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5. 9. 24. 04:35

야곱의 축복 I

ㅡ도덕성과 영성ㅡ

창세기 64

(창세기 49:1-7)

 

창세기 49장은 야곱의 축복이라고 불리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복음성가로 만들어져 교회의 예배 시간에 널리 불려지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매우 익숙한 말씀이다. 말씀도 유명세를 타는 말씀이 있다. 대개 예배(또는 예전)에서 이런 저런 모양으로 자주 사용되는 말씀은 유명세를 타기 마련이다. 그래서 일찍이 종교개혁자들은 예배(예전)의 중요성을 알았기에 그들은 종교개혁의 내용을 예배(예전)를 통해서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들을 연구했다. 루터는 자신의 종교개혁 사상에 바탕을 둔 찬송가를 많이 지었는데, 그것을 통해서 그는 종교개혁을 더 효과적으로 해나갈 수 있었다. 그 중 대표되는 찬송가가 바로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찬송가이다.

 

야곱의 축복은 우리가 노래로 부르는 것만큼 달콤하지만은 않다. 이 말씀은 복 많이 받아라고 외치는 단순한 축복이 아니다. 이 말씀은 차라리 예언이라고 부르는 것이 낫다. 여기에는 축복뿐만 아니라, 저주, 심판 그리고 약속의 말씀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야곱이 아들들을 모두 모아놓고 죽기 전에 풀어놓는 넋두리가 아니다. 이것은 그의 온 생의 영적 능력을 담은 예언적 유언이다. 아버지 야곱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지만, 이것은 단순히 아버지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예언의 말씀이다.

 

성경에서 예언이란 점치듯이 미래를 미리 내다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행위이다. 점치는 사람들의 관심은 자기 자신의 미래, 즉 자기 자신에게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예언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관심을 둔다. 자기의 미래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자신의 미래가 중요하다. 점치는 사람들은 숙명론에 빠지지만, 예언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린다.

 

야곱의 축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예언이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파악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뜻인데,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어떤 지리적인 차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나아갔던 모세를 떠올린다. 그러나, 그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지리적 차원에서 하나님께 접근했기 때문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께 접근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야곱의 축복이 야곱의 인생 말년에 일어나는 사건 중 하나라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와 그 말씀을 듣는 자는 동일한 수준에 서 있어야 한다. 이들이 도덕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존재로 하나님 앞에 빚어지지 않았다면, 대언하는 자나 그 말씀을 듣는 자나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할 수 없게 된다. 둘 중 하나만 모자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온전히 전해지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야곱을 통해 아들들에게 대언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충분히 빚어졌다는 뜻이다.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들들에게 대언하려고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2). 여기에는 반복법과 대구법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러한 어법이 사용되는 이유는 지금 야곱이 전하고자 하는 예언이 너무도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이야기는 들어야한다. 그런데 이 듣는다는 행위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인간의 감각기관 중 귀만큼 허술한 것도 없다. 인간의 귀는 절대로 혼자서 작동하지 않는다. 인간의 귀는 마음과 함께 작동한다. 그래서 듣는다는 것은 귀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문제는 그래서 지리의 차원(거리의 차원)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영적인 차원인 것이다. 이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있지 않거나,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들을만한 도덕성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인간의 귀에 와 닿지 않는다. 그래서 야곱의 축복은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험난한 세월가운데 하나님을 경험하고 난 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도덕적이고 영적인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난 시점에서 말해지는 것이다.

 

도덕성과 영성이 결여되어 있으면 결코 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 전달되는 야곱의 자녀들이 장자 르우벤과 두 형제 시므온과 레위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들에게 전해지는 예언은 축복이 아니라 차라리 저주이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야곱의 축복이라 할 수 있겠는가.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이다. 고대 이스라엘 전통에서 장자가 갖는 특권은 대단했다. 장자는 아버지의 권위를 그대로 불려 받을 뿐만 아니라, 다른 형제들보다 물질적인 부분에서도 두 배를 더 받았다. 장자의 자리에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명예이고 특권이었다. 르우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야곱은 장남 르우벤을 이렇게 평가한다.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3).

 

여기까지만 보면 르우벤은 이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아버지 야곱의 말은 가슴 아프다. “… 탁월하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니리…” 탁월해야 마땅한 사람이 탁월하지 못하게 될거라는 예언이다. 왜 이렇게 르우벤은 순식간에 명예와 특권을 잃어버리게 됐을까?

 

야곱은 르우벤이 이렇게 명예와 특권을 잃어버리게 된 까닭을 우선 비유적으로 설명한다. 르우벤이 물의 끓음 같았다고 말한다. 물이 끓는다는 것은 일정한 범위를 넘어선다는 뜻인데, 르우벤의 인생에 있어 그러한 일이 있었다. 야곱은 비유적으로 설명한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데, 그것은 바로 르우벤과 빌하(야곱의 부인 중 한 명)의 간통 사건이다.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4).

 

르우벤에게 있어 지우고 싶은 흑역사였지만, 이 사건이 가지고 온 여파는 잔인했다. 우선 아버지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그리고 빌하의 자녀들이자 자신의 동생들인 단과 납달리와도 관계가 소원해졌다. 무엇보다 장남으로서의 권위를 잃어버리고, 동생들에게 권위 있는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요셉을 애굽의 노예로 판 사건 때의 일이다. 요셉을 죽이지 말자는 르우벤의 말을 귀담아 듣는 동생들이 없었다. 결국 그 사건에서 르우벤은 소외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실질적 장자의 축복이 동생 요셉에게로 돌아갔다. 장남에게 돌아가야 할 두 배의 축복이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이후 역사에서도 르우벤 지파는 별 볼 일 없는 지파로 역사에서 주목 받지 못하고 스르르 사라진다. 르우벤 지파는 가나안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요단 강 동편에 자리를 잡아 정착한 후 이스라엘 역사에서 사사나 왕 또는 예언자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지파로 그 지도력을 완전히 상실한 채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르우벤은 도덕적이지도 못했고 영적이지도 못했다.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한르우벤은 결국 물의 끓음 같지선을 지키지 못하고 넘어서는 바람에 그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도덕은 인간의 삶을 얽어 매는 족쇄가 아니라 삶을 지켜주는 안전띠이다. 도덕은 삶을 질주하고 있는 인간들이 서로 부딪쳐 치명적인 사고를 내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안전거리이다. 도덕성과 영성은 동전의 앞 뒤 면과 같아서 서로를 분리해 낼 수 없다. 잠언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부모의 물건(소유)을 도둑질하고서도 죄가 아니라 하는 자는 멸망 받게 하는 자의 동류니라”(잠언 28:24).

 

다음으로 이어지는 야곱의 축복은 시므온과 레위에게 함께 내려진다. 이 둘이 따로 예언을 받지 않고 함께 받는 이유는 이들이 무엇보다 여동생 디나의 강간 사건에 대한 보복의 주역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에 대한 평가는 이렇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5). 여기서 이들이 형제라고 언급되는 이유는 엄마가 같은 형제’(실제로 이들은 엄마가 같은 형제이다)라는 뜻이라기 보다는 어떠한 일을 위해 한 통속이 되어 동맹또는 연합을 했기 때문이다.

 

이들을 평가하는 단어는 매우 과격하다. ‘이라는 말과 폭력이라는 말이 쓰이는데, 이것은 이들의 행동을 매우 강하게 비난하고 있는 용어이다. 이들은 자신의 여동생 디나가 강간 당한 것에 대하여 복수하기 위해 둘이 한 통속이 되어 무자비한 폭력을 저질렀다. 비도덕적인 일을 당한 것이 비도덕적인 일을 수행하게 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무엇보다 자신의 탐욕과 미움을 해결하기 위해 폭력의 수단을 쓰는 것은 그 어느 상황에서도 정당화 될 수 없다.

 

야곱은 아들들에게 이렇게 못박아 말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6절 전반부). 그들의 모의와 그들의 집회는 도덕성과 영성을 벗어나는 모의와 집회였다. 그들의 모의와 집회는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는폭력 그 자체였다. 폭력에 사로 잡힌 자는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안식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폭력을 저지르는 자는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땅(나라)에 발 붙일 곳이 없다.

 

하나님 안에서의 도덕성과 영성을 잃고 폭력을 저지른 시므온과 레위에게 내려진 예언은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지는것이다. 폭력성이 짙은 자들은 서로 한 통속이 되도록 놓아두면 안 된다. 이들이 서로 모여 모의하고 집회를 갖게 하면 안 된다. 폭력성이 짙은 자들은 서로서로 떼 놓아야 한다.

 

야곱의 예언은 성취된다. 레위 지파는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에 48개 성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고(21), 다른 지파처럼 기업을 물려 받아 그곳에서 모여 살지 못한다. 신명기서에서 관찰할 수 있는 바, 모세가 각 지파를 축복할 때에 시므온 지파가 빠진다. 그리고 결국 시므온 지파는 자기에게 할당된 기업을 지켜내지 못하고 유다 지파에 흡수된다. 이렇게 레위 지파와 시므온 지파는 야곱의 예언대로 다시는 서로 연합하지 못하게 된다.

 

야곱의 축복은 야곱의 사사로운 복 빌어 줌이 아니다. 험난한 세월을 살아오며 야곱은 하나님을 만났고,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분간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예언자로 거듭났다. 야곱의 아들들도 험난한 세월을 그냥 허송 세월로 보내지 않았다. 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아버지의 예언(축복)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났다.

 

만약 그들이 예언자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지 않았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지도 그 말씀을 귀담아 듣지도 않았을 것이다. 죽을 날을 얼마 안 놓아두고, 아들들을 모아놓고 축복한답시고 저주와 심판을 퍼부을 아버지가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그렇게 저주와 심판을 퍼붓고 있는 아버지의 말씀을 곱게 듣고 있을 아들들은 더더군다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예언했고, 아들들은 들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한 아버지의 사사로운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예언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고 들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도덕성과 영성에 대하여,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폭력에 대하여 묵상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들에게 듣기 싫은 잔소리가 아니라, 삶을 돌아보고 반성하며 묵상하게 하는 그야말로 축복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그 축복안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향해 당당히 나아갈 수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예언) 안에 거하는 것은 그것이 비록 저주와 심판 같아 보일지라도 멸망이 아니라 생명이다.

 

www.columbuskmc.org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 성령을 받아야 하는가  (0) 2016.04.04
야곱의 축복 II  (0) 2015.10.08
아버지의 마음  (0) 2015.09.03
에브라임과 므낫세  (0) 2015.07.16
야곱의 유언  (0) 2015.07.09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9. 3. 05:10

아버지의 마음

창세기 63

(창세기 48:8-22)

 

아버지 야곱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아들을 대동하고 아버지 병문안을 간 요셉은 두 아들이 그들의 할아버지 야곱에게 축복 받기를 원하는 마음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죽음을 앞 둔 사람일 것이다. 죽음을 앞 둔 사람의 마음만큼 간절한 마음은 없다. 죽음을 앞 둔 사람의 은 그 자체가 힘이고 능력이고, 진실이다. 죽음을 앞 둔 아버지 야곱의 축복은 그 자체가 힘이고 능력이고, 진실을 넘어선 현실이었다.

 

죽음을 앞 둔 아버지와 죽음의 끝까지 가보았던 아들의 대화에는 이 세상 어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베어있다. 베토벤이 작곡했음 직 한,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을 그린 한 편의 서정적인 교향곡을 보는 듯하다. 요셉은 병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 야곱에게 자신의 두 아들을 이렇게 소개한다.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9). 요셉은 자신의 두 아들을 하나님의 선물로 소개한다. 자식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인식은 그 자식에 대한 기대와 양육의 질을 바꾼다.

 

이 세상 어느 것도, 하나님과 관련되지 않은 것은 없다. 자식도 마찬가지다. 자식은 나의 생물학적 작용을 통해서 내가낳은 나의 소유가 아니다. 자식은 철 없던 한 때 불장난으로 난 천덕꾸러기가 아니다. 자식은 아무런 계획도 없는 상태에서 실수로 낳은 짐스러운 존재가 아니다. 일단 생명이 태어나면, 그 생명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물이므로, 그 생명을 잉태한 부모나, 그와 똑 같은 과정을 통해서 이 땅에 온 모든 이들은 새로운 생명을 온 힘을 다해 돌봐야 할 의무가 있다.

 

요셉에게 자식은 하나님의 선물이었기 때문에 그 어느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자식들에게 충만하게 임하기를 바랬다. 그 하나님의 은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아버지 야곱을 통해서 임한다는 것을 요셉은 알고 있었다. 이렇게 부모는 자식의 축복의 통로이다. 그러므로, 자식이 예의를 갖추어 온전한 마음으로 부모를 섬기는 것은 성경에서도 약속이 있는 계명으로 나타난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20:12).

 

한국 사회가 잃어버린 전통 중 가장 안타까운 것은 ()’의 전통이다. 유학사상을 바탕으로 발전해온 한국의 정신 문화에서 는 그 중심에 있었다. 유학에서 강조하는 사람됨의 핵심은 ()’인데, 공자의 논어에 의하면 그 인을 이루는데 가장 근간이 되는 것이 바로 이다. 논어의 위정편에 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거기에는 에 대한 이런 이야기까지 나온다.

 

어떤 사람이 관직에 있지 않은 공자에게 말했다.

선생께서는 어찌하여 정치를 하지 않으십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서경]에 이르기를 효도하고 오직 효도하여 형제들에게 우애롭게 대하고 정치에 이것을 배풀어라라고 했으니, 이 또한 정치를 하는 것이다. 어찌 벼슬을 해야만 정치를 하는 것이겠느냐?”

<출처: 김원중 옮김 [논어], 글항아리>

 

유학의 ()’ 사상은 기독교의 사랑(아가페)’과 비교할 수 있는데, 이를 기독교식으로 풀어 설명하자면, 사랑을 실천하는 바탕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형제와 우애 있게 지내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게 잘 안 되면, 하늘의 복을 받기가 쉽지 않다. 동맥이 막혀 있는데 어찌 건강할 수 있겠는가. 가장 중요한 축복의 통로가 막혀 있는데 어찌 하늘의 복이 시원하게 임하겠는가. 혹시, 인생이 잘 안 풀린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다면, ‘의 문제를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많은 젊은 이들이 부모(또는 나이 많으신 어르신) 공경하는 일을 등한시 하는 이유는 그들을 공경하는 일이 남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부모를 공경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은 오직 부모를 위한 일, 어른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일들은 자신들을 귀찮게만 할 뿐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잘못된 생각이다. 효를 행하는 것(부모와 어른을 공경하는 일)은 남을 위한 일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자연의 섭리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은 모두 태어나서 성장해 살다가, 결국 늙어서 병들어 죽는다는 것이다(생로병사). 생명은 모두 늙는다. 생명은 모두 죽는다. ‘늙어감에서 예외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죽음에서 예외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지금 효를 행하는 것은 남에게 행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제 곧 늙게 될 나 자신에게 행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더군다나 문명의 발달로 인해 인간의 수명이 현저하게 늘어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노년의 삶은 그 어느 시대에서보다 길어졌다. 옛날에는 노년의 삶이 별로 길지 않았다. 노년에 들어서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옛날에는 노년에 들어서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래서 옛날에는 인간이 누리는 복 중에, 장수의 복이 들어갔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수의 복을 누리는 시대가 되었다.

 

노인 우울증의 대부분은 사회적 관계에서 소외를 당하기 때문에 온다. 다른 말로 하자면, 노인으로서의 공경을 받지 못하는 스트레스가 고스란히 우울증으로 발전하게 되고, 이는 노인 자살의 수를 늘려가는 요인이다. 이러한 노인의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노인 우울증 치료제를 개발하는 게 아니라, 무엇보다 잃어버린 사상을 회복하는 것이 최선이다.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잠언 16:31).

 

늙어간다는 것은, 늙었다는 것은 단순히 나이만 먹었다는 뜻이 아니다. 인생의 모진 풍파를 모두 견뎌냈다는 뜻이다. 그들은 존재에의 용기를 선택한 자들이고, 삶의 투쟁에서 승리한 자들이고, 존경 받아 마땅한 면류관을 머리에 쓴 자들이다. 노인들의 백발은 액면가 그대로 흰색이 아니라, 그 안에 황금을 감추고 있는 영화의 면류관이다. 그러므로 부모님과 어른들은 존경 받아 마땅하다.

 

야곱은 아들 요셉과 손자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축복을 베풀만한 영화의 면류관을 머리에 쓴 아버지요 노인이었다. 야곱이 베풀고자 하는 축복은 부끄러운 축복이 아니라 당당한 축복이었다. 야곱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들 요셉에게 그의 아들을 나아오게 하고 그들에게 축복하리라고 말한다. 아들 요셉은 이렇게 당당한 아버지를 인정하고 있다. 요셉은 아버지가 축복하려고 하자 아버지 앞에서 엎드려 경의를 표한다.

 

이렇게 부모가 자녀에게 인정 받는 길 또한 쉽지 않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에게 인정 받을 때 그것만큼 복된 인생도 없다. 세상에서 인정 못 받았어도, 자녀에게 인정 받는다면 그 어떤 인정보다도 값진 것이다. 반대로, 세상에서 아무리 큰 인정을 받았어도, 자녀에게 인정을 못 받는다면 무슨 위로함이 있겠는가. 부모가 자녀에게 인정 받을 때, 하늘의 복은 자녀들에게 시원하게 임하게 된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에게 베푸는 축복에는 두 가지의 특징이 있다. 한 가지는 장자 므낫세와 차남 에브라임에게 손을 얹을 때 팔을 엇바꾸어 얹는 것이다. 원래는 므낫세가 장자이므로 야곱의 오른손이 므낫세의 머리 위로 향해야 하고, 에브라임은 차남이므로 야곱의 왼손이 에브라임의 머리 위로 향해야 한다. 그러나 야곱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팔을 엇바꾸어 오른손을 에브라임 위에, 왼손을 므낫세 위에 얹는다. 또한, 야곱은 형식적으로 봤을 때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을 베풀고 있으나 그 내용 면에서는 요셉에게 축복을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요셉의 두 아들에게 손을 얹고 비는 야곱의 축복은 이후 제사장이 복을 빌 때 쓰는 형식의 전조가 된다. 야곱의 축복 기도문 형식은 유대교 의식에서 그대로 사용된다. 야곱이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지 직접 보자.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15-16).

 

야곱은 하나님의 이름을 세 번 부른다. 하나님의 이름을 세 번 부를 때,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야곱의 하나님은 뜬구름 잡는 하나님이 아니라,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하나님이다. 야곱의 하나님은 무관심한 하나님이 아니라 야곱을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길러주신 하나님이시다. 야곱의 하나님은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야곱을 모든 환란에서 건지신 하나님이시다. 야곱의 하나님은 이토록 구체적이다.

 

여기서 주목해서 봐야 할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건지신(redeem)’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히브리어 원어에서 가알이라는 말이다. ‘가알은 성경의 고엘이라는 말의 어원이다. 레위기 25장에 보면 고엘법이 나오는데, 이는 어떤 사람이 빚을 지거나 노예가 되었을 때 가장 가까운 남자 친족이 돈을 대신 지불하고 풀려나게 해주는 율법(제도)이다. 성경에서 가장 잘 알려진 고엘법의 수혜자는 룻기서의 주인공 모압여인 이다. 룻은 고엘법을 잘 알았고, 또 그 율법을 경건하게 지키고자 했던 보아스에 의해서 건짐(redemm)’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야곱에게는 그를 어려움에서 건져줄친족이 없었다. 형 에서와의 관계나 외삼촌 라반과의 관계 속에서 그들에게 가알(건짐)’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야곱에게는 그를 모든 환난에서 건져줄존재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었다. 그것을 알았던 하나님은 실제로, 야곱의 신앙 고백과 같이, 야곱은 환난에서 건져주셨다.

