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5. 5. 14. 05:37

나는 요셉이라 (구원의 신비)

창세기 55

(창세기 45:1-15)

 

하나님은 역전의 용사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이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방식으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이다.

 

요셉은 곤경에 처한 동생 베냐민을 구명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으려 하는 형들의 모습을 보고 이제 자기 자신의 정체를 그들에게 밝혀도 되는 시점에 왔다고 생각했다. 이는 마치 물이 서서히 뜨거워지다 임계점에 도달해 수증기를 내뿜으며 끓어 오를 때와 같다. 임계점에 도달한 물이 보글보글 끓어 오르며 공중에 수증기를 풀풀 내뿜듯이, 요셉은 감정의 임계점에 도달해 그 동안 꾹꾹 참았던 눈물을 펑 터뜨린다. 요셉의 울음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바로의 궁중 사방에 퍼져나갔다.

 

꺼이꺼이 울면서 요셉은 자기 자신의 정체를 형들에게 드러낸다. “나는 요셉이라 (I am Joseph!).” 요셉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며, 형들에게 가장 먼저 아버지의 안부를 묻는다.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자신들의 눈 앞에 있는 존재가 요셉이라는 것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형들은 요셉이 자기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둥절해서 아무런 반응도 못한다.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인간의 속성 중 하나는 자기 자신에게 익숙한 것들에게만 오감을 열어 놓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면 인간은 그것을 감지하지 못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떤 이에게는 인지되고 어떤 이에게는 인지되지 못한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된 뒤 허탈한 심정으로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부활하신 예수는 집으로 돌아가는 그들과 함께 걸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그런데 두 제자는 자신들과 함께 걷고 있는 존재가 부활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그들의 오감은 부활의 주님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이 부활의 주님을 인식하게 된 것은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성만찬을 행하며 그들의 오감을 열어주셨을 때이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24:30-31).

 

신앙이란 닫힌 오감(감각들)을 여는 일이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영안을 연다라고 말한다. 처음 인간은 오감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 타락이란 오감이 닫혀 버린 것을 말한다. 오감이 닫혀 버린 타락한 인간(죄인)은 더 이상 진리(하나님)를 보지 못하고,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신들이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매우 편협한 존재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해방자인 것은 우리의 오감을 열어 하나님을 다시 볼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오감을 회복한 신앙인 요셉의 고백을 들어보자.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5). 이것은 평범한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신앙 고백이 아니다. 형들에게 두 배로 복수를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요셉은 형들을 안심시키며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고 신앙 고백한다.

 

신앙은 삶의 해석학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이는 신앙(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말을 했지만, 그것은 신앙을 왜곡한 말이다. 물론, 신앙을 아편으로 잘못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어디나 있는 법이다. 일례로 부엌 칼은 요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사람을 죽이는데 쓰는 사람도 있다. 부엌 칼은 원래 음식을 만들어 생명을 살리는 데 써야 온전한 것인데, 반대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데 쓰는 사람은 부엌 칼의 용도를 심하게 훼손하는 것이다. 이처럼, 신앙을 심하게 훼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들이 바로 신앙을 아편처럼 사용하는 이들이다. 참 불쌍한 사람들이다.

 

신앙은 오감을 열어 그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역사를 분별해 내는 능력을 말한다. 요셉의 스토리를 알거니와, 요셉과 같은 인생을 산 사람이 있다면 그 마음 속에 무슨 기쁨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 요셉과 같은 삶을 산 사람이 있다면, 요셉처럼 권력을 쥐게 되었을 때 십중팔구 그 권력을 이용하여 원수 갚는 데 썼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신앙을 통하여 오감을 열어 젖힌 참된 신앙인이었다. 그야말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불행한 인생을 불행으로 보지 않고,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로 보았다. 요셉은 타락한 오감을 제대로 회복한 온전한 인간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모름지기 신앙이란 바로 이렇게 새로운 피조물로의 새창조 역사를 보이는 법이다.

 

요셉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이렇게 밝힌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7). 여기서 후손(쉐에리트)’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쉐에리트남은자, 남은 것, 살아남은 자의 뜻을 가지고 있다. , ‘후손은 극심한 기근에서 살아남은 자를 뜻한다. <생명 보존과 후손> 모티브는 구약성경 전반에 걸쳐 흐르는 가장 중요한 핵심 주제 중 하나이다. 노아의 홍수 이야기도 이 모티브이고, 요셉도 결국 이 모티브를 가진 이야기이다. 이후 출애굽 이야기도 같은 모티브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과 최대 관심사가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참 신앙인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가 무엇인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생명을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이 구원 받았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깨달았다는 뜻이다. 타락한 구원을 갈망하는 자는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못하고, 그저 자기 자신의 극대화를 위한 욕심을 채울 뿐이다. 하나님이 생명이시고, 생명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자로의 거듭남이 바로 구원이다. 이러한 거듭남 없이 구원을 논하는 것은 전혀 무의미하다.

 

요셉이 형들과 화해를 이루기 위해 오랜 시간 형들을 괴롭혔던 이유는 형들에 대한 복수를 실행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헌신짝처럼 여기던 형들이 얼마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존재로 바뀌었는가를 보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요셉은 생명을 헌신짝처럼 여기는 형들에 의해서 버림 받았다. 그런, 요셉은 생명을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 받았다. 또한 베냐민은 생명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비로소 깨달은 형들에 의해서 목숨을 구할 수 있었고, 형들 자신 또한 그렇게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난 것을 통해서 자신들의 생명 또한 구원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요셉이라고 자신의 정체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형들에게 요셉은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설명하며 자기 자신의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끔 형들의 오감을 열어젖히는 작업을 한다. 요셉은 결정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입이라(12).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비로소 깨달은 형들은 이제 그 동안 막혀 있었던 오감을 열어 현재 자신들 앞에 펼쳐지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소식을 받아 들인다. “자기 아우 베냐민을 목에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고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14-15).

 

구원 받지 못한 자, 생명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자, 생명이 가장 중요한 인간의 가치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자, 진리(하나님)를 향해 오감이 열리지 못한 자, 여전히 타락한 자, 죄인은 생명을 헤치는 일에 자신의 에너지를 쏟는다. 형들이 그랬다.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어떻게 하면 요셉의 생명을 빼앗을까에만 골몰했다. 그리고 그 기회가 왔을 때 그들은 생명을 무참히 짓밟았다.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동생의 울부짖음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은 그 울부짖음을 전혀 상관하지 않고 둘러 앉아 점심 도시락을 까먹었다. 양심에 아무런 가책이 없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라고 외쳤던 군중들도 그랬다. 그들은 예수가 누군지 몰랐다. 그들은 예수를 눈에 가시처럼 여기며 그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자들에게 편승하여 사납게 외쳤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라!” 그들은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가 마땅히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아무도 예수가 누구인지 몰랐다. 로마 총독 빌라도도 예수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는 예수에게 이렇게 물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알고 물은 것이 아니라, 모르고 물은 것이었다. 아니, 비웃음의 물음이었다. ‘네가 유대인의 왕 일리가 없다는 물음이었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

 

요셉이 자기의 정체를 밝히며 나는 요셉이라!”고 했을 때 형들은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예수께서 부활하여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정체를 밝히셨을 때 무덤을 찾았던 여자들은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16:8).

 

신앙은 오감을 여는 작업이다. 오감을 여는 작업은 쉽지 않다. 신앙은 한 순간에 도달하게 되는 순간이동의 장치가 아니고, 산을 오르는 지난한 과정과도 같다. 그래서 신앙을 일컬어 순례라고 하는 것이다. 신앙의 작업을 통해 오감이 열린 신앙인은 요셉이 보는 것처럼 우리 삶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보게 된다. 형들은 요셉을 죽였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살리시고 그 흉측한 죽음을 생명의 도구로 삼으셨다. 무지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일으키시고 그 흉측한 십자가를 생명과 구원의 도구로 삼으셨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구원의 신비이다.

 

그 구원의 신비는 온통 생명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신앙인은 생명을 얻게 된다. 그리고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이러한 생명의 신비를 담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방식이다. 그것을 보는 자,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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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5. 10. 12:59

하나님 같은 어머니, 어머니 같은 하나님

(이사야 66:13-14, 요한복음 15:4-5)

 

한국에서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한다. 55일은 어린이날이고, 58일은 어버이날이고, 515일은 스승의 날이다. 미국은 1365일을 어린이날로 간주하기 때문에 어린이날이 따로 없다. 미국에서는 510일을 어머니의 날로 지키고 있다. 한국에서는 어머니의 날과 아버지의 날을 함께 묶어 어버이날이라고 부르는데 반해, 미국은 어머니의 날과 아버지의 날을 따로 지키고 있다. 이것은 문화의 차이가 반영된 것이다. 한국은 유교문화가 강하기 때문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구분하지 않으려 한다. 어머니보다 아버지가 가장으로서 집안의 최고 위치에 오랫동안 군림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현재 어머니의 날과 아버지의 날을 함께 지키는 데 큰 어려움이 많다. 이혼한 가정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가정의 가치를 가장 중시하는 미국 사회에서 이혼이 가장 많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함께 며칠 상간으로 있는 것은 자녀와 부모의 관계를 다시 한 번 돌아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특별히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인으로서 부모 자식의 관계는 곧잘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로 비유되기도 한다. 우리는 평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데 익숙하지만, 실상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어머니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교리적인 고백이지, 하나님이 인간처럼 을 지닌 분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인식하는 데 있어, 우리가 인식할 수 있고 익숙한 것을 통해서 인식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 그것은 종말에나 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출애굽기 34장은 하나님을 이렇게 묘사한다. “주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리고 이사야서 42장에서는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속성을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투영시킨다면, 하나님은 아버지를 닮았는가 아니면 어머니를 닮았는가? 아마도 어머니를 닮았다고 말씀하실 분이 많을 것이다. 보통 아버지들은 자비롭지 못하고 은혜롭지 못하고 노하기를 불같이 하고 죄를 용서치 않는다. 그래서 흔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무서움이 많다. 그러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애틋한 경우가 많다. 다음은 박목월 시인의 아들이요, 서울대학교 국문과 교수를 지내신 박동규 씨의 어머니에 대한 간증이다.

 

내가 초등학교 육학년 때 육이오 전쟁이 났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집 지키고 있어> 하시고는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셨다. 그 당시 내 여동생은 다섯 살이었고 남동생은 젖먹이였다. 인민군 치하에서 한 달이 넘게 고생하며 살아도 국군은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견디다 못해서 아버지를 따라 남쪽으로 가자고 하셨다. 우리 삼 형제와 어머니는 보따리를 들고 아무도 아는 이가 없는 남쪽으로 향해 길을 떠났다. 일주일 걸려 겨우 걸어서 닿은 곳이 평택 옆 어느 바닷가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인심이 사나워서 헛간에도 재워주지 않았다. 우리는 어느 집 흙담 옆 골목길에 가마니 두 장을 주워 펴놓고 잤다.

        어머니는 밤이면 가마니 위에 누운 우리들 얼굴에 이슬이 내릴까봐 보자기로 씌어 주셨다. 먹을 것이 없었던 우리는 개천에 가서 작은 새우를 잡아 담장에 넝쿨을 뻗은 호박잎을 따서 죽처럼 끓여서 먹었다. 담장 안집 여주인이 나와서 우리가 호박잎을 너무 따서 호박이 열리지 않는다고 다른데 가서 자라고 하였다. 그날 밤 어머니는 우리를 껴안고 슬피 우시더니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남쪽으로 내려갈 수 없으니 다시 서울로 돌아가서 아버지를 기다리자고 하셨다.

        다음날 새벽 어머니는 우리들이 신주처럼 소중하게 아끼던 재봉틀을 들고 나가서 쌀로 바꾸어 오셨다. 쌀자루에는 끈을 매어서 나에게 지우시고, 어머니는 어린 동생과 보따리를 들고 서울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평택에서 수원으로 오는 산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가고 있을 때였다.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 청년이 내 곁에 붙으면서 <무겁지. 내가 좀 져 줄게> 하였다. 나는 고마워서 <아저씨 감사해요>하고 쌀자루를 맡겼다.

        쌀자루를 짊어진 청년의 발길이 빨랐다. 뒤에 따라 오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으나 외길이라서 그냥 그를 따라갔다. 한참을 가다가 갈라지는 길이 나왔다. 나는 어머니를 놓칠까봐 <아저씨, 여기 내려주세요. 어머니를 기다려야 해요>하였다. 그러나 청년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냥 따라와>하고는 가 버렸다. 나는 갈라지는 길목에 서서 망설였다. 청년을 따라 가면 어머니를 잃을 것 같고 그냥 앉아 있으면 쌀을 잃을 것 같았다. 당황해서 큰소리로 몇 번이나 <아저씨!> 하고 불렀지만 청년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 어머니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 즈음, 어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오셨다. 길가에 울고 있는 나를 보시더니 첫마디가 <쌀자루는 어디 갔니?> 하고 물으셨다. 나는 청년이 져 준다면서 쌀자루를 지고 저 길로 갔는데, 어머니를 놓칠까봐 그냥 앉아 있었다고 했다.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리고 한참 있더니 내 머리를 껴안고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에미를 잃지 않았네> 하시며 우셨다.

        그날 밤 우리는 조금 더 걸어가 어느 농가 마루에서 자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디에 가셔서 새끼 손가락만한 삶은 고구마 두 개를 얻어 오셔서 내 입에 넣어 주시고는,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아버지를 볼 낯이 있지> 하시면서 우셨다. 그 위기에 생명줄 같았던 쌀을 바보같이 다 잃고 누워 있는 나를 영리하고 똑똑한 아들이라고 칭찬해 주시다니.

        그 후 어머니에게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가 되는 것이 내 소원이었다.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도 결국은 어머니에게 기쁨을 드리고자 하는 소박한 욕망이 그 토양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때는 남들에게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바보처럼 보이는 나를 똑똑한 아이로 인정해 주시던 칭찬의 말 한 마디가 지금까지 내 삶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다.

 

부모는 자녀에게 하나님 같은 존재이다. 부모는 자녀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녀를 잘 성장하도록 도울 수도 있고, 방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플레르 펠르렝 씨의 이야기를 보자. 플레르 펠르렝은 한국계 프랑스 사람이다. 플레르는 이란 뜻인데, 참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여인이다. 그는 프랑스 문화부장관으로 자랑스런 한국인 2세이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한국계 인물로 프랑스 정계에 진출한 첫 번째 인물이다. 한국과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은 이 여성은 그러나 사실 한국으로부터 버려진 존재였다. 서울 빈민촌에서 태어난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거리에 버려졌고, 생후 3~4일쯤 됐을 때 거리에서 발견돼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6개월 여 기간 동안 보살핌을 받던 그녀는 운명적으로 프랑스의 한 평범한 가정으로 입양된다.

 

그를 입양한 프랑스 아버지는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는 기술자였고 어머니는 정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평범한 여성이었다. 평소 교육에 대한 아쉬움과 열정이 있던 이 양어머니는 딸에게 자신이 못한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어려서부터 남다른 교육열을 보였다. 그런 어머니의 바람대로, 펠르랭은 정말 이를 악물고 공부했고 결국 그녀는 남들보다 2년이나 빠른 16세 때 이미 바칼로레아(대학입학자격시험)에 합격하여 프랑스의 최고 명문 학교들을 연이어 졸업한다. 경제, 정치, 행정에 관련된 최고 학교들을 다 마친 후 결국 정치에 입문했고, 이제 프랑스 정부의 요직인 프랑스 통상장관에 이어 문화부장관에 오른 기적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어느 신문 시사에서 가져옴)

 

이처럼 부모는 아이를 버릴 수도 있고, 이렇게 잘 키울 수도 있다.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아이의 운명은 이처럼 갈린다. 그러니, 부모가 아이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

 

요즘 사회 문제로 크게 대두되고 있는 것은 아동 학대문제이다. 다음은 작년에 났던 기사다.

 

신우(가명)는 태어날 때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친가외가 모두 스무살짜리 아빠와 한살 어린 엄마의 임신과 출산을 질책했다. 환대받지 못한 어린 부부는 우는 아기를 달랠 방법을 찾지 못했다.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다툼이 일상이 됐다. 신우가 태어난 지 한달이 되던 2014 2월 어느 날, 부부는 심하게 다퉜다. "신우를 없애자"는 말을 꺼낸 건 아빠였다. "나가 있으라"는 그의 말에 엄마는 현관으로 향했다. 아빠는 우는 아이를 냉동실에 넣었다.

 

이렇게 아동 학대가 일어나 아이들이 죽는 경우의 시작은 90% 이상이 가정불화라고 한다. 부부 간의 싸움이 시발점이 되어, 결국 부모가 아이들을 화풀이 대상으로 삼아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물론 가정 불화가 일어나는 원인 중 67%경제 곤란이라고 한다. 사실 이러한 문제들은 어느 한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부부 간에 화목이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한 가정을 이루게 되기 전에는 서로 간의 사랑이 바탕이 된다. 그러다 아이를 낳으면 관심사가 아이들에게 가기 마련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생기면 아이들을 먹여 살리느라 일에 빠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모들이 놓치고 사는 것이 있다. 아이들도 중요하고 먹고 살기 위해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정을 지탱하는 요소는 아이들에 대한 사랑도, 일에 대한 열정도 아니고, 결국 부부간의 애틋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엄청난 투자를 한다. 시간도 그렇고 돈도 그렇고 아이를 낳으면 아이들에게 엄청난 투자를 한다. 그러나 실상 시간과 돈을 가장 많이 투자해야 하는 곳은 자녀들이 아니라, 부부 간의 사랑이다. 부부 간에 행복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결혼한 부부들, 아이를 둔 부부들은 자녀를 위한 희생을 인생 최대의 목표로 삼고, 인생 최대의 보람으로 삼는다. 물론 자녀를 책임져야 할 부모 입장에서는 굉장히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이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아이들은 따라쟁이라는 것이다. 아이들은 듣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보고 배운다’. 부모님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지 못했는데, 그들이 어떻게 행복하게 사는 법을 배우겠는가? 부모님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행복하게 사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그러니, 너무 자식들을 위해 희생만 하지 말고, 부부 간의 행복을 위해 더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시라.

