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0. 28. 04:38

이것밖에 드릴 것이 별로 없어요

(마가복음 12:41-44)

 

성경 시대의 공간적 배경은 이스라엘 유대 땅(팔레스타인)이지만, 사회문화정치적 배경은 여러 문명이 섞여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 시대에는 이스라엘 땅에 유대문화, 그리스문화 그리고 로마문화가 공존해 있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화폐 단위만 보아도 그 상황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달란트, 드라크마, 데나리온 등 우리에게 익숙한 화폐 단위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이 화폐 단위는 각각 유대, 그리스, 로마의 문화를 반영한 화폐 단위입니다.

 

달란트는 유대인들의 화폐 단위입니다. 드라크마는 헬라인들의 화폐 단위입니다. 데나리온은 로마인들의 화폐 단위 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등장하는 렙돈과 고드란트는 어느 나라의 화폐 단위일까요? 렙돈은 헬라인들의 화폐 단위이고, 고드란트는 로마인들의 화폐 단위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과부는 두 렙돈을 성전 헌금함에 넣었는데, 이는 그 당시 유대땅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인들의 화폐가 아니라, 헬라인들의 화폐를 이용하여 헌금한 것입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렙돈은 헬라의 화폐 단위 중 가장 작은 단위입니다. 우리 나라 말로 이나 으로 번역하여 부를 수 있는 단위 입니다. 그러니까 과부가 성전의 헌금함에 넣은 돈은 두 전’, 또는 두 푼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화폐 단위를 이용하여 가치를 계산해 보면, 렙돈은 노동자 하루 품삯의 1/64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노동자 하루 품삯을 100불로 친다면, 렙돈은 약 1.5불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참 별 거 안 되는 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헌금을 많이 한 부자를 칭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얼마 안 되는 헌금을 드린 과부를 칭찬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교훈은 그 이전에 나오는 외식하는 자의 경고에 대한 말씀과 대조를 이루는 말씀입니다. 외식하는 자들은 한 마디로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긴 옷 입고 다니면서 눈에 남들 눈에 띄는 것을 좋아하고, 눈에 잘 띄니까 사람들에게 인사 받게 되고, 또한 회당과 잔치 자리에 가면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기도할 때도 남들 눈을 의식하여 길게 기도합니다. 거룩함이나 사회적 책임 또는 기도 자체에는 관심이 없고, 그러한 것들을 이용해서 오직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데만 관심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에 비해, 가난한 과부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드러낼 외적인 아름다움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드러나지 않은 아름다움을 알아보시고,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을 칭찬하는 대신,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십니다.

 

렙돈은 마카비 왕조 가운데 알렉산더 얀네우스 왕(기원전 103-76) 때 사용하던 돈입니다. 이 시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다윗 왕국의 영화를 회복한 시절로 평가됩니다. 특별히 성전을 정화하여, ‘수전절의 기원을 만들기도 하죠. 수전절은 히브리말로 하누카라고 하는데, 그 뜻은 ‘dedication’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누카를 영어로 ‘Feast of Dedication’이라고 합니다. 마카비 왕조가 이방인들로부터 성전을 탈환하여, 다시 하나님께 올려드린 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절기입니다. ‘는 닦을 ’, ‘은 전각 로서, 수전절은 <성전을 다시 고친 절기>라고 풀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성전을 다시 고쳤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신앙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수전절은 무너진 신앙을 다시 회복하는 절기인 것이죠. 그러므로 가난한 과부가 성전에 와서 헌금함에 두 렙돈을 넣었다는 것은 그녀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헌금이었다는 겁니다. 그냥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외식하는 자들의 개념 없는 헌금과는 달리, 과부의 헌금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신앙의 회복의 소망이 담긴 소중한 헌금이었다는 겁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저는 이것을 기도의 힘이라고 믿습니다. 사실 가난한 과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고, 로마는 세계 최강의 나라로 발돋움 하여 전 세계를 자신의 발 아래 둔 엄청난 힘을 지닌 나라였습니다. 그 엄청난 힘 앞에서 가난한 과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로마 총독이 머무는 관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할 수도 없고, 칼과 방패를 들고 나가서 로마군과 싸울 수도 없습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힘센 용병들을 고용할 수도 없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나님께 기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답답한 현실을 돌아보면서 다윗 왕과 같은 힘센 존재가 나타나서 그들을 그 답답한 현실에서 구원해 주기를 바라면서 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메시아 사상입니다. 메시아가 나타나서 다윗 왕처럼 주변 나라들을 다 굴복시키고 성전을 회복시키고 자신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소망은 묘연해 보였습니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로마 황제에게 도전장을 내밀 수 있을만한 환경이 전혀 조성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절망 가운데 살았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삶을 꾸려 간 것도 사실은 이해할 만 합니다. 세상을 바꿀 수 없으니, 자존심이라도 지켜야겠다는 마음이었겠죠. 그러나, 그러한 자존심마저 지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가난한 과부는 그저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그리고 그 소망을 담아 성전 헌금함에 두 렙돈의 헌금을 넣습니다. 정말 두 렙돈에는 하나님의 향한 겨자씨 같은 믿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런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죠. “이것밖에 드릴 것이 별로 없어요!”