 

이것은 야곱의 절절한 고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야곱은 두 아들을 데리고 병문안 온 아들 요셉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네 자손까지도 보게 하셨도다”(11). 눈물 없이는 듣지 못할 야곱의 신앙 고백이다. 야곱은 사랑하는 요셉 아들이 죽은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야곱은 평생 요셉을 가슴에 묻고 살았다. 한국의 유명한 희극인 송해 씨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식을 잃으면 가슴에 묻는데, 그 가슴을 파면 거기서 죽은 아이가 나올 것 같다.” 이처럼, 야곱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간다. 그런데, 지금 야곱은 그토록 그리워하던 요셉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요셉의 자식들까지도 그리하고 있다. 이 어찌 하나님께서 모든 환란에서 건지셨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야곱이 팔을 엇바꾸어 축복을 하자 그것을 지켜보던 요셉은 아버지가 실수로 그렇게 하는 줄로 알고 아버지 야곱에게 오른손을 므낫세에게, 왼손을 에브라임에게 얹으시라고 정정해 준다. 그러나, 야곱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이렇게 말한다.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19).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요, 이것이 아버지의 영력이요, 이것이 아버지의 권위이다. 아버지는 실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행하고 있는 중이다. 아버지는 언제나 옳다. 더군다나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아버지는 언제나 옳다. 게다가 하나님의 기르심과 건져주심 가운데 모진 세월의 풍파를 견뎌내신 아버지는 언제나 옳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아버지는 언제나 옳다.

 

야곱이 차남인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오른손을 얹은 것은 자신의 살아온 인생이 주마등처럼 흘러가며 가슴을 움직였기 때문일 것이다. 야곱도 차남이었다. 장남의 복을 받을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그러나, 야곱은 형 에서를 제치고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장자의 복을 받았다. 야곱이 살아온 세월은 바로 이것을 깨닫는 세월이었다. 눈이 안 보이고 병들어 죽게 될 초라한 인생의 끝자락에 와 있으나, 야곱이 평생을 걸쳐 모진 인생의 고난 속에서 얻은 것,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들에게 남겨주고 갈 유산은 바로 하나님의 섭리였다.

 

아버지 야곱의 마음은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되었다. 이런 아버지가 내리는 축복은 허공을 가르는 허언이나 요행을 바라는 공염불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된 아버지의 마음에서 나오는 축복은 그 자체가 힘이고 능력이고, 진실을 넘어선현실이다.

 

야곱은 이렇게 축복을 마무리 한다.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20-21). 훗날, 야곱의 축복은 그대로 이루어진다. 에브라임 지파는 가나안 정복 전쟁 시기에 여호수아를 배출하는 등 이스라엘의 중심 역할을 감당하게 되고, 요셉은 세겜 땅에 묻히게 되고, 결국 애굽에서 번성한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하여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주신 가나안 땅으로 되돌아 가게 된다.

 

www.columbuskmc.org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야곱의 축복 II  (0) 2015.10.08
야곱의 축복 I  (0) 2015.09.24
에브라임과 므낫세  (0) 2015.07.16
야곱의 유언  (0) 2015.07.09
새로운 신앙의 경지  (0) 2015.07.09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7. 16. 11:45

에브라임과 므낫세

창세기 62

(창세기 48:1-7)

 

유언을 남긴 야곱이 연로하여 병에 든다. 요셉은 이 소식을 듣고 그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대동하고 아버지 문병을 간다. 그런데 거기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진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입양하게 된다.

 

물론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입양이 오늘날과 같은 입양 절차를 걸치는 것은 아니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입양하게 되는 것은 자식을 더 갖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입양하는 근거는 순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야곱은 어떠한 결정을 할 때마다 자기 자신의 생각에 근거하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결정을 내린다. 요셉의 두 아들을 입양하려는 순간에도 야곱은 왜 그가 이러한 행동을 취하는 지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내어놓는다.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3-4).

 

이것이 바로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입양하게 되는 배경이다. 야곱은 자신의 욕심에 근거해서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받은 말씀을 근거로 그의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전달하기 위해 그러한 결정을 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생을 살면서 선택의 기로에 섰거나, 무슨 일을 감행하게 될 때 무엇을 근거로 해야 복을 받는지에 대해 배운다.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입양하게 되는 경위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둔다. 특별히 이 구절이 끌린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내게 이르시되.”

 

이 구절을 근거로 생각해볼 때, 야곱에게는 분명한 하나님 경험이 있었다. 그가 경험한 하나님은 우선 전능하신분이다. 여기서 전능하신이라는 뜻은 엘샤다이인데, 엘샤다이란 ‘자기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자신이 정한 말과 법칙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철저하게 지킨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엘샤다이의 하나님, 전능한 하나님이란 약속을 꼭 지키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야곱이 경험한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을 내릴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행한 어떠한 일은 복이 될지 악이 될지 최종적으로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례를 들어, 어떤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 그를 도와주기 위해 많은 돈을 기부했다고 치자. 부자의 기부는 가난한 자에게 이 될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부자의 기부를 통해 가난한 자에게 행복이 임할 수도 있고, 더 큰 불행에 처할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갖는 한계이며 연약함이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에게서 무엇인가 을 기대하면 안 된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복이 복으로 작용하게 끔 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밖에 없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그것을 그대로 복이 된다. 반대로 하나님이 심판하시면 그것은 그대로 심판이 된다. 뒤바뀌는 일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복을 내리신다는 것은 믿을 만한 것이다. 야곱은 일생을 통해 바로 그것을 경험했다.

 

또한, 야곱이 경험한 하나님은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이다. 결국 이 말씀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경험하는 인간의 말은 존재의 가벼움을 그대로 반영할 뿐이다. 입에서 나간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인간은 서로 말을 주고 받으면 그 말 대로 꼭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손가락을 걸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로 그 말이 곧이곧대로 지켜지는가?

 

말이 얼마나 안 지켜지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지,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충분히 알고 있다. 그래서 세상에는 법체계가 등장한 것이다. 법이라는 것이 복잡해 보이지만 사실 별개 아니다. 법이 생겨난 이유는 사람들끼리 서로 간에 한 말을 안 지키기 때문이다. 아무리 준엄하게 선서의식을 행해도 소용 없다. 약속이 깨지는 순간을 보면, 언제 그들이 준엄하게 선서의식을 행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뒤 돌아보지 않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인간의 사악함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다르다. 하나님이 하나님인 이유는 그의 말씀은 신실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대면하는 자에게 말씀을 주시는데, 그 말씀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말씀은 그냥 말씀이 아니라, 언약(Testament)이다. 그래서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복 주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면서 경험해야 하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 경험이다. 이 사회는 이런 저런 경험 내지 체험을 많이 한 인재를 요구한다. 경험과 체험이 많은 사람은 생각이 유연하고 문제 해결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험과 체험이 많은 사람은 유능한 인재로서 어느 집단에서나 인기가 높다.

 

요즘 젊은이들은 이러한 사회적 인재상에 부응하기 위하여 경험과 체험을 많이 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일에 도전한다. 공부만 열심히 하는 것으로는 모자라기 때문에, 어학 연수도 떠나고 여행도 떠나고 여러 군데 일터에서 인턴십도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 사회의 인재상으로 빚어져 간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공교롭게도 단 한 가지,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이다.

 

종착역이 좋은 직장이라면, 경험과 체험을 많이 해서 생각이 유연하고 문제 해결 능력이 뛰어난 인재로 성장해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마도,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경험과 체험의 영역을 넓히는 사람은 놀부 같은 사람이지 않을까 싶다. 복 받기 위해 제비 다리를 일부러 부러뜨려 치료한 놀부에게 임한 것은 복이 아니라 재앙이었듯이, 좋은 직장을 위해 경험과 체험의 영역을 넓히는 사람에게 결국 무엇이 올까? 적어도 유연한 생각과 문제 해결 능력이 그들의 참된 인격으로 자리 잡지는 않을 것이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하나님의 존재성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경험할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기독교이다. 특별히 기독교는 나사렛 예수에게서 경험되고 있는 하나님을 전한다. 그 하나님을 만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참된 평안과 안식을 누리게 된다고 말한다.

 

우리가 성경을 이토록 열심히 들여다 보는 이유는 거기에 어떠한 신령한 능력이 있어서 그것을 통해 복을 받기 위함이 아니다. 성경은 나침반이고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가리키고 설명해 주고 있는 그곳을 바라보며 그곳에 계신 하나님을 내가직접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한 번 물어보자. ‘나에게 하나님 경험이 있는가?’ 이것은 참 도전적인 말이기도 하지만 위험한 말이기도 하다. 어떠한 사람이 정말로 하나님 경험이 있는지 아닌지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로 하나님 경험을 했다고 스스로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단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래서 하나님 경험에 대한 검증을 위해서라도 신앙은 절대적으로 공동체성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는 하나의 교회라는 개념을 통해 교회의 공동체성을 유지해 왔다. 물론 교회 안에는 여러 분파가 있을지라도, 그 분파들에게 공통되는 요소들이 존재한다. 서로가 서로의 신앙을 살피는 것이다. ‘목양이라는 개념도 이런 것이다. 그리스도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울타리 역할을 해주는 목양을 해야 하는 것이다.

 

야곱에게는 분명한 하나님 경험이 있었다.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어떠한 말씀을 받는 것인데, 그러한 경험을 하고 나면 야곱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 말씀에 매이게 되어 있다.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어떠한 결정을 하든, 그 말씀이 근거가 되는 삶을 살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이다. 이 세상에는 경험해보고 체험해봐야 할 것이 정말로 많다. 유연한 사고력과 문제해결 능력을 키우려면 다양한 경험과 체험은 기본이다. 그러나, 아무리 다양한 경험과 체험을 통해 유연한 사고력과 문제해결 능력을 키운다 할지라도 우리의 인생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야곱은 죽음을 앞두고 병이 들어 몸이 허약해진 상태였지만, 그런 중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행동을 취한다. 이게 정말 쉽지 않은 거다. 사람은 나이 들고 병들고 죽음을 앞두면 나약해지고 흔들리는 법이다. 그래서 엉뚱한 행동을 통해서 자녀들에게 또는 지인들에게 상처주기 십상이다. 하지 말해야 할 말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한다. 혼란만 가중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나약한 인간의 말로이다.

 

그러나 야곱에게는 분명한 하나님 경험이 있었다. 그 경험은 끝까지 야곱을 붙들어 주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그가 끝까지 어떠한 행동을 취하는 데 기준이 되어 주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하여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입양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요셉에게 내리신 복이기도 하다. 야곱의 12명의 아들 중, 첫째 아들인 르우벤이 장남으로서 다른 아들보다 두 배의 복을 받아야 했으나 르우벤 대신 요셉이 두 배의 복을 받게 된 것이다.

 

요셉이 이렇게 큰 형 르우벤을 대신하여 장자의 복을 받게 된 이유는 그가 진정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데 헌신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데 헌신하는 자를 결코 그냥 두지 않으신다. 두 배의 복을 내리신다. 이 사실만 알아도, 우리의 헌신은 결코 힘든 일이 아니게 될 것이다.

 

물론, 요셉이 그렇게 모진 고통 가운데서도 헌신할 수 있었던 것도 그에게도 하나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경험한 자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하나님의 복이 넘치는 세상이다. 우리도 하나님을 경험해야 하지 않겠는가.

 

www.columbuskmc.org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야곱의 축복 I  (0) 2015.09.24
아버지의 마음  (0) 2015.09.03
야곱의 유언  (0) 2015.07.09
새로운 신앙의 경지  (0) 2015.07.09
살리는 자  (0) 2015.06.25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7. 9. 06:07

야곱의 유언

창세기 61

(창세기 47:27-31)

 

갖고 온 게 없는데

뭘 가지고 가겠어

 

생각해봐, 그 어렵던 시절

 

생명보다 죽음을 먼저 알았고

평화보다 침략을 먼저 알았고

사랑보다 전쟁을 먼저 알았고

神보다 미신(迷信)을 먼저 알았고

 

그러나 생각해봐, 살아온 시절

 

생명을 만났고

생명을 낳았고

평화를 누렸고

평화를 남겼고

사랑을 입었고

사랑을 나눴고

()을 배웠고

()을 전했고

 

갖고 온 게 없는데

뭘 가지고 가겠어

   

그만큼이면 됐어 그러니

내 누울 자릴랑 남겨두지 말고,,,,,,

                             

불에 태워 한 줌의 재로 만들어

우면산(牛眠山) 기슭에서

마주보며 살게 해줘

 

장준식, <유언> 전문

 

이것은 선친의 유언이 담긴 시이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해 보면, 사람에게는 죽음에 대한 보이지 않는 직감이 있는 듯하다. 물론 아버지께서 의사로부터 8개월정도 후에는 생을 마감하게 될 거라는 ‘사형선고’를 받으신 영향도 있겠지만, 사람은 죽기 전까지 죽는 것을 생각하기 보다 살 것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시한부 인생을 살더라도, 인간은 언제 죽게 될지 그 정확한 시간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인간의 생명 안에는 보이지 않는 직감 같은 것이 있는 것 같다. 아버지는 본인이 언제 죽게 될지 그 정확한 시간을 알지 못했으나, 본능적으로 죽음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았는지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에게서 정을 뗐다. 일부러 정을 뗀 게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정을 떼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정말로 얼마 뒤, 아버지는 죽음을 맞이했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는 특별한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저 자신이 죽으면 매장하지 말고 화장을 해서 우면산 기슭에 뿌려 달라고만 했다. 화장이 그렇게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이었음에도 아버지는 죽은 뒤 화장해 달라고 고집했다.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매장하면 산소를 찾아와야 하는 번거로움을 자녀들에게 남기는 것인데, 아버지는 그러한 번거로움마저 자녀들에게 지우고 싶지 않아 했다. 물론 아버지의 유언대로 아버지가 죽은 뒤 화장해서 그 유해를 납골당에 모셔놓고 일부를 우면산에 뿌렸지만(모든 유해를 야산에 뿌리는 것은 불법이다),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마다 후회되는 건 아버지의 유언을 곧이곧대로 들어드린 것이다. 아버지 산소가 없으니까, 아버지가 정말로 아무데도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사는 게 힘들어서 아버지가 생각날 때마다 어디를 찾아가서 ‘아버지’를 부르며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유언에는 그 사람의 인생이 담긴다. 아버지는 참 소박한 분이었다. 아버지는 그 무엇에 욕심 부리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마지막 유언도 ‘가지고 온 게 없는 뭘 가지고 가겠어!’라며 자신의 산소조차 만들지 말라고 했다. 죽은 뒤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크게 알리고자 산소를 멋지게 꾸미는 사람들과는 달리 아버지는 자신의 산소조차 만들지 말라며, 자녀들의 부담을 줄여주었다. 이것이 평생 소박하게 살아온 아버지가 후손들에게 남긴 마지막 교훈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나는 욕심부릴 수 없다. 소박함을 거부할 수가 없다.

 

야곱도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던 모양이다. 애굽 땅에 거주 한 지 17년이 지난, 그의 나의 147세 때의 일이다. 죽음을 직감한 야곱은 사랑하는 아들, 실질적으로 장자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아들 요셉을 부른다. 그리고 그에게 유언을 전한다. 그의 유언은 장황하지 않다.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29-30).

 

야곱의 유언식은 매우 준엄하게 진행된다. 야곱은 요셉을 불러들인 뒤, 유언을 말하기에 앞서 요셉에게 자신의 유언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인식시키고자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29). 야곱은 아들 요셉에게 자신의 유언을 준엄하게 실행해 줄 것을 부탁한다.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는 행위는 그 옛날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신붓감을 구하러 그의 종을 하란 땅으로 보내면서 행했던 의식과 똑같다. 이런 ‘의식(ritual)’은 그 일의 중요성을 환기시킨다. 같은 말을 해도, 같은 행동을 해도 일상에서 하는 것과 ‘의식’ 안에서 하는 것을 매우 다른 성격을 지닌다. 어떠한 특정한 말과 행위는 ‘의식’ 속에서만이 우리의 내면 깊이 의식화(意識化)된다. 의식(ritual)은 어떠한 것에 특별한 위치를 부여하는 일을 한다.

 

야곱의 유언, 즉 “내가 죽거든 너는 나를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가나안땅)에 장사하라”는 유언은 야곱에게 있어 단순한 유언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험악한 세월’을 견뎌온 이유이기도 하다. 그가 그렇게 험악한 세월을 견디며 산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었다. 야곱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약속이 없었다면 야곱은 그 ‘험악한 세월’을 그토록 잘 견뎌내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은 그가 그의 ‘험악한 세월’을 끝까지 잘 견디도록 해 준 버팀목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때부터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약속은 ‘가나안 땅’이었다. 그 땅에서 그의 자손들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하실 거라는 약속이었다. 그러므로 야곱에게 ‘귀향’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에 끝까지 기대어 사는 그의 사명이었다. 게다가 야곱은 요셉의 인도를 따라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오면서 브엘세바에서 제단을 쌓았을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한 시도 잊지 않았다.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46:4).

 

한 사람이 죽기 전, 그가 남기는 유언을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의 가치를 알 수 있다. 유언에는 그 사람의 인생의 가치가 담길 수 밖에 없다. 마지막에 먹는 음식은 자신에게 가장 의미 있는 음식일 것이고, 마지막에 방문하고 싶은 장소는 자신에게 가장 의미 있는 장소일 것이고, 마지막에 만나는 사람은 자신에게 가장 의미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남기는 말(유언)은 그 사람의 인생의 가치가 담길 수 밖에 없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야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약속)이었다. 그가 왜 아브라함과 이삭에 이어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지 그의 유언이 증명해 준다. 우리는 하나님을 일컬을 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리고 야곱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일 때문에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 그래서 흔히 하나님을 부를 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다’는 것은 요즘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원리의 입장에서 해석하면 절대로 안 된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다’는 것은 그렇게 세속적인 뜻이 아니다. 게다가 우리는 하나님과 아무리 겨루어도 이길 수 없는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다’는 뜻은 무엇인가?

 

야곱의 유언이 그 뜻을 보여준다. 야곱은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다. 이사야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28:16). 조급한 마음과 서두르는 마음은 모두 확신하지 못하는 데서 온다. 확신이 있는 사람, 믿음 가운데 거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은 꼭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신하고 믿는 이는 절대로 서두르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때를 기다리고, 그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자기 자신을 밑거름으로 내놓는다.

 

야곱의 유언은 단순히 자기 자신만의 소망이 아니다. 야곱의 유언은 ‘비록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기근을 피해 애굽 땅에 내려왔지만 언젠가는 하나님의 언약대로 <귀향>하게 될 거’라는 믿음의 확인이다. 만약 야곱의 유언이 준엄하게 진행되지 않았다면, 창세기의 뒤를 잇는 <출애굽기>는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비록 430년이라는 긴 세월이 필요했지만, 야곱은 믿음의 눈으로 미리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이 ‘마중물’이 되어 그의 자손들에게 일어날 일, 즉 가나안 땅으로의 회귀를 자신의 유언을 통해서 미리 실현했던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다 ( 11:1). 야곱의 유언은 단순한 ‘말 남김’이 아니라, 그의 믿음이었다. 그의 유언은 그의 인생에서 그가 가장 중요하게 붙든 삶의 가치가 무엇이었는지 보여주는 믿음의 증거였다.