 

우리는 성경에서 어머니 같은 하나님을 발견한다. 그 중 대표적인 성경 구절 몇 군데만 함께 보자.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편 121:3-4)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이사야 49:15)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너희가 이를 보고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의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의 원수에게 더하리라”(이사야 66:13-1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태복음 23:37).

 

1930년에 양주동 박사가 지은 어머니 마음라는 노래의 가사를 보자.

1: 나실제 괴로움 다잊으시고 기를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2: 어려선 안고 업고 얼려 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마음 앓을사 그릇될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 위에 주름이 가득 땅 위에 그 무엇이 높다 하리오 어머님의 정성은 지극하여라

3: 사람의 마음 속엔 온가지 소원 어머님의 마음 속엔 오직 한 가지 아낌없이 일생을 자식 위하여 살과 뼈를 깎아서 바치는 마음 이 땅에 그 무엇이 거룩하리오 어머님의 사랑은 그지없어라

 

하나님의 모습은 이렇게 어머니를 닮았다. 우리가 부모의 역할을 제대로, 성실하게, 온 마음을 다해 할 수 있는 길은 다른데 있지 않고, 하나님을 아는데 있다. 하나님을 알면 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되고, 그것은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어머니의 마음으로 자녀를 돌보고 세상을 돌보는 데 필연적으로 작용하게 되어 있다. 신앙생활은 단순히 예수 잘 믿고 구원 받아 천국 가는 것에 있지 않다.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데 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면 이미 우리는 천국에 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처럼사랑이다.

 

어머니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면, 우리의 삶 구석구석이 얼마나 아름답게 변하겠는가? 어머니 같은 하나님의 사랑은 내 자식만 사랑하는 사랑이 아니라, 남의 자식도 내 자식처럼 사랑하는 마음이다. 어머니 같은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는 선한 사랑에게만 베풀어진 것이 아니라, 악한 사람에게도 베풀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모두에게 햇볕을 비춰주신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자기가 제일 중요한 사회이다. 자기를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사회이다. 자기의 감정이 제일 중요한 사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어머니 같은 하나님을 닮아 간다는 것은 더불어 어울려 사는 사회를 만드는 데 헌신한다는 뜻이다. 더불어 어울려 살려면 서로가 서로를 위해 자기를 제한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남을 위해 너무 자기 자신을 희생만 시키는 것도 건강하지 못하고, 자기를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것도 건강하지 못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충분히 배려할 수 있는 자기조절능력을 갖출 때, 사회는 아름답게 변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요한복음 15장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15:4-5).

 

하나님 같은 어머니가 되어, 또는 하나님 같은 아버지가 되어 자녀를 돌보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돌보려면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로 되지 않는다. 요한복음의 말씀처럼, 포도나무 가지인 우리들이 포도나무이신 하나님께 붙어 있을 때, 그때 비로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혹시, 삶에서 하나님 같은 어머니로서, 아버지로서 아름다운 열매, 사랑의 열매, 선한 열매를 맺는 것이 잘 안 되고 있다면, 나는 지금 어디에 붙어 있는가를 잠시 멈춰 서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게 중요하다. 우리가 하나님 같은 어머니, 아버지로서 이 세상에서 많은 열매를 맺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결정적인 차이는 우리가 얼마나 포도나무 되신 하나님께 붙어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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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5. 7. 06:50

이것이냐 저것이냐

창세기 54

(창세기 44:1-34)

 

그리스 신화에 오이디푸스 이야기가 있다. 그에게는 무시무시한 신탁이 내려졌는데, 장차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거라는 신탁이었다. 이 신탁 때문에 오이디푸스는 가족들에게 버림 받고, 또한 성장하여 방황하게 된다. 그런데, 자신의 고향 테베로 가는 중 그 신탁이 실현된다. 오이디푸스는 길에서 만난 자신의 아버지 라이오스와 논쟁 끝에 그가 자신의 아버지인줄도 모르고 그를 죽이고, 테베 왕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어머니인줄도 모르고 이오카스테와 결혼하여 자식들을 낳고 산다.

 

신탁대로 아버지를 죽이고 테베로 오는 중 테베의 오랜 골칫거리인 스핑크스를 만난 오이디푸스는 그 요상한 괴물과 씨름하게 된다. 스핑크스는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마다 수수께끼를 냈는데, 그의 수수께끼는 이것이었다. “아침에는 네 다리로, 낮에는 두 다리로, 저녁에는 세 다리로 걷는 짐승이 무엇이냐?” 이 질문을 맞히는 사람은 살아서 스핑크스의 앞을 통과할 수 있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스핑크스에게 잡아 먹혔다. 오이디푸스 또한 이 무시무시한 수수께끼 앞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오이디푸스는 수수께끼를 내놓고 음흉한 웃음을 짓고 있던 스핑크스에게 정답을 내 놓는다. “그것은 인간이다!” 오이디푸스가 정답을 맞히자 스핑크스는 수치심에 괴로워하며 자결한다. 그러나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오이디푸스 자신에게 내려진 또 다른 신탁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중에 오이디푸스는 신탁대로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 것을 알자 어머니이자 부인인 이오카스테가 자결해 죽고 난 뒤 그녀가 하던 브로치로 눈을 찔러 스스로 장님이 된다. 장님이 된 오이디푸스는 평생 지팡이에 의지하며 살게 된다.

 

“아침에는 네 다리로, 낮에는 두 다리로, 저녁에는 세 다리로 걷는 짐승이 무엇이냐?”는 스핑크스의 질문 또한 심오한 것이다. 스핑크스는 사자의 몸에 인간의 얼굴, 독수리의 날개와 늑대의 발톱을 갖고 있었다. 즉 스핑크스는 둘이면서 셋, 셋이면서 넷, 넷이면서도 하나의 존재였다. 이것은 인간의 본질을 형상화하고 있는 모습으로 인간의 본질 자체가 수수께끼라는 뜻이다. 오이디푸스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맞혔을 때 스핑크스는 자기 자신만이 알고 있던 인간의 비밀을 오이디푸스도 꿰뚫고 있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껴 자살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스핑크스의 착각이었다. 정답을 맞히긴 했지만, 오이디푸스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가 인간의 본질을 알았다면, 자기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비극적인 일들에 대해서 어떠한 조치를 취했을 것이고, 그렇게 자기 자신의 눈을 상하게 하여 세상을 보지 못하는 지경으로 자기 자신을 망가뜨리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눈에 비수를 꽂으며 의식을 잃었던 오이디푸스가 정신을 차리고 한 첫마디는 놀랍게도, “, 빛이여!”였다. 눈이 없는 사람이 빛이라니, 신하들이 무슨 의미인지 묻자 오이디푸스가 대답했다. “세상의 눈을 가진 그대들은 이 빛을 보지 못하리. 세상의 눈을 지닌 그대들은 이 빛을 알지 못하리.” 그는 비로소 눈이 먼 뒤에 인간의 본질을 깨닫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인생은 참 알 수 없다. 시기심에 불타 노예상에게 팔아버렸던, 그래서 어딘가에서 굶주림과 학대에 못 이겨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동생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 자신들 앞에서 이렇게 호령하게 될 거라는 것을 야곱의 아들들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요셉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의 울부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 앞에 이렇게 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으로 우뚝 서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요셉은 자신들 앞에 나타난 형들에게 자기의 신분을 곧바로 밝히지 않고, 계속해서 시험 거리를 던져주며 형들과의 화해를 향해 한걸음씩 나아간다. 화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화해는 준비된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화해를 청해도 상대방이 화해할 수 있는 성숙한 마음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을 오히려 관계를 더 망칠 수 있다.

 

아버지가 살아계신 것을 확인하고, 동생 베냐민도 잘 성장했음을 두 눈으로 확인한 요셉은 이제 마지막 확인 작업을 한다. 그것을 위해 요셉은 형제들에게 함정을 놓는다. 요셉은 청지기에게 시켜 양식을 각자의 자루에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채우고 각자의 돈을 그 자루에 넣고 또 자신이 즐겨 쓰는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 아귀에 넣고 그 양식 값도 함께 넣으라고 한다. 그리고, 형제들이 길을 떠나 얼마큼 갔을 때 그들을 따라 가서 너희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 이것은 내 주인이 가지고 마시며 늘 점치는 데 쓰는 것이 아니냐며 은잔이 없어진 것에 대해서 추궁하라고 시킨다.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고 싶었던 형제들은 자신들 중 어느 누구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오면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내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고 맹세한다. 그런데, 자루를 하나씩 풀어나가자 은잔이 발견된 자루는 베냐민의 자루였다. 그러자 형제들은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들이 옷을 찢고 각기 짐을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 가니라”(13).

 

요셉은 왜 이런 계략을 꾸몄을까? 이 계략을 통해서 무엇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형들의 반응 (특히 레아의 아들들)을 보기 위함이었다. 베냐민을 곤경에 처하게 만든 뒤, 형들이 베냐민을 향해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예전에 형들(레아의 아들들)은 시기 질투에 사로잡혀 곤경에 처한 자신들의 배다른 동생 요셉을 헌신짝 취급하며 노예상에게 팔아 버렸다. 만약 아직까지 형들이 그때와 꼭 같은 마음을 가지고, 동생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요셉 쪽에서 화해를 청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런 형들과 화해한 들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요셉은 확인하고 싶었다. 과연 곤경에 처한 베냐민을 버리고 갈 것인가? 아니면 베냐민을 구하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한 것인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가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서게 한 무시무시한 것이었던 것처럼 요셉의 계략 또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요셉이 던진 이 인생의 수수께끼에 형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화해가 이루어질 것인가, 아니면 요셉도 형들처럼 그들의 인생을 죽음에 처하게 할 것인가 판가름 나게 된다.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냐 저것이냐, 형제들의 반응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는 순간이다.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오자 형제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요셉의 거처로 되돌아 온다. 자신들의 맹세에 따라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된 베냐민을 구명하기 위해서이다. 형제들을 대표해서 유다는 요셉에게 나아가 베냐민 구명을 위한 탄원을 한다. 유다의 탄원은 구구절절하다. 유다는 아버지 야곱이 아들 한 명(요셉)을 잃고 얼마나 슬픈 세월을 보냈는지, 그리고 베냐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만약 양식을 구하기 위해 애굽의 총리대신의 요청대로 어쩔 수 없이 함께 데리고 온 베냐민을 아버지에게로 다시 못 데려가는 일이 생기면 아버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며 간절히 탄원한다.

 

요셉은 베냐민을 구명하기 위하여 저토록 구구절절하게 탄원하는 형들의 모습을 보면서 솟구쳐 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낸 계략을 통해 형들이 그 동안 얼마나 성숙해졌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유다는 자기를 희생하더라도 끝까지 동생 베냐민과 아버지를 지켜내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이 원래 형제가 가져야 할 따뜻한 마음 아니었던가?

 

화해는 마음과 마음의 재결합이다. 화해는 상대방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다시 불타오르는 것이다. 요셉은 형들에게서 그 옛날 시기와 질투 때문에 자신을 미워하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들의 마음 속에서 무르익은 성숙한 마음, 즉 아버지와 형제를 돌보고 자기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더 큰 가치를 위해 자기 자신을 포기할 줄 아는 책임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물었던 스핑크스의 질문에 인간으로서 인간다운 대답을 통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오이디푸스처럼, 형들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인간다움을 견지하게 되었을 때라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하리라고 외쳤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다움이 인간을 구원할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 앞에서 우리의 나아갈 길은 인간다움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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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4. 16. 04:35

배수진

창세기 52

(창세기 42:29-43:14)

 

애굽에 양식을 구하러 갔던 야곱의 아들들이 돌아온다. 일단 양식을 구해 오는 것에는 성공을 한다. 그러나 큰 문제가 발생한다. 우선 둘째 아들 시므온이 함께 돌아오지 못한 채 볼모로 애굽의 감옥에 갇혀 있다. 그리고 양식 자루 속에는 돈뭉치가 고스란히 들어 있어서 영락 없이 사기꾼으로 몰린 위기에 처해 있다. 마지막으로 애굽의 총리는 시므온을 구하고 양식을 또 얻기 위해서는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올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야말로 어려움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찾아 온 것이다. 이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양식을 구해 돌아온 아들들은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아버지 야곱에게 자세하게 말해준다. 애굽에서 벌어진 모든 일을 들은 야곱은 비탄에 잠겨 통곡한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42:36). 부모에게 자신의 죽음보다 더한 아픔은 자식을 잃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부모는 죽지 못해 산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이미 죽은 것처럼 산다. 자기 목숨보다 귀한 자식을 잃었는데 무슨 낙이 있겠는가.

 

야곱은 그렇게 살았다.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낳은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고 야곱은 죽은 것처럼 살았다. 그런데 거기에 또 다른 괴로움을 얹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둘째 아들 시므온도 잃게 생겼고, 막내 아들 베냐민도 잃게 생겼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고통을 감지한 장남 르우벤이 나선다. 그는 베냐민을 데리고 가서 시므온도 찾아오고 양식도 구해오고 베냐민도 도로 데리고 오겠다고 말한다. 만약 그 일에 실패하면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쩐지 야곱은 장남 르우벤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추측 건데, 르우벤은 빌하와의 간통 사건 때문에 아버지 야곱의 신뢰를 잃어버린 것 같다(53:22, 49:4). 사람은 기본적으로 아무리 옳은 말이어도 신뢰하지 않거나 싫어하는 사람의 말은 듣지 않는 법이다.

 

해결책에 대한 뾰족한 수가 없는 상태에서 시간은 흐른다. 그리고 기근은 계속 심해지고, 애굽에서 얻어온 양식마저 떨어진다. 이제 다시 본격적으로 살 궁리를 해야 할 시간이 다가 온 것이다. “그들이 애굽에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오라”(43:2).

 

아버지 야곱의 이 말에 이번에는 넷째 아들 유다가 나선다. 베냐민을 데려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이다. 유다는 베냐민과 함께 가지 못하면 절대로 양식을 얻을 수 없을 거라고 애굽의 주인이 말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야곱은 괴로워한다.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또 다른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말하여 나를 괴롭게 하였느냐”(43:6).

 

유다는 필사적으로 아버지 야곱을 설득한다. 아버지 야곱의 생명뿐만 아니라, 아들들의 생명, 그리고 아들들의 가족들의 생명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베냐민과 함께 양식을 구하러 가는 것뿐이라고 유다는 말하며 아버지 야곱을 설득한다. 그러면서 아버지 야곱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자기 자신이 담보가 될 것과 만약 베냐민을 다시 데려오지 못하면 아버지 앞에서 영원히 죄인으로 살겠다고 제안한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결단을 재촉한다. “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벌써 두 번 갔다 왔으리이다”(43:10).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야곱은 유다의 설득에 동의한다. 그러면서 그냥 가지 말고, 그 옛날 형 에서의 마음을 달랬던 것처럼, 예물을 가져 갈 것과 돈을 두 배 더 가져갈 것을 지시한다.

 

여기에는 배수진을 치는 삶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배수진이란 물을 등진 진지(陣地)라는 말로, 어떤 일에 죽음을 각오하고 대처하는 것을 뜻한다. 배수진을 치고 싸울 때 이길 수 있다는 뜻이다.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하여 배수진을 친다. 르우벤은 자신의 두 아들의 목숨을 배수진으로 치고 아버지를 설득하고, 유다는 자신의 목숨과 평생 죄인의 낙인을 배수진으로 치고 아버지를 설득한다. 결국 야곱은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아들 베냐민을 배수진으로 치고 양식을 구하는 일에 협조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 속에는 보이지 않는 배수진이 한 개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가족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베냐민을 보내는 것인데, 사실 베냐민을 보낸다는 것이 곧 베냐민의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야곱은 그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할 뿐이다.

 

겉으로 보기에 야곱은 베냐민을 배수진으로 삼고 있는 것 같지만, 그가 베냐민을 보낼 수 있었던 궁극적인 이유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믿음을 지니게 되는 과정은 그렇게 빨리 일어나지 않는다. 인간은 생득적으로 이런 저런 인간적인 방법을 먼저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다 결국 도달하게 되는 경지가 신앙이다.

 

야곱은 베냐민을 보내기로 결정하면서 이런 기도를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43:14).

 

여기서 전능하신 하나님(엘샤다이)’이라는 칭호는 아브라함에게 처음 계시된 것이고(17:1), 이삭이 야곱을 축복할 때도 사용했고(28:3), 야곱에게도 계시된 이름이다(35:11). 야곱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한 적이 있다. 밧단아람에서 돌아올 때 에서를 만나기 전에 야곱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했다.

 

야곱에게 있어서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와 늘 함께하신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호칭이었다. 야곱이 형 에서의 보복을 피해 집을 떠날 때 아버지 이삭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들 야곱에게 복 주실 것을 빈 적이 있다(28:3). 디나의 강간 사건으로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성 사람들을 도륙한 일로 야곱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야곱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자신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소개한다(35:11). 나중에 죽음을 앞둔 야곱이 자신의 과거를 회상할 때도 자신의 인생을 전능하신 하나님이 주관하셨다고 고백한다(48:3).

 

이렇게 야곱에게 있어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기억은 좋은 것이었다. 어려울 때마다 찾아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었고, 어려울 때마다 찾을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었다. 지금, 야곱이 바로 그 전능하신 하나님을 언급하며 기도하고 있다는 것은 늘 그랬듯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일이 다 잘 될 거라는 희망이 담긴 기도인 것이다.