 

우리의 주위를 한 번 둘러보십시오. 우리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문제들이 널려 있습니다. 우리가 나약하고 게을러서가 아니라,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지닌 한계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벗어나고픈 욕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한 욕망을 담아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있고, 그러한 욕망을 담아 애니메이션이나 영화가 제작됩니다. 600만불의 사나이, 원더우먼, 쏘머즈 그리고 슈퍼맨 등의 드라마나 영화는 그러한 인간의 욕망이 담긴 제작물들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낍니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그 꿈이 물거품처럼 사라집니다. 카지노나 복권에 집착하는 사람들도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답답한 현실을 극복해 보려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답답한 현실을 극복해 보려고 노력해도 별로 나아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마음은 점점 황폐해집니다.

 

우리는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이야기를 통해서, 답답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최고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600만불의 사나이나, 원더우먼 또는 수퍼맨은 아닐지라도 우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간절한 마음이 담긴 기도에 있다는 겁니다.

 

목회를 하면서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상황이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일례로 최숙희 성도님이 지금 병원에 계신데, 목사로서 그분을 심방할 때마다 느끼는 좌절감은 그분을 위해서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가서 말동무나 조금 해드리고, 두 손 잡고 기도나 해드릴 뿐이지, 저는 그분의 병을 낫게 해줄 수도 없고 그분이 늙어서 죽어가는 것을 막을 수도 없습니다.

 

지난 주에는 이분께서 리헵을 받으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내가 이렇게 병원에 누워 있는데, 자신이 젊었다 생각하는 사람들도 다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런데 참 이상하죠?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계속 살겠다고 이러고 있으니인생을 오래 살고 보니까, 다 소용 없더라고요. 지난 날을 돌아보면 재밌는 일이 참 많았는데, 지금 와서 돌아보면 욕심 부리면서 산 사람은 다 떠나고, 욕심 부리지 않고 산 사람들만 아직 살아 있더라고요.’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는 이분을 위해서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 가슴 아팠습니다. 이분뿐만이 아닙니다. 지난 주에 변 사모님이 애기를 낳았습니다만, 애기는 낳는 사모님을 위해서 목사인 제가 해드릴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산통의 아픔은 그냥 변 사모님 자신이 겪어야 하는 것일 뿐,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요즘 김문규 권사님이 일하러 안델루시아라는 곳으로 가 계십니다. 지난 금요일 밤 830분쯤에 전화를 드렸는데, 김 권사님이 그러십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좀 울적했는데 목사님께서 전화를 주셨네요. 가족 떨어져서 먼 곳에 와 있는 것도 힘들고, 거기다가 찬바람까지 부니까 마음이 좀 울적하네요.’ 그러실 것 같아서 제가 전화를 드린 것입니다만, 그렇게 마음 울적해 하시는 김 권사님을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 제 마음을 울적하게 했습니다.

 

뉴스를 봐도, 거기에는 수많은 상처와 아픔이 생산되는 일들이 즐비합니다. 돈 때문에 부모를 죽인 사건, 욕정 때문에 한 여인의 인생을 망가뜨린 사건, 남편의 외도 때문에 가슴 아픈 여인의 사건, 유괴, 납치, 강간, 살인 등의 일들을 통해 가슴 아픈 사람들에게 제가 해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또한 답답하게 돌아가는 정치 상황과 경제 상황을 보면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 때문에 제 자신이 초라해집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라는 겁니다. 기도는 일차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겸손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피조물과는 달리 창조주로서 전지전능하시다는 신앙고백입니다. 기도는 기본적으로 탄식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탄식은 단순한 징징거림과 다릅니다. 징징거리는 것은 내 주변만 맴돌 뿐, 자기 연민에 빠지고 맙니다. 그러나 탄식은 나의 곤경, 또는 우리의 곤경을 하나님께 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징징거림은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못하지만, 탄식의 기도는 내적이든 외적이든 분명 어떠한 변화를 가져옵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참으로 별로 없습니다. 그런 우리가 드리는 기도조차도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의 가치 밖에는 안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탄식하는 마음으로, 겨자씨만한 믿음을 담아서 기도를 드린다면, 우리의 주님께서는 두 렙돈 만한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원래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누가 아파해도 대신 아플 수 없고, 누가 죽어가도 대신 죽을 수도 없습니다. 누가 아파도 그 아픔을 치유해 줄 수 없고, 누가 죽어가도 그 죽음을 막아 줄 수 없습니다. 지금 현재의 공간과 지금 현재의 시간에만 존재하는 우리는 다른 공간, 다른 시간에서 고통 받으며 신음하는 자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는 길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의 몸짓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비의 몸짓처럼 얼마나 보잘것없습니까? 그야말로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같은 몸짓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께서는 간절한 마음으로 드리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가난한 과부에게 하셨던 그 말씀을 우리에게도 해주십니다.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어려운 일이 있으십니까? 현실이 답답하십니까? 어찌할 바를 몰라 방황하고 계십니까? 지금 바로, 무릎 꿇고 기도하십시오. 그 두 렙돈 같은 기도에 '이것밖에 드릴 것이 별로 없어요'라는 겸손한 마음을 담아 주님께 기도해 보십시오. 죽음을 이기신 생명의 주인이시 우리 주님께서 두 렙돈 같은 여러분의 기도를 받으시고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