투를 비교해 보면, 정탐하는 것은 똑같다. 오늘 2절 말씀도 보면, 아이 성 전투는 정탐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쪽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2).

 

그런데, 명확히 다른 것이 있다. 아이 성 정탐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없다. 여리고 성 정탐은 매우 어려웠다. 정탐꾼들이 죽을 뻔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기생 라합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다. 아이 성 정탐은 상대적으로 쉬웠다. 정탐하면서 어떤 일이 전혀 벌어지지 않았다. 매우 순조로웠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런 하나님의 역사가 없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이 형통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무 일도 안 일어 나는 것이 형통인가? 아니면, 무슨 일이 일어나서 그 일 때문에 힘들어도 그 안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형통인가? 우리를 힘들게 하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건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 살면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혹시 그 사건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라. 어떤 사건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힘들고 불행한 일이다. 물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어떤 어려운 일이 일어나기를 바랄 필요는 없다. 바라지 않아도, 우리의 삶은 사건의 연속이다.

 

아이 성 전투의 다른 점 또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이 없다는 것이다. 여리고 성을 치르기 전,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6:2). 그리고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명령을 주신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시고,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며 명령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백성은 여호수아의 음성을 들었다. 그런데, 아이 성 전투에는 그런 게 전혀 없다. 아이 성 전투에서는 정탐꾼이 여호수아에게 말하고, 여호수아는 그 말을 따른다. 정탐꾼과 여호수아의 음성만 있을 뿐, 하나님의 음성이 전혀 없다.

 

2016818, 인생의 중요한 사건을 놓아두고 기도하던 중 내가 쓴 짤막한 글이다.

 

일이 잘 안 되어서 고통 받는 것보다 일이 잘 되기를 기도하느라 고통 받는 것이 훨씬,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낫다. 일이 잘 안 되어 받는 고통은 아픔을 주지만, 기도하느라 받는 고통은 기쁨을 준다. 기도의 고통은 치유하는 능력과 감추어진 것을 보게 하는 능력이 있다. 온전해질 수 있고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자기를 굴복시켜 기도의 자리에서 고통 받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만 몰랐지, 7 1절의 말씀을 읽으면서 아이 성 전투에 임한 성경의 독자들은 모두 아이 성 전투의 결과를 짐작했다. 결국 아이 성 전투는 패배로 끝난다. 너무 허무하게 끝난다. 정탐꾼의 말대로 3천 명의 군사만 올려 보냈다가 별다른 전투도 해보지 못하고 36명의 전사자만 낸 채 허무하게 패배하고 만다. 그 허무한 전투의 패배로 인해, 여리고 성의 승리의 기쁨은 온 데 간데 없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큰 슬픔에 빠지고 만다.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된지라”(5).

 

이에, 여호수아는 절망에 빠져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주여 이스라엘이 그 원수들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6-8).

 

여리고 성 이야기와 아이 성 이야기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이야기이다. 여리고 성 전투는 외적인 전투의 이야기이고, 아이 성 전투는 내적인 전투의 이야기이다. 외적인 전투(여리고 성)를 아무리 잘해도, 내적인 전투(아이 성)에서 무너지면 결국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 부끄러움과 고통을 당하게 된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2-3).

 

사랑하는 여러분, 큰 일, 위대한 일을 이루려 하지 말고, 이 마음을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시는 데 전력을 다 하시라. 큰 일, 위대한 일은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신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헤렘법을 지키는 것이다. ,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아간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 백성이 실패하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헤렘법)이다. 아이 성 전투는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준다. 여호수아는 아이 성 전투 패배 뒤에, 하나님께 엎드린다’. 엎드리는 것은 기도의 자세이다. 민수기서에 보면 모세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 모세의 제자 여호수아는 모세에게서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 하나만은 확실해 배웠던 것 같다. 문제가 발생하니까 여호수아도 모세처럼 하나님 앞에 바짝 엎드린다.

 

엎드림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무슨 일을 하기 전의 엎드림이고, 다른 하나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의 엎드림이다. 둘 다 중요하다. 그런데 무엇이 더 어려운 것 같은가?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 전투를 앞두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 전투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아이 성 전투를 앞두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아이 성 전투에서 패배했다.

 

그런데, 신앙의 선조 여호수아의 위대함은 패배 후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다는 데 있다. 어떤 일을 앞두고 기도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그 일이 잘 되기 위한 간절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떠한 일이 잘 되지 않아 깊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일이 잘 되지 않으면 보통 사람들은 반발심이 일어나 하나님을 욕하고 부인한다. 엎드리기는커녕 고개를 쳐든다.

 

사랑하는 여러분,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거든, 계획처럼, 또는 기도한 대로 일이 잘 되지 않거든, 당황하거나 분노하지 마시고, 여호수아처럼 다시 한 번 엎드려 보시라.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 앞에 엎드린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10).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왜 아이 성 전투에서 패배하게 되었는지,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알려주신다. 벌써, 앞으로의 아이 성 전투가 어떻게 될 지 이 한 마디를 통해 예상이 되지 않는가?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엎드리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기도는 고통의 자리이다. 쉽지 않다.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대개 사람들은 엎드리는 일, 기도하는 고통의 자리로 오지 않는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일이 잘 안 되어서 고통 받는 것보다 일이 잘 되기를 기도하느라 고통 받는 것이 훨씬,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낫다. 일이 잘 안 되어 받는 고통은 아픔과 부끄러움을 주지만, 기도하느라 받는 고통은 기쁨과 승리를 준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요즘 개신교의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개혁개혁을 외친다. 그러나, 개혁은 외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다. 외적인 전투(여리고 성 전투)에서 아무리 승리했어도, 내적인 전투(아이 성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울리는 꾕과리에 불과하다. 시끄럽기만 하지 열매가 없다.

 

우리 구주 예수님은 일을 앞두고(십자가) 엎드리는 일, 기도의 고통의 자리로 들어서는 일을 기꺼이 감당하셨다. 그랬더니,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패배)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승리를 온 몸으로 안으셨다. 이제 우리가 여호수아서 8장에서 보게 되겠지만(이것이 궁금하신 분들은 토요일 새벽기도에 나오시라!), 기도의 고통의 자리로 기꺼이 들어간 여호수아는 아이 성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나 아이 성의 큰 승리’, 부활의 승리를 온 몸으로 경험하게 된다.


부활의 승리는 믿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어느 자리에 있는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크고 위대한 일은 우리 주님께서 이루어주신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크고 위대한 일이 아니라, 주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오직, 주님께만 마음을 두라. 갈보리 언덕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엎드린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며 우리와 함께 부활하실 것이다. 나는 그것을 믿기에, 오늘도 주 앞에 엎드린다.

 

엎드림을 간구하는 기도

 

주여, 엎드리게 하옵소서.

아이 성 패배의 아픔이 쓰라리고 부끄럽더라도

고개를 쳐들고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지 말게 하시고

오직 주 앞에서 엎드려

주의 선하심을 간구하게 하옵소서.

여호수아가 위대한 신앙의 선조가 된 것은

그가 전쟁에 능한 용사이기 때문이 아니요

그가 크고 위대한 일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요,

그가 스승 모세에게 배운 가장 중요한 한 가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주 앞에 엎드린 것 때문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외적인 전투에서 아무리 큰 승리를 거두었어도

내적인 전투에서 패배하면 울리는 꽹과리처럼

시끄러운 쇳소리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셔서

이 마음이 오직 주를 향하여 엎드린

겸손한 주의 종이 되게 하옵소서.

주 앞에 엎드리는 고통을

기꺼이 감당하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기꺼이 엎드린 우리에게도

찬란하게 임하게 되는 줄 믿사옵나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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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0. 27. 07:02

예수님의 가족

(마가복음 3:20-35)

 

오늘 말씀은 샌드위치 구조로 되어 있다. , 예수님의 가족이 예수님을 찾으러 온 이야기 속에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과의 바알세불 논쟁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는 구조다. 구조를 보자면, 예수님의 가족 이야기로 시작해서, 중간에 바알세불 논쟁이 들어가고, 마지막에 예수님의 가족 이야기로 끝나는 구조다. 이야기의 샌드위치 구조는 마가복음의 특징이다.

 

예수님의 가족이 예수님을 붙들러 왔다.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통해 (또는 귀신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요,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진 자요, 하나님 나라의 왕이라고 드러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완전히 정신이 나갔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가 미쳤다는 헬라어의 엑세스테를 옮긴 것인데, ‘온전했던 정신을 다른 곳에 두다또는 정신이 나가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신천지 이만희: 자기 자신이 보혜사 성령이다. 자신만이 봉인된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이 사람은 미쳤거나, 진짜이거나 할 것이다.) 이런 사람을 보면, 세 가지의 의문을 가질 수 있다. 1) 자기가 주장하는 것을 실제로 믿는 확신범인가 2) 자기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기꾼인가 3) 진짜 진리를 전하는 하나님의 아들인가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성경 전문가)은 바알세불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은 예수님이 바알세불, 혹은 귀신들의 우두머리를 힘입어 귀신들을 쫓아낸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는 일을 주술로 이해했다. 그 당시 주술은 중범죄로 취급했다. (미쉬나 산헤드린 7:4). , 그들은 예수님이 치료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바알세불(사탄)의 힘을 빌어 주술을 시행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논리적인 대답을 펼치신다. ‘만약 하나님께 대항해 싸우고 있는 사탄이 다른 사탄을 사람에게서 내쫓는다면 이것은 스스로 분쟁하는 일이 되어 자신의 세력에 타격을 주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의 사역은 사탄의 역사일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교회 공동체가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같은 편끼리의 분쟁은 좋지 못하다. 자신의 힘을 약화시킬 뿐이다.

 

이야기 1)

작은 어항 속에 금붕어 두 마리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미워하면서 툭하면 싸웠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대판 싸웠다. 결국 그 중에서 많이 다친 금붕어는 상처를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살아남은 금붕어 한 마리는 이제 편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며 좋아했다. 그런데 죽은 물고기가 악취를 내면서 물을 썩게 만들더니, 결국 살아 있던 한 마리 금붕어도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이야기 2)

두 수도승이 오랫동안 화목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자신들의 생활이 단조롭다고 느낀 한 수도승이 말하였다. "매일매일의 따분한 이 생활을 한번 다르게 바꿔 봅시다. 수도원 밖에 사는 사람들처럼 살아보는 게 어떨까요?" 너무 오랫동안 수도원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다른 수도승은 세상 사람들이 어떤 생활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 잘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들이 무엇을 하면서 사는데요?"

"그들이 행하는 것 중에 하나가 분쟁이라는 것입니다."그러나 다른 수도승은 거룩한 사랑의 생활을 오랫동안 해왔기 때문에 싸움을 어떻게 하는지 잊어버렸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싸우는데요?"

수도승이 말하였다.

"저 돌을 보십시오. 그것을 우리 사이에 두고 `이 돌은 내 것이야.'라고 서로 우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제안을 했던 수도승이 잠시 생각하고 나더니 자신들 의 오랜 우정에 위협을 느끼고는 이렇게 결정하였다.

"형제님, 이 돌을 당신 것이라고 하시고 가지십시오." 분쟁은 일어나기도 전에 끝났다.

( R. 리브)


둘 중의 어느 이야기가 더 마음에 감동적인가? 금붕어 이야기는 쓴 웃음을 유발하고, 수도승들의 이야기는 감동을 유발한다. 금붕어 이야기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비춰주고, 수도승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꿈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도승들의 이야기가 더 감동적이다. 왜 더 감동적인가? 사실, 그리스도인으로서 수도승들처럼 살아야 하는 줄 알면서도 이렇게 살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함 때문이다.