 

우리도 언젠가는 죽는다. 죽음을 생각하며 살지 않는 현대인들에게 ‘유언을 남기는 일’은 재수없는 행위일지 모른다. 그리고 현대인들에게 유언이란 기껏해야 자신이 가진 물질을 어떻게 분배할지에 대한 진술에 불과한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언은 결코 세속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언은 야곱의 유언처럼 ‘자신이 믿어온 바’에 대한 신앙고백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무슨 말씀을 받았으며, 어떻게 살고 있는가. 그리고 마지막 시간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어떠한 유언을 남길 것인가.

 

www.columbuskmc.org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버지의 마음  (0) 2015.09.03
에브라임과 므낫세  (0) 2015.07.16
새로운 신앙의 경지  (0) 2015.07.09
살리는 자  (0) 2015.06.25
안식을 간구하라 (친구 3 - 소발)  (0) 2015.06.21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7. 9. 06:05

새로운 신앙의 경지

(하나님의 현현)

욥기 6

(욥기 42:1-6)

 

욥과 친구들의 지난한 논쟁이 끝나고, 하나님이 등장하신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등장하셔서 정리해 주셨다면 좋았을 텐데, 하나님은 늘 이렇게 맨 마지막에 등장하신다.

 

인생은 미지의 세계이다. 좀 아는 것 같다가도 모르는 게 투성이다. 이런 미지의 세계에서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우리에게 닥쳐오는 고난이다.

 

고난은 늘 낯설다. 고난에 익숙한 사람은 없다. 고난은 낯설기 때문에 그 고난의 상황은 늘 우리를 긴장시키고, 힘들게 한다. 그토록 우리의 삶을 괴롭히는 고난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이유를 아는 존재는 하나님 밖에 없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이 닥쳤을 때 그 이유도 모른 채, 어쨌든 살아남기 위해 온 몸으로 그 고난과 맞서 싸워야 한다.

 

욥은 의인이었으나, 고난을 당했다. 고난이란 의인이나 악인이나 상관 없이, 인생을 살게 되면 겪게 되는 것이다. 악인의 고난은 그래도 이해가 간다. 누구든지 악인이 고난을 받게 되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의인이 고난을 받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고난을 마땅히 받아야 할 만큼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른 사람이 얼마큼이나 될까? 그러한 이들은 천벌이 아니어도 사회적으로 정해진 벌을 받게 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엄청난 시련이 닥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세월호 사건이라든지, 미국 찰스턴의 총기난사 사건 같은 것이다. 학생들에게 무슨 죄가 있길래, 또는 그들의 부모에게 무슨 죄가 있길래 그토록 끔찍한 일들이 벌어진 것일까? 수요일에 모여 성경공부 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길래 찰스톤에서는 그렇게 끔찍한 총기사건이 발생한 것일까?

 

욥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이렇게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값싼 위로를 받으며, 값싼 신앙을 내세우며 하루 빨리 잃어버리려고 한다. 그러다 더 큰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인생을 완전히 망쳐버리는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밀양>이라는 영화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이다. 결혼생활에 실패하고 아들과 함께 시골에 내려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했던 여주인공(전도연 분)에게 비극적인 일이 발생한다. 아들이 납치 살해 당한 것이다. 그 사건을 경험하고 여주인공은 거의 반실성상태에 들어서지만, 나름대로 신앙의 힘으로 그것을 극복했다고 생각한다. 그녀에겐 왜 자신에게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처절한 저항의 과정이 부족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용서하기도 전에 용서받았다고 믿는 범인을 만났을 때, ‘자신이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용서했냐며 분노에 못 이겨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마로 변신한다.

 

악마(악마 같은 인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악마 같은 존재(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들)는 처음부터 그런 인간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그들에게 일어난 비극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물론, 비극(고난, 고통)을 경험한 이들이 그 비극을 잘 극복하는 일은 쉽지 않다. 어쩌면 죽기보다 더 힘든 일인지 모르겠다. 트라우마가 발생하면 그것은 평생 그것을 당한 이들에는 몸의 가시로 존재한다.

 

얼마 전 개봉되어 인기를 끌었던 <아메리칸 스나이퍼>라는 영화가 있다. 완전히 미국적인 영화인데, 911 사건 등 테러단체들에 의해 희생당하는 자국민이나 군인들에 대한 뉴스를 접한 어떤 젊은이가 애국심에 불타 특수부대에 지원하여 스나이퍼가 되어 전장을 누비며 혁혁한 공을 세우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의 전쟁 경험은 그렇게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애국심으로만 해결되지 않는, 인간의 나약함과 참상이 있다. 특별히 아이를 이용하여 테러를 저지르는 테러단체의 악마성 앞에서 그는 큰 충격에 빠진다. 폭탄을 들어 뛰어드는 테러단체의 어린 아이를 스나이퍼로서 총으로 쏴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그는 갈등하지만 어쩔 수 없이 아이를 쏴 죽인다. 그는 스나이퍼로서 명성을 날리지만, 그의 개인적인 삶은 자꾸 파탄으로 치닫는다. 아내와의 관계가 서먹해지고, 자꾸 정신이상 증세가 발생한다. 그는 결국 제대한 뒤, 전쟁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하여 힘쓴 결과 그것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자신처럼 전쟁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예비역들을 보살피는 일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한, 전쟁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신이상자였던 한 예비역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우리 삶의 비극은 이렇게 자꾸 악순환 되는 것 같다. 이렇게 비극이 넘쳐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며, 내가 경험한 비극의 혼란 속에서 어떻게 해야 헤어나올 수 있을까?

 

욥이 가르쳐 주는 것은 이것이다. 나에게 일어난 고난, 비극, 고통에 순응하지 말고 끝까지 저항하라는 것이다.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절대로 내면화시키지 말고,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거냐고 끝까지 하나님께 따져 물으라는 것이다. 그렇게 끝까지 저항하고 따져 물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주신다는 것이다.

 

욥이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며 자신에게 닥친 고난에 끝까지 맞서 저항했을 때,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나타나셔서 그가 당한 고난을 넘어서는 어떤 신비로운 경험을 주신다.

 

물론, 욥기서에서도 왜 욥이 그러한 고난을 당했는지에 대한 인과율적인 대답을 내놓지는 않는다. 그러나, 욥이 하나님의 현현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전능성을 깨달아 알았을 때, 욥은 더 이상 왜 자신에게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현현 앞에서 인과율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 하나님의 주권과 전능성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신비그 자체라는 것이다. 신비는 감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감추어져 있는 것을 경험할 때 우리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거나 질문을 내놓지 못하게 된다.

 

욥이 자신에게 닥친 고난(비극, 고통)을 극복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그가 새로운 신앙의 차원으로 들어선 것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5). 이것은 욥이 진짜로 하나님을 눈으로 직접 뵈었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욥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새롭게 가졌다는 뜻이다. 귀로 듣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백문이 물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뜻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눈으로 보았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뜻이다.

 

“overview effect”라는 말이 있다. 우주인인 Frank White가 만든 말인데, 지구 바깥에서 지구를 바라보니 모든 게 달라 보인 것에서 비롯된 말이다. 우주선을 타고 지구 바깥에서 지구를 경험한 모든 이들이 동일한 경험을 했다고 증언했다. 이들은 모두 “overview effect”를 경험했는데, 지구 바깥에서 지구를 바라보니 지구의 실제 모습이 보였다는 것이다. 지구는 굉장히 작고, 쉽게 깨질 것 같은 생명체 같은 것이었는데, 종이처럼 얇은 대기에 의해서 보호되고 생명을 지탱하고 있는 연약한 존재였다는 것이다.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니, 국가 간의 경제는 사라지고, 사람들을 나누던 갈등은 별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우주에서 바라보니, 지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경험한 그들은 다시 지구로 돌아왔을 때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이 세상과 자신의 삶을 바라보게 되었다고 한다.

 

지구 바깥에서 지구를 경험한 사람들은 더 이상 지구 안에서만 아옹다옹 살던 때에 가졌던 생각 속에서 살지 않는다. 우주를 한 번 경험하고 나면, 그야말로 ‘overview effect’가 발생하여 이 세상에 대한 인식 자체가 영원히 바뀐다.

 

욥은 지금 하나님의 현현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 대한 인식 자체가 바뀐 ‘overview effect’를 경험한 것이다. 새로운 신앙의 차원으로 들어가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 특별히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고난의 문제가 다르게 다가 온다. 그렇게 새로운 신앙의 차원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비로소 고난(비극, 고통)에 휩쓸리지 않고, 그것을 당당히 극복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새로운 신앙의 차원으로 들어가게 된 욥이 취하는 자세를 보자. 그는 우선 하나님 앞에서 회개부터 한다. 욥의 회개는 싸구려 회개가 아니다. 단순히 내가 잘못했습니다.’라는 자기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용서의 갈구가 아니다. 욥의 회개는 ‘overview effect’를 경험한 자로서 자신의 무지와 한계를 철저하게 인정하는 겸손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신비 앞에서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비 앞에서 우리는 침묵할 수 밖에 없다.

 

욥은 자신에게 더 깊은 상처를 주었고, 자신과 의견을 달리했던 친구들과 화해한다. 하나님의 신비 앞에서 친구들과의 논쟁은 무의미하다. 그들과 아옹다옹 싸우는 것도 무의미하다. 우리는 무의미한 일들을 얼마나 많이 벌이며 살아가는지 모른다.

 

욥은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순종을 하게 된다. 욥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원수같은그의 친구들을 위해 기도한다. 하나님의 신비 앞에서 순종하지 못할 것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하기만 한다면, 우리도 욥처럼 깊은 순종의 도를 펼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욥은 참된 안식에 거하게 된다.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하고 나니, 욥은 하나님의 깊은 위로를 받는다. 고난을 당하며 욥이 그토록 바라던 것이 바로 안식이었다. 욥은 안식을 달라고, 죽기를 갈망했었다. 죽는 게 오히려 낫다고 했다. 그게 오히려 안식을 누리는 길이라고 토로했었다. 그런데, 욥은 이제 그가 그토록 바라던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된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욥기 42:10).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욥기 42:16-17).

 

욥의 인생에 이토록 안식과 평안이 넘쳤다. 그의 마지막 죽음도 안식과 평안에 싸여 있다. 욥은 우리가 그토록 바라고 소망하는 안식과 평안을 누렸다. 안식과 평안을 누리는 길은 새로운 신앙의 차원으로 들어서는 것 밖에는 없는 듯 하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과 평안 가운데서 살게 되는 것이다.

 

www.columbuskmc.org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브라임과 므낫세  (0) 2015.07.16
야곱의 유언  (0) 2015.07.09
살리는 자  (0) 2015.06.25
안식을 간구하라 (친구 3 - 소발)  (0) 2015.06.21
복을 베푸는 자  (0) 2015.06.18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6. 25. 06:08

살리는 자

창세기 60

(창세기 47:13-26)

 

선친께서 살아 계실 때 손자, 손녀 이름 (형님의 아들, )을 지어주셨다. 아들의 이름을 요셉이라 지어주시고, 딸의 이름을 민지라 지어주셨다. 손자의 이름을 요셉이라 지어주시면서 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생각난다. “성경에서 요셉만큼 흠 없고 훌륭한 사람이 없더라.” 정말 그렇다. 요셉이란 인물은 보면 볼수록 신통 방통한 인물이다. 지혜로운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는가!

 

어찌보면 요셉은 세상에서 가장 악독한 인물이 될 수도 있었다. 형들에게 버림받고 노예로 팔려가면서 복수의 칼날을 갈 수도 있었다. 보디발의 아내에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면서 복수의 칼날을 갈 수도 있었다. 술 맡은 관원장의 배신을 생각하면서 감옥에서 복수의 칼날을 갈 수도 있었다. 마치, <올드보이>의 주인공처럼.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생각했고, 자기 발전의 기회로 삼았다. 그리고 정말로 가장 어려운 때에 하나님의 약속을 지켜내는 구세주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렇게 크게 쓰임 받은 데에는 요셉의 개인적인 성품과 신앙도 어느 정도 작용했겠으나,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붙드심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성품이나 신앙의 깊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붙드심이다. 우리가 가장 간절히 소망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붙드심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붙들린 바 되기를 소망하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 눈을 떠갈수록 깨달아지는 것은 이 험악한 세월을 헤쳐 나갈만한 지혜가 나에겐 부족하다는 것이다. 살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을 자기 자신만의 지혜로 온전히 헤쳐나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상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내가 만나는 세상은 언제나 골리앗 같다. 그래서 주저 않고 싶은 마음을 가질 때가 많다.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를 때가 많다. 그렇다고 세상을 막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책임도 있고, 사회적인 지위와 책임도 있고, 무엇보다 한 번 주어진 생명, 인생을 허무하게 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요셉의 이야기는 이 험악한 세월을 어떻게 헤쳐나가면 되는지 가르쳐 준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게 무엇인지, 어떻게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인지 손에 잘 안 잡힌다. 어떻게 보면 무력해 보이고, 어떻게 보면 숙명론자가 되는 것 같고, 어떻게 보면 고통을 무조건 감내하는 메조키스트 같다. 사실,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이 되는 일은 하루 아침에 되는 일 같지는 않다. 그리고 아무리 내가 노력해도 되는 일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꼭 해내야 하는 일생일대의 최고 미션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왜냐하면, 그래야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살아남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애굽과 가나안 땅에 든 기근으로 인해 땅이 황폐하여져서 더 이상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식량문제는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이것보다 중요한 문제는 없다. 세상이 아무리 경제, 경제, 정치, 정치를 외쳐도, 경제와 정치는 곧 인간이 먹고 사는 문제를 정의롭게 잘 해결하는 데 기여하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요즘엔 정치와 경제가 인간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쓰이고 있는 실정이지만, 원래 정치와 경제는 인간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인류 역사에 정치와 경제가 생겨난 이유는 정의로운 분배의 문제 때문이다. 무한대로 있는 게 아닌, 유한한 자원을 어떻게 인류가 정의롭게 나누어 쓸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 정치와 경제이다.

 

인류의 가장 큰 문제는 양극화 문제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격차가 점점 커지고 있다. 부자는 자신의 욕망을 극대화시키고 있고, 가난한 자는 생존자체에 위협을 받고 있다. 부자는 자신의 기득권을 지켜내기 위해서, 즉 유한한 자원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서 온갖 권모술수를 다 부리고 있고, 가난한 자들은 그들의 횡포 때문에 고통이 더욱더 가중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를 생산하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정작 그들이 생산한 카카오가 그토록 맛있는 초콜릿의 원료라는 것 자체를 모른다. 한 마디로, 부자는 가난한 자의 피를 빨아 먹으며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번영하고 있고, 가난한 자는 그들에게 피를 빨려 어지럼증에 시달리며 시름시름 죽어가고 있다.

 

요셉은 애초부터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자로서 다가올 기근에 대비하기 위해 바로 왕에 의해 온 나라를 다스리는 총리로 세워진 인물이다. 사람의 진가는 어려울 때 발휘된다. 풍년 동안에 요셉의 진가는 그렇게 드러나지 않았다. 모두들 잘 먹고 잘 살았기 때문에 요셉이 하는 일에 대하여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요셉은 풍년의 때에 여느 사람들처럼 그 풍요로움을 소비하며 흥청망청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비전에 따라 흉년의 때를 대비하여 곡식을 창고에 차곡차곡 모아 들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7년 동안 풍년이 들지만 그 이후에 7년 동안 흉년이 들 거라는 꿈의 해석을 마음에 품고, 풍년의 때에 7년의 흉년을 견뎌낼 수 있도록 곡식을 저장해 두었다.

 

바로의 꿈을 통해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대로 7년의 풍년이 끝나고 7년의 흉년이 왔을 때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은 더 이상 곡물을 생산해내지 못하고, 저장해 둔 곡식마저 바닥을 드러냈다. 바로 그때 지난 날 이 때를 위하여 준비한 요셉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애굽 땅과 가나안 땅 주민들은 돈을 들고 요셉에게 양식을 구하러 온다. 요셉은 돈을 받고 양식을 판다. 그리고 그 돈을 바로의 궁으로 가져가 바로 왕을 부요케 만들어 준다. 돈이 다 떨어지자 백성들은 자신들의 가축을 요셉에게 끌고 와 양식으로 바꾸어 간다. 양식을 사는 데 가축마저 다 소비하자, 백성들은 자신들의 몸과 토지를 내어놓고 요셉에게서 양식을 사 간다.

 

이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결국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양식이다. 일용할 양식.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만 있어도 우리는 살만한 것이다. 일용할 양식만 있어도 하나님께 감사드릴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일용할 양식에 대한 중요성을 망각하며 사는 시대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양 폄하하고,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 있는 양 사람들을 부추긴다. 그것을 일컬어 소비심리라 한다. 그 소비심리가 지구환경을 얼마나 황폐화시키고 있는지 우리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소비심리에 따라 소비욕구만 채우려 든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이대로 나가다간 지구가 황폐해져 더 이상 이곳에서 살 수 없게 될지 모른다. 다른 그 무엇에 의한 멸망이 아닌, 바로 인간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고 있는 중이다. 양심 있는 과학자들은 말한다. 지구 멸망의 시간이 1분 남았다고.

 

요셉은 모든 토지를 양식과 바꾸어 사 들인 뒤 바로의 소유가 되게 한다. 그리고 토지개혁을 벌인다. 백성들에게 종자를 주고, 바로의 소유가 된 토지에서 경작을 하여 그 중 5분의 1은 바로에게 바치고, 나머지 5분의 4토지의 종자로도 삼고 너희 양식으로도 삼고 너희 가족과 어린 아이의 양식으로도 삼으라.고 한다(24). 백성들은 요셉의 이러한 토지개혁법을 반긴다. 그러며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25).

 

요셉은 정치와 경제의 진수를 보여준다. 요셉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들거나,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려 들거나, 원수를 갚은 데 쓰지 않는다. 요셉은 자신이 왜 그 자리에 있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한 번도 망각하지 않는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된 것은 요셉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요셉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펼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곧 나도 살고 남도 사는 참된 지혜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까지도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요셉은 자신을 거두어준 애굽 왕에게 충성한다. 자기를 부른 주인에게 충성하는 것은 종의 최고 가치이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전 4:2). 요셉은 참으로 충성된 일꾼이었다. 그것은 그만큼 요셉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강력했다는 뜻이다. 또한 요셉은 그 부르심에 대한 이해가 확실했다는 뜻이다. 믿음이란 부르심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고, 그 부르심을 바탕으로 한 충성이다. 부르심에 대한 인식과 그에 합당한 충성이 없다면, 그는 믿음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다.

