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2. 2. 11:02

깨어 있으라

(마태복음 24:36-44)

 

우리는 인간으로서는 달력을 살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는 교회력을 삽니다. 세상 달력은 12월을 맞았지만, 교회달력은 대림절을 맞았습니다. 대림절(Advent)는 우리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바꾸는 절기입니다. 정신 못 차리고 살다가 정신 차리게 하는 절기입니다. 대림절은 기다릴 대()와 임할 임()으로 구성된 말로, ‘임하는 것을 기다리는 절기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영어로 표현되는 Advent의 뜻을 다 담고 있지는 못합니다. Advent의 기본적인 뜻은, ‘뜻하지 않은 시간에 있는 하나님의 개입(역사)’를 말합니다. 오늘 말씀이 그것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44).

 

2천 년 전 유대땅 베들레헴에 생각하지 않은 때에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완전한 자유 가운데 생각하시고 행동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역사를 당신의 때에 이루십니다.

 

생각하지 않은 때에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에 2천 년 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것을 참지 못합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세상이 돌아가야 직성이 풀립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과오를 범하지 않고, 생각지 못한 때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본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자체가 얼마나 은총 받은 존재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은 시험대에 올라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처럼 어느 날에 우리 주가 임할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기때문입니다(42).

 

예수 그리스도가 2천 년 전에 유대땅 베들레헴에 오신 것은 약속의 성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메시야의 도래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2천년 전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통하여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성경은 그것을 증거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모세를 통하여,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이루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것을 일컬어 언약이라고 합니다. 사실 성경 자체의 뜻이 언약입니다. 구약, 신약,이라고 하는 것이 옛언약’, ‘새언약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의 하나님이라는 진술은 매주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그 약속하신 것을 꼭 이루시는 분인데, 그분의 백성은 그 약속을 믿고 기다립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기다림의 종교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또는 약속의 종교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들이 가장 못하는 것이 기다림입니다. 요즘 한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응답하라 1994’라는 드라마를 보면, “삐삐(호출기)”가 등장합니다. 요즘에는 쓰지 않는 전자기기인데, 그 당시 삐삐(호출기)”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누군가 호출하면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어 호출한 사람과 연락을 취하는 형태의 전자기기입니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공중전화가 가장 잘 되던 시절이었는데, 삐삐를 차고 다니다 호출이 들어오면 공중전화에 줄을 서 연락을 취하곤 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호출기를 지니고 다녔던 시절이라 공중전화는 언제나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앞사람이 너무 오래 통화하면 뒷사람들의 원성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통화를 길게 하는 앞사람과 그것을 기다리던 사람 간에 시비가 붙어 칼부림까지 나서 사람이 죽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만큼 현대인들은 기다리는 것을 잘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발전된 전자기기가 핸드폰입니다. 핸드폰의 보급으로 삐삐와 공중전화가 사라지고, 그만큼 인간사회가 편리해지긴 했지만, 인간은 더욱더 조급한 존재가 된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인터넷을 보급을 통해 우편물 또한 감소했습니다. 옛날에는 손으로 손수 쓴 편지를 상대방에게 부치고, 상대방에게서 답장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설레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설렘은 없습니다. 전하고 싶은 소식이 있으면 이메일로 전하거나, 간단한 것은 핸드폰의 메시지 기능 또는 카톡 등을 이용하기 때문에, 오히려 상대방에게서 답장이 늦게 오면 짜증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지금 시대는 기다림의 미덕이 없어지고, 온통 짜증만 넘쳐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대림절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시대에 뒤쳐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의 뜻즉시알기 위하여 신접한 사람인 무당을 찾아가거나,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일컬어지는 성경을 쥐 잡듯이 뒤지거나 게임 하듯이 펼치기도 합니다. 이는 모두 자신의 조급한 욕망을 채우려는 종교적 열정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당신의 뜻을 드러내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으시는 분입니다. 언제나 예기치 않은 때에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욕망을 채우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의 역사, 당신의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욕망 가운데 있는 한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의 성취를 볼 수 없습니다. 욕망을 내려놓고,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에 기대는 수밖에 없습니다.

 

대림절을 맞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특별히 시간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시간은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흘러갑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시간은 의미 없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향해 나아가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시간의 끝에 무엇이 있을까 고민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시간의 끝은 그저 죽음뿐입니다. 그래서 인생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인 생각은 허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그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이긴 새로운 생명, 즉 부활생명이 시간의 끝이라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대림절은 이것을 더욱 붙드는 절기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시간의 끝은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2천 년 전에 유대땅에서 일어난 부활이 완성되는 시간입니다. 2천 년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부활이 일어났지만,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는 모든 믿는 자에게 부활이 일어납니다. 부활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모든 이들을 당신처럼 부활의 몸을 입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 시간의 끝,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면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목적의식이 분명한 사람은 아무렇게나 행동하거나 살지 않습니다. 춘향이가 변사또의 수청을 거절한 이유는 한양에 과거시험 보러 간 이도령이 꼭 다시 돌아올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춘향이에게 이러한 믿음과 기다림이 없었다면, 춘향이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변사또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나 춘향이는 목적의식이 분명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아무렇게나 행동하지 않고, 꼭 돌아올 이도령을 맞이할 몸과 마음을 유지했던 것이죠.

 

목적의식을 대림절의 용어로 바꾸면, ‘희망라고 합니다. 춘향이에게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이죠. 우리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입니다. 좀 더 넓은 개념에서 말하자면, 우리의 희망은 ‘Advent’입니다. 뜻하지 않은 때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은혜가 곧 우리의 희망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이지만, 우리는 그 날을 기다리면서 절망의 순간 순간에 뜻하지 않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정신이 번쩍 나는 말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날에 우리 주가 임할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노아의 방주 사건을 예로 듭니다. 그때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하지 않은 임재를 깨닫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만은 하나님의 뜻하지 않은 임재를 준비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결과 노아는 구원 받았지만, 노아와 그의 가족 외 모든 사람은 갑작스럽게 임한 홍수에 휩쓸려 죽고 말았습니다. 그 정황을 오늘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40-41).

 

이것은 누구는 구원 받고 누구는 구원 받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를 겁주는 말씀도 아닙니다. 약속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꼭 이루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처럼 뜻하지 않은 때에 하나님이 역사하셨던 것처럼, 뜻하지 않은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거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모순되어 보이는 이 두 가지 사실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꼭 다시 오십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 즉 진리입니다. 그런데, 그 날은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즉 뜻하지 않은 때에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두 사실은 긴장 관계에 있습니다. 믿음과 인내 없이는 이 두 가지 사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거라는 약속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여러분께서는 인내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시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셨을 때, 그분의 얼굴을 기쁜 낯으로 바라 볼 수 있게끔 성결하게 사시겠습니까?

 

우리의 주님이 다시 오십니다. 그러니 사시는 동안 너무 걱정 근심 가운데 살지 마십시오. 희망 가운데 용서하고 내려놓고, 화평 가운데 서로 사랑하며 사십시오. 그것이 바로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