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4. 3. 10. 05:02

지식과 생명의 일치를 향하여

( 2:15-17; 3:1-7)

 

지난 수요일, 참회의 수요일 (Ash Wednesday)을 시작으로 우리는 사순절에 들어섰습니다. 사순절은 40일을 의미합니다. 참회의 수요일부터 부활절 전날까지, 중간중간에 끼어 있는 주일은 빼고 40일 동안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묵상하며 그리스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영적 훈련의 기간입니다. 여기서 중간중간 끼어 있는 주일40일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금식기도 할 때, 주일은 금식기도를 안 하는 것도 좋습니다. 금식기도는 주님께 집중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거나 자신의 공적을 쌓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활절은 어떻게 정해지는지 아십니까? 춘분이 지나 오는 보름달 후 첫 번째 주일이 부활절 입니다. 춘분은 대개 3 21일쯤 됩니다. 그 후 보름달이 얼마나 빨리 뜨느냐에 따라서 부활절이 빨리 오느냐 좀 늦게 오느냐 결정되는 것이죠. 올해 같은 경우는 춘분인 3 21일을 지나, 보름달이 뜨는 날이 4 14일이기 때문에, 보름달이 뜬 그 날 이후 첫 번째로 맞는 주일이 4 20일이기 때문에 부활절이 4 20일로 정해진 것이죠. 이 법칙만 알면 매년 부활절이 언제인지 스스로 계산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참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해서 광야에서 보낸 시간이 40년이고,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 가셔서 금식하시며 하나님을 만난 기간이 40일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마귀의 유혹이 왔습니다. 교회가 40일을 정해 사순절로 지키는 이유는 예수님의 40일 간의 영적 훈련을 모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순절 첫 번째 주일을 지키면서 우리는 인류 최초의 유혹이 들어있는 창세기의 말씀을 보고,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 당하시는 부분을 읽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창세기의 말씀만 읽었고, 복음서의 말씀은 대부분의 분들이 너무 잘 아시는 이야기라 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창세기의 말씀과 복음서의 말씀이 엮여 선포될 것입니다.

 

창세기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들에게 복 주신 후 어떻게 우리 인간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사실, 죄는 미스터리입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온전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떻게 죄가 들어오게 되었는지, 하나님께서 왜 죄가 당신의 창조세계에 들어오게 놓아두셨는지, 등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창세기가 이런 것들에게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창세기의 말씀을 통해서 죄에 대해서 약간의 이해를 가질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창세기는 죄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들어온 것은 미스터리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미스터리는 신비인데, 이는 우리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고, 감추어져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실체가 아직 파악되지 않았고, 파악되어 가는 중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드러날 것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신비는 종말론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게 될 종말에는 모든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생명의 신비도 드러날 것이고, 죄의 신비도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니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현재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것이라고 무시하거나 등한히 할 것이 아니라, 인내를 가지고 그것에 대한 실체를 알아가도록 계속 노력해야 합니다.

 

창세기의 이야기와 복음서의 이야기는 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결론이 완전히 반대입니다. 정황은 이렇습니다. 우선 창세기에서 보면 사탄이가 아담과 하와를 꼬드겨서 하나님을 거역하게 합니다. 뭔가 솔깃한 것을 인간에게 던져주어서 그것을 덥석 물게끔 합니다. 그런데 사탄이가 제시하는 솔깃한 것은 바로 하나님에게 정면으로 대항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매력적인 것이죠.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는 일이었습니다. 뱀의 형상을 한 사탄이가 아담과 하와에게 이렇게 말하며 꼬드깁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

 

우리 인간에게 가장 크게 다가오는 유혹은 바로 하나님처럼 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죄악은 바로 이 마음 때문에 생겨나는 겁니다. 피조물로 살기보다 인간은 스스로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삽니다.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은 뭔가를 좀 아는 것처럼 살게 된다는 겁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매우 매력적인 일입니다. ‘안다는 것은 히브리어의 야다라는 말인데, 부부관계에서 서로를 알듯이 훤히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그것이 얼마나 매력적입니까? 우리의 인생이 불안하고 답답한 이유는 우리는 한치 앞도 우리의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당이나 점집이 잘 되는 겁니다. 뭔가를 알고 싶어 하는 인간의 강렬한 욕구와 앞날을 알려주는 무속의 기능이 잘 맞아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을 때, 그들은 정말로 무엇인가를 알게되었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3:7a). 그런데 하나님처럼 되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낭만적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어 무엇인가를 알게 된 첫 번째가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게 된 것인 것을 보면 말입니다.

 

뭔가를 안다는 것은 이런 상황과 같은 것입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어느 농부가 시장에 가서 거위 한 마리를 사가지고 왔습니다. 다음날 거위가 낳은 알을 가져다가 요리 해 먹으려고 거위 집에 갔는데, 가서 보니 거위가 낳은 알이 그냥 알이 아니라 황금알이었습니다. 너무도 신난 농부는 아내를 불러서 그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거위는 하루에 한 개씩 매일 아침 황금알을 낳았습니다. 그 덕분에 농부 부부는 점차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농부 부부는 서로 말하기를, 하루에 한 개씩만 황금알을 낳으니까 감질 난다는 겁니다. 한꺼번에 많은 황금을 손에 넣고 싶은 욕심이 생겼던 것이죠. 그래서 이들은 생각하기를 거위의 배를 가르면 거기에는 수 많은 황금이 들어 있을 거고, 그것을 차지하면 감질나게 하루에 한 개씩 황금알을 가질 필요 없이 한 번에 엄청난 부자가 될 거라고 믿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 농부 부부는 칼을 가져다가 거위의 배를 가릅니다. 물론 거위는 죽었죠. 그러나 거위의 배를 들여다 보니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거위도 잃고, 황금도 못 찾고, 아무런 이득도 없이 그렇게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에만 마음을 집중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 그 은혜가 족합니다. 한 눈 팔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는 한 눈 팔게 하는 유혹들이 엄청나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에게서 눈을 떼고 다른 곳을 바라보게 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눈을 떼고 다른 곳을 바라보는 바로 그 순간이 타락의 순간이고 죄악에 빠지는 순간입니다. 우리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입니다. 뭔가를 안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자기 스스로 뭔가를 이룰 수 있다는 교만이 싹트는 순간인 것이죠.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광야 시험 이야기 나오는 사탄의 유혹도 매우 매력적입니다. 1. 돌을 떡으로 만들어라. 2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라 그러면 천사들이 네가 땅에 닿기도 전에 너를 받들어 줄 것이다. 3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주겠다. 이게 다 뭡니까?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게 하는 교만한 마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실수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겁니다. 예수님 믿는다고 하면서 우쭐해지는 것이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피조물로,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복에 의존해서, 그것으로 만족해서 산다는 뜻이지, 하나님처럼 스스로 복의 주인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유혹 받습니다. 스스로 대단한 존재가 된 양 행동하고 싶어 합니다. 뭔가를 아는 사람인 것처럼 살아가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인간이 되는 법, 그리고 하나님께만 의존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광야에서 시험 당하시는 것과 똑 같은 시험이 왔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남은 구원하면서 자신은 왜 구원하지 못하느냐고 하는 비아냥거림이 들려왔습니다. 우리 상식에서도 십자가에서 핵폭발과 같은 엄청난 위력을 지닌 사건, 그리고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어가던 예수를 바라보면서 조롱하던 사람들이 알아듣고 볼 수 있도록 무슨 엄청난 일이 일어났으면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아보고 더 잘 믿었을 텐데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십자가에서는 그 어떤 신적인 힘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한 인간의 무력한 죽음만이 십자가에 걸려 있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신 것입니까? 인간이 인간으로 사는 법을 가르쳐 주신 겁니다. 끝까지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복에 만족하는 법을 보여주신 겁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굉장한 겁니다. 지식과 생명의 일치가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처음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을 통해 지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식이 그들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벗고 있다는 부끄러움(shame)’만 맛보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한계입니다. 우리가 가진 지식과 생명이 자꾸 일치되지 못한다는 것이 우리에겐 곤욕이고 아픔입니다.

 

일례로 노벨상의 제정한 알프레드 노벨이라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지식을 통해서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자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했습니다. 그러나 노벨은 자기가 발명한 다이나마이트가 새 문명을 건설해가는 어려운 공사에 이바지되는 것은 기뻤으나 전쟁에 이용되어 많은 사람을 죽이는 힘이 되는 것은 도무지 참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지식이 생명과 일치하지 못하고, 결국 생명을 헤치는 일에 쓰이는 것을 보고 절망한 것이죠.

 

우리는 내가 뭔가를 좀 아는 것을 가지고 삶을 꾸려갑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를 풍성한 생명으로 이끌어주지 못할 때 우리는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참된 지식, 지혜는 우리는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데, 우리가 가진 지식은 생명으로 이끌지 못하는 것 같아 당황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바로 이것을 훈련하는 기간입니다. 순종. 순종이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것은 어쩐지 생명으로 나를 이끌어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를 참된 생명 가운데로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것, 그것이 순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그렇게 순종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는 한, 십자가를 피하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알량한 지식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 순종했고,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맡겼습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23:46). 그랬더니 거기에서 생명이 꽃처럼 피어났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태초의 인류 때부터 그런 일이 인류에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지식과 생명의 일치는 하나님께 순종할 때만 일어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그 일이 참인간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식과 생명의 일치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지식과 생명의 일치를 향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터득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니리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4:1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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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3. 2. 23:10

텐트(장막) 치고 사순절 맞기

마태복음 17:1-9

 

예수는 누구인가? 사람인가? 신인가? 예수라는 이름은 지난 2천 년 동안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수많은 질문거리를 주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간단하게,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2천 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나사렛에서 자랐으며, 갈릴리지역에서 주로 활동을 했고,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라는 사람을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믿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끊임없이 예수는 누구인가?”를 질문해왔습니다. 기독교회가 내린 최고의 결론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는 참 사람이고, 참 하나님이다. Vere Homo, Vere Deus. 이 말은 50%는 인간이고, 50%는 신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인물들 중에는 그런 존재가 많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과 차원이 다릅니다. 이 말은 100% 인간, 100% 신이라는 뜻입니다. AD 451년 칼케톤 공의회에서 확정된 교리입니다. 이후로,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모두 이단(정통이 아닌, not 나쁜놈)으로 낙인 찍혔습니다.

 

교회는 이것을 각각 성탄절기와 주현절기를 통해서 선포해왔습니다. 우리는 별로 생각 없이 성탄절기와 주현절기를 보내지만, 사실은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만들어진 교회력은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탄절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즉 참 사람됨을 증거합니다. 어떻게 증명합니까? 예수는 여느 사람들처럼 여자의 몸에서 태어납니다. 여기에 물론 신성을 증명하는 요소가 가미됩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긴 태어나는데,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동정녀탄생이야기입니다.

 

예수의 인성(사람됨)이 성탄절기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처럼, 이제 예수의 신성(하나님됨)이 주현절기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주현절기는 동방박사의 이야기와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시작됩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세례식 때에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리고 오늘, 주현절기가 끝나면서 우리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또 듣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렇게 해서 주현절기는 이 음성을 듣는 것으로 시작해서, 이 음성을 듣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신성이 희미하게 드러나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예수의 신성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지요.

 

우리는 오늘, 산상변모사건을 전해주고 있는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의 신성, 즉 예수님의 하나님 됨을 깊이 묵상합니다.

 

마태복음 저자의 진술에 의하면, 오늘 사건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첫 번째로 수난 예고를 하신 뒤 엿새 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 중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 이 장면은 분명히 구약의 두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오르는 장면과 그리고 엘리야가 모세처럼 시내산에 오르는 장면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상대로 씌어진 복음서이기 때문에 늘 이런식으로 구약과의 연결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우리는 기억합니다.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 즉 율법을 받았습니다. 엘리야도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으로부터 새 힘을 얻고 새로운 사명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합니다. 예수께서 높은 산에 올라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는 장면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눈치챌 수 있습니다. 율법을 통하여서 전해진 하나님의 의와 선지자를 통해서 전해진 예언이 바로 예수에게서 성취될 거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그곳에 갔던 세 제자는 자신들의 눈을 의심할 정도로 희한한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형되는 장면입니다.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리고 갑자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봅니다. 이것을 제자들의 반응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은 신적인 영광을 체험하고 모두 두려워 떨었습니다. 모세도 그랬고, 에스겔도 그랬고, 다니엘도 그랬고, 신적인 영광을 체험하고 두려워 떨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베드로는 횡설수설하면서 예수님께 제언을 합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우리도 중요한 장면,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은 비디오나 사진으로 담아두려고 합니다. 옛날에는 그러한 장치들이 없었습니다. 그저 그림을 그릴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풍습에는 그것을 저장하는 장치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절기(일종의 기억장치)입니다. 일례로 유월절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사건을 우리가 비디오나 사진에 담아두는 것처럼 담아둡니다.

 

이스라엘에는 장막절(초막절, 수장절)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들은 이 절기를 통해서 출애굽 이후 40년 동안 광야생활 한 것을 기념했습니다. 광야에서 텐트를 치며 생활했던 것을 기억하는 것이죠. 광야생활 동안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 그리고 위대하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한 기간이었죠.

 

지금 베드로가 예수님께 초막을 셋 지어서 여기에 있자고 하는 것은 바로 장막절에 지었던 그 텐트를 의미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유대인의 3대 절기는 유월절, 칠칠절(초실절, 오순절), 그리고 초막절(수장절, 장막절)입니다. 이 유대인의 절기 중, 장막절(초막절)이 가장 큰 절기였는데, 이것을 통해서 베드로는 변모사건을 기념하고 싶었던 것이겠죠. 유대인이었던 베드로로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주님, 기념 사진 하나 찍어 놓죠!” 정도가 될 겁니다.

 

이런 가운데 놀라운 일이 연속하여 벌어집니다. 갑자기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더니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구름은 신적표상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는 구름이 몰려듭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거기에 임했다는 뜻입니다. 구름 속에서,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진술하고 있는 겁니다.

 

제자들은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정신 못 차리고 있는데,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어루만지시며,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라고 하십니다. 모세도 사라졌습니다. 엘리야도 사라졌습니다. 그들 눈 앞에 여전히 서 계신 분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을 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고,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죠.

 

무서워 떨고 있는 제자들을 일으켜 세워 주시고, 제자들과 함께 산을 내려오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무서워 떨고 있는 제자들을 일으켜 세우신 것은 부활을 연상시킵니다. 그것이 곧 구원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 부활 사건이 바로 구원 사건입니다. 그것이 일어나기 전까지, 아무에게도 변모사건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완전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빛에서 보지 않으면, 변모 사건도 그 빛이 온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있은 뒤, 베드로가 어떻게 이 변모사건을 증거하고 다녔는지, 그리고 이 변모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는 베드로후서 1 16절 이하에 잘 나와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벧후 1:16-18).

