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9. 1. 12:25

항복하라

(예레미야 2:4-13)

 

예레미야서는 남유다 왕국의 몰락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참 쉽지 않은 겁니다. 사랑하는 조국이 망해가는 모습을 그린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이 일에 부름 받았다는 것은 참 괴로운 일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을 지 이해가 가는 대목입니다. 얼마나 고달팠으면 그의 별명이 눈물의 선지자이겠습니까?

 

진짜 의사와 가짜 의사의 차이점은 그들이 의사 면허증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논할 가치 조차 없는 상황이지요. 그렇다면 진짜 의사와 가짜 의사의 차이점은 무엇이겠습니까? 환자의 병을 고쳐주려고 하느냐, 아니면 환자의 병을 통해 돈을 벌려고 하느냐, 정도가 될 것입니다. 의사는 여러 가지 정황을 통해서 환자의 미래를 예견할 수 있습니다. 진짜 의사는 그것을 감지하고 어떻게 해서든 죽음으로 치닫고 있는 환자를 생명의 길로 돌려 놓으려고 하겠지요. 그러나 가짜 의사는 그 환자가 죽든 살든 별로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냥 환자를 통해서 돈벌이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레미야가 살던 시대에는 선지자가 예레미야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여러 명의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조국 남유다의 앞날을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유독 예레미야만 조국의 앞날을 다르게 내다봤습니다. 예레미야의 고통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조국의 운명을 알아버렸다는 것이고, 그 운명이 불행했다는 것이고, 그것을 전해도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이 없는 것만큼 외로운 것은 없습니다. 그럴만한 사람들이 그러면 오히려 이 무식한 것들하면서 침이라도 퉤퉤 내뱉을 수 있지만, 예레미야 예언의 청중은 유식하고 교양 있고 권력 있는 예루살렘의 주민들과 고관들, 그리고 왕이었습니다. 알아 들을 만한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니, 예레미야의 심정이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게다가 예레미야 예언의 청중이 힘 있는 사람들이다 보니, 예레미야 예언을 못 알아 들은 것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동원해서 자신들의 구미에 맞지 않는 예언을 한 예레미야를 죽이려 들기까지 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이것이었습니다. 남유다 왕국이 바벨론에 의해서 망한다는 것입니다. 망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게다가 남유다의 왕과 고관들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성과도 있었습니다. 앞날이 그렇게 불투명하지만은 않았습니다. 한국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국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 속에서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한국이 곧 중국에 의해서 멸망 당할 거라는 예언을 하고 돌아다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현재 그렇게 큰 어려움이 없는 상황 속에서 그 멸망 예언을 들은 한국인들은 멸망을 예언하고 다니는 그 사람을 어떤 취급할까요? 미친놈 또는 매국노 취급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언을 보면, 이것이 단순히 국제 정세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닌 듯 합니다. 예레미야는 나라의 앞날을 좀 더 근본적인 문제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택하셔서 세우신 나라입니다. 소위 시내산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이것은 혼인관계의 비유로까지 나아갑니다. 하나님은 신랑이고, 이스라엘은 신부입니다. 신랑과 신부는 서로에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문제가 발생한 겁니다. 신부가 신랑을 버리고 외도를 했다는 것이죠. 이것을 일컬어서,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검증하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 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5). 다른 말로 표현해서, 하나님 당신이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무슨 잘못한 게 있느냐를 물으시는 겁니다. 여기서 조상들은 출애굽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조상들이 출애굽을 하면서 경험한 하나님에 대해서 뭔가 불의한 것을 발견한 것이 있느냐를 물으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이나 고관들이 선지자들이 어떠한 잘못을 범했는지에 대해서 고발하십니다. 율법을 다루는 제사장들은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냐?’하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고관들은 정의를 굽게 하고,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바알의 이름으로 엉뚱한 거짓 예언만 전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즉 남유다에게 닥칠 운명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알려주는 겁니다. 그것을 요약적으로, 그리고 은유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구절이 바로 13절 말씀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13). 여기서 두 가지 악이란 하나님을 떠난 것과 다른 신에게 간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볼 수 있는 상황은 이런 것입니다. 이들이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은 이들도 나름대로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했다는 겁니다. 인간은 누구나 생존을 위해서 투쟁합니다. 우리가 늘 고민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나에게 생명을 가져다 줄까? 어떻게 해야 내가 살 수 있을까? 생존의 문제는 우리 인간에게 아주 근원적인 문제입니다. 생존의 문제를 가지고 투쟁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여기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지적하는 것은, 생존의 문제를 위한 투쟁을 하되,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알고 해야 한다는 겁니다.

 

남유다는 그것에서 실패한 겁니다. 남유다도 왕국을 존속시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투쟁했습니다. 나라가 망하는 것을 방관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남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엉뚱한 웅덩이를 팠다는 겁니다. 생명의 근원이 아닌, 곧 터질 웅덩이를 팠다는 겁니다. 웅덩이를 파는 그 때는 그것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착각이었습니다.