 

평화는 우리 삶을 행복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이다. 평화로운 자아, 평화로운 가정, 평화로운 교회, 평화로운 나라, 평화로운 지구를 만들어가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결코 멈추어서는 안 된다. 평화는 그냥 오지 않는다. 부지런한 자기 비하에서 온다. 자기 비하란 자기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비워내는 것이다.

 

 

성경은 인류의 평화를 깨는 요소를 세 가지 지목한다. 죽음, , 질병이 그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그것을 사탄이 지배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예수님이 죽음, , 질병을 물리치는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는 이유는 예수님이 강한자를 공격하심으로 사탄의 나라를 결박하시고, ‘죽음, , 질병이 없는 하나님 나를 가져오시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강한자(사탄)를 결박하는 것은 유대 묵시 사상의 특징이고, 기독교 종말론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시는 사역은 그저 귀신 들린 사람을 치유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확대되고 있음을 알린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알세불 논쟁을 하시며, ‘성령을 거스르는 죄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오늘 말씀에는 성령을 모독하는 자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대조되고 있다.

 

성령을 거스르는 죄는 블라스페미아라는 말로 표현된다. 이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말이다. 예수님은 특히 다른 죄는 용서를 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다고 선언하신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도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거절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능력을 거부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죄 용서 능력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오늘 말씀의 문맥 상,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결국, 이 논쟁을 통해서 마가복음 공동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역시 예수가 누구냐에 대한 대답이다.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는 여느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그래서 그의 가족들이 예수를 붙들러 온 것처럼 미친자가 아니다. 예수는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메시아이다.

 

현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메시아(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주님)로 인정하고 믿고 따르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예수의 사역(하나님 나라 사역)을 믿지 못하고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 사람들이 많았다. 예수를 미친 자로 생각하는 자는 예수를 떠날 것이고, 예수를 메시아로 생각하는 자들은 예수를 따를 것이다. 그러나, 마가복음 공동체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사역을 근본적으로 성령에 의한 사역으로 보았고, 사람들에게 메시아이신 예수를 따를 것을 강력하게 증언하고 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아는 게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의 관심, 교회의 관심은 예수님께서 하신 하나님 나라 사역에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앙인은 단순히 우리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 속에 예수를 끌어들여 이용하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하나님 나라 사역에 동참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회심이란 그런 것이다. 처음에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예수님을 자신의 인생에 끌어들이지만, 결국에는 반대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사역에 동참하여 자기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예수님은 서기관들과의 바알세불 논쟁을 마무리 지으면서 누가 나의 가족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시선을 돌리신다. 예수님을 둘러싼 무리들은 예수님께 아뢨다.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32).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왔다는데, 나가서 맞이하거나 사람을 시켜 잠시 기다리고 있으라거나 해야 맞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말에 이렇게 대응하신다. “누가 내 어머니며 내 동생들이냐?”

 

예수님은 누가 하나님 나라의 가족인지 새로운 정의를 내려주신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35). 이것은 오늘 말씀의 처음에 언급했던 성령을 모독하는 자와 대비되는 말이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거부할 뿐 아니라 예수를 대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 운동에 동참하며 헌신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즉 믿음이란 예수 믿고 구원 받아 천국간다의 개념이 아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받아들이고 동참하여, 예수님이 행하신 죽음과 죄와 질병을 몰아내는 일, 즉 사탄(귀신)을 몰아내는 일을 계속하여 감당하는 것이다. 그런 자가 예수님의 가족이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것이다.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 눌려 있는가? 아니면, 죄와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 우리는 진실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이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자는 주님께서 그 모든 것을 더해주실 뿐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가족이라 칭하여 주신다.

 

주님의 가족이라면,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도대체 우리의 일이 사탄의 세력을 몰아내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이 아니고 무엇일 수 있겠는가? "형제님, 이 돌을 당신 것이라고 하시고 가지십시오." 주님은 평화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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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0. 27. 06:59

특별한 부르심

(마가복음 3:7-19)


3 7-12절은 116절에서 35절까지의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을 요약하고 있다. 이 부분은 지금까지의 갈릴리 전기 사역을 요약하고 앞으로 있을 갈릴리 후기 사역을 전망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전기 사역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유대 전역에서 폭넓은 대중의 지지를 확보했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귀신들까지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식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귀신들에게 침묵할 것을 명령했다.

 

왜 예수님은 귀신들에게 침묵할 것을 명령하는가? ‘경고하다(에피티마오)’는 경고나 꾸짖음과 같은 강한 의미의 동사이다. 이는 마가복음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메시아의 비밀의 주제를 담고 있다. 예수님의 정체성은 감춰져 있다. 사실 아직까지 감춰져 있다. 예수의 메시아성(메시아되심)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도 사람들이 안 믿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갈리는 이유는 바로 예수의 메시아성이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님의 메시아되심(메시아성)이 온 세상에 완전히 드러날 날이 온다. 그날을 종말이라고 한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종말은 단순히 세상의 끝이 아니라, 예수의 메시아성이 완전히 드러나는 날을 말한다. 이미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고 섬기는 이들에게는 복이 있다. 우리는 정말로 특별한 사람들이고 선택 받은 사람들이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제자 열 둘을 세우신다. 이것은 제자들을 선발하시는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을 부르셨다. 이것은 갈릴리 후기 사역을 위한 준비였다.

 

사역은 혼자서 하는 게 아니다. 교회에는 헌신된 사역자가 꼭 세워져야 한다. 교회 다니면서 마음 속에 품어야 하는 것은 헌신된 사역자로 세워져 가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사역은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을 이어서 하는 것이다. 교회의 사역은 우리가 주님의 제자이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지이다. 교회 다니면서 교회 사역을 안 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주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고, 스스로 구원에서 멀리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다. 교회의 사역자는 단순히 교회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드러내신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자이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드러났다. 그리스도의 인격사역이라는 말을 깊이 묵상해야 한다. ‘인격이란 지속적인 자아를 가리킨다. 심신의 변화에 따라 변하는 자아가 아니라, 심신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자아를 인격이라고 한다. ‘사역하는 일이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그 사람이 하는 일을 보면 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이유는 그분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나의 인격과 사역(하는 일)이 그리스도를 담아내고 있는지를 늘 돌아보아야 한다.

 

KBS 2TV '제보자들'에서는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 앞에서 시위하는 한 남성의 사연이 소개됐다. 이 남자는 자신의 아내와 교회 목사가 불륜을 저질렀다며 아들의 유전자 감식을 병원에 의뢰했다. 그리고 감식 결과, 99.99%의 확률로 목사의 아들임이 밝혀져 충격을 줬다. 그런데 아내는 "결과가 그렇게 나왔어도 아들이 하나님의 자식인 것은 때려죽여도 사실이다"라고 말하고 있고, 목사는 "(그 여성이)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며 기도해달라고 해서 기도를 했다" "기도한 것 외에는 없다, 불륜 관계는 아니었다고 발뺌을 했다. 그러면서 그 목사는 그 아이는 기도해서 생긴 아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런 것을 보고, 이들의 인격과 사역이 그리스도를 담아내고 있다고 볼 수 없다.

 

사도행전에도 보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서 벗어난 일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들이다. 사도행전 1장부터 4장까지 보면,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예수님의 명령대로 예루살렘에 모여 기도하던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받아 어떻게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재현했는 지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이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입은 그리스도인이 되니까,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되고,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고, 한 마음이 되고, 모이기를 힘쓰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고,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과 필요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서로를 뜨겁게 사랑했다.

 

그런데, 사도행전 5장에 가면, 이러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드러낸 일과 정 반대되는 일이 발생하는데,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자신의 재산이 아까워서 얼마간 감추어 두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둔 일이 소개되고 있다. 사도행전은 이 일을 베드로의 입을 빌려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이것은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한 것이다!”(5:3-4).

 

성령이 마음에 내주하시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 우리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드러난다. 그러나, 사탄에게 이 마음을 빼앗기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은 사탄에 의해서 우리의 인격과 사역을 통하여 자취를 감추고, 나를 죽이고 공동체를 죽이는 일로 돌변하고 만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을 특별히 부르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특별한 사명을 위임하신다. 이 위임은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부여된 위임이다. 모든 교회는 이것을 위해 한 마음으로 달려가야 한다. 이것을 하고 있지 않는 교회는 교회라 할 수 없고, 이것을 하고 있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다.

 

4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은 열 둘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무엇을 위임하셨는지 구체적으로 나온다.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14-15).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시는데, 자신과 함께 있게 하시려 부르신다.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는 주님과 동행하는가?” 하나님의 역사는 주님과 동행하는 자를 통해서 일어난다. 구약에서 대표적인 자가 에녹과 노아이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에녹이 어떤 사람인지 이렇게 소개되고 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세상을 떠나더라도, 하나님이 데려간 사람이 되어야지, 누가 데려갔는지 모르면 안 된다. 그것만큼 비참한 인생이 어디 있는가?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더니, 하나님이 데려가셨다.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라. 오늘 내가 죽는다면, 내 죽음은 그냥 개죽음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데려가신 죽음인가?

 

창세기 6장에 보면, 노아 이야기가 나온다. 창세기 6장은 노아를 이렇게 소개한다.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6:9).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알리시고 세상을 구원할 방도를 알려 주신다.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 덕분에 세상은 홍수로 인해 멸망하지 않고 여태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나는 주님과 동행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누구와 동행하고 있는가? 돌아보고 또 돌아보자.

 

예수님이 우리(제자)를 부르시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주님의 보내심을 받아 전도하게 하기 위해서 이다. 전도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말한다. ‘복음(유앙겔리온)’은 예수님의 왕되심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왔다!)를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복음 전하는 일은 귀신을 내어 쫓는 일을 수반한다. 복음 전하는 자는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를 가진다. 이게 중요하다. 복음 전하는 자는 귀신을 내어 쫓아야 한다. 그런데, 어떤가? 위에서 보았던 제보자들의 방송을 통해서 보는 저들의 모습은 귀신을 내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귀신을 불러들이고 있다. 음란 귀신을 내쫓아야 하는데, 그들은 음란 귀신을 오히려 불러들여 처참한 죄악을 저지르고 있다.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에서도 보면, 탐욕 귀신을 내쫓아야 하는데, 그들은 오히려 탐욕 귀신을 불러드린다.

 

여러분을 죄악으로 옭아매는 귀신을 내어 쫓으라!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갖는 권세이다. 귀신을 내어 쫓지 못하니까,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귀신을 불러들여 죄악에 얽매인 자가 어떻게, 무슨 힘으로 복음을 세상에 나가 당당하게, 두려움 없이 전하겠는가? 이런 말이나 듣지 않겠는가! “너나 잘하세요!”

 

우리는 예수님께 특별한 부르심을 받는 자들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른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부른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일컬어 붙여준 이름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사도행전 11장의 안디옥에서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가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11:25-26).

 

그리스도에게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은 1)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고, 2) 예수 그리스도의 왕되심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며 우리를 죄악에 얽매이게 하는 귀신을 내쫓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한 부르심에 우리는 잘 응답하며 살고 있는가. 특별한 부르심을 입은 자답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인격과 사역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담아내는 믿음의 자녀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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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0. 24. 14:39

파루시아를 살다

(로마서 12:1-8)


흔적

 

발자국은 몸이 눌리는 중력만큼 흔적을 남기지만

심장은 사랑의 무게만큼 흔적을 남긴다

돌아서서 갈 곳이 없다는 것은 축복이다

여기까지 힘들게 온 흔적에 대하여 걱정할 필요없다

네가 지우지 않아도 바람이 지운다

바람은 너를 따라다니는 운명이다

흔적이 깊이 패인만큼 바람은 세차게 분다

 

바람이 세차게 분다

........................................................................................

