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7. 28. 23:05

뻔뻔한 기도 (Shameless Prayer)

(누가복음 11:1-13)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숙제입니다. 기도가 가능한 것은 우리 인간의 간절한 마음 때문이 아니고, 기도를 들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허공에 대고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아니고, 대상이 정확한 기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는 데도 형식이 중요합니다. 기도는 단순한 말이 아니고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대상과 관계를 맺을 때에는 그에 따른 예법이 필요한 법입니다. 남편과 아내 간의 예법이 있고, 부모와 자식 간에 예법이 있고, 친구들 간에도 예법이 있습니다. 목사와 성도들 간에도 예법이 있고, 성도들 간에도 예법이 있습니다. 그 예법에서 벗어나면 관계가 어긋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관한 중요한 예법을 일러주십니다. 여기서 예법이란 윤리, 도덕적으로 갖추어야 할 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방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기도가 그 열매를 맺을 것인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의 최고 관심사는 기도의 응답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기도해야 기도의 응답을 가장 잘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는 꼭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그것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선 주기도문에 대한 가르침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가 매일 외우는 주기도문은 여기 누가복음에 나온 것을 근거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태복음에 나오는 것을 근거로 합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주기도문은 우리가 늘 외우는 주기도문보다 짧습니다. 빠진 부분이 많습니다. 기도는 관계라는 것을 생각할 때, 주기도문은 매우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도 그렇고, 아버지의 이름을 존귀하게 생각하는 것도 그렇고,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며 평화를 간구하는 것도 그렇고, 욕심내지 않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도 그렇고, 화해를 간구하는 것도 그렇고, 시험에 들지 않기를 구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주기도문의 핵심은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관계를 생각하지 않는 기도는 이방인의 기도입니다. 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나 자신의 이익만을 구하는 기도는 관계의 중심인 사랑이 없는 기도이기 때문에 무익한 기도에 그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는 성서의 진술을 기억할 때, 사랑이 중심이 된 관계적인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지금 내가 드리는 기도가 사랑에 바탕을 둔 관계적 기도인지 아닌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벗어난 기도는 예법에서 어긋난 기도이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듣지 않으십니다.

 

주기도문으로 기도를 가르치기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기도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가르치십니다. 이 비유는 친구 간에 벌어진 일을 바탕으로 합니다. 어떤 사람이 한 밤중에 친구를 찾아갑니다. 이유는 손대접 때문입니다. 10장에서도 손대접의 문제가 거론되었는데, 11장에서도 손대접의 상황이 등장합니다. 여행 중에 있던 어떤 사람의 친구가 한 밤 중에 방문을 했는데, 마침 그 친구를 대접할 양식이 없어, 그 사람은 한 동네에 사는 친구에게 양식을 구하러 한 밤 중에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 갑니다.

 

이미 한 밤 중이기 때문에 친구와 친구의 가족은 잠자리에 누웠습니다. 그런데 난감하게도 그 와중에 문을 두드립니다. 양식을 구하는 친구에게 잠 자리에서 일어난 친구는 말합니다.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7). 좀 짜증나는 상황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짜증나는 상황을 만든, 한 밤 중에 남의 집을 찾아간 사람에게 비난의 손가락질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예수님 당시의 문화적 상황에서는 손가락질을 받아야 할 사람은 양식 주기를 거절하는 친구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8). 양식을 좀 꾸어 달라는 요구를 들어주긴 하는데, 들어주는 이유가 그 사람이 친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간청함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려면 좀 더 설명이 필요합니다. ‘간청함은 대개 영어로 ‘persistence’로 번역됩니다. 이는 고집, 집요함, 인내력, 불굴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영어 성경에서는 간청함‘boldness’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대담함, 무모함, 버릇없음, 뻔뻔스러움, 철면피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찾아낸 간청함의 정확한 뜻은 ‘shamelessness’가 가장 잘 담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제목도 뻔뻔한 기도라고 정한 것입니다. ‘shameless’부끄러움을 모르는, 즉 뻔뻔한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수련회 가는 길, 알고 보니, 예전에 이의재 집사님과 함께 포사이드 법정에 가기 위해 갔던 길이었다. 그래서 일정에 없었지만, 포사이드 법원 앞 버거킹에서 이의재 집사님과 예전에 함께 점심 먹었던 것을 기억하면서 점심 식사를 했다. 그러면서 기도했다. 집사님은 하늘 나라에 잘 계신지 여쭙고, 유가족들의 평강을 위해서 기도 드렸다. 이의재 집사님에게 전화 받은 것이 작년 이 맘 때다. 그런데, 두 달 후,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부인 집사님에게서 들었다. 참 마음이 아팠다. 영주권 받는다고 좋아하셨는데, 영주권 받으면 우리 건유 찬유 줄 뻥튀기 사들고 한 번 오신다고 했는데. 여기 계시는 동안, 오늘 등장하는 친구처럼 나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모른다.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분이다. 그래서 더 마음이 짠하다. 술병만 났다하면, 나에게 전화해서 개새끼 소새끼 욕을 해대고, 직장에 무단 결근한 것 처리하느라 매니저와 엄청 통화했고, DUI 걸리셔서 그 문제 해결하느라, 변호사 대신(변호사가 돈 안 줘서 안 간다고 하루 전날 손 놓아 버리는 바람에) 내가 법정에 서서 증언해 주고, 통역해 주었다. 이 때 정말로 힘들었지만, 내가 이의재 집사님의 요구를 하나도 빠짐 없이 잘 들어주었던 이유는 이의재 집사님의 간청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도 내가 가지고 있는 목사라는 위치 때문이었다. 목사인 나에게는 그러한 의무가 필연적으로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매우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은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9-10). 이것은 위에서 말한 뻔뻔한 기도가 어떤 기도인지를 말해주는 말씀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 왜 이렇게 해야 하는가는 손대접의 사회적 풍습을 이해하면 알 수 있습니다.

