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8. 29. 05:04

누가 세상의 주인인가?

창세기 7

(창세기 11:1-9)

 

창세기 10장은 노아의 세아들의 족보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노아 가족의 잔혹사 이후, 어찌되었든 노아의 가족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땅에서 번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후손들이 온 땅의 지면에 흩어져 번성하기를 바라셨던 것이죠. 그러다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문제가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볼 바벨탑 이야기입니다.

 

바벨탑 이야기는 그냥 그 스토리만 보면 조금 쌩뚱 맞습니다. 시날 평지에 이르러 거기에 모여 살고자 했던 인간들, 그리고 그곳에 도시를 만들어 흩어져 살지 않기를 바랐던 인간들, 또한 거기에서 높은 탑을 쌓았던 인간들. 그 모습을 보고 염려스러워 인간의 언어를 흩으시는 하나님의 행동. 무엇이 그렇게 잘못이기에 하나님께서는 바벨을 심판하시는 것일까요?

 

바벨탑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좀 더 큰 틀에서 보아야 합니다. 성경이 현재의 형태로 기록되기 시작한 시기는 바벨론 포로기 때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살 때, 그들에게는 지금과 같은 형태의 성경이 있지 않았습니다. 그저 구전(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으로만 성경이 대대로 전해졌지요. 나라가 존재할 때는 그것이 아무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다른 나라의 포로로 잡혀갔을 때, 위기가 닥쳐 온 것이지요.

 

우리 나라의 일제 강점기 시대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을 때 일본에서 행했던 일 중 가장 악랄하게 했던 것이 언어말살 정책입니다. 그 나라 사람의 말은 곧 그 나라 사람의 존재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언어가 없어지면 존재도 없어지는 겁니다. 우리 나라 역사를 보아도 국어 사전이 편찬되고 국어를 지키기 위한 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일제강점기였습니다.

 

바벨론에 의해서 나라가 망하고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갔을 때 이들에게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이들에게 구전으로 내려오던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보존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바벨론 포로기 때 그 동안 구전으로 내려오던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로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구약성경입니다.

 

또한 그 뿐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이렇게 심판을 받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으며, 자신들의 정체성은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반성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자신들의 죄악의 뿌리가 어디에 있었는지도 찾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을 함부로 다룬 바벨론에 대한 심판도 이야기를 합니다. 오늘 바벨탑 이야기는 그것과 잇닿아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처참하게 짓밟은 바벨론은 그 당시 세계를 제패한 제국이었습니다. 이들은 온 세상의 모든 나라를 정복하여 절대 왕국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 정황이 바로 오늘 말씀에 나오는 시날 평지에 정착하는 장면입니다. 그 중에서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4).

 

여기에는 바벨의 욕망이 드러나 있습니다. 이들은 탑을 쌓아 그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려 했습니다. 이는 즉, 자신들이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려고 하는 욕망인 것이죠. 또한 이름을 내고라는 것은 소유와 지배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출세라는 말인데, 사람들이 출세하고자 하는 이유는 이름을 내는 일을 통해서 갑과 을의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름이 난 갑은 소유와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서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출세하려고 하는 겁니다. 이름이 나야, 갑의 위치에 올라서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유권과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 바벨은 자신들이 하나님이 되어서 이 세상에 대한 소유권과 지배권을 가지려는 욕망의 표출인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다른 사람들을 정복하는 형태로 나아갈 뿐 아니라, 이 세상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도전을 줍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비록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온 신세이지만, 이들은 성경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이 세상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알리고자 했습니다. 그것은 창세기 1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 세상의 주인은 바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보기에 바벨론은 그것을 망각하고, 자신들이 이 세상의 주인인양 하나님 행세를 하고 있었던 것이죠.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 가장 무서운 심판이 임할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바벨론을 심판하게 될 거라는 예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죠.

 

바벨론의 심판 예언은 구약의 예언서 전반에 흐르는 기류입니다. 특별히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의 대선지서에서 그 심판 예언이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그러한 기류의 입장에서 오늘 말씀을 들여다 보면, 오늘 말씀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언어를 주신 이유는 자기 존재에 대한 자각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 결국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던지는 가장 깊은 철학적 질문은 이것 아닙니까? “나는 누구인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얼마나 찾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을 달라집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하루는 꾀죄죄한 옷차림에 흐트러진 모습으로 프랑크푸르트의 한 공원에 앉아 있었습니다. 공원 관리인은 그가 노숙자인줄 알고당신 누구요?”하고 퉁명스럽게 물었습니다. 그때 쇼펜하우어가 몹시 괴로운 어조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발 나도 내가 누구인지 좀 알았으면 좋겠소.”