 

1. 교회력으로 우리는 지금 성령강림절 후 스물 세 번째주일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곧 있으면 강림절(대림절)’이 온다. ‘강림절은 성탄절을 기다리는 절기인데, 성탄절에 온 세상이 기다리던 메시아(그리스도)가 이 땅에 강림하신다. 메시아(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인하여, 이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메시아(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 모든 만물은 새롭게 되었다.

 

2. <파루시아를 살다>는 개인적으로, 나의 인생관이다. (물론 오늘 말씀에서 나의 개인적인 인생관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파루시아는 문자적으로 강림이라는 뜻이고, 신학적으로는 종말을 뜻한다. 모든 우주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되는 때를 뜻한다. ‘파루시아를 산다는 것은, 그러한 때를 갈망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새로운 피조물로서 바로 지금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파루시아(강림)을 산다는 것은 2천 년 전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음 안에서 이미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 사는 것이고, 이제 다시 오셔서 모든 만물을 새롭게 하신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며 희망을 잃지 않고 사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궁극적인 삶의 지향점을 말하고 있다. 오늘 말씀이 그것을 말해준다.

 

3. 바울의 편지(서신)의 특징은 앞부분에서는 교리를 말하고, 뒷부분에서는 실천을 권면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의 앞부분 (1장부터 11장까지)에서 길게 교리를 쓴 후 이어서 실천적 권면(12장부터 15장까지)을 쓴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을 이해하려면 로마서의 앞부분에 대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로마서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진 내용이니, 로마서 앞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 데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다.

 

3. 우리는 흔히 교리를 어려운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는 매우 지루한 것이고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 생각한다. 교리뿐만이 아니라, 실천도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오히려 실천이 교리보다 어렵다고 말한다. 

 

4.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 교리는 지루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실천은 어려운 게 아니라,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다.

 

5. 좀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교리는 연애이고, 실천은 결혼생활이다. 연애가 어려운가? 결혼생활이 어려운가? 교리는 좀 복잡하지만 어렵지 않다. 연애는 좀 복잡하지만 어렵지 않다. ? 사랑에 취해 있으니까. (연애할 때 참 힘들었다. 여자들은 왜 그러나?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모르는 시한 폭탄? 다시는 연애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연애할 때의 그 달콤한 로맨스는 늘 로망의 대상이다.)

 

6. 실천은 복잡하지 않지만 어렵다. 결혼생활은 복잡하지 않지만 어렵다. ? 실재의 삶이니까. 현실이니까. (결혼했기 때문에 이미 서로 밀고 당기는 복잡한 관계의 메커니즘 같은 것은 없다. 그러나, 결혼한 후부터 삶의 전쟁이 시작된다.)

 

7. 로마서 12:1-2는 실천적 권면의 대전제와 같은 선언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8.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기독교 윤리 생활, 기독교 신앙생활의 기초에 필요한 두 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하나님께 자신을 헌신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적인 생각과 가치관이 변화되어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일이다.

 

9.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 (엉망으로 사는 게 아니라, 똑바로 사는 것)동기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 내지는 복음의 깨달음이다. , 하나님이 얼마나 풍성한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지, 구원의 목적과 소명이 무엇인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윤리적 삶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 응답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 1장에서 11장에 걸쳐 말하고 있다.

 

10. 상대방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 삶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이 무엇인지 등을 알아야, ‘will you marry me?’ ‘Yes’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것이다. 연애가 어려운 이유는 서로에게 이러한 것을 확인해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11. 상대방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두려움 없이 결혼하여 서로 간에 헌신할 수 있는 것이다. 그처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두려움 없는 온전한 헌신이 가능해진다.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되지 못하는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12. 옛날에 한창 잘나가던 개그맨, 장두석이라고 있다. 부채도사 코너로 유명한데, 장두석은 음반까지 낸 뮤지션이기도 하다. 그의 노래 중에 이런 노래가 있다. – ‘사랑한다 해도 듣지를 않네~’

 

13. 우리는 이런 의문을 품는다.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믿니?” 그러나, 성경을 딱 한마디로 말하자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못 믿는 이유도 간단하다. 성경을 진지하게 보지 않기 때문이다. 드라마 볼 시간은 있어도, 성경 볼 시간은 없다. 아무리 피곤해도 드라마는 다 본다. 그런데, 하나님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에는 관심을 두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연약함이다.

 

14.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나면, 그 사랑 가운데서 살지 않을 수 없다. 연예하면서 나에 대한 상대방의 사랑의 확인하고 나면, 결혼을 결심하게 된다. 사도 바울이 오늘 말씀에서 힘주어 말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나면, 그리스도인은 이 세대(아이온)가 아니라 올 세대(파루시아, 강림)를 살 수 밖에 없다. 이것을 <춘향전>을 통해서 설명해 보려 한다.

 

15. 한국 사람은 <춘향전>을 안다. 거기에 보면, 춘향이는 이몽룡에 대한 사랑을 확인했기에 이몽룡에게 헌신하며 수절할 수 있었던 것이다. 춘향이는 퇴기 월매의 딸이다. 이몽룡은 남원부사의 아들이다. 둘은 몸종 향단이와 방자의 도움을 통해서 사랑을 키워간다. 사랑이 무르익어 백년가약에 대한 마음을 굳혀가던 때 그들에게는 시련이 다가온다. 남원부사였던 몽룡의 아버지가 한양으로 발령이 나서, 몽룡의 가족은 한양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그 사건으로 둘은 헤어질 위기에 처해진다. 그러나, 몽룡은 춘향에게 꼭 다시 돌아와 춘향을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약속한다.

 

16. 이몽룡과 그의 가족은 떠나고 변학도(변사또)가 남원부사로 새롭게 부임한다. 변학도는 이 세대를 대표하는 사람이다. 그는 주색에 빠져 백성을 돌보지 않고, 백성을 착취하면서 산다. 춘향은 변학도의 핍박과 위협에 굴하지 않고 대항하다, 칼을 쓰고 감옥에 갇힌다.

 

17. 춘향전의 클리아막스는 이몽룡이 등장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몽룡은 춘향이가 기대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몽룡은 거렁뱅이 행세를 하며 넋이 나간 사람행세를 한다. 춘향이는 그런 이몽룡을 원망하기는커녕 여전히 변치 않는 사랑을 보여주며 월매에게 그를 극진히 대접해라주라고 부탁하기까지 한다.

 

18. 변학도의 생일잔치 날, 이몽룡은 변학도에게 시 한 수를 바친다.

 

금준미주(金樽美酒)는 천인혈(千人血)이요, (황금술잔에 담겨있는 맛좋은 술은 천명 백성의 피요,)

옥반가효(玉盤佳肴)는 만성고(萬姓膏). (옥쟁반에 담긴 맛있는 고기는 만 백성의 기름이라.)

촉루락시(燭淚落時)에 민루락(民淚落)이요, (촛농이 떨어질 때 백성들의 피눈물이 떨어지고,)

가성고처(歌聲高處)에 원성고(怨聲高). (아름다운 노랫소리라 울려퍼지는 곳에 원망소리도 드높아진다.)

 

19. 춘향은 이 세대 (변학도의 세대변학도에게 잘 보였으면 그와 함께 황금술잔과 옥쟁반에 담긴 맛있는 고기를 먹었을텐데)를 본받지 않고, 올 세대(이몽룡이 돌아와 자신과 결혼할 세대)를 생각하며 이 세대를 견뎠다. ? 사랑하니까! 이몽룡이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으니까!

 

20. 인간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을 수 있다. ? 인간에게는 약속한대로 그것을 이룰 능력이 부족하다. 나도 우리 아이들에게 이런저런 약속을 하지만, 때로는 못 지킬 때가 있다. 나빠서가 아니라, 그것을 이룰 능력이 부족해서다.

 

21.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한대로 이루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랑한 대로, 약속한 대로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랑 안에서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는 믿음의 자녀로 살아도 손해볼 것이 전혀 없다. 그렇게 사는 것이 우리의 힘이고, 하나님의 기쁨이며,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힘입어 구원 받은 믿음의 백성들이 사는 길이다.

 

22. 우리가 처음 본문으로 읽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말씀이니까 1214절부터 21절까지의 말씀을 한 번 보자.

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23. 사랑하지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들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알지 못하면, 그 사랑 안에 거하지 못하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들이다.

 

24.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려고 결단한다. ? 하나님께서 우리는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기 때문이다.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5:8).

 

25.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사랑을 확인하고 확신했다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그리스도와 결혼하라는 뜻이다.

 

26.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다고 절절히 말하고 있는데도, 그 사랑 안에 거하지 못하는 자는, 복권에 당첨됐다고 연락을 받았는데도, 그 복권당첨금을 안 찾아가는 사람과 같다. 얼마나 어리석은가.

 

27.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지금 이 세대를 살고 있는가? 아니면 올 세대를 살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은 올 세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만물이 새롭게 된 때, 바로 파루시아를 사는 자들이다. ?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그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것이 아무 것도 없으니까! 이 세대를 살지 말고, 올 세대를 사시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시라. 이 말씀을 함께 읽으며 말씀을 마무리 짓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8:38-39).

 

파루시아를 간구하는 기도

 

주여, 이 세대를 살지 말게 하시고

올 세대를 살게 하여 주옵소서.

이 세대를 본받아 아직까지 죄인으로 산다면

그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아직까지 모르고 있다는

증거이오니,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을 확신하고

마음을 돌이켜 이 세대를 떠나 올 세대에 마음을 두고 사는

믿음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주여, 우리는 우리의 몸을 주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나이다.

주여,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 받아

주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살겠나이다.

우리가 이렇게 살겠다고 결단하는 이유는

바로 주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니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신부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우리에게

주의 은총과 사랑을 넘치도록 부어주옵소서.

주여, 우리는 파루시아를 사는 주의 거룩한 백성이니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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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0. 17. 02:38

예수 그리스도와 안식일

(마가복음 2:23-3:6)

 

오늘 말씀은 안식일에 관한 두 가지 논쟁을 다루고 있다. 하나는 안식일에 밀이삭 자른 것과 다른 하나는 안식일에 손 마른 자 고쳐 준 것이다. 안식일에 두 가지의 행위를 한 것이 왜 논쟁거리인가?

 

유대인들에게 안식일 지키는 것은 모세 언약(시내산)언약에 대한 징표이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계약관계를 확인했다. , 안식일을 통해서 그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그것을 지키는 언약백성으로 스스로를 이해했다.

 

게다가 바벨론 포로의 경험을 안고 있는 예수님 시대의 (경건한)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의 조상이 겪은 질곡이 하나님의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있었다. 조상의 실패를 번복하고 싶지 않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는 일에 집착하는 일은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 입방에서는 이 문제로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한 일이 이해 가능한 일이다.

 

예를 들어, 조상님께 제사 드리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조상님께 제사 드리는 일을 게을리 했기 때문에 삶의 질곡(어려움)을 겪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조상에 대한 제사는 그들에게 꼭 지켜내야만 하는 집착이 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가복음 저자는 무엇을 전하고 싶은 것일까? 마가복음 저가가 유대인들에게 안식일 법이 얼마나 중요한 지 몰랐을 리 없다. 유대인 공동체에서 안식일을 어긴다는 것은 예수님에게서 실제로 벌어졌던 것처럼 죽음을 몰고 올 수도 있다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러나 초대교회 공동체는 예수 안에서 일어난 안식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고수했다. 왜 그랬을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안식일 제정 원리는 이렇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런 질문을 던지신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사실, 유대인들이 이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들도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악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을 알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 죽이는 것보다 나은 지 알았다. 그러나 위에서 보았듯이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을 지킴으로 해서,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은 언약 백성이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그런데 예수님과 초대교회 공동체에 따르면 이것은 안식일 법에 대한 큰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안식일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단순히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는 것으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일까? 안식일을 제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안식일의 기원은 하나님의 안식에 있다. 출애굽기는 안식일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20:8, 10).

