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9. 5. 04:37

()하란

창세기 8 

(창세기 11:27-12:9)

 

노아와 홍수 이야기는 족보로 끝납니다. 그리고 새로운 이야기의 출발점도 족보로부터 시작됩니다. 성경에서 족보를 삽입하는 이유는 뼈대 있는 집안을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족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섭리)에 대한 외적인 표현입니다. 족보를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선택)가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 볼 수 있는 것이죠.

 

오늘 우리는 노아의 아들 셈의 족보 중, 새롭게 시작되는 족보를 만납니다. ‘데라라고 하는 인물부터 시작하는 족보입니다.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11:27).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데라가 그의 가족들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다가 하란에 정착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데라의 가족사를 발견합니다. 데라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막내 아들인 하란이 아버지 데라보다 먼저 죽습니다. 막내 아들의 죽음을 두고 아버지 데라가 얼마나 슬퍼했는지, 그가 가족들을 데리고 그 땅을 떠나는 것을 통해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고통 중에서 가장 큰 고통은 참척의 고통이라고 합니다. 참혹할 에 근심할 으로 구성된 이 말은 말 만들어도 참혹하고 근심스럽습니다.

 

우리는 흔히 아브라함이 본토친척아비의 집을 떠날 때,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좀 틀린 말입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된 것은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의 참척의 고통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의 추억이 묻어 있는 곳에서, 그것을 견뎌내며 잘 지낼 부모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떠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데라는 가족들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납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원래 목적지는 가나안 땅으로 가는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데라는 가나안 땅으로 가는 도중, 하란 땅에 뿌리를 내립니다. 정착이라는 것은 사실 삼박자가 맞아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데라는 하란 땅에서 참척의 고통을 잊을만한 무엇인가를 발견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성경이 알려주는 것은 없지만, 아마도 쾌락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서 242절에 데라에 대한 짧은 기사가 다음과 같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24:2).

 

인간은 기본적으로 고통에 취약합니다. 고통 당할 때 인간은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기 십상입니다. 미국 광고 중에 이것을 재미나게 표현한 광고가 있습니다. 스닉커즈라고, 초콜렛바 광고인데, 이런 문구를 활용합니다. “You are not you when you’re hungry. 배고플 때 당신은 당신의 원래 모습이 아닙니다.” 참 재치 있는 광고입니다. 그러니, 배고플 때 얼른 스니커즈라도 먹으라는 광고입니다.

 

데라는 참척의 고통으로 인해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렸던 것 같습니다. 하란 땅에서 우상숭배를 통하여 참척의 고통을 잊은 것을 보면 말이죠. 물론 데라에게는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삶의 몸부림을 치더라고,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꼭 던져 볼 필요는 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질문 속에서 바로서기는 쉽지 않겠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신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 오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질문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데라에게는 그러한 질문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거기, 하란 땅에서 생명이 다하기까지 살다 죽었겠지요.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11:32).

 

동생의 죽음, 아버지의 방황, 어지러운 환경 등, 우울한 환경 속에서 자란 아브라함에게도 분명 간절함이 있었을 겁니다.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 그러한 간절한 소망 때문인지,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소명을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12:1). 내 마음이 원한다고 다 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실수하기 십상입니다. 아브라함, 얼마나 그 지긋지긋한 환경 속에서 벗어나고 싶었겠습니까? 특별히 우상숭배의 쾌락을 통해 고통을 잊으려고 하는 타락한 아버지의 그늘에서 아브라함은 얼마나 벗어나고 싶었겠습니까? 웬만한 사람 같으면 그냥 뛰쳐나왔겠죠. 그러나, 내가 하고 싶다고 섣불리 행동에 옮겼다간 인생이 더 꼬일 수 있습니다. 시쳇말로, 쓰레기 차 피하려다 똥 차 만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소원이 있더라도, 가장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사실 믿는 이들에게는 이것이 가장 큰 과제 중 하나죠.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내가 들은 것이 하나님의 음성인지 아닌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제가 여기에 대해서 말씀 드릴 수 있는 것, 그리고 누누이 강조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 듣는 법은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시를 쓰는 것과 같습니다. 시 쓰는 것을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을까요? 물론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도 대학 다닐 때, ‘시쓰기라는 수업을 들은 적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정말로 시를 쓰는 사람들은 시쓰기를 배워서 시를 쓰게 됐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뭐라고 말하나요? “시가 내게로 왔다!”라고 말합니다.

