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0. 10. 06:13

아브람의 승리 교회의 승리를 위하여

창세기 11

(창세기 14:1-23)

 

소돔 땅으로 간 롯에게 위기가 닥칩니다. 평화는 나 혼자만 평화롭다고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공동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평화롭게, 잘 살아보겠다고 소돔 땅으로 간 롯 개인은 평화로웠을지 모르지만, 그가 속한 공동체에 평화가 없었기 때문에 롯은 평화를 빼앗기는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개인의 평화도 중요하지만, 공동체의 평화는 더 중요합니다.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서 개개인이 노력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또한 공동체는 개인의 평화를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공동체가 평화로워도 개인이 괴로우면 소용이 없습니다. 이렇게 공동체와 개인은 상호작용에 의해서 평화를 만들어 갑니다.

 

롯의 위기는 전쟁에서 비롯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 번의 전쟁 이야기가 나옵니다. 먼저 동방의 네 왕들과 서방의 다섯 왕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집니다. 첫 번째 전쟁에서 동방의 네 왕들이 승리를 거둡니다. 그 결과 서방의 다섯 왕들은 동방의 네 왕들을 섬기게 됩니다. 그러한 상태가 12년 동안 지속되다가, 13년째 되는 해에, 서방의 다섯 왕들이 배반합니다. 그 배반에 응징하기 위해서 동방의 네 왕들이 두 번째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에 맞서 서방의 다섯 왕들이 모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전쟁에서도 동방의 네 왕이 승리를 거둡니다. 승리한 동방의 네 왕은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갑니다. 바로 그 때, 소돔에 살고 있었던 아브람의 조카 롯도 포로로 끌려 갑니다.

 

어떤 사람(전쟁에서 도망한 자)에 의해서 이 소식이 아브람에게 전해집니다. 롯이 포로로 끌려 갔다는 소식을 들은 아브람은 군대를 소집하여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세 번째 전쟁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을 치르는 일은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전쟁은 큰 상처를 남기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이긴 쪽이 전리품을 챙길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전리품이 전쟁의 상흔을 다 치유해주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은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손자병법에서도 가장 좋은 병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평화롭게 살던 아브람은 불가피하게 전쟁에 휩싸이게 됩니다. 자신의 욕심을 따라 갔던 조카 롯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욕심을 따라가는 사람은 자신 뿐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도 피해를 입히게 됩니다. 나의 평화뿐만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욕심을 접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두 번의 전쟁에서 승리한 동방의 네 왕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아브람은 자신의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318명의 용사들, 그리고 자신과 동맹을 맺은 부족의 젊은이들을 이끌고 전쟁에 나가 승리를 일구어 냅니다. 그리고 빼앗겼던 모든 재물과 특별히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 돌아옵니다. 정말 기적 같은 일입니다.

 

오늘 말씀에, 승전고를 울리며 돌아오는 아브람 일행을 맞이한 자들이 등장합니다. 소돔 왕과 살렘 왕 멜기세덱이 그들입니다. 이들이 아브람 일행을 맞이한 장소는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였습니다. 왕들이 왕의 골짜기에서 아브람을 맞이하는 것을 보면 아브람의 위치가 왕의 반열에 올라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은 이렇게 존귀한 대접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우선 살렘 왕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먼저 알현합니다. 살렘은 예루살렘을 가리키고, 멜기세덱은 의로운 왕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멜기-, 세덱-의로운). 성경은 이 사람을 가리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소개답게 아브람을 알현한 멜기세덱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송축하면서 아브람을 이렇게 축복합니다.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19, 20).