 

사랑하는 여러분! 그들은 분명히 이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이 음성이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 드리며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들려야 합니다. 이 음성을 들은 여러분!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들려진 이 음성을 지금 이 자리에서 그들과 똑같이 들은 분은 베드로후서에서 베드로가 증거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를 그리스도로, 예수를 메시야로, 예수를 구원자로, 예수를 주님으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예수를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고백하게 될 겁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사실, 예수님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깨달은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내 안에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고백합니다. 성찬을 통해서 눈에 보이게끔 확실하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성찬식 때 단순히 떡과 포도주를 먹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습니다. 내 살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이요, 내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라는 고백입니다. 내 살과 내 피가, 내 살이 아니고 내 피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살이고 그리스도의 피인데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부활을 통해서, 오늘 우리가 살펴본 변모사건을 통해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깨달은 사람은 이제 내 몸과 내 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그리스도의 피로 삽니다. 그게 나에게 의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이제 이번 주 수요일에 있는 참회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사순절기가 시작됩니다. 충만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시간을 사는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시간을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눈 앞에 다가온 사순절 동안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요즘 텐트 치며 야영하는 레저 산업이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텐트는 장막인데, 장막절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살 때,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가장 가까이 체험한 것을 기념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하는 의식입니다. 모든 것이 너무 풍요로운 요즘, 우리는 광야와 같은 삶의 조건을 일부러 조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스로 만족한다는 조건을 다 갖추어 놓고 살면, 하나님이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끼어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만족을 조장합니다. 참된 만족이 없으면서도 우리는 만족을 조장합니다. 특별히 세상에서 말하는 풍요로움을 통해서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마치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처럼 이렇게 만족을 조장합니다. “내가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두리라영혼아 여러 해 쓸 문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12:18-19).

 

우리는 재물의 풍족함에 취해, 영혼의 빈곤함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며 삽니다. 이와 같았던 어리석은 부자에게 다음과 같은 선언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12:20-21).

 

재물에 집착할수록 영혼이 빈곤하다는 증거가 됩니다. 사람의 속성 중 하나가 바로 만족이 없을 때 어딘가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말고,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의 부족한 모습을 하나님께 노출(올려드림)시켜 드리십시오. 밥도 좀 굶어보고, 잠도 좀 안 자보고, 가난한 자에게 가진 것을 일부러 나누어 주고 좀 빈털터리로 살아 보기도 하고, 자발적인가난에 한 번 처해 보십시오. 만족이 없으면서 애써 만족하는 것처럼 재물로서 만족을 조장하지 말고, 있는 모습 그대로, 만족이 없는 모습 그대로 우리의 삶을 주님께 노출(올려드림)시켜 보자는 겁니다. 즉 우리의 삶을 광야와 같은 삶으로 한 번 만들어 보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시고, 풍요롭게 하시는지, 즉 우리의 삶을 어떻게 만족시키시는지 한 번 체험해 보자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사순절기를 맞는 것은 예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 받으실 때의 심정으로,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하나님께 인도하심을 받을 때의 심정으로, 하나님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몸소 체험하겠다는 영적인 갈급함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사순절기 동안 여러분이 각자 치시게 될 텐트는 다르겠지만, 여러분이 만나게 될 하나님은 동일한 하나님이십니다. 사순절기가 눈 앞에 왔습니다. 텐트 치고 사순절기를 맞읍시다.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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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2. 27. 06:22

소통 문제

창세기 17

(창세기 19:1-14)

 

2004년에 만들어진 <Crash>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인종과 계층 간의 차별, 즉 소통의 문제를 다룬 영화인데, 서로에 대한 편견 때문에 겪는 아픔 그리고 화해를 그린 영화입니다. 그 중에서 명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이란인 가게에 문이 고장 나서 그것을 고쳐주러 간 히스페닉 열쇠수리공은 자물쇠는 고쳤지만 문 자체가 문제이니 문을 꼭 고치라고 일러줍니다. 하지만 이란인 가장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돈을 돌려 달라고 고함칩니다. 히스페닉 열쇠수리공은 돈을 돌려 주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란인 가족의 가게는 강도를 맞고, 문을 고치지 않은 것 때문에 보험금 처리도 받지 못하게 됩니다. 가게가 털려 화가 난 이란인 가장은 화풀이를 하기 위해 히스페닉 열쇠수리공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퇴근해서 집에 돌아온 그에게 총을 겨누며 강도 맞은 피해 보상을 하라며 윽박지릅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히스페닉 열쇠수리공의 어린 딸이 아빠를 향해서 뛰어듭니다. 동시에 이란인 가장은 방아쇠를 당깁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비디오) www.youtube.com/watch?v=Tjct4zCo_Qg

 

다행히도 이란인 가장의 총에 들어있던 총알은 공포탄이었고, 열쇠수리공의 딸은 무사했습니다. 가게로 돌아간 이란인 가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소녀는 나의 천사야.”

 

이것 외에도 제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백인 경찰에게 부당하게 검문을 당하며 치욕을 겪은 방송국 PD 흑인 부부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흑인 부인이 교통 사고를 당해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는데, 자동차가 폭발하기 직전 본인을 구하러 온 경찰관이 바로 자신들을 욕보인 그 백인 경찰관이었습니다. 그 경찰관의 얼굴을 알아본 흑인 부인은 “no, not you”하면서 절체절명의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경찰관에게 구조받기를 거부합니다. 백인 경찰관은 사력을 다해 흑인 부인을 설득해서 자동차가 폭파되기 일보 직전에 그녀를 구출합니다.

 

모두 소통의 문제 때문에 벌어진 일들입니다. 아무리 사실을 말하고 도와주려고 해도 서로에 대한 신뢰와 이해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오늘 말씀에는 크게 네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천사들, , 소돔사람들, 그리고 롯의 사위들입니다. 이들 간에 일어난 소통의 문제를 하나씩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천사들과 롯 사이에는 소통이 잘 되는 듯 합니다.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있었다는 것은 소돔 사회에서의 롯의 사회적 위치를 말해줍니다. 성문은 장로들과 공직자들이 앉아서 법적인 문제를 논하거나 판결하는 장소였습니다. 롯이 성문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그가 소돔의 지도자 그룹에 속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성문에 앉아 있던 롯은 소돔으로 들어온 천사들을 영접합니다. 롯이 그들을 어떻게 알아보았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들을 알아본 것과 똑같이 롯도 그들을 알아보고 그들을 극진히 영접했습니다. 뭔가 좀 특별한 기운이 그들에게서 나왔던 것 같습니다.

 

롯이 두 천사를 영접한 소식이 소돔사회에 금방 번져나갔나 봅니다. 날이 어두워지기 무섭게 소돔지역 사방에서 노소를 불문하고 롯의 집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롯에게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합니다.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5). 여기서 상관하다라는 말은 그들과 성관계를 갖겠다는 뜻입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소통의 문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소돔사람들과 천사들 간의 소통의 문제입니다. 천사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니까, 결국 소돔사람들과 하나님 간의 소통의 문제 발생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 땅에 천사들을 보내신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을 멸하시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소돔사람들이 하나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였다면 소돔 땅에 도착한 천사들을 그런 식으로 대해서는 안됩니다. 이들이 롯에게 천사들을 내놓으라고, 그들과 관계하리라고 말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의 소통을 거부한 처사입니다.

 

둘째는 소돔사람들과 롯 간의 소통의 문제입니다. 롯은 두 천사를 내놓으라는 소돔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습니다. 롯은 두 천사를 보호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리고 그들을 윤리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설득하려고 노력합니다.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7-8). 롯은 소돔사람들과 소통을 해보려고 그들을 형제들아라고까지 부르며 적극적으로 대처합니다. 그러나, 롯의 그러한 노력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소돔사람들이 롯을 다음과 같이 상대화시켜 버립니다. “너는 물러나라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9a).

 

문제가 발생하니, 평소에는 모르던 것이 드러납니다. 롯은 소돔사람들을 형제라고 불렀는데 반해, 소돔사람들은 롯을 거류민으로 불렀습니다. 롯의 노력과는 달리, 소돔사람들은 롯을 자신들의 공동체 안으로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죠. 서로 간에 소통이 안 된 겁니다. 지금 소돔사람들은 롯에게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니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어느 설문 조사에서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마음이 아프다는 조사결과가 나왔습니다. “선생님이 뭔데 그러세요?”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선생님들은 허무해집니다. 자신이 가르친 학생에게 자신은 아무런 존재가 아닌 것이라는 자괴감 때문입니다. 롯은 평소 소돔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며 그들을 형제로 생각했는데, 지금 소돔사람들은 롯을 이방인 취급하는 겁니다.

 

이렇게 소통이 부재하니, 폭력사태가 발생합니다. 소통이 부재하고, 관계가 상대화 되면 거기에는 어김 없이 폭력이 발생합니다. 다른 말로 해서, 폭력을 행사하려면 일단 소통의 부재를 내세워야 하고, 상대방을 상대화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명한 유대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소통이 잘 되는 상태를 나와 너의 관계로, 소통이 잘 안 되는 상태를 나와 그것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소통이 잘 되는 나와 너의 관계에서는 절대로 상대방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서로에게 어떠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러나 소통이 잘 되지 않는 나와 그것의 관계로 서로의 관계가 상대화되면 거기에는 각종 폭력이 난무하게 됩니다.

 

롯과의 관계를 상대화시킨 소돔사람들은 자신들의 욕정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끝내 폭력을 휘두릅니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가서 그 문을 부수려고 하는지라”(9b). 이런 상황에서 만약 두 천사의 개입이 없었다면 롯은 큰 화를 당했을 겁니다.

 

상황이 다급해진 두 천사는 자신들이 이곳 소돔 땅에 온 이유를 롯에게 알립니다.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이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13). 그리고 천사들은 롯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립니다. “네 사위나 자녀나 성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12).

 

이 말을 들은 롯은 다급한 마음에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리고 빨리 일어나 소돔땅을 떠나라고 일러줍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한 번 소통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사위들이 장인의 말에 순종하여 다급하게 그 자리를 떠났어야 마땅한데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은 그와 반대의 행동을 전합니다.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14b).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요?

 

이것은 롯의 이해되지 않는 행동 때문입니다. 롯은 소돔사람들에게서 천사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해할 수 없는 제안을 합니다. 천사들과 상관하리라고 성내며 달려드는 소돔사람들에게 천사들을 대신하여 자신의 두 딸을 내놓으려고 합니다. 롯의 집에 손님으로 들어온 천사들을 보호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결혼을 앞 두고 있는 두 딸에게 험한 꼴을 당하게 하는 처사는 이해하기 힘든 겁니다. 천사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두 딸을 내놓으려고 하는 롯의 모습을 예비 사위들이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도, 장인 롯이 미쳤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위들이 장인 롯의 말을 믿지 않고, 농담으로 여긴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 <Crash>나 오늘 말씀이나, 소통의 문제 때문에 벌어진 참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픕니다. 소통에 문제가 생기고, 서로를 상대화시키고, 서로에 대한 편견 때문에 차별이 발생하면, 거기에는 생명이 발생하지 못하고, 결국 죽음의 그림자만 드리워집니다.

 

아무리 생명의 말씀을 전해도,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생명의 말씀은 상대방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천사들은 소돔땅을 구원하러 간 것이지 멸하러 간 것이 아닙니다. 결국 소돔땅이 멸하게 된 이유는 소돔사람들이 천사들, 즉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장인 롯이 사위들에게 찾아가 구원 받을 방도에 대해서 말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 발생한 소통의 부재는 결국 사위들을 구원하지 못하는 비극을 발생시킵니다. 이렇듯, 소통의 부재가 발생하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소통이란 결국 상대방을 신뢰하고 사랑할 때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기능입니다. 구체적인 예로, 만약 여러분이 지금 이렇게 말씀을 전하고 있는 저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저를 신뢰하지 못하고 저를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제가 전하는 말씀이 약장수의 허튼소리로만 들릴 뿐,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여러분이 저와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저를 신뢰하고 저를 마음으로 사랑하신다면, 제가 전하는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하실 겁니다.

 

소통의 문제를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소통이 잘 되느냐 안 되느냐에 따라서 생명을 보존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결정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소통이 잘 될 수 있도록 평소에 주님을 가까이 해야 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소통은 인격적인 사귐이 있을 때에만 잘 되는 법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사귐을 갖고 계십니까? 2천년 전,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오셨을 때, 그리스도와의 소통에 성공한 자들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지만, 그리스도와의 소통에 실패한 자들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소통에 실패하여 멸망 받은 소돔사람들과 같이 되지 말고, 소통에 성공하여 구원 받은 롯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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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2. 23. 23:56

거룩이란 무엇인가?

(레위기 19:1-2, 9-18)

 

자고 일어나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각종 사건들이 전해져 옵니다. 얼마 전 미국에서는 한인 입양아를 살해한 혐의로 현직 국가정보요원이 구속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양아버지에 의해 살해된 한인 입양아의 나이는 세 살이었고, 부검해 본 결과 뇌의 진액이 신체 곳곳에 스며들 정도로 심한 구타를 당해 죽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끔찍한 일을 보면, 절대로 거룩하다는 생각이 안 듭니다. 한국에서는 13, 15살 먹은 어린 조카를 임신시키고 출산까지 하게 한 삼촌의 범죄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정욕 때문에 소녀들의 소중한 삶을 무참히 짓밟은 이런 인면수심의 인간을 보면 거룩하다는 생각이 안 듭니다. 이런 일도 있습니다. 어떤 중년 여인이 이혼소송을 냈는데, 그 이유가 남편의 종교 강요 때문이랍니다. 남편은 가족들과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교회에 헌금을 바쳤답니다. 그 액수가 처음에는 수 천, 그리고 나중에는 수 억 원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게다가 남편은 교회를 잘 안 나가려고 하는 부인과 자녀들에게 폭언과 폭력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그것 때문에 가족들 간에 불화가 생기고 급기야 이혼소송까지 갔는데 법원은 남편의 잘못된 종교 강요로 인해 가정이 파탄에 이르렀다는 판단과 함께 부인의 손을 들어 줬습니다. 종교 문제로 이렇게 가정이 파탄 나는 것을 보면 거룩하다는 생각이 안 듭니다.

 

성경에도 보면 거룩하지 못한 일들이 즐비합니다. 대표적으로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하나인 유다의 부정과 다윗 왕의 간음이 있습니다. 유다는 두 아들 엘과 오난이 죽자 셋째 아들 셀라를 보호하기 위해서 계대결혼법을 어기며 며느리 다말을 시집으로 돌려 보냅니다. 이에 앙심을 품은 며느리 다말은 창녀로 변장해 시아버지 유다와 동침을 합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동침 사건을 보면서 거룩한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경은 이 이야기를 당당하게 싣고 있고, 하나님께서는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동침을 통해서 난 베레스와 쎄라에게 복을 내리십니다. 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입니다. 또한 다윗 왕의 간음 사건은 매우 잘 알려진 사건입니다. 자신의 음욕을 채우기 위해서 충직한 부하 장수의 부인인 밧세바를 왕궁으로 범하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서 충직한 부하 장수 우리아를 최전방으로 보내 전사하게 만듭니다. 물론 나단 선지자의 폭로를 통해 다윗 왕이 회개하긴 했지만, 이스라엘 최고의 성군이라고 하는 다윗이 이러한 일을 벌였다는 것 자체가 거룩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도대체 거룩이란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2). 하나님 당신께서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선 거룩이란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인 거룩을 우리 인간 존재에 담아낼 수 있느냐입니다.