 

육신을 가진 우리는 한 치 앞의 일도 모른다. 잘 되고 있을 때 곧 닥치게 될 어려움을 모르고, 어려움을 겪을 때 곧 잘 되게 될 것을 모른다. 잘 될 때는 잘 되는 것에 파묻혀 지내고, 어려움을 겪을 때는 그냥 어려움에 괴로워할 뿐이다. 그런 우리의 인생은 참 가련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 즐거움이나 괴로움 가운데 조금만 눈을 돌려 전능하신 하나님을 기억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인생을 겸손하게 그리고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 ‘엘샤다이의 하나님께 기도하며, 결연한 의지를 보이며 이렇게 말하는 야곱.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과연 자식을 잃게 될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하나님을 배수진으로 치고,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한 야곱에게 꿈에도 생각 못했던 좋은 일이 일어난다. 자식을 잃게 되기는커녕 잃은 줄로 알았던 자식(요셉)까지도 도로 찾는 일이 일어난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배수진, 한 번 쳐 볼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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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4. 13. 05:15

오직 한 가지의 즐거움

(시편 33:1)

 

백지가 하나 있다. 여기에 무엇을 채우겠는가? 이렇게 생각해 보자. 여기에 백지가 하나 있다. 어떤 색깔로 이 백지에 칠하고 싶은가? 미술심리치료라는 분야가 있는데, 미술을 통해서 내면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보고 그것을 치료하는 심리치료의 일종이다. 주로 어린 아이들의 심리치료를 위해서 쓰이는데, 마음이 어두운 아이는 어두운 색깔을 써서 백지에 무엇인가를 그리고, 마음이 밝은 아이는 밝은 색을 통해서 자신을 표현한다.

 

우리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그것은 눈에 안 보이지만, 우리의 마음의 눈은 그것을 본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못 보더라도 자기 자신은 본다. 물론 자기 자신도 못 볼 때가 있다. 자기 자신이 못 보는 경우는 으로 발전된 경우이다. 그래서 전문가를 만나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한 경우가 많다.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한 경우, 자기 자신은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이 대부분이다.

 

인간은 내면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에 따라 인생을 산다. 겉으로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인간의 행복은 외적인 것에서 오지 않는다. 인간의 행복은 내면에 무엇을 품고 있느냐에 따라서 온다. 일례로, 어떤 부인이 남편에게 3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선물 받았다고 하자. 그 부인이 행복하겠는가? 행복이 3캐럿짜리 다이아몬드가 가져다 주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 부부의 관계에서 온다. , 보이지 않는 이 마음이 서로를 향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면 아무리 3캐럿짜리 다이아몬드 선물을 주고 받더라도 그들은 행복할 수 없다. 이처럼, 인간의 행복은 이 안에 무엇을 품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여러분은 무엇으로 인해 즐거움을 삼고 사시는가?

고사성어에, 군자삼락(君子三樂)이라는 말이 있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는 뜻이다.

 

전국 시대, 철인(哲人)으로서 공자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맹자(孟子)는 이렇게 말했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君子有三樂(군자 유삼락)]. 첫째 즐거움은 양친이 다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요[父母具存 兄弟無故(부모구존 형제무고)]. 둘째 즐거움은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구부려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요[仰不傀於天 俯不作於人(앙불괴어천 부부작어인)]. 셋째 즐거움은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다[得天下英才而敎育之(득천하영재 이교육지)]”. - 맹자(孟子) 진심편(盡心篇) -

 

맹자가 말하는 세 가지의 즐거움도 보면, 외적인 것이다. 부모형제의 무고,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는 삶, 그리고 제자를 키우는 것인데, 이것은 모두 외적인 것이다. 부모형제가 없는 사람은 불행한가? 사람들에게 인정 받지 못하면 불행한가? 자신을 따르는 자가 없으면 불행한가? 사실, 이런 것이 세상에서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항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인간의 행복을 절대적으로 가르지는 않는다.

 

인간에게는 이것보다 더 근본적인 즐거움이 존재한다. 식량공급과 안보, 그리고 자녀가 그것이다. 이것은 모두생명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즐거움이다.

 

식량은 생명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식량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인간은 즐거움을 모른 채 죽고 말 것이다. 먹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없다. 먹는 것이 얼마나 좋으면, “먹다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라는 말이 있겠는가? 인생의 반 이상은 먹는 즐거움에 산다. 그래서 반대로 가장 큰 불행은 굶는 것이다. 배고파서 죽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러한 식량공급도 안보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구약의 많은 이야기들이 이와 연관이 있다. 이스라엘이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께 왕을 구한 것도 결국안보때문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생명에 가장 기본적인 식량공급을 위해 힘쓰고 애쓴다. 그러나, 애쓰고 힘써서 얻은 식량을 누군가에 의해 약탈 당할 때의 허탈감이란 곧죽음과 같다.

 

가나안에 정착해서 살던 이스라엘은 열심히 식량공급을 위해 일했다. 그런데 추수가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주변 나라의 폭군들이 쳐들어와 생명과도 같은 식량을 약탈해갔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그들의 여호와 하나님께 울부짖을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안보를 강화시키기 위한 방책으로 그들은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것이 좋은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니다. 이들은 좀 더 근본적인 것을 잃어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 이들은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왕을 의지하다, 결국 주변 나라 정세를 잘못 읽는 실수를 범해 나라가 망하고 만다.

 

이에 대해 예레미야 선지자는 시적인 수사법을 동원해 이스라엘의 잘못을 지적한다. 강하고 오래된 민족이 와서 그들의 삶을 피해하게 만들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들이 네 자녀들이 먹을 추수 곡물과 양식을 먹으며 네 양 떼와 소 떼를 먹으며 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열매를 먹으며 네가 믿는 견고한 성들을 칼로 파멸하리라”( 5:17).

 

이것을 통해서 예레미야가 파멸해가는 이스라엘에게 지적하고 싶었던 것은 이들이 이렇게 무력하게 무너지는 이유는 엉성한 군사대책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를 무시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무시했던 이스라엘이 당해야 했던 대가는 엄청났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즐거움인 식량공급, 안보, 자녀 등 모든 것을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신앙이란 인간의 기본적인 즐거움을 보이지 않게 떠받치고 있는 기둥과도 같다. 우리는 단순히 식량공급, 안보, 자녀 등을 통해서 즐거움을 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을 보이지 않게 보장해 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결국 이것으로 끝난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시편 33:1).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시편 64:10).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17-18).

 

서양음악의 어머니라 불리는 헨델의 일화이다. 어느 날 헨델이 길을 가다가 가발을 잃어버렸다. 당시에 가발은 매우 중요한 물건이었다. 요즘에도 영국에서도 법관들이 재판을 할 때 가발을 쓴다. 가발은 어떤 권위를 가지게 해주는 물건과도 같다. 한참 동안 난처해 하고 있을 때 한 아름다운 아가씨가 그의 가발을 찾아주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근처 이발관에서 일하는 아가씨였다. 그 후 헨델은 고마운 마음에 그녀를 자주 찾아가게 되었다. 자주 보면 정드는 법이다. 그러나 보니 어느덧 그녀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헨델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자신의 오라토리오 메시야의 친필 악보를 선물로 주었다. 헨델은 그녀와 결혼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헨델은 다시 그 이발관을 들렀다. 그 아가씨는 헨델이 온 줄 모르고 있었다. 이발을 하러 온 손님의 머리를 만지고 있던 그녀는 무심코 다른 이발사에게 머리를 말게 악보 몇 장만 갖다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헨델은 조용히 이발관을 나왔고, 그 후로 다시는 그 이발관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헨델의 명작 메시아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여인처럼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무엇이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사실, 사람은 영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맨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 보자.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시편 33:1).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시편 64:10).

 

여기서 말하는 의인이란 옳은 일을 행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하다.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가치 있는 인생인가를 가르쳐 준다.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이것이 우리가 인생의 백지에 그려야 하는 삶이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우리 내면에 채워야 하는 색깔이다. 여호와를 즐거워하는 자, 다른 무엇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이 마음에 가득 채우고 사는 자의 삶을 보라.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17-18).

 

아무것도 없었지만, 오직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살았던 한 분을 소개한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8:20, 9:58). 그러나, 이 분은 행복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어도 행복했다. 왜냐하면, 이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웠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것을 나누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즐거움의 원천이 오직 하나님에게 있지 않고, 내가 지금 소유하고 있는 그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인데,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줄 아는 자들이다.

 

마음이 허전하거나, 혼란스럽다면,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다면, 인생이 행복하지 않다고 느껴진다면, 바로 지금이 여호와 하나님을 찾을 때이다. 그런 분은 그리스도께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으로 즐거워하는 인생에 대해서 배워야 한다. 그러면, 윤동주의 다음 시처럼,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인생을 가치 있는 일에 헌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쫓아오든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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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4. 9. 03:39

화해는 은혜다

(Art of Reconciliation)

창세기 51

(창세기 42:21-28)

 

인간에게 일어난 일 중 가장 불행한 일은 사랑의 능력을 상실한 일이다. 인간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은 대부분 서로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얼마나 불행한가!

 

한국 사회는 또다시 토막살인사건의 충격에 휩싸여 있다. 시화호에서 발견된 시신의 몸통 부분과 그 인근에서 발견된 손과 발의 신원을 확인해 본 결과 중국여성동포의 것으로 밝혀졌다. 신원확인을 토대로 범인이 검거되었는데, 범인은 다름 아닌 남편이었다.

 

남편이 밝힌 범행의 이유는 중국에 있는 계좌로 돈을 부치라는 잔소리 때문에 부부싸움을 했고 홧김에 집에 있던 둔기로 아내를 내리쳐 죽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범행을 숨기기 위해서 자신의 집 화장실에서 아내의 시신을 훼손해서 유기했다고 한다. 머리와 팔, 다리를 몸통에서 분리시켰고, 팔과 다리에서 다시 손과 발을 분리시켰다. 손과 발에서 지문을 채취하지 못하게 하려고 한 것 같다. 그렇게 훼손한 아내의 시신을 자전거로 여러 번에 걸쳐 이곳 저곳에 유기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팔, 다리를 유기하려다 잠복 중인 경찰에게 긴급 체포되었다. 아내를 죽이고 시신을 훼손 한 뒤, 태연하게 직장에 출근까지 했다고 한다. 무엇이 이 사람을 이렇게 괴물로 만들었을까?

 

거의 20년 가까이 부부로 살아온 이들의 삶이 이렇게 처참한 비극으로 끝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바로 사랑의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사랑의 능력 상실은 이렇게 비참한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는 데 그 위험성이 있다.

 

이것은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사회는 중국 동포 사회에서 이런 문제가 일어난 것 때문에 중국 동포 사회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지만, 그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그들과 거리를 두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문제가 계속 발생되고 있는 중국 동포 사회를 끌어 안아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한국 정부도, 한국 교회도 발벗고 나서야 한다.

 

이런 문제가 연속해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중국 동포)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가를 보여주는 극단적인 모습이다. 먹고 살기에 바빠 서로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고,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한 자신의 신세를 존재는 한 없이 한탄하며 울고 있다는 뜻이고, 메말라 버린 정서를 어쩌지 못해 신음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가 어디 중국 동포에게서만 일어나는 일이겠는가.

 

인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돈을 많이 벌었을 때도 아니고, 좋은 직장에 들어갔을 때도 아니고, 명문대에 합격했을 때도 아니다. 인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사랑할 때, 그리고 사랑 받을 때이다. , 사랑의 능력을 발휘할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하다.

 

사랑의 능력을 상실하면 다툼이 일어나고 불화가 일어나지만, 사랑의 능력이 회복되고 발휘되면 화해가 일어나고 평화가 일어난다.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 사랑의 능력이 상실되었을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가? 시기, 질투, 미움이 일어났다. 그래서 형들은 동생 요셉을 죽이려 했다. 르우벤의 반대와 유다의 만류로 요셉을 죽이지는 않지만, 그들은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인 행동, 즉 요셉을 애굽의 노예로 팔아버린다.

 

본문에는 사랑의 능력이 상실된 가운데 죽음과 같은 일이 벌어질 때, 그 일을 당한 당사자 요셉의 감정이 나타나 있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21). 여기서 괴로움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차라인데, 이것은 극단적인 상황을 나타내는 데 주로 쓰이는 단어이다.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성을 전멸한 후, 야곱이 그 지역 사람들이 보복할까 봐 두려워 떨면서 자신의 심정을 드러낼 때(34:30) 쓰였고,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섬긴 것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에게서 얼굴을 숨기심으로 그들이 당할 고통을 나타낼 때도 쓰였다(31:17).

 

상상해 보라. 형들에 의해서 죽음의 위기에 처해졌을 때 요셉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거룩한 심정으로 걸러서 보면 안 된다.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이야기는 상상력을 동원해서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재구성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현실성 있게 다가 온다. 요셉은 그때 형들에게 간절히 애원했다. 그리고 요셉의 마음은 극심한 괴로움에 떨었다. 사실, 그와 똑 같은 상황에 처해보지 않는 이상 그 마음을 헤아리기는 힘들 것이다.

 

화해는 사랑의 능력을 회복하여 발휘하는 것인데, 화해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첫 번째로 동일한 경험에서 오는 연민(compassion)’이 필요하다. 현재 형들의 위치는 과거 요셉의 위치로 전락한 상황이다. 형들은 곡식을 구하러 애굽에 와서 정탐꾼으로 몰려 생명을 잃을 위기에 처하게 되자, 옛날 요셉이 겪었을 괴로움을 생각하며 거기에 빗대어 자신들의 괴로움을 토로하고 있다.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21). 형들이 요셉의 괴로움을 이해하게 된 것은 바로 자신들이 그러한 괴로움을 동일하게 겪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어떠한 사건이 일어나면 그 사건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지만, 그것은 제 삼자들이 그렇게 보는 것일 뿐, 당사자들 간에는 누가 가해자인지 누가 피해자인지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기 십상이다. 사건이 일어나면 대부분 거기에는 피해자만 있지 가해자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벌인 일에 대해서 시인하기 보다는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들기 때문이다. , 인간은 자기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싶어 하지 않고 감추려 한다. 그래서 가해자는 자신을 가해자라고 드러내질 않고 오히려 자신이 피해자라며 자신을 감추려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온전히 구분되는 시점은 가해자가 피해자와 동일한 고통을 겪게 될 때이다. 가해자는 자신이 행한 극악무도한 일을 자신이 동일하게 당해보기 전까지 인식하지 못한다. 가해자가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뼈저린 반성을 하게 되는 시점은 피해자와 동일한 피해자의 입장에 처할 때이다. 형들이 동생 요셉에게 가한 일이 얼마나 잘못한 일인가를 깨닫는 순간은 바로 그들이 동생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자 당하는 괴로움(차라) 때문이다.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21).

 

 

통역을 통해서 형들과 대화를 나누었지만, 사실 요셉은 형들이 하는 말을 모두 듣고 있었다. 그들의 괴로움도 들었고, 그가 알지 못하던 사실도 알게 되었다. , 큰 형 르우벤은 자신을 죽이는 음모를 반대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안타까운 것은 큰 형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어떤 해결책을 내놓기 보다는 동생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으니라”(22).

 

자신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을 들은 요셉은 그 자리를 벗어나 외딴 곳에 가서 운다. 여기에서 화해를 위한 두 번째 과정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눈물이다.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24). 여기서 울고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바카인데, 이것은 단순한 울음이 아니라 슬픔과 기쁨을 모두 포함하는 울음을 뜻한다.

 

큰 어려움을 겪은 사람의 마음은 폭풍이 치는 바다와 같다가도 평온함이 깃든 잔잔한 바다로 바뀐다. 이것이 반복된다. 이것을 정신의학적 용어로 조울증이라고 한다. 조울증이 깊어지면서 눈물이 마르게 되는데, 눈물이 마른 사람만큼 인생이 어려운 사람이 없다. 눈물은 영혼의 윤활유와도 같은 것인데, 눈물이 말랐다는 것은 영혼의 작용이 멈춘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요셉이 울었다는 것은 영혼의 작용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뜻인데, 영혼이 되살아 나야 사랑의 능력이 회복되고 화해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므로, 화해의 과정에 서로에 대하여 눈물을 흘리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눈물은 카타르시스의 역할을 해주고, 영혼의 얼룩을 씻어주는 세정제 역할을 해준다.

 

요셉은 둘째 형 시므온을 붙잡아 두고 나머지 형들을 아버지 야곱의 집으로 돌려보낸다. 열 명의 형들 중 왜 시므온을 붙잡아 두었을까? 일단 큰 형 르우벤을 잡아 두려고 했다가 르우벤 형은 자신 해하려는 범죄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열외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둘째 형인 시므온을 붙잡아 두었을 것이다. 어떤 학자(Nahum M. Sarna)는 여동생 디나의 사건을 고려해 볼 때 시므온의 성격 상 그 범죄의 주동자일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한다. , 요셉을 죽이려 한 범죄를 주동한 것이 시므온이었기 때문에 그를 붙잡아 두었다는 것이다.

 

이유야 어찌됐든 시므온을 뺀 나머지 아홉 형제들은 풀려난다. 눈물을 흘리며 카타르시스를 한 요셉은 형들을 그냥 돌려 보내지 않고 부하들을 명해서 형들의 자루에 곡식도 채워주고, 그들의 돈을 다시 자루에 넣고, 길에서 먹을 양식까지 챙겨준다.

 

형들은 요셉이 챙겨둔 보따리를 메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여관에 유숙하게 되는데, 거기서 혼이 나서 떨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다름이 아닌 자신들의 돈이 도로 자루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자루 속에 돈이 고스란히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정신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면서 서로가 서로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28).

 

여기에서 화해의 세 번째 과정이 발견되는 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사랑의 능력을 상실하게 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창세기는 이것을 에덴동산 이야기를 통해서 묘사하고 있고, 누가복음은 이것을 탕자 이야기를 통해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성경과 기독교 신학이 제시하는 인간론의 기본이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 상황, 즉 인간이 하나님과 분리된 상황을 일컬어 원죄라고 표현한다.

