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1. 10. 23:34

어디에 관심을 두고 사십니까?

(살후 2:1-5, 13-17)

 

 

최근 뉴스 중 제 마음을 아프게 한 기사가 있습니다. <기러기 아빠의 유언>이라는 제목의 기사였습니다. 53살 먹은 아빠가 자신의 삶을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 이유는 아내와 아들을 미국 유학 보내 놓고 한국에서 혼자 살면서 몸과 마음이 모두 망가져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랍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그 기러기 아빠는 아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모든 분들한테 짐을 덜고자 이 길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00아 끝까지 책임 못 져서 미안하다. 아빠처럼 살지 말고 열심히 살아라. 정말로 숨 막히는 세상이다. 아빠는 몸 건강, 정신 건강 모두 다 잃었다. 아무쪼록 모든 분께 죄송합니다.”

 

더 가슴 아픈 것은 기러기 아빠의 장례식에 아내와 아들이 참석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비행기 삯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네요. 그래서 장례는 형제와 친척만 참석했다고 합니다. 참 가슴 아픈 일입니다.

 

기러기 아빠가 아내와 아들을 유학 보낸 이유는 더 행복한 삶을 준비하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참 비참합니다. 행복은 온데 간데 없고, 가슴 아픈 사연만 남았습니다. 아내 또한 아들의 행복을 위해서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왔지만, 미국에서 아들 뒷바라지 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아빠를 이렇게 허무하게 보낸 아들은 어떠한 정신적 외상을 입었을까요? 정신 차리고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 되면 좋겠지만, 그렇게 한들 아빠가 다시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무슨 소용이 있나 싶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렇게 각박합니다.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할지 모르는 세상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주인공들인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도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던 것 같습니다.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할지 몰랐던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마음이 흔들리고, 두려워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격려의 편지를 써서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었습니다. 그런데 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그렇게 마음이 흔들리고 두려워했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되면 마음이 흔들립니다. 삶에 대한, 행복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되면, 위의 기러기 아빠를 통해서 보았듯이, 마음이 흔들리고 두려운 마음에 돌이킬 수 없는 가슴 아픈 선택을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바에 대한 잘못된 생각은 그릇된 행동을 낳아,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삶의 질을 망가뜨립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재림에 대한 오해입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이전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에 대해서 논하는 글을 써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데살로니가 교회에 부작용을 낳고 말았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 몇몇이 사도 바울의 첫 번째 편지를 보고 예수님의 재림 시기를 오해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오로지 다시 오실 예수님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행동했던 그들의 마음도 이해할 만 합니다. 그들의 삶이 너무도 고단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인생살이의 고단함 만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것에서 오는 고단함이 컸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 당시 예수를 믿는 잃은 크나큰 위험을 떠안아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세상이 예수 믿는 것을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어디를 가든 예수 믿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방해하는 것을 넘어, 종교적 또는 정치적인 탄압을 받았습니다. 종교적 또는 정치적 탄압을 받은 경험이 별로 없는 우리들에게 그러한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 아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나, 목숨에 위협을 날마다 느끼며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고단한 일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삶이 고단한 사람일수록 그 고단함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득한 법입니다. 병이 깊은 사람일수록 지푸라기라도 하나 잡고 싶은 심정에 그 병을 낫게 하는 약이 있다고 하면 그것이 아무리 혐오스러운 음식이라고 할지라도 먹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처럼 예수 믿는 것이 고단하다 보니, 하루 빨리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의 삶을 고단하게 하는 불의한 세력들을 물리쳐 주길 바랐던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재림이 지연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기독교가 안고 있는 크나큰 딜레마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24:34)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한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9:1)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증언과는 달리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됐습니다. 그들은 진실로 자신들이 죽기 전에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 소망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종교적, 정치적 탄압 속에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세월이 지나갈수록 이 세대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죽어나갔을 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 징조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더 광신적으로 예수님의 재림에 매달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생각을 포기하고 그냥 생활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2천 년 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만 닥친 딜레마가 아닙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닥치는 딜레마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고 계십니까?