 

안식일 법 제정을 선포하는 출애굽기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안식은 노동으로부터의 쉼이라기 보다, 창조의 완성이다. 창조의 완성은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창조를 끝내고 안식하신 것이다. , 창조의 완성은 안식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안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묵상이 필요하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안식인가? 하나님이 일을 끝내고 쉬셨으니까 우리도 아무 일도 안 하고 쉬는 것이 안식일의 뜻인가? 그렇지 않다.

 

안식은 행복한 상태이다. 죄가 없는 상태이다. 하나님의 복이 충만한 상태이다. 하나님과 합일된 상태이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안식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21:4).

 

한마디로, 안식은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상태이다.

 

우리는 오늘, 현실을 말해 주고 있는 두 가지 이야기 접했다. 첫째로,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른 이야기이다. 왜 이들은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랐는가? 배고픔 때문이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다. 오병이어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모든 배고픈 자를 배부르게 먹이시는 생명의 빵으로 묘사된다.

 

둘째로, 현실을 말해주는 이야기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마른 자를 고쳐주신 이야기이다. 예수님의 전도여행은 수많은 병자를 고치신 이야기와 병행을 이룬다. 예수님은 배고픈 자를 먹이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와 있다라는 것을 선포하셨다.

 

배고픔과 질병은 안식을 헤치는 요소이다. 이것이 존재하는 한 안식이 없다. 배고픈 자에게는 빵이 필요하고, 질병 때문에 고생하는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 죄 때문에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자에게는 용서가 필요하다. 배고픔, 질병, 죄가 존재하는 한 안식은 없다. 그러나, 반대로 배고픔과 질병과 죄가 없으면 안식을 누린다. (죄의 삯은 죽음이다.)

 

마가복음은 안식일 논쟁을 통해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선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배고픔과 질병을 없애시는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신 분이다. 예수께서 죽음을 이겼다는 것은 죄를 없애셨다는 뜻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안식 자체이시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공동체는 이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안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안식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안식의 완성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미 안식을 누리는 자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이 중요하다.

 

주일에 일 안 하는 것이 안식이 아니다.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단순히 안식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안식은 다시 노동으로 복귀하기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교회 와서 노동한다. 노동의 자리를 일터에서 교회로 옮기는 것을 안식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구원을 경험하는 것이다. 삶의 문제들이 여전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자는 노동의 자리에서, 그것이 일터가 되었든 교회가 되었든, 그 노동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실현하면서 산다. 감사하면서 산다. 행복하게 산다.

 

여전히 안식을 가로막는 질병이나 배고픔 같은 근심 걱정과 시기 질투 가운데 살면서, 주일(안식일)에 일 안 나가고 교회 나오는 것으로 안식일을 지켰다고 생각하면 바리새인의 믿음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참된 안식이란 일 안하고 쉬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종교적 의무를 행하면서 종교적 보상을 바란다면 그것은 기복신앙에 불과하다. 참된 안식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배고픔의 문제, 질병의 문제, 죄의 문제를 모두 해결하는 것이다. 형제를 미워하고, 시기 질투 가운데 여전히 사로잡혀 마음에 평강이 없으면서 안식일에 쉰 것을 통해서 구원을 확보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구원을 싸구려로 만드는 불경한 행위에 불과하다.

 

안식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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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0. 17. 02:33

과부의 기도, 우리의 기도

(누가복음 18:1-8)


나는 녹차를 좋아한다. 커피를 안 마신다. (물론 스타벅스의 바닐라 라떼 같은 달달한 커피는 가끔 마신다.) 중학교 때 커피 마셨다가 밤새 잠을 못 잔 경험이 있은 후로는 커피에 손이 잘 안 간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면 속도 아프다. 요즘엔 커피가 너무 자본주의적이라서 싫다. 스타벅스 등 커피를 시장에 팔아 이윤을 남기는 거대 기업들이 커피를 너무 현대인의 필수 음료로 띄워 놓은 경향이 있다.

 

한 동안 메스컴에서는 커피의 좋은 효능에 대하여 연일 기사를 띄웠다. 정작 커피를 재배하는 가난한 농부들은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지 못한다. 고생은 가난한 농부가 하고, 돈은 거대 기업이 버는 불의한 사회 구조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커피 뿐만이 아니라,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를 재배하는 아프리카의 가난한 농부들은 카카오가 그렇게 맛있는 초콜릿으로 변신한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기사를 읽은 적도 있다.)

 

나는 이런 저런 이유로 커피를 안 마신다. 대신에 나는 녹차를 즐겨 마신다. 녹차에는 카테킨이라는 성분이 들어 있어 쌉쌀한 맛을 낸다. 녹차는 이 쌉쌀한 맛 때문에 먹는데, 카테킨이라는 성분은 항암효과도 있고, 체내의 노폐물도 배출해 주고, 카페인 흡수를 억제해줘서 중독효과도 막아 준다. 녹차를 마시면 피곤함도 덜하고, 콜레스테롤 수치도 낮춰준다. 다만, 이뇨작용 때문에 화장실을 자주 가게 되는 단점은 있다. 그리고 몸이 차가운 사람들(음 기운이 강한 사람들)에게는 별로 좋지 못한 음료이다. 몸을 더 차갑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양 기운이 강한 사람이라 녹차가 몸에 잘 맞는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기도이다. 기도의 주제를 듣는 순간, 귀를 닫는 사람이 있다. 그런 이들은 기도에 대하여 하도 많은 설교를 들었든지, 아니면 기도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거나 기도를 통해 어떠한 좋은 경험을 해보지 못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위에서 내가 녹차의 좋은 점에 대하여 아무리 이야기를 했어도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여전히 커피만 고집하는 사람과 같다. 그런데 나처럼 녹차의 효능을 깊이 경험한 사람은 녹차를 마시듯이, 기도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은 기도에 대한 말씀을 절대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보내지 않는다.

 

오늘 말씀 1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오늘 이야기는 비유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비유를 이야기하시는 목적은 기도와 낙심에 관한 것이다. 이것을 이렇게 간단하게 다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낙심 하는 이유는 기도 안 하기 때문이고, 기도하는 자는 낙심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의 삶은 낙심 거리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이 우리의 연약함이다. 낙심하고 싶어서 낙심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나의 의지와 상관 없이, 나의 능력과 상관 없이 낙심하게 되는 상황이 우리의 인생 가운데는 즐비하게 널려 있다.

 

나는 영어 때문에 매일 낙심한다. 물론 미국에서 살아가면서 필요한 일상 영어에는 별 문제 없지만, 모국어인 한국어로 깊은 사유를 하는 것만큼 영어로 사유하지 못해 공부하면서 토론을 하거나 페이퍼를 쓸 때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낙심한다. 그래서 때로는 미국에서 태어나 자라지 못한 것에 대하여 한탄까지 섞여 나올 때가 있다.

 

미국에 살다보니 낙심하게 되는 게 언어 이외에도 많다. 특별히 인종차별을 당하거나, 사회참여를 깊이 하지 못하는 현실이라든지, 이 나라가 나의 조국(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태어나 살다 묻혀 있는 땅을 조국이라 한다. 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이곳이 아닌 한국에서 태어나 살다 거기에 묻혀 계시기에 나의 조국은 한국이 될 수 밖에 없다.)이 아닌 것 때문에 느끼는 이방인의 느낌 같은 것이 현실 속에서 벽으로 다가올 때 많은 낙심을 하게 된다.

 

이런 것뿐만이 아니다. 사업의 실패 또는 경제의 불황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거나, 여러 가지 삶의 환경들로부터 오는 스트레스 때문에 얻게 된 정신적 질병이나 우리의 의지와 상관 없이 노화에서 오는 약해진 신체와 마주하게 될 때와 병 때문에 고생하게 될 때 우리는 깊은 낙심에 빠지게 된다.

 

물론 이러한 낙심의 상황들 가운데, 우리가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것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노화 때문에 오는 육신의 연약함이나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낙심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나 의도와는 상관 없이 겪게 되는 낙심들, 즉 불의한 낙심들에 대해서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끊임 없이 탄원하는 일이 필요하다.

 

오늘 말씀의 비유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라고도 하고, ‘간청하는 과부의 비유라고도 한다. 누구에게 초점을 맞추든, 이 비유의 핵심은 끊임 없는 기도이다. 불의한 재판관조차도 과부의 끊임 없는 기도 때문에 그의 간청을 들어주었는데, 하물며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끊임 없는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상황을 생각하며 기도할 수 있다. 하나는 생활인의 입장에서,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상황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우선 생활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우리는 살면서 나의 의지와 상관 없고, 능력을 벗어나는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그냥 자포자기해야 할까? 아니다. 우리는 그 상황을 주께 아뢰며, 끊임 없이 기도해야 한다. 성경에서 그 대표적인 예가 사무엘의 엄마 한나이다.

 

사무엘의 아버지는 엘가나였는데, 엘가나에게는 아내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의 이름은 한나요,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은 브닌나였다. 그런데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었는데, 한나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고대 이스라엘 사회(한국도 마찬가지이지만)에 여자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자식이 없는 여자는 사회적 사형을 당했다.

 

엘가나는 두 아내 중 한나를 더 사랑했다. 그래서 제사 드리러 갈 때 엘가나는 한나에게 브닌나에 비해 분깃을 두 배나 더 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한나를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한나가 원하는 것은 남편의 두 배 사랑이 아닌, 자식이었다. 그 일로 한나는 매일 같이 펑펑 울었다. 이에 대해 엘가나는 한나에게 이런 말을 한다. “한나여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삼상 1:8).

 

여러분 같으면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라고 말하는 엘가나(남편)에게 어떻게 하겠는가? 고마워할 것인가, 아니면 남편을 향해 광선을 쏘며 도끼눈을 뜰 것인가? 남녀관계가 그렇다. 처음에는 너 없이는 못살아하다가 나중에는 너만 없으면 살겠다한다.

 

어느 부인이 시도 때도 없이 남편을 구박했다. "당신이 뭘 알아요?"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서 부인에게 전화가 왔다.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중환자실에 있으니 빨리 오라는 연락 이였다. 부인은 허겁지겁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부인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남편이 죽어서 하얀 천이 뒤집어 씌워져 있었다. 허구한날 남편을 구박 했지만 막상 죽은 남편을 보니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부인은 죽은 남편을 부여잡고 한없이 울었다. 부인이 한참을 그렇게 울고 있는데 남편이 슬그머니 하얀 천을 내리면서 말 했다. "여보! 나 아직 안 죽었어!" 그러자 깜짝 놀란 부인은 울음을 뚝 그치면서 남편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뭘 알아요? 의사가 죽었다는데!"

 

남편 엘가나가 부인 한나의 마음을 뭘 알겠나. 한나는 실로에 있는 성전으로 기도하러 갔다. 그 당시 제사장은 엘리였는데, 한나는, 엘리 제사장이 성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거나 말거나, 괴로운 마음을 하나님께 통곡하며 기도로 아뢰었다. 한나는 오랫동안 끊이 없이 기도했다. 엘리 제사장은 한나가 속으로 말하고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않는 것을 보고, 한나가 취한 줄로 생각하고, 한나에게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고 말한다.

 

한나는 기도하되, 남들이 보기에 술 취한 것처럼 간절히 기도했다. 이렇게 기도했던 사람들이 또 있다. 예수님이 승천 하신 후, 성령이 강림하시길 기다리면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했던 예루살렘 초대교회 공동체이다. 그들이 성령을 받고 기도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그들이 술에 취했다고 비아냥댔다.