 

우리가 특별히 레위기서의 이 말씀을 살펴 보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오늘 말씀과 관련된 것을 토대로 가르침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인 이웃사랑법이 레위기서에서 비롯됩니다. 레위기 18절 후반부 말씀입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런 것을 보면, 거룩이란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 인간 존재에 담아낼 수 있는 하나님의 속성인 것 같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라라는 말씀 뒤에 이어지는 레위기의 규례들은 하나님 자신의 어떠한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이웃과의 관계법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넓게 말해서, 레위기 19장에 등장하는 규례들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어떻게 배려하고(respect) 공경해야(honor)하는지에 대한 윤리적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이웃)과 어떻게 적절한 관계를 맺는 것이 좋은 것인가에 대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이웃이란 이런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자(the poor), 거류민(the stranger), 이웃(fellow), 품꾼(laborer), 귀먹은 자(deaf), 맹인(blind), 부자(the rich), 친족(kinsman), 동포(countryman).

 

가난한 자와 거류민과의 올바른 관계는 이것입니다.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9-10). 거룩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가난한 자와 거류민에게 자비를 베풀고 그들의 최저 생계를 보장해 주는 것. ‘이것도 내 꺼, 저것도 내 꺼, 다 내 꺼야라면서 혼자서 다 먹는 것이 아니라, 나눔의 삶을 사는 것이 거룩이라는 겁니다.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는 이것입니다. 여기서 이웃이란 지리적 위치에서 내 옆집에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 삶 가운데서 만나서 삶을 나누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너는 네 이웃을 억압하지 말며 착취하지 말며”(13a). 거룩이란 바로 이런 겁니다. 내가 내 삶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 만나는 사람들을 억압하거나 착취하면 그것은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삶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세워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들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들의 삶에 생명력이 넘치게 할 수 있을까, 하면서 그들을 오히려 섬기는 것이 거룩입니다.

 

품꾼과의 올바른 관계는 이것입니다.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13b). 품꾼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참 대견하고 성실한 사람들이죠. 남에게 빌어먹는 게 아니라, 스스로 어떻게 해서든 삶을 꾸려가려고 몸부림 치는 사람들입니다. 품꾼은 그날 벌은 돈으로 그날 먹거리를 사가지고 들어가지 않으면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굶주리게 됩니다. 그래서 품꾼의 삯은 일이 끝나는 대로 바로 주어야 합니다. 주지 않고 그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붙들고 있으면, 품꾼은 꼼짝없이 굶어야만 합니다. 거룩이란 이런 것입니다. 일 한 것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 자신의 배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의 배까지도 생각하는 것.

 

귀먹은 자와 맹인과의 올바른 관계는 이것입니다.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14). 저 사람이 안 들린다고 저주하면 안됩니다. 저 사람이 안 보인다고 그 앞에 장애물을 놓으면 안 됩니다. 안 들리기 때문에 더 조심해서 말해야 하고, 안 보이기 때문에 그의 앞에 장애물이 있다면 치워주어야 합니다. 거룩이란 이런 것입니다. 저 사람은 안 들릴지 몰라도 하나님은 듣고 계시며, 저 사람은 안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말이 뒤에 붙는 겁니다. 더 나아가, 지금 내 눈 앞에 그 사람이 없다고, 그 사람에 대해서 험담하고 없는 말을 지어내 그 사람의 인격에 흠집을 내는 것 또한 거룩하지 못한 겁니다. 지금 내 앞에 없어서 그 사람에 대해서 험담하고 흠집을 내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그런 일을 하면서 낄낄거리며 웃을지 모르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 듣고 보고 계신다는 것을 안다면, 그럴 수 없습니다.

 

가난한 자와 부자와의 올바른 관계는 이것입니다.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15). 재판을 한다는 것은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뜻입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나면 그 사람의 속마음을 알 수 있는데, 특별히 가난한 자와 부자에 대한 태도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공의라는 개념을 들어 거룩을 표현합니다. 재판을 할 때, 올바르게 재판하기 위해서 동정도 아첨도 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가난한 자는 동정표를 얻기 십상입니다. 부자는 아첨표를 얻기 십상입니다. 이렇게 하면 공의가 제대로 서지 않게 되고, 관계가 어긋나게 되며 결국 이것은 거룩과 멀어지는 상황을 낳게 됩니다.

 

친족과 동포와의 올바른 관계는 이것입니다.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17-18). 살다 보면 가족 간에도 미워하고 원망할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마음으로 미워하면 서로 간에 큰 상처를 남깁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서운한 마음이 생길 수는 있어도 그것으로 인해 마음으로 미워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적인 개념에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내주하시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내주하시는 마음은 하나님의 형상, 곧 사랑이 가득해야 하는데, 그곳에 사랑 대신 미움이 자리한다면 그것은 이미 거룩한 모습이 아닙니다. 미움을 마음에까지 남기지 마십시오. 그것이 형제와 이웃과의 관계를 어긋나게 할 뿐만 아니라, 내 삶까지도 망가뜨리는 가장 큰 원인이 됩니다. 마음에 미움을 안고 사는 것만큼 불행한 일도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은 주어진 본문 내에서만 거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 보았습니다만, 혼자 있는 고요한 시간에 레위기서를 찬찬히 들여다 보십시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라는 말씀 아래, 거룩이 무엇인지 제시되는 것은 모두 이웃과의 관계에 관한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거룩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이지만, 그것을 우리 인간 존재에 가져오는 방법은 다름 아닌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를 통해서입니다. 성경은 예배 잘 드리고, 교회에서 봉사 잘 한다고 그 사람을 거룩한 사람이라고 칭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사람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 사람에게 붙는 수식어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23절 이하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5:23-24).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를 배제한 거룩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과의 관계만 올바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법을 거룩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시는데, 그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자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거룩한 예배란 우리가 얼마나 이웃과의 관계를 올바로 맺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렇게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행위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거룩한 예배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예배가 얼마나 부족한 예배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부족한 예배나마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길은 이웃과의 관계를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올바른 이웃관계를 맺기 위해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거룩이란 무엇인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respect & honor).” 이것이 거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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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2. 17. 05:03

교회의 성장통

(행 2:42-47)

 

우리 큰 아들이 이제 7살이 되는데, 자주 다리가 아프다고 한다. 키가 클 때 그런다. 육체적인 성장통이다. 이제 조금 있으면 사춘기가 되어, 정신적인 성장통을 겪게 될 것이다. 그 성장통이 얼마나 힘들면, 괴테 같은 사람은 그 성장통을 일컬어 질풍 노도의 시기라고 했겠는가? 성장통을 겪을 때, 잘 겪어야지 성장을 잘 할 수 있다. 성장할 때 제대로 영양분이 공급되어야 한다. 육체적으로 성장할 때는 영양분이 충분이 섭취되도록 해줘야 하고, 정신적으로 성장할 때는 사랑이 많이 필요하다. 영양분을 충분히 섭취하지 못하면 키가 안 크거나 성장이 멈추고, 사랑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으면 인간성이 비뚤어진다.

 

교회도 유기체이기 때문에 성장통을 겪는다. 교회가 생겨났을 때도 성장통을 겪고, 서서히 성장해 가면서 성장통을 겪는다. 어느 교회든지 성장할 때는 성장통을 겪는데, 그것을 영적인 눈으로 잘 파악하고 적절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오늘 말씀에서 본 대로 초대교회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탄생하여 잘 성장해 갔다. 47절 말씀이 그것을 증거해 준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그러나 초대교회에 이렇게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도 성장통을 심하게 겪었다. 첫째, 교회는 복음 자체 때문에 성장통을 겪는다. 복음을 못 받아 들이는 대적자들이 교회를 핍박한다. 4장에 보면 복음을 전하다 체포된 베드로와 요한의 이야기가 나온다. 4 1절과 2절을 보면 이렇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예수 안에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매..”라고 나온다. 그리고 그 복음을 전한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해서 가둔다.

 

교회가 복음 자체 때문에 받는 성장통은 교회가 겪어야 할 필연이기도 하고, 그것이 오히려 교회가 살아 있다는 것을 반증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빛을 싫어한다. 자신의 어둠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벌인 악한 일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이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5).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1-12).

 

복음 자체 때문에 교회가 성장통을 겪는다면 그것은 교회가 올바로 성장해 간다는 증거이다. 아이가 올바르게 성장하면 성장통을 겪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아이가 성장통을 겪을 때 부모의 마음은 안쓰럽지만 한편으로는 아이가 정상적으로 잘 성장하고 있다는 안도감에 기쁘고 즐거운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5:11-12).

 

둘째로, 교회 지도자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때 교회는 성장통을 겪는다. 4장에 보면 복음을 전하던 교회 지도자, 특별히 베드로와 요한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 것이다. 이러한 신변의 위기를 초대교회가 어떻게 극복했는지 보라. 423절과 24절을 보면,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그리고 31절을 보면,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지도자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 때 이들은 교회 지도자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다. 교회는 지도자의 신변이 늘 안전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의 성장통이 잘 지나가고 교회가 잘 성장할 수 있다. 목회자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교회의 성장에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라. 목회자의 주변(건강, 가족 등)이 편안하도록 늘 기도하시라. 교회가 잘 성장하다 성장통을 심하게 앓는 경우,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목회자의 신변의 문제이다. 돈문제, 여자문제, 건강문제, 가족 간의 불화, 자녀문제 등 일반 사람들에게도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들을 통해 목회자를 넘어뜨려 교회를 힘들게 하려는 사탄이 호시탐탐 교회의 지도자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세 번째 성장통은 5장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범죄 때문에 벌어진다. 오늘 말씀에서 봤듯이, 초대교회 성도들은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욕심 때문에 하나님께 내놓아야 할 것을 숨겼다.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5:2).

 

베드로가 아나니야를 이렇게 꾸짖는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교회의 성장통은, 이렇게 성령의 충만한 마음이 밀리고, 그 안에 사탄이의 마음이 들어올 때 온다. 마음에 성령이 충만한지, 사탄이의 마음이 가득한지 평소에는 잘 모른다. 사람의 눈을 속일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알고, 성령님께서 아신다. 사람을 속이는 것은 나쁜 일이지만, 사람이 나를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것은 무서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성령을 속이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육신을 멸할 수 있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너의 영혼까지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셨는데, 성령을 실족하게 하는 죄는 참으로 두려운 거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같은 날 초상을 치르게 된 것은 사람을 속였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을 속였기 때문이다.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부지런히 살펴서, 성령이 가득한 마음을 잘 지켜야 한다. 그래서 범죄치 말아야 한다. 마귀는 교회 지도자만 노리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구성원 모두를 노린다. 베드로 사도는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하면서, 믿음을 굳건하게 하고 그를 대적하라고 말한다. 마귀에게 몸과 마음을 내어주지 말라.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 주님께서 도우신다.

 

네 번째 교회의 성장통을 6장에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교회의 지체끼리 서로 배려해 주는 일에 실수가 있을 때 그렇다. 61절을 보면,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초대교회(예루살렘교회)는 크게 헬라파 교인들과 히브리파 교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고린도교회는 더 심했다. 아볼로파, 바울파, 게바파, 그리스도파가 그것이었는데, 누구한테서 세례를 받았느냐에 따라서 나눠진 것이었다. 이것은 무슨 파당을 지은 것은 아니고, 그냥 태생이 그렇게 된 거다. 서로 그냥 다른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다르듯, 그리고 경상도 출신과 전라도 출신, 또는 충청도 출신이 다르듯이 말이다. 성향이나, 태생이 다른 것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6장에서도,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라파 유대인들이 다르다. 유대인이라는 것은 같지만, 한쪽은 이민자들이고, 한쪽은 유대땅에서 자란 사람들이다. 우리로 따지면, 미국에 사는 한인 이민자들과 한국에 사는 한인들인 것이다.

 

이런 것은 어쩔 수 없는 거다. 그런데, 문제는 히브리파 사람들이 배식을 맡아서 할 때 같은 히브리파 사람들에게는 생선을 나누어줘도 몸통, 살이 통통한 것을 주고, 헬라파 사람들에게는 꼬리나 삐쩍 마른 것을 주는 등, 이렇게 차별을 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누구든지 차별 당하면 싫은 법이다. 배척당하면 싫은 법이다.  교회가 이렇게 헬라파냐 히브리파냐, 남자냐 여자냐, 종이냐 주인이냐, 뭐 이런 것 때문에 차별하거나 배척하면 안 된다. 만약 이렇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배려하지 못하면,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교회는 살아온 배경이 다르고, 하나님 체험에 대한 경험이 다른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에, 그 다름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는 곳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을 잘 알고 있었던 사도 바울도, 서신서에서 계속 강조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치다. 십자가를 중심으로 서로의 다른 것은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라는 것이다. 다른 것은 그냥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니다. 이것이 잘 되면 교회는 성장한다. 그런데 이것이 잘 안 되면 교회는 어려워진다.

 

여러분에게 여쭙고 싶다. 교회를 사랑하시는가? 에베소서 5장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교회는 우리의 신랑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신랑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우리가 교회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다. 다 비유인데, 그만큼 교회는 소중하고 사랑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성숙이란, 나와 다른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과 잘 지내는 능력을 말한다. 성숙한 사람, 성숙한 시민, 성숙한 사회, 우리는 성숙이라는 말을 통해 그 사람이, 그 사회가 얼마나 좋은 사람, 좋은 사회인가를 표현한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나와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주변을 어렵게 한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성장통을 잘 이겨내고, 나와 다른 것을 잘 받아드리고 그것과 잘 지내며 화평을 이룬다.

 

위의 네 가지가 형통하면 교회는 성장통을 잘 이겨내고 잘 성장하게 된다. 복음 자체의 능력이 그대로 나타나길 기도하시라. 교회의 지도자인 목회자의 신변을 위해서 기도하시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마음에 사탄의 마음이 들어가지 않도록 부지런히 자기 자신을 살피시라.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배려하고,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시라. 그러면, 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할 것이다. 교회가 성장통을 잘 이겨내고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두 팔을 넓게 벌려 기지개 한 번 켜시라.

 

* 실제 설교에서는 좀 더 보충해 가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좀 더 확장된 설교를 들으시려면 아래를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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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2. 9. 23:39

생명의 물, 생명의 길 (2, 2, 20 운동)

(요한복음 4:1-15)

 

여러분은 하루에 물을 얼마큼 드십니까? 우리의 몸은 70%가 물로 구성되어 있고, 20%가 모자라면 곧바로 사망합니다. 그 정도로 물은 중요합니다. “돈을 물쓰듯 한다라는 비유문구가 있습니다. 돈을 거침 없이 많이 쓴다는 뜻인데, ‘물쓰듯이라는 말이 보여주고 있듯이 예전에는 물 쓰는 것이 그렇게 어색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별히 한국은 산좋고 물좋은 곳이어서 더더욱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돈을 물쓰듯 한다라는 문장도 한 번쯤 돌아봐야 하는 문장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한국도 물부족 국가 중 한 나라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구상에서 물이 가장 부족한 대륙은 아프리카 대륙입니다. 그들은 먹을 물이 없어서 목마르게살아갑니다. 국제기구에서는 아프리카 주민들에게 깨끗한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물 자체가 부족한 것도 문제이지만 그나마 있는 물도 그냥 마시면 각종 질병을 유발시키는, 마시기에는 위험한 물들이 도처에 고여 있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만큼 오염된 물이 많다는 뜻입니다.