 

요셉의 부르심에 대한 인식과 충성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우리는 오늘 이야기에서 명확하게 본다. 꼼짝없이 죽을 수 밖에 없을 뻔한 생명을 모두 살려내는 일을 한다. 사람들은 요셉에게 나아와 이렇게 말한다.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25). 그 어떤 은혜보다 생명을 건짐 받은 은혜는 가장 값지고 감사한 것이다. 생명을 건짐 받은 백성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바로의 종이 되겠다고 선언한다. 비굴한 종이 아니라 기쁨의 종이 되겠다는 뜻이다. 이 종이라는 개념은 신약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렇게 진술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5-8).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께서 자발적으로 종이 되신 이유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함이었다. 종은 주인의 뜻을 죽기까지 따르는 자이다.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나, 스스로 자기를 낮춰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죽기까지 따르는 참 종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사실 이것만 제대로 깨닫는다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죽기까지 준행하는 자발적인 종되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시대는 누군가의 종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주인이 되어야 성공한 인생인 양 주인이 되도록 해주는 일이라면 영혼까지 팔아먹는 시대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밖에는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피조물의 장자도 이렇게 자발적인 종이 되셨건만, 하물며 우리들이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보듯이, 종이 된다는 것은 비굴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죽기까지 순종하는 위치로 자신을 재배치하는 거룩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발적인 종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려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셨다. 그것으로 어떠한 일이 창조되었는가? 바로 생명이 창조되었다. 새로운 창조가 이 땅 위에 임했다. 이처럼 종이 되는 일은 비굴한 일을 만들어 내는 후퇴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생명을 창조해 내는 거룩한 일이다.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는 존귀한 자였지만,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는 인생의 질곡을 겪었다. 그는 이방 땅에서 모진 고통과 억압을 받았지만 결국 하나님에 의해서 높이 들림 받은 놋뱀과 같은 인물이 되었다. 그는 바로 왕의 종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지 않았으며, 종으로서 충성된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어 드리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다. 하나님은 결국 요셉을 통하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요셉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셨고, 그 일을 잘 감당한 요셉은 많은 생명을 살려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우리의 생명을 살리셨거늘, 우리가 어떻게 생명을 살리신 하나님의 종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은 비굴한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져 가는 하늘 밑에서 조용히 흘리기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요셉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발적인 종이 되는 일은 살리는 자로 거듭나기 위한 새로운 창조의 사역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www.columbuskmc.org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야곱의 유언  (0) 2015.07.09
새로운 신앙의 경지  (0) 2015.07.09
안식을 간구하라 (친구 3 - 소발)  (0) 2015.06.21
복을 베푸는 자  (0) 2015.06.18
차라리 죽었으면 (친구 2 - 빌닷)  (0) 2015.06.08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6. 21. 23:02

안식을 간구하라 - (친구 3 - 소발)

욥기 4

(욥기 10:20-22)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10:1). 탄식은 단순한 불평이 아니다. 탄식은 현재 겪는 고통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다. 고통 받고 있는데 고통 받고 있는지 모르는 건 불행한 일이다. 고통은 저항해야 하는 것이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에 저항하지 못하는 자는 고통으로 인해 멸망 받고 만다. 고통에 대하여 저항할 때 우리에게 새로운 미래가 열리는 것이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는 속담이 있다. 아무리 약한 존재(미물)라 할지라도 거기에 고통을 가하면 아픔을 느끼는 법이다. 세상엔 두 종류의 존재가 있다. 고통을 가하는 존재와 고통을 받는 존재이다. 고통을 가하는 존재는 강자라 하고, 고통을 받는 존재는 약자라 한다. 강자는 약자를 괴롭힌다. 강자는 약자를 괴롭히며 고통을 감내하라고 한다. 강자는 고통을 가하면서 그것이 고통인 줄 모른다. 고통을 가하면서 고통 당하는 약자가 자신에게 복종하기를 바라는 것이 강자의 속성이다. 약자는 대개 강자가 고통을 가해 오면 거기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 고통을 온몸으로 감내한다. 그렇게 약자는 반복되는 폭력 앞에 몸과 영혼이 죽어간다. 그렇다면 약자가 강자에게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강자에게 저항하거나, 아니면 강자의 폭력을 더 이상 느끼지 않는 죽음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다. 죽음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실제로 목숨을 끊는 것과 다른 하나는 고통을 내면화시키는 것이다. 즉 고통을 고통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에게 가해지는 고통을 감각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 들어서는 것이다. 고통이 극심한 사람에게는 이 상태가 가능하다. 대개 이런 사람은 정신이 돈다. 우리는 흔히 이런 사람을 미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미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고통에 대하여 저항하지 못하고 그 고통을 감각하지 않고 내면화시키는 일은 불행한 일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감각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 몸에 감각이 있는 이유는 우리 자신에게 가해져 오는 어떠한 위험으로부터 피하기 위함이다. 일례로, 우리는 뜨거운 것을 만졌을 때 뜨거움에 대한 통증을 느낀다. 감각이 그것을 감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뜨거운 것을 만졌을 때 본능적으로 손을 떼거나 그 자리를 얼른 피하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위험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낸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문둥병(한센병)’이 무서운 이유는 그 병에 들면 감각이 없어지기 때문에 자신의 몸이 위험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감지하지 못한다. 뜨거운 것을 만져도 뜨거운 것을 느끼지 못한다. 뜨거운 것을 느끼지 못할 뿐이지, 뜨거운 곳에 살을 대면 살은 타 들어가게 마련이고 결국 그것 때문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감각하지 못한다고 괜찮은 것이 아니다. 감각하지 못했지만 감각하지 못한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 인생은 종말에 이를 수 있다.

 

성경에는 에 대한 이야기가 참 많이 나온다. 물론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과 우리가 일상에서 말하는 실정법적인 죄의 개념 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우리가 흔히 일상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으로 성경에 등장하는 죄의 개념을 이해하려 들면 안 된다. 특별히 성경에는 우리가 죄의 노예가 되었다고 선언한다. 죄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노예란 가해지는 폭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 폭력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죄의 노예란 죄가 가하는 폭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 죄의 폭력을 내면화시킨 상태를 말한다. 노예는 자신이 지금 어떠한 폭력에 노출되어 있고, 그 폭력의 상황에서 어떻게 빠져 나와야 하는지 조차도 모른다. 그저 노예로 살아갈 뿐이다. 이처럼 죄의 노예도 자신이 지금 어떠한 죄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고, 그 폭력의 상황에서 어떻게 빠져 나와야 하는지 모른다. 노예가 스스로의 힘으로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죄의 노예도 스스로의 힘으로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구원의 손길인 것이다.

 

욥은 우리에게 고통에 저항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폭력의 상황에서 받는 고통에 대하여 어떻게 그것을 감각적으로 느끼고 저항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욥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고통에 매몰되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키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태도이다.

 

이유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느낀 욥은 계속해서 하나님에게 그 이유를 따져 묻는다.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시옵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1:2). 욥은 섣불리 자신에게 가해지는 고통을 내면화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상황에 대하여 하나님께 탄식한다. 탄식은 하나님에게 저지르는 불경이 아니라, 공의로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다. 하나님은 까닭 없이 자신이 지으신 피조물을 괴롭히지 않으신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까닭만 있다면 피조물을 마음껏 괴롭히시는 분이라는 뜻은 아니다.

 

욥은 자신이 겪는 고통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기 자신이 이러한 고통을 받을만한 악을 저지른 적이 없다고 항변한다. 그러면서 욥은 고통으로 인해 가까이 다가온 자신의 죽음을 감지하고, 죽기 전 마지막으로 평안을 누리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 “내 날은 적지 아니하나이까 그런즉 그치시고 나를 버려두사 잠시나마 평안하게 하시되”(10:20).

 

욥이 안식을 구하고 있다. 욥은 왜 안식을 구하는 것일까? 그는 왜 잠시나마 평안하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고통이 너무 극심해서 그 고통에서 잠시나마 해방되고 싶어서 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좀 더 깊은 뜻이 있다. 욥은 잠시나마의 평안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원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안식과 하나님은 어떠한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안식을 누리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일까?

 

하나님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위기 25장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한 가지 길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안식이다.

 

현대인들에게 쉰다는 개념은 그저 하던 일을 멈추고 일터를 떠나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쉰다는 것을 레져라는 말로 생각한다. 쉬는 것도 소비의 개념으로 생각한다. 현대인들은 쉬는 동안 엔터테인먼트 사업의 소비자가 될 뿐이다. 쉬면서 생명력을 얻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그러했듯이 또 다른 소비에 물들 뿐이다. 현대인들은안식하는 것이 무엇인지 잃어버린 지 오래다. 그저 이 세상이 이끄는 데로, 소비의 멍에를 짊어진 황소처럼 끌려 다니고 있다.

 

안식은 멈춤이다. 욥이 안식을 간구하는 것은 고통이 멈췄으면 하는 바람이다. 멈추지 않으면 쉬는 게 아니다. 고뇌의 멈춤, 미움의 멈춤, 걱정의 멈춤, 아픔의 멈춤, 후회의 멈춤 등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그 어떠한 것이든 모든 것들을 다 멈추는 상태가 안식이다.

 

우리를 괴롭히는 어떠한 형태의 고통이든지 그것이 멈춰지는 순간이 바로 안식인데, 그 안식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은혜이다. 그래서 안식은 곧 하나님을 경험하는 길이 된다. 레위기에서 특별히 안식일 법을 제정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이나 자신이 부리는 종들에게 안식일을 지킬 것을 명령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에게 육체적인 쉼을 주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그 안식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신학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성경의 관심은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가에 있다. 성경은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과 해방의 길은 하나님으로부터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성경은 온통 하나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떠한 형태든 우리에게서 안식을 빼앗아 가는 것은 악한 일()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안식을 빼앗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누군가의 안식을 빼앗은 일은 가장 큰 죄인 것이다.

 

욥의 친구 소발이 저지르는 죄가 바로 이것이다. 소발은 욥을 위로하기는커녕, 다른 말로 욥에게 안식을 주기는커녕 욥에게서 안식을 빼앗고 있다. 소발은 욥의 탄식과 고통에 대하여 어떠한 위로나 동정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욥의 고통이 욥 자신의 죄에 비하면 작은 것이라고 한다. 소발은 욥의 교만한 상태를 보면 지금 가해지는 고통보다 훨씬 더 큰 고통 가운데 처해져야 마땅하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만큼만 고통 받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라고 말한다.

 

가장 큰 죄악은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 상대방이 안식을 잃게 될 줄 뻔히 알면서도 상대방의 안식을 빼앗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다. 밧줄을 끊으면 그 밧줄에 의지해서 목숨을 부지하는 사람이 죽을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끝내 그 밧줄을 끊어내는 사람은 얼마나 사악한가!

 

욥은 무엇보다 안식을 간구했다. 바로 그 안식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안식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만큼 인생에게 위로가 되고 평안이 되는 것은 없다. 그래서 어쩌면 인생에게 가장 좋은 안식은 죽음인지도 모르겠다. 욥은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지 전에 그리하옵소서 땅은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10:21-22).

 

인생은 더하기가 아니라, 곱하기이다. 그런데 상수가 ‘0()’인 곱하기이다. 상수가 ‘0’이기 때문에 그 상수에 무엇을 곱해도 결과는 똑같이 ‘0’으로 나온다. 1곱하기 00이고, 100 곱하기 00이다. 물론 10000 곱하기 0도 영이다. 그러니 인생이란 어차피 0이 되는 곱하기이니, 이 세상에서 남들보다 좀 멋지게 살지 못했어도 괜찮은 것 아니겠는가. 어차피 우리 모두는 다 똑 같은 곳으로 간다. 우리는 모두 땅으로 간다. “땅은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

 

그러므로 인생을 살면서 어떠한 업적을 이루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든 간에 그것에서 안식을 누리를 것이다. 아무리 큰 업적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이루면서 안식을 누리지 못했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그리고 아무리 큰 업적을 이루었어도 결국 그것 때문에 영생을 얻는 게 아니라, 모두 똑같은 곳,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은곳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그 업적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을 주겠는가.

 

이것은 인생의 허무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업적을 이루지 말고 배짱이처럼 놀고 먹는 게 최고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허무할 수 밖에 없는 인생으로부터 구원 받는 길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인생은 그 고통의 강도가 조금씩 다를 뿐, 욥처럼 말할 수 없는, 끊임 없는 고통의 파도 속에서 평안할 날이 없다. 그런 가운데, 욥처럼 하나님께 내 날은 적지 아니하나이까 그런즉 그치시고 나를 버려두사 잠시나마 평안하게 하소서라며 하나님께 안식을 간구하는 일은 허무한 인생을 극복하고자 하는 인생, 고통에 저항하고자 하는 인생들에게 너무도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안식을 간구하며 탄식한다. 고로 존재한다.

 

www.columbuskmc.org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로운 신앙의 경지  (0) 2015.07.09
살리는 자  (0) 2015.06.25
복을 베푸는 자  (0) 2015.06.18
차라리 죽었으면 (친구 2 - 빌닷)  (0) 2015.06.08
요셉의 지혜  (0) 2015.06.04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6. 18. 06:36

복을 베푸는 자

창세기 59

(창세기 47:1-12)

 

<예언과 성취>는 성경 전반에 흐르는 성경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이다. 즉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의 주 관심사는 예언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그 예언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 독자(신앙인)로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부분은 성경의 저자들의 관심사와 행보를 맞추는 것이다.

 

야곱과 그의 가족이 애굽으로 땅으로 가게 되는 사건은 예언의 성취이다. 창세기 14장에서 우리는 이미 그것을 보았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14:13-14).

 

아브라함에게 내렸던 이 예언이 오랜 세월이 지나 야곱 때에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예언과 성취>의 구조가 인간의 숙명론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언은 신비에 속하는 것이지, ‘숙명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예언을 통해 인간의 미래를 속박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자유를 주시는 분이지 속박하는 분이 아니시다.

 

이런 점에서 이방인의 점치는 행위와 하나님의 예언은 분명히 다르다. 점치는 행위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자 위함이지만, 하나님의 예언은 자신의 운명을 알고자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기 위함이다. 점치는 행위는 숙명론에 사로잡히는 우상행위이지만, 하나님의 예언은 참 해방의 길이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다는 것은 모든 상황을 이겨내고 극복하게 해주는 힘의 원동력이 된다. 하나님의 예언(말씀)이 없다면 우리는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희망 없이 죽어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언(말씀)이 있다면 우리는 능히 삶의 무게를 이겨내고 새로운 희망을 꿈꾸게 된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거주했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기근이 있을 때마다 애굽으로 내려가려는 계획을 갖는다. 그것은 인지상정이다.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이 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방법을 강구하는 일은 매우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런 방법을 강구할 때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도 기근 때에 애굽으로 내려갔지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지 못했다. 이삭도 기근 때에 애굽으로 내려가고자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셔서 내려가지 못했다. 그런데, 유독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에 대한 모든 여건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은 야곱의 때였다. 그 일은 형들의 시기를 사 애굽으로 팔려 간 요셉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고, 야곱은 결국 하나님의 예언대로 이방 땅(애굽)에 내려가게 되는 것이다.

 

야곱은 모든 식솔들과 가축들을 거느리고 고센 땅에 도착한 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 요셉과 극적인 재회를 한다. 그리고 몇몇 자녀들과 함께 애굽의 왕을 알현하게 된다. 애굽 왕과 야곱의 만남은 야곱의 인생이 얼마나 드라마틱 했는지를 짧고 강렬하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야곱의 인생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7). 야곱은 바로 앞에서 당당하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를 축복한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야곱의 신과 바로의 신은 달랐다. 쉽게 말해서, 불자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일은 쉽지 않다. 기독교 신자 앞에서 불자가 부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일은 쉽지 않다. 상대방에 대한 깊은 존중과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이 섬기는 신의 이름으로 상대방을 축복하는 일은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

 

야곱은 애굽 왕 앞에서 당당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를 축복한다. 야곱의 축복을 받은 애굽 왕은 야곱에게 나이를 묻는다. “네 나이가 얼마냐?” 한글 성경은 애굽 왕이 야곱에게 매우 거만하게 질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번역이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다. 영어 성경만 봐도 애굽 왕이 야곱에게 얼마나 예의를 갖추어 나이에 대하여 질문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How many years have you lived?” , “당신의 삶의 연수가 얼마나 되느냐?”라고 묻는다. 굉장히 공손한 표현이다.

 

이에 대한 야곱의 대답에는 깊은 연륜이 묻어난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나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9). 야곱은 자신의 인생을 두 단어로 표현한다. “나그네와 험악한 세월이 그것이다. 나그네는 마고르라는 히브리어로 거류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 야곱은 고향이 아닌 곳에서 거주했다는 뜻이다. 야곱의 고향은 브엘세바였다. 그라나 야곱은 형 에서의 보복을 피해 밧단아람으로 피신한 뒤, 늘 고향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삶을 꾸려야만 했다.

 

또한 야곱의 세월은 참으로 험악했다. 홀홀 단신으로 고향을 떠나 삼촌 라반의 집에서 삼촌의 속임수 아래 험한 세월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뒤 야곱의 삶은 고통과 아픔의 연속이었다. 사랑하는 딸 자식의 강간 사건을 겪어야 했고,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떠나 보내야 했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아들이 낳은 아들을 잃은 슬픔을 맛보아야 했다.

 

그러나 야곱이 이렇게 초면인 사람, 그것도 애굽의 왕 앞에서 자신의 삶을 나그네와 험악한 세월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비록 그의 인생이 나그네 인생이었고 그의 삶이 험악한 삶이었지만 그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이다. 야곱이 당당하게 애굽 왕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단순히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인네이기 때문이 아니다. 나그네 인생과 험악한 세월은 오히려 인간의 자아를 망가뜨리고 고십불통으로 만들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야곱이 나그네 인생과 험악한 세월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애굽 왕 앞에서 당당하게 축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분명하게 임했기 때문이다.

 

야곱은 애굽 왕에게 들어가면서 복을 빌고, 나오면서 복을 빈다.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10). 이 장면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으나, 사실 이 장면은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놀라운 장면이다. 야곱이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남의 복을 빼앗는 사람이었다. 야곱의 이름이 바로 그것을 말해 준다. 야곱은 발 뒤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이다. 이는 남의 복을 가로채는 자라는 뜻이다. 남의 복을 가로채는 자만큼 비열한 인생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이제 야곱은 더 이상 남의 복을 가로채는 자’, 발 뒤꿈치를 잡은 자가 아니라 남에게 복을 빌어주는 자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 야곱은 더 이상 남의 복을 빼앗는 자가 아니라, 복을 베푸는 자가 된 것이다. 이것은 기적이다. 이런 기적을 베푸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야곱이 그 동안 하나님의 손에서 얼마나 연단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래서 야곱은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인 것이다. 그 이름이 지닌 뜻처럼,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예언,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예언은 인간을 숙명론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것이다. 또한 그 말씀 안에 있는 자는 어떠한 어려움과 아픔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이겨내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복음서에 나오는 밭에서 보화를 발견한 자의 비유와 같다. 밭에서 고된 일을 하다가 거기에서 보화를 발견한 자는 그 보화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모든 것을 팔아 그 밭을 산다. 모든 것을 다 팔아도, 그 보화만 있으면 그 아무 것도 부럽거나 두려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인생의 어려움을 많이 겪은 사람이 베푸는 자가 되지 않는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자가 베푸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감추어진 보화, 즉 하나님의 말씀, 예언을 발견한 자가 베푸는 자로 거듭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시게된 것은 그가 산전수전을 다 겪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즉 그가 그 자신을 메시아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예언에 대한 성취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예언은 인식하는 자에서 성취된다. 예언의 신비는 그것을 인식하는 자에게서 신비로운 방식으로 성취된다. 그리고 예언의 성취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을 베푼다. 참 자유를 주고, 생명을 구원하고, 삶을 풍성하게 한다.

 

생명이 붙어 있는 모든 자의 삶은 어찌 보면 나그네 인생이고 험악한 세월을 보낸다. 야곱만 특별한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고난과 고통의 연속 가운데서 삶을 산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야곱처럼 이스라엘이 되어서 예언을 성취하고, 빼앗는 자(철 없는 자)에서 베푸는 자로 거듭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어도, 아무리 인생의 고난과 고통을 겪어도 철 들지 못하고 여전히 빼앗는 자로 남의 발뒤꿈치를 잡은 인생으로 사는 자들이 수두룩하다. 그런 자들은 세상에 희망을 안겨주기는커녕 탄식 소리만 늘려놓는다.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남의 발뒤꿈치를 더 효과적으로 잡는 인생이 되는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예언의 성취가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내 삶에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기는 삶을 사는 것이다. 야곱처럼 발뒤꿈치를 잡는 자(남의 것을 빼앗는 자)에서 복을 베푸는 자로 거듭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누군가 우리에게 당신의 삶의 연수가 얼마나 됩니까?”라고 물어본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가. 연륜은 나이만 먹는다고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나야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복을 베푸는 자로 잘 자라나고 있는가!