 

인간이 사랑의 능력을 상실한 이유는 단순히 인간의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는 성경의 진술처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본질이 사랑에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랑하고 사랑 받을 때 가장 행복한 것이고,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 받지 못할 때 가장 불행한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므로 하나님을 떠나서는 사랑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존재이다. ,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과 분리되어서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인간이 사랑의 능력을 회복하고 발휘할 가능성은 없다. 요셉과 형들 사이에 화해가 발생하는 시점은 이렇게 형들이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이 있은 후였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요셉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안에 있었다. 하나님 안에 있었던 요셉과 이제 하나님 안으로 들어온 형들 사이에 화해가 일어나는 일은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화해는 은혜다. 어떻게 보면 요셉의 인생은 진노 가운데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형들이 요셉의 일을 기억하면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거하게 되었다고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들의 인생이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거하게 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노가 은혜로 바뀌는 순간은 바로 그들 모두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는 그 순간이라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만물이 하나님 안에 거하게 하는 은혜의 상징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는 것 같으나,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서 죽임 당한 것 같으나, 그의 죽음은 진노의 죽음이 아니라 은혜의 죽음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십자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과 화해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화해는 인간이 사랑의 능력을 회복하고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은혜의 징표이다. 화해는 우선 동일한 경험에서 오는 연민(compassion)’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 찌꺼기가 껴서 움직이지 못하는 영혼을 맑게 해주는 카타르시스의 눈물이 있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깨닫는 일(하나님과의 합일)이 있어야 한다.

 

사랑의 능력을 회복시켜 주시고 화해를 이루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이 되시고(one of us), 눈물로 발을 씻도록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은 우리 인간에겐 그야말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가장 큰 표지는 사랑의 능력을 회복하고 발휘하는 일이다. 사랑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가? 화해가 일어나고 있는가? 행복한가? 화해는 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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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4. 6. 06:49

'예수 부활하셨다'의 의미

(눅 15:11-24)

 

오늘은 부활주일이다. 우리가 찬양했듯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다. 우리는 이 날예수 부활하셨다!”를 외치며, 기뻐하며 즐거워한다. 일단, 외친다는 것은 그것이 어떠한 사실을 담고 있다는 뜻이고,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은 그 사실이 우리에게 어떤 좋은 일을 가져다 준다는 뜻이다.

 

유레카!”라는 말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찾았다라는 뜻이다. 기원전 25년경, 지금으로부터 2 2 20년 전 살았던 아르키메데스가 목욕을 하다가 물질의 밀도가 물질마다 다르다는 것을 발견한 일화로 알려진 말이다. 아르키메데스는 그 원리로 왕관에 금이 아닌 다른 물질이 섞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금세공사가 속임수를 썼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래서, 뭔가 어려운 일에 대한 해답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유레카!”를 외친다. 아르키메데스가유레카!”를 외쳤을 때, “유레카!”라는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찾은 그 원리가 중요한 것이다. 그 원리는물질의 밀도가 물질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가예수 부활하셨다!”라고 외칠 때, “예수 부활하셨다!”라는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He is Risen!)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단순히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어떤 현상에 대한 진술이 아닐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께서 다시 사셨다라는 현상은 그냥 신기한 일에 불과할 것이다.

 

사실 세상에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만큼 신기한 일이 많다. 죽은 자가 살아날 확률이 많은 가? 아니면, 망망대해에서 폭풍을 만나 배가 뒤집혔는데 거기서 살아날 확률이 많은가? 실제로 옛날에 바다에 빠져서 죽게 됐는데 거북이가 등에 태워 뭍으로 실어다 준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정말 신기한 일이다. 우리가예수 부활하셨다!”라고 외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신기한 일이기 때문이 아니다.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사건은 단순히 신기한 일이 아니라, 무엇인가 아주 큰 의미와 변화를 가져다 주기 때문에 외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사실 예수의 부활은 지금도 계속해서 해석되고 있는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예수의 부활이 진리인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진리는 확정된 원리가 아니라, 끊임 없이 해석을 요구하는 신비를 말한다. 더 이상 해석되지 않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예수의 부활 사건을 놓아두고, 그 부활 사건을 경험한 예수의 제자들이 해석한 것은 예수의 부활이 구원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우리가예수 부활하셨다!”를 외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신기한 일이 아니라, 우리(인류)를 구원한 구원 사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구원이라는 개념도 아주 광범위한 개념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쓰는언어의 범주에서 구원은 아주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고 예수의 부활과 관련된구원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주 정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그 중에서 아주 보편적인 기독교의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구원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려면, 먼저 죄에 대한 개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란 무엇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은 우리가 흔히 아는 죄의 개념과 완전히 다르다.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의 개념은범죄를 주로 의미한다. 나쁜 짓, 즉 윤리 도적적인 범주를 벗어난 일을 죄라고 한다. 그래서 죄를 지은 자는 사회적 지탄(손가락질)을 받고, 그 값을 어떤 형태로든 치르게 되어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의 개념은 윤리 도덕적 차원의 개념이 아니다. 성경의 죄는 신학적 죄의 개념인데, 여기서신학적이라는 말은하나님과 관련된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신학적 죄는 하나님과 관련된 죄의 개념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15장의 말씀은탕자의 비유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아주 유명한 예수님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 이야기의 예수님 버전(또는 누가복음 버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탕자의 비유 이야기에는 세 명의 주연급 인물이 등장한다. 아버지, 큰아들, 둘째 아들이 그들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 흔히 말하는 탕자는 작은 아들을 가리킨다. 어느 날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이런 요구를 한다. “아버지,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12). 그리고 며칠 후,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나누어준 모든 분깃을 챙겨 먼 나라로 떠난다. 여기까지 보면,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후려 아들 놈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 당시의 통념으로,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신데도 불구하고 재산을 요구하거나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신데도 재산을 챙겨 아버지를 떠났다는 것은,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죽은 자로, 없는 자 취급했다는 뜻이다.

 

, 성경에서 말하는 신학적 죄의 개념은, “하나님과 인간의 분리된 상태를 말한다. 아들이 아버지를 닮은 것이 당연한 것처럼, 창세기 말씀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이 말은 우리가 단순히하나님을 닮았다는 뜻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뜻은인간은 하나님의 떠나서, 하나님과 분리되어서는 살 수 없는 존재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둘째 아들을 보자, 어떻게 행동하는가? 아버지를 떠나서, 아버지와 분리되어서 마치 잘 살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한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그런데 결국 어떻게 되는가?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둘째 아들은 그때부터 엄청난 시련을 겪는다. 단순히 시련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 자체가 완전히 무너진다.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둘째 아들은 인간의 존엄성이 돼지만도 못한 존재로 추락하고 만다. 돼지는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혐오하던 동물이다. 율법에 돼지고기는 먹지 못하게 되어 있다. 율법에서 금하는 동물은 부정한 동물이요 혐오 동물이다. 그런데, 그 돼지를 치는 것으로 모자라,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먹으려고 했는데, 그것조차도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얼마나 비참한가!

 

죄란 바로 이런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과 분리되어 살 수 없도록 창조된 존재인 인간,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하나님처럼 귀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과 분리되어서 살아가는 그 존재 자체를 죄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원죄라고 한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을 떠나서 분리되어 살던 존재가, 다시 하나님과 연합하여 살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원죄는 우리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극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원죄는죽음과도 같은 것이다. 죽은 자가 자기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다시 생명을 얻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누가 해주어야 하는가? 바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셔야 한다.

 

둘째 아들의 상황을 잠시 더 보자. 둘째 아들은 궁핍한 지경 (죄의 상태)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모두 잃어버리고 비참하게 삶을 살아다가, 어느 순간 이런 상태에 이른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지금 이 스토리의 전체 상황을 신학적인 용어로회개(메타노이아)”라고 하는데, 회개는 단순히, ‘아이고 내가 잘못했소!’라고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돌이켜서 완전히 방향을 틀어, 하나님과의 합일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초대교회의 제자들이예수 부활하셨다!”를 외친 것은 바로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바로, ‘구원을 보았던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단순히 신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과 분리되어서 살던 우리들이 이제 하나님과 다시 합일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그야말로구원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 사건은 둘째 아들이 17절에서이에 스스로 돌이켜라고 했을 때처럼, “!!”라고 하는 깨달음의 사건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과 분리되어 살던, 즉 죄 가운데 살던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도록 길은 열어준 구원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듣는다는 것은 그래서 우리에게 기쁘고 즐거운 일이다.

 

, 아버지께로 돌아온 아들의 삶을 보자.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이것은 비유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비유란 눈에 안 보이는 것을 눈에 보이게끔 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분리되어 살고 있다는 것도 눈에 안 보이고, 깨닫는 순간도 눈에 보이지 않고, 하나님과의 합일된 삶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뇌과학에서 우리가 지금 보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순전히 뇌의 작용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우리는 우리의 뇌가 보고 느낄 수 있는 정도만 보고 느낀다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인지할 수 없다.

 

일례로, 개는 세상을 우리처럼 컬러플(colorful)하게 보지 못한다. 흑백으로만 세상을 인식한다. 그리고 개는 우리 인간이 듣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소리를 듣는다. 우리가 듣는 소리의 범위와 개가 듣는 소리의 범위는 완전히 다르다. 또한 박쥐는 어두운 동굴 속에서 생활한지 오래 되었으므로 눈이 퇴화되었다. , 박쥐는 장님이다. 그들은 세상을 초음파로 인식한다. 우리처럼 눈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것과 초음파로 세상을 인식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쉽게 생각해 보자. 눈 먼 자가 눈 외의 감각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것과 눈이 보이는 자가 빛을 통해서 세상을 인식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지금 여러분들이 경험하는 세계가 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착각 중의 가장 큰 착각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벌어진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인식하는 능력을영성이라고 한다. 빛이 없으면 우리 눈을 절대로 아무것도 못 본다. 여러분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는 절대적인 이유는 빛 때문이다. 그것처럼, 성령의 빛이 없으면 우리는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벌어진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볼 수 없다. 그래서 성령은 어느 무식한 종교업자가 말하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 구원 사건, 즉 진리의 사건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진리의 빛인 것이다.

 

오늘 부활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예수 부활하셨다!”를 외친 여러분들에게 성령의 빛이 비추어, 영안이 열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서 일어난 하나님의 새창조 역사가 보이게 되길 바란다.

 

* 실제 설교에서는 "아!!"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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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11. 10. 02:47

사랑하다 죽으라

(레위기 19:1-18)

 

종교는 삶의 의미를 묻는다. 의미를 묻는 것은 인간뿐이다. 이것은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별하는 독특한 점이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것을 추구하고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을 지녔다. 이런 것을, 영적이다,라고 한다.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 의미를 묻다 간다. ‘죽음자체에서도 의미를 찾는다. 그래서 의미 없는 죽음은 없다. 인간은 무엇을 하든, 거기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면, 공허함을 느낀다. ‘내가 지금 무엇하는거지?’라며, 힘들어 한다. 인간이 힘들 때는 육체의 노동이 고될 때가 아니다. 노동을 고되게 하는데, 내가 지금 이것을 왜 하는지, 의미를 못 찾을 때 힘들다. 아무리 힘든 일을 해도, 거기에서 의미를 찾는다면, 인간은 오히려, 그 노동을 즐거워한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삶의 의미를 질문하다. 창세기는 내가 왜 태어났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의미에 대답을 준다. 또한 이렇게 태어났는데, ‘왜 세상은 이렇게 어렵고 힘들지?’라는 질문에 의미를 준다. 그리고 출애굽기는 이렇게 어렵고 힘든 삶에서 어떻게 해방될 수 있지?’라는 질문에 의미를 준다. 그리고, 레위기는 이렇게 해방된 삶을 어떻게 향유해야 행복하지?’라는 질문에 의미를 준다.

 

좋은 질문은 좋은 해답을 찾게 해 준다. 우리는 계속, ‘의미에 대하여 물어야 한다. 의미를 묻지 않으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동물은 의미를 묻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는 본능에 의해서 살아갈 뿐이다. 물론, 본능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도 어느 정도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인간에겐 그것과 비교될 수 없는 의미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 그래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인 것이다.

 

레위기는 어려운 것처럼 느껴진다. 성경을 창세기부터 읽어내려가다 처음 봉착하는 난관이 레위기이다. 창세기, 출애굽기는 스토리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다. 그런데, 레위기는 법전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읽기 쉽지 않다. 그래서 어려움을 느낀다. 그런데, 사실, 레위기는 우리가 해방된 삶에서 어떻게 인생을 향유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꼭 넘어야 하는 산과 같다.

 

레위기는 율법을 기록한 곳인데, 내용적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이다. 하나님과 관계 맺는 법, 그리고 이웃과 관계 맺는 법이 그것이다. 해방되었다는 것은 자유를 얻었다는 것인데, 참된 자유란 무엇인가에 대한 지침을 주는 곳이 레위기이다.

 

우리는 대개, ‘에 대해서 오해한다. 법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한다고 생각한다. 그건 오해다. 물론 억압적인 법도 있다. 자유를 제한하고, 자유를 박탈하는 법도 있다. 그것을 악법이라고 한다. 그러한 법에는 철저하게 저항해야 한다. 그러나, 레위기에서 제시되고 있는 법은 자유를 제한하고 억압하는 법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를 지켜주는 법이다.

 

자유는 개인적이기도 하지만, 공공선을 위해 존재하기도 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는 것도 자유이지만, 공공선을 위해서 자기 자신이 자기를 스스로 제한하는 것도 자유의 범주에 들어간다. 나 좋자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는 철저하게 공동체적인 개념이어야 한다. 상호간에 서로 만족할 때, 가장 큰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 지점을 찾아가는 과정이, 레위기의 핵심 내용이다.

 

레위기는 제사법부터 시작한다. 제사법은 하나님과의 관계 맺는 법에 대한 것이다. 해방된 삶의 향유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고 구속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를 극대화시키신다. 자유의 극대화는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서 나오는 최고의 선물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을 통해, 우리의 자유를 극대화시켜 주신다. 죄는 우리의 자유를 옭아 매는 올가미와 같다. 쇠창살이 감옥이 아니라, 죄 자체가 쇠창살 없는 감옥이다. 죄지은 인간은, 용서 받기 전까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쇠창살에 가두어 놓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죄를 지으면, 두 다리 뻗고 자기 힘들다. 그러나, 용서 받으면,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두 다리 뻗고 자도록 해주시는 분이다.

 

제사법에 대한 것이 열 장에 거쳐 나오고, 레위기 11장부터 나오는 것은 정결법이다. 정결법은 단순히, 깨끗하고 부정한 것을 구별하기 위함이 아니다. 정결법은, 본인의 생명뿐만이 아니라, 이웃의 생명까지도 귀하게 여기고, 그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법이다. 본인과 이웃의 자유를 극대화하기 위한 법이다.

 

일례로, 12장에, 산모 정결법이 있다. 산모는 남자 아기를 낳으면, 이레 동안 부정하다. 부정하다는 것은 아무도 그를 만지거나, 그가 아무와도 접촉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출산으로 인해 극도로 약해진 산모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다. 출산으로 극도로 약해진 산모를 못살게 구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남자 아기를 낳은 산모는 삼십일이 지나야 산혈이 깨끗해지기 때문에, 30일이 지난 후에다 성물을 만질 수 있고, 성소에도 들어갈 수 있다. , 30일이 지나지 않은 산모는 밖에 돌아다니면 안 된다. 이것은 산모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다.

 

다른 예로, 13장과 14장은 나병 환자에 대한 정결법을 진술하고 있다. 나병이라고 확진 된 환자는 격리 수용된다. 그리고, 스스로,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이렇게 외쳐야 한다.”부정하다 부정하다.” 그리고, 부정한 동안 진영 밖에서 살아야 한다. 이것을 나병 환자의 인권 제한이라고 보면 안 된다. 옛날에는 전염병이 돌면, 인구의 대다수가 죽었다. 지금처럼 백신이 잘 발달 되어 있어서, 질병을 치료할 수 없었다. 병이 돌면, 무조건 죽었다. 나병 환자를 격리 수용하는 것은 나병 환자도 보호하고, 병이 들지 않은 이웃들도 보호하는 법이다. 병 때문에 서로를 제한하고 구속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레위기에 나와 있는 법을 여기서 일일이 다 열거 할 수 없지만, 모든 법의 근간은 본문말씀에 집약되어 있다. 본문의 1절부터 8절까지는 하나님을 향한 규례들이고, 9절부터 18절까지는 이웃과 사회를 향한 규례들이다.

 

하나님을 향한 규례들에서 눈에 띄는 것은,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어서,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라는 말씀이다. 거룩함을 이야기하면서, 부모와 안식일을 말하는 것에 대해서 주목해야 한다. ‘부모는 자신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기억하는 것이고, ‘안식일은 쉼에 대한 것이다. 부모님을 기억하라. 부모님에게 잘하라. 이게 현실에서 그렇게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잘하고 싶어도, 이미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분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거룩과 부모와 연관된다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시라. 거룩이 안식일, 쉼과 연관된다는 것도 한 번 생각해 보시라. 쉬지 못하는 사람은 자유를 빼앗긴 사람이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을 단순히 주일에 교회 나오라는 말로 오해하시면 곤란하다. 쉼이란 단순히 주일에 교회 나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쉼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쉼은 우리의 자유와 직결된다.

 

9절부터 나오는 이웃과 사회를 향한 규례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에 대한 배려와 상대방에 대한 폭력 금지, 그리고 상대방의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 잘못했을 때, 견책하는 것(꾸짖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알려주는 것)을 주문한다. 견책하는 이유는 그 사람을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이 잘못인지 인식하게 해서 또 다시 잘못으로 인해 서로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줄여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로 요약하고 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규례와 이웃에 대한 규례를 종합하면, 해방된 삶을 어떻게 향유해야 의미 있는 것인가에 대한 대답인데, 한 단어로 집약된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참 자유를 누리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삶의 가치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을 남녀간의 사랑으로 너무 축약시키지 말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라는 말처럼 사랑은 굉장히 광범위하고 심오한 개념이다.

 

한 번 생각해 보시라. 마음껏 사랑하고 계신가? 내가 정말, 자유롭다는 것은, 마음껏 사랑하고 있는가 아닌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참된 자유를 누리는 자는, 마음껏 사랑한다. 이 마음에 가장 샘솟는 것이 사랑이다. 그러나,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자는, 마음껏 사랑하지 못하고, 미움에 사로잡혀 괴로운 날을 보낸다. 미움은 자유 하지 못한 자에게서 나오는 죄악의 올가미다.