 

멜기세덱은 아브람을 축복하면서 중요한 사실을 말합니다. 아브람의 승리가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 같으면 멜기세덱의 이 진술을 우습게 여겼을 겁니다. 목숨 내 놓고 뛰어든 전쟁인데, 그 공이 자신에게 오지 않고 하나님께 돌려진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오를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이었던 아브람은 멜기세덱의 선언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멜기세덱의 축복에 대한 반응으로 십일조를 바칩니다. 이 십일조는 아브람이 목숨 내놓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거둔 피값의 전리품 중 일부였습니다. 만일 아브람이 믿음 없는 사람이었다면 절대로 멜기세덱에게 피값의 일부인 십일조를 바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자신의 승리는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인정했고, 그 신앙고백의 표현으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십일조의 개념이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십일조는 수입의 10분의 1을 정확히 떼서 드리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신앙고백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신앙고백과 감사하는 마음 없이 수입의 10분의 1을 의무적으로 드린다면, 그것은 십일조 정신을 심각하게 헤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헌금을 세부화시켰습니다만, 그것은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편의상 그런 것이지, 헌금의 정신 자체가 그렇게 세부화된 것은 아닙니다.

 

모든 헌금은 십일조 정신에서 비롯됩니다. 십일조 정신이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신앙고백과 감사의 마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요, 거룩한 헌금을 세속적으로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헌금은 불쌍한 사람 돕는 적선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송축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드리는 자, 즉 즐겨내는 자를 기뻐하신다는 말씀이 바로 이런 맥락입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과의 은혜로운 만남에 이어, 소돔 왕과의 세속적인 만남이 이어집니다. 타락한 도시의 왕답게 소돔 왕은 본색을 드러냅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은 이름대로 아브람과 의로운 관계를 맺었다면, 소돔 왕은 아브람과 세속적 관계를 맺습니다. 그것은 소돔 왕의 요청에서 드러납니다.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21). 이를 쉬운 성경으로 다시 옮겨보면 이런 겁니다. “사람은 나에게 주라! 그리고 너는 그 소유물을 너 자신을 위해서 취하라!”

 

아브람에게 더 많은 선물을 안겨줘도 시원치 않을 판에, 아브람이 목숨 걸고 되찾아온 사람과 재물 중, 사람은 자신에게 돌려달라는 소돔 왕의 요청입니다. 이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소돔 왕은 처음부터 아브람을 알현하러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취하러 온 것이었다는 겁니다. 소돔 왕의 탐욕스러움이 아브람의 존귀함을 헤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속적인 사람과는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것을 알았던 아브람은 소돔 왕에게 단호하게 말합니다.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23).

 

