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2. 22. 23:36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이사야 7:1-16)

 

아하스는 남유다 요담 왕의 아들이고 히스기야의 아버지였습니다. 열왕기하 15장에서 20장에 걸쳐 요담, 아하스 그리고 히스기야의 통치에 대한 평가가 내려져 있는데, 아하스의 아버지 요담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나쁘지 않습니다.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왕하 15:34). 그리고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는 매우 유명한 이스라엘의 왕 중 한 명으로서, 그의 기사가 무려 4장에 걸쳐 나옵니다. 그는 많은 치적을 쌓았고, 평가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아하스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좋지 못합니다.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다만 그 전 이스라엘 여러 왕들과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더라”(왕하 17:2).

 

아하스가 통지하던 시대는 국제 정세가 매우 긴박하게 돌아갔고, 남유다 왕국에게 불리하게 돌아갔습니다. 북이스라엘에 비해서 국력이 약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 나라와의 관계도 원만치 않았습니다. 심지어 북이스라엘은 남유다 왕국을 치기 위해서 이웃 나라인 아람과 손을 잡고 남유다를 침공합니다. 이 사실에 아하스는 기겁을 합니다. 가뜩이나 국력도 약한데, 두 나라가 협공을 해오니, 이제 꼼짝 없이 나라가 망할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지요. 아시다시피, 고대의 전쟁은 무자비하고 잔인했습니다. 전쟁에서 패한 나라의 왕과 백성들은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전쟁이 나면 죽을 힘을 다해 싸웠던 것이죠. 그런 상황을 맞닥뜨린 아하스 왕과 남유다 백성들의 마음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7:2b).

 

인간의 심령을 가장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아하스 왕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종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아하스의 마음을 만져주십니다. 물론 왕이기 때문에 겉으로는 의연한 척 하고 있지만, 사실 저 깊은 심령은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는 아하스에게 가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7:4).

 

예나 지금이나 우리가 어떠한 일을 당했을 때 두려워 떨고 낙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서 말씀하십니다.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동맹을 맺어 남유다를 무너뜨리려고 애를 쓸지라도 그 뜻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니,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우두머리()인 르신과 베가의 앞날도 예언해주십니다. 그들이 곧 패망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말씀을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전해 듣고도 아하스 왕이 잘 믿지를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런 구절이 나오는 것을 보면 말이죠.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7:9b).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을 주시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하스 왕이 믿지를 않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확신을 더해주는 가시적인 징조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7:11). 사시시대 때 기드온은 자신의 부르심이 확실한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두 번이나 징표를 구합니다. 그 중 유명한 것이 양털 한 뭉치 징표입니다. 하루는 양털 한 뭉치에만 이슬이 떨어지고 주변 땅은 마른 것을 통하여, 하루는 양털 한 뭉치에는 이슬이 떨어지지 않고 주변 땅에만 이슬이 떨어지는 것을 통하여, 기드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합니다.

 

징표를 구하라고 하시는 말씀에 아하스는 다음과 같이 응답합니다.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17:12). 징표 구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시험한 기드온에 비해 아하스의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아하스의 그러한 행동은 좋은 뜻에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의미에서 기록된 것입니다. 지금 아하스가 징조를 구하지 않는 것은 겸손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믿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 믿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 없는 자를 내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배교한 자를 내치긴 하시지만, 믿음이 연약한 자는 보듬어 안으십니다. 아하스는 배교한 자가 아니라, 믿음이 연약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징조조차 구하지 못하는 연약한 믿음을 가진 아하스에게 친히 징조를 주십니다. 그것이 유명한 이 말씀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7:14b).

 

이렇게까지 하나님께서는 친히 징조를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아하스는 믿음이 연약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합니다. 열왕기하 16장에 보면,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동맹을 물리쳐 주실 거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 아하스는 앗수르에 도움을 청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맙니다. 그러면서 그 대가로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내어다가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셋 왕에게 갔다 바칩니다(왕하 16:8).

 

아하스는 하나님 앞에서 정말 큰 잘못을 범하고 맙니다.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다 드려도 시원치 않을 판에, 성전에 있는 은금을 내어다가, 즉 하나님의 것을 가져다가 이방 나라 왕에게 갔다 바치는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도 무심코 이렇게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마땅히 하나님께 올려져야 할 영광과 예물이 엉뚱한 곳으로 드려지는 것이죠. 믿음이 연약하다는 것은 이렇게 위험하고 어리석은 겁니다. 연약한 믿음을 그대로 놓아두면 오히려 사탄의 노리개가 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니리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시라”(4:14-15).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징조를 통하여 아하스 왕에게 이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니 두려워하지 말고 떨지 말라!”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만큼 우리에게 힘이 되는 것, 좋은 것이 없습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도 숨을 거두시면서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리더십을 이어받았던 여호수아도 가나안 땅으로의 입성, 즉 가나안 족속들과의 전쟁을 눈앞에 두고 바로 이 말씀을 받았습니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1:9).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아느냐는 겁니다. 오늘 말씀은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은 금방 눈에 확 보이듯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을 말해 주고 있는 구절이 오늘 말씀 15절과 16절입니다.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을 알 때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은 아이가 자라서 선과 악을 구분하게 되는 것처럼, 성장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겁니다. 아이들은 생명을 입고 태어나긴 했어도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이것을 분별력이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도 새생명을 입고 다시 태어나긴 했어도 믿음이 어린 아이와 같은 상태에 있으면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영적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영적 분별력이 없는 자가 됩니다. 아이가 성장하지 못하면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미숙아가 되는 것처럼, 영적 성장을 이루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보지 못하고, 아하스처럼 엉뚱한 선택을 하게 되고, 결국 멸망의 길로 가고 만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성장, 영적 성장, 분별력, 이런 말들이 마음에 잘 와 닿지 않으시는 분들께서도 계실 겁니다. 영적 성장이 우리의 눈을 뜨게 하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놀라운 사실을 보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사건이 열왕기하 6장에 나와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던 아람이 오늘 말씀에서는 북이스라엘과 손을 잡고 남유다를 침공하지만, 원래부터 아람이 북이스라엘과 이렇게 사이 좋았던 것은 아닙니다. 정치 세계에서는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기도 하고,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되기도 합니다. 선지자 엘리사가 사마리아에서 활동하던 시절, 아람은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침공했습니다. 그 당시 아람의 국력은 막강했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은 아람의 침공에 꼼짝 없이 당했습니다. 아람은 사마리아성을 포위했고, 북이스라엘은 풍전등화에 놓여 있었습니다.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는 그 모습을 보고 기겁을 합니다.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왕하 6:15b). 아람 군대가 사마리아성을 꽁꽁 포위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놀란 게하시에게 엘리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왕하 6:16). 그리고 엘리사는 하나님께 기도 드려 사환 게하시의 눈을 열어 달라고 합니다. 엘리사의 기도로 영안이 열린 게하시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영적 성장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던 엘리야의 믿음과 같은 믿음을 갖게 된 게하시는 사마리아성을 지키고 있는 천군천사를 보았습니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 6:17).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실한 징표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이 임마누엘이신, 오늘 날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징표입니다. 이렇게 보이는 증거를 주셨는데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아하스처럼 믿음 없이 행동하면, 참 안타까운 겁니다.

 

여러분에게 어떠한 문제가 있든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십자가 붙들고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리십니까? 여러분 앞에 놓인 문제는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힘을 내십시오. 우리 서로 위로하고 축복합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힘을 냅시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