 

그 대상이 누구이든, 이 마음에 미움이 가득하신가?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은 해방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를 향유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대상이 누구이든, 이 마음에 사랑이 가득하신가? 그냥 누구를 보든, 그가 무슨 일을 하든, 예뻐 보이시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해방, 구원, 자유를 누리고 계신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짧다. 의미를 찾기 전에, 아니, 의미를 묻기도 전에 훅 지나가 버리는 것이 인생이다. 짧은 인생, 우리는 무엇을 하다 갈 것인가? 남을 미워하고 정죄하는 일에, 이 짧은 인생을 허비하기에는 너무도 아깝고, 어리석다. 사랑만 하다 가기에도 너무 짧은 인생인데, 누군가를 미워할 시간이 어디 있는가? 사랑할 시간이 얼마나 없는지 한 번 보시라.

 

동영상 상영 --> https://www.youtube.com/watch?v=I0e-7qRBuj0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특별히, 여러분의 소중한 가족들과 함께 보낼 시간이 얼마 없다. 우리의 기대수명은 80살 정도이다. 계산해 보면,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보낼 시간이 얼마나 없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죽는다. 먼 훗날 죽는 것이 아니라, 곧 죽는다.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미워하다? 아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사랑하다 죽으라.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참 자유를 누리는 자만이 한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참 자유를 얻으셨는가? 구원 받으셨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해답이 여기에 있다. 사랑하다, 죽으라. 서로, 사랑하시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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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10. 16. 05:51

보라, 아들이다!

(레아의 슬픔과 사랑)

창세기 36

(창세기 29:31-35)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찬양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가사 전문)

 

교회에서 애창되고 있는 찬양곡이다. 우리는 이 찬양을 함께 부르면서 서로의 눈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상대방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래가 교회에서 가장 애창되고 있다는 것은 오히려 그만큼 서로 사랑하면서 살고 있지 못하다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기도 한다. 잘 지켜지는 것은 강조할 필요 없다.

 

초등학교 시절(1980년대) 미술 시간에 가장 많이 그렸던 그림은 두 가지였다. 반공 포스터와 불조심 포스터. 반공 포스터는 군사독재 시절, 그리고 북한과의 이념 대립에 국가의 에너지를 전부 쏟고 있었던 시절, 반공에 대한 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리고 불조심 포스터를 그때 그렇게도 그려댔던 이유는 그만큼 불사고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어린 시절 내가 경험한 산불만 해도 수 차례 된다. 산불 진화 장비가 변변치 않았던 시절이라 산불이 한 번 나면 엄청난 피해를 당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잘 지켜지지 않았던 불조심에 대한 경각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생겨난 가장 유명한 불조심 포스터 문구는 바로 이것이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잘 지켜지는 것은 강조할 필요 없다. 문제는 잘 지켜지는 것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언제나 문제는 잘 지켜지지 않는 것에서 발생한다. 결혼생활의 기본은 사랑이다. 그런데, 야곱의 결혼 생활에서 잘 지켜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야곱의 첫 번째 부인인 레아에 대한 야곱의 사랑이었다. 이야기는 그 사실을 이렇게 전한다.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31). 이렇게 완곡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사랑 받지 못했다에 대한 히브리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미워하다이다. , 야곱은 레아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미워했다. ‘미워하다사랑하지 않는다보다 더 적극적인 감정의 표현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사랑 받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 받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매우 원초적이다. 또 한 가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사랑 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 받고 싶은 욕망만큼 사랑하고 싶은 욕망도 매우 원초적이다. 사랑의 욕구가 원초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생명에 내재되어 있는 속성이라는 뜻이다. 생명이 존속하려면 세 가지가 기본적으로 필요한데, 그것은 사랑과 영양분과 휴식이다. 이것은 창세기의 창조기사가 담고 있는 매우 원초적인 메시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신 후(1:26-28), 사람(아담과 하와)에게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신다. 번성하고 충만하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사랑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눈치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원초적으로 말하자면,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라는 말은 성관계(Sex)’에 대한 말이다. ‘성관계는 사랑의 다른 말이다. 많은 경우 성()을 타락한 형태로 경험해서 그렇지, 성은 생명에 담긴 매우 원초적인 속성이다. 사랑과 성은 떼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이것은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서구의 유명한 심리학자인 프로이트를 통해서 밝혀진 사실이다.

 

생명은 기본적으로 성관계를 통해서 유지된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창조하시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신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해서, ‘성관계를 많이 가지라는 뜻이다. 이것은 이 말과 똑 같은 것이다. “많이 사랑하라.” 그러므로 생명은 기본적으로 사랑을 통해서 유지된다. 이것은 생명에 내재되어 있는 매우 원초적인 속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기본적으로 거룩한 행위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지면의 모든 식물과 짐승들을 주시면서 그것들이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고 말씀하신다(1:29-30). 생명은 존속하려면 영양분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시며 그것이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많이 먹으라는 표현이다. 먹고 싶은 욕망은 생명 보존을 위해서 생명 안에 내재되어 있는 원초적인 속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먹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거룩한 행위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안식(휴식)하신다. 당신의 안식은 모든 피조물에게 전가되어, 안식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로 생명 안에 원초적으로 자리 잡게 된다. 휴식은 옵션이 아니다.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것은 자본주의 산업 사회가 만들어낸 허탄한 신화이다. 쉴 새 없이 기계처럼 자기 몸을 굴려대는습성이 사회에 자리 잡은 역사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적어도 전기가 발명되기 전까지 밤에 일하는 법은 거의 없었다. 조명의 발달로 비교적 환하게 밤을 대하는 현대인들은 옛날의 밤을 무섭게 덮었던 어둠을 이해하지 못한다. 옛날 밤에 가장 밝은 것은 대보름 달이었다. 옛날 사람들은 밤이 되면 사람들은 무조건 쉬었다. 더 이상 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휴식은 옵션이 아니다. 휴식은 생명 안에 내재되어 있는 원초적인 속성이다. 사람은 휴식하지 못하면 죽는다. 일 하는 것만 너무 강조하는 사회이다 보니 휴식하는 것에 별로 신경 못쓰는 일이 많은데, 휴식은 게으른 자의 미련함이나 가진 자의 여유가 아니라 생명의 원초적 욕망이다. 그러므로 휴식은 기본적으로 거룩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모두 이것과 연관되어 있다. 사랑 받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굶고, 쉬지 못하는 일은 인간의 존엄성을 무너뜨린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존재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하나님의 형상과 맞닿아 있다. 인간의 존엄성이 뭉개지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할 수 없다. 거기에는 거룩함이 없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이 살아나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거기에 거룩함이 묻어난다.

 

레아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을 당하고 있다.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 남편 야곱에게 사랑 받고 싶은 레아의 원초적인 욕구는 처절하다. 간절하고 처절한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 하나님은 낮은 자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레아의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열어주신다. 그리고 레아는 아들을 낳는다.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고대사회에서 여인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었다. 그래서 레아는 아들을 낳은 뒤, 그의 이름을 르우벤이라고 짓는다. ‘르우벤보라, 아들이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사랑 받지 못하고 있는 슬픔 가운데서 외쳐 나온 레아의 기쁨이었다. 또한 이것은 고통 가운데 있는 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위로였다. 그리고 이것은 남편에게 사랑 받고 있지 못하고 있는 레아의 소망이었다. 이제, 남편이 자신을 사랑해 줄 거라는 기대였다.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32절 후반부).

 

그런데 레아의 소망과 기대와는 달리 레아는 여전히 남편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두 번째 아이를 출산하고, 그 이름을 시므온이라고 짓는다. ‘시므온듣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샤마에 명사형 접미사를 붙여 만든 이름이다. ‘시므온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뜻이다. 비록 남편의 사랑은 받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들으셔서 태를 열어 또 다른 아들을 주셨다는 것에 대한 감사가 베어 있는 이름이다. 그러나 여전히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 레아는 남편의 사랑에 대한 갈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레아는 남편과 진정한 연합을 원했다. 그 동안 레아는 남편과 성관계를 갖긴 했지만, 그것이 진정한 연합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세 번째 아들을 낳았을 때 그의 이름을 레위라고 짓는다. ‘레위의 뜻은 연합된 자이다. 레아가 세 번째 아들의 이름을 이렇게 지은 것을 통해서 우리는 레아의 간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34).

 

세 번의 아들을 출산하는 과정을 통해 레아의 신앙에 어떤 변화가 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은 바로 네 번째 출산이다. 레아는 임신해서 네 번째 아들을 낳는다. 그리고 그에게 유다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유다찬양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리고 앞의 세 번의 출산과는 달리 더 이상 남편과의 관계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레아가 남편의 사랑을 포기한 것은 아닐까이다. 만약 그렇다면, 네 번째 아들에게 레아는 유다(찬양하다)’라는 이름보다는 '아자브(떠나다, 포기하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레아는 그렇게 하지 않고, ‘유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것은 레아가 남편의 사랑을 욕망하던 사람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만족하는 사람으로 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 큰 사랑, 절대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작은 사랑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고 받는 사랑은 매우 소중한 것이지만, 마음에 깊은 만족을 주는 큰 사랑, 또는 절대 사랑은 되지 못한다. 사랑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주고 받는 인간의 죄성(罪性) 때문이다. 사람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큰 사랑, 절대 사랑을 주고 받게 끔 되어 있었다. 그러나, 창세기의 창조기사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사랑의 원초적 속성뿐만이 아니라, 그 사랑을 충만하게 주고 받으며 살아야 할 피조물이 어떻게 타락하게 되었는가 또한 보여준다.

 

사람은 사랑 없이 못산다. 그래서 사람은 필연적으로 사랑을 갈망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사랑은 완전한 아가페의 사랑이 아니라, 불완전한 자기애, 즉 에로스의 사랑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절실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에서 경험하는 사랑은 모두 자기의 욕망에만 근거한 에로스 사랑뿐이다. 그 사랑은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사랑 때문에 생명을 헤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 아가페 사랑을 경험하게 되면 이 세상에서 경험하게 되는 작은 사랑(에로스 사랑) 때문에 실망하여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생명을 위해 사랑이 절실하게 필요한 우리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그래서 절실하다.

 

레아는 세 번의 출산 과정을 통해 비로소 남편 야곱의 사랑보다 더 크고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온몸으로 받는다. 그렇다고 물론 레아에게 남편 야곱의 사랑이 필요 없어졌다거나 남편을 무시하게 됐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더 큰 사랑, 절대 사랑이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레아는 작은 사랑 때문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레아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 그 사랑 안에서 계속해서 복을 받는다. 이후 레아는 두 명의 자녀를 더 출산하고, 자신의 몸종을 통해 두 명의 자녀를 또한 출산한다. 몸종의 자녀까지 합해 총 8명의 자녀를 자신의 발 아래 둔다. 그 뿐만 아니라, 야곱의 자녀들 가운데 구속사의 중심에 있는 레위(레위지파, 제사장지파)와 유다(왕의지파, 그리스도의 조상)는 다름 아닌 레아의 태에서 나온 아들들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사랑 받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 받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면 그만큼 인간의 존엄성은 훼손된다. 충만한 생명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사랑하고 또 사랑해야 한다. 사랑 하고 사랑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 거룩해진다. 그리고 그 생명의 원초적인 욕망인 사랑을 충만하게 나눌 수 있는 길은 큰 사랑이시고 절대 사랑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데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그래서 레아의 이 외침, “보라, 아들이다!(르우벤)”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외침이다. 그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그의 입술에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유다)”를 넣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참 고맙다. 사랑 받지 못하여 슬프지 않기를, 사랑 하지 못하여 슬프지 않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내가

나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했을 때

참 많이 노력해야 했습니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서 ......

내가

나의 사랑으로 남편을 사랑했을 때

참 많이 울어야 했습니다.

남편을 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

내가

나의 사랑으로 아이들을 사랑했을 때

참 많이 화를 내야 했습니다.

아이들을 잘 키워야 한다는 욕심 때문에 ......

내가

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했을 때

참 많이 참아야 했습니다.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윤리 때문에 ......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을 하니

사랑하는 일이 쉬워졌습니다.

사랑하는 일이 기쁨이 됩니다.

사랑하는 일이 감사가 됩니다.

 

(민혜숙의 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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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10. 5. 23:12

계시: 해와 율법과 그리스도

(시편 19편)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질문한다.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고,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기본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없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 능력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파악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는가? 그건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배타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당신 스스로 계시해 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실까? “계시(Revelation)”는 자신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실까?

 

시인은 두 가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 하나는 자연이고, 다른 하나는 율법(토라)이다. 자연이 하나님을 드러낸다고 하는 인식은 창세기의 천지창조 기사와 맞닿아 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천지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낸다. 물론 자연에게는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다”(3). 말을 해야 존재가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고 서로의 존재를 가슴 속 깊이 느끼듯이, 피조물은 조물주의 사랑을 말 없이 드러낸다.

 

특별히 시인이 주목하는 피조물은 해이다. 해를 통해서 시인은 자연의 질서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본다. 시인은 아침이 되어 해 뜨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그것을신방에서 나오는 신랑이라고 표현한다. 하나님께서 해를 위해 하늘에 장막(텐트, )을 지어 주셔서 밤새껏 해가 쉴 수 있는 거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보금자리에서 밤새껏 쉬다가 아침이 되어 떠오르는 해는 얼마나 큰 기쁨을 전해주는가! 아침에 떠오른 해는 저녁이 돼서 질 때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온 세상에 나누어 준다. 그 열기, 그 사랑에서 피할 자는 아무도 없다!(6)

 

자연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여, 그것을 노래한 시를 소개한다. 박목월, 조지훈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활동한 박두진의 <>라는 시이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평론가들은 박두진의 시를 이렇게 평가한다. “그의 시에서 '자연'은 인간에게 새 생명을 불어 넣어 주는 일종의 '메시아'의 상징이며, 이상을 추구할 수 있는 매개적 존재로 표현된다.” 자연이 인간에게 일종의 메시아의 상징이 될 수 있는 것은 자연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숨결 때문이다. 물론 자연 자체는 (메시아)’이 아니다. 자연 자체를 신으로 보는 사상을 범신론이라고 한다. 기독교 신앙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연은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이다. 그러나 자연이 바로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자연은 하나님의 숨결을 담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다. 이것을 일컬어 범재신론이라고 한다. 범재신론은 하나님의 창조성을 담아낸 신론으로서, 기독교의 하나님을 잘 설명해 준다.

 

시편 기자처럼, 또는 박두진 시인처럼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발견하는 일은 시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시인은 눈에 보이는 너머의 것을 형상화시킬 줄 아는 창조성을 지니고 있다. 만약 우리가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인해 즐거워하며,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시인이다. 만약 이 찬송가를 사랑한다면 이미 시인이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찬송가 79,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시인은 다음으로 율법에 주목한다. 시인에게 율법은 단순히 지켜야 할 어떤 규율, 법이 아니다. 율법은영혼을 소성시키고’,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한다. 율법 자체에 그러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계시되고 있는, 율법에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 때문이다. 이러한 능력을 베풀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밖에 없다. 이 세상 그 무엇이 우리의 영혼을 소성시키고, 참된 지혜를 주며, 참 기쁨과 의로움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 그래서 시인은 율법을 사모한다. 그것은 순금보다 더 귀하고, 꿀보다 더 달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율법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발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를 뿐더러, 율법을 오히려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바울 서신에 보면(로마서, 갈라디아서), 율법과 복음이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기독교인들은 복음은 좋은 것이고 율법은 나쁜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구원은 복음으로 받는 것이지 율법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복음의 핵심을 잘못 이해한 탓에서 비롯된 생각일 뿐이다.

 

바울이 지적하는 것은 율법은 지식(우리가 이것을 해서는 안된다)이라는 힘을 주지만, 그 지식은 함께 본래적으로 복종할 힘(우리는 이것을 하지 않을 것이다)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마커스보그, 첫 번째 바울의 복음, 235). 반면에 신앙은 안에서 그 법에 따를 힘을 불러일으킨다”(같은 책 235). ,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신앙의 우선성이지 율법의 폐지가 아니다. 율법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이 배제된 상태로 인간의 삶에 주어진다면 율법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이 심각하게 훼손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율법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숨결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는 경우를 보자. 2012년 대한민국의 보성에서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고,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다. 일명, ‘보성 삼남매 사건이다. 한 교회의 목사가 자신의 자녀 셋을 죽인 사건이다. 그가 자신의 자녀 셋을 죽인 이유가 어처구니없다. 다음의성경구절이 그들의 행동을 부추겼단다.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기 아니하리라”(잠언 24:13).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Sheol 죽음)에서 구원하리라”(잠언 24:14).

 

죽은 삼남매 중 어느 한 명이 죽기 전 이러한 일기를 남겼다. “2012 1 20일 목요일 TV를 보았다 재미있다 런닝맨이 재밌었다.” 런닝맨을 재미있게 본 아이들이성경에 의해서 이렇게 처참하게 죽었다. 숨지기 열흘 전부터 축귀 의식이 아이들에게 행해졌고, 금식 명령이 내려졌다. 결국 몸이 허약해진 아이들은허리띠와 파리채로 채벌을 당하다 쇼크사로 죽음을 맞이했다. 이 모든 것이 그들을에서 구원하기 위한 행위였다고 부모는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성경이 런닝맨보다 못한 존재로 추락한 순간이다. 런닝맨은 아이들에게 재미라도 줬다. 그러나 이 경우, 성경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죽음을 주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이것은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숨결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율법은영혼을 소성시키고’,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한다. 우리가 경전으로 생각하며 주야로 묵상하는 성경은 복음의 율법이다. , 하나님의 숨결이 담겨 있는 책이다. 기독교의 여러 종파 중, 특별히 개신교는 설교를 예배의 중심으로 삼을 만큼 성경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통해 영혼이 소생되고, 지혜롭고, 마음이 기쁘고, 눈이 밝아 지지 못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장애를 앓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른 말로, 성경 공부를 그렇게도 많이 하고 설교 말씀을 그렇게도 많이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영혼이 소생되지 않고, 지혜롭지 못하고, 마음이 기쁘지 못하고 눈이 오히려 어두워졌다면, 그래서 스스로 괴로움을 느끼고 여전히 남을 정죄하고, 악한 일에 자기 자신을 내어주고 있다면, 그는 신앙이 없는 것이다. ,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에 불과하다.

