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8. 8. 05:56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그 은혜를 누리는 인간

창세기 5

(창세기 8: 13-22)

 

꼬박 1년이 걸린 홍수사건이 마무리 되고,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드디어 방주의 문을 열고 나옵니다. 1년 동안 방주에 머물면서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TV든 책이든 가장 큰 약점은 냄새를 맡을 수 없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눈과 귀로만 들었을 때는 모든 것이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뭐 때로는 끔찍하기도 하지만요. 그러나 냄새를 맡는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 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1년 동안 방주에 갇혀 있으면서, 그 수많은 동물들의 땀과 똥 냄새를 맡아야 한다는 상황을 말이죠. 쉽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눈과 귀로만 듣는 것과, 직접 가서 냄새를 맡으며 체험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겁니다. 한국을 떠나 오기 전 2년 정도 중증장애인들을 돌보는 한사랑 마을이라는 곳에서 자원 봉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자원 봉사라는 말 자체는 굉장히 아름다워 보이고, 낭만적으로 보이고, 있어 보이죠. 그러나, 그곳에 직접 가서 그들과 함께 뒹굴며 그들의 땀냄새와 똥냄새를 맡으며 봉사하는 일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함께 갔던 한 후배는 한 번 가더니 다시는 못 가겠다고 하더군요. 도저히 냄새를 맡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저도 처음 자원 봉사를 간 날, 한 녀석이 화장실에서 부르는 소리가 나서 가보니까 똥을 푸지게 싸 놓고 그것을 치워 달라고 하더라고요. 똥 냄새가 얼마나 나고, 그 상황이 지저분한지, 좀 어리둥절하더라고요. 그러한 것을 이겨내고 적응해나가지 못하면 자원 봉사도 그림의 떡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겁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을 생각만 할 때는 낭만적으로 아름다워 보이고, 가슴이 타오르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은 매우 구체적인 겁니다. 보고 듣는 것만이 아니라, 냄새를 맡아가면서 해야 하는 고단한 일이죠. 믿음이란 뜬 구름 잡는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삶이라는 뜻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방주를 지었습니다. 방주를 짓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리고 그 방주 안에서 온갖 동물들과 일년 동안 갇혀 있었습니다. 그것도 햇볕 쨍쨍 내리 쬐는 날이 아니라, 비 오는 궂은 날에 말이죠. 비 오는 날 동물원에 가 보셨나요? 냄새가 진동해서 동물원에 있기 힘듭니다. 물론 1년 동안 방주 안에서 견뎌내야만 살 수 있는 이유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준행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곤혹스러운 일을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최첨단 과학장비가 없었던 노아는 일일이 손으로 다 확인해야 했습니다. 비가 그치고, 시간이 충분히 지났다고 생각된 때에 노아는 까마귀와 비둘기를 보내서 땅이 말랐는지 아직 안 말랐는지 확인합니다. 그리고 방주에서 1년의 세월을 보낸 뒤 땅이 말랐음을 확인합니다. 그런데 노아는 자기 마음대로 방주 문을 열고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옵니다.

 

레크리에이션 가운데 가라사대라는 게임이 있습니다. ‘가라사대라는 말을 해야만 사회자가 말한 대로 움직여야 하는 게임입니다. 그 게임을 하다 보면, 사회자가 가라사대를 안 했는 데도 우리의 육체가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상황, 여건, 조건을 보고 움직이지 마시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움직이십시오. 그래야 노아처럼 하나님께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흐뭇하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 받을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듣는 것인지 잘 모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일차적으로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옵니다. 우리의 귀에 대고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성경을 펴서 기계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도 우울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성경을 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눈을 감고 손으로 성경을 잡고 펴지는 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올 거라 생각하고 성경을 폈습니다. 그랬더니, 거기에 이런 말씀이 써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목매어 죽으니라.” 이 말씀을 본 그는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다시 눈을 감고 성경 중 짚이는 아무데나 또 폈습니다. 그랬더니 이런 말씀이 써 있었습니다. “어서 가서 그 일을 행하라.”