 

고대 유대인 사회에서 손대접은 매우 중요한 사회적 약속이었습니다. 낮에 찾아왔건, 한 밤 중에 찾아왔건, 손대접을 잘 해야 그 공동체가 칭송을 받습니다. 손대접을 얼마나 잘 했느냐에 따라서 공동체의 운명이 갈렸습니다. 손대접을 잘 했다면 그 공동체는 명예롭게 존속할 것이고, 손대접을 잘 못했다면 그 공동체는 부끄러움 가운데 소멸될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손대접의 사회적 의미가 완전히 달랐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한 중차대한 문제 앞에서, ‘뻔뻔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 내가 죽고 사는 문제 앞에서 체면 차릴 여유가 없습니다. 이런 문제를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당장 죽게 생겼는데도, 지금 나에게 일어난 문제들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는데도, 그것이 부끄러움인줄 모르고 태연하게 있습니다. 오히려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하면서 어긋난 겸손함을 보이며 하나님 앞에 나아와 뻔뻔한 기도를 드리지 못합니다. 참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기도에 대한 응답을 해주시는 지에 대한 지혜를 얻을 수 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생명)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11-13).

 

잠 자던 친구는 한 밤 중에 찾아와 양식을 꾸어 달라는 것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친구로서가 아니라, 사회적 파장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그 친구에게 양식을 내어주지 않으면, ‘손대접의 도리를 지키지 않은 것 때문에 사회적으로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 확실 했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하고, 공동체를 보호하는 차원에서도라도 양식을 내어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이의재 집사님을 성심껏 도와준 원리와 비슷한 겁니다. 목사가 성도의 어려움을 모른 채 하면, 목사로서의 사회적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 되고, 공동체에 누를 끼치는 경우가 되기 때문에, 도리 때문이라도 이의재 집사님을 도와주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우리의 상황이 이럴진대,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어떠시겠느냐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고, 성령(생명의 영, 생명)을 주기 원하십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이 거룩한 것을 유지하시는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않고, 생명을 주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그러한 분을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악마라고 부르겠죠. 악마는 우리에게 나쁜 것, 죽음을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 생명을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언제든지 뻔뻔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는 우선 사랑이 바탕되어야 합니다. 오늘 등장하는 어떤 사람도 손대접의 의무를 지키기 위해서, 즉 사랑을 바탕으로 간청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기도가 사랑에 바탕되어 있다면, 우리는 뻔뻔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뻔뻔해야만 합니다. 지금 인정사정 볼 겨를이 없습니다. 지금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데, 인정사정 볼 겨를이 어디 있습니까? 담대하게 나와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고, 생명을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뻔뻔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다는 겁니다.

 

비록, 모든 기도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응답 받는 것은 아니지만, 응답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달린 것이니까, 신실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맡겨두고, 우리 쪽에서는 그저 뻔뻔한 기도를 집요하게 드릴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것만 알아두면 됩니다. 기도할 때 좀 뻔뻔해져도 괜찮습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과 생명을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꺼이 응답해 주실 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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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