 

자연과 율법에서 하나님을 발견한 시인이 십자가 사건을 보았다면 무슨 고백을 했을까? 이런 고백이 아니었을까?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드러남은 모두 여기에 모아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하나님의 계시, 드러남이 아니라, 궁극적인 계시, 즉 하나님 스스로를 세상에 보이신 절대적인 사건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이상, 자연도 율법도 그 빛을 잃고 우리의 모든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계시, 드러남 그 자체이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집중시키는 이유는 그가 우리에게 을 주시기 때문이 아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땅에서 활동하실 당시, 사람들은 실제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누어주신 빵을 얻어 먹기 위하여 예수를 따라 다녔다. 그러나, 예수께서 자기 자신이 하늘에 내려온 산 떡이라는 비유를 통해 자기를 드러내셨을 때, 사람들은 더 이상 예수에게서 을 얻어 먹을 수 없게 되었구나라는 생각에 예수를 떠나간다. 그 모습을 모시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신다. “너희도 가려느냐?”(요 6:67).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집중시키는 이유는 그가 우리에게 을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곧 생명이기 때문이다.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곧 생명을 다가오는 것이다.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하신 말씀은 배타적인 말씀이 아니라, 매우 포괄적이고 긍정적인 말씀이다.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이 말은 예수 믿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는 배타적인 진술이 아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궁극적인 생명이시다라고 하는 우주적인 선포이다. ,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한 적극적인 해명이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가 궁극적인 생명이라는 뜻은,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궁극적인 생명, 즉 하나님을 경험한 자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날 수 없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가르침), 죽음(십자가)와 부활에 관심을 집중하고, 거기에 자신의 모든 생명을 건다. 그것이 곧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1장에는 <두 아들의 비유>가 나온다. 짧은 비유라서 그것을 그대로 옮겨 본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21:28-32).

 

우리는 어떻게 자연과 율법과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 이처럼, 신앙 있는 자가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것에 놀라워하며 찬양하는 자가 신앙 있는 자이다. 신앙 있는 자가 율법(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소생되고 지혜롭게 되고 마음이 기쁘고 눈이 밝아진 자가 성경에서 하나님을 발견한 자이다. 신앙 있는 자가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는 자가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을 발견한 자이다. 신앙 있는 자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돌보는 자가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을 발견한 자이다. 다른 말로 해서, 열매를 보면 그가 신앙인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마태복음 12장이 증거하는 메시지다.

 

나무가 좋으면 그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그 열매도 나쁘다.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악한데, 어떻게 선한 것을 말할 수 있겠느냐?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선한 사람은 선한 것을 쌓아 두었다가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것을 쌓아두었다가 악한 것을 낸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은 심판 날에 자기가 말한 온갖 쓸데없는 말을 해명해야 할 것이다. 너는 네가 한 말로, 무죄 선고를 받기도 하고, 유죄 선고를 받기도 할 것이다. (12:33-37)

 

(자연)와 율법(성경)과 그리스도에 드러난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가? 정말로 만났는가? 정말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 관심이 있는가? 거기에서 생명 자체이신 하나님을 만났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 무엇보다 궁극적 생명 사건이고, 하나님의 궁극적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시라.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이시다. 이것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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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10. 2. 05:57

야곱의 결혼

창세기 35

(창세기 29:1-30)

 

야곱은 지팡이 하나 들고 집을 나섰다. 형 에서의 보복을 피해 하란 땅에 있는 외삼촌 집으로 피신 하는 중이다. 그가 걷는 길은 불안하다.

 

잃어버렸습니다 /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 두 손으로 주머니를 더듬어 / 길게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 길 우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 담 저 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윤동주 시 <> 전문)

 

야곱은 길을 걸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있는 길을 걸었다. 아침에 출발한 길은 저녁에 당도하고, 끝없이 걷다 멈춰선 곳에 놓여 있는 돌 하나를 베개 삼아 길 위에서 잠을 청했다. 야곱은 돌 베개를 베고 바로 누웠다. 하늘이 보였다. 하늘은 까맸다. 까만 밤 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별들은 눈에 부딪히는 순간 눈물로 변했다. 벌거벗긴 채 내몰린 한 마리 어린 짐승처럼 야곱은 울었다. 눈물로 자기 안에 있는 부끄러움이 씻어질 때까지 울었다. 그리고 잠 들었다.

 

야곱은 꿈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했다. 꿈 속에서 만난 하나님께서는 눈물로 깨끗이 씻겨진 야곱의 부끄러움을 가려주셨다. 아담과 하와의 부끄러움을 가려주셨듯이, 가인의 부끄러움을 가려주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부끄러움을 가려주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28:15).

 

야곱은 잠에서 깨어나 희망을 품고 길을 다시 걸었다. 모든 것을 잃어 버렸다는 생각 때문에 부끄러웠던 마음은 이제 희망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열심히 걸었다. 풀 한 포기 없는 척박한 땅을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며칠을 걸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야곱은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렀다.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렀다는 진술은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뒤 품게 된 희망과 맞닿아 있다. 야곱은 그 땅에 이르러 눈을 들어 주변을 자세히 보았다. 그가 그 땅에서 처음 발견한 것은 우물이었다. “본즉 들에 우물이 있고 (He looked and saw a well in the field)”(2). 성경에서우물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모두 새로운 사건이 전개되고, 하나님의 복이 발생한다. 야곱의 고된 여정 가운데 우물이 등장했다는 것은 이제 그가 인생에 있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는 뜻이고, 하나님의 복이 그의 인생 가운데 창조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우물과 관련된 중요한 일화들을 보자. 리브가도 이삭의 아내를 구하러 온 아브라함의 종을 우물가에서 만났고(24:16), 후에 십보라도 남편이 된 모세를 우물가에서 만났다(2:15-17). 우물은 하나님의 복의 상징이며, 생명을 공급받는 장소였다. 이렇듯, 야곱이 길을 걷다 우물을 만나게 됐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그의 인생 가운데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

 

야곱은 우물을 만났다. 그는 우물에 가서 물 한 잔 얻어 먹으며 생기를 되찾았고, 우물을 들여다 보며 우물 속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 시 <자화상> 전문)

 

야곱은 우물 속에서 미워할 수 없는 한 사람을 발견한다. 바로 자기 자신이다. 우물은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장소이다.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한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약속이 구체적으로 삶 속에 펼쳐진다는 것을 뜻한다. 야곱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은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게 주셨던 것과 다르지 않다. 야곱은 고향 땅에서 부모님 곁을 떠나올 때 이러한 약속을 받았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28:3). 우물에서 무엇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질 것인가?

 

야곱은 우물에서 만난 동방 사람들에게 혹시 라반을 아냐고 묻는다. 자신들은 하란 땅에서 왔고 라반을 안다고 대답한다. 삼촌 라반의 안부를 물은 뒤, 이어지는 장면은 기적과 같다. 다름 아닌, 라반의 둘째 딸 라헬이 삼촌 라반의 양 떼들을 몰고 그가 서 있는 우물가로 오고 있었다. 우물에서 야곱과 라헬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야곱은 라헬이 몰고 온 양 떼에게 우물물을 먹이고, 자기의 신분을 밝힌 뒤, 라헬을 붙들고 운다. 그간의 서러움이 한꺼번에 터지는 순간이다.

 

야곱은 삼촌 라반을 만나 그간의 안부를 물은 뒤, 하란 땅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이 삶은 그가 가보지 않았던 새로운 길이었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 오늘도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윤동주 시 <새로운 길> 전문)

 

야곱은 삼촌 라반의 집에서 한 달 동안 편안하게 지내다, 이제 본격적인 생활인으로서 그곳에서의 삶을 시작한다.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말하라”(15). 결혼을 위해서는 지참금이 필요했던 시대에 살던 야곱은 부모님을 떠나 빈손으로 왔기 때문에 결혼을 위한 지참금이 없었다. 야곱은 결혼을 위해 지불해야 할 지참금을 자신의 노동력으로 대신하겠다는 제안을 한다.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18).

 

속임수로 남의 것을 빼앗기만 하며 살았던 야곱의 인생이 달라졌다. 야곱은 이제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하여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기 원했다. 고대 근동의 풍습을 기록하고 있는 누지 문서에 따르면 지참금은 대개 은 30-40 세겔 정도이다. 10 세겔은 목자의 1년 임금에 해당하므로,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7년을 봉사하겠다고 한 것은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하여 통상 지불해야 하는 지참금보다 많은 액수를 지불한 것이다.

 

쫓아오든 햇빛인데 / 지금 교회당 꼭대기 /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데 /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 시 <십자가> 전문)

 

우리 인생 가운데 요행은 없다. 하나님의 은혜만 있을 뿐이다. 속이고 빼앗는 것은 언젠가 그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다. 그 대가는 혹독하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가는 길은 힘들고 어렵더라도 그 열매가 달고 영광스럽다. 야곱은 이제 더 이상 속이는 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붙들고 가는 책임 있는 존재로 거듭났다. 요행을 바라며 가는 길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걷는 길은 겉으로 보기에 같아 보이지만 차원이 다른 길이다. 험난하기는 마찬가지나 그 열매가 다르다. 길을 가며 통과하게 될 시간의 질이 다르다.

 

야곱은 이제 속이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담지한 자로 인생을 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희망 가운데 살게 되었다. 그는 라헬을 아내로 맞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라헬을 위해, ‘모가리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흘렸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20).

 

칠 년을 며칠 같이 성실하게 일한 야곱에게 드디어 결혼식 하는 날이 다가 왔다. 야곱은 삼촌 라반과 맺은 계약대로 칠 년 동안 열심히 일했고, 이제 그의 권리를 행사한다.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21). 라반도 야곱의 요구를 묵살하지 않고, 사람들을 모아 잔치를 벌이며 결혼식을 거행한다. 잔치가 끝나고 밤이 왔다. 이제 야곱은 라헬에게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라반은 라헬 대신에 레아를 야곱에게로 들인다. 밤에 품었던 여인이 라헬이 아니라 레아라는 것을 아침에야 비로소 알게 된 야곱은 삼촌 라반에게 따진다.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25).

 

이 일을 놓고 야곱과 라반 사이에 주고 받은 말은 모두 야곱의 가슴을 후벼 팠다. 야곱이 라반에게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한 말은 자기 자신에 대한 책망으로 다가왔다. 자기 자신이 속이는 자였기 때문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을 갖게 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속이는 자는 달콤하지만, 속임을 당한 자는 쓰다. 야곱은 그 쓴 맛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라반은 야곱에게 이렇게 변명한다. “라반이 이르되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26). 이 말은 형보다 앞서려 했던 야곱의 행적에 대한 고발로 작용했다. 야곱은 라반에게 더 이상 따져 들 수 없었다. 그래서 야곱은 삼촌 라반의 요구대로 칠 일 동안의 레아와의 결혼식을 마치고, 그 이후에 라헬을 아내로 맞이 한다. 또한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는 대가로 지불해야 할 지참금을 칠 년 동안의 노동으로 다시 지불한다.

 

야곱에게 있어 두 번째 칠 년은 단순한 지참금이 아니었다. 속이는 자로 살던 야곱이 이제 속임을 당하는 자로서 겪게 된 아픔 가운데, 지난 날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반성하고 그 대가를 지불하는 참회의 시간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참회록을 쓰지 않은 인생은 진정 거듭났다고 말할 수 없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 내 얼골이 남아 있는 것은 /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이기에 /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241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든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윤동주 시 <참회록> 전문)

 

이렇듯 야곱의 결혼은 참회의 시간이요, 참회로부터 맺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시간이었다. 야곱은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얻었고, 레아와 라헬은 실바와 빌하를 몸종으로 얻었다. 야곱의 참회와 라반의 속임수, 그리고 이 네 여인의 역동적인 인생이 하나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무엇을 만들어 가게 될 지, 우물 들여다 보듯, 가만히 들여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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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9. 27. 03:22

약속의 성취

창세기 23

(창세기 23:1-2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90:10, 12).

 

사라가 죽는다. 돌아보면 수고와 슬픔뿐인 삶을 127년 동안 살다 죽는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종속된 존재로 산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도반(길벗)으로서, 그리고 돕는 배필로서, 또한 아브라함과 함께 언약을 받은 만국의 어머니로서 세상을 살다 죽는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함께 언약의 담지자라는 것을 말해 주는 징표는 다른 누구의 태가 아닌 바로 사라의 태를 통하여 약속의 자녀 이삭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사라는 어머니다. 사라는 여자를 대표하고, 언약의 통로이다. 언약은 하나님의 창조의 약속인데, 하나님의 창조는 어머니 사라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는 마치 대지에서 새로운 싹이 돋아나는 것과 같다. 대지가 없으면 생명이 없고, 대지가 오염되면 생명이 위태로운 것처럼, 어머니 사라가 없으면 하나님의 창조도 없고, 그의 믿음이 오염되면 약속도 위태롭다. 그녀가 없으면 약속의 성취도 없다. 그래서 사라는 생명과 창조의 통로인 어머니요 대지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창조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두 가지, 자손과 땅이었다. 창세기 21장에서는 두 가지 약속 중 자손에 대한 약속의 성취를 보았고, 22장에서는 언약의 위기를 보았고, 23장에서는 또 하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본다. 그런데 두 가지 약속이 모두 사라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눈에 보이지 않던 약속의 자식 이삭이 어머니 사라를 통해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인생에 들어왔다. 이제 눈에 보이지 않던 약속의 땅이 사라의 죽음을 통해서 창조된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아내 사라의 죽음은 통렬한 것이었다. 사라가 숨을 거둔 장소는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이다. 이곳이 바로 마므레인데, 이곳은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헤어진 뒤 하나님으로부터 땅에 대한 약속을 받고 처음 옮겨간 곳이다(13:18). 그때만 해도 아브라함은 땅에 대한 약속이 바로 그곳에서 이루어지게 될 거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이처럼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하나님은 이미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준비하시고 계신다. 지금 당장은 막막해 보여도 날마다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살다 보면 믿음(하나님의 약속)이 형상화되는 날이 온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죽음을 마냥 슬퍼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망자(죽은 자)를 예우하는 일은 죽은 시체를 잘 매장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흙에서 온 인생이 흙 속에 잘 묻히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비참한 인생도 없다. 그래서 옛날에는 극악무도한 죄를 짓고 죽은 자들은 땅 속에 묻지 않고 땅 바닥에 놓아 들짐승들의 밥이 되게 했다. 그것은 인간이 당하는 수치 가운데 가장 큰 수치 중 하나였다. 열왕기상에 나오는 아합과 이세벨 이야기에서 엘리야가 그들에게 전한 예언이 그런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왕상 21:23). 아합과 이세벨이 행한 극악무도한 죄의 심판으로 그들은 엘리야의 예언대로 그렇게 비참하게 인생을 마감한다.

 

아브라함은 평생의 도반(길벗)이자 돕는 배필이었던 아내 사라의 삶을 예우하기 위해서 그녀의 죽음 앞에 슬퍼만 하지 않고 일어나 그녀의 무덤을 마련하고자 한다. 그리고 현재 살고 있는 지역을 다스리고 있는 헷족속에게 가서 죽은 아내를 매장할 땅을 줄 것을 요청한다. 이제 아브라함은 헷족속과의 긴장감 도는 흥정을 시작한다.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우선 아브라함은 헷족속 앞에 서서 자기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입니다”(4). 이것은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다. 지금 아브라함에게 필요한 것은 아내 사라를 매장할 수 있는 땅이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목적에 집중하는 사람은 그 나머지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 목적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낮출 준 안다.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을 이렇게 낮추면서 헷족속과 교감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핵심을 말한다. “죽은 제 아내를 장사 지낼 수 있게 여러분들의 땅을 제게 좀 나눠 주십시오”(4).

 

이에 대한 헷족속의 반응이 참 다행스럽다. 헷족속은 자기 자신을 낮춘 아브라함을 높여준다. “내 주여, 들어 보십시오. 어른께서는 우리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입니다. 우리 묘지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골라 돌아가신 부인을 장사 지내십시오. 어른께서 돌아가신 부인을 장사 지내신다는데 우리들 가운데 그 누구도 자기 묘지라고 해서 거절할 사람이 있겠습니까?”(6). 이는 아브라함이 나그네와 거류민으로서 약속의 땅에 살면서 얼마나 덕망 있는 삶을 살았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자성어에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이란 말이 있다. 이는 덕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웃이 있다, 따르는 무리가 있다라는 뜻이다. 누구를 대할 때 나 자신이 조금 손해 보며 대한다면 반드시 많은 이웃이 생겨 복된 삶을 누리게 된다. 또한 나 자신보다 약한 자를 돌봐주고 훈훈한 인정을 베풀면 서로 평화스러운 마음으로 바라 보게 되므로 어찌 외로울 있겠는가. ‘()’이란 자기 희생이다. 덕을 쌓는다는 것은 자기 희생, 즉 사랑을 통해서 쌓는 것이다. 덕은 용서하고 용납하고 이해하고 희생하는 것을 통해 쌓는 것이다. 이렇게 덕스러운 마음은 근본적으로 마음을 허탄한 데 두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둔 자들에게 오는 자연스러운 마음이다.

 

아브라함은 헤브론에 살면서 그곳을 다스리고 있던 헷족속과 충분한 교감을 가졌다. 덕스러운 말과 행동으로 충분한 교감을 갖는 것은 참 중요하다. 충분한 교감이 없는 가운데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교만과 욕심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충분한 교감을 쌓은 후에 말하는 것은 서로의 것을 나누는 사랑의 행위가 된다. 서로에게 유익을 주고 기쁨을 주는 사귐의 행위가 된다.

