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2. 9. 00:37

왜 회개해야 하는가?

(마태복음 3:1-12)

 

요한만큼 사명이 확실한 나실인을 찾아보기도 힘듭니다. 4복음서는 모두 예수님이 세상에 드러나기 전, 세례 요한이 먼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 중에서 누가복음은 요한과 예수님의 첫 만남을 적어 놓았는데, 그것은 어머니의 뱃속에서의 만남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한 소식을 들은 마리아는 사갸랴의 집에 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만납니다. 그 만남을 누가복음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1:41).

 

요한과 예수님은 첫 만남부터 범상치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복중에 있던 요한은 이제 겨우 잉태된 예수님을 만나자 어떠한 반응을 했습니다. 시작부터, 아니 태초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요한을 준비하셨던 것이죠.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나실인으로 태어난 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합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 나와 있듯이, 세상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2).

 

그런데 다음 구절을 보면 조금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면서 천국에 대해서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인물에 대해서 소개를 합니다. 요한의 소개를 직접 들어 봅니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3).

 

요한은 천국을 장소적 개념으로 말하지 않고, 오히려 어떠한 인물에 대해서 말하는데, 그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오기로 예언된 자이고, 그를 일컬어 주님이라고까지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은연 중에 천국을 장소의 개념으로만 이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가는 것에만 초점을 둡니다. 천국만 갈 수 있다면, 그것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부처든 공자든 알라든, 또는 돈이든 상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무엇으로든 천국을 가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천국을 장소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우리들의 생각에 제동을 겁니다. 요한은 천국을 장소의 개념으로 전달하지 않고, 한 인물에 집중시킵니다.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은 이 사실에만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4절 말씀을 보면 요한의 행색에 대해서 나오는데, 가히 기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4). 뭔가에 집중한 사람의 인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어디에 집중시켜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 기독교적인 용어로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의 삶은 너저분하고 복잡합니다. 그러나 요한처럼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그 사명을 위해서 사는 사람의 삶은 이토록 심플합니다. 받은 사명을 위해서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습니다.

 

나실인으로서, 자신의 사명에 집중하면서 살았던 요한은 모든 에너지를 모아 세상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7-10).

 

지금 이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은 요한이 외치고 있는 이 말씀에 아무런 감흥이 없으시겠지만, 만약 이것이 제가 여러분에게 직접적으로 외치는 말씀이라고 생각하면, 지금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시는 분이 있으시거나 돌을 들고 저한테 던지려고 흥분하신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의 이 말이 그렇게 편하게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굉장히 불편한 말입니다.

 

말라기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니리”(4:5). 복음서는 요한을 말라기서에서 예언한 엘리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엘리야처럼 유대 광야에서전파합니다. 우리가 열왕기서에 등장하는 엘리야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듯이, 엘리야가 아합 왕조를 향해 불 같은 메시지를 전했을 때, 엘리야는 곧바로 아합 왕의 아내, 왕비 이세벨의 살해 위협을 받고 광야로 도망칩니다. 지금 요한의 선포가 엘리야의 선포와 다르지 않고, 요한 또한 목숨을 내 놓고 이 말씀을 외치고 있는 중인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요한의 외침이 한 사람에게 모아진다는 겁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치면서 한 사람에게 우리의 시선을 주목시키는 요한의 행동이 참으로 특이한 겁니다. 요한은 요단 강에서 물로 세계를 베풀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12).

 

우리는 물로 몸을 씻습니다. 요한이 물로 세례를 베푸는 목적과 이유입니다. 회개란 깨끗해지는 겁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물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말하길 자신은 물로 깨끗하게 하지만, 자신보다 능력이 많으신 는 불로 깨끗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불도 물처럼 깨끗하게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불은 물보다 위험합니다. 자신의 몸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물을 사용하는 사람은 있어도, 불을 사용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요한의 세례는 준비의 세례입니다. 오고 있는 천국에 대한 준비의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는 심판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은 그 천국을 맞을 준비를 한 자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지만, 가까이 온 천국을 맞이할 준비가 안 된 자들에게는 두려운 소식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회개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선 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장소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요한이 말하는 천국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인물의 개념이었습니다. 요한에게서 천국은 내 뒤에 오시는 이와 동일한 개념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천국을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관 속에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 믿고 천국 간다라고만 생각하지, 예수 그리스도가 곧 천국이라는 생각은 잘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이유는 천국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이미 왔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내가 죽어서 가는 어떤 곳이 아니라, 이미 이 세상에 임한 천국인 그리스도와의 사귐 안에 있습니다. 천국을 죽어서 가는 어떤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당장의 회개와 당장의 합당한 열매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천국 가는 것을 어떠한 보상으로 생각을 합니다. 심지어 예수 믿는 사람들도, 천국 가는 것을 예수 믿는 것에 대한 보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천국은 예수를 잘 믿었기 때문에 주어지는 보상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자꾸 걸려 넘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천국을 보상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예수님과 거래를 할 뿐입니다. ‘내가 당신한테 잘 보일 테니까,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할 테니까, 나를 꼭 천국 보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이유는 천국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천국으로 이미 이 땅에 임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중요한 것이지, ‘천국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만약 지옥에 계시다면 나는 기꺼이 지옥에 가겠다!’

 

요한이 소개하는 천국, 천국으로 이 땅에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심판주입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12). 회개한다는 것은 심판주로 오시는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에게로 방향을 트는 것입니다. 탕자가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아버지를 기억하고 방향을 틀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듯이, 우리의 삶 자체를 그리스도에게로 트는 겁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그리스도와의 사귐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왜 회개해야 하냐면, 그리스도께서는 심판주이시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그리스도와의 사귐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사귐을 갖는다는 것은 친구가 된다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친구를 심판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친구를 심판하고 정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미 친구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사귐을 갖는다면, 친구라면 어떠한 죄를 지었든지, 친구 사이는 정죄하는 사이가 아니라 용서하는 사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심판주이신 그리스도와 사귐을 가지십시오. 회개하십시오. 그래야 물이 아니라 불로 하시는 심판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사귐을 가질 때, 그리스도에게로 우리의 방향을 틀 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친구가 되셔서 우리를 정죄하시는 것이 아니라, 친구인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덮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개 하십시오. 천국이 가까이 왔습니다. 회개 하십시오. 천국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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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