 

니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현대인은 두 가지 병()을 갖는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 첫째의 병이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둘째의 병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언어로 자기 자신에 대한 탐구를 태어나면서부터 하는 인간은 결국 자신의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도서 12:1-2).

 

여기서 “~하기 전에라는 것은 죽음 또는 종말을 의미합니다. 죽기 전에, 종말이 이르기 전에 우리 인간이 기억해야 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근본적이고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뻔하고 흔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생을 조금 진지하게 살고 있는 분들은 이것이 무슨 말인지 알 겁니다. 또한 인생을 오래 사신 분들도 이것이 무슨 말인지 깨달음이 있으실 겁니다. 인생은 그야말로 생로병사인데, 인생이란 태어나서 살다 늙고 병들어 죽는 것입니다.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도,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나에게는 그 차례가 오지 않을 거라고 착각하고 사는 것이 우리네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착각과는 상관 없이, 우리 인생에서 다른 것은 몰라도, 꼭 찾아오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우리 인간이 던지는 질문,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궁극적으로 던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죽음, 종말이 없다면, 우리는 그러한 질문을 특별히 던지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주어진 삶을 살면 되니까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죽음, 즉 종말이 있다는 겁니다. 아무리 호화롭게 살아도, 아무리 이름을 내고 살아도, 아무리 큰 업적을 이루었다 해도, 그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죽음’, 종말의 순간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실존 앞에서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바벨탑 이야기에서 가장 큰 비극은 그들이 언어를 잃어버렸다는 겁니다. 언어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존재를 잃어버렸다는 것인데, 존재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 모르고 멸망 받았다는 뜻입니다. 구원이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나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피조물인 내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어리석음을 벗어버리고, 창조주 하나님께 모든 인생을 맡기는 신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창조주께서 피조물을 돌보실 때, 우리는 창조주께서 갖고 계신 모든 선한 것들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이 되어 스스로의 생명을 유지하겠다고 마음 먹는 그 순간, 피조물인 우리는 스스로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죠.

 

땅에서 뿌리 뽑힌 나무는 꽃도 피울 수 없고,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한국에 있는 모교회 옆에 라일락 나무가 있었습니다. 해마다 봄이 되면 라일락 나무는 꽃을 피워 아름다운 향기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에는 그 나무의 주인이 나무를 뿌리째 뽑아 공터에 버려두었습니다. 한창 라일락 꽃이 핀 시기였습니다. 물론 어느 기간 동안 뿌리 뽑힌 라일락 나무는 라일락 향기를 발할 수 있었지만, 며칠이 지나자 곧 그 나무는 죽어버렸고, 그 이후로 더 이상 봄이 되었을 때 라일락 향기를 나누어주지 못하고 존재가 사라져버렸습니다.

 

라일락 향기는 그 나무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 때 생산될 수 있는 아름다움 입니다. 이처럼, 피조물은 창조주에게 뿌리는 내리고 있을 때만 그 생명을 아름답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깨달아 가는 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 이 땅에서 뿌리가 뽑히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완전히 다른 세상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죽음을 통해 이 땅에서 뿌리가 뽑히는 것 같은 경험을 하는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들려줍니다. 만약 우리에게 죽음이 없다면, 죽음이 극복된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는 영원히 라일락 향기를 발산하며 아름답게 살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아니,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죽음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죽이시는 분입니다. 그 일이 실제로 예수라는 사람에게서 일어났다고 하는 것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언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그 예수를 믿을 때, 우리에게도 똑같이 죽음을 죽이는 사건, 즉 구원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언어로 무엇을 하십니까? 악한 일을 꾸미십니까? 욕하십니까? 남의 일에 감나라 콩나라 간섭하십니까? 남 뒷담화 하십니까? 세상 살기 힘들다고 불평하십니까? 바벨탑을 쌓으십니까? 하나님처럼 되려고, 욕망을 분출하고 계십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아무리 성공적인 것 같아도, 곧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려다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언어로 바벨론을 건설하지 마시고, ‘나는 누구인지에 대한 해답을 찾으십시오. 누가 세상의 주인인지 탐구하십시오. 누가 창조주고, 누가 피조물인지, 깨달으십시오. 죽음을 이기신, 죽음을 죽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일을 행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거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의 생명의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