 

여기까지 보면 헷족속이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매장할 땅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땅 값을 충분히 지불하고자 한다. 제 값을 지불하고 합법적이고 영구적인 소유권을 갖기 원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한 땅이라고 공짜로 얻기를 원하거나 헐 값에 땅을 사고자 하지 않는다. 그에 정당한 대가를 충분히 지불하고자 한다. 이것은 십자가에서도 나타나는 대가의 완전성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위한 대가를 완전히 지불하시고 세상을 구원하신다. 하나님이기 때문에 구원을 싼 값에 이루시거나 헐값에 이루지 않으신다. 대가를 정당하게 지불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인 이유는 값싸게 구원을 이루셨기 때문이 아니라, 대가를 온전히 지불하셨기 때문이다. 온전한 대가를 지불한 구원은 그 어떤 것으로도 보상할 수 없는 신적 능력이다. 그래서 본 회퍼 같은 신학자는 하나님의 구원을 값비싼 은혜(teure gnade)’라고 부른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윤리를 넘어선 신앙의 행위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벌어지는 현실은 그런 신앙의 행위와 동떨어질 때가 많다. 거룩한 노동을 '헌신과 봉사'로 탈바꿈시켜 노동력을 착취하는 교회의 비루한 행동은 멈추어야 한다. 담임목사가 부교역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뿐만 아니라, 교인들이 목회자의 노동력을 '헌신과 봉사'로 착취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때로 교회에는 도대체 인권이라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교회는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그것을 훈련으로, 헌신으로, 봉사로 미화시킬 때가 많다. 노동력과 '헌신과 봉사'는 구분되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의 헌신과 봉사는 감사와 찬미로 주님께 영광 돌리는 신앙 행위이지만, 교회 안에서의 노동력은 그 대가를 정당하게 지불되는 것으로 주님께 영광 돌리는 신앙 행위이다.

 

교회의 일꾼(교회에서의 노동을 통하여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치기로 서원한 고귀한 직분'이다. 그러나 그것을 빌미로 부당한 노동력 착취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헌신과 봉사'를 빌미로, 교회의 일꾼(담임이든 부담임이든, 전임이든, 파트타임이든, 교회 일반 사무직이든 관리직이든)의 노동력이 착취당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런 일이 교회에서 얼마나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는지 다 아는 사실 아닌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치기로 작정했다'는 신앙적 결단이 곧 인권과 노동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유린당하고 착취당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매장지이자 하나님께 받은 약속의 땅을 매입하는 데 정당한 대가(상인이 통용하는 은 400 세겔)를 모두 지불하고 헷족속이 모두 보는 앞에서 그 땅이 자신의 소유지가 됐음을 선포한다. “성문에 들어온 모든 헷 족속이 보는 데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된지라”(18). 헷 족속이 무상으로 주겠다고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이렇게 약속의 땅을 한 켠 얻으며 정당한 대가를 모두 지불하려고 했던 것은 약속의 아들을 얻는 과정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정의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손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기까지 아브라함이 지불해야 했던 대가는 매우 혹독했다. 약속의 자식이니까 어렵지 않게 낳을 수 있을 거라는 얄팍한 생각은 하나님 앞에서 허용되지 않았다. 모든 대가(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믿음이 모든 대가였다)를 지불하고 약속의 자식을 어렵게 얻었을 뿐만이 아니라, 얻은 자식을 지켜내는 일도 쉽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여 100세에 얻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까지 하셨다. 그 모든 시련과 시험을 믿음으로 이겨냈을 때 비로소 자식에 대한 약속이 성취된 것이었다.

 

아브라함이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땅을 구입한 것은 땅에 대한 약속의 성취이다. 그러나 이것은 약속의 성취일 뿐이지 완성은 아니다. 이것은 성취의 시작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하나님의 새창조에 대한 종말론적 성취요 비전인 것처럼, 사라의 매장지는 땅의 약속에 대한 종말론적 성취요 비전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비전이 무엇인지 알게 된 그리스도인이 이제부터 그 비전의 완성을 향해 달음질 해야 하는 것처럼, 사라의 죽음과 매장지의 구입을 통하여 이제 시작된 땅에 대한 약속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약속의 완성을 향해 달려야 하는 그들의 비전인 것이다.

 

사라의 죽음은 남편 아브라함에게도 아들 이삭에게도 큰 아픔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사라의 죽음이 아픔으로만 끝나지 않는 것은, 그의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비전과 삶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은 비통한 것이기도 하지만 축제이기도 하다. 바로 아래의 시처럼.

 

축제

 

축제다

독수리 대여섯 마리의 흥분

날갯짓

쪼는 부리

통통통 구르는 발

 

그들의 축제는

아마딜로의 죽음에서 비롯된다

 

세상이 늘 그렇듯이

아마딜로의 죽음은

이중적이다

 

슬픔이며 기쁨이다

상실이며 기회다

곡이며 흥이다

 

피곤과 지루가 베어 있는 오후

무심한 햇살은

껍데기만 남은 독수리 한 마리가

아마딜로와 같은 운명으로

저만치 널브러져 있는 장면을

조명처럼 비추고 있다

 

저것은 또 누구의 축제 현장이었을까

(장준식 作)

 

과거에 나는 없었고, 미래에도 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오직 현재에만 존재한다. 그러나 내가 존재하는 현재를 시점으로 과거와 미래는 같을 수 없다. 내가 현재에 존재하면서 해야 할 일은 과거와 미래가 동일한 세상으로 남아 있지 않게 하는 것이다. 나로 인해 과거에는 없었던 그 무엇이 미래에 존재케 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처럼 기도하고, 사라처럼 헌신하고, 헷족속처럼 협력하는 이 땅의 나그네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이전의 세상과 그리스도 이후의 세상은 같지 않다. 그리스도 이전의 세상은 약속의 세상이고, 그리스도 이후의 세상은 약속 성취의 세상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이후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약속의 성취 안에서 약속의 완성을 향하여 미래를 열어젖히며 살아간다.

 

이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있어 사라 죽음 이전의 세상과 그 이후의 세상은 같지 않다. 사라의 죽음을 통하여 열려진 미래가 그들 앞에 놓여 있다. 사라의 생명을 통해 존재하게 된 약속의 자식이 사라의 죽음을 통해 존재하게 된 약속의 땅에서 이제 약속의 완성을 향해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라의 죽음은 비통이 아니라, 축제로 승화된다.

 

이처럼 죽음은 단순한 존재의 소멸이 아니다. 죽음은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악마적인 그 무엇도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향해 믿음으로 끊임 없이 삶의 현실을 뚫고 나간다면, 어느 순간 틀림 없이 맞닥뜨리게 될 죽음은 단순한 사라짐이 아니라 미래를 열어젖히는 축제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삶의 토대를 마련하고 끊임 없이 거기에 집중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을 믿음이라 부르는데, 바로 그것이 철저한 현실인 죽음을 순간영원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삶의 정열 아니겠는가(키에르케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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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9. 19. 06:31

이삭의 결혼

아브라함이 받은 범사의 복

창세기 24

(창세기 24: 1-67)

 

사라는 죽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통하여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의 한 켠을 차지할 수 있었다. 누군가의 죽음은 슬픈 일이지만, 그것이 헛된 것으로만 끝나지 않는 것은 그 죽음이 누군가의 인생에는 거름이 되어 새로운 삶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사라가 죽기 전에 어떤 유언을 남겼겠는가? 그리고 그의 죽기 전 가장 큰 소망이 무엇이었겠는가? 아마도, 어렵게 얻은 아들 이삭이 좋은 처자와 결혼하는 것 아니었겠는가. 엄마는 죽었지만, 엄마의 소망은 죽지 않는다.

 

창세기 24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1). 어떻게 보면 참 모순 된 말인 것 같다. “늙음과 복이라는 단어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늙는 것을 부끄럽게생각하는 현대 사회의 허상일 뿐이다. 늙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신비한 일이다. 다른 말로 늙음은 신비이다. 늙음 속에는 신비가 감추어져 있다. 늙었다는 것 자체가 복이다. 복 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늙겠는가. 그러므로 현대 사회는 늙음을 신비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던 고대인의 영성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늙음의 신비에 눈 뜰 때, 우리는 늙은 이들을 천대하는 것이 아니라, 비로서 그들을 마음으로 존경하고 우대하게 된다. 늙은이를 존경하는 일은 사회적 규범이나 의무 또는 윤리를 넘어선 신비에 대한 눈뜸이다.

 

아브라함은 범사에 복을 받았다. 이 구절을 영어로 보면 이렇다. “The Lord had blessed Abraham in every way.” 여기서 ‘every way’라는 말에 주목해 보자. 이것은 어떤 길을 가든 무엇을 하든 복을 받았다는 뜻이다. 이것이 참 쉽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범사에(every way)’에 복 받기를 끊임 없이 간구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길이, 무엇이 복된 길이고 복된 일인지 잘 알지 못한다. 그저 우리는 우리 앞에 놓여진 길을 가고 우리 앞에 놓여진 일을 할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미 예배해 놓으신 복된 길, 복된 일이라면 우리의 발걸음과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범사에 복을 받은 것에 대한 증거가 바로 이삭의 결혼 과정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죽음에 대한 고통을 이겨내고 이제는 아들 이삭의 삶을 돌본다. 이삭을 결혼시키는 것이 나이 많은 아브라함의 마지막 과제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중 땅에 대한 것은 이제 사라의 죽음을 통해서 성취되었다. 이제 남은 약속은 자손에 대한 것인데 그것은 아들 이삭의 삶을 통해서 성취되어야 한다. 그 출발점이 결혼이었다. 그러므로 이삭의 결혼은 매우 중차대한 일이었다. 아브라함은 이 중차대한 일을 진행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종들 중 가장 신실한 종을 부른다. 그리고 그에게 이삭의 결혼이라는 중차대한 일을 맡기면서 이 일이 얼마나 중차대한 일인지를 환기시킨다. 그것은 다음의 의식(ritual)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하건데 내 허벅지 밑에 네 손을 넣어으라”(2).

 

의식(Rituals)은 사소하고 지루하고 권태로운 일상을 구원하여 그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일상이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하여 쉴새 없이 정신 없는 삶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구원은 일상의 구원이다. 우리가 아무런 의미 없이 반복하는 듯한 그 지루한 일상은 사실 우리 인생의 전부이다. 인생은 뭔가 특별한 일로 구성된 무엇이 아니라, 일상으로 구성된다. 일상은 사소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매우 의미 있고 특별하다. 우리의 생명을 보존해주는 것은 어떤 특별한 일이 아니라, 일상이다. 우리는 일상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 일어나고 식사하고 일하고 누군가와 만나고 하는 일을 반복한다. 그것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 그것을 지루하고 권태롭고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그러한 일상생활 때문에 이렇게 생존해 살아가는 것이다.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일상은 매우 소중한 것이고 우리의 삶의 전부이다. 그런 일상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바로 의식(Rituals)을 통해서 가능하다. 우리는 삶 속에서 일어나는 특별한 일에 대해서는 무의식적으로 의식을 행한다. 가령 결혼을 한다든지, 졸업을 한다든지, 생일이라든지, 그런 특별한 일에 대해서는 의식을 통하여 그날 또는 그것을 환기시킨다. 의식이 왜 특별한 날에만 행해져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의식은 특별한 날에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 자체에서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의 일상을 사소함에서 구원할 수 있다. 밥 먹기 전에, 잠 자기 전에, 잠에서 깨어나,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기 전, 누군가를 만나기 전, 그 일상이 지장 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 짧게 의식을 행한다면 우리가 이제 맞닥뜨리게 될 일상은 사소하고 지루하고 권태로운 것에서 구원된다.

 

의식을 통하여 어떤 일에 관계된 모든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한 중요성을 환기한다. 아브라함 입장에서 이삭의 결혼은 매우 중차대한 문제 일 수 있으나, 아브라함의 종의 입장에서 이삭의 결혼은 그저 또 하나의 지루한 일상일 수 있다. 종은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일상인데, 이삭의 결혼을 수행해야 하는 종의 입장에서는 이삭의 결혼이 아브라함이 생각하는 것만큼 중차대한 것이 아니라, 그저 또 하나의 수행해야 할 지루한 일상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그것을 알았던 것일까? 아브라함은 종에게 이삭의 결혼을 그냥 맡기지 않고 의식을 통해서 맡긴다. 이삭의 결혼이 얼마큼 중요한 것인지 종에게 환기시키는 것이다. ‘허벅지에 밑에 손을 넣는의식을 통해 아브라함의 종은 그가 맡은 일을 지루한 일상에 머물러 있게 하지 않고, 정신 차리고 성실하게 수행해야 할 중차대한 일로 승화시킨다.

 

의식을 통하여 아브라함이 그의 종에게 내린 명령은 이것이다.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3-4). 종의 임무는 이삭의 아내를 가나안 땅이 아닌, 아브라함의 고향 하란 땅에서 찾아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종은 그 임무를 받아 들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여자가 나를 따라 이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서 만약 그렇다면 이삭을 그 여자가 살고 있는 땅으로 데리고 가야 합니까?”라고 질문한다(5).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다음과 같은 강력한 지침을 내린다.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아니하도록 하라”(6). 여기서 ‘~하도록 하라는 히브리어 히샤메르 레카를 번역한 것인데, 이것은 매우 강력한 표현으로써 결코 이삭을 그리로 데라고 가지 말 것에 대한 당부이자 주의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왜 이토록 강력하게 이삭을 그리로 데리고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브라함의 신앙 때문이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선택을 받아 가나안 땅에 왔고, 하나님께서 이 가나안 땅을 자신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이삭은 이 땅을 절대로 떠나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 것이다. , 이삭의 결혼이 중요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이 땅을 떠나서 결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삭의 아내를 찾는 일은 아브라함 집안의 개인적인 일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길을 간다는 것은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서,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서 결정하고 진행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내가 하는 이 일이 과연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 있는가,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 있는가를 살펴 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삭의 결혼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과의 언약도 중요하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무시하고,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서 결정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해 놓고 하나님 보고 그 결정을 인정하시든지 말든지 하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혼시키는 데 있어 쉬운 길을 택할 수도 있었다. 가나안 여인과 결혼 시킨다든지, 자신의 고향 땅에서 여자를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라 이삭을 그쪽으로 보내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서 결정하고 선택하고 일을 진행시켜야 하는 거룩한 의무가 있기 때문에 쉽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종이 한 질문을 뒤집어 보면 이런 것이다. 주인님, 왜 쉬운 길이 있는데 그렇게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십니까? 이삭을 가나안 여인과 결혼시키면 얼마나 쉽습니까? 여자를 주인님의 고향 땅에서 이곳으로 데리고 오는 것보다 이삭을 그리로 데리고 가는 것이 얼마나 쉽습니까? 이렇게 쉬운 길이 있는데, 왜 굳이 이렇게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십니까? 이것은 아브라함의 종만이 갖는 의문이 아니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흔히 갖게 되는 의문이요 유혹이다.

 

아브라함은 쉬운 길에 대한 유혹을 물리치면서, 그리고 쉬운 길을 생각하는 그의 종의 생각을 바로 잡아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그의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He will send his angel before you!)”(7). 언약 안에 머물러야 하는,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서 걸어 가야 하는 어려운 길을 택하면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하며 쉬운 길이 아닌 주님의 길을 가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돌보심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의식(Ritual)을 통하여 이제 이삭의 결혼은 아브라함에게나 그의 종에게나 똑같이 매우 특별한 일상, 중차대한 일로 승화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게 될 아브라함의 종의 기도를 만나게 된다.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데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12). 정말 멋진 기도다. 우리가 일상에서 매일 같이 따라 해야 하는 기도이다.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며 그 길을 가는 우리에겐 끊임 없이 기도가 필요하다.

 

생각해 보자. 의식을 통해서 이삭의 결혼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했다고 할지라도, 아브라함의 종이 잠시라도 딴 맘을 먹게 되면 일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일단 길을 떠나면 그 길 떠난 사람의 행방은 그 사람이 돌아올 때까지는 확인할 길이 거의 없다. 그리고 변변한 교통 수단이 없었던 그 때에, 먼 곳을 여행하며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일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의 종이 딴 맘을 품고 얼마쯤 가다가 아무 여인이나 데리고 와서 주인의 명령을 온전히 수행한 것처럼 일을 꾸민다 해도 그것을 알아차리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보라. 언약 가운데서 진행된 이삭의 결혼이 얼마나 은혜 가운데 진행되는지. 아브라함의 믿음과 종의 신실함은 연합을 이루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낸다. 아브라함이 종에게 선언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자를 아브라함의 종보다 앞서 보내셨고, 종은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고자 끊임 없이 기도하면서 그 길을 걸어갔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선언한대로, 그리고 아브라함의 종이 기도한대로, 종은 한 여인(리브가)을 만나게 되고, 리브가와 그녀의 가족 모두의 동의 하에 은혜롭게 리브가를 하란 땅에서부터 가나안 땅으로 데리고 온다. 이 일이 진행되는 가운데 리브가와 그의 가족의 입술에서 나오는 신앙의 고백을 들어보라.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리브가가 당신 앞에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를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50-51).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서,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이루어진 이삭의 결혼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이삭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에 오랜 시간 동안 괴로운 시절을 보냈던 이삭은 자신 앞에 서 있는 약속의 아내 리브가를 보고 기뻐했다. 엄마는 죽었지만, 죽지 않은 엄마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이삭이 눈 앞에 서 있는 리브가를 더욱더 기쁘게 맞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엄마 때문이었다. 상실의 아픔을 겪은 사람에게는 지금 눈 앞에 서 있는 존재가 한 없이 더 귀해 보이는 법이다. 그러므로 이삭이 리브가를 맞아 아내로 삼고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었던 엄마의 죽음이 준 또 다른 선물이다. 참 눈물 나는 장면이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67).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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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9. 18. 05:12

야곱의 하나님 경험

창세기 34

(창세기 28:10-22)

 

형 에서의 복을 가로 챈 뒤, 궁지의 몰린 야곱은 엄마 리브가의 권유대로 집을 떠나 하란 땅으로 향한다. 길을 떠나기 전, 다행히도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고 가지만, 그 축복이 그의 인생에 어떻게 작용하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길은 멀고 험하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뒤에 나오는 야곱의 회상에 의하면, 그는 지팡이 하나만 의지한 채 집을 떠났다(32:10). 아무것도 걸치지 않을 채 엄마의 자궁을 통해 세상에 던져진 인생처럼, 그의 인생은 무(nothing)에서 시작된다. 그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지만, 마음 속은 번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그가 길을 가다 날이 저물었을 때 어떤 집을 찾아가 유숙을 청하지 않고, 그냥 노숙하게 되는 것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이는 마치 창세기 1장에서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 모습과 유사하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1:1). 아무것도 없고, 혼돈과 공허만 가득한 상태, 바로 야곱의 삶과 같다. 이것을 볼 때, 인생은 혼돈과 공허만 가득한 빈 상태(nothing)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만들어져 가는 창조와 다르지 않다.