 

이렇게 기도해 봤는가? 여러분의 삶의 문제를 놓아두고,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술 취한 것처럼기도해 봤는가? 내가 지금 겪는 문제가 불의하다고 생각이 들거든, 내 능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이 간절히 필요하거든, 그 삶의 문제를 놓아두고, 술 취한 것처럼 기도해 보시라.

 

두번째로, 우리는 생활인에 이어,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기도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늘 말씀은 누가 공동체의 상황 중, 재림의 지연 문제 가운데 놓여 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재림이 지연되는 것 때문에 낙심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주변 세계(로마와 유대공동체)로부터 엄청난 핍박을 받고 있었는데, 그들이 그러한 핍박을 견뎠던 첫 번째 이유는 예수께서 곧 재림하여 자신들을 영원한 생명에 들이시고 자신들을 핍박하는 불의한 세력들을 혼내주실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생각과는 달리 재림은 지연되었고, 그들은 핍박(박해) 속에서 죽어갔다. 사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재림 지연의 문제 가운데 살고 있다. 예수의 제자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정의와 사랑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인데, 그 나라를 살다보니 세상의 불의와 부대낄 수 밖에 없다. 세상에 창궐하는 엄청난 악 때문에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기도가 저절로 나온다.

 

우리는 세상의 창궐하는 악을 보며 쉽게 절망하고 실망한다. 하나님이 안 계시나보다, 라는 불경한 생각까지 들 때가 많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과 구별돼서 사느니, 그냥 세상 사람들처럼 적당히 살고 싶은 유혹이 몰려든다. 그래서 우리는 한 쪽 발은 세상에, 한 쪽 발은 하나님 나라에 은근슬쩍 들여 놓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산다.

 

한국에서는 최근 6살짜리 입양 딸의 시신을 훼손해 야산에 묻은 혐의를 받는 양부모가 아동이 숨지기 전 온몸에 투명테이프를 감아 놓고 17시간 동안 방치한 것으로 드러난 사건 기사가 언론을 도배했다. 세상에 얼마나 악이 창궐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가! 이런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께서 악이 창월하는 불의한 세상을 심판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주님은 우리가 끊임 없이 기도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께 졸라서 원하는 것을 받아내라는 뜻이 아니다. 험한 세상, 악이 창궐하는 세상을 보더라도 절망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해야 한다. 나의 의도나 의지와 전혀 상관 없는 일, 나의 능력에서 벗어나는 일 때문에 괴로움을 겪고 있다면, 그것 때문에 절망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해야 한다.

 

끝까지 기도한다는 것은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다. 러시아 속담에 희망은 맨 나중에 죽는다는 말이 있다. 희망은 우리를 부활케 한다. 내가 죽었다고, 내가 과부처럼 힘 없는 자라고, 희망까지 죽고 힘 없나? 십자가를 보라. 죽었다고 끝이 아니다. 희망을 끝까지 붙든 자는 부활한다.

 

딱따구리 한 마리가 열심히 나무를 쪼개고 있었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개고 있는데 갑자기 마른 벼락이 치더니 그 나무를 반으로 쪼개는 게 아닌가. 이것을 보고 놀란 다른 짐승들이 그 딱따구리에게 와서 물었다. ‘너에게 무슨 힘이 있어서 이 큰 나무를 쪼갤 수 있니?’ 그러자 딱따구리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단지 나에게 맡겨진 일을 매일 성실히 했을 뿐이야.’

 

우리가 기도를 끊임 없이 하느냐 아니냐는 끈기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비유의 불의한 재판장처럼 불의한 분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의 원한을 풀어 주시는 분이고, 우리의 잃어버린 권리를 찾아 주시는 분이고, 우리를 올바르게 판결해 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창궐하는 악을 심판하시는 분이시고, 우리의 약함을 아시며, 우리에게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거나 예상치 못한 기적으로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낙심하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과부는 그 시대에 가장 힘 없는 약자였다. 단순히 남편을 잃은 여인이 아니었다. 우리가 과부와 무엇이 다른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어도, 우리는 여전히 약하다. 힘 없는 과부와 같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우리가 기도할 때 듣고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그러니, 낙심하지 말고 끊임 없이 기도하라. 주께서는 분명 우리의 끊임 없는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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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0. 9. 13:41

돌아온 레퍼(Leper)

(눅 17:11-19)


공교롭게도 오늘은 한글날이다. 한글 창제는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생각했던 중국(중화민국)의 입장에서 보면 독립선언이나 마찬가지이다. 한글이 창제되기 전까지 한국(조선)은 한자를 빌어 그 음을 표시했다. 그것을 차자표기라 한다. 문자를 빌어서 표기한다는 뜻이다.

 

한문차자표기의 가장 큰 문제는 한문은 뜻 글자이기 때문에 어휘(Vocabulary)가 엄청 많아서 일반백성들이 한자를 모두 습득하여 문자를 표기하기에는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근본적인 이유에는 백성들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글을 훈민정음이라 칭하였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세종대왕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훈민정음서문에 잘 드러나 있다.

 

중세국어

현대국어

나랏말ᄊᆞ미中듀ᇰ에달아

ᄍᆞᆼ와로서르ᄉᆞᄆᆞᆺ디아니ᄒᆞᆯᄊᆡ
이런젼ᄎᆞ로어린百ᄇᆡᆨ서ᇰ
니니르고져호ᇙ배이셔도
ᄆᆞᄎᆞᆷ내제ᄠᅳ들시러펴디
몯ᄒᆞᇙ노미하니라
내이ᄅᆞᆯ爲ᄒᆞ야어엿비너겨
새로스믈여듧字ᄍᆞᆼᄅᆞᆯᄆᆡᇰᄀᆞ노니
사ᄅᆞᆯ마다ᄒᆡᅇᅧ수ᄫᅵ니겨날로ᄡᅮ메
便ᅙᅡᆫ킈ᄒᆞ고져ᄒᆞᇙᄯᆞᄅᆞ미니라

 :나라의 말이 중국과 서로 달라

한자로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니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할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할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위하여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한글의 창제는 변방, 변두리의 한 작은 국가에 불과한 조선이 큰 국가(중화민국)의 종속관계에서 벗어나게 만든 해방과 같은 역사적인 사건이다. 한국의 역사를 보면 말할 수 업는 질곡 가운데서도 한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며 현재 이렇게 세계에 우뚝 선 국가로 존속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한민족을 하나로 묶어주는 한글이라는 언어체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세종대왕은 하나님께서 한민족에게 베푸신 최고의 은혜 중 하나이다.

 

주변부로 밀려나 존재감 없이 사는 일은 쉽지 않다. 그 모멸감이란 죽는 것보다 힘든 법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해서든 주변부로 밀려나지 않고 중심에 서서 자기의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사실 그것 때문에 인생이 피곤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자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하여 자기 힘으로 싸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행복한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는 자기 힘으로 아무리 싸워도 공동체(사회)의 중심부로 들어서는 게 전혀 불가능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레퍼(Leper)이다. 그 당시 나병환자들은 절대로 유대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나병이라는 말을 히브리어로 차라아트로 표기하는데, 이는 ’, ‘징계를 의미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말이다.

 

성경에서는 대개 차라아트나병(문둥병, 한센병)’이라고 표기하는데, 사실 이는 광범위한 피부질환을 일컫는 말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차라아트에 걸린 병자들을 모두 나병환자로 볼 필요는 없다. 다만, 피부병이라는 것이 오늘날에도 난치병인 것이 많아서, 그 당시에는 피부병(차라아트)’하나님께 맞아서 생긴 병으로 생각했다. 다른 말로, ‘차라아트는 죄로 인해 징계 받는 것이는 생각이 고대유대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통념이었다.

 

죄 때문에 생긴 병이라는 낙인은 파급력이 엄청나다. 우선 차라아트에 걸린 당사자는 죄책감에 휩싸인다. 자기가 자기 자신을 책망하게 되는 일만큼 자기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일은 없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책망하면 화(anger)가 나지만, 자기가 자기 자신을 책망하게 되면 고통(suffering)’이 온다. 고통은 죽음보다 무서운 거다. 고통에 처한 자는 누구든지 죽기를 갈망한다. 고통 당하는 것이 죽는 것보다 힘들기 때문이다.

 

죄 때문에 생긴 병이라는 낙인이 가져오는 두번째 파급력은 타인(다른 이들, 이웃)에게서 오는데, 그들은 차라아트를 지닌 자들을 멀리하게 된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해치는 위험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보호본능이 있는 법이다. 그들은 차라아트를 지닌 자들과 가까이 하면 그들의 차라아트가 자신들에게 옮을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병환자들을 멀리했다.

 

결국, 나병환자들은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지역, 즉 변방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오늘 이야기는 그러한 곳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11). 우리는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라는 말을 들으면 여기가 어떠한 곳인지 전혀 눈치를 못 채지만,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이곳이 어떠한 곳인지 다 알았다. (일례로, ‘예수께서 미아리를 지나시다가라는 표현을 외국인이 들으면 무슨 뜻인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지만, 한국인들은 미아리가 어떠한 곳인지 다 아는 것과 같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시다가, 예수님은 열 명의 나병환자들을 우연히 만나신다. 아마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변방의 나병환자촌에까지 퍼진 모양이다.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에 나병환자 열 명은 멀리 서서 예수님께 이렇게 외친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13).

 

이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간청이었다. 기독교의 기도 전통에서 주님께 드리는 기도 중에 가장 위대한 기도는 바로 이것이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Kyrie eleison, Lord, have mercy). 주님께 우리가 구할 수 있는 게, 그분의 자비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우리는 기도할 때 너무나 많은 것을 간구한다. 그러나 최고의 기도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것을 안다면, 주님께 드리는 기도는 매우 겸손해질 것이다. 많은 말을 하여야 주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거라는 잘못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라.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짧은 기도를 간절하게 드리기만 해도, 우리의 모든 형편을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한량없는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도 보라. 나병환자들의 그 짧은 간청에 주님께서는 응답해 주신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들에게 별다른 말씀 없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14). 이것은 이해하기 힘든 치료방법이다. 병자의 입장에서, 또는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의 적절한 반응은 자비를 구하는 나병환자들을 불러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별다른 치유행위를 하지 않으시고, 그저 그들에게 제사장들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반항하여 예수님께 어떠한 치료행위를 요구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사장들에게 자신들의 몸을 보이러 길을 떠난다. 사건은 그 길을 가는 중에 발생한다. 오늘 말씀은 그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14).

 

바로 여기에서부터 어떠한 일이 벌어진다. 본문은 그 어떠한 일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 중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15). 열 명의 나병환자가 길을 가다 깨끗함을 받았는데, 그 중 한 명의 나병환자만이 돌아왔다고 성경은 말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질문을 하게 된다: 그 사람은 왜 돌아왔으며, 나머지 아홉 사람은 왜 돌아오지 않았을까? 이 이야기를 통해서 누가복음 저자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오늘 말씀에 대한, 이 질문에 대한 가장 낮은 수준의 해석은 이것이다. ‘은혜를 입으면 감사해야 한다.’ 물론 본문에서 그러한 메시지를 읽어내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 만은 않다. 은혜를 입었으면 감사하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은혜를 입었는데도 감사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이런 말이 생겨나는 거다. “아무튼,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야!” (사랑하는 여러분,) 최선을 다해서, ‘머리 검은 짐승이 되지 마시라.

 

오늘 말씀에서도 보면, 예수님께서 열 명의 나병환자를 고쳐주셨는데, 그 중에 한 명만 돌아와 주님께 엎드려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나머지 아홉 명은 머리 검은 짐승이 되고 만다. 어떤 이들은 아홉 명의 나병환자들이 주님께 돌아와 감사하지 않은 이유를 그들이 자신들의 나병치유를 순종에 대한 보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을 가한다.

