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9. 26. 06:50

신앙의 안전지대

창세기 10

(13:1-18)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피신했던 아브람 일행이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옵니다. ‘사래사건을 통해 일촉즉발의 상황에 처했던 아브람이었지만, 하나님의 돌보심 덕분에 모든 가족이 무사히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그냥 돌아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자가 되어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2).

 

애굽에서 돌아온 아브람 일행은 벧엘과 아이 사이에 터를 잡고 거주합니다. 그 지역에 자리를 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예전에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에 처음 들어왔을 때에도 이곳에 자리를 잡은 적이 있습니다. 이곳에서의 정착은 두 번째로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정착했을 때 첫 번째 정착했을 때와는 달리 문제가 발생합니다. 바로 소유의 넉넉함 때문이었습니다. 첫 번째 정착했을 때 없던 문제가 두 번째 정착했을 때 생긴 것을 보면, 아브람 일행의 재산이 얼마나 많이 불어났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소유가 많은 데 왜 싸우나?’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들의 재산은 지금과는 달리 돈이 아니라 가축 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소나 양 등을 풀어놓고 먹일 수 있는 공간이 한정되어 있다 보니, 다툼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말씀을 보니까, 좁은 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것 같습니다. 아브람과 그의 조카 롯, 그리고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 등이 좁은 지역에서 목축업을 하려니 서로 많이 부대꼈던 것이지요.

 

이런 상황 속에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길은 서로 갈라서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지역으로 가서 가축 떼들을 키우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다 똑같다고, 좋은 지역을 차지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좋은 지역을 차지하려면 먼저 움직여야 합니다. 정 안 된다면 가위바위보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지요.

 

우리 인간 사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욕심때문입니다. 더 많이 차지하고, 더 좋은 것을 차지하려는 욕심 때문이지요. 이것만 잘 다스린다면 문제를 최소화시킬 수 있을 텐데, 그것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까, 아브람은 그것을 잘 극복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우선권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한국 사람에게는 나이가 가장 큰 우선권이죠. 그래서 나이가 깡패라는 말도 있습니다. 나이 많은 어르신이 나서면 나이 어린 것들은 입도 뻥끗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예절이라 배웠습니다. 나이 외에도 우선권을 정해주는 예법들이 많이 존재합니다. 한국 문화 속에서 성장하신 분들은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들입니다.

 

어느 문화나 연장자가 우선권을 갖는 것은 보편적인 문화입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 일행 중 우선권을 갖는 것은 연장자인 아브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속에서 아브람은 자신의 우선권을 조카 롯에게 양도합니다. 친족끼리 싸우는 것이 볼썽사나운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조카 롯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떠나 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9). 아브람은 조카 롯에게 동서남북 사방을 둘러 본 뒤 좋다고 생각하는 곳으로 먼저 가면 자신은 조카 롯이 선택하지 않은 다른 곳을 선택하겠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아브람에게는 이런 여유로운 마음이 있었을까요? 아브람이 부자였기 때문에? 아니면, 조카 롯을 사랑했기 때문에? 우리가 아브람의 마음 속에 들어가 볼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본문에 나와 있는 그의 행동을 살펴 본다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듯도 합니다.

 

우선 아브람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습니다. ‘제단을 쌓다라는 말은 예배라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무작정 예배 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예배의 주도권은 우리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가 먼저 드려서 초월적 존재의 마음을 달래 주는 어느 종교의 제사와는 다릅니다. 기독교의 예배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에 대한 반응이 곧 예배입니다. 특별히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베푸신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 드린다는 것은 복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이미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입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 예배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임한 복에 대한 감사로 예배 드리는 것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예배를 아예 이런 식으로 부릅니다. 그들이 말하는 미사감사성찬례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성찬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베푸신 은혜()를 재현하고,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 감사예배를 드리는 것이지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관계가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예배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입니다. 적어도 아브람은 이것을 정확하게 인식했던 것 같습니다. 아브람은 예배를 아무 때나 드린 것이 아니라, 즉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신 복에 대한 반응으로 제단을 쌓았습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낳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만 소유한 사람이었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하셨다, 또는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믿음이 없는 사람은 결코 감사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하시고,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께 예배 드릴 수 있었던 것이죠. 이러한 믿음이 없었다면, 아브람이 어떻게 조카 롯에게 우선권을 양도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마도 조카 롯보다 좋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지위를 이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조카 롯에게 먼저 양보했습니다.

 

롯이 만약 믿음의 사람이었다면, 삼촌 아브람이 우선권을 양도했을 때 그것을 덥석 받아 들지 않았을 겁니다. 삼촌 아브람처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만 소유하겠다는 믿음이 있었다면, 롯은 절대로 삼촌 아브람보다 앞서지 않으려 했을 겁니다. 그런데, 롯의 비극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애석하게도 롯은 삼촌 아브람이 우선권을 양도했을 때 얼씨구나 좋다생각하고 그것을 덥석 받아 듭니다. 그리고 자신의 눈에 좋아 보이는 요단지역을 택합니다. 롯의 눈에 자신이 택한 곳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의 땅과 같이보였습니다. 모든 것이 풍요롭고, 모든 것이 흡족해 보였습니다. 그곳에 가면 더욱더 번영할 수 있을 것 같고,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롯은 그곳으로 갑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그의 선택에 대해서 이러한 간접적인 평가를 내립니다.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13).

 

조카 롯을 떠나 보내고 아브람은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당신을 바라보는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으로 처음 부르실 때의 그 음성을 다시 들려 주십니다.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15,16). 아브람은 자신이 원하고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는 것만 바라보았습니다. 그 결과는 18절로 이어집니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지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18).

 

무엇입니까?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는 반응으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 즉 예배 드렸습니다. 아브람에게 예배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대한 반응이었다는 것이 여기서 또 한 번 드러납니다.

 

반면에 롯의 선택한 지역은 신앙적으로 안전지대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누가 보아도 그곳은 참 좋은 지역이었습니다. 에덴 동산 같고 애굽의 땅과 같다는 표현이 그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그곳은 신앙의 안전지대가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살펴볼 말씀에서 그것이 여실히 증명됩니다. 그곳은 신앙의 안전지대가 아니라, 심판의 장소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모르고, 눈이 보기에 좋은 곳만 찾아서 갑니다. 그것이 멸망으로 가는 길임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맹모삼천지교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맹자 어머니가 맹자의 교육을 위해서 세 번 이사를 한 일화에서 비롯된 고사성어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떠한 선택을 할 때, 제일 먼저 경제(, 수입)를 생각하고, 둘째 자식의 교육을 생각합니다. 신앙의 안전지대 같은 것은 순위에도 들지 못합니다. 물론 경제도 생각해야 하고, 교육도 생각해야 합니다. 인생을 사는데 굉장히 중요한 문제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이라면 그러한 것들과 더불어, 내가 선택하는 것이 신앙적으로 안전지대에 거하게 하는 것인가를 꼭 고려해야 합니다.

 

사실 그러한 것은 따로 항복을 구분해서 고려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제든 교육이든, 내 삶에 일어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인가를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에게 들어오는 수입도, 내 힘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인 줄 아는 사람이 감사할 수 있는 겁니다. 교육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인 줄로 아는 사람이 감사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인가! 아니면 내가 나 잘 난 맛에 이룬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우리가 지금 신앙의 안전지대에 거하고 있는가 아닌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만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삶은 예배로 모아졌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만 소유한 삶입니까?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 감사의 예배를 드리십니까? 신앙의 안전지대에 거하십시오. ,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만을 소유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그래야, 우리의 삶은 감사로 넘치는 복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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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