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8. 22. 05:25

드러내는 자와 가리는 자 - 노아 가족의 잔혹사

창세기 6

(창세기 9:18-29)

 

불에 타 죽는 것도 끔찍하고, 물에 빠져 죽는 것도 끔찍합니다. 홍수심판은 물에 빠져 죽는 심판입니다. 우리가 문자의 형태로 홍수심판을 접해서 그렇지 얼마나 끔찍한 심판입니까? 지금도 여전히 물 때문에 죽는 사람이 많습니다. 특별히 요즘에는 쓰나미(해일) 때문에 죽는 사람이 많습니다. 몇 년 전에도 동남아시아와 일본에 쓰나미가 닥쳐서 수 만명이 희생 당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그러한 현상들이 참 이상한 겁니다. 왜냐하면, 홍수심판 끝에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무지개 언약이라는 것을 맺으시는데, 그 요점은 이것입니다.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9:15).

 

어떤 사람은 동남아시아나 일본의 쓰나미 피해를 하나님의 심판으로 간주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이 그렇게 입에 붙이고 사는 성경적인일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지개 언약을 통해서 다시는 물로 육체를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쓰나미 피해를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비성경적인, 우매한 지식에서 나온 망언에 불과한 것이죠. 그러면 뭡니까? 알 수 없는 일인 겁니다. 그냥 사고인 것이죠. 우리가 그 뜻을 어떻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저, 쓰나미로 피해 당한 사람과 그의 가족을 위해서 잠시나마 기도할 수 밖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사건사고에 하나님의 심판을 갖다 붙이면 안 되는 겁니다. 우리 나라 최초의 선교사인 아펜젤러 목사님도 목포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사람들을 구하다 물에 빠져 죽으셨는데, 그럼 그분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인가요? 물에 빠져 죽었으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노아(인간) 사이에 무지개 언약이 맺어졌다는 겁니다. 이는 어느 특정한 심판(물 심판)을 내리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더 이상 피조물을 벌하는 방식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언약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 인간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벌하는 방식으로 심판을 내립니다. 사법기관이 그렇게 작동합니다. 일례로 살인을 저지른 사람에게는 종신형에 처하든지, 아니면 무기징역에 처하든지, 벌하는 방식으로 심판을 내립니다. 그렇게 해야 피해를 당한 입장에서는 위안을 받을 수 있고, 때로는 속이 시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 방식은 무지개 언약이래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벌하는 방식으로 심판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누군가 악한 일을 저질렀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벌을 내리실 것(천벌)을 기대하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간구합니다. 극악 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자에게는 당연히 죽음이라는 천벌을 내려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갑작스러운 죽음 말이죠. 벼락을 맞아 죽는다든지, 갑자기 암에 걸려 죽는다든지, 아니면 교통사고라도 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바람입니다.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른 자에게 인간이 내릴 수 있는 최고의 심판은 죽음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해주시기를 바라는 것이죠. 그러나, 죽음은 극악무도한 자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태로든 모든 사람이 당하는 일이라는 것이죠. 좀 일찍 죽거나, 예상치 못하게 죽거나, 수명을 다하고 죽거나, 축복 속에서 죽거나, 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지, ‘죽는다는 현상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겁니다. 그러니까, 분한 마음에 나에게 나쁜 짓을 한 그 사람을 법이든 하나님이든 죽음이라는 것으로 심판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은 사실 생각해 보면 소용 없는 일입니다. 결국 도 언젠가는 죽음에 처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더 이상 심판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십자가에서 발견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무지개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피조물을 벌하는 방식으로 심판하지 않으시고, 당신 스스로 죄악을 짊어지시는 방식으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지개 언약의 핵심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용서라는 용어를 쓰시는 겁니다. ‘용서는 단순히 잘못한 것을 없던 일로 눈 감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란 심판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는 메타노이아(회개)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절대로 할 수 없는 영적인 행위인 것입니다. 여기서 영적이라는 뜻은 그 근본이 인간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용서란 하나님과 잇닿게 하는 신적인 행위인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살펴볼 노아 가족의 잔혹사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가족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 농사도 시작합니다. 그가 가장 먼저 지은 농사는 포도 농사였습니다. 성경 문화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포도 농사가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왜 중요한 지에 대해서는 요즘에 주보에 실리고 있는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의 글을 보시면 됩니다. 노아는 포도 농사를 지어, 수확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마셨습니다. 포도주는 당분이 높아서 마실 때 취하는 줄 모릅니다. 그래서 한 번 마시면 많이 마시게 됩니다. 게다가 노아는 홍수심판에서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므로, 방주에서 나온 이래 처음 지은 농사에서 얻은 열매로 만든 포도주니,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마음껏 마셨겠습니까? 그러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와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겠죠.