 

위대한 예술가들은 모두 이런 식입니다. 미켈란젤로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은 무엇인가를 조각하지 않았다고 말이죠. 그는 그저 대리석 덩어리 안에 있는 그 무엇을 발견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불필요한 부분들을 제거하고 나니까, 그 안에서 피에타 상이나 다비드 상, 모세 상 같은 것들이 나왔다고 말합니다. 베토벤 같은 음악가도 똑 같은 말을 합니다. 그는 그저 들려오는 악상을 노트에 적었을 뿐이라고 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듣기에는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생각하겠지만, 이것이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경험해 본 사람들은 그들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갈 겁니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들도 모두 같은 말을 합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316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여기서 하나님의 감동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들은 뭔가를 기록하기 위해서 억지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는 것인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가르쳐 줄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지에 들어선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신적 경이감인 것이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신적 경이감을 체험한 사람들은 절대로 경솔하거나 경박스럽지 않다는 겁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도 않고, 자신이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처럼 교만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떠벌리지도 않습니다. 그저, 무쏘의 뿔처럼 자기 길을 갈 뿐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그러한 모습을 발견합니다. “떠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은 순종합니다. 순종이란 바로 그런 것이죠.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는 것. 우리는 아브라함이 본토친척아비의 집을 떠날 때 룰루랄라했을 거라 생각하지만, 분명 마음이 무거웠을 겁니다. 누구든지, 자신에게 익숙한 삶을 뒤로하고 새로운 곳으로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피하고 싶은 일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의 마음을 따라 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눌러 앉아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순종했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12:4).

 

하나님께서는 왜 아브라함에게 본토친척아비의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서 떠나라고 하신 곳은 하란입니다. 하란은 우르와 함께 달을 숭배하던 지역으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데라는 우상숭배를 통해서 고통을 잊어보려고 했던,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던 사람입니다. 그런 곳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구출하기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이후에 일어나게 될 출애굽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출하란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모든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시니까요.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통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새롭게 하실 때에는 기존에 있던 것에서 하기를 원하십니다. 나도 모르게 나를 묶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나오기를 바라십니다. 나를 묶고 있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께 예배 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한 속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면, 우리는 결국 하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살다 죽을 겁니다. 데라처럼.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출하란하여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가나안 땅으로 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께 집중합니다. “그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12:8). 결국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출하란시키신 이유는, 아브라함을 새롭게 하셔서 하나님 당신께 집중하는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도 출하란이 필요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예수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우리들에게도 날마다 그 음성을 건네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듣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는 이래저래 삶의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속박 당하고 있어, 나도 모르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하나님께 예배 드리지 못하는 삶을 살아 갑니다. 지금 이 시간 이렇게 예배당에 나와 앉아 있다는 것이, 내가 지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고,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있는 것이라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냥 일상의 스케줄 중 하나로 그러는 경우가 허다하죠.

 

각자의 삶은 각자가 가장 잘 아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출하란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정신차리고 잠시만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순종입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출하란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정말로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가 우리에게는 얼마나 있을까요?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출하란은 그 누구를 위한 일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것만 기억해 두면 됩니다. 순종은 현재 내가 쥐고 있는 보장된 유익, 이익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일 같지만, 결국 그것은 오히려 나에게 더 큰 유익으로의 여행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러한 영적 혜안을 갖는다면, 순종이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을 겁니다.

 

출하란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도 아브라함처럼 이 되십시오. 축복의 통로가 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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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