 

유럽 또한 물이 부족한 대륙입니다. 그리고 거기 지형에서 나오는 물은 석회석이 섞여 있기 때문에 그냥 마시면 안 됩니다. 물 속에 섞여 나오는 석회석을 꼭 정화시켜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로 맥주를 마시고, 그 지역에는 정수기가 발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손쉽게 구하고 쓸 수 있는 브리타(Brita) 정수기도 유럽 나라인 독일에서 발명된 것입니다. 유럽 여행을 가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유럽에서 물 한 잔 얻어 먹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식당에 가서도 물은 사먹어야 합니다. 한국이나 미국처럼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물을 갖다 주지 않습니다. 유럽은 물이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기차역 같은 곳에 있는 공공화장실을 갈 때도 돈을 내야 합니다. 용무를 보고 나면 물로 처리하기 때문에, 그 물값을 지불해야 하는 시스템입니다.

 

물이 없으면 사람은 죽습니다. 밥은 40일 동안 굶을 수 있어도, 물 없이는 며칠 못삽니다. 40일 금식기도 할 때도 물과 소금은 먹습니다. 단식하다 쓰러지는 이유는 배고파서가 아니라, 몸에 수분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중요한 물, 그래서 물은 그냥 물이 아니라 생명의 물인 것이죠.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실 때, 사마리아를 통해서 가셨습니다. 그리고 수가란 동네에서 우물로 물을 길러 나온 한 여인을 만납니다. 요즘은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나오게끔 편리한 세상이지만, 옛날에는 물을 쓰려면 물 깃는 것부터 해야 했습니다. 물 깃는 일은 주로 여자들이 담당을 했습니다. 사극 같은 것을 보면 궁녀 중 무수리가 있는데, 무수리가 주로 담당한 일이 물 깃는 일입니다. 일상에서 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물 깃는 일만 감당하는 궁녀를 둔 것이죠.

 

사마리아 수가란 동네에 있는 우물로 물 길으러 나온 한 여인, 우리는 그녀를 일컬어 사마리아 여인이라고 부릅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큰 인생의 굴곡이 있었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입니다. 인생의 굴곡이 심한 사람들의 특징은 이웃 사람들과 거리를 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인생의 큰 굴곡을 겪었더라도, 물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에 사마리아 여인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우물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이 여인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의 눈을 피해야 하는 상황인데, 물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에 물을 길러 우물에 가야 하는 상황이 겹칩니다. 예로부터 우물은 동네 아낙네들이 모여 수다를 떨던 곳입니다. 아무도 없는 시간을 골라 삶의 필수품인 물을 구해야 하는 상황은 매우 피곤한 상황입니다. 그 삶이 오죽 피곤했으면, 예수님께서 영원히 마르지 않는 물을 주시겠다고 하시니까, 그녀가 이렇게 대답하겠습니까?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15).

 

이것은 예수님이 생명의 물이라는 진리를 깨달아서 사마리아 여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사마리아 여인의 인생의 고단함이 묻어 있는 말입니다. “여기 물 길으러 오지 않게 하옵소서!” 얼마나 애잔합니까? 남의 시선을 피해, 물 길러 와야 한다는 그녀의 삶의 상황이 얼마나 피곤했으면 이렇게 애원하겠습니까? 타임머신이 있으면 이때로 가서 사마리아 여인의 집에 한일자동펌프라도 설치해 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렇게 물에 대한 갈급한 삶의 정황이 있었기 때문에, 사마리아 여인은 결국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 겁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4). 우리는 이 말씀에 아멘하고 대답하기는 쉽지만, 사실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이 말씀을 이해하게 될까요?

 

물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을 모르는 자는 예수가 생명의 근원이라는 말뜻이 무엇인지 절대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하루에 물을 얼마큼 드십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하루에 물을 충분히 마시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요즘 현대인들의 건강을 헤치는 것 중 하나가, 몸 속에 수분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제적으로 느끼지 못하지만, 몸 속에 수분이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의 몸은 심한 탈수증세를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로 인해 각종 질병들이 유발된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생명의 물이시다!”라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물이 생명이다!”라는 것은 잘 인식하지 못하고 삽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생명의 물이시다라는 진술은 비유입니다. , ‘물이 생명이다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지 못하면 예수님이 생명의 물이시다라는 비유가 절대로 가슴 속에 와 닿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생명의 물이시다라는 진리를 깨닫기 전에, 먼저 물이 생명이다라는 사실부터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몸 속에서 탈수현상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적어도 하루에 2리터 이상의 물을 마셔야 한답니다. 다시 말해, 하루에 적어도 2리터 이상의 물을 마셔야만 인간의 생명이 정상적으로 유지된다는 뜻입니다. 이 때의 물은 미네랄이 풍부한 생수이어야만 합니다. 탄산음료나 각종 차(커피, 녹차 등)는 안 됩니다. 탄산음료나 각종 차는 목마름을 더 유발하거나 이뇨작용을 하기 때문에 결국 그것들을 먹은 만큼 물을 보충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명이 정상적으로 유지되려면, 미네랄이 풍부한 생수 2리터 이상씩 매일 마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한 번 들여다 보십시오. 우리가 매일 생수 2리터씩 마시면서 삽니까? 실제로 현대인의 90% 이상이 그렇게 못하고 산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심한 탈수현상을 겪고 있고, 그로 인해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답니다.

 

기독교 신앙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생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 숨쉬는 것과 직결된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가슴으로 잘 와 닿지 않는 이유는 신앙 따로 생명 따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물이시다라는 것과 물이 생명이다라는 것은 분리해서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물이 생명인 것을 깊이 깨닫고 우리의 생명을 지탱해주는 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닫고 성실하게 마시는 자는 분명 예수님이 생명의 물이시다라는 진리를 더욱 깊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물을 열심히 마셔 생명을 유지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물처럼 마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몸소 깨달아 알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2, 2, 20 운동을 제안합니다. “, , 투에니 운동이란 하루에 물 2리터 이상 마시고, 하루에 2마일 이상 걷고, 하루에 20분 이상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을 모르는 자는 예수가 생명의 근원이라는 말뜻이 무엇인지 절대로 깨달을 수 없는 것처럼, 그 길을 걸어보지 않은 자는 예수가 길이라는 뜻이 무엇인지 절대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요즘에는 길을 걷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어디를 갈 때 우리는 주로 자동차를 타고 다닙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사는 미국은 더욱더 그렇습니다. 자동차 없이 돌아다닐 수 없는 구조로 사회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길이시다라는 것 또한 잘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자동차를 타지 않고, 한 번 도보로 걸어서 어느 목적지까지 가보십시오. 그 길을 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험난한 일을 겪게 되는지, 그 길을 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되는지, 그 길을 가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병 중에서 가장 무서운 병이 혈관질환이라고 합니다. 다른 질병은 발견해서 치료가 가능하고 치료할 때도 드러나지만, 혈관질환은 생명과 직결되는 무서운 병입니다. 심장마비, 뇌출혈(stroke) 등이 혈관질환인데, 우리가 알다시피 심장마비에 걸리면 손 써 볼 겨를도 없이 즉시 사망합니다. 그리고 뇌출혈이 일어나면 전신마비가 되거나, 잠시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사지 중 하나를 못쓰게 되거나 언어장애를 겪게 됩니다. 특별히 중풍병에 걸리면 골방에 틀어박히게 되는데, 그때 드러나지 않는 어두운 골방에 누워 인생을 보내야 하는 환자나, 그 환자를 돌봐야 하는 가족이나, 살아 있으나 살아 있는 것 같지 않는 인생을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명과 직결되는 혈관질환을 예방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일주일에 적어도 세 번, 2마일 이상 걷는 거랍니다. 걷는 것 또한 우리의 생명과 직결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깨달은 자만이, ‘예수님이 길이시다라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삶을 강건하게 하는 운동과도 같습니다. 믿는 이들의 주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밥만 먹어서는 건강해질 수 없습니다. 운동이 꼭 필요합니다. 우리의 몸은 음식과 운동을 통해서 건강함을 유지합니다. 말씀을 먹는 기독교인들에게 기도는 운동처럼 꼭 필요한 영성생활입니다.

 

기도는 그리스도께 굴복(surrender)하는 삶의 자세입니다. 그리스도께 굴복한다는 것은 비굴해진다는 뜻이 아니라, 참된 생명을 갈구하는 인생으로, 풍성한 생명 가운데 살아가겠다는 다짐입니다. 생명되신 예수님께 굴복한다는 뜻은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만 하면서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먹은 음식이 잘 소화되어 우리의 몸 구석구석까지 에너지를 잘 전달되게 끔 하려면 신진대사가 원활해야 하는데,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하려면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런 것처럼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의 삶 구석구석까지 에너지로 잘 전달되려면 영적인 신진대사가 원활해야 하는데, 그것에 필수적인 것이 기도입니다. 몸의 움직임이 운동이라면, 영의 움직임이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20분씩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먹고 사는 기독교인으로서 꼭 필요한 운동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명의 물이시고 생명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삶 속에서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는 것처럼 만나고 싶으시거든, 먼저 생명과도 같은 물 마시기를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그 길을 걸어 보십시오. 또한 기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 굴복(surrender)해 보십시오. ‘2, 2, 20 운동이 그냥 스쳐 지나가는 한 설교자의 잔소리가 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2리터의 물마시기, 2마일의 걷기, 20분의 기도가 여러분을 생명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물, 생명의 길이십니다. 이것을 믿으시는 분, 물을 마시고 길을 걸으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생명의 물이시고 생명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삶 속에서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는 것처럼 꼭 만나게 되실 겁니다. 아멘.

 

* 설교를 음성으로 듣고 싶으시면 아래를 클릭하세요~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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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2. 6. 08:20

아무도 모른다

창세기 16

(창세기 18:16-33)

 

 

아무도 모른다

- 김사인

 

나의 옛 흙들은 어디로 갔을까

땡볕 아래서도 촉촉하던 그 마당과 길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개울은, 따갑게 익던 자갈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앞산은, 밤이면 굴러다니던 도깨비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런닝구와 파자마 바람으로도 의젓하던 옛 동네어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누님들,

수국 같던 웃음 많던 나의 옛 누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배고픔들은 어디로 갔을까 설익은 가지의 그 비린내는 어디로 갔을까

시름 많던 나의 옛 젊은 어머니는

나의 옛 형님들은, 그 딴딴한 장딴지들은 다 어디로 흩어졌을까

나의 옛 비석치기와 구슬치기는, 등줄기를 후려치던 빗자루는,

나의 옛 아버지의 힘센 팔뚝은, 고소해하던 옆집 가시내는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무덤들은, 흰머리 할미꽃과 사금파리 살림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봄날 저녁은 어디로 갔을까 키 큰 미루나무 아래 강아지풀들은,

낮은 굴뚝과 노곤하던 저녁연기는

나의 옛 캄캄한 골방은 어디로 갔을까 캄캄한 할아버지는,

캄캄한 기침소리와 캄캄한 고리짝은, 다 어디로 흩어졌을까

나의 옛 나는 어디로 갔을까,

고무신 밖으로 발등이 새카맣던 어린 나는 어느 거리를 떠돌다 흩어졌을까

 

우리는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뭔가를 좀 아는 것처럼 살아가다가도 잠시 멈춰 서서 생각해 보면, 뭔가 아는 것처럼 살아온 인생이 부끄럽기도 합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 우리가 귀로 듣는 것, 또는 손으로 만져 보는 것, 이러한 모든 것들을 통해 세상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뭔가 아는 것처럼 확신하고 눈과 귀와 손으로 느끼는 세상을 따라 조심스럽게 살아가지만, 결국 뒤돌아 보면 눈과 귀와 손으로 보고 듣고 만졌던 세상이 얼마나 불확실한 것이었나를 깨달을 때 섬뜩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불확실한 것에 근거해서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하기까지 합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 땅으로 나아갈 때 그는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하란 땅에 아버지를 묻고 가나안 땅으로 나아갈 때 그는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그저 부르시는 음성 하나만 믿고 나아갔는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브라함은 몰랐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정착할 시기에 조카 롯과 땅을 놓고 갈등한 사건을 알고 있습니다. 기근을 피해 애굽 땅으로 잠시 내려갔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오히려 많은 재산을 얻어 가지고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아브라함 일행은 불어난 재산 때문에 갈등합니다.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13:5-7a).

 

사실,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이렇게 재산 문제로 다투게 될 거라는 것을 꿈에도 몰랐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투게 되었고, 그 다툼을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다툼의 원인은 가축들을 방목할 목초지였는데, 이것을 해결할 방법은 서로 갈라서서 각자의 목초지에서 가축들을 키우는 방법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조카 롯은 어느 목초지를 차지할 것인가를 놓아두고 의논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건네 줍니다. 물론 삼촌이 조카보다 선택하는 데 있어서 우선권을 가진다고 해도 조카 롯이 토를 달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아들처럼 사랑했으므로 조카 롯에게 우선권을 줍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자가 양보하는 법입니다. 그리고 더 많이 가진 자, 그리고 더 힘 센 자가 양보하는 것이 사랑이고 덕입니다. 또한 그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습니다. 더 많이 가진 자, 그리고 더 힘 센 자가 모든 것을 먼저 차지하는 것이 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방식은 그것이 아닙니다. 비록 내가 더 많이 가졌다 할지라도, 또는 내가 덜 가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더 많이 사랑하는 자가 먼저 양보하고 내려놓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방식입니다.

 

아브라함은 무엇을 알고 먼저 내려놓은 것이 아닙니다. 화평과 사랑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에 먼저 내려놓은 것뿐입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라리”(13:8-9).

 

그런데 문제는 롯입니다. 롯은 뭔가를 아는 듯이 선택권을 행사합니다. 눈과 귀와 손을 통해서 오는 정보를 바탕으로 뭔가를 안다는 듯이 자신 있게 선택합니다.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13:10). 롯은 소알 땅에 가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빠진 이 문장을 몰랐던 것이죠.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13:10 중간).

 

만약, 롯이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실 것에 대해서 알았다면 과연 롯이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손의 감촉을 통해 느낀 대로 소알 땅을 택했을까요? 망할 것 알면서도 그것을 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그런 사람이 간혹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스스로 인생을 포기한 사람이거나, 바보천치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아는 것이 너무 많아서 힘든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서 인생이 힘듭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의 주요 논쟁점인 의인과 악인에 관한 것 또한 우리는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융성한 대접을 받으신 후, 소돔 땅으로 향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계획을 알려주십니다. 두 가지를 알려 주시는 데, 첫 번째는 18절 말씀대로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아브라함에 대한 계획입니다. 또한 택함 받은 백성에게 요구되는 것은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두 번째로는 20절 말씀대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알아보려고 하는계획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이것이 참 쉽지 않은 겁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해야 하는데, 무엇이 의와 공도인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는 겁니다. 명백하게 의로운 일인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 그 의로운 일 때문에 다치는 사람이 생기거나 더 안 좋은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잘못한 일인 것 같아서 후회하거나 회개하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 때문에 오히려 기쁘고 즐거운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더욱더 잘 모르는 것은 누가 의인이고 누가 악인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킬 계획을 갖고 계신 여호와 하나님께 자신을 티끌과 재같은 존재로 낮추면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망시킬 수는 없다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의인 50명만 있다면 그 의인들로 인해 악인들까지고 구원해 달라는 간청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간구가 10명까지로 내려갑니다.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니라”(32).