만약 아브람이 소돔 왕의 말대로 사람은 돌려주고 재물을 취했다면, 나중에 소돔 왕은 우쭐대면서 아브람이 부자가 된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고 떠벌리며 아브람의 명성에 먹칠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빌미로 아브람에게 곤욕스러운 일들을 안겨주었을 겁니다. 아브람은 그러한 것을 미리 차단합니다. 아브람은 멜기세덱과의 예배에서 보여주었듯이, 그를 돕고 계시는 것은 하나님이지 소돔 왕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세속적이고 탐욕스러운 소돔 왕과 엮이지 않기 위해서 소돔 왕의 요청대로 사람뿐만이 아니라, 재물까지도 모두 돌려줍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믿음의 행위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소돔 왕의 요청대로 모든 것을 돌려주되, 아브람과 함께 목숨 내놓고 전쟁에 참여했던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은 제하고 돌려줍니다. 이는 아브람이 하나님 앞에서 매우 공정하고 관대한 처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불필요하게 희생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의란, 믿음이란 이렇게 나도 살고 주변 사람도 살리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믿음과 사랑과 의(윤리)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 시대의 교회에 가장 요청되는 덕목입니다. 찬송가 600, <교회의 참된 터는>에서 고백되고 있듯이, 교회의 참된 터는 우리 주 예수입니다. 우리 주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되어 나타난 하나님의 참된 말씀입니다. 우리 주 예수는 하나님의 참된 계시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는 참된 터인 우리 주 예수 위에 세워지지 못하고, 세상의 욕망 위에 세워지는 듯한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참된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모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데 무슨 몇 백억, 천억짜리 교회당 건물이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모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데 누추하지 않을 만큼의 공간만 있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만큼의 터를 세워나가는 지혜와 겸손 그리고 소박함이 필요한 때입니다. 아브람처럼 욕심과 교만을 내려놓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감사한 마음만이 우리의 삶에 자리 잡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아브람처럼 덕을 쌓는 교회가 그리운 시대입니다. 덕은 희생을 의미합니다. 누군가 덕망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가 가진 재물이나 지식 때문에 그렇게 덕망 있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진 것을 통해서 희생했기 때문입니다. 희생이란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생이란 사랑 없이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덕목입니다. 우리 교회 친교실에는 덕불고 필유린이라는 고사성어가 걸려 있습니다. 이는 덕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희생하여 섬김의 도를 실천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유는 그를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얄팍한 종교적 욕망의 충족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생명)을 십자가에서 내어주셨다는 복음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굳이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지 않아도, 우리를 능히 구원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놓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 자신을 내어놓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희생없이 의로운 나라,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생명)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는 믿음의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을 더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즉 더 사랑하는 자가 더 희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롯이 삼촌 아브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아브람은 조카 롯을 더 사랑했습니다. 더 사랑했기 때문에 아브람은 롯을 위해서 목숨을 내걸고 전쟁을 일으켜 롯을 위험에서 건져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독생자의 생명을 통하여 우리를 죄(죽음)에서 건져 주신 것입니다. 이 사랑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욱더 희생할 수 있게 됩니다. 솔로몬의 판결에서도 더 사랑하는 진짜 어머니가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희생하듯이 더 사랑하는 자가 희생하는 법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덕을 쌓아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지체가 모여 교회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희생(사랑)을 통해 쌓는 덕이 교회를 교회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듯이, 자기 자신을 내어놓으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시간, 물질, 마음을 빼앗지 마시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여러분의 시간, 물질, 마음을 내어놓으십시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9:24)는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마지막으로 아브람처럼 하나님 앞에서 공정하고 관대하게 처신하는 교회가 그리운 시대입니다. 의로움이란 자신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요즘 교회는 자신의 교리나 신념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너무도 희생시키고 있습니다. 기독교 윤리의 바탕은 사랑이지, 옳고 그름을 가리는 심판이 아닙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잠정적입니다. 이 말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뜻입니다. 심판은 오직 마지막 날에 심판주로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십니다. 그때까지 교회는 판단하지 말고, 사랑으로 용서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의로움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함께 전쟁에 참여했던 동맹부족의 젊은이들(아넬, 에스골, 마므레)을 희생시키지 않았습니다. 요즘 일어나는 종교전쟁이나,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동성애 문제 등을 돌아볼 때, 우리는 우리의 의로움과 신념을 위해서 힘 없는 자들을 희생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차분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동성애를 옹호하자는 뜻이 아니라, 동성애가 잘못됐다는 신념 때문에 그들에게 불필요한 폭력을 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무튼, 의로운 삶을 살기 위한 구체적인 지침인 기독교 윤리는 사랑이 바탕 되어야지, 그 자리에 폭력이 들어서면 안 된다는 겁니다.

 

아브람의 승리는 사랑(희생)과 믿음 그리고 도덕성(윤리, 의로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이 어두운 시대에 교회가 승리할 수 있는 비결도 다르지 않다는 것 또한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교회의 승리를 위하여, 아브람의 승리를 은혜로 받으시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 주의: 이 설교의 마지막 부분 중 동성애 문제를 거론한 것은, 동성애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쓴 것이 아님을 밝혀 둡니다. 동성애 문제에 대한 저의 개인적 입장을 듣고 싶으신 분은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십시오. 이 문제에 관해서는 공개적으로 입장을 표명하고 싶지 않습니다. 비겁해서가 아니라, 공개적으로 입장을 표명할만큼 확실한 신학적 입장을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동성애 문제가 그렇게 저에게 영향을 끼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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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