 

보상 받으려 순종하는가? 바로 앞에 나오는 무익한 종의 비유에서 보듯이, 순종은 보상의 개념에서 보면 안되고, 순종은 겸손의 개념에서 봐야 하는 게 맞다. , 우리는 보상 받기 위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무익한 종이기 때문에 생득적으로(naturally)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튼, 누가복음의 저자가 돌아온 레퍼(Leper)’의 이야기를 통해서 머리 검은 짐승이 되지 말자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그 실마리는 16절 말씀이 가지고 있다.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열 명의 나병환자 중, 아홉 명은 유대인이었고, 한 명은 사마리아인이었다. 여기에는 매우 정치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의 구원 메커니즘이 들어 있다. 인간이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의 구원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인간은 자기 자신이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데 익숙하다.

 

레위기에 보면 정결의식법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레위기에 보면, 부정한 자는 제의(제사,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고, ‘제의에 참여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정결한 자 뿐이다. 그들에게 제의(제사)’에 참여하는 일은 절대적으로 중요했는데, 그들은 제사에 참여하여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 것을 통해 자신들의 구원을 확보하고 확인했다.

 

그런데, 만약 부정한 자 또는 부정한 것에 접촉하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게 되기 때문에, 그들에게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는 일은 생명처럼 소중했다. ‘차라아트’(나병환자)’는 정결한 자의 구원을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이었다. 그래서 정결한 자들은 자신들의 구원을 확보하고 지켜내기 위해서 부정한 자(차라아트)를 공동체 밖으로 쫓아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이기적이고 차별적인 신앙이다. 자기의 구원에 방해되는 것을 쫓아내는 것이 옳은 일인가? 쉽게 말해, 나 살자고 다른 이들을 죽게 내버려 두는 게 옳은 일인가? 인간의 죄된 본성의 측면에서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변명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측면, 기독교의 진리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 괴변에 불과하다.

 

돌아오지 않은 아홉 명의 레퍼(나병환자)는 분명 길을 가다가 자신들의 병이 나았다는 것을 알고 기뻐했을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지시대로 제사장들에게 가서 자신들의 몸을 보이고, 그들의 몸이 깨끗해졌다는 것을 확인 받은 뒤, 유대공동체로 복귀되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까지였다. 그들은 유대공동체로 복귀된 뒤, 자기 자신의 구원을 확보하고 지켜 내기 위해서 (분명, 또는 아마도) 자신들의 구원을 방해하는 다른 차라아트(나병환자)’들을 차별하며 살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그냥 일반 사람들보다 나병환자들을 차별하는 데 더 열심을 보였을 지 모른다. 어떻게 얻은 구원인가? 갖은 모멸감을 참아내며 얻어낸 구원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사마리아인 레퍼(나병환자)는 달랐다. 그는 깨끗함을 받고,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감사드렸다. 사실, 사마리아인 레퍼는 아홉 명의 유대인 레퍼보다 그 아픔이 두 배인 사람이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에게 죄인으로 낙인 찍힌 자들이었다. 그들은 유대공동체에서 원래 제외된 자들이었다. 그러니까, 사마리아인 레퍼는 두 번 죽은 자와 같았다. 유대인 공동체에 의해 한 번 죽고, 사마리아 공동체에 의해 두 번 죽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사마리아인 레퍼가 제사장에게 가서 그의 몸이 깨끗함을 입은 것을 보여 보았자, 그는 여전히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방인에 머물 것이 뻔했다. 다른 말로 해서, 사마리아인 레퍼는 나병에서 깨끗함을 얻었다 한들, 여전히 구원 받지 못한, 구원공동체에서 제외된, 버림 받은 자로 살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로 돌아왔다. 놀랍게도 바로 그 돌아온 레퍼(Lper)’에게, 돌아와 엎드리어 감사드리는 레퍼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선포하신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9).

 

생각해 보라. 누가 참으로(진정으로) 구원 받은 자인가? 제사장들에게 깨끗함을 입은 것을 확인 받고 공동체로 복귀하여 자기 자신의 구원을 확보하고 지켜 내기 위하여 여전히 자신의 구원을 방해하는 자들을 차별하며 사는 아홉 명의 레퍼들이 구원 받은 자인가, 아니면, 주께로 돌아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선포를 가슴에 안은 한 명의 사마리아인돌아온 레퍼(Lepere)’가 구원 받은 자인가?

 

도대체 우리에게 구원은 무엇인가? 구원을 확보하고 지켜 내기 위해 다른 이들보다 깨끗해지는 것’, ‘우위에 올라서는 것이 구원인가? 참된 구원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구원이란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정결해지고 구원받아 감사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완전한(fully) 인간으로 사는 것이다.

 

돌아온 레퍼가 어떻게 살았을 것 같은가? 그가 나병에서 깨끗함을 입고 공동체로 복귀되어 자신의 구원을 확보하고 지켜 내기 위해 자신의 구원에 방해되는 모든 것을 차별하며 살았을 것 같은가?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참된 구원을 받은 자 답게, 공동체의 다른 레퍼들(구원에 방해되는 요소들)을 차별하지 않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자기의 형제로 받아들이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참된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영적인 레퍼이다. 우리는 모두 깨끗함을 입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보혈로 우리를 깨끗케 하셨다. 깨끗함을 입은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깨끗함을 입은 것을 확인 받기 위해 제사장(이 세상의 공중권세 잡은 자들)에게 가서 굽실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자신의 구원에 방해되는 것을 차별하며 사는 것을 아닌가.

 

우리는 모두 돌아온 레퍼가 되어야 한다.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께 돌아와 엎드려 감사해야 한다. 구원에 방해되는 것들을 차별하는 아홉 명의 나병환자와 같은 자들이 되면 안 된다. 우리는 구원 받은 자로서 세상에 나아가 구원에 방해되는 것들까지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어, 그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도록 도와야 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돌아온 레퍼(Leper)’인가? 그렇다면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주님께서 돌아온 레퍼인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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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0. 6. 14:36

레위의 아픔, 레위의 희망

(마가복음 2:13-17)

 

오늘 이야기는 마태복음 9장과 누가복음 5장에서도 나오는 이야기이다. 레위를 부르시는 이야기, 집에서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는 이야기, 그것을 보고 바리세인 서기관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는 예수님을 비판하는 이야기, 그것을 들으시고, 자신이 온 이유를 밝히시는 이야기이다.

 

오늘 말씀의 핵심 구절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7)이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구절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오시는 이유는 의인을 구원하고 죄인을 심판하러 오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러한 통념을 뒤집는 것 같다.

 

레위를 부르시는 이야기를 통해서 이 핵심 구절들의 의미를 파악해 보자. 레위는 누구인가? 레위의 직업은 세리로 소개되고 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의 명단을 보면 이렇다: 시몬 베드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요한, 안드레,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가나나인(아람어, 열심당원) 시몬, 가룟 유다

 

그렇다면, ‘레위는 누구인가? 레위는 마태의 다른 이름이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세리 레위라 소개되어 있고, 마태복음에는 세리 마태라고 소개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레위라는 이름보다 마태라는 이름이 더 친숙하다. 그렇게 된 데에는 마태복음의 영향이 크다.

 

세리 레위에게는 아픔이 있었다. 레위의 이름이 보여주듯이 레위는 레위 지파 사람이었다. 레위 지파는 자기 분깃을 따로 갖지 않았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나의 분깃이라는 믿음으로 살던 성별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다른 열한 지파의 땅에 흩어져 살면서 그들의 십일조에 의존하는 생활을 했다.

 

그런데, 레위는 지금 로마의 세금 청부업자로서, 하나님이 아닌 로마가 그의 기업이 되었다. 그로인해 레위는 동족들(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서 배제되었다. 그의 이름(레위)과 현실(로마의 세금 청부업자)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었다. 이것이 레위의 아픔이었다.

 

죄인이란 하나님 나라에서 제외된 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거나 지키지 못하는 자들은 모두 죄인의 범주에 들었다. 우리가 잘 아는 바리세인들은 하나님의 법(율법)을 잘 지켰는데,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잘 지키지 못했던 사회적 약자들을 향해 죄인이라 칭하며 그들과 같지 않음을 공적인 자리에서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며 살았다.

 

레위는 자신이 하나님 나라에서 제외되어 죄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괴로워했을 것이 뻔하다. 그러한 그의 심정이 카라바조의 <세리 마태를 부르심>이라는 그림에 아주 잘 묘사되어 있다. 확대된 그림을 보면, 세리 레위(마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아랑곳하지 않고 돈 세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다. 돈 세는 일 외에 다른 것에는 신경 쓰지 않는 그의 어두운 표정이 그림에 잘 드러나 있다.

 

본문 말씀에 보면, 그림과 같이 예수님은 그런 죄인세리 레위(마태)를 부르신다. “나를 따르라!” 카라바조의 그림은 세리 레위(마태)를 부르시는 장면을 예사롭지 않게 표현한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의 손가락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지으실 때 가리키던 손가락과 같은 손가락을 묘사하고 있다.

 

즉 세리 레위(마태)의 부르심은 예사로운 부르심이 아니라, 새창조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은 죄인을 죄인의 자리에 그냥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신다. 그것이 바로 레위의 희망이요 기쁨이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그냥 두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부르신다. 그가 어떻게, 어떠한 연유로 죄인이 되었는지, 즉 하나님 나라에서 멀어지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죄인을 부르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리 레위(마태)를 부르신 뒤, 그와 함께 식사를 하신다. 예수님은레위만이 아니라 다른 죄인들과 세리들도 함께 부르셨다.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15).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그러한 광경을 보고 언짢은 말투로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16). 마태복음 1119절에 보면 예수님을 반대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부른 것을 볼 수 있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대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여기서 친구는 헬라어의 필로스를 가리키는데, 이는 가까이 지내는 사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번 질문해보자. 예수님은 정말로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는가? 필로스의 뜻대로라고 하면 만약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다면, 예수님도 세리나 죄인 신분이었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과 가까이 지내는 죄인이나 세리가 아니라, 세리와 죄인을 불러 새롭게 하시는 분이다.

 

세리 레위를 부르시는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또 한 번 알게 된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과 같은 분이 아니라, 세리와 죄인을 불러 그들의 삶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생명을 거듭나게 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분께서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생각하여 못마땅하게 여기는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7). 병을 고치는 의사가 병든 자에게 다가서는 것처럼, 생명을 거듭나게 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이 죄인에게 다가서시는 것은 당연하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의 정의는 죄인과 사귐을 갖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당연하다. 그들에게는 죄인을 거듭나게 하고 새롭게 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죄인과 가까이 하다가 오히려 그들이 죄인에게 물들어 죄인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예수님이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선포는 레위에게 희망이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희망이다. 우리도 레위처럼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얼마든지 죄인의 자리에 들어설 수 있다. ‘여호와께서 나의 기업이라는 것을 레위지파 출신의 레위(마태)가 알지 못했을 리 없다. 그래서 레위는 아픈 사람이었고, 죄인이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우리의 의지와 상관 없이 죄인의 자리에 내몰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럴 때마다 의기소침할 필요 없다. 우리가 이 복음을 들었기 때문이다. 일부러 죄인의 자리에 들어서면 안 되겠지만, 우리의 의도나 의지와 상관 없이 죄인의 자리에 들어섰을 때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는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레위와 같은 아픔이 있는 자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는 일 또한 중요하다. 그들은 자신의 의도나 의지와 상관없이 죄인의 자리에 내몰려 큰 죄책감에 싸여 생명을 망가뜨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 자들에게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 죄인을 불러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다.

 

우리는 죄인과 친구될 수 없다. 자칫하다가는 죄인에게 물들어 우리도 똑같은 죄인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다. 그들이 이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면, 죄인의 친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죄의 자리에서 건져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실 것이다. 이 복음은 죄인의 자리에 앉아 신음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희망이다.