 

이것은 남유다의 실제 역사에서 이런 상황을 반영한 비유입니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남유다는 왕국을 존속시키기 위해서 주변국들과 긴밀한 동맹을 맺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의 예언은 이들이 바벨론과 화친을 맺고 바벨론과 잘 지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남유다의 왕과 고관들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바벨론이 아니라 애굽과 동맹을 맺고, 오히려 바벨론을 무찔러야 할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오판은 결국 바벨론의 심기를 건드린 꼴이 되었고, 바벨론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애굽은 물론이고 남유다까지 복속시키십니다. 결국 남유다는 바벨론에게 망하게 된 것이죠.

 

이렇게 국제 정세를 잘못 읽고 오판한 이유는 남유다의 왕과 고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신들에게 계속되는 풍요와 안정을 가져다 줄 거라고 예언한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 헛된 것, 즉 우상숭배를 하니까 인간성의 상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상은 결국 우리에게 인간성의 상실만 경험하게 합니다. 지금 내가 우상을 섬기는지, 하나님을 섬기는 지 알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은 인간 냄새를 풍기느냐, 썩은 내를 풍기느냐를 보면 됩니다. 우리가 그냥 모르는 척 하고 넘어가서 그렇지, 인간 냄새가 무엇인지 우리는 압니다. 그리고 무엇이 썩은 냄새인지도 압니다. 애써 눈감는 것 자체도 이미 썩은 내를 풍긴다는 증거겠죠.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다시 싸우고 너희 자손들과도 싸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9).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굉장한 희망의 말씀입니다. 그렇게 당신을 버리고 우상(헛된 것)에게로 간 당신의 백성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들과의 관계를 끊지 않으시고, 싸우셔서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시고 관계를 회복하시겠다는 의지를 보이십니다.

 

바벨론에게 망하고 포로 잡혀가는 남유다 왕국은 처절한 절망은 경험합니다. 그들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말해주었던 성전이 파괴되고, 왕들이 잡혀 죽고,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떠나 포로생활을 하게 됩니다. 정말이지, 모든 것, 그들의 삶의 근간이었던 모든 것이 파괴된 경험을 합니다. 이것만큼 더 큰 절망은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마저 이들을 버리시겠다고 하셨다면, 이들은 절망을 넘어, 그냥 멸망으로 치달았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희망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다시 싸우고 너희 자손들과도 싸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9). 여기서 싸운다는 것은 다툼을 통해서 관계를 끝장내버리겠다는 뜻이 아니라, 법적소송을 통해서 권리를 되찾아 오겠다는 뜻입니다. 위에서 말씀 드렸듯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시내산 계약으로 맺어진 계약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 관계를 파기하고 마음대로 떠나버린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법적 관계를 다시 세우시겠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잘못된 판단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떠나 헛된 것을 추구하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인생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의 삶을 지탱해 주는 모든 것이 무너졌더라도,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데, 왜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포기합니까?

 

또한 하나님께서는 다시 싸우고 싸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싸움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빨리 항복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과 싸워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본적으로 생수의 근원,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삶을 두고, 존재를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절망이 자리 잡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닌 것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아닌 것, 영원하지 못한 것은 언젠가는 그 존재조차도 사라지고 맙니다. 그것이 사라졌을 때, 그 밀려오는 절망감을 어떻게 감당하시렵니까?

 

이스라엘은 근본적으로 영원하신 하나님께 존재의 근거를 두고 살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전에, 왕에, 그리고 땅에 존재의 근거를 두고 살았습니다. 돌과 나무로 지은 성전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인간인 왕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피조 세계인 땅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영원한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안 계십니다. 영원한 하나님께 존재의 근거를 두지 않고, 성전, , 땅에 존재의 근거를 두고 살았던 이스라엘은 영원할 줄 알았던 성전, , 땅을 빼앗겼을 때 멘붕(멘탈붕괴)에 빠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가장 중요한 교훈을 주시는 겁니다. , 그들의 존재 근거는 성전, ,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디에 존재 근거를 두고 사십니까? 돈 몇 푼 번 것에 기쁨을 느끼시고, 돈이 좀 없는 것에 비애를 느끼십니까?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에서 자꾸 기쁨과 비애를 찾으니까 그러는 겁니다. 그것은 그냥 잠시 뿐입니다. 있다가 없어질 것은 우리에게 참된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다른 말로, 우리에게 절대로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참된 기쁨, 즉 구원을 가져다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싸우고 또 싸우시는 하나님께 순순히 항복하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 아닐까요?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은 자칫 절망으로 치달을 수 있는 우리에게 참으로 희망입니다.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아멘.

 

 

*설교 제목을 <항복하라>라고 정했지만, 이런 설교 제목도 괜찮을 것 같군요. <우리의 존재 근거이신 하나님>

 

* 설교를 '기독론적'으로 더 발전시키고 싶었지만, 그러면 설교가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그만 두었습니다. 기독론적으로 발전시키지 않아도,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우리의 존재 근거이신 하나님이 잘 드러났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렇죠?^^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