 

문제는 노아가 포도주를 먹고 취한 것에 있지 않고, 그것을 본 아들들이 어떻게 처신했는가에 있습니다. 요즘처럼 대중목욕탕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목욕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시절을 사는 우리들이 보기에는 좀 이해가 안 가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들이 아버지의 하체를 보았느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잘 보십시오. 아버지가 술 취해서 하체를 드러내 놓고 자는 것을 최초로 목격한 사람은 함(가나안의 아버지)입니다. 함은 그 모습을 목격하고는 밖으로 나가 두 형제에게 그 사실을 알립니다. 이 부분을 묘사한 문장은 이겁니다.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22). 여기서 보다라는 말은 라아인데, ‘주목해서 관찰해 보았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체에르바인데, ‘발가벗음, 노출, 외음부등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함은 아버지의 하체를 주목해서 관찰해 보았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하체를 주목해서 관찰해 본 것도 모자라, 밖으로 나가 형제들에게 자기가 본 것에 대해서 상세하게 보도합니다.

 

함의 잘못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버지의 수치를 가리기 보다 드러냈다는 것이죠. 수치()는 가려야 하는 것이지,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노아에게 잘못은 자신의 수치()를 드러낸 것이고, 함의 잘못은 아버지의 수치()를 드러낸 것입니다. 우리가 창세기 2장에서 보았듯이, 아담과 하와는 죄를 범한 이후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알고 그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치마를 엮어 입었습니다. 죄를 저지른 자나, 그 죄를 본 자나, 그것을 가려야 하는 것이지, 드러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함의 경솔하고 경박스러운 행동에 비해, 다른 두 형제 셈과 야벳은 완전히 다르게 행동합니다. 함의 상세한 보도를 들은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장막으로 달려옵니다. 그런데 이들은 함처럼 경솔하고 경박스럽게 행동한 것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아버지의 벌거벗음(수치, )를 가립니다.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질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23).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수치()를 보지도 않았을 뿐더러, 가려주었습니다. 이것이 함과는 다르게 행동한 셈과 야벳의 모습입니다.

 

무지개 언약이 맺어지기 전이라면, 함의 행동이 옳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벌건 대낮에 술취해서 하체를 드러내 놓고 자는 아버지의 추태를 까발리면서 아버지를 벌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지개 언약을 통해서 더 이상 벌 주는 것을 통해서 심판을 내리지 않으시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의 행동은 하나님의 약속에서 어긋나는 불의한 행동이 된 것입니다. 반면에, 셈과 야벳의 행동은 하나님의 무지개 언약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수치를 드러내는 방식이 아닌, 덮어주고 가려주고 용서하는 방식으로 그 수치를 자신들이 짊어지는 방식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겁니다.

 

이러한 셈과 야벳의 행동이 답답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후에 술에서 깨어난 노아가 이 일을 알 고 난 뒤 내리는 저주와 축복을 통해서 어떠한 것이 옳은 행동인지 알게 됩니다. 노아는 자신의 수치를 가리지 않고 오히려 드러낸 함을 저주합니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들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25). 형제들의 종도 아니고, 형제들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은 아주 지독한 저주입니다. 반면에, 노아는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지 않고 가려준 셈과 야벳을 축복합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26-27).

 

이 후의 진행되는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셈을 택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드라마입니다. 반면 가나안의 아버지 함과 그의 자손들, 특별히 가나안은 죄가 가려지지 않고 드러나며 그 드러난 죄 때문에 멸망해 갑니다. 드러내는 자와 가리는 자의 운명은 매우 엇갈립니다. 드러내는 자는 멸망하고, 가리는 자는 생명을 얻습니다.

 

우리는 남의 수치(허물, )를 드러내는 것을 매우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수다의 주제로 삼기도 하고, 재미 있어 하며, 그들이 쉽게 멸망(벌 받기)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것은 함의 자손이 되는 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무지개 언약을 믿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는 불신앙의 행동입니다. 더군다나 무지개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정하는, 성령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이런 사람은 용서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용서를 그저 잘못한 일 눈 한 번 감아주는 일 정도로 생각하는 경솔하고 경박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남의 수치(허물, )를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가려주고 덮어주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셈의 자손입니다. 무엇보다 비 온 뒤 구름 사이로 아름답게 떠오르는 무지개를 보면서 하나님의 무지개 언약을 기억하고, 그 언약을 믿고 따르며, 무지개 언약의 성취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바라보면서, 참된 용서를 실천하면서 사는 거룩한 사람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몸으로, 온 몸으로, 생명으로, 우리의 수치(허물, )를 가리셨습니다. 벌 하신 것이 아니라 용서하셨습니다. 벌 하는 방식으로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용서하는 방식으로 심판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48절에서 이렇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겁니다. “무엇보다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여러분은 드러내는 자입니까? 아니면, 가리는 자입니까? 불의한 방식으로 잘못된 것을 눈감아 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가에서 하신 것처럼, 벌하는 방식으로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는 방식으로 심판하라는 겁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더욱더 깨달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