* 카라바조의 <세리 마태를 부르심> 그림은 김학철 교수의 해석에 빚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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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0. 2. 14:05

겨자씨 믿음

(누가복음 17:5-10)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제자도를 가르치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제자도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제자도하면 예수님의 제자로서 어떤 행위를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물론 행위를 거룩하고 정의롭게 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거기에는 함정이 숨어 있다. 이를 놀부증후군이라 할 수 있다.

 

흥부와 놀부 이야기는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진 전례동화이다. 그 이야기에서 보면, 흥부와 놀부는 똑같이 제비 다리를 고쳐주는데, 그 결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흥부는 복을 받았는데, 놀부는 벌을 받았다. 왜 그런가? 그들의 행위가 결과를 가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의도(Intension)가 결과를 갈랐다. 흥부는 선한 마음, 놀부는 악한 마음을 대표한다. 이처럼, 행위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정신, ()’이다.

 

이와 같이 제자도는 어떠한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의 문제, 정신의 문제이다. 제자도에 대해 하인리히 아놀드는 이렇게 말했다. “제자도는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께 자리를 내어드려 우리 안에 사시게 하는 것이다. 제자됨이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살아 역사하시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문제이다

 

예수님의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은 누가복음 9장부터 시작된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제자도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 어떻게 사냐?’ 일례로, 오늘 본문말씀과 가까이에 있는 제자도를 들여다 보자. 171절에서 4절에만 해도 2개의 제자도가 나온다. 하나는 실족하게 하는 것에 대한 경고이고, 다른 하나는 범죄한 형제를 대하는 자세이다. 우선 실족하게 하는 것에 대한 경고에서 보면, 제자도는 작은 자 하나라도 절대로 실족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런 경우가 발생한다면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게 낫다고 한다. 두 번째로 범죄한 형제를 대하는 자세에서 보면, 제자도는 자신에게 범죄한 형제에게 경고하고 회개하면 용서해 주되, 죄를 짓고 일곱 번이라도 회개하면 계속해서 용서하라고 한다.

 

이게 쉬운가? 욕 나올 정도다. ‘더러워서 제자 못해먹겠네!’ 할 정도다. 인생을 돌아보면 작은 자 하나를 실족하게 한 일이 한 두 개인가? 나는 조지아에서 10년 동안 담임목회를 하며 대략 3천 번 정도의 설교를 했다. 목회자로서 나도 설교를 통해 작은 자 하나를 실족하게 한 일이 딱 한 번 있었다. 개척 초기(목회 초기)에 한 실수인데, ‘부모 공경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면서 말씀에 자기 의가 들어가는 바람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 나의 설교가 부모님을 잘 공경하지 못해서 죄책감을 가지고 살았던 그분에게 상처가 되었던 모양이다. 사랑의 마음으로 설교했어야 하는데, 자기 의를 넣어서 설교하다 보니 그러한 일이 생겼다. 그때부터 나는 절대로 설교에 자기 의를 표출하지 않는다.

 

대개 그리스도인이 작은 자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경우는 바로 어떠한 말이나 행동에 자기 의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사랑의 마음으로 하지 못하고, 자기 의를 가지고 상대방을 대하면 어떠한 일을 잘 하지 못해 죄책감을 지니고 사는 사람에게는 큰 상처가 되는 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나도 모르게 자기 의를 드러내느라 작은 자 하나를 얼마나 실족시키고 살아가는지 모른다. 우리는 무슨 말이나 행동을 하든지 의롭게하면 안 된다. 우리에게 무슨 의가 있는가? 의로우신 분은 오직 한 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우리는 그저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참 어렵다.

 

범죄한 형제를 대하는 자세에 대한 제자도는 더 어려워 보인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상대방에게 범죄하기는 쉬워도 나에게 범죄한 상대방을 용서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내가 상대방에게 범죄했을 때 상대방에게는 용서해 주기를 당연히 바란다. 그러나 상대방이 나에게 범죄했을 때는 당연히 상대방을 죽여버리고 싶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라고 요구하신다. 이게 가능한가? 요즘엔 나한테 실제적인 피해를 끼치는 범죄가 아니라 단순히 좀 쳐다봤다고 폭력을 행사하거나 살인을 저지르는 세상인데,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제자들도 이러한 가르침 앞에서 당황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제자들(오늘 말씀엔 사도들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제자들을 사도들로 표현하는 것도 누가복음의 특징 중 하나이다. 누가가 사도행전을 썼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해 보인다.)은 예수님께 이렇게 간구한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이런 제자도 앞에서 우리도 제자들과 같은 심정일 것이다. “주님, 이런 것을 어떻게 실천합니까?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 주옵소서.”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그런 요청에 대하여 다소 엉뚱한 말씀을 하신다. 그냥 속 시원히, “옛다, 믿음을 받아라!”라고 말씀해 주셨다면 손쉽게 끝나는 문제일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믿음을 더해주시지 않고,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는 듯한 말씀을 하신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니라”(6).

 

이것은 믿음이 있으면 갑자기 괴력이 생겨서 뽕나무를 뿌리째 뽑을 수 있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말씀에 언급되는 뽕나무는 무화과나무과의 뽕나무(Mulberry Tree)로서 뿌리를 깊고 넓게 내리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 지금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제자도가 뽕나무를 뿌리째 뽑는 게 어려운 것처럼 어렵다는 뜻이다. 제자도가 어렵다는 것을 예수님이 모르는 바가 아니다. 예수님은 그 제자도를 이루는 방식이 제자들이 생각하는 믿음을 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그것은 제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믿음을 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을 빼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이 바로 겨자씨 믿음이다.

 

30년 전, 1986년도 8월에 선친께서 생애 처음 성지순례를 다녀오셨다. 그때만 해도 가족 중에 누가 해외 여행을 나가면 온 가족이 공항(김포공항)으로 배웅을 나가던 시절이었다. 생애 처음 가시는 아버지의 성지순례에 삼촌들, 이모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까지 모든 분들이 총 출동하셨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 아버지는 성지순례를 다녀오셔서 지금도 기억에 남는 두 가지 신비한 이야기와 네 가지의 신비한 물건을 가져오셨다. 두 가지의 신비한 이야기는 이것이었다. 하나는, 사해바다에서 수영을 했더니 몸이 저절로 둥둥 뜨더라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였고(사진으로 증명), 다른 하나는, 유럽에서는 물을 사먹어야 한다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지금은 물을 사먹는 게 당연한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네 가지의 물건을 가지고 오셨는데, 요단강 물, 감람나무로 만든 십자가, 감람나무로 만든 리코더, 그리고 겨자씨였다. 현재, 감람나무로 만든 십자가는 서울 어머니 집에 걸려 있고, 감람나무로 만든 리코더는 내 보물 1호이고, 요단강 물과 겨자씨는 사라졌다.

 

여기에, 요단강 물과 얽힌 이야기가 있다. 그 당시 아버지께서는 물을 사 드시고 남은 빈 페트병에 요단강 물을 담아 오셔서 집 냉장고에 잘 보관해 두셨다. 그런데, 어느 주일 오후, 형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왔는데, 날씨가 더운 탓에 우리 집에 들어오자 마자 냉장고를 열면서 시원한 물을 찾았다. 형 친구는 마침 냉장고에 들어 있던 페트병에 담긴 요단강 물을 그것이 그냥 일반 물 인줄 알고 홀짝 다 마셔버렸다. 요단강 물은 그렇게 존재를 감췄다. 요단강 물을 마시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갑자기 믿음이 막 솟아날 것 같은가? 요단강 물을 마신 형 친구는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신 분은 이따 (식사 시간에) 물어보시라.

 

나는 그때 처음으로 겨자씨를 보았다. (그 이후로 나는 머스타드 소스를 좋아하게 됐다. 특별히 나는 허니머스타드 소스를 좋아한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좋아하게 된 데에는 대개 이렇게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 법이다.) 겨자씨는 굉장히 작다. 눈 어두운 어르신들은 안 보일 정도로 작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작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그토록 어렵게 보이는 제자도를 능히 감당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도대체 겨자씨 믿음이란 무엇일까?

 

그것에 대한 실마리는 이어 나오는 7절에서 10절 말씀에 있다. 예수님은 겨자씨 믿음을 말하신 후, ‘무익한 종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다. 종은 철저하게 주인에게 속해 있다. 종은 바깥에 나가서 열심히 일하고 들어와서 주인이 차려놓은 밥상을 날름 받아 먹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고된 노동 후에도 집에 돌아와 주인을 위해 밥상을 차려야 하는 존재이다. 종이 그렇게 한다고 주인이 종에게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종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종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다 마친 뒤 이렇게 말해야 한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10).

 

겨자씨 믿음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겨자씨 믿음이란 겸손의 믿음, 순종의 믿음을 말한다. , 위에서 하인리히 아놀드가 제자도를 “제자도는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께 자리를 내어드려 우리 안에 사시게 하는 것이다. 제자됨이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살아 역사하시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문제이다라고 정의했던 것처럼, 믿음이란 내가 그것을 통해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하시도록 우리 안에 주께서 사시도록 나를 내어 드리는 일, 그 분이 역사하시도록 물러서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인생과 사명은 분리될 수 없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우리는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사명을 갖게 된다. (공동체의 사명, 개인의 사명)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과 사명을 아름답게 완수하기 위해서 기도하며 이런 저런 계획을 세운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여러분의 인생과 사명을 아름답게 완수하기 위하여 어떠한 계획을 하며 사시는가? 이렇게 사시는가?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정말 이렇게 사는 분이 있다면, 둘 중 하나다. 신앙의 경지가 하늘에 닿은 분이거나, 한량이거나.

 

"계획은 있지만, 계획 없이." 이 말은 참으로 무책임한 말 같지만, 기독교 영성에서는 꼭 필요한 말이다. 계획 없이 어떻게 인생을 살 수 있는가. 20141월 어느 신문매체에 실린 김정운 교수(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명강사, 전 명지대교수, 인기 작가, 김선도 목사의 아들)의 인터뷰 기사가 내 마음에 도끼질을 했다. 이런 제목의 기사였다. “100세 시대인데 이렇게 대책 없을 수 있나!”

 

그 기사 인터뷰에서 김정운 교수는 이런 말을 한다.

 

교수를 그만둘 때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과연 강의는 계속 들어올지, 책은 잘 팔릴지 누가 장담하나. 50세에 훌쩍 버리고 떠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추구할 세계에 대한 동기가 분명해야 한다. 지금 내가 사는 세계가 내가 추구하는 삶이나 세계가 아니라는 인식이 분명할 때 떠나야 한다. 새로 시작하려면 버려야 한다. 내려놔야 다시 새로운 것을 쥘 수 있다. 아무리 직장에서 버텨도 60이나 65세면 쫓겨난다. 우린 그동안 대학까지 16년 정도 공부한 것으로 60세까지 버텼다. 이제 100세 시대인데 왜 남은 인생에 대한 투자는 하지 않는가. 날 부러워하지 말고 자기의 삶과 인생을 성찰해야 한다. … 평균수명의 연장은 어마어마한 혁명이다. 사회구조의 변혁보다 더 무서운 일이다. 그런데 100년을 사는 것에 대해 이렇게 대책이 없을 수 있나. 모든 것이 엄청나게 변하고 달라질 것이다. 무엇보다 100년을 살아야 하는데 50년을 사는 속도와 의식으로 살 듯 조급하고 불안하게 살면 탈진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모든 이성과 영성을 동원하여 인생을(사명을) 열심히 계획해야 한다. 그래야 낭패보지 않을 수 있다. 현재를 계획해야 하고, 10년 후를 계획해야 하고, 20년 후를 계획해야 하고, 노후를 계획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후를 계획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을 계획하는 데 열정을 들이지 않으면 인생은 산으로 간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게 자신의 모든 이성과 영성을 모두 동원하여 촘촘하게 짠 계획에 너무 얽매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에게 인생(사명)은 더 이상 '나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일'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증언하고 있듯이, 성령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분이다. 성령은 결코 우리들이 촘촘하게 짜놓은 계획대로 움직이는 분이 아니다.