 

www.columbuskmc.org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6. 8. 04:45

차라리 죽었으면 (친구 2 – 빌닷)

욥기 3

(욥기 7:7-10)

 

차라리 죽었으면…”하는 생각은 인간이라면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품어보는 마음이다. 사람은 왜 죽기를 갈망하는가? 죽음을 좋게 보는 문화는 없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한 모든 사람은 죽음을 갈망한다. 죽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게 우리 인간의 삶의 현실이다. “차라리 죽었으면…”

 

욥은 죽기를 바랐다.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육체가 고통스러웠고, 마음이 고통스러웠고, 영혼이 고통스러웠다. 인간이 고통을 느끼는 세 가지 차원 모두 고통스러웠다. 육체에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종기가 차 올라 괴로웠고, 그 괴로움을 어떻게 해보고자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 온 몸을 긁었다. 그래도 시원치 않았다. 자식과 모든 소유를 잃은 고통은 마음을 조여왔고, 그것을 어쩌지 못해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차라리 깨어 있는 게 나았다. 잠을 자면 악몽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대개 사람은 잠을 자면 아픔이 치유된다. 하룻밤 잤다고 치유되는 것은 아니지만, 잠은 치유의 과정에서 필수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런 말도 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편 127:2).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자는 편하게 잘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으면, 그리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느끼면 잠을 잘 수 없다.

 

인간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은 육체와 마음에 고통이 가해질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할 때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실 때 가장 괴로워했던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다.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외쳤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망은 육체와 마음이 허물어질 때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여 영혼이 허물어질 때 온다. 이게 바로 진짜 죽음의 경험이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순교자의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차이가 바로 이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한 죽음이요, 순교자의 죽음은 하나님의 존재를 경험한 죽음이다. 순교자는 죽어가면서 감사했다. 육체와 마음은 고통 가운데 있었지만, 그의 영혼은 하나님 안에서 참 평안을 누렸다. 순교자가 죽어가면서 감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한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의 죽음은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며 죽는 죽음은 이미 하나님의 존재가 스며 있는 죽음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 모든 죽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욥은 고통 가운데서 인생의 허망함을 토로한다. 고통 가운데 있는 그가 느끼는 인생은 종이나 품꾼의 날 같은 인생살이이다. 종이나 품꾼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는 인생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자기 자신의 인생에 대한 어떠한 주권도 없다. 자기 스스로 자기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자기의 인생이 이렇다고 느끼는 사람은 의기소침해진다. 그리고 인생을 비관하게 된다. 이런 생각을 품은 자가 자기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으로 마지막 선택하게 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욥은 또한 고통 가운데서 자기의 인생을 바람과 구름에 비유한다. 바람은 한 번 불고 나면 그만이다. 그리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로 모른다. 그야말로 허망한 것이다. 구름 또한 그렇다. 구름도 한 번 생성됐다 사라지면 그만이다. 사라져 없어지면 다시는 볼 수 없다. 인생이 이처럼 바람과 구름처럼 허망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떠한 희망을 품을 수 있겠는가? 사는 거나 죽은 거나 별반 다르지 않다면, 사는 게 오히려 고통스러운 사람이 자기의 인생을 위해서 마지막 선택하게 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욥은 죽기를 바랬다. “차라리 죽었으면…”하고 바랬다. 인생이 이렇게 허무한데, 거기에 욥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과녁 삼아 일부러 괴롭히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서 욥의 입술에서는 다음과 같은 처절한 탄식이 터져 나온다. “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내가 범죄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셔서 내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욥기 7:20).

 

이렇게 한 없는 불평을 하나님께 쏟아내고 있는 욥에게 그의 친구 빌닷은 다음과 같이 꾸짖으며 응수한다.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느냐”(욥기 8:1-2).

 

친구 빌닷의 주장은 보상의 교리를 대변한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죄의 결과이고 하나님의 은혜는 간절함과 노력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는 매우 전근대적인 신학적 발상이다. 만약 빌닷의 주장대로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노력에 의한 보상으로 주어진다면,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 아닌 인간의 자기 의의 결과가 된다. 이것은 기독교 구원론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생각이다. 그야말로 이단사상 중 가장 큰 이단사상이라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2:8). 여기서 은혜와 믿음이라는 두 가지 단어가 나오니까 구원이 무슨 2단계에 걸쳐 이루어지는 것인 줄 잘못 전달될 수 있으나, 은혜와 믿음은 같은 말이다.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고, 믿음은 인간 측에서 행하는 어떤 것인 줄로 알면 안 된다. 구원 받는 데 하나님의 은혜도 있어야 하고 믿음도 있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구원은 두 가지가 충족돼야 받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의 은혜로만 오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믿음이지, 인간의 측면에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지 우리의 믿음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철저한 배타적인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 받은 자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믿음은 나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다. 구원 받은 자는 은혜 받으려고 죄를 안 짓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존재 자체가 변했기 때문에 죄를 안 짓는 것이다.

 

빌닷은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는 욥에게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을 늘어 놓는다.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욥기 8:4). 욥의 자녀들이 그렇게 죽은 이유는 그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빌닷은 인과응보를 주장하고 있다. 욥의 고통은 이유 없는 고통이 아니라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욥이 지금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 거센 바람과 같은말로 불평할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 자비를 간구하며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 자기를 청결하고 정직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고통 가운데 있는 욥의 인생을 다시 평안하게 해주실 거라고 한다. 그러면서 빌닷은 욥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기 8:7).

 

이 성경구절은 성경구절 중 가장 심하게 훼손되어 쓰이는 것 중의 하나이다. 기독교인이 운영하는 웬만한 비즈니스 공간에는 이 성경구절이 걸려 있다. 이 성경구절을 구멍가게에 걸어놓으면 이런 뜻이 된다. ‘지금은 구멍가게 수준이지만 나중에는 대기업이 될 것이다’. 전형적인 기복신앙이고, 전형적인 성경말씀의 훼손이다. 이 말 자체는 굉장히 은혜스러운 것일 수 있으나, 빌닷이 한 이 말은 욥의 심장을 후벼 판 옳은 말이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맥락에 전혀 맞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상대방에게 폭력이 될 수 있다.

 

빌닷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욥의 상황을 왕골과 갈대’, ‘거미줄’, 그리고 정원의 식물등에 비유하며 공격한다. 빌닷은 욥의 고통을 위로하기는커녕 욥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불경건한 자들의 삶을 택했기 때문에 그에게 불시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거라고 진단한다.

 

욥이 하나님께 불평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보다 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욥은 하나님의 의로움을 철저하게 인정한다.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욥기 9:2). 또한 욥은 하나님의 전능성을 철저하게 인정한다. “그는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그를 거슬러 스스로 완악하게 행하고도 형통할 자가 누구이랴”(욥기 9:4). 욥이 하나님께 불평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의로움과 전능성을 부정해서가 아니라, 자기에게 닥친 고난이 부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욥이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은 자기 자신의 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통을 당할 정도로 자신은 불의한 자가 아니라고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 상황 속에서 욥은 자신에게 세 가지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온갖 불평을 다 던져 버리고 슬픈 얼굴빛을 고쳐서 명랑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이렇게 고통당하고 있는데 그런들 자신의 죄가 사면 되겠는가? 둘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최대한 정결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 이유도 모른 채 하나님에 의해 악인으로 정죄된 마당에 자신을 정결케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욥은 이것도 헛된 수고가 될 뿐이라고 한탄한다. 셋째, 자신의 상황을 공평하게 중재할 자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은 인간과 같지 않고, 인간과 하나님과의 질적 차이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과 동등한 법적 지위를 누릴 수 없다고 토로한다. 이처럼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세 가지의 선택권 모두 자신의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는 허망한 것에 불과하다. 결국 이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욥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죽음밖에 없는 듯이 보인다. 왜냐하면 죽음은 고통과 슬픔과 불행한 삶에서의 유일한 해방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토록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차라리 죽었으면…”하는 고통이 엄습하는 상황 속에서 차라리 죽으면 고통과 슬픔과 불행한 삶에서 해방될 수 있을 텐데, 왜 우리는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을 택해야 하는가?

 

인간의 불행한 삶 만을 들여다 보면 살아야 할 이유가 없고 죽어야 할 이유들만 보이나,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 주는지, 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필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위에서 살펴본 욥의 세 가지 선택권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얼굴 빛을 고칠 수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정결케 될 수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는 동등한 법적 지위를 누릴 수 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것을 기독론에서 다루는데, 특별히 이것을 화해론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피조물과 하나님을 화해시키셨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우리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 모른다. 살아야 할 의미를 아무 데서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우리는 살아야 할 의미를 발견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죽음이 고통과 슬픔과 불행한 삶의 해방구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만이 고통과 슬픔과 불행한 삶의 해방구가 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기만 한다면, 덧없어 보이는 우리의 인생에 대한 모든 의문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큰 괴로움은 육체와 마음의 고통이 아니라, 영혼의 고통이다. , 인간은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할 때 가장 괴롭다. 그때 인간은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해 생명의 끈을 놓아버린다. 그러나 육체와 마음의 고통이 아무리 클지라도, 그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면 인간은 평안을 누릴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 가련한 인생들에게 가장 큰 소망이다. 그리스도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해주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 아무리 지옥 같은 인생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신다면,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을 택해야 한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가 만약 지옥에 계시다면 나는 기꺼이 지옥에 가겠다!”

 

www.columbuskmc.org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6. 4. 07:29

요셉의 지혜

창세기 58

(창세기 46:28-34)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는 사랑과 관련 있다. 그 상대가 무엇인지는 상관 없다.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단절될 때 인간은 슬퍼한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사랑이 단전될 때 인간은 더욱 슬퍼한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수많은 슬픈 사랑의 이야기들이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윌리엄 포크너의 <에밀리를 위한 장미>라는 단편 소설이 있다. ‘섬뜩한 사랑을 그린 소설로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작품이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몰락한 미국 남부의 명문가의 마지막 후예인 에밀리는 아버지가 죽은 뒤 시에서 세금면제의 예우를 받으며 남부의 자존심의 대명사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의 도로 포장공사의 현장감독으로 온 호머 베른이라는 호탕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남부 귀족의 딸과 한갓 북부 노동자에 불과한 그들의 사랑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에밀리는 약국에서 쥐약을 사고, 상점에서 남자용 옷가지도 사들인다. 그러한 에밀리의 행동에 마을 사람들은 못마땅한 듯 수군거린다. 그 날, 호머 베른이 에밀리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봤지만 그 뒤로 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남자가 여자를 버리고 떠난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 이후, 마을 사람들은 가끔 창문 안쪽에서 에밀리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뿐, 시간이 흘러 그녀의 머리카락은 철회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에밀리는 마침내 세상을 떠난다. 마을 사람들은 에밀리의 장례를 위해 그녀의 집으로 몰려 가는데, 그들은 굳게 닫혀 있던 2층 방 침대에서 오래된 백골 한 구가 웃는 모습으로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의 곁에서는 누군가 계속해서 누워 있었던 것처럼 움푹 들어간 자리를 발견한다. 마을 주민 중 한 사람이 베개에서 머리카락 한 올을 들어 올렸는데, 그것은 에밀리의 철회색 머리카락이었다.

 

사랑의 마음은 이렇게 집요하다.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 때문에 연인과의 사랑이 좌절을 겪게 되자, 에밀리는 쥐약으로 연인 호머 베른을 죽인 뒤, 자신의 침대 위에 눕혀 놓고 그의 곁에서 평생을 지냈던 것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고통 때문에 독약을 마시고 죽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슬픈 사랑의 이야기보다 더 애절하고 섬뜩한 사랑의 이야기이다.

 

반대로, 세상에서 가장 기쁘고 즐거운 일도 사랑에 관한 것이다. 인간은 마음껏 사랑을 나누게 될 때 한없는 행복에 젖는다. 인간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더불어 이루어진 사랑 이야기이다. 오늘 우리는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신파극 한 편을 보게 된다. 아들이 죽을 줄로만 알고 통한의 세월을 살았던 아버지 야곱과 당당하게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되어 나타난 아들 요셉의 재회이다.

 

20여년이 지난 뒤, 극적으로 만난 아버지와 아들은 목을 어긋맞춰 안고 오랜 시간 동안 펑펑 운다. 이들의 울음에는 단순히 보고 싶은 그리움만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리움보다 더 큰 아픔이 담겨 있었다. 아버지 야곱의 눈물에는 자식을 잃은 참척의 고통이 담겨 있었고, 아들 요셉에게는 형들에게 버림 받은 상처의 고통이 담겨 있었다. 이들의 눈물은 그 어느 눈물보다 뜨거웠다. 살아 있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 중 가장 큰 고통을 겪은 후 흘리게 되는 눈물이 다 들어가 있었다. 그래서 이들의 재회는 기쁨보다 아픔이 앞섰다.

 

눈물은 마음의 고름이다. 육체에 상처가 났을 때 고름이 차오르듯이, 마음에 상처가 나면 눈물이 차오른다. 육체에 고인 고름을 다 짜내야 상처가 낫듯이, 마음에 고인 눈물을 다 흘려야 마음의 상처가 낫는 법이다. 육체의 고름을 짜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듯, 마음의 고음을 짜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고름도 무르익어야 짜내지는 법이다. 지금, 야곱과 요셉의 마음의 고름은 무르익어 철철 흘러나오고 있다.

 

마음의 고름을 다 짜내어 아픔이 진정되자, 야곱은 아들 요셉에게 감동적인 말을 한다.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30). 한을 품으면 눈 감기 어렵다. 눈을 감아야 할 때 망설임 없이 눈을 감을 수 있는 것만큼 복된 삶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그러한 축복 가운데 눈을 감는 사람이 얼마큼이나 되겠는가. 후회 없는 인생을 살고 싶어도 그게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간의 연약함인 것 같다.

 

야곱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오른 것은 바로 이러한 축복을 하나님께 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입에서는 감사의 언어가 흘러 나왔다. 이보다 아름다운 언어가 어디에 있겠는가.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 이것은 신앙인들이 사는 동안 끊임 없이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복이다. 오늘 눈 감게 되더라도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라는 감사의 고백을 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복된 것이다.

 

재회의 기쁨도 잠시, 요셉은 아버지가 거느리고 온 70명의 식솔을 먹여 살려야 하는 책임감 때문에 아버지와 형들을 위한 현실적인 계획을 마련한다. 애굽의 바로 왕은 전에 말하기를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 온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임이니라고 했지만, 아버지 야곱은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내려왔다. 애굽 왕은 야곱 가족들에게 몸만 와도 된다고 했지만, 목축업이 가업인 야곱은 식솔들뿐 아니라 모든 가축들도 끌고 내려왔던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요셉은 현실적인 대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요셉의 계획은 매우 지혜로운 것이었다. 우선, 그는 애굽 왕에게 자신의 아버지와 형들이 왕의 윤허대로 애굽 땅에 도착한 것을 보고하면서 이렇게 말하고자 했다. “그들은 목자들이라 목축하는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나이다.”(32). ‘몸만 오라고명령했던 애굽 왕의 명령에 반하여 야곱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는데, 이것은 애굽 왕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요셉은 애굽 왕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그들이 몸만 오지 않고 모든 소유를 이끌고 온 이유를 설명한다. 그들은 목자들, 즉 목축업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요셉은 아버지와 형들에게 애굽 왕이 너희의 직업이 무엇이냐묻거든 목축업을 하는 자들이라고 대답하라고 가르쳐 준다. 그러면서 단순히 목축업을 하는 자들이 아니라, 대대로 목축업을 하는 집안 인 것을 강조하라고 말한다.

 

요셉이 이렇게 계획을 꾸민 이유는 그래야 아버지와 그의 식솔들이 고센 땅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고센 땅은 목축업을 하기에 좋은 땅이었다. 게다가 애굽의 총리 대신의 가족들이 대거 애굽 땅으로 이주해 온 것을 모든 사람이 환영해 줄리 만무하다. 사람들은 경제적 이해관계나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히면 거칠어지는 법이다. 요셉의 가족들이 목축업을 하는 목자라는 것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얽힌 자들에게 안심할 수 있는 조건이었을 것이다. ‘목축업을 하는 목자라는 말은 그들이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애굽인들과 히브리인들이 함께 섞여 사는 것은 많은 갈등을 일으킬 것이 뻔했다. 오히려 이렇게 따로 떨어져 사는 것이 평화롭게 사는 방법이었다. 일례로, 종교적인 측면에서 애굽인들은 소를 신성시한 데 반해 히브리인들은 소를 잡아 제사를 드렸다. 한쪽에서는 소를 신성시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자신들이 신성시 하는 소를 죽여 제사 드리는 데 사용한다면, 이는 불 보듯 뻔한 갈등을 유발시키는 요소였다. 일상생활 속에서도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다른 사람이 사소하게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오르는 법인데, 종교적인 문제에서 그런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끔직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 뻔하다.

 

요셉의 계획은 매우 지혜로웠다. 이렇게 요셉이 지혜로운 계획을 마련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주된 관심사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요셉의 주된 관심사는 자신의 총리 대신 자리를 보존하는 것도 아니고, 부와 명성을 유지해 가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개인적인 꿈을 펼치는 것도 아니고, 애굽의 왕에게 충성하는 것도 아니었다. 요셉의 주된 관심사는 아버지와 그의 모든 가족이 애굽에서 안전하게 지내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요셉이 자기 가족만 챙기겠다는 가족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하는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셨다.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요셉에게 가족을 지키는 일은 단순히 가족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신앙의 문제였던 것이다. 게다가 야곱은 애굽으로 이주를 결심한 뒤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음성을 듣지 아니했던가.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46:3).

 

지혜는 당면한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질 때 생겨난다. 요셉에게 당면한 문제는 아버지와 그들의 가족들의 안전이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큰 민족을 이루려면 가족들의 안전이 가장 중요했다. 바로 그것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집중했을 때 요셉에게서는 가족들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지혜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살면서 지혜롭지 못할 때가 많다. 지혜롭지 못하여 일을 그르치고 한탄의 세월을 보내게 될 때가 있다. 그러한 때를 생각해 보면 모두 지혜롭게 일을 대처하지 못해서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기 자신의 이익에만 몰두하다 보면 잠깐은 자신에게 이익이 될지 몰라도, 결국에는 더 큰 일이 발생하며 공멸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와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당면한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식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드리는 데 부름 받는 자들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자가 아니다. 그리스도교에는 그러한 저급한 신앙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곧 나 자신의 이익이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생명과 평화이다. 요셉이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뜻에 집중할 때 지혜가 생겨 모든 가족들을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했듯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생명과 평화의 뜻을 마음 속에 품고 집중한다면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생명과 평화’, 여기에 집중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요, 하나님의 지혜를 폭포수 같이 받게 될 것이다.

 

www.columbuskmc.org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6. 1. 02:51

나의 의는 아직 건재하다 (친구 1 - 엘리바스)

욥기 2

(욥기 6:24-30)

 

욥기는 지혜문헌이다. 지혜는 하루 아침에 축적되지 않는다. 욥기가 지혜문헌이라는 뜻은 욥기에 제시되고 있는 지혜가 하루 아침에 깨달아진 진리가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삶을 꿰뚫고 나온 진리라는 뜻이다.

