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2. 19. 03:16

약속이니까 아프다

창세기 14

(창세기 179-14, 23-27절)

 

할례는 대표적인 율법입니다.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외적인 표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썼습니다. 바로 오늘 말씀 때문입니다.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배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14).

 

여러분은 이 말씀이 무섭습니까?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할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 없는 사람에게는 별로 무서운 말씀이 아닙니다. ‘백성 중에 끊어지리라는 말씀이 무섭지 않은 이유는 그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 말씀은 정말 무서운 말씀입니다.

 

창조신앙이 없는 사람에게 이 말씀은 별로 무서운 말씀이 아닙니다. 창조신앙이란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라고 인식하는 신앙입니다. 이 신앙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리고 그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전혀 그렇지 않게 살아가기 때문에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우리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인식하게 해 주는 중요한 신앙입니다.

 

창조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은 일단 하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의 주인이 되어 살아갑니다. 또한 창조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눈에 보이는 현상에 의해서만 살아갑니다.

 

창조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노예처럼 부리시도록 놓아둔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명을 주인 되신 하나님께 내어드림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또한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유한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으로, 무한한 존재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창조신앙은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게 하고 자유케 합니다. 사람들은 착각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살아가는 것이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이죠. 그런데 이것은 피조물인 인간의 한계를 너무 인식하지 못하는 겁니다. 인간은 누군가에 기대지 않으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매우 연약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자연에 기대지 않으면 살 수 없고, 다른 인간에 기대지 않으면 살 수 없고,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기대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할 일은 자기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도 나의 버팀목인 자연, 인간,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합니다. 자연을 착취하고, 인간을 착취하고, 하나님을 착취하면 결국 기댈 곳이 없어 멸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에 기대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을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의 비유, 양무리의 비유, 그리고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중에서 탕자의 비유는 매우 결정적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분깃을 챙겨 먼나라로 떠난 둘째 아들(탕자)은 하나님을 떠나 사는 인간의 실존을 보여줍니다. 아버지 집 울타리를 벗어난 것은 자신의 한계를 벗어난 것 같고, 자기의 분깃으로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은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된 것 같았지만, 결국 둘째 아들의 신세는 돼지와 한솥밥을 먹는 돼지 같이 천한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지금은 삽겹살이 금겹살이지만, 그 당시 돼지는, 특별히 이스라엘에서는 매우 천한 동물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율법에 돼지고기 먹는 것을 금지했겠습니까.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겁니다. 창조신앙을 가지고 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무서운 말씀인 것이죠. 하나님의 백성 울타리 밖으로 벗어나는 일은 살아 있으나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상태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시고, 언약과 관련해서 아브라함이 이행해야 하는 부분을 말씀하십니다. “[너로 말할 것 같으면] 내 언약을 지켜야 한다”(9).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너는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언약을 받은 아브라함이 이행해야 하는 책임을 드러내십니다. 언약과 관련해서 아브라함이 이행해야 할 명령은 이것입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10). 이것은 아브라함이 지켜야 할 책임입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어느 상황에서든 꼭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책임을 이행하지 않으면, 언약은 깨지는 것이죠. 백성 중에서 끊어지는것입니다.

 

이 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특별히 은혜의 강조로 인해 책임이 희석된 개신교 신앙은 이 원리를 잘 기억하고, ‘책임의 중요성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의 신학사상 중 가장 오해 받는 부분이 바로 오직 은혜로라는 구호입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외쳐진 구호인 오직 믿음으로라는 겁니다.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구호는 자칫 구원을 싸구려로 만들어 버릴 위험성이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께서 밥숟갈 떠서 입으로 넣어주신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에베소서 2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구원은 은혜와 믿음의 합작품입니다. 은혜는 하나님 편에서 오는 것이고, 믿음은 인간 편에서 오는 것입니다. 은혜가 없으면 믿음이 소용 없고, 은혜가 있어도 믿음이 없으면 소용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언약은 하나님 편에서 베푸시는 은혜를 말합니다. 그리고 할례는 인간 편에서 이행해야 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마음의 행위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할례가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믿음은 단순히 마음의 행위가 아니라, 행동을 동반한 총체적인 행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믿음은 갈대처럼 가벼운 마음의 장난이 아니라, 아픔을 동반하는 책임이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언약을 세운 뒤, 자기 쪽에서 이행해야 하는 명령인 할례를 곧바로 시행합니다. 할례는 남자 성기의 포피를 베어내는 일입니다. 지금이야 마취의학이 발달해서 할례를 행할 때 아픔이 없지만, 아브라함 시대에 할례는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살갗을 조금만 베어도 얼마나 아픕니까? 그런데 포피를 베어내는 일은 그 고통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아팠으면 할례를 받은 며칠 동안 남자들은 거동을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창세기 34장에는 훗날 할례의 아픔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동생 디나를 욕보인 세겜 사람들을 도륙한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의 유명한 일화도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시행한 나이가 99세입니다. 하갈에게서 얻은 아들 이스마엘의 나이는 13세였습니다. 난 지 8일만에 할례를 받는 것은 은혜로운 처사입니다. 아이는 고통을 잘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학이 발달되지 않은 그 시절에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베풀게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지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아무튼, 아브라함과 이스마엘, 그리고 아브라함 집안의 모든 남자들은 할례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성경을 한 마디로 줄여 말하면, ‘약속입니다. ‘언약이라고도 하고, ‘계약이라고도 합니다. 구원은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마술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피조물) 간의 약속에서 일어나는 은혜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엘샤다이의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모든 것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그 징표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입니다. , 하나님 자기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믿는다는 의미로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약속을 믿는 우리들의 믿음은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 깨달아지십니까?

 

우리는 너무도 쉽게 믿음을 헌신짝처럼 버립니다. 그 이유는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아프셨는지에 대한 체험이 없기 때문이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책임적으로 할례를 행한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약속이니까 아픈 겁니다. 믿음은 아픈 겁니다. 믿음은 마음에 받는 할례입니다.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아픔이 이 마음에 새겨지는 겁니다. 그러니 이 마음이 통회하는 마음이 되는 것이고, 아픈 마음, 마음의 할례를 통해서 거듭나는 겁니다. 그 과정을 통과해야 믿음의 삶을 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엘샤다이의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아낌 없이 자신을 십자가 위에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아픔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도 그 은혜의 약속을 붙들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갈대처럼 가벼운 마음의 장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책임 있게 응답하는 영혼(존재)의 울림입니다. 약속이니까 아픈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값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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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