 

아브라함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소돔과 고모라에 롯을 비롯해서 롯과 엮인 의인이 열 명쯤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예상과는 다르게 소돔과 고모라에는 열 명의 의인이 없었습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도 누가 의인이고 누가 악인인지 구분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누가 의인이고 누가 악인인지 구분할 능력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는 후한 점수를 주고, 다른 사람(타자)에게는 박한 점수를 줍니다. ‘나는 옳고 상대방은 틀리다고 전제하면서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우리의 보통 마음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바로 그런 사건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로마인들과 유대인들이 어리석고 악독해서, 즉 그들은 악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로마인들의 눈에 비친 예수는 정치적으로 위험한 자였고, 로마의 정치체계를 무너뜨릴만한 선동자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보기에 예수는 명백하게 신성모독죄를 범했습니다. 게다가 신명기 2122절과 23절 말씀은 나무에 달린 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그들이 보기에 말씀에 근거해서 본 예수, 그것도 나무에 달려 죽은 예수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가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증거하는 바는 그와 정반대입니다. 유대인들이 거리끼게 여기고, 헬라인들이 어리석다고 여기는 바로 그 십자가의 예수가, 누가복음 2347절에서 로마의 백부장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향해 이렇게 외쳤듯이,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는 것을 우리는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러한 겸손함이 먼저 필요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입니다. “아무도 모른다!” 이것은 무지의 언어도 아니고 절망의 언어도 아니고 체념의 언어도 아닙니다.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막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고 살아야 하는 겸손과 용기가 필요한 겁니다. 정죄하기를 내려놓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와 같은 우리들, 그저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를 세워주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는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길인지, 좀 아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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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2. 3. 05:14

하나님의 생명을 사는 자

(마태복음 5:1-12)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우리는 행복하기를 원하고 행복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때 행복을 느끼십니까? 교회 다녀서 여러분의 삶이 행복해졌습니까? 예수님을 따라 나서서 여러분의 삶이 행복해졌습니까?

 

요즘 시대를 일컬어 소비사회라고 하는데, 소비사회를 사는 사람들에게 행복은 마음껏 소비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알게 모르게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지니고 있습니다. 일례로, 현대인들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쇼핑을 합니다. 그래야 스트레스가 풀립니다. 스트레스를 푼다는 것은 쇼핑을 통해서 행복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현대사회에서 행복한 자란, 더 소비할 수 있는 능력자란 뜻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우리를 행복한 삶으로 안내해 주는 말씀인 것 같기는 한데, 우리가 바라는 형태가 아닌 것 같아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성경에서 마음껏 소비할 수 있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말해주면 내가 지금 추구하고 있는, 그리고 이 사회가 말해주고 있는 것이 옳다 여기고 열심히 소비를 통해 행복을 추구할 텐데, 왠지 그것과는 별로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이런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을 덮고, 못 본 척 하고 그냥 내가 행복을 느끼는 방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요? 아니면, 좀 당황스럽긴 하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인내를 가지고 들여다 봐야 할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산상수훈으로 알려진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는 이러한 이름이 붙여져 있습니다. “팔복”. 오늘 말씀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입니다.

 

우리는 흔히 복 받았다라는 것을 행복과 연관 짓습니다.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국사람들은 특별히 ‘lottery’복권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행복과 오늘 말씀에서 말하고 있는 행복에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많이 당황스러운 겁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 단어인 은 영어로는 ‘blessedness’라고 하고, 성경의 원어인 헬라어는 ‘makarios’라고 합니다. ‘마카리오스는 어느 한 가지의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행운, 행복, 특권 등의 의미가 그것입니다. 행복과 마카리우스의 의미가 겹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팔복이라는 주제로 하시는 말씀 속에서 우리가 흔히 행복이라는 것을 찾기가 어려워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것일까요?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는 딱히 행복을 약속하시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을 약속하시는데, 그 복을 약속하시는 정황이 우리가 흔히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상황입니다. 애통할 때, 온유할 때, 화평케 할 때, 핍박 당할 때, 심령이 가난할 때 등입니다.

 

우리가 흔히 불행하다고 느끼고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이것을 살펴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하나님 나라(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신 상황에서 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맥락에서 선포하시는 복의 내용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이라는 것이 우리가 흔히 행복이라고 말하는 부(wealth)나 건강(health) 또는 사회적 지위(status)에 달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에서는 부나 건강이나 사회적 지위가 복을 가져오는 인자(요소)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서 복이란 의로움이나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했을 때 받는 보상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복이란 하나님의 충만한 선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생명은 명예와 수치를 통해서 다스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을 통해서 다스려진다는 겁니다.

 

이것이 좀 마음에 와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계는 지금 말씀 드린 하나님 나라의 생명 경험과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행복이 부나 건강 또는 사회적 지위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는 부할 때, 건강할 때 사회적 지위가 높을 때 행복해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무슨 수를 써서든, 부자가 되려고 하고, 건강해지려고 하고, 사회적 지위를 높이려고 합니다. 내가 그러한 것을 못 갖추었다고 할지라도, 내 자식들만은 그러한 것들을 갖추고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식 뒷바라지 하느라 뼈가 부서지도록 일합니다. 또한 우리는 의롭게 살거나 어떠한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을 때는 당연히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상이 없다면, 의롭게 살 필요도 없고, 어떠한 임무도 성실히 수행할 필요성을 못 느낍니다.

 

이런 식으로 행복을 경험하고 생명을 경험하는 우리들에게 오히려 오늘 말씀은 굉장히 낯설게 다가옵니다. 설교하고 있는 저 자신도 오늘 말씀과 다르게 작동하는 세상에서 몸담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보니, 오늘 말씀이 낯설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저도 자식이 있는 입장에서 우리 아이들이 커서 잘 살았으면 좋겠고, 건강했으면 좋겠고,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어 세상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기는 바라는 마음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느끼는 행복과 생명을 경험하는 방식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 오늘 말씀이 우리가 가난하게 살아야 되고, 건강치 못하게 늘 병에 들어서 살아야 하고, 사회적 지위 같은 것 없이 천민으로 살라는 뜻은 아닐 테니까요. 그렇다면 도대체 오늘 말씀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통치라고 할 수 있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하나님 나라란, 하나님의 통치란, 하나님을 경험하는 방식이란 하나님이 드러나시는 상황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는 말씀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서 하나님이 드러나시게 된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떠한 사람의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그 마음이 비어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심령이 부자라는 뜻은 그 마음에 무엇인가가 가득 찼다는 뜻입니다. 무엇인가가 가득 차 있는 사람은 그것을 알리기 위해 힘씁니다. 내가 얼마나 아는지, 내가 얼마나 큰 일을 행할 수 있는지. 그래서 그것을 하기 위해 늘 바쁩니다.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행하실 비어 있는 공간이 없습니다.

 

복이 임하는 방식, 즉 하나님이 드러나시는 방식을 보십시오. 심령이 가난 할 때처럼, 무엇인가 비어 있어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수 있는 여지가 있을 때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비어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위로의 형태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수 있는 겁니다. ‘온유한 자는 비어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거기에기업의 형태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수 있는 겁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비어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배부름에 형태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수 있는 겁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비어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긍휼히 여김을 받음의 형태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수 있는 겁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비어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라는 형태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수 있는 겁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비어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음이라는 형태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수 있는 겁니다. ‘의를 위하며 박해를 받은 자는 비어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천국이라는 형태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수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때, 하나님의 생명을 살 수 있는(live) 때는 강할 때보다 오히려 약할 때이고 가득 차 있을 때보다 오히려 비어 있을 때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약하게 되는 것을, 비어 있게 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기를 쓰고 강하게 되려고 하고 기를 쓰고 가득 채우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오히려 약할 때, 오히려 비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 드러나시는 때라고 가르쳐 줍니다. 그러니, 혹시 우리가 지금 약한 처지에 처해졌다고 해서, 혹시 우리가 비어 있는 처지가 되어 있다고 해서, 너무 두려워하거나 수치스럽게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겁니다. 우리가 약할 때, 우리가 비어 있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약한 것을 우리의 비어 있는 것을 우리 주님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맡기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을 내려주시는데, 그 복은 하늘의 복, 즉 하나님의 생명을 충만히 누리게 되는 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생명, 하늘의 복을 누리는 것보다 이 세상의 복을 누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약한 것과 비어 있는 것을 참지 못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내어드리지 못하고, 이 세상이 원하는 방식으로 강해지고 채우는 삶을 살겠다고 하시는 분들에게 오늘 말씀이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적어도, '나를 따라오너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답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우리를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생명의 나라로의 부르심에 응답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의 삶(천국, 하늘 나라)으로 들어가겠다고 다짐했다면, 하나님 나라가 작동하는 방식을 따라 가십시오. 하나님께서 드러나시도록 그분께 삶을 맡기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생명을 사는 자,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것이 참된 행복의 길입니다. 아멘.

 

 

* 오늘 본문 말씀이 너무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때문에 그것을 한 편의 설교에 한꺼번에 다 담아내지 못한 것 같아 <하연이에게>라는 찬양을 통해 그 이미지를 더 풍성하게 표현해 보았습니다. 찬양을 듣고 싶으시면, 컬럼버스감리교회 홈페이지에서 설교를 들으시면 좋습니다.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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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1. 26. 23:10

예수를 따르라

(마태복음 4:12-25)

 

예수님의 사역은 광야에서의 시험이 끝난 후, 세례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과 함께 시작됩니다. 개구리가 크게 도약하기 위해서 몸을 움츠리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우선 고향인 갈릴리 나사렛으로 물러나셨다가,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시는데,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서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그곳으로 아예 이사를 가십니다.

 

 

문학 용어에 복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나중에 터질 사건에 대해 암시하는 부분을 말합니다. 세례 요한이 잡혔다는 이야기는 복선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도 잡히게 될 거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신 곳인 가버나움은 인구 1000명 정도 되는 마을이었습니다. 그곳은 갈릴리 바다 북서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곳의 주민들은 농사를 짓거나 고기잡이를 통해서 생계를 이어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받으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권력이 있거나 부자들과 함께 살지 않으시고, 그냥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서 사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예수님 당신의 사역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가버나움은 역사적으로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에 속한 마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그곳은 이방인들의 갈릴리라고 불렸는데, 로마에 의해서 점령 당했을 뿐만 아니라, 그곳을 통치하는 유대 지도자도 로마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 당시에 그곳을 다스리던 유대 지도자는 헤롯 안티파스라는 분봉왕이었는데, 그는 잔인하기로 유명했고 자신이 가진 권력을 이용하여 폭정을 일삼았습니다. 그러니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그곳에서 고통 받으며 사는 사람들에게 해방과 빛과 생명을 선포하기 위해서 그곳으로 들어가셨던 것입니다.

 

억압과 폭정이 난무하는 곳에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은 이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17). 이는 앞서 32절에서 세례 요한이 선포한 말씀과 같습니다. 그런데 내용적으로는 같지만 상황은 매우 다릅니다. 요한은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예비한 길로 온 바로 그이였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통치를 예비한 사람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한 분이십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의 개념은 장소의 개념이 아닙니다. ‘통치의 개념입니다. 이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천국이 장소의 개념이면 천국을 죽어서 가는 어떤 곳이라고 생각하며 죽는 것이 낫다는 허무주의에 빠지겠지만, 천국이 통치의 개념이라는 것을 유념한다면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있으면, 바로 지금 이곳이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오해되는 개념 하나가 또 있습니다. 바로 회개하라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회개를 단순히 사과하는 것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쓰이고 있는 회개(metanoea, 메타노이아)’의 의미는 돌아서라(turn around)’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단순히 후회하고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바꾸는 것이고 행동과 삶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첫 번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시몬(베드로)과 그 형제 안드레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해변을 거니시다가 시몬과 안드레 형제를 만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라라고 부르십니다. 그러한 부르심에 시몬과 안드레는 어떠한 질문도 제기하지 않고, “곧 그물을 버려 두고예수님을 따릅니다.

 

두 번째 장면도 마찬가지 입니다. 해변을 더 거니시다가 이번에는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만납니다. 그들에게도 동일한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즉시 아버지를 버려두고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첫 번째 장면은 새로운 삶으로의 부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새로운 삶은 고기를 낚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의 삶입니다. 두 번째 장면은 새로운 공동체로의 부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의 문화 풍습으로 봤을 때 이것은 혁명적인 일입니다. 가족 공동체를 떠나, 예수의 공동체가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부르심에 대한 철저한 순종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있는 새로운 삶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제자도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나서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든 그의 뒤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하여 그 길을 따라나선 이들은 그 길을 걸으면서 쉽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에게 조명을 비추면서 마태복음을 읽어보면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걸으면서 예수님을 이해하고 예수님께 순종하는데 수도 없이 실패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통 가운데 기도하실 때에도 저만치 떨어져서 잠자고 있었고, 예수님이 체포 당하셨을 때 도망쳤고, 심지어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중간에 가는 길이야 어쨌든 끝이 중요한 것인데, 마태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보면 좌충우돌 하던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 부르심의 뜻에 합당한 삶으로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참 은혜 되는 것은 제자들의 삶이 드라마틱 하게 변하게 되는 상황이 예수님을 처음 만난 갈릴리에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287절을 보면 예수님의 무덤에 갔던 마리아 일행이 천사를 만나 메시지를 듣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메시지가 놀랍게도 이런 메시지였습니다.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제자들은 도망쳤지만,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도망친 제자들에게 다시 말씀하시는 겁니다. “회개하라!” , “방향을 돌려라, 방향을 돌려 처음 시작했던 곳으로 되돌아 오라!” 그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갈릴리였습니다. 그들은 실패했지만, 다시 한 번 갈릴리에서, 실패한 바로 그곳에서, 다시 한 번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하나님의 통치가 어떤 것인지,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서 형성될 새로운 삶, 그리고 새로운 공동체가 어떤 것인지를 몸소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침 가운데, 복음 선포 가운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쳐 주시는 가운데,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추었다는 말씀을 실현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오늘,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예수님께서는 삶의 방향을 틀어서 당신을 따르라고 우리를 부르시고 초청하십니다. 바로 여기가 갈릴리입니다. 혹시 본인이 지금 갈릴리에 있지 않다고 생각되시는 분은 먼저 갈릴리로 가신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부지런히 갈릴리로 가십시오.

 

마음이 어두우십니까?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 나아오십시오. 그 어두움이 물러갈 것입니다.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 때문에 삶이 고달프십니까? 하나님의 통치, 즉 천국을 실현하신 예수님께로 오십시오. 오늘 말씀 24절을 보십시오.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리고 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새로운 삶, 새로운 공동체로 방향을 트셨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처럼 세상에 나아가 하나님의 통치를 보이십시오. 억울한 자, 눌린 자, 가난한 자, 슬픈 자, 외로운 자, 병든 자 등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자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십시오.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셔서 그들을 자유케하시고 빛을 주시고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십시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따라갑시다. 예수님을 따라 가면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선포합시다. “회개하라 천국이 임하였느니라!”