 

욥기서는 총 42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구성이 매우 짜임새 있고 촘촘하다. 욥은 하나의 잘 짜여진 드라마 같다. 거기에는 주연과 조연들이 있는데, 주연은 욥이고, 조연은 욥의 세 친구와 엘리후라는 지혜자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이 등장하신다.

 

이야기 전체의 줄거리는 동방의 의인이라 불리는 욥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신실하고 부유했던 그의 삶이 하루 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겪게 되는 인생의 갈등을 그렸다. 그가 그렇게 어려움을 겪게 되는 배경에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했는데, 사탄의 참소에 의한 하나님의 허락이 작용한다.

 

이것 자체가 하나의 세계관이다. 이런 세계관에 동의하는 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자도 있지만, 욥기가 씌어진 시대는 대개 신화적 세계관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욥이 겪은 어려움이 보이지 않는 힘(신 또는 사탄)’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인식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실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 아직도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어떤 경로를 통해 일어나는지 잘 알지 못한다. 신앙을 가진 자들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고 믿지만, 신앙이 없는 자들은 그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섭리든 우연이든 우리가 겪는 삶의 고통은 우리에게 현실적인 어려움을 가져오고 그 어려움 가운데 어떠한 의미를 추구하지 않으면 인생이 너무도 허무해진다는 것이다. 즉 고통의 문제는 인간에게 있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삶의 현실이라는 뜻이다.

 

욥이 재산과 자식을 잃고, 그리고 몸에 병까지 들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그 소식을 들은 친구 세 명이 욥을 위로하기 위하여 찾아온다. 욥기서의 이야기는 욥과 그 친구 세 명이 주고 받는 지혜의 언변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의 언변의 관점 포인트는 자신의 의로움을 완고하게 주장하는 욥과 그러한 욥의 불의함을 지적하는 친구들의 지혜이다.

 

욥은 자기 자신이 이렇게 어려움을 겪게 된 이유를 자기 자신에게서 찾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아무리 돌아보아도 자신에게서 어떠한 불의를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욥은 더 고통스러워 한다. 어떻게 의인이 이렇게 고통을 당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관점이다. 특별히 기독교인에게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으로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기 위해서 욥의 관점은 매우 중요한 관점을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 의인이 어떻게 고난 당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생각하면, 고난은 의인이 받으면 안 되고 악인이 받아야 한다.

 

예수 당시의 사람들이나 지금 사람들이나 예수의 십자가 사역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특별히 신명기서에는 이런 말까지 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21:23). 이것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도 논증하고 있는 내용인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속량(구원)하셨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3:13).

 

마가복음 15장에 보면, 아리마대 요셉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예수가 죽은 후 당돌하게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강력히 요청한다. 그가 그렇게 행동한 배경은 그가 경건한 유대인이었기 때문인데, 경건한 유대인이란 율법을 잘 알고 율법 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뜻한다. 신명기서 21장에보면 나무에 달린 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율법적 지침이 나온다. 그 부분을 직접 보자.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21:22-23).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당돌하게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한 것은 그가 예수를 그리스도(주님)로 고백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가 경건한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율법의 명령을 온전히 준행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그의 그러한 행동이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 된 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그의 아들을 일으키신 하나님의 부활 역사 때문이다.

 

이처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는 율법의 가르침 가운데 살았던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세주로, 하나님의 아들로, 주님으로 인식하기에는 매우 큰 어려움이 존재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예수가 메시아,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주님이라면, 또한 그가 정말로 의인이었다면 어떻게 그렇게 십자가에서 허무하게 죽임을 당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사람들의 신앙을 방해한다. 이러한 의문을 풀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경건하고 건전하게 갖기 위해서라도 욥기서에 제시되고 있는 고난 받는 의인에 대한 통렬한 주제에 대한 깊은 성찰은 꼭 필요하다.

 

자기 자신의 의로움에 대하여 토로하는 욥에 맞서 그의 친구 세 명(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욥을 정죄한다. 그들의 논점은 이것이다. 고난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잘못했기 때문에 온다는 것이다. , 그들은 인과응보론을 주장한다. 욥이 이렇게 고난 당하는 이유는 그에게 가 있기 때문이라는 거다. 그래서 욥의 세 친구는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욥에 맞서 욥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할 것을 촉구한다.

 

욥기서의 구성은 매우 탄탄한데, 그 이유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 일관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욥기서의 이야기 전개는 우선 욥이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면서 자신의 고난에 대한 탄식을 늘어 놓으면, 그에 대하여 욥의 친구가 한 명씩 대응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그렇게 두 세트가 진행되고 나서, 엘리후라는 젊은 지혜자가 등장하여 욥과 세 친구들의 잘못에 대하여 지적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끝으로 하나님이 등장하여서 모든 문제를 정리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욥기서를 읽으면서 견지해야 할 자세는 일단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욥기서이기 때문에 욥의 편에 서서 문제를 바라볼 필요가 없고, 욥의 주장과 세 친구의 주장을 일정한 거리에서 바라보며 분석하는 것이 제일 좋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의 주장이 인생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큰 지혜를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 우리는 욥이 주장하는 것처럼 의로운 데도 고난 가운데 처하기도 하고, 우리의 연약함 또는 죄 때문에 고난 가운데 처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욥기서 3장에서 욥은 자기 자신의 의로움을 견지하며, 자신에게 닥친 불행한 일에 대하여 읍소한다. 욥은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고, 죽음을 동경하고, 삶에 회의를 느끼는데, 결코 자기 자신의 죄 때문에 이러한 일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더 괴롭고,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며 당황해 한다. 그의 탄식은 고난 받는 의인의 탄식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보통 신앙생활 하면서 이러한 것에 대한 가르침은 별로 없다. 우리가 삶 속에서 고통을 당하면 그저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거라며 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탓하며 우선 회개부터 하려 든다. 물론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너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죄의식부터 갖고 보는 것은 건전한 신앙이 아니다. 물론 살다 보면 나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 많지만 인생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나의 뜻(의지)과는 상관 없이 나에게 닥쳐 오는 불행과 어려움이 많다.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한 일을 모두 자기 자신의 부족함 때문인 것으로 돌릴 필요는 없다. 우선 그 상황에 대해서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탄식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문제 자체에 대한 인식을 정확하게 가질 수 있다.

 

이 과정이 없으면 우리는 대개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한다. 칼 융이 이런 말을 했다. “의식되지 않는 무의식은 운명이 된다.” 이것을 이렇게 바꾸어 볼 수 있다. “의식되지 않는 불행은 운명이 된다.” 어떤 사람이 불행을 겪고 있는데 그 불행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면, 그 사람은 영원히 그 불행을 반복하게 되거나 그 불행 가운데서 헤어나오질 못하게 된다. 대개 불행하게 삶을 마감하는 사람들의 인식 능력은 형편 없이 결여되어 있다. 일례로 알코올 중독에 걸린 사람은 자신이 지금 알코올 중독에 걸렸다는 인식 능력이 부족하다. 그래서 거기에서 헤어나오질 못한다. 자기는 지금 괜찮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반주는 건강에 좋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 알코올 중독 가운데 살다가 그렇게 삶을 마감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또 하나의 가장 큰 이유는 자기 자신에게 닥친 불행이 자기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죄의식이 그 불행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끔 작용하기 때문이다. 배우 성유리가 주연한 누나라는 영화에서 그것을 잘 보여주는데, 극중 성유리는 물에 빠지는데 자기를 구하고 죽은 동생이 자기 때문에 죽었다는 죄의식 때문에 아버지의 폭력에 저항하지 않고 그 폭력을 통해 자신의 죄의식을 씻으려 하는 행동패턴을 보인다. 이것은 불행한 일보다 더 불행한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행동 패턴을 보인다. 자신의 불행을 자기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자책하면서 그 불행을 자기의 것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들은 불행에 저항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불행한 인생을 살다 간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러한 불행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욥기서에서 욥이 견지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의로움에 대하여 배울 필요가 있다. 자기에게 닥친 불행을 자신의 탓으로 금방 돌려 버리면, 우리는 평생 그 불행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불행을 인식하는 능력을 상실해 버리기 때문에 불행이 일상이 되어 버린다.

 

이렇게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욥에 대하여 엘리바스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제사한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4:7). 그러면서 그는 욥에게 자신의 죄로 인한 징계를 인정하라고 촉구한다.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5:17).

 

이러한 주장을 펴는 엘리바스의 입에서 인생에 대하여 큰 통찰을 주는 지혜의 말이 쏟아진다. “재난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고생은 흙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니라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5:6-7). 이 지혜는 불교의 그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불교에서는 인생을 ()’라고 부른다. 우리는 인생에서 이러한 를 느낀다. 그래서 고개를 끄떡이게 되지만, 정말 인생이 고통스럽기만 하다면 우리는 왜 이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아내야만 하는가?

 

욥은 엘리바스의 권고를 단호하게 거부한다. 물론 욥은 엘리바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인정한다. 엘리바스의 인생에 대한 통찰도 모두 옳은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통찰이 욥 자신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항변한다. 욥의 항변이 정곡을 찌른다.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6:25).

 

우리는 남을 쉽게 정죄한다. 특별히 고통을 겪는 자들에 대해 쉽게 말을 내뱉는다. 물론 그들을 정죄하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욥이 말하는 것처럼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지’, 옳은 말이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다면 그 옳은 말조차 삼갈 필요가 있다.

 

인생은 어렵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게 전부도 아닐뿐더러, 내가 경험한 것이 전부도 아니다. 욥기서를 읽으면서 가져야 할 가장 큰 자세는 열린 마음이 아닌가 싶다. 욥의 주장도 맞고, 친구들의 주장도 맞다. 그 모든 것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자기가 처한 현실에서 자신의 문제를 다각도로 진단해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나, 너무도 죄의식에 물들어 버린 현대 신앙인에게 필요한 것은 좀 더 욥의 자세를 배우는 것이다. 자신의 죄에 대하여 뻔뻔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의식되지 않는 불행은 운명이 된다라는 말처럼, 자신의 불행을 온전히 인식하는 인식능력을 키우기 위해서이다. 불행이 인식되지 않으면, 불행이 불행인지 모르고 그렇게 불행하게 살다가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행복이지 불행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품 안에서 우리 모두가 행복하길 원하신다. 그 행복의 시작은 내 삶 안에 일어나고 있는 불행한 일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비롯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일은 욥처럼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에 대하여 자기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며 저항하는 것이다. 욥은 말한다. “너희는 돌이켜 행악자가 되지 말라 아직도 나의 의가 건재하니 돌아오라”(6:29). “나의 의는 아직 건재하다.” 새겨들어야 하는 저항이다.

 

www.columbuskmc.org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차라리 죽었으면 (친구 2 - 빌닷)  (0) 2015.06.08
요셉의 지혜  (0) 2015.06.04
야곱의 희생제사와 그 의미  (2) 2015.05.28
함부로 감사하지 말라  (0) 2015.05.25
기쁨의 향연  (1) 2015.05.21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5. 28. 06:51

야곱의 희생제사와 그 의미

창세기 57

(창세기 46:1-27)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의 응답이다. 예배는 하나님에게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먼저 발현되고, 그 은혜와 사랑을 몸소 체험한 자들이 그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예배를 드리게 된다. 거꾸로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푸신다는 예배의 개념은 완전히 이방인의 예배 개념이다. 이런 것을 기복신앙이라고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는 분이지만, 그 복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리거나 하나님께 잘 보였을 때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보상은 은혜가 아니다. 값 없이 주어지는 것만이 은혜이다.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꾸미지 않았다. 그는 요셉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자식 잃은 아픔의 세월을 그저 견디면서 살아왔을 뿐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었다. 요셉의 고백에서 드러났듯이, 이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었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45:5,7,8).

 

야곱의 인생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었다. 하나님은 언제나 야곱을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셨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다는 것이 곧 인생 가운데 아무런 어려움이나 고난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것은 인생의 신비이다. 성경은 온통 이러한 인생의 신비에 관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성경은 인생들에게 지혜의 창고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인생들에게 등불인 것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 119:105).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죽은 줄로만 알고 참척의 고통(자식을 잃은 슬픔, 세상의 슬픔 가운데서 가장 참혹한 슬픔) 가운데 살던 야곱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는다. 요셉이 살아 있고,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애굽의 왕이 야곱의 모든 식구들의 이주를 권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꿈 같은 소식을 들은 야곱은 드디어 애굽으로의 이주를 결심하고 짐을 꾸려 애굽으로 떠난다.

 

야곱이 살던 곳은 헤브론이다. 헤브론에서 애굽으로 내려가려면 브엘세바라는 곳을 꼭 거쳐야 한다. 그런데 브엘세바는 어떤 곳인가? 브엘세바는 야곱에게 매우 특별한 곳이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화친을 맺고 언약을 세우며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곳이며, 할아버지도 거주하던 곳이었고, 아버지도 거주하던 곳이었고, 자기 자신도 거주하던 곳이었다. 삼대에 걸친 인생의 스토리가 가득한 곳이다. 그곳을 지나면서 야곱은 수많은 감정이 교차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 역사적인 장소에서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린다.

 

브엘세바에서 드리는 희생제사는 야곱에게 특별한 의미였다.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삶의 스토리가 담긴 제사였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아들 이삭을 희생제사의 제물로 드리려 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희생제물을 준비해 주셨다는 데 있다. 그래서 그 아찔한 이야기의 끝은 여호와 이레라는 은혜의 고백으로 마무리 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원하셨던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그의 마음, 곧 그의 삶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예배자들에게 절대적인 의미를 가져다 준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행위나 제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예배자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삶 그 자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 영적 예배의 매개체가 우리 자신의 몸, 즉 우리 자신의 삶 전체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좀 더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인류의 타락()의 과정을 그리고 있는 이야기인 동시에 예배자의 참된 예배를 제시하는 곳이기도 하다. 결국 인간의 타락은 예배의 타락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가인과 아벨은 동시에 하나님께 제사(예배)를 올려 드렸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자로서 자신이 수확한 곡식으로 제사 드렸고, 아벨은 목축업을 하는 자로서 자신이 기른 양을 잡아서 제사 드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혹자는 아벨이 피와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제사를 받으셨다고 말한다. 히브리서에 이런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9:22). 이것은 너무 신약성서의 관점에서 가인과 아벨의 제사 문제를 해결하려는 편협한 시각일 뿐이다.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물에 대한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가인이 드린 곡물이나 아벨이 드린 동물이나 모두 미느하'로 표현하고 있다. ‘미느하' '선물'(膳物)이라는 뜻과 '소제'(素祭; cereal offering)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낱말이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서 무엇을 제물로 드렸느냐는 별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면 무엇이 이들의 제사를 갈랐는가?

 

창세기 4장은 가인과 아벨이 제물을 바쳤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의 제물을 받으셨는지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4:4-5). 여호와께서 제물을 받으실 때 단순히 제물만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제물보다 먼저 언급되는 것은 아벨 그리고 가인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예배자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말씀을 그대로 담고 있다. 제사(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제물이 아니라, 그 제사(예배)를 드리는 자의 삶과 인격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이유는 제물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삶과 인격의 차이에서 왔다는 뜻이다. 아무리 좋은 것을 드리고 아무리 많은 것을 드려도, 드리는 자의 삶과 인격이 거룩한 산 제사가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선지자들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이다. 사울 왕의 잘못된 제사를 꾸짖었던 사무엘 선지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사무엘상 15:22).

 

북이스라엘의 패역한 제사행위를 꾸짖은 아모스 선지자와 호세아 선지자도 각각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아모스 5:21-24). “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세아 6:6).

 

남유다 왕국에서 활동한 이사야 선지와, 미가 선지자, 예레미야 선지자도 똑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이사야 1:11).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6-8).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예레미야 7:4-6)

그래,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이, 너희의 눈에는 도둑들이 숨는 곳으로 보이느냐? 여기에서 벌어진 온갖 악을 나도 똑똑히 다 보았다”(예레미야 7:11, 표준새번역).

 

애굽으로 내려가기 전, 우리는 브엘세바에서 또 한 번 예배자로 나오는 야곱을 발견한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희생제사를 드릴 때 그는 그의 모든 자손들과 함께 제사를 드렸다. 특별히 그 제사에 야곱의 열 한 아들이 참여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야곱이 삼촌 라반의 집(밧단아람)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 세겜과 벧엘에서 제사 드린 후에 그 동안 야곱이 하나님께 제사드렸다는 기사는 없다. 아니 제사드릴 수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인지 모르겠다.

 

밧단아람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야곱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세겜에서 딸 디나가 강간당했고, 그 일로 인해 디나의 오빠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 사람들을 속여 그들을 도륙함으로 복수했다. 그 일로 인해 야곱은 세겜을 떠날 수 밖에 없었고 세겜 사람들의 복수의 칼날이 들이닥칠까 봐 두려워했다.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잃었고, 정신적 지주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아버지가 살던 헤브론에 정착해서 살던 중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남기고 간 아들 요셉마저 잃는 참척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런 고난의 연속 가운데서 야곱이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나오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예배자로 나아오려면 희생제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자의 삶과 인격이 중요한 것인데 그 동안 야곱의 아들들이 보여주었던 삶의 모습은 전혀 인격적이지 못했다. 그들은 시기와 질투 가운데 치졸한 행동을 일삼았고, 전혀 책임 있고 정의로운 삶을 살아내지 못했다. 그들은 동생을 죽였고(물론 노예에게 팔았지만 죽인 거나 마찬가지다), 아버지에게 거짓말 했고, 무책임한 삶을 살았다. 이들은 전혀 예배자로서 희생제사의 자리에 나올 수 없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야곱이 겪은 고난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통해서 자신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일어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었다는 것이 드러났고, 야곱의 아들들은 기근 때문에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내려갔다가 요셉을 다시 만나게 되는 과정 속에서 삶과 인격의 성장을 경험하게 된다. 야곱에게는 희생제사를 드릴 '이유'가 생겼고, 야곱의 아들들에게는 희생제사를 드릴 '자격'이 생긴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서, 그리고 희생제물이 아닌 삶과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께 드린 희생제사는 야곱에게 또 한 번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이 된다. 사실 야곱은 두려웠다. 낯선 땅 애굽으로 가는 것이 두려웠다기 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거쳐 자기 자신에게 전해진 약속의 땅을 떠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할아버지 아브라함도 기근이 들었을 때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갔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간 것은 아니었다. 그때 하나님은 아무 말씀 없으셨다. 아버지 이삭도 기근이 들었을 때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가려 했지만 그때 하나님께서는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런데 어떻게 야곱이 약속의 땅을 버리고 함부로 애굽으로 내려 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희생제사의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타나셨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 주신다.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3-4).

 

야곱의 희생제사는 (삶과 인격)으로 드린 거룩한 산 제사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제사를 받으시고 그에게 나타나서 현재 야곱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해주셨다. “어디에 있느냐 보다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 야곱이 들은 음성을 들을 수만 있다면 내가 처한 상황과 현실이 어떠하든지, 어떤 두려움 가운데 있든지, 강하고 담대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될 것이고, 걸어가는 발걸음을 암사슴 같이 기쁘고 즐겁게 그리고 가볍게 뗄 수 있을 것이다.