 

하나님의 음성을 그렇게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이 거기에 신비로운 방식으로 숨겨 있습니다. 고요한 가운데 성경을 묵상하고, 성령의 조명을 받고, 기도할 때 신비로운 방식으로 그 음성이 들려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학원에서 무슨 기술을 배우듯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와 사랑을 나누는 상황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사랑을 어떻게 기술 배우듯 학원에서 가르치고 배울 수 있습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서적 깊이로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죠. 이처럼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속에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들려 오는 것이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노아의 지속적인 의로운 행위는 환경, 여건, 조건을 보고 움직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움직인 것 외에, 방주에서 나와 정결한 짐승으로 제단을 쌓아 예배 드린 것에서도 드러납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짐승들은 방주 사건을 거치면서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습니다.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고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 내라”(17). 여기서 나오다라는 단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히브리어로 야차라는 이 말은 여기서 나오다로 번역되고 있지만, 이는 하나님께서 동물을 창조하실 때 사용된 동사입니다(1:24-25). 그러니까 노아와 방주 사건, 즉 홍수사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재창조의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방주에서 나온그들에게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라는 말씀도 주십니다. 우리가 창세기 1장에서 보았던 바로 그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기 위해서 어떤 사건을 주십니다. 물론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가장 궁극적인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우리 삶 속에는 그것과 닮은, 우리를 새롭게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건이 널려 있습니다. 우리가 인식을 하지 못해서 그렇지, 하나님께서는 그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뭔가 말씀하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고자 하십니다. 그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건을 통해서 새롭게 되는 인간, 특별히 노아에게 일어난 홍수사건은 그와 그의 가족을 새롭게 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새롭게 된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께 제단을 쌓게 된다는 겁니다. 노아는 정결한 짐승으로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제단을 쌓은 것이 아니라, 정결한 짐승으로 제단을 쌓았습니다. 여기서 쌓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바나인데, 이것은 아름다운 건축물을 예술적으로 짓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아름다움이 베어 있는 예배를 드렸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매우 진진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거듭난 우리들은 얼마나 아름다움이 베어 있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지속적인 노아의 의로운 행위, 그리고 아름다움이 베어 있는 예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열납해 주십니다. 21절 전반부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아 주신다는 것은 은혜입니다. 우리의 예배를 받아 주신다는 것 자체가 우리를 열납해 주시고 용납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안 받아 주신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앞에서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를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안 받아 주셨을 때, 가인이 얼마나 황당한 일을 저지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안 받아 주시는 상황은 죽음의 상황이나 다름 없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아 주시면 거기에는 생명이 넘치게 됩니다.

 

예배를 받아 주신 하나님께서는 말할 수 없는 은혜의 약속을 또한 해 주십니다. 그 음성을 성경에 적힌 그대로 들어 보겠습니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라”(21). 사실, 땅은 사람 때문에 애꿎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땅이라 함은 사람 빼놓은 모든 동식물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땅 자체도 의미합니다. 사람의 악함 때문에 애꿎은 것들만 피해를 봅니다. 악함은 애꿎은 것들만 피해 보게 만듭니다. 그래서 악함은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엊그제도 뉴스를 보니까, 음주 운전 때문에 야영장에서 텐트 치고 자던 두 자매가 그 자리에서 죽었고, 운전자의 아버지도 중상을 입고 병원에서 치료 중이랍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인간의 욕심 때문에 지구가 파멸로 가고 있습니다. 현재 지구의 가장 큰 문제는 경제가 아니고, 지구 온난화입니다. 환경 오염입니다.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인류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 전, 스스로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십니다. 사람의 마음이 어려서부터 악한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제 그것 때문에 멸하지 않으시고, 인간과 땅을 보존해 주시겠다고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당신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때까지 쉬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모든 사람들에게 해를 비추시며 비를 내려 주십니다. 그러니, 스스로 멸망 길에 들어서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습니다.

 

홍수사건 이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의 악함 때문에 다시는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아무리 악한 일을 저질러도 벼락이 내리쳐서 그를 멸하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악함 때문에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악함 때문에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이십니다. 당신 스스로가 그 악함을 담당하신 것입니다.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 새로운 생명을 온 우주 만물이 누리게 되는 그날을 기다리며 새생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즉 내 자신이 흠 없고 온전한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산 제사로 올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없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은혜를 누린다는 것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악함 때문에 우리를 멸하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을 믿고 까불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궁극적 은혜를 알았다면, 이 말씀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전 5:17).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종말론적인 삶, 새생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땅에서 하늘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누리는 삶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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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