 

억울한 자, 눌린 자, 가난한 자, 슬픈 자, 외로운 자, 병든 자들

그들 모두 우리를 기다리고 있네 우리의 사랑 애타게 기다리고 있네

우린 그들 사랑한다 말하면서도 그들에 대해 아무 관심도 없네

우리 그들 사랑할 때 주님 기뻐하시네 그들 우리의 형제니

 

어린이, 노인들, 청소년, 약한 자, 강한 자, 있는 자, 없는 자

자신의 고통 속에 모두 울고 있네 주님의 구원 애타게 기다리고 있네

주님 바로 그들 위해 죽으셨건만 아직도 그들 모르고 있네

우리 주의 사랑으로 사랑할 때에 그들도 그 사랑 알겠네

 

주님 다시 오실 때에 우릴 심판하시리 우리의 믿음 우리의 사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것으로 우리에게 갚아 주시리

 

~ 사랑하세 주의 사랑으로 사랑하세 주의 사랑

주님 우리를 통해 그들을 구원하시리

주님 우리를 통해 이 땅을 고쳐 주시리

/ 사랑하세, 최덕신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1. 19. 23:16

내가 만난 예수

(요 1:29-42)

 

오늘 말씀에서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 (the Lamb of God)’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왜 그 많은 표현을 놓아두고, ‘어린 양을 들어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을까요? 도대체 하나님의 어린양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우리는 흔히 어린 양하면 이스라엘의 제사를 떠올립니다. 레위기서에 보면 제사법이 잘 나와 있는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어김 없이 등장하는 동물이 입니다. 그리고 성경 곳곳에서 은 수도 없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을 들어 예수님을 설명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친숙함을 느낍니다.

 

레위기서에 보면 제사에는 번제(the Burnt Offering), 소제(the Grain Offering), 속죄제(the Sin Offering), 그리고 속건제(the Guilt Offering)가 있습니다. 이 중에서 죄를 사하는 제사는 속죄제입니다.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생각은 죄를 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표현한 것은 이와 관련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레위기서에 나와 있는 제사법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속죄제에 쓰이는 어린 양은 수컷이 아니라, 암컷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남자였다는 사실과 잘 맞지 않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여자였다면,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표현한 것이 속죄제의 제물로 쓰인 것을 말하는 것일 텐데, 문제는 예수님께서는 남자였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어디에서 이 문제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것을 창세기 22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22장에는 아브라함이 100세에 어렵게 얻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인하고자 고통스러운 명령을 내리신 하나님, 그리고 그 명령에 순종하는 아브라함, 그 가운데서 영문도 모르고 이런 질문을 하는 아들 이삭: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22:7). 아들의 심장을 파는 날카로운 질문에 아버지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22:8).

 

여기서 이삭과 아브라함 사이에 오고 간 대화 중에 등장하는 은 번제물로 쓰일 양으로서 성별이 배제된 양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영어 성경은 이 양을 ‘sheep’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번제(the Burnt Offering)는 제물을 온전히 태워서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로서,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번제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앙을 표현할 때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아들을 제물 삼아 번제를 드리려 했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야말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표현한 것에 대한 의문이 좀 풀리는 것 같습니다. 요한은 좀 더 큰 틀에서 예수님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죠. 예수님을 단순히 죄사함의 제물로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연관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앙을 총체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다음 말씀이 이것을 뒷받침 해줍니다.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기를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30).

 

이는 예수님이 단순한 죄사함의 제물 이상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선재성이라고 하는데, 요한이 말하고 있듯이, 그리스도는 모든 만물보다 먼저 계신 이라는 뜻입니다. 누가복음의 기사를 통해서 알고 있듯이, 예수님은 요한 보다 몇 개월 늦게 잉태됩니다. , 요한의 생일이 예수님의 생일보다 빠릅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나보다 뒤에 오시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고 요한은 그 사람이 본인 보다 앞서는데, 그 이유를 나보다 먼저 계시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단순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34절에서 요한이 증거하듯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보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한 가지 더 도전적인 문장을 접하게 됩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31).

 

요한이 베푼 세례는 기본적으로 죄사함을 위한 세례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겁니다. 이것은 굉장히 모순된 행동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면 예수님은 스스로 죄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셨을까요? 그에 대한 대답이 바로 이 문장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이 받은 세례는 죄사함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양(lifting up) 또는 드러냄(revelation)’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민수기에 나오는 불뱀사건과 연관됩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예수를 증언하기 위해서 구약성경을 줄기차게 사용합니다. 유대교인이 아닌 기독교인이 구약성경을 경전으로 받아 들고 읽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잘 모르면, 신약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불뱀 사건은 민수기서 21장에 나옵니다. 가나안 땅으로 행진하고 있는 중, 이스라엘 백성은 길이 험한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여 하나님과 모세에게 원망을 퍼붓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는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21:5). 이런 원망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심판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뱀에 물려 죽어 나가자,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모세에게 살려달라고 합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뜻을 하나님께 전하는데, 그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셔서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라고 하시고, “물린 자마다 그것을 쳐다보면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 나타나신다는 요한의 진술은 이 불뱀 이야기를 떠오르게 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불뱀(놋뱀)을 장대 위에 매달아 높이 올린 것처럼 그래서 그것을 쳐다본 이들이 죄사함을 얻고 구원 받은 것처럼, 십자가에 매달려 높이 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이들(믿는 이들)’이 죄사함을 받고 구원 받는 것을 말해줍니다.

 

요한의 이러한 증언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인지 밝혀집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바쳤던 이삭과 같은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범죄하여 죽을 위기에 처했던 이스라엘을 구원했던 장대에 높이 달린 불뱀과 같이 십자가에 높이 달린 구원자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한 것은 하나님의 어린 양인 예수님 당신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구원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베푸시는 신적 능력입니다. 그 구원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났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몸을 입으신 어린 양이심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능력을 베푸시는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튿날, 요한의 제자 두 명이 하나님의 어린 양인 예수님을 만납니다. 요한의 제자 두 명은 예수님을 만난 뒤 요한을 떠나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요한을 떠나 자신을 따르는 요한의 두 제자를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What do you want?)” 그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머물기를 청합니다.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을 갖기 원했던 것이죠. 그리고 그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깨닫고, 그 중 한 명(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이 자신의 형제(베드로)에게 달려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요한이 만난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었습니다. 구원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안드레와 베드로가 만난 예수님은 메시야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메시야(그리스도)’로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 말은 예수님은 메시야이시다!”라는 고백의 줄임말입니다.

 

여러분이 만난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요한이 만나고, 안드레가 만나고, 베드로가 만났던 예수님이 여러분에게도 메시야, 그리스도로 고백되십니까? 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다!” 이것이 제가 만난 예수님입니다.

 

주님 날 위해지신 십자가

허물 많은 내 삶에 늘 흐르며

죽었던 내 영혼 살리시네

메마른 나의 맘을 적시네

내가 만난 가장 큰 사랑 예수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니

이제 내가 사는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분이 사는 것

내가 만난 가장 큰 용서 예수

 

세상 모든 어둠 힘을 잃고

우리 가진 모든 일 녹아지리라

어떻게 그분 닮을 수 있을까

어떻게 그길 걸을 수 있나

내가 만난 가장 큰 이름 예수

 

/ 꿈이 있는 자유, 한웅재 곡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1. 13. 10:08

빛이 되라 말씀이 십자가다

(이사야 42:1-9)

 

하나님 말씀은 언제나 급진적이고 파격적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보수적이고 고착화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변화를 싫어하고 어딘가에 안주하고 싶어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내놓기 싫어하고 집착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야가 좁습니다. 아는 만큼만 알고, 오른 만큼만 보고, 이해한 만큼만 믿습니다. 인간은 우물 안 개구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인생을 살다 갑니다. 이런 인간에게 하나님은 우물 안을 벗어나, 새로운 세상, 넓은 세상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경험은 매우 역사적입니다. 역사가 깊다는 뜻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경험은 출애굽 사건에서 비롯됩니다. 이스라엘에게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출애굽 한 후,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자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광야를 거쳐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 정착해 삽니다. 거기서 이들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이루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을 짓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이들은 주변 나라들과의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척박한 땅에서 기근을 면하며 풍요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다 길을 잃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언약에 나와 있는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바벨론이라는 이방 나라에 나라가 망한 것입니다.

 

우리는 합법적인 이민자들이기 때문에 미국 땅에 와서 사는 것이 그런대로 괜찮지만, 불법적인 이민자들만 해도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녹록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나라를 잃고 포로의 신세로 이국 땅에 잡혀 와서 산다는 것은 그야말로 지옥 같은 경험입니다. 적들의 손에 넘겨져 치욕을 당하고 삶의 터전이 파괴당하고, 쇠사슬에 묶여 끌려가는 곤욕 속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돌아보며 질문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까지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은 뭐하시는가? 계시기는 하는가?”

 

이렇게 절박한 상황 속에서 이토록 절박한 질문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사야 선지자는 매우 급진적이고 파격적인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그리고 그분이 어떻게 일하시는 지를 상기시킵니다. 이 일은 이스라엘 백성의 시야를 넓혀 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카메라로 따지면, Zoom Out 기능을 이용하여, 특정 부위만 보다가 더 넓게 앵글을 잡는 것과 같습니다. 우물 안에 있던 개구리를 우물 바깥으로 꺼내주는 것과 같습니다. 나무만 보던 눈을 숲을 보도록 시야를 넓혀 주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분입니다(5). 이것을 창조신앙이라고 합니다. 창조신앙을 가진 자만이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아온 바빌론의 하나님도 됩니다. 하나님의 영은 이스라엘만 살아 숨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지으신 모든 만물을 살아 숨쉬게 합니다.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불러 특별한 백성이 되게 하시고, 이들에게 의로운 세상을 열도록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의로운 세상을 열도록 부르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특별한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으로 가득 찬 종을 보내십니다. 이 종은 정복자나 독재자가 아닌, 정의를 베푸는 해방자입니다. 이 종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습니다. , 병들고, 힘 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거나 못살게 굴거나 필요 없다고 무시하고 죽여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새삶을 열어주고, 그들을 오히려 섬겨줍니다.

 

요즘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731부대의 죄악이 언론을 전세계에 낱낱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화학무기를 개발하기 위해서 중국인, 조선인, 러시아인들을 잡아 생체실험을 한 기록들이 발견되었고, 그것을 언론에서는 공개했습니다. 정복자나 독재자는 상한 갈대를 꺾고, 꺼져가는 등불을 끕니다.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없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생명을 하찮은 개미처럼 생각합니다. 이런 일이 그때만 벌어진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도 세상 곳곳에서, 심지어 가장 민주주의가 발달됐다고 자부하는 미국에서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신 당신의 영으로 가득 찬 종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만물을 사랑하고, 오히려 그것들을 위해서 당신의 생명을 내어놓습니다. 그래서 만물을 살리시고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정의를 이 땅 위에 가져오시는데, 그 정의는 어느 한 곳에 치중되어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땅 위에(섬들에게까지)서 시행됩니다. 이 정의를 베푸는 하나님의 종은 정의가 온전히 펼쳐질 때까지 인내합니다. 정의를 펼치다 낙담하거나 실망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라는 말을 이사야 선지자가 힘주어 말하는 이유는, 정의를 행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정의를 행하다 결국 쇠하고 낙담합니다. 인간에게는 의협심이라는 것이 있어서 일시적으로 정의로운 일에 가담하고 정의를 갈망하고 외치지만, 그것을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행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찬 사람은 정의를 행하면서 당하는 어려움 때문에 쇠하거나 낙담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사람이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찬 사람인가 아닌가를 판가름 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찬 사람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서 정의를 행하시면서 많은 어려움을 당하셨습니다. 결국 그것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쇠하거나 낙담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 부활이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목표를 주십니다.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6-7).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만이 의로워지시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하여 모든 나라가 의로워지기를 바랐습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일하고 계신다고, 그들 가운데서 일 하고 계신다고 이사야 선지자는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가장 이해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에게 안 좋은 일이 닥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슬픔 가운데 빠집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바벨론이라는 이방 나라에 의해서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잡혀와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본인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 일하고 계신다는 것은 웬만해선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복의 근원으로, 제사장 나라로 택하신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신의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원래의 그 역할, 복의 근원과 제사장 나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길을 내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스라엘을 언약 백성과 빛으로 삼아, 눈먼 자들을 밝히고, 갇힌 자들을 옥에서 이끌어 내고, 흑암에 앉은 자들을 감방에서 나오게 하십니다. 지금 현재의 이스라엘의 처지가 비참해 보여도, 그것은 좁은 눈으로 봤을 때만 그럴 뿐이지, 우주적인 관점에서 시야를 넓혀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당신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겁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수세주일이기도 하고, 교회적으로는 임직 예배를 드리는 날이기도 합니다. 교회력은 오늘을 수세주일로 기념하는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예수님의 정체성을 세상에 드러내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이 되셨지만,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세례를 통하여 그 사실이 온 세상에 드러납니다. 그 정황이 오늘 같이 읽도록 되어 있는 마태복음 3장의 말씀에 잘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3:16-17).

 

이것을 시작으로 소위 말하는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됩니다.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면서 본격적인 사역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세례라는 것은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죄사함과 구원의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지만, 이제부터 신앙생활을 사적이 아니라, ‘공적으로 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공적으로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찬그리스도인으로서 병들고, 힘 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거나 못살게 굴거나 필요 없다고 무시하고 죽여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새삶을 열어주고, 그들을 오히려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일을 하면서 쇠하거나 낙망하지 말아야 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본인을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최악의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 주변 사람들에게 복을 베풀기 원하시고, 거룩하게 하길 원하신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세례 받는 것을 넘어, 집사로 권사로 세움을 받는다는 것은 그 영성이 한 단계 더 성숙해져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충만한 사람이 되어, 더 섬기고, 더 복의 근원이 되고, 더 거룩하고, 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가 받은 세례를 돌아보고, 임직식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가 받은 직분에 대하여 다시 한 번 돌아봅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세상의 빛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빛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까? 마태복음 1624절에서 우리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고, 예수님께 그리고 이웃에게 시선을 돌린다는 뜻입니다. 이게 잘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느라, 시간을 쓰고 물질을 씁니다.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느라, 상한 갈대를 꺾어 버리고 꺼져가는 등불을 꺼버립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는다는 것, 직분을 받는다는 것은, 이러한 삶을 십자가에 못박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부르심입니다.

 

십자가는 나무로 된 저것이 십자가가 아닙니다. 나무로 된 십자가는 누구든지 짊어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나무로 된 것이 아니라, 말씀이 곧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빛이 되라! 이 십자가를 짊어지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십자가를 짊어질 때, 새 일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1. 9. 04:42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냉소에서 희망으로

창세기 15

(창세기 18:1-15)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아브라함이 손님을 잘 대접해서 복 받은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손님을 잘 대접하면 복 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손대접하기(Hospitality)’가 기독교인들의 윤리이긴 하지만, 오늘 말씀은 단순히 손대접하기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진수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왕국을 형성해서 성전을 지어 그곳에서 예배를 드린 것과 요즘 우리들이 이렇게 모여서 예배 드리는 것을 생각하면서 아브라함의 예배를 들여다 보면 아브라함의 예배는 예배 같지 않습니다. 우선, 아브라함의 예배는 공간의 존재가 없습니다(No Building). 아브라함의 예배는 공간의 예배가 아니라, 장소의 예배였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이 되고 있는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은 이전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던 곳이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제단을 쌓았던 곳입니다.