 

www.columbuskmc.org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셉의 지혜  (0) 2015.06.04
나의 의는 아직 건재하다 (친구 1 - 엘리바스)  (0) 2015.06.01
함부로 감사하지 말라  (0) 2015.05.25
기쁨의 향연  (1) 2015.05.21
멈춤과 나눔  (1) 2015.05.17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5. 25. 03:13

함부로 감사하지 말라

욥기 1

(욥기 3:20-26)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진달래 피는 곳에 내 마음도 피어 건너마을 젊은 처자 꽃 따러 오거든 꽃만 말고 내 마음도 함께 따가주~”

 

봄이 오면 꽃이 핀다. 참 기어코 꽃이 핀다. 우리의 기분이나 환경과는 상관 없이 꽃이 핀다. 그래서 봄꽃은 우리에게 희망을 전달한다. 꽃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도 언젠가는 저렇게 찬란하게 피어나게 되리라는 희망을 본다. 그러나 꽃이 피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해 보면, 그게 그렇게 녹녹하지는 않다. 봄에 핀 꽃은 혹독한 겨울을 참아내고 이겨낸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의 꽃은 감사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감사할 줄 모르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안 하는 것만 못하다. 그러나 그 감사의 꽃을 피워내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쉬우면 안 된다. 자연인이 꽃을 보며 우주가 돌아가는 이치를 깨달을 수 있듯이, 신앙인은 감사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 어느 지식보다 오묘하고 그 어느 지혜보다 경이롭다. 그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담아내야 하는 신앙인의 감사는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도 값비싸다. 우리는 그것을 욥의 이야기를 통해 배운다.

 

욥은 동방의 의인이라 불릴 정도로 매우 훌륭한 사람이었다. 욥기서는 그것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시작한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1:1). 그런데 그의 인생에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시련이 닥친다.

 

그에게 시련이 닥치게 된 배경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작용한 것으로 서술된다. 하늘 나라에서 욥에 대한 참소가 있었다. 사탄은 하나님께 이르기를 욥이 그렇게 밤낮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양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셔서 그의 소유물이 넘쳐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만약 하나님께서 욥의 모든 소유를 걷어 가시면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욥을 시험하고자 하는 사탄의 계획을 허락한다.

 

이것은 인간의 삶에 대한 매우 중요한 통찰이다. 성경은 언제나 다음의 두 가지 상황을 함께 제시한다. 1) 부재하는 무자비한 신의 세계. 2) 범재하는 자비한 신의 세계. 부재하는 무자비한 신은 인간의 불행을 방관하는 것처럼 보인다. 범재하는 자비의 신은 세계를 돌보며 피조물의 입에서 감사가 흘러나게끔 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상황에서 매우 헷갈려 한다.

 

사람들이 신앙을 갖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부재하는 무자비한 신의 세계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들여다 보면 우리는 신의 존재보다 신의 부재를 경험할 때가 훨씬 더 많다. 일례로, 한국 사회는 세월호 사건이전과 이후로 구분될 만큼 세월호 충격에 아직도 휩싸여 있다. 아마도 21세기 한국 역사에서 세월호 사건은 절대로 잊혀지지 않은 역사의 푯대가 될 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푸느냐에 따라서 한국 사회가 전진하느냐 후퇴하느냐가 결정될 것이다. 한국 사회가 전진하게 되면 세월호 문제를 잘 풀어서 그렇게 된 것이고, 한국 사회가 후퇴하면 세월호 문제를 잘 풀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니, 세월호 사건은 한국 사회의 미래의 지표가 될 수 밖에 없다.

 

많은 신앙인들이 세월호 사건을 생각하면서 이런 질문한다.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셨는가?” 이 질문은 인간이 겪는 비극적인 순간에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질문이다. 2차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유대인 대학살이 진행되었을 때도 유대인들은 죽어가며 똑 같은 질문을 했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신가?”

 

비극적인 일을 겪는 이들에게 그 비극적인 일에서 자신들을 건져줄 메시야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그들이 평소에 메시야라고 믿으며 찬양했던 하나님은 바로 그 순간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야 말로 부재하는 신의 무자비를 경험하게 된다. 그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우리는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

 

사탄의 참소와 하나님의 허락 아래 욥에게 말할 수 없는 고난이 닥친다. 그에게 닥친 고난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간접적인 것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직접적인 것이다. 우선, 욥은 자신의 모든 소유를 잃는다. 여기에는 자식들도 포함된다. 모두 소중한 것들임에는 틀림없으나 욥 자신이 아니라 욥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간접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욥은 이렇게 자신의 소유를 잃었을 때 가슴이 찢어졌지만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 이런 고백을 한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기 1:21).

 

사실, 자식을 포함한 자신의 모든 소유를 잃었음에도 이런 고백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욥은 이것만 해도 초인적이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소유를 조금만 잃어도 밤잠을 자지 못해 수척해진다. 그런데 이것은 시대의 반영이기도 한 것 같다. 욥기가 씌어진 시대는 지금 시대처럼 소유에 대한 집착이 덜 했다. 요즘 시대는 소유가 미덕이고 소유가 곧 생명인 시대인 것처럼 세뇌 당한 시대이다. 물질이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한 시대가 되었으니, 요즘 시대에 젖어 있는 사람들의 눈으로 욥의 고백을 보면 전혀 이해 가지 않는다. 모든 소유를 저렇게 잃고 어떻게 저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

 

모든 소유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 앞에 나아와 찬양하는 욥의 모습을 보고 사탄은 한 가지 더 시험하기를 하나님께 청한다. 바로 욥 자신의 몸을 직접적으로 치는 시험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욥기 2:5,7).

 

모든 소유를 잃고 절망 가운데 있던 욥에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직접적인 육신의 고통이 닥쳐온다. 욥은 어떤 질병에 의해 온 몸에 종기가 났고, 그 종기 때문에 육신이 너무 괴로워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었다 (욥기 2:8).

 

이 모습을 보다 못한 욥의 아내는 신앙을 잃은 듯한 말을 내뱉는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적인, 아주 인간적인 솔직한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기 2:9). 이 진술은 두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부재에 대한 고발이요, 다른 하나는 욥의 자기 의에 대한 고발이다. 의로운 욥에게 이러한 고난이 닥쳐 오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르게 보면, 욥이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욕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의 때문이라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불행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찾지 못하는 것도 불행이고, 이렇게 고통 받으면서 자기 자신의 의 때문에 하나님께 하소연 하지 못하는 것도 불행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두 번째가 더 불행한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솔직히 두 번째 이유 때문에 불행한 일을 겪으면서도 하나님께 탄원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크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무조건 감사해야 한다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아내의 말에 욥은 끝까지 자신의 의로움을 지킨다.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욥기 2:10). 사실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설교자들의 편집의 함정이 그것이다. 보통 설교자들은 욥기에서 이 부분만 떼내어 설교한다. 그러면서 욥처럼 어느 상황에서도 이렇게 감사와 찬양을 돌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욥기서를 좀 더 읽어 보면 바로 다음 장에서 상황이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욥기서 3 1절을 보자.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욥에게 닥친 불행한 일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의 절친 세 명이 욥을 위로하기 위해서 방문한다. 그러나 친구 세 명은 욥에게 닥친 그 처절한 불행을 직접 눈으로 보고 할 말을 잃는다. 그렇게 친구들과 욥은 칠일 밤낮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는데, 욥이 비로소 입을 연 것이다. 그때 욥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감사가 아니라 저주였다.

 

욥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에 휩싸여 자기 자신에 대하여 저주를 퍼붓는다. 태어난 것을 저주하고, 죽음을 동경하고, 삶에 회의를 느낀다. 욥기서 전체를 보면, 욥의 처절한 몸부림이 잘 표현되어 있는데, 욥의 처절한 몸부림은 감사가 아니라 탄원이다. 욥기서의 저자가 신앙인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게 바로 이것일 것이다. ‘함부로 감사하지 마라!’ 감사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한 탄원의 늪을 지날 때 비로소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욥기서 3장은 신앙인이 꼭 배워야 하는 신앙의 감정이다. 고통 당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섣부른 감사를 드리기 이전에, 탄원할 줄 알아야 한다. 그 과정이 없으면 감사는 값싼 감사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솔직해지지 못하는가? 하나님은 무조건 감사하는 자를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서 솔직하게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는 자를 찾으신다. 고통 당하고 있으면서 그 고통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와 탄원하지 못하는 자의 입술에서 무슨 신령한 감사가 나올 수 있겠는가.

 

이것은 욥기서만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신앙의 신비가 아니다. 우리 구주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의 입술에서는 섣부른 감사가 튀어나오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입술에서 튀어나온 말은 말할 수 없는 탄식이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시편 22편 첫 구절이기도 한데, 불행한 일을 겪고 있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그 상황을 무조건 받아 들이는 감사의 신앙이 아니라 먼저 그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인간의 솔직한 마음을 담은 탄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인도하심을 믿는 신앙인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하나님의 임재보다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게 되는 불행한 일들이 너무도 많다. 그러한 불행을 겪을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심하게 된다. 불행한 일을 겪을 때 우리는 인간의 불행을 전혀 돌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무자비함 앞에 당황하게 된다. 어쩌면 그것이 불행한 일보다 더 불행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일본의 기독교인이자 문인이었던 엔도 슈샤쿠는 이렇게 묘비를 남겼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도 푸릅니다.”

 

불행한 일, 그토록 슬프고 외로운 일을 겪으며 이렇게 가련한 인생을 살고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나아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냐고따져 묻지 못하는 것만큼 불행한 신앙인은 없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고통에 대하여 따져 묻는 것은 차라리 의로운 일이다. 절대로 불경스러운 일이 아니다. 욥기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준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그것을 몸소 보여주셨다. 그러니, 우리가 삶을 살면서 어려움을 겪고 불행을 겪어 고통 당할 때 하나님 앞에 나아와 다른 무엇보다 탄식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오히려 신앙인의 참된 모습이다.

 

고통 당하고 있는데, 불행을 겪고 있는데, 나에게 일어난 일을 전혀 이해 할 수 없는데, 그것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지 못하고 그저 하나님께 함부로 감사 드리지 말라. 그냥 지금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솔직한 심정을 하나님께 토로하라. 욥기서 3장에 나오는 욥의 탄식으로 탄식하라. 그래야 산다. 그래야 마지막 피어나게 될 감사의 꽃이 찬란한 것이다. 그래야 감사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함부로 감사하지 마라

 

함부로 감사하지 마라

이 순간만큼은

뻔뻔한 욥이 되어라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면서도

자신이 왜 이처럼 고통에 처해져야 하는지

따져 물었던

용감한 예수가 되어라

신이 너에게 원하는 것은

값싼 감사가 아니니라

신이 너에게 원하는 것은

수줍은 어리광이 아니니라

신이 너에게 원하는 것은

억지 같은 투쟁이니라

네 비천함에 대한 저항이니라

너의 불행을 방관만 하고 있는,

무자비한,

부재하는 신에 대한 고발이

거꾸로 솟는 핏방울처럼

네 목젖을 힘껏 울리게 하라

가랑비 같은 감사의 눈물을 흘리지 말지어다

폭풍우 같은 분노의 눈물을 흘릴지어다

감사하는 자가 칭찬 받는 시대가 아니니

애통하는 자가 위로 받는 시대이나니

복을 받으려거든

우주의 법정에서

준엄하게

신을

...

 

www.columbuskmc.org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의는 아직 건재하다 (친구 1 - 엘리바스)  (0) 2015.06.01
야곱의 희생제사와 그 의미  (2) 2015.05.28
기쁨의 향연  (1) 2015.05.21
멈춤과 나눔  (1) 2015.05.17
나는 요셉이라 (구원의 신비)  (1) 2015.05.14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5. 21. 06:41

기쁨의 향연

창세기 56

(창세기 45:16-28)

 

정체를 밝힌 요셉과 형들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지고 이제 기쁨의 향연이 벌어진다. 이런 장면을 보는 일은 기쁘다. 살맛 난다. 우리 삶 가운데 이러한 기쁨의 향연이 날마다 벌어지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시고, 우리가 살면서 이루기를 바라는 삶의 모습 아니겠는가. 인생은 환대 받을 때 기쁘다. 예수께서는 모든 자들을 환대하셨다. 환대 받지 못해 외로움에 치를 떨던 자들을 환대 해주셨다. 그 자체가 바로 구원이었다.

 

예수께서는 병에 걸려 사회로부터 버림 받았던 자들을 치유해 주시고 다시 공동체로 복귀시켜 공동체가 그들을 환대하도록 인도해 주셨다. 죄를 지어 사회적으로 소외 당하던 자들에게 용서의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을 다시 공동체 안으로 복귀시켜 공동체가 그들을 환대하도록 인도해 주셨다. 그 대표적인 이야기가 누가복음 19장의 사케오 이야기이다. 사케오는 세리로서 유대인 공동체에서 죄인으로 낙인 찍혀 소외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케오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칭해주시고, 그를 아브라함 공동체에 복귀시켜 주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9-10).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는 이 진술이 가진 정치사회적 함의는 매우 레디컬하다. 여기서 잃어버린 자란 환영 받지 못하는 자를 가리킨다. 무슨 이유에서든지 환영 받지 못하는 자는 잃어버린 자이다.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셨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언은 잃어버린 자에게 매우 기쁜 소식이다. 이것이 요셉의 이야기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은 우리에게 매우 유익하다.

 

양식을 구하러 온 형제들은 처음에 애굽의 총리(요셉)에게 환대 받지 못하는 것 같아 두려워했다. 그러나, 애굽의 총리가 자신들의 형제 요셉이라는 것을 알고, 그리고 그가 자신들의 죄를 용서하고 환대하는 것을 알고 형들은 기뻐했다. 환영 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일었던 두려움이 사라지고 이제 그들은 환영 받는 상황에서 마음껏 기뻐할 수 있었다.

 

요셉의 형제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왕과 신하들도 기뻐하며 그들을 환대해 준다. 왕과 신하들이 요셉의 형제들을 환대할 수 있는 이유는 요셉 때문이었다. 요셉의 덕과 인품, 그리고 그의 사회적 공헌이 그러한 환경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형들에게 환영 받지 못해 결국 버림 받은 요셉이 이렇게 애굽에서 존경 받는 인물로 자라날 수 있었던 요인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요셉이 애굽에서 환영 받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품에 있었을 때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 색동옷을 입었으나, 바로 그것 때문에 요셉은 형들에게 환영 받지 못했다. 환영 받지 못하는 곳에서의 요셉의 삶은 괴로움 그 자체였다. 결국 환영 받지 못한 요셉은 형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다. 이처럼, 환영 받지 못한다는 것은 그 결말이 슬프다.

 

환영 받지 못하는 곳에서 사람은 기쁘지 않다. 이것은 사람뿐만 아니다. 동물도 마찬가지다. 환영 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동물도 마음이 움츠러든다. 하물며 사람이랴. 사람은 환영 받지 못하면 마음이 움츠러들고 삐뚤어진다. 대인관계에서,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 대부분은 환영 받지 못한 환경에서 자란 경험을 가지고 있다.

 

사람에게 가장 좋지 않는 것이 외로움이다. 환영 받지 못하면, 외로워지는데, 외로움은 인간에게 치명적인 상처(정신적 상처)를 준다. 몸이 아픈 사람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마음이 아픈 사람이 범죄를 저지른다. 범죄를 저지르는 가장 큰 이유는 환영 받지 못한 것에 대한 복수의 개념도 있지만, 오히려 환영 받고 싶은 욕구가 강하기 때문이다. , 자기의 존재감을 그렇게라도 드러내고 싶기 때문이다. 정상적으로는 아무도 자기를 환영해 주거나 알아주지 않으니까, 비정상적인 방법으로라도 자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어두운 욕망이다.

 

창세기 2장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런 말씀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2:18). 이 부분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The Lord God said, “It is not good for the man to be alone. I will make a helper suitable for him.” 옛날 성경은 이 부분은 독처하는 것이라고 번역했다. ‘독처한다는 것은 혼자서 외롭게 산다는 뜻이다. ,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이어서 아담의 돕는 배필인 여자 하와를 창조하신 이유가 사람(아담)은 혼자서 외롭게 사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혼자서 외롭게 사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결혼하는 이유는 생물학적 생산을 위한 것도 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혼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외로움을 면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우리 인간이 직면하고 있는 외로움의 문제를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사실,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남녀가 만나 결혼하지만, 결혼생활을 하다 보면 오히려 결혼이 외로움을 더 극대화시키는 부작용을 낳을 때가 있다. 이런 것이 인간의 연약함(죄성)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라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외로움을 극복하도록 하시기 위해 결혼이라는 것을 제정하셨는데 막상 결혼한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통해 외로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더 큰 외로움을 생산해 내는 것은 인간이 가진 비극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르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2:22-25).

 

소외감, 외로움은 인간에게 치명적이다. 인정 받지 못하고 사랑 받지 못한다는 현실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현실을 왜곡하게 만든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성격(기질)에 따라 그 현실을 체념하거나 그 현실에 공격을 가한다. 체념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이 세상과 작별하는 방법을 선택하고, 공격하는 사람은 이 세상을 자신처럼 아프게 만든다. 둘 다 비극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요셉이 형들에게 환영 받지 못하고, 소외 당하고 외로움에 처해지고, 결국 버림 받았지만, 자신이 당면한 현실을 체념하거나 공격하지 않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애굽에서 환영 받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느 한 곳에서만이라도 환영 받는다면, 다른 곳에서 환영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유지하며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아버지 야곱 또한 외로움 가운데 살았다. 사랑하는 부인 라헬을 잃고, 사랑하는 부인이 낳은 아들 요셉을 잃고, 그는 외롭게 살았다. 열 한 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그들과 소통이 잘 된 것 같지 않다. 더군다나 야곱은 아들들을 신뢰하지 못했다. 신뢰할 수 없는 사람과는 의미 있는 관계를 맺지 못하고, 결국 외로워질 수밖에 없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과 애굽의 왕에게 환대를 받아 기쁜 마음으로 애굽의 왕과 요셉이 제안한 애굽으로의 이주 소식을 아버지 야곱에게 알리고자 길을 떠난다. 요셉은 형들에게 옷 한 벌씩을 주고, 동생 베냐민에게는 은 삼백과 옷 다섯 벌을 챙겨 준다. 요셉과 형들 사이의 불화의 원인 중 하나가 이었는데, 바로 그 옷이 화해의 선물이 된다. 참 의미심장하다. 또한 요셉은 형들에게 여러 가지 아름다운 선물과 곡식을 가득 실어 아버지에게 돌려 보낸다. 그러면서 이렇게 당부한다.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

 

겉으로 보면 요셉이 철없는 형들을 걱정해서 말한 것 같으나, 이것은 학자들 사이에 두 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다투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가즈떨다, 흔들리다, 동요하다는 뜻으로, 흔히 두려움을 묘사하는데 쓰이는 단어다. 그래서 유대인 랍비들은 이러한 의미를 살려 요셉의 형들이 많은 물품을 싣고 가나안으로 가는 동안 강도들을 만나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도록 격려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현대의 학자들은 르우벤이 그랬던 것처럼 과거의 잘못에 대해 서로 탓하지 말라는 당부로 해석한다. 아무튼, 요셉은 끝까지 형들과의 화해가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신경 쓰고 있는 것이다.

 

요셉의 걱정대로, 또는 당부대로, 형들 일행은 무사히 집에 도착한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린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26).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 야곱은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해한다. 여기서 어리둥절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푸그는 문자적으로 무감각해지다는 뜻을 갖고 있다. 이것에 근거해서 상황을 다시 표현해 보자면, 야곱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다. 야곱은 아들들의 말을 전혀 믿지 못할 신빙성이 없는 말로 들었다. "니네들이 하는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안 믿는다!"