 

오늘 말씀에서처럼 우리는 믿음을 '더 달라'고 주님께 간구하지만, 주님은 결코 제자들에게 믿을 더 주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이 간구해야 할 믿음이 어떠한 것인지 '겨자씨 비유'를 통해서 알려주신다.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보자. 믿음을 더 가져서 무엇 하려는가? 결국 그것을 내 정욕에 쓰려는 것 아닌가? 믿음은 어떠한 것을 하는 능력이 아니다. 믿음이 있으면 병을 고치고, 손에서 장풍 나가고, 미래를 보고, 그러는가? 예수님께서 무익한 종의 비유에서 말씀하고 계시듯, 믿음은 나를 쳐서 주님께 굴복시키는 순종의 깊이이다.

 

인생(사명)은 우리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일'이라는 것을 간과한 모든 계획은 그것이 아무리 촘촘하고 잘 짜인 것이라 하더라도 '탐욕'에 불과하다. 탐욕은 개인의 인생(또는 공동체)를 세우지 못한다. 탐욕은 결국 인생(공동체)을 허물고 만다.

 

아골 골짜기를 아는가? 가나안 입성을 앞 둔 여호수아는 정탐꾼을 은밀히 파견하는 등, 가나안 땅의 관문인 여리고 성을 차지하기 위하여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하나님의 말씀에 힘 입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공동체는 여리고 성을 어렵지 않게 정복한다. 다음 정복지는 아이성이었다. 아이성은 여리고 성에 비하면 작고 형편 없는 성이었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공동체는 손 쉽게 아이성을 정복할 거라 믿었다. 그런데, 결과는 참담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공동체는 보잘것없는 아이성에게 대패하고 만다.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가?

 

아이성 패배는 한 사람의 탐욕 때문이었다. 유대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여리고성에서 노략한 물건을 탐욕스럽게 감추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공동체가 무너졌다. 이와 똑 같은 일이 신약시대의 초대교회에서도 있었다.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아간과 같았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탐욕은 초대교회 신앙공동체를 흔들었다. 그 탐욕 때문에, 결국 공동체도 위기를 겪고, 개인의 삶은 파탄에 이르게 됐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획은 있지만, 계획 없이" 인생을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에게 도대체 얼마큼의 믿음이 필요한가. 믿음을 더 달라고 해서, 주님이 믿음을 더 주시면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 하는가. 사실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하면 그 능력이 나타난다. 결국 믿음도 우리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일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 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 있는가. 믿음을 더 달라는 탐욕에 사로잡히지 말고, 자기 안에 있는 겨자씨 만한 믿음을 성령님께 맡기는믿음’, 그리고순종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사명)에는실패란 없다. 결국 성령이 하신 일이니까.

 

겨자씨 믿음을 간구하시라. 더하지 말고 오히려 빼시라. 나를 쳐서 주님께 굴복시키는 순종의 깊이를 간구하시라. 주께서 하시도록 우리 안에 주께서 사시도록 나를 내어 드리시라. 주께서 역사하시도록 물러서시라. 겨자씨 믿음으로 인생과 사명에서 승리하시는 믿음의 종들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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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9. 26. 02:15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

(출 31:1-11)


회생활이 재밌고, 신앙생활이 깊어지려면 성경을 잘 알아야 한다. 물론 성경을 정보 차원에서 아는 것으로만 그치면 안 되고, 성경과 나의 삶을 긴밀히 연결시켜 그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학교 다닐 때 수업 시간이 지루했던 기억이 있는가? 왜 그런가? 왜 그렇게 수업이 지루했는가?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요인은 수업 내용을 잘 못 쫓아가기 때문이다. 수업 내용을 잘 못 쫓아간다는 것은 수업의 내용을 잘 모른다는 뜻이다. 무엇이든지 그것에 대한 흥미를 느끼려면 어느 정도 기본 지식은 갖추고 있어야 한다.

 

신앙생활도 예외가 아니다. 신앙생활이 재밌고 깊어지려면, 교회 열심히 다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경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을 잘 아는 일이 쉽지 않다. 분량도 많을뿐더러, 내용도 이해하기 쉽지 않고, 게다가 우리 민족과는 별로 상관 없어 보이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중심으로 성경의 내용이 전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단, 성경은 문자로 씌어 있기 때문에, ‘독서에 대한 부담감이 있다. 먹고 살기 바쁜데, 조용히 앉아서 독서하는 일이 어디 쉬운가.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먹고 사는 것을 넘어선,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생명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명의 토대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우리의 생명은 그냥 그렇게 허무하고 비참하게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인생의 의미는 그 어떤 것으로도 충만해질 수 없다. 오직, 생명의 근원이시고 토대이신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것은 인류 역사에서 인생을 진지하게 살아온 사람들의 공통적인 지혜이다.

 

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만나는 방법을 터득하고 나면, 우리가 사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깊게 만날 수 있게 된다. 그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 성경은 꼭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다. 그러니, 성경에 관심을 좀 갖자. 단순한 관심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열망이 있어야 한다.

 

성경을 알아가는 한 방법으로, 일단, 성경에 나오는 인물과 그 인물을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을 유심히 보면 된다. 하나님은 한 인물을 택하시고, 그 인물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 자기 자신을 드러내신다. 그것을 유심히 관찰해 보면, 하나님이 우리의 현재 삶 속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며, 그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고 경배해야 하는 배울 수 있다.

 

창세기를 보자. 창세기 하면, 누가 생각나는가? 무슨 사건이 생각 나는가?

 

아담과 하와 창조기사

노아 홍수와 무지개 언약

아브라함과 사라 가나안 땅과 이삭 사건

이삭과 리브가 우물 판 사건 (우물 팔 때마다 물이 나왔다. – 대박사건 로또)

야곱과 레아, 라헬 장자권, 얍복강, 요셉에 대한 사랑과 비극

요셉 - 애굽에서의 고난과 성공

 

출애굽기를 보자.

 

출애굽 사건

모세, 아론, 여호수아

시내산 십계명

 

출애굽하면, 이것으로 끝날 것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은 그래도 교회 좀 다니신 분이고, 성경을 조금 아시는 분이다. 그런데, 출애굽기를 전혀 안 읽어 보신 분이다. 출애굽기는 출애굽 하는 이야기와 시내산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생활의 중심인, ‘성막이야기가 나온다.


출애굽기는 4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24장까지가 출애굽 이야기, 시내산, 그리고 율법에 관한 기사가 담겨 있고, 25장부터 40장까지는 성막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다. 그리고 출애굽기 40장은 성막 봉헌이야기로 끝맺는다.

 

성막은 무엇인가? 성막(이동식 예배당, Portable Sanctuary) à 왜 이동식 예배당이 필요한가? 기본적으로, 이스라엘은 유목민족이었다. 소나 양을 키우는 것을 주업으로 살았는데, 소나 양을 키우는 사람들은 그들을 먹일 꼴()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닐 수밖에 없다. 게다가, 지금은 출애굽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땅인 가나안으로 이동 중이다. 이동 중이기 때문에, ‘이동식 예배당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성막은 하나님이 거주하신다는,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상징이다. 성막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하나님과의 사귐, 그리고 죄사함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런데, 성막은 그냥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리신 말씀대로 지어졌다. 규격과 건축자재며 재질이 꼼꼼하게 율법의 형태로 모세에게 전해졌다.

 

성막과 관련해서, 꼭 알아야 할 인물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브살렐과 오홀리압이다.

 

교회 다니면서, 아브라함이나 모세, 여호수아 등은 잘 아는데,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잘 모르는 경향이 있다. 여러분이 한 번 시험해 보시라. 교회 다니는 여러분의 친구들에게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누군지 아냐고 물어보시라. 만약,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맞추는 분은 성경을 좀 진지하게 읽은 분이다. 그런데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교회 문턱만 드나든 분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막에 관한 규례를 내리고, 그 규례대로 성막 지을 일꾼을 택하신다. 그 사람이 바로, 브살렐이다. “내가 유다 지파 홀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2) 브살렐은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요즘으로 따지면, 건축 장인이었다. 기술자다. 하나님의 규례대로 성막을 정교하게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여러 가지 시술로 나무를 새겨 만들게 하리라”(3-4).

 

브살렐과 더불어서 성막제작을 위해 택함 받은 사람이 있다. 오홀리압이다. “내가 또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세워 그와 함께 하게 하며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에게 내가 지혜를 주어 그들이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을 다 만들게 할지니…”(6).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성막제작을 위해서, 리더로 세움 받았다. 또한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구절이 있다.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에게 내가 지혜를 주어 그들이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을 다 만들게 할지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을 감당할 일꾼을 부르시는데,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같이,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를 부르신다.

 

지혜로운 마음이 무엇일까? 무엇이 자신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지 아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명의 토대이시고 근원이신, 지혜의 원천이신,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마음이 있는 자를 부르시고 쓰신다.

 

성서정과에서 이번 주에 살펴보게 되어 있는 디모데전서의 말씀 중, 디모데전서 6장에서는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를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는 자.” 이렇게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는 자족하는 마음을 갖는다. 자족하는 마음이란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는 것과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는 것을 알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것을 족한 것으로 알고 만족하며 사는 것이다.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는 자족할 줄 알기 때문에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때문에 살지 않고,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따라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안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과 영생을 취하는 일을 위해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살아간다. 하나님께 마음을 둔 자는 1) 선을 행하고 2)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3)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4) 너그러운 자가 된다. 브살레과 오홀리압처럼 자신의 재능을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쓰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는 자가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복 받아서 부자가 될까? 잘 먹고 잘 살까? 만사가 형통할까?’만 생각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탐욕의 눈으로 세상 만물을 쳐다보는 속물들과 다를 바 없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왜 성막 제작자로서 택함을 받았는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바로 지혜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 또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고 갈망하는 자, 그런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다. 택하셔서 당신의 일꾼 삼으신다.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복 받아서 돈 좀 잘 벌어볼까? 출세할까? 만사가 형통할까?’ 이런 데만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고, 얼마나 하나님을 갈망하며 살아가는가?

 

브살렐과 오홀리압, 지혜로운 자가 하나님의 일꾼이니, 얼마나 일이 아름답게 진행되겠는가. 이들 외의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모든 자가 성막 제작에 전념하여, 출애굽기 40장에 나와 있는 대로, 성막 봉헌식을 갖는다.

 

성막 봉헌식의 마지막 장면을 보자.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40:36-38).


뭔가? 마음이 지혜로운 자들이 만든 성막을 통해,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인도하심을 받았다.

 

광야 같은 세상에서, 종종 길을 잃는 우리들, 어떻게 해야겠는가? 지혜로운 마음으로 성막을 지어야 하지 않겠는가? 성막을 짓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중심에 모신다는 것이다. 성막을 짓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살핀다는 것,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중심에 모신 자, 광야 같은 세상에서 길을 잃지 않고, 삶의 목적지(가나안)까지 안전하게 가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 다른 데 한 눈 팔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데 전념하는 지혜로운 마음을 지닌 자들이 되자. 그렇게 우리 모두가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가 되어 같은 마음, 같은 뜻, 같은 생각을 모으고 교회를 세워 나가면, 왜 주께서 사도행전의 부흥의 역사를 우리 교회에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는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2:46-47).

 

우리 모두,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살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집중하는,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가 되어 주께서 피로 값주고 세우신 교회를 잘 세워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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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