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4. 1. 13. 10:08

빛이 되라 말씀이 십자가다

(이사야 42:1-9)

 

하나님 말씀은 언제나 급진적이고 파격적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보수적이고 고착화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변화를 싫어하고 어딘가에 안주하고 싶어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내놓기 싫어하고 집착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야가 좁습니다. 아는 만큼만 알고, 오른 만큼만 보고, 이해한 만큼만 믿습니다. 인간은 우물 안 개구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인생을 살다 갑니다. 이런 인간에게 하나님은 우물 안을 벗어나, 새로운 세상, 넓은 세상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경험은 매우 역사적입니다. 역사가 깊다는 뜻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경험은 출애굽 사건에서 비롯됩니다. 이스라엘에게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출애굽 한 후,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자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광야를 거쳐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 정착해 삽니다. 거기서 이들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이루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을 짓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이들은 주변 나라들과의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척박한 땅에서 기근을 면하며 풍요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다 길을 잃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언약에 나와 있는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바벨론이라는 이방 나라에 나라가 망한 것입니다.

 

우리는 합법적인 이민자들이기 때문에 미국 땅에 와서 사는 것이 그런대로 괜찮지만, 불법적인 이민자들만 해도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녹록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나라를 잃고 포로의 신세로 이국 땅에 잡혀 와서 산다는 것은 그야말로 지옥 같은 경험입니다. 적들의 손에 넘겨져 치욕을 당하고 삶의 터전이 파괴당하고, 쇠사슬에 묶여 끌려가는 곤욕 속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돌아보며 질문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까지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은 뭐하시는가? 계시기는 하는가?”

 

이렇게 절박한 상황 속에서 이토록 절박한 질문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사야 선지자는 매우 급진적이고 파격적인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그리고 그분이 어떻게 일하시는 지를 상기시킵니다. 이 일은 이스라엘 백성의 시야를 넓혀 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카메라로 따지면, Zoom Out 기능을 이용하여, 특정 부위만 보다가 더 넓게 앵글을 잡는 것과 같습니다. 우물 안에 있던 개구리를 우물 바깥으로 꺼내주는 것과 같습니다. 나무만 보던 눈을 숲을 보도록 시야를 넓혀 주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분입니다(5). 이것을 창조신앙이라고 합니다. 창조신앙을 가진 자만이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아온 바빌론의 하나님도 됩니다. 하나님의 영은 이스라엘만 살아 숨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지으신 모든 만물을 살아 숨쉬게 합니다.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불러 특별한 백성이 되게 하시고, 이들에게 의로운 세상을 열도록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의로운 세상을 열도록 부르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특별한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으로 가득 찬 종을 보내십니다. 이 종은 정복자나 독재자가 아닌, 정의를 베푸는 해방자입니다. 이 종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습니다. , 병들고, 힘 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거나 못살게 굴거나 필요 없다고 무시하고 죽여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새삶을 열어주고, 그들을 오히려 섬겨줍니다.

 

요즘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731부대의 죄악이 언론을 전세계에 낱낱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화학무기를 개발하기 위해서 중국인, 조선인, 러시아인들을 잡아 생체실험을 한 기록들이 발견되었고, 그것을 언론에서는 공개했습니다. 정복자나 독재자는 상한 갈대를 꺾고, 꺼져가는 등불을 끕니다.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없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생명을 하찮은 개미처럼 생각합니다. 이런 일이 그때만 벌어진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도 세상 곳곳에서, 심지어 가장 민주주의가 발달됐다고 자부하는 미국에서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신 당신의 영으로 가득 찬 종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만물을 사랑하고, 오히려 그것들을 위해서 당신의 생명을 내어놓습니다. 그래서 만물을 살리시고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정의를 이 땅 위에 가져오시는데, 그 정의는 어느 한 곳에 치중되어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땅 위에(섬들에게까지)서 시행됩니다. 이 정의를 베푸는 하나님의 종은 정의가 온전히 펼쳐질 때까지 인내합니다. 정의를 펼치다 낙담하거나 실망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라는 말을 이사야 선지자가 힘주어 말하는 이유는, 정의를 행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정의를 행하다 결국 쇠하고 낙담합니다. 인간에게는 의협심이라는 것이 있어서 일시적으로 정의로운 일에 가담하고 정의를 갈망하고 외치지만, 그것을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행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찬 사람은 정의를 행하면서 당하는 어려움 때문에 쇠하거나 낙담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사람이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찬 사람인가 아닌가를 판가름 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찬 사람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서 정의를 행하시면서 많은 어려움을 당하셨습니다. 결국 그것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쇠하거나 낙담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 부활이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목표를 주십니다.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6-7).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만이 의로워지시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하여 모든 나라가 의로워지기를 바랐습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일하고 계신다고, 그들 가운데서 일 하고 계신다고 이사야 선지자는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가장 이해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에게 안 좋은 일이 닥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슬픔 가운데 빠집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바벨론이라는 이방 나라에 의해서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잡혀와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본인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 일하고 계신다는 것은 웬만해선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복의 근원으로, 제사장 나라로 택하신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신의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원래의 그 역할, 복의 근원과 제사장 나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길을 내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스라엘을 언약 백성과 빛으로 삼아, 눈먼 자들을 밝히고, 갇힌 자들을 옥에서 이끌어 내고, 흑암에 앉은 자들을 감방에서 나오게 하십니다. 지금 현재의 이스라엘의 처지가 비참해 보여도, 그것은 좁은 눈으로 봤을 때만 그럴 뿐이지, 우주적인 관점에서 시야를 넓혀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당신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겁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수세주일이기도 하고, 교회적으로는 임직 예배를 드리는 날이기도 합니다. 교회력은 오늘을 수세주일로 기념하는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예수님의 정체성을 세상에 드러내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이 되셨지만,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세례를 통하여 그 사실이 온 세상에 드러납니다. 그 정황이 오늘 같이 읽도록 되어 있는 마태복음 3장의 말씀에 잘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3:16-17).

 

이것을 시작으로 소위 말하는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됩니다.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면서 본격적인 사역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세례라는 것은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죄사함과 구원의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지만, 이제부터 신앙생활을 사적이 아니라, ‘공적으로 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공적으로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찬그리스도인으로서 병들고, 힘 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거나 못살게 굴거나 필요 없다고 무시하고 죽여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새삶을 열어주고, 그들을 오히려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일을 하면서 쇠하거나 낙망하지 말아야 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본인을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최악의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 주변 사람들에게 복을 베풀기 원하시고, 거룩하게 하길 원하신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세례 받는 것을 넘어, 집사로 권사로 세움을 받는다는 것은 그 영성이 한 단계 더 성숙해져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충만한 사람이 되어, 더 섬기고, 더 복의 근원이 되고, 더 거룩하고, 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가 받은 세례를 돌아보고, 임직식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가 받은 직분에 대하여 다시 한 번 돌아봅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세상의 빛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빛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까? 마태복음 1624절에서 우리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고, 예수님께 그리고 이웃에게 시선을 돌린다는 뜻입니다. 이게 잘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느라, 시간을 쓰고 물질을 씁니다.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느라, 상한 갈대를 꺾어 버리고 꺼져가는 등불을 꺼버립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는다는 것, 직분을 받는다는 것은, 이러한 삶을 십자가에 못박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부르심입니다.

 

십자가는 나무로 된 저것이 십자가가 아닙니다. 나무로 된 십자가는 누구든지 짊어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나무로 된 것이 아니라, 말씀이 곧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빛이 되라! 이 십자가를 짊어지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십자가를 짊어질 때, 새 일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입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