 

이것은 야곱이 자신의 아들들과 얼마나 서원한 관계 속에서 외롭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마디로, 아들들은 아버지 야곱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다. 그 옛날 요셉이 들판에서 죽었다고 아들들이 아버지에게 보고할 때, 그들은 피에 젖은 옷을 아버지에게 보여주며 그 사실을 알렸다. 그렇게 말해 놓고, 이제 와서 요셉이 살아 있고, 그냥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되었다는 것이 어떻게 야곱의 귀에 곧이곧대로 들리겠는가.

 

이 외에도 아들들이 아버지에게 신뢰를 잃은 일이 많다. 장남 르우벤은 서모 빌하와 통간을 하질 않았나, 그리고 시므온과 레위는 디나 강간 사건 때 아버지 모르게 세겜 사람들을 모두 도륙내어 아버지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게다가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보내 놨더니, 시므온을 볼모로 잡히게 해 놓고 돌아 왔으며, 양식 값을 치르기 위해 준 돈도 자루에 도로 가지고 와 놓고 왜 그것이 여기에 들었는지 모르겠다며 이상한 말을 해댔다. 또한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베냐민을 내놓으라고 협박 아닌 협박도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버지 야곱이 어떻게 아들들의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요셉과 애굽의 왕이 보여준 환대가 닫혀 있던 야곱의 마음을 활짝 열어준다. 아들들의 말을 못 믿었지만, 요셉과 애굽의 왕이 보내온 환대(암나귀 열 필에 가득 실린 선물과 양식들)를 보고 야곱은 아들들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게 된다. 그 상황은 성경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한지라”(27).

 

그렇다.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 기운이 소생했다. ‘기운이 소생했다는 말은 영이 살았다는 말이다. , 무감각해졌던 마음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아들들을 믿지 못해 외로움 가운데 살았던 야곱의 마음이 다시 환해졌다는 뜻이다. 요셉을 잃고 아픈 가슴을 부여 안고 살았는데, 게다가 이제 베냐민 마저 잃을까 봐 노심초사하며 살았는데, 비로소 야곱의 마음에 기쁨이 돌아온 것이다.

 

인간의 기쁨은 외로움이 극복될 때 온다. 환영 받지 못할 때 인간은 외로움에 던져지지만, 환대 받을 때 인간은 외로움을 극복하게 된다. 환대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구원의 빛이다. 요셉은 형들에게 환영 받지 못했을 때 죽음에 처해졌지만, 팔려간 애굽에서 환대 받았을 때 자존감을 회복하여 과거의 어두운 상처를 씻어내고 형들과 화해할 수 있었다. 형들은 양식을 구하러 가서 애굽에서 환영 받지 못했을 때 마음이 두렵고 떨렸다. 그러나 요셉과 애굽의 왕에게 환대 받았을 때 기쁘고 즐거운 마음 가운데 그 동안의 죄책감을 씻어 버리고 책임감 있는 삶을 사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야곱은 외로움 가운데 살았지만, 요셉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외로움을 극복하고 자식들에 대한 서운한 마음을 풀고 새로운 삶을 향해 발을 내디딜 수 있게 되었다.

 

기쁨의 향연을 보는 일은 가슴 벅차다. 그 기쁨이 바이러스처럼 우리의 삶 가운데 옮겨지는 것 같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누구든지 소외되는 자가 없도록 누구든지 환영하며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자리는 그렇지 못할 때가 너무도 많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자기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우선 배제부터 하는 사회인 것 같다. 그래서 요즘엔 외로운 사람들이 많다. 외로움에 던져지지 않으려고, 상대방에게 인정받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현대인들의 몸 짓는 애처롭기까지 하다.

 

현대인들의 우울증은 바로 이렇게 소외되어 외로움 가운데 처해지는 데서부터 온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분명해 진다. ‘혼자서 외롭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외로움에 처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뿐 아니라, 그 누구도 외로움에 처해지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환영해 주었듯이, 우리도 서로 환영하면서 살자. 그것이 그리스도의 기쁨이요 우리의 기쁨이요, 결국 구원의 기쁨이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5. 17. 22:54

멈춤과 나눔

(왕상 10:23-25, 전도서 1:2-3)

 

현대인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은 멈추는 일과 나누는 일이다. 더 힘든 건 멈춰야 하는 것을 알고 나누어야 하는 것을 하는 데 그것이 마음 먹은 대로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의 경제구조가 그렇기 때문이다. 미국 중심의 세계 경제는 신자유주의라는 경제 개념에 의해서 돌아간다. ‘신자유주의경제 개념의 핵심은 무한경쟁이다. 발전을 위해 경쟁은 어느 정도 필요한 부분이지만, 그것이 무한으로 치달을 때 거기에서 발생하는 가장 큰 문제는 인간성 말살이라는 요소이다. 무한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사람의 가치는 상실되고, ‘살아남는 것이 목표가 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되고 자기 자신 또한 넘어야 할 으로 간주되는 상황에 이른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모두 무한경쟁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렇게 커다란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소소한 일상생활 속에서도 우리는 멈추는 것을 싫어한다. 멈추면 짜증난다. 차를 몰고 도로를 달리다 빨간 신호등에 걸렸을 때 계속 달리지 못하고 서야 하는 것 때문에 짜증난다. 바쁜 시간에 스쿨버스를 만나면 짜증난다. 물론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서 멈춰 서야 하는 것이지만, 전진하지 못하고 서야 하는 상황에 짜증난다. 병원 가서도 몇 분 보지 않는 의사를 만나기 위해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서도 짜증난다.

 

우리들은 어느새 나누는 일 또한 힘들어 하게 됐다. 서로가 다 어려운 시절에는 나누며 사는 게 오히려 미덕이었다. 내가 좀 가진 게 없어도 모두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남들보다 조금 못 가진 것을 못 견뎌 하는 시대가 됐다. 남들보다 좀 못 가지면 인생의 낙오자인 양 매우 불쾌한 생각과 더불어 모멸감을 느끼는 세상이 됐다. 게다가 풍요로운 세상에 살다 보니 나눔에 대한 감각이 거의 죽은 상태가 됐다.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 대한 긍휼한 마음이 잘 들지 않는다. 어려움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아 마음이 움직이질 않는다.

 

그리고 나눔이라는 가치 또한 무한경쟁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자기 포장 수단으로 전락한 것도 문제이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풂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의 주가를 높이려고 한다. 나눔 또한 철저하게 산업화된 것이 현실이다.

 

요즘 사람들에게 성경의 인물 중 가장 닮고 싶은 사람을 꼽으라면 솔로몬이 수위를 차지한다. 성경의 인물에 빗대어 자녀들을 위한 기도를 할 때 우리는 서슴지 않고 솔로몬과 같이 부귀 영화를 누리는 자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성경의 저자가 솔로몬의 부귀 영화를 기록한 이유는 솔로몬이 우리 삶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솔로몬의 부와 명성을 부러워한다.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세상의 그 어느 왕보다 큰지라”(왕상 10:23).

 

실제로 솔로몬의 부와 명성은 에 달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마음에 주신 지혜를 들으며 그의 얼굴을 보기 원하여값비싼 예물을 가지고 솔로몬을 찾아왔다. 솔로몬은 모든 사람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부와 명성은 치명적인 매력을 뿜어낸다.

 

만약 솔로몬에 대한 기록이 열왕기상 10장으로만 끝났다면, 성경의 가르침은 부귀와 영화(부와 명성)’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솔로몬에 대한 기록을 한 장 더 할애한다. 열왕기상 11장에 기록된 솔로몬은 이전 열 장에 걸쳐 묘사되고 있는 솔로몬과 사뭇 다른 솔로몬의 모습이다.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샀던 솔로몬이 여색과 우상숭배에 빠져 결국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나라를 두 동강이 낸 주범으로 지목된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는가?

 

주극생란 낙극생비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술이 극에 달하면 난리가 나고 쾌락이 극에 달하면 슬퍼진다는 뜻이다. 이는 사마천의 <사기> 126골계열전(滑稽列傳)’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고사성어이다.

 

이 성어는 전국시대 제() 나라의 종횡가 순우곤(淳于髡)의 일화에서 유래한다.

 

순우곤(淳于髡)은 제()나라 사람의 데릴사위(지위가 낮아 죄수와 거의 같은 대우를 받았다)였다. 그는 키가 일곱 자도 안 되지만 익살스럽고 변설에 뛰어나 제후들에게 자주 사신으로 갔으나 굴욕을 당한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제위왕(齊威王)8년에 초()나라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제나라를 쳐들어왔다.

 

제나라 위왕은 순우곤을 사자로 삼아 조()나라로 가서 구원병을 청하게 하였고, 조나라 왕은 정예 병사 10만 명과 전차 천 승()을 주었다. 초나라는 이 말을 듣고 밤중에 군대를 이끌고 가 버렸다.

 

위왕은 몹시 기뻐하여 후궁에 주연을 준비하여 순우곤을 불러 술을 내려주며 이렇게 물었다.

 

“선생은 어느 정도 마셔야 취하시오?”

 

순우곤이 대답했다.

 

“신은 한 말을 마셔도 취하고 한 섬을 마셔도 취합니다.”

 

위왕이 말했다.

 

“선생이 한 말을 마시고 취한다면 어찌 한 섬을 마실 수 있소? 그 이유를 들려줄 수 있소?”

 

순우곤이 대답했다.

 

“대왕이 계신 앞에서 술을 내려 주신다면 법을 집행하는 관리가 곁에 서 있고 어사(御史; 문서와 기사를 담당하는 관리)가 뒤에 있어, 신은 몹시 두려워하며 엎드려 마시기 때문에 한 말을 못 넘기고 바로 취합니다.

 

만일 어버이에게 귀한 손님이 있어 신이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꿇어앉아 앞에서 모시며 술을 대접하면서, 때때로 끝잔을 받기도 하고 여러 차례 일어나 술잔을 들어 손님의 장수를 빌기라도 하면 두 말을 못 마시기 전에 즉시 취합니다. 만약 사귀던 친구를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뜻밖에 만나면 너무 기뻐 지난날 일을 이야기하고 사사로운 생각이나 감정까지 서로 터놓게 되어 대여섯 말을 마시면 취합니다.

 

만약 같은 고향마을에 모여 남녀가 한데 섞여 앉아 서로 상대방에게 술을 돌리며 장기와 투호 놀이를 벌여 짝을 짓고 남자와 여자가 손을 잡아도 벌을 받지 않고, 눈이 뚫어져라 쳐다보아도 금하는 일이 없으며, 앞에 귀걸이가 떨어지고 뒤에 비녀가 어지럽게 흩어지는 경우라면 신은 이런 것을 좋아하여 여덟 말쯤 마셔도 약간 취기가 돌 뿐입니다.

 

그러다가 날이 저물어 술자리가 끝나면 술 단지를 한군데로 모아 놓고 자리를 좁혀 남녀가 한자리에 앉고 신발이 뒤섞이고 술잔과 그릇이 어지럽게 흩어지고(杯盤狼藉) 마루 위의 촛불이 꺼집니다. 주인은 저만을 머물게 하고 다른 손님들을 돌려보냅니다. 이윽고 엷은 비단 속옷의 옷깃이 열리는가 싶더니 은은한 향내가 퍼집니다. 이때 신의 마음이 몹시 즐거워 한 섬은 마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술이 극도에 이르면 어지럽고 즐거움이 극도에 이르면 슬퍼진다(故曰酒極則亂,樂極則悲).’라고 하는데 모든 일이 이와 같습니다. 사물이란 지나치면 안 되며, 지나치면 반드시 쇠합니다.”

 

이러한 말로(위왕에게) 풍간하였다. 위왕이 말했다. “좋은 말이오.”

 

위왕 그 뒤로 밤새워 술 마시는 것을 그만두고, 순우곤에게 제후들 사이의 외교 업무를 맡겼다. 왕실에서 주연이 있을 때마다 순우곤이 항상 왕을 모셨다.

<출처: 김영수의 [나를 세우는 옛 문장들]>

 

무엇이든지 극에 달하면 슬퍼진다. 그래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도 있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은 것이라는 뜻이다. “과유불급"의 출전은 《논어(論語)》〈선진편(先進篇)〉에 공자(孔子)와 제자 자공(子貢) 간의 문답에서 찾을 수 있다.

 

자공이 공자에게 다른 제자인 자장(子張)과 자하(子夏)에 대해 물었다. "(:자장의 이름)와 상(:자하의 이름)은 누가 어집니까?"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사는 지나치고 상은 미치지 못한다."하니, 다시 자공이 반문하기를 "그럼 사가 낫다는 말씀입니까?"하니, 공자는 다시 답하기를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은 것이다." 子貢 問師與商也 孰賢,  子曰 師也 過 商也 不及,  曰 然則師愈與,  子曰 過猶不及.

 

무엇이든지 극에 달하면 슬퍼지고, 지나친 것은 모자라는 것만 못하다. 모자라고 도달하지 못한 것이 그 사람을 망하게 하지는 않지만, 극에 달하고 지나친 것은 그 사람을 망하게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솔로몬의 부와 명성에 관한 이야기는 쉽게 기억하면서, 솔로몬이 썼다고 알려진 성경의 다른 이야기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 최고의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에 대한 다른 이야기는 전도서에 등장한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도서 1:2-3).

 

무엇이든지 극에 달아 슬퍼지는 것, 무엇이든지 지나쳐 인생을 망쳐버리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멈춤과 나눔에 있다. 인간은 자신이 관리할 수 있고 소화할 수 있는 분량 외에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축적하는 것은 모두 욕심이다. 신약성경의 야고보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1:15).

 

우리가 사는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경제체제는 인간을 무한경쟁으로 내몰아 모두가 욕심가운데 살게 만든다. 멈추고 나누는 것보다 끝까지 질주하고 남들이 따라 올 수 없는 부를 축적하는 것을 미덕인 양 선전한다. 나누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일단 쌓아놓고 보는 게 먼저라는 식이다. 기부금도 일단 쌓아 놓고 남들이 따라올 수 없는 정도의 기부금을 내야 경쟁에서 온전히 이긴 사람처럼 대우 받는다. 그러니 현대인의 인생이 얼마나 피곤한가. 서로가 서로를 못살게 구는 것을 넘어 자신이 자기를 못살게 군다. 요즘 서점에서 가장 잘 나가는 주제의 책은 단연 자기계발서이다. 자신이 잘나가지 못하는 이유를 결국 자기 자신이 아직 덜 계발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계발만 더 잘 되면, 무한경쟁에서 승자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사람들 사이에 팽배해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되고, 나 자신 또한 나에게 극복해야 할 적이 되어 생명을 향유하지 못하고 생명을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소진하고 마는 불행한 인생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성경과 교회는 어떠한 메시지를 던져주어야 할까? 바로 멈춤과 나눔의 가치를 통해 무한경쟁으로 치닫고 있는 이 사회에서 희생당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깨닫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 성경의 멈춤과 나눔의 메시지는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건네준 빨간약과 같은 역할을 한다. 현실을 직시할 수 있게 하는 메시지, 그 메시지를 통해 가상현실(무한경쟁)에서 나와 자신의 삶을 영유할 수 있게 해주는 일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이유는 바로 멈춤과 나눔의 가치를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특별히 모세 오경 전반에 걸쳐 강조되는 율법의 핵심은 안식일과 희년 사상인데, 그것이 담고 있는 뜻은 멈춤과 나눔의 가치에 있다. 아무리 좋은 것도 멈추지 못하고 나누지 못하면 그 가치가 상실된다. 아무리 나쁜 일도 일단 멈추는 데서부터 다시 회복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주일을 통해서 안식일의 가치를 실현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것이 멈추는 순간이다. 부활은 모든 것이 새롭게 되는 순간이다. 우리가 매주일 교회에 모여 작은 부활절로서의 주일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담긴 멈춤과 나눔의 가치를 우리 삶 속에서 구현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세상의 변혁(변화)에 대한 이야기이지 그저 신기하고 놀라운 동화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멈추지 못하는 것만큼 불행하고 잠 못 이루는 일이 어디에 있는가. 나누지 못하는 것만큼 가난한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멈춘다는 것은 인간 자신의 실존을 깨닫는 일과 같다. 영어단어 ‘handful’손으로 움켜쥘 만큼의 뜻을 가지고 있다. ‘손으로 움켜쥘 만큼많다는 뜻이 아니라 적다는 뜻이다. 인간이 움켜쥘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다. 인간의 위()는 자신의 주먹만하다. 주먹만한 위에 채워 넣을 수 있는 음식의 양은 그야말로 ‘handful’하다. 그러므로 많이 먹으면 탈이 나지만 적게 먹으면 오히려 편안하다.

 

좋은 것뿐만 아니라 해로운 것도 손으로 움켜쥘 만큼만 하다가 멈춰야 한다. 그래야 몸이 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인생을 망치지 않을 수 있다. 미움, 다툼, 시기, 질투, 이러한 것도 극에 달하면 결국 자기 몸만 상하고 자기의 인생과 상대방의 인생을 망치고 만다. 우리는 복음서의 이 가르침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5:23-24).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절대로 나누지 못한다. 나눔은 마음이 풍요로운 자가 누리는 생명의 향연이요, 모든 피조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죽기까지 자기 자신을 내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자기 삶 속에 구현하는 놀라운 신앙 행위이다.

 

어느 누군가가 혼자만 돈을 많이 벌어 하나님께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헌금을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 어느 누군가가 혼자만 돈을 많이 벌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기부금을 많이 내어 놓을 들 무슨 소용이 있나. 물론 그렇게라도 공공선을 이루는 것은 그렇게 나무랄만한 것은 못되지만, 기독교의 가르침은 그렇게 차선책을 택하도록 이끌지 않고, 삶 자체가 나눔의 삶이 되도록 도전한다. 가령, 회사의 사장이 사장이니까 자기 자신이 돈을 많이 벌어 교회에 헌금 많이 하고 사회에 기부금을 많이 해서 자기 혼자만 영광 받는 자리에 서지 말고, 자기 자신이 좀 덜 가져가더라도 직원들에게 수익을 더 분배하여 직원들과 그 기쁨을 나누는 것이 궁극적인 나눔의 삶이라는 것이다. 다른 이들보다 많이 벌어 혼자만 기쁘고 즐거워 하나님께 많이 드리고 사회에 기부 많이 하는 자가 되지 말고, 모든 이들이 그렇게 되도록 처음부터 수익분배의 구조를 철저한 나눔의 구조로 혁신해야 한다는 뜻이다.

 

풍요로운 듯하면서도 인생이 슬픈 이유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극에 달하도록 우리 모두를 무한경쟁에 치닫게 하는 이 세상의 불의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우리가 왜 주일을 지키는 지, 왜 우리는 예배하는 자들로 하나님께 나오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무엇이든지 극에 달하면 슬퍼지는 법이다. 극에 달하면 생명의 가치를 상실하고 결국 상대방을 소모하고 자기 자신을 소모하여 소멸될 뿐이다. 상대방과 자기 자신을 소멸하는 일에서 해방되는 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멈춤과 나눔의 가치를 회복하는 데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자, 그 능력이 우리 삶 속에 실제적으로 나타나기를 바라는 자, 그런 자는 주일(안식일)과 예배의 가치가 무엇인지 온전히 깨닫고 거기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할 줄 안다. 주일과 예배의 가치는 멈춤과 나눔에 있다. 멈추라, 그리고 나누라. 그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이 우리가 생명을 누리는 길이다.

 

www.columbuskmc.org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함부로 감사하지 말라  (0) 2015.05.25
기쁨의 향연  (1) 2015.05.21
나는 요셉이라 (구원의 신비)  (1) 2015.05.14
하나님 같은 어머니, 어머니 같은 하나님  (0) 2015.05.10
이것이냐 저것이냐  (0) 2015.05.07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