 

아브라함 시대(족장시대)에는 예배를 드리는 성전같은 것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본인을 나타내신(현현) 곳이 곧 예배의 장소였습니다. 이후에 야곱도 형 에서를 피해 하란 땅으로 가다가 벧엘이라는 곳에서 하나님의 현현을 경험한 후 바로 그곳에 제단을 쌓습니다. 사실, 성전신앙이 자리 잡은 후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좀처럼 피어나지 못했습니다. 형식적이고 의무적인 측면에서 예배를 드리긴 했어도, 삶의 곳곳이 곧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될 수 있다는 보편적 임재의 의식이 사라지다 보니, 신앙 자체가 형해화되었습니다.

 

이러한 형해화 된 신앙은 우리도 체험합니다. 예배는 그저 교회당에 와서만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교회당에서는 거룩한 모습으로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데(하나님께 예배당에서만 잘 보이면 된다는 의식), 교회당 밖에만 나서면 전혀 거룩한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는 세상 속의 인간으로 살아가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요즘 우리들이 회복해야 할 예배의 영성은 성전예배가 아니라, 삶의 예배입니다. 다른 말로 아브라함 예배 또는 족장 예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족장들)에게 예배는 닫혀 있는 공간에서의 퍼포먼스가 아니라 열려 있는 공간에서의 살아 있는 체험 그 자체였습니다.

 

이것은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이 예배를 통해서 기대하게 되는 기대치를 다르게 합니다. 예배가 닫혀 있는 공간에서의 퍼포먼스로 전락하면 예배는 일종의 엔터테인먼트로 변하게 됩니다. 예배 드리는 자는 예배 받는 자를 만족시키면 그만이고, 예배 드리는 자는 자신들의 예배를 통해서 자족하면 그만입니다. 예배 드리는 자와 예배를 받는 자 사이의 인격적인 사귐 같은 것은 필요 없게 됩니다. 의무를 다했다는 생각이 더 이상의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게 합니다. 인격적 사귐이 없는 존재들 사이에는 기대치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저 각자의 일을 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에서처럼 예배가 열려 있는 공간에서의 살아 있는 체험으로 다가오면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예배는 하나님의 현현 그 자체였습니다. 하나님의 현현은 계시적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계시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드러내신다는 것을 말하는데, 하나님이 드러나신다는 것(내재적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경륜적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신 말씀 그리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일치를 이룹니다. 존재와 말과 행동이 언제나 다르게 노는 우리 인간이 이해하기 힘든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이렇듯,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현현을 기대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기대하는 것이 없으니까 예배도 퍼포먼스 형태로 드리고 말지만, 아브라함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현현을 기대했기 때문에 삶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현현, 하나님의 계시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제단을 쌓으면(예배 드리면), 어떠한 징조가 있을 것인데, 그 때 그것을 포착할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제단을 쌓은(예배를 드린 그래서 하나님의 현현을 경험했던) 아브라함은 무더위 가운데서도 어떠한 징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장막 문 앞에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나타난 징조를 놓치지 않습니다.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 편에 서 있는지라”(2a).

 

기대가 없는 사람,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현현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 앞에 서 있는 징조를 포착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현현을 기대하는 믿음의 사람은 절대로 징조를 놓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반응을 보십시오.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2b).

 

제단을 쌓아(예배를 드려) 참되신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열정을 지닌 참된 예배자의 자세를 보십시오. 그 어디에서도 교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몸을 땅에 굽히고, 자신 앞에 선 세 사람에게 주여라는 호칭을 쓰며, 자기 자신은 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분이고, 나는 땅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철저하게 인식한 믿음의 사람은 절대로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이지 않습니다. 땅에 있는 우리는 죽을 때까지 스스로 낮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낮추고, 하나님은 높이십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높일 때 부끄러움을 당하지만,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낮추고 하나님께서 높여 주실 때 우리의 삶은 영광스러워집니다. 우리는 사랑하고 용서하는 일만 해야 합니다.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만 하십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용서하는 일을 그치고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정죄할 때, 거기에는 죄악이 풍기는 썩은 내만 날뿐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다음 구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현현 앞에서 절대로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함부로 나열하며 자신의 싸구려 욕망을 드러내 보이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손님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나열합니다. 더운 날씨에 여행 중인 손님들에게 필요한 것은 발을 씻는 것과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픈 배를 채우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시선이 자기 자신에게 가 있지 않고, 오직 손님들에게 가 있습니다.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데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이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음식을 내오는지를 살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손님들을 나무 그늘 아래 모셔놓고, 아브라함은 급히 장막으로 달려가 음식 준비를 합니다. “고운 가루 세 아스를 가져다가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지금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예배 시간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 쓰는 재료는 모두 제사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때 사용되는 것들입니다. ‘고운 가루와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 아브라함에게 따로 떼어낸 예배 시간과 삶이 구별되고 있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삶 자체가 예배의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운 가루와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로 만든 음식을 가져다가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 아래에 쉬고 있는 손님들을 대접하는 모습은 영락 없이 예배를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에게 집중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집중한 아브라함의 삶은 이제 드라마틱한 변화를 보게 됩니다.

 

식사를 마친 손님들은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지금 아브라함 가정의 최대 이슈는 자손의 출산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가정의 사사로운 소망이 아니라, 아브라함 가정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겁니다. 신앙은 하나님에게 집중하는 것이지,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어, 하나님의 뜻이 내 삶에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는 것이지, 내 욕망을 채우는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기에서 자꾸 걸려 넘어집니다. 우리는 예배 드릴 때 조차도 우리 자신에게만 집중합니다. 온통 나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니 귀가 닫히고 눈이 닫힙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말씀하셔도 들리지 않고, 하나님이 아무리 일하셔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의 일치를 통해 하나님에게 집중하게 된다면 비로소 우리 삶에서 이루실 하나님의 뜻이 들리고 보이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집중했던 아브라함에게 들린 음성을 보십시오.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이것이 현현이고, 계시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네 인생이 가장 바라는 것이 이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놀라운 순간, 하나님의 계시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숨겨져 있던 것이 드러났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냉소주의입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냉소주의, ‘그게 되겠어?’ 냉소주의는 믿음 없음의 다른 말입니다.

 

사라의 냉소를 보십시오. “사라는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12). 비웃음, 냉소, 불신이 가득 찬 마음은 드러난 하나님의 뜻조차 발로 차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14a). 여호와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일이라면, 하나님께 어려운 일은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입으로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꼭 이루십니다.

 

엘샤다이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냉소를 희망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사라의 웃음은 냉소의 웃음이었으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라고 할 때의 웃음은 희망의 웃음입니다. , ‘네가 지금은 그렇게 냉소적으로 웃고 있으나, 내 뜻이 이루어지는 그 때에는 그 웃음이 기쁨의 웃음으로 변할 것이다!’라는 선포인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삶 가운데, 비웃고 싶은, 냉소적으로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 막막한 일이 있으십니까? 그 문제에 매여 있지 마시고, 우리의 구원자 되신, 엘샤다이의 하나님에게로 시선을 돌려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보여준 절차를 따라, 퍼포먼스의 예배가 아닌 삶의 예배를 정성스럽게 드리면, 여러분의 냉소가 기쁨으로 변할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사람이 그분을 불신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냉소를 희망으로 바꾸어 주시는 엘샤다이의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불신을 믿음으로 바꾸십시오. ‘내년 이맘때’, 다시 말해, ‘웃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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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1. 6. 00:01

당신은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이사야 43:1-21)

 

새해가 밝았습니다. 한국은 올해를 갑오년이라고 부릅니다. ‘갑오년하면 120년전인 1894년에 있었던 갑오개혁이 생각납니다. 특별히 갑오농민혁명을 이끌었던 녹두장군 전봉준이라는 분이 생각납니다. 그 분이 지은 <새야, 새야 파랑새야>라는 시는 매우 유명합니다. 갑오년을 맞아 한 번 낭송하겠습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 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잎에 앉은 새야

녹두 잎이 깐닥 하면 너 죽을 줄 왜 모르니

 

새야, 새야 파랑새야 너 뭣 하러 나왔느냐

솔잎 댓잎 푸릇푸릇 하절인 줄 알았더니

 

백설이 펄펄 엄동설한이 되었구나.

 

파랑새는 희망을 나타냅니다. 그것도 그냥 희망이 아니라 구슬픈 희망입니다. 마음 속 깊이 묻혀 있는 간절한 소망입니다. 여러분 중에 닛산 자동차를 타고 다니시는 분이 계실 텐데, 일본어 닛산이 바로 파랑새(Bluebird)’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닛산 자동차를 탄다는 것은 파랑새, 즉 희망을 탄다는 뜻이죠. (저는 닛산 자동차 판매원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희망 가운데, 또는 한 가지 희망 가운데 새로운 해를 시작하셨을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새해에 우리가 가져야 할 희망이 무엇인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 되기입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우리는 말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대답하면서도 실제로 하나님의 백성처럼 살아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잘 모르고 삽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백성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그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을 부를 때, ‘야곱아, 이스라엘아라는 명칭이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명칭인데,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부를 때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를 그리스도, 주님, 메시야, 왕으로 고백하고 그를 따르는 무리에게 붙여진 명칭입니다. 구체적으로 사도행전 1126절에 나옵니다. “바나바가 사울(바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야곱으로서, 이스라엘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대하여 독특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바로 창조신앙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말씀하시느니라.”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인데, 그 하나님이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것은 매우 절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택함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택하시는 것은 그가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가리킵니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에 대하여 절대적인 주권을 가집니다. 물론 부모가 없을 때 조부모나, 백부(삼촌), 고모, 이모 등이 아이들의 법적인 대리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었다고 생각했던 부모가 살아 돌아오면 부모 앞에서 다른 법적 대리인은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것은 우리를 부르시는 것, 즉 택함에 대하여 절대적인 주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냥 백성이 아니라, 택함 받은 백성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매우 특별하게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을 일컬어 선민이라고 했습니다. 영어로 ‘chosen people’이라고 합니다. ‘택함 받은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그 택함 받은 백성에 대해서 오늘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7)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1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도조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20)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내가 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해주셔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택해 주시는 하나님이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택해 당신의 백성 삼아 주신 것은 매우 큰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복에 대해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구속 redemption’의 복입니다. 구속은 어디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자유케 하셨다는 뜻입니다. 스티븐 킹(Stephen King)의 소설을 바탕으로 팀 로빈슨(Tim Robbins)과 모건 프리먼(Morgan Freeman)을 주연으로 해서 1994년에 만들어진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도 영어로 <Shawshank Redemption>이라고 합니다. 멜 깁슨이 주연한 <브레이브 하트>라는 영화에서 스코틀랜드의 해방을 꿈꾸는 주인공이 마지막에 죽으면서 이 한 마디를 외치며 죽습니다. “Freedom! 자유!” 자유를 향한 인간의 열망은 그 어떤 욕구보다 더 깊은 욕구입니다. 자유는 모든 욕구의 기초입니다. 배고픔으로부터의 자유, 성욕으로부터의 자유, 이런 욕구뿐만이 아니라, 사회, 정치, 경제, 문화적인 모든 면에서 우리 인간은 어딘가에 속박되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하다못해 아이들도 좀 크면 부모들로부터 자유를 얻으려고 갈망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신앙으로 속박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참 자유를 누린다는 뜻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삶 가운데 여러분의 자유를 빼앗는 그 무엇이 있거든, 바로 거기로부터 구속해 달라고, 해방시켜 달라고, 자유케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당신의 백성을 구속하시는 하나님, 당신의 백성을 해방시키시고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유를 갈망하는 여러분에게 참 자유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자유는 우리의 욕망을 채우는 방식으로 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욕망을 비우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임합니다.

 

이 시대 최고의 영성가 중 한 명인 안셀름 그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거룩해진다는 것은 세상의 힘에 굴복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기를 바라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과 일치하면서 그분에 의해 거룩해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진정으로, 그리고 온전히 구원받을 것입니다”(치유, 71)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의 소망을 이루어 주옵소서.’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 얼마나 어려운 고백입니까? 겟세마네의 피땀 기도가 없다면 불가능한 고백입니다. 솔직히, 우리는 우리의 소망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을 기대하지,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내놓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보여야 할 거룩한 모습은 언제나 묘연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욕망에 사로잡혀 거룩함을 잃고 방황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속박된 그곳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으시거든, 여러분의 욕망을 채우는 방식으로 기도를 드리지 마시고, 거룩한 기도, 즉 우리를 백성으로 택해주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참 자유를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내리시는 복 중, 오늘 말씀을 읽기만 해도 은혜 되는 복이 있습니다. 2절 말씀입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랄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 또한 4절 말씀도 보십시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니라!”

 

그리고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은 다음과 같은 복을 누립니다. 19절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라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라!”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 일의 혜택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이루신 새 일(a new thing)’이 무엇인지 압니다.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라!” 우리는 그 길을 걸어가고, 그 물을 마십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예수는 진리의 길이다! 예수는 생명의 물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걸으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자신을 마시라고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 놓으셨습니다. 바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만복을 누린 하나님의 백성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오늘 말씀은 이렇게 가르쳐 줍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21).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나이 많은 어느 목수가 은퇴할 때가 되었다 생각하고 고용주를 찾아가나이가 많아 더 이상 일을 하지 않고 자신의 가족과 함께 편히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고용주는 가족들의 생계가 걱정되지 않느냐면서 더 일하라고 극구 말렸지만 그 목수는 자기의 주장을 꺾지 않고일을 그만 두겠다일을 그만 두더라도 앞으로도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고용주는훌륭한 일꾼을 잃게 되어 무척 유감이라고 말하면서마지막으로 손수 집을 한 채만 더 지어 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목수는 그 고용주의 부탁을 뿌리칠 수 없어그렇게 하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그의 마음은 벌써 고용주를 떠나 있었고 집 짓는 것도 내키지 않는 일로 치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목수는 임금을 적게 주어도 될 형편 없는 인부들을 고용하였고 건축자재 또한 무성의하게 조잡한 것을 구입하여 집을 지었습니다.

 

집이 완성 되자 고용주가 집을 보러 왔습니다. 엉성하게 지었기 때문에 자세히 살피면 그 집이 잘못 지어진 것임을 눈치 챌 수 있었지만 그 고용주는 집을 자세히 둘러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 목수는 마음이 조마조마 했지만 집을 자세히 검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말 운이 좋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기뻐했습니다.

 

고용주가 목수에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당신의 집입니다. 당신이 나를 위해 여러 해 일을 해 주었기 때문에 고마운 마음으로 보답하는 의미에서 이 집을 드립니다.“하고는 현관 열쇠를 그에게 쥐어주었습니다.