 

사실, 지금은 교회에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말씀을 전하기 쉽지 않은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 다시 오시겠다는 예수님은 2천 년이 지나도 다시 오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교회에서 종말, 재림등의 단어를 써가며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기를 치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오늘 말씀을 붙들어야 하는 이유는, 성경의 증언을 우리 마음대로, 우리의 취향대로 골라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종말, 재림등의 언어는 사기꾼들의 언어가 아니라, 우리 기독교의 언어입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은 묵상이 필요한, 하나님께서 만들어가시는 미래를 알려주는 중요한 언어입니다. 그 언어가 담고 있는 세계가 너무 깊기 때문에 우리가 잘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 그 언어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우리의 관심입니다. 우리가 가장 관심을 두어야 할 부분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복음입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가장 관심이 없는 부분이 예수님의 재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저 예수 잘 믿어 지금 여기에서 잘 먹고 잘 살게 되는 것에만 관심을 둡니다. 예수의 재림이고 뭐고, 지금 먹고 살기 힘들어 죽겠는데, 예수가 다시 오든 말든 그것은 내 알 바 아니고, 그냥 이 숨막히는 세상에서 숨통이나 좀 텄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숨통 트이는 데는 이 최고이니까, 돈이나 좀 잘 벌 수 있게 해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더 이하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렇게,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복음인 예수님의 재림은 묻혀 버린 시대입니다.

 

사도 바울은 재림의 문제로 마음이 흔들리고 두려움을 갖고 살아가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크게 두 가지 교훈을 줍니다. 첫째, 재림에 대한 징후에 대해서 미혹되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의 재림이 있기 전에 배교하는 일이 있고 멸망의 아들이 먼저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것들을 파악할만한 지혜가 부족하다는 겁니다. 무엇이 배교이고, 누가 멸망의 아들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내 교파들끼리 서로 치고 박고 싸우는 모습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모두들 자기들은 정통이고, 다른 이들은 이단이라고 합니다. 자기들만 옳고 다른 사람들은 틀렸다고 하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얼마나 지혜가 없는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둘째,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고 합니다. 흔들리고 두려워하는 이유는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지 못하고, 자꾸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사막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침반을 따라 가는 겁니다. 그런데 사막에서는 나침반이 틀렸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나타납니다. 그렇다 보니, 나침반을 믿지 못하고 자기의 판단을 의지하여 길을 나서게 됩니다. 물론 자기의 판단을 의지하면 속은 편할지 몰라도, 사막에서 자신의 판단을 의지하다가는 결국 죽음을 면치 못합니다. 이처럼, 사막처럼 숨막히는 세상에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나침반, 즉 사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진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을 따라서 이 세상을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숨막히는 세상, 여러분은 어디에 관심을 두고 사십니까? 사실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관심이 있는지 조차 모르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정신 없이 살아갑니다. 개미 집단의 80%가 그냥 앞의 개미가 가는 대로 별생각 없이 그냥 따라 다니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개미보다 나은 존재라고 생각하며, 개미를 보면 우습게 생각하고 침 바른 손가락 끝으로 하찮게 죽여 버리지만, 생각해 보면 개미나 우리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왜요? 별 생각 없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우리의 나침반이 무엇인지, 우리가 이 숨막히는 세상에서 어디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야 하는지 성경의 가르침을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이것을 놓쳐 버리면 우리의 인생이 개미처럼 하찮은 인생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재림)’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성경의 증언을 그대로 따라간다면, 이 세상은 숨막히는 세상이 아니라, 위로와 소망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삶은 몸과 마음의 건강을 잃는 안타까운 삶이 아니라, 생명력 넘치는 귀한 삶이 될 것입니다.

 

저도 사도 바울의 말을 인용하여, 여러분께 복을 빌어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6-17).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