 

야곱은 어느 집에 들어가 유숙을 청하지도 못하고, 괴로운 마음에 짓눌려 그냥 거리에서 노숙한다.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에서 잠을 청해보려고 주변에 있는 돌을 하나 가져다가 베개를 삼아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꿈을 꾼다. 꿈에서 야곱은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는 사닥다리를 본다. 그리고 그 사닥다리를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본다. 이것을 무슨 현실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일까?

 

야곱은 지금 그 어디에도 연결되어 있지 않고, 그냥 세상에 내던져진 것 같은 비참한 상황이다. 그런데 그가 꿈 꾼 대로 사닥다리가 이 땅에서 저 하늘 꼭대기에 닿았다는 것은 그의 인생이 어디에도 연결되지 않고 버려진 것 같아도, 그가 보지 못하고 있을 뿐 결국 이 땅의 인생이 저 하늘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리고 사닥다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자들(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 의지할 데 없는 야곱을 하나님께서 보호 하고 계신다는 현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꿈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것은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들었던 음성과 같은 것이었다.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13-14). 그리고 여기에 더 하여, 그의 고단한 삶의 여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까지 받는다.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자신의 현실을 다르게 보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고, 의지할 데 없는 것 같고, 온통 혼돈과 공허뿐인 것 같았던 인생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야곱은 하나님을 이렇게 경험하고 나서 인생을 다르게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

 

그 동안 하나님이 늘 자신과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했던 야곱은 이렇게 고백한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16).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여기 계신다. 나와는 상관 없는 곳, 다른 곳에 계신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 계신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여호와께서 바로 여기에 계신 것을 깨달은 야곱의 첫 번째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이것은 그냥 두려움이 아니라 거룩한 두려움이다. 귀신 나올 것 같은 등골이 오싹한 기분 나쁜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의 막혀 있는 오감이 하나님을 향해 전부 열리게 되면서 느끼는 거룩한 두려움이다. 등골이 오싹한 기분 나쁜 두려움은 그 자리를 얼른 피하게 하지만, 거룩한 두려움은 바로 그 자리에 꿇어 엎드리게 한다. 야곱은 거룩한 두려움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 바로 그곳에서 제단을 쌓는다. 자신이 베고 잤던 돌을 기둥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구별한 뒤, 그곳을 벧엘이라고 불렀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저 하늘에 있거나 어디 다른 곳에 있지 않다. 하나님의 집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만난 곳, 하나님을 만나 거룩한 두려움을 경험한 곳, 하나님을 만나 제단을 쌓는 곳, 하나님을 만나 예배 드리는 곳,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다. , 하나님은 어디 다른 데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바로 지금 여기에 계신 분이다.

 

야곱은 거룩한 두려움 가운데 예배 드린 뒤, 하나님께 서원한다. 서원은 어떤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난 신비한 체험에 뒤따르는 자발적인 감사의 행위이다. 야곱의 서원을 보면, 그는 어떤 조건 하에서 자신의 서원을 이행할 것처럼 보인다.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20-21).

 

그런데 이것은 어떤 조건이라기 보다, 이미 야곱에게 주어져 있는 은혜이다. 하나님은 이미 야곱과 함께 하셨고, 이미 야곱이 바라는 대로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고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야곱의 서원은 조건이 충족되면 성립되는 서원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자발적인 응답이라고 보아야 한다.

 

물론 서원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소원을 아뢰고, 그 소원을 이루어주시면 어떻게 하겠다는 서원도 있다. 사사기에 등장하는 입다의 서원이 그 경우이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자신을 맞으러 나온 사람 중 첫 번째 나온 사람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서원이었다. 사무엘상에 나오는 한나의 서원도 그러한 서원이었다.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서원이었다.

 

예레미야서에는 아주 특이한 서원이 나온다. 레갑 족속의 서원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명하여 레갑 족속을 불러 놓고 그들에게 포도주 마실 것을 권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예레미야는 레갑 족속을 불러 놓고 포도주를 권한다. 그런데 레갑 족속은 그 권유를 뿌리치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겠노라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원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너희가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을 소유하지도 말고 너희 평생 동안 장막에 살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머물러 사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 하였으므로 우리가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한 모든 말을 순종하여 우리와 우리 아내와 자녀가 평생 동안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살 집도 짓지 아니하며 포도원이나 밭이나 종자도 가지지 아니하고 장막에 살면서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한 대로 다 지켜 행하였노라”(35:6-9).

 

레갑 족속의 서원은 매주 자발적인 서원이지만 그 성격에 있어서는 매우 고무적이고 의미심장하다. 레갑 족속의 서원은 지극히 준엄한 생활을 하면서 족장들의 간소한 생활방식의 모범을 배우려 한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레갑 족속이 하고 있는 것은 가나안 문화에 대한 저항이었다. 가나안 사람들이 받아들인 농경문화는 부를 축적하고 그 안에서 온갖 타락한 모습을 보였다. 가나안의 농경문화는 성적타락은 물론이요 종교적 타락을 불러왔다. 그리고 모든 것을 그저 소비만 하는 문화였다. 과연 현재 소위 선진국들이 지향하고 누리는 소비문화와 다를 바 없다. 레갑 족속은 그러한 타락하고 소비적인 문화에 저항하기 위해서 서원했던 것이다. 소비를 위해 무분별한 자원 낭비를 조장하는, 그래서 지구온난화 문제로 생태계의 위기를 겪고 있는 현재의 지구적 위기를 돌아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이 한 번 진지하게 이행해 볼만한 서원이다. 저항은 살기 위한, 생명을 위한 몸부림이다.

 

야곱의 서원은 이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해주시는 은혜에 응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다이다였다(21-22). 여기에서 십일조가 나오는데, 이것을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당연히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로 읽으면 곤란하다.

 

십일조는 단순히 소득의 십분의 일을 떼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다. 십일조는 대표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십분의 일을 떼서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그 십분의 일 안에 자신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십분의 일은 단지 소유의 십분의 일만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십분의 일을 떼어서 하나님께서 십일조 드리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이 이행해야 할 의무를 다 했다고 말하는 것은 착각이고 교만이다. 그것은 전혀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 들어가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야곱이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한 고백은 하나님께서 야곱과 언제든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에 응답하여 자기 자신도 언제든지 하나님과 동행하겠다는 신앙고백이다. , 야곱은 이제부터 하나님 안에서 삶을 살아가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안과 밖은 구분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현존 안에 있게 된 것이다. 야곱은 이제 하나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빚어져 가는 거룩한 인생을 살게 된 것이다.

 

야곱의 하나님 경험은 그를 구원으로 인도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구원의 약속이다. 고대인들에게 땅과 자손은 자신의 생명을 길이 잇는 영생이나 다름 없었다. 땅이 그들의 어머니였고, 자손이 그들의 생명이었다. 그래서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은 곧 구원에 대한 약속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 경험은 구원의 경험이요,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거룩한 두려움의 경험이다.

 

야곱은 꿈에서 땅과 하늘을 잇는 사닥다리를 경험하고, 하나님께서 바로 여기에 계신 것을 깨달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서,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땅과 하늘을 잇는 사닥다리를 경험한다. 그 사닥다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누구에게나 보이는 것은 아니다. 야곱이 꿈 속에서 하나님 경험을 통해 비로서 깨닫게 되었듯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닥다리가 우리의 현실에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단 깨닫고 나면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현실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알게 되고 거기에 대한 반응으로 그리스도의 제자(그리스도인, a follower of Christ)가 될 수 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뜻이 임마누엘이다. ,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봄으로 눈에 보이는 현실, 공허와 혼돈이 가득한 현실 속에서 완전히 새로운 현실을 본다. 그 현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영생(하나님의 생명)의 현실이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현실은 죽음과 혼돈, 그리고 참을 수 없는 공허함이 가득한 것 같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은 새창조의 사역이다. ,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안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시며, 우리에게 무한한 생명의 나라를 안겨 주신다.

 

이것을 경험하는 자, 이것을 깨닫는 자는 하나님께 서원할 수 밖에 없다. 그 서원은 다름 아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나서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 구원이 있고, 거기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바로 여기에 계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현실을 경험하는 자, 하나님과의 일치되는 거룩한 두려움 속에서 영원한 생명(하나님의 영)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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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9. 15. 05:13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 그리스도의 빛에서 보기 -

(삼상 17:41-51)

 

사무엘상 17장은 다윗의 용맹성에 대해서 묘사되어 있다.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역사에 등장하게 된 다윗은 정신적 병 때문에 고통 받던 사울의 수금 타는 자로 왕궁에 입성하게 된다. 그때 다윗을 수금 타는 자로서 사울에게 소개한 자는 다윗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내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을 본즉 수금을 탈 줄 알고 용기와 무용(a mighty man of valor)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삼상 16:18). 여기서 소개되고 있는 것처럼 다윗의 용기와 무용은 골리앗과의 대면에서 증명된다.

 

사무엘상 14장에서 보았던 것처럼, 사울 왕의 장남 요나단의 기지로 인해서 블레셋을 물리치고 한 동안 블레셋과의 전쟁은 소강상태에 있었다. 시간이 지나 블레셋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다시 일으킨다. 그런데 이때 블레셋은 골리앗이라고 하는 거인 같은 장수를 앞세워 이스라엘을 위협한다. 4절에 걸쳐 묘사되고 있는 골리앗의 위용은 압도적이다(삼상 17:4-7).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스를 보는 것 같다. 골리앗의 위용에 주눅이 든 이스라엘 군사들은 아무도 그와 대적하기 위해 나서는 자가 없었다. 골리앗은 그런 이스라엘 군사들을 조롱했고, 이스라엘 군사의 심리를 무너뜨리기 위해 급기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까지 모욕한다.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와 더불어 싸우게 하라”(17:10).

 

싸움을 돋우는 자골리앗의 모욕을 한 창 당하고 있을 무렵, 다윗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대치하고 있는 엘라 골짜기에 오게 된다. 다윗의 큰 형 셋이 그 전쟁에 참전하고 있었기에 아버지 이새가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오라 했기 때문이다. 다윗이 전장에 도착했을 때, 때마침 골리앗이 싸움을 돋우기 위해 이스라엘의 군대와 여호와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골리앗과 싸우려고 나서는 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아무도 나서는 자가 없는 가운데 그들은 서로 이런 말만 주고 받았다. “(골리앗)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의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버지의 집을 이스라엘 중에서 세금을 면제하게 하시리라”(17:25).

 

다윗은 이 상황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골리앗이 여호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골리앗과 상대할 의사를 내비친다.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17:26). 그리고 다윗은 자신이 골리앗과 상대하기 위해 나서려고 하는 이유를 상금 때문에 아니라 신앙 때문임을 밝힌다.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17:26).

 

다윗은 무엇보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가 모욕 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이것은 그가 얼마큼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에 대한 증거이다. 마음 속 깊이 진실되게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그것이 진실된 행동으로 나타난다. 어린 아이가 아무리 힘이 없어도, 사랑하는 부모님이 누군가에게 모욕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면 가만히 있지 않는 것과 같다.

 

다윗의 이런 마음은 사울 왕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던 사울 왕은 다윗을 불러 참전 의사를 확인한다. 그리고 다윗은 이렇게 담대하게 말한다. “(골리앗)로 말미암아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17:32). 다윗의 이러한 용기는 가상하지만 그래도 골리앗과 싸우는 것이 무리하고 생각한 사울 왕은 다시 한 번 묻는다.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니리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라”(17:33). 이에 대해 다윗은 자신이 그저 소년이 아니라, 양을 치면서 양을 잡아 먹으려 하는 사자나 곰 등을 물리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골리앗과 싸워 볼만한 무용을 갖춘 자라는 것을 호소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사자나 곰을 물리친 것은 단순한 용맹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주셨기 때문이라고 신앙고백 한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이리다”(17:37).

 

다윗의 용맹과 신앙을 확인한 사울 왕은 다윗에게 나가서 골리앗과 싸울 것을 허락한다. 그리고 다윗에게 자신의 갑옷과 칼을 내어준다. 그만큼 다윗에게 신뢰를 보낸다는 뜻이다. 그러나 다윗은 갑옷과 칼이 불편하다고 말한 뒤, 자신이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물매와 돌 다섯개를 손에 쥐고 출전한다.

 

골리앗은 갑옷을 걸치거나 칼을 차지 않은 상태에서 물매만 가지고 자신을 상대하기 위해 나온 다윗을 보고 기가 막혀 한다.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왔느냐?”(43). 그러면서 다윗을 저주한 뒤 다윗을 공격하려 한다. 그때 다윗은 담대하게 이렇게 외친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45).

 

싸움은 굉장히 싱겁게 끝난다. 그토록 이스라엘 군대를 숨막히게 했던 골리앗이 다윗의 물매 돌 하나에 쓰러지고 만다. 골리앗은 이 싸움에서 칼 한 번 제대로 휘둘러 보지 못하고 죽는다. 앞에서 전개된 이야기에 비해서 허무하게 결말이 맺어진다. 그렇게 골리앗은 다윗의 물매 돌 하나에 인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리고 다윗은 골리앗을 사자나 곰보다도 못한 개 한 마리 쓰러뜨리듯이 쉽게 쓰러뜨린다. 골리앗을 앞세워 전쟁에 나섰던 블레셋은 골리앗의 죽음과 함께 사분오열되어 도망친다. 그리고 전쟁의 승리는 이스라엘의 것이 된다.

 

우리는 통쾌해 보이는 이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생각해 보아야 하는가? 골리앗과 같은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두 물리쳐야 한다? 골리앗과 같은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하나님을 모욕하는 자는 가만히 놔두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 전쟁은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까, 그 분을 믿기만 하면 우리 삶에 있는 전쟁은 모두 해결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무조건 이긴다?

 

위에서 열거한 것들도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통해서 엿볼 수 있는 교훈일 수 있겠으나, 나는 그것을 넘어서 위의 열거된 교훈의 위험성을 말하고자 한다. 구약성경을 읽는 데 있어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에서 읽어야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해, 성경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빛 아래서 성경을 읽지 않으면, 자칫 잘못하다간 성경이 오히려 폭력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보듯이, 그리스도는 폭력을 끝내신 분이지 폭력을 조장하신 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없다.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에서 조장되고 있는 폭력의 메커니즘을 한 번 보자. 거기서 허용되는 폭력의 메커니즘은 바로 이 문구에서 온다.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17:26). 여기서 다윗은 블레셋 사람 골리앗은 할례 받지 않은이라고 존재를 상대화시킨다. 이것을 전문 용어로 타자성(otherness)’이라고 한다. 상대방에 대한 폭력은 몇 가지 절차를 걸쳐서 이루어지는데, 가장 먼저 행해지는 것이 바로 상대방을 타자로 만드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할례 받은 사람들의 집합이다. 이스라엘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 할례를 않았다면 그는 이스라엘의 울타리 밖으로 내몰린다. 상대방에게 폭력을 가하려면 일단 울타리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그래야 폭력이 행사되더라도 죄책감에 시달리거나 폭력행사에 대한 거부감을 없앨 수 있다. 지금 다윗이 골리앗을 그야말로 취급하며 한 방의 폭력으로 물리칠 수 있는 것은, 골리앗을 자신들의 울타리 밖에 있는 할례 받지 않은사람임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이 기독교의 경전으로 읽혀지기는 하지만, 구약성경은 유대인의 고유한 역사 속에서 형성되어 온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고유한 역사의식과 하나님 인식에 대한 이해를 갖지 않고 보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에 큰 위협을 가할 수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기독교 역사는 구약성경을 신약성경의 빛에서, 즉 그리스도의 빛에서 봐야 한다고 늘 강조해 왔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표면적으로 읽으면, 승리는 폭력에 의해서 쟁취된다는 결론을 얻는다. 비록 다윗이 골리앗보다 외적으로 보기에 왜소했지만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다는 논리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이긴다는 것이 맞기도 하지만 틀리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이기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폭력의 극대화를 통해서 승리를 쟁취하게 하시지는 않는다. 폭력을 통한 승리는 결코 그리스도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구원한 것은 이 세상의 공중권세 잡은 자들과의 폭력적인 전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과 사랑을 통해서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은 폭력이 아니라, 비폭력이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들, 즉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철저하게 폭력에 저항하고 그리스도처럼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과 사랑을 통한 승리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밖으로 소외되는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가 안에 있는형제자매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자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3:28). 여기서 더 나아가, ‘죄인까지도 밖으로 소외시켜서는 안 된다고 성경은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기때문이다(5:8).

 

우리는 상대방에게 폭력을 행사하기 위해 너무도 쉽게 그들과 우리를 구별 짓는다. 폭력을 행사하기 위해 그들을 울타리 밖으로 내쫓는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폭력을 행사한다. 오히려 그들은 폭력의 희생자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진실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라면,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는 그 어떠한 폭력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 폭력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 어떤 사람도 우리의 울타리 밖으로 밀어내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원수라 할지라도 사랑의 띠로 꼭 묶어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품고 있어야 한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그저 다윗의 용기와 무용을 보여주기 위한 에피소드 정도로만 읽은 것이 좋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성군으로서 유대인들이 다윗을 위대한 인물로 만들기 위한 장치였다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다윗의 폭력 행위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모범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다. 다윗이 우리의 주님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다. 그리스도인은 폭력을 조장하는 자들이 아니라, 폭력에 저항하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의 삶을 언제나 비추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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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