 

목수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주인의 통 큰 보답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받은 더 큰 충격은 집을 한 채 선물로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렇게 집을 지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도 몇 년이 채 지나지도 않아서 대폭 수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란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어리석은 목수가 전에 했던 것처럼 자신의 경험을 살리고 정성을 다해 집을 지었다면 100년이 더 갈 튼튼한 집을 지었을 것입니다. 그 목수는 마지막 순간에 그런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갑오년을 맞아, 처음에 갑오개혁을 생각하며 녹두장군의 파랑새를 읽었듯이, 갑오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신앙인으로,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개혁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한 번 돌아보면, 우리는 위에 등장하는 마음 떠난 목수처럼’, '마음 내키지 않는 목수처럼'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얼마나 엉성하게 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 남을 위한 일이라고만 생각하지, 결국 나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예배 드린다고만 생각하지, 결국 이 예배를 통해서 혜택을 받는 것은 우리 자신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집을 정성스럽게 지은 만큼 그 혜택을 목수가 보게 되는 것처럼, 예배를 정성스럽게 드린 만큼 그 혜택을 우리 자신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그렇습니다. 좋은 것 먹고, 운동 열심히 하는 것만이 나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새로운 계명을 주셨듯이,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신 계명에 입각한, 하나님을 위하고 이웃을 위한 모든 일이, 결국 나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는 목수처럼 하루를 짓고 한 달을 짓고 한 해를 지으며 살아나가고 있습니다. 성의 없이 지은 모든 세월들이 원망과 한탄으로 얼룩지지 않도록 오늘 이 하루를 성실과 감사로 지어나가야겠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2. 22. 23:36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이사야 7:1-16)

 

아하스는 남유다 요담 왕의 아들이고 히스기야의 아버지였습니다. 열왕기하 15장에서 20장에 걸쳐 요담, 아하스 그리고 히스기야의 통치에 대한 평가가 내려져 있는데, 아하스의 아버지 요담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나쁘지 않습니다.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왕하 15:34). 그리고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는 매우 유명한 이스라엘의 왕 중 한 명으로서, 그의 기사가 무려 4장에 걸쳐 나옵니다. 그는 많은 치적을 쌓았고, 평가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아하스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좋지 못합니다.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다만 그 전 이스라엘 여러 왕들과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더라”(왕하 17:2).

 

아하스가 통지하던 시대는 국제 정세가 매우 긴박하게 돌아갔고, 남유다 왕국에게 불리하게 돌아갔습니다. 북이스라엘에 비해서 국력이 약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 나라와의 관계도 원만치 않았습니다. 심지어 북이스라엘은 남유다 왕국을 치기 위해서 이웃 나라인 아람과 손을 잡고 남유다를 침공합니다. 이 사실에 아하스는 기겁을 합니다. 가뜩이나 국력도 약한데, 두 나라가 협공을 해오니, 이제 꼼짝 없이 나라가 망할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지요. 아시다시피, 고대의 전쟁은 무자비하고 잔인했습니다. 전쟁에서 패한 나라의 왕과 백성들은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전쟁이 나면 죽을 힘을 다해 싸웠던 것이죠. 그런 상황을 맞닥뜨린 아하스 왕과 남유다 백성들의 마음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7:2b).

 

인간의 심령을 가장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아하스 왕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종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아하스의 마음을 만져주십니다. 물론 왕이기 때문에 겉으로는 의연한 척 하고 있지만, 사실 저 깊은 심령은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는 아하스에게 가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7:4).

 

예나 지금이나 우리가 어떠한 일을 당했을 때 두려워 떨고 낙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서 말씀하십니다.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동맹을 맺어 남유다를 무너뜨리려고 애를 쓸지라도 그 뜻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니,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우두머리()인 르신과 베가의 앞날도 예언해주십니다. 그들이 곧 패망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말씀을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전해 듣고도 아하스 왕이 잘 믿지를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런 구절이 나오는 것을 보면 말이죠.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7:9b).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을 주시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하스 왕이 믿지를 않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확신을 더해주는 가시적인 징조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7:11). 사시시대 때 기드온은 자신의 부르심이 확실한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두 번이나 징표를 구합니다. 그 중 유명한 것이 양털 한 뭉치 징표입니다. 하루는 양털 한 뭉치에만 이슬이 떨어지고 주변 땅은 마른 것을 통하여, 하루는 양털 한 뭉치에는 이슬이 떨어지지 않고 주변 땅에만 이슬이 떨어지는 것을 통하여, 기드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합니다.

 

징표를 구하라고 하시는 말씀에 아하스는 다음과 같이 응답합니다.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17:12). 징표 구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시험한 기드온에 비해 아하스의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아하스의 그러한 행동은 좋은 뜻에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의미에서 기록된 것입니다. 지금 아하스가 징조를 구하지 않는 것은 겸손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믿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 믿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 없는 자를 내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배교한 자를 내치긴 하시지만, 믿음이 연약한 자는 보듬어 안으십니다. 아하스는 배교한 자가 아니라, 믿음이 연약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징조조차 구하지 못하는 연약한 믿음을 가진 아하스에게 친히 징조를 주십니다. 그것이 유명한 이 말씀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7:14b).

 

이렇게까지 하나님께서는 친히 징조를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아하스는 믿음이 연약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합니다. 열왕기하 16장에 보면,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동맹을 물리쳐 주실 거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 아하스는 앗수르에 도움을 청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맙니다. 그러면서 그 대가로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내어다가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셋 왕에게 갔다 바칩니다(왕하 16:8).

 

아하스는 하나님 앞에서 정말 큰 잘못을 범하고 맙니다.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다 드려도 시원치 않을 판에, 성전에 있는 은금을 내어다가, 즉 하나님의 것을 가져다가 이방 나라 왕에게 갔다 바치는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도 무심코 이렇게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마땅히 하나님께 올려져야 할 영광과 예물이 엉뚱한 곳으로 드려지는 것이죠. 믿음이 연약하다는 것은 이렇게 위험하고 어리석은 겁니다. 연약한 믿음을 그대로 놓아두면 오히려 사탄의 노리개가 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니리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시라”(4:14-15).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징조를 통하여 아하스 왕에게 이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니 두려워하지 말고 떨지 말라!”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만큼 우리에게 힘이 되는 것, 좋은 것이 없습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도 숨을 거두시면서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리더십을 이어받았던 여호수아도 가나안 땅으로의 입성, 즉 가나안 족속들과의 전쟁을 눈앞에 두고 바로 이 말씀을 받았습니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1:9).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아느냐는 겁니다. 오늘 말씀은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은 금방 눈에 확 보이듯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을 말해 주고 있는 구절이 오늘 말씀 15절과 16절입니다.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을 알 때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은 아이가 자라서 선과 악을 구분하게 되는 것처럼, 성장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겁니다. 아이들은 생명을 입고 태어나긴 했어도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이것을 분별력이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도 새생명을 입고 다시 태어나긴 했어도 믿음이 어린 아이와 같은 상태에 있으면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영적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영적 분별력이 없는 자가 됩니다. 아이가 성장하지 못하면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미숙아가 되는 것처럼, 영적 성장을 이루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보지 못하고, 아하스처럼 엉뚱한 선택을 하게 되고, 결국 멸망의 길로 가고 만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성장, 영적 성장, 분별력, 이런 말들이 마음에 잘 와 닿지 않으시는 분들께서도 계실 겁니다. 영적 성장이 우리의 눈을 뜨게 하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놀라운 사실을 보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사건이 열왕기하 6장에 나와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던 아람이 오늘 말씀에서는 북이스라엘과 손을 잡고 남유다를 침공하지만, 원래부터 아람이 북이스라엘과 이렇게 사이 좋았던 것은 아닙니다. 정치 세계에서는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기도 하고,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되기도 합니다. 선지자 엘리사가 사마리아에서 활동하던 시절, 아람은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침공했습니다. 그 당시 아람의 국력은 막강했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은 아람의 침공에 꼼짝 없이 당했습니다. 아람은 사마리아성을 포위했고, 북이스라엘은 풍전등화에 놓여 있었습니다.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는 그 모습을 보고 기겁을 합니다.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왕하 6:15b). 아람 군대가 사마리아성을 꽁꽁 포위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놀란 게하시에게 엘리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왕하 6:16). 그리고 엘리사는 하나님께 기도 드려 사환 게하시의 눈을 열어 달라고 합니다. 엘리사의 기도로 영안이 열린 게하시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영적 성장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던 엘리야의 믿음과 같은 믿음을 갖게 된 게하시는 사마리아성을 지키고 있는 천군천사를 보았습니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 6:17).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실한 징표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이 임마누엘이신, 오늘 날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징표입니다. 이렇게 보이는 증거를 주셨는데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아하스처럼 믿음 없이 행동하면, 참 안타까운 겁니다.

 

여러분에게 어떠한 문제가 있든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십자가 붙들고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리십니까? 여러분 앞에 놓인 문제는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힘을 내십시오. 우리 서로 위로하고 축복합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힘을 냅시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2. 19. 03:16

약속이니까 아프다

창세기 14

(창세기 179-14, 23-27절)

 

할례는 대표적인 율법입니다.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외적인 표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썼습니다. 바로 오늘 말씀 때문입니다.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배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14).

 

여러분은 이 말씀이 무섭습니까?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할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 없는 사람에게는 별로 무서운 말씀이 아닙니다. ‘백성 중에 끊어지리라는 말씀이 무섭지 않은 이유는 그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 말씀은 정말 무서운 말씀입니다.

 

창조신앙이 없는 사람에게 이 말씀은 별로 무서운 말씀이 아닙니다. 창조신앙이란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라고 인식하는 신앙입니다. 이 신앙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리고 그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전혀 그렇지 않게 살아가기 때문에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우리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인식하게 해 주는 중요한 신앙입니다.

 

창조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은 일단 하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의 주인이 되어 살아갑니다. 또한 창조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눈에 보이는 현상에 의해서만 살아갑니다.

 

창조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노예처럼 부리시도록 놓아둔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명을 주인 되신 하나님께 내어드림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또한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유한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으로, 무한한 존재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창조신앙은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게 하고 자유케 합니다. 사람들은 착각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살아가는 것이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이죠. 그런데 이것은 피조물인 인간의 한계를 너무 인식하지 못하는 겁니다. 인간은 누군가에 기대지 않으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매우 연약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자연에 기대지 않으면 살 수 없고, 다른 인간에 기대지 않으면 살 수 없고,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기대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할 일은 자기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도 나의 버팀목인 자연, 인간,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합니다. 자연을 착취하고, 인간을 착취하고, 하나님을 착취하면 결국 기댈 곳이 없어 멸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에 기대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을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의 비유, 양무리의 비유, 그리고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중에서 탕자의 비유는 매우 결정적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분깃을 챙겨 먼나라로 떠난 둘째 아들(탕자)은 하나님을 떠나 사는 인간의 실존을 보여줍니다. 아버지 집 울타리를 벗어난 것은 자신의 한계를 벗어난 것 같고, 자기의 분깃으로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은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된 것 같았지만, 결국 둘째 아들의 신세는 돼지와 한솥밥을 먹는 돼지 같이 천한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지금은 삽겹살이 금겹살이지만, 그 당시 돼지는, 특별히 이스라엘에서는 매우 천한 동물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율법에 돼지고기 먹는 것을 금지했겠습니까.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겁니다. 창조신앙을 가지고 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무서운 말씀인 것이죠. 하나님의 백성 울타리 밖으로 벗어나는 일은 살아 있으나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상태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시고, 언약과 관련해서 아브라함이 이행해야 하는 부분을 말씀하십니다. “[너로 말할 것 같으면] 내 언약을 지켜야 한다”(9).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너는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언약을 받은 아브라함이 이행해야 하는 책임을 드러내십니다. 언약과 관련해서 아브라함이 이행해야 할 명령은 이것입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10). 이것은 아브라함이 지켜야 할 책임입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어느 상황에서든 꼭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책임을 이행하지 않으면, 언약은 깨지는 것이죠. 백성 중에서 끊어지는것입니다.

 

이 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특별히 은혜의 강조로 인해 책임이 희석된 개신교 신앙은 이 원리를 잘 기억하고, ‘책임의 중요성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의 신학사상 중 가장 오해 받는 부분이 바로 오직 은혜로라는 구호입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외쳐진 구호인 오직 믿음으로라는 겁니다.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구호는 자칫 구원을 싸구려로 만들어 버릴 위험성이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께서 밥숟갈 떠서 입으로 넣어주신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에베소서 2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구원은 은혜와 믿음의 합작품입니다. 은혜는 하나님 편에서 오는 것이고, 믿음은 인간 편에서 오는 것입니다. 은혜가 없으면 믿음이 소용 없고, 은혜가 있어도 믿음이 없으면 소용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언약은 하나님 편에서 베푸시는 은혜를 말합니다. 그리고 할례는 인간 편에서 이행해야 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마음의 행위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할례가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믿음은 단순히 마음의 행위가 아니라, 행동을 동반한 총체적인 행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믿음은 갈대처럼 가벼운 마음의 장난이 아니라, 아픔을 동반하는 책임이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언약을 세운 뒤, 자기 쪽에서 이행해야 하는 명령인 할례를 곧바로 시행합니다. 할례는 남자 성기의 포피를 베어내는 일입니다. 지금이야 마취의학이 발달해서 할례를 행할 때 아픔이 없지만, 아브라함 시대에 할례는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살갗을 조금만 베어도 얼마나 아픕니까? 그런데 포피를 베어내는 일은 그 고통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아팠으면 할례를 받은 며칠 동안 남자들은 거동을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창세기 34장에는 훗날 할례의 아픔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동생 디나를 욕보인 세겜 사람들을 도륙한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의 유명한 일화도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시행한 나이가 99세입니다. 하갈에게서 얻은 아들 이스마엘의 나이는 13세였습니다. 난 지 8일만에 할례를 받는 것은 은혜로운 처사입니다. 아이는 고통을 잘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학이 발달되지 않은 그 시절에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베풀게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지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아무튼, 아브라함과 이스마엘, 그리고 아브라함 집안의 모든 남자들은 할례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성경을 한 마디로 줄여 말하면, ‘약속입니다. ‘언약이라고도 하고, ‘계약이라고도 합니다. 구원은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마술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피조물) 간의 약속에서 일어나는 은혜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엘샤다이의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모든 것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그 징표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입니다. , 하나님 자기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믿는다는 의미로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약속을 믿는 우리들의 믿음은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 깨달아지십니까?

 

우리는 너무도 쉽게 믿음을 헌신짝처럼 버립니다. 그 이유는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아프셨는지에 대한 체험이 없기 때문이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책임적으로 할례를 행한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약속이니까 아픈 겁니다. 믿음은 아픈 겁니다. 믿음은 마음에 받는 할례입니다.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아픔이 이 마음에 새겨지는 겁니다. 그러니 이 마음이 통회하는 마음이 되는 것이고, 아픈 마음, 마음의 할례를 통해서 거듭나는 겁니다. 그 과정을 통과해야 믿음의 삶을 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엘샤다이의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아낌 없이 자신을 십자가 위에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아픔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도 그 은혜의 약속을 붙들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갈대처럼 가벼운 마음의 장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책임 있게 응답하는 영혼(존재)의 울림입니다. 약속이니까 아픈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값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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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