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7. 12. 13:57

은혜의 눈을 발견하라

창세기 3

(창세기 6:1-12)

 

세상은 가인의 후예와 셋의 후예로 구분됩니다. 가인의 후예는 죄악으로 물들고, 셋의 후예는 은혜로 물듭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셋의 후예 중 에노스에 이르러서 비로서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오고, 사람의 딸들이 나옵니다. 사람의 딸들은 이해가 가는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인지 이해가 안 가서 질문해 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욥기서에서 천사적 존재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셋의 후예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벨처럼, 에노스처럼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 드리는 사람들을 일컬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의 딸들은 어떤 사람들을 지칭하는 지 아시겠죠? 바로 가인의 후예들, 즉 죄악에 물든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결혼하기 시작합니다. 셋의 후예들과 가인의 후예들이 결혼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하게 예배 드리는 의인들과 하나님을 모르는 죄인들이 결혼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냥 상황만 봐도 그 결과가 별로 좋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듭니다.

 

2절 말씀을 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이 구절은 매우 흥미로운 구절입니다. 우리 나라 말에는 그 느낌이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이 구절을 히브리어로 보면 그 옛날 아담과 하와 때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상황과 매우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토브)’보고(라아)’ 원하는 이들을 모두 아내로 취합니다’(라카흐). 이것은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금지된 나무의 열매가 먹음직(토브)’함을 보고(라아)’ 결국 그것을 (라카흐)’ 먹은 과정과 동일합니다. 동일한 단어들이 사용됩니다. 죄를 짓게 되는 과정이 똑같다는 겁니다.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보는 것에 근거해서 행동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믿음으로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게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2:16-17). 그러나 하와는 뱀의 꼬임에 넘어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했습니다.

 

결국 신앙은 믿음으로 행하는 것과 보는 것에 근거해서 행동하는 것과의 싸움입니다. 우리 신체 감각 중 가장 타락한 곳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바로 눈입니다. 우리 신체 감각 중 가장 중요한 곳도 눈입니다. 다른 신체 감각이 고장 나도 눈 감각만 살아 있다면 그나마 살만합니다.

 

연세대학교 영문과 교수를 지내신 임철규 씨가 쓴 <눈의 역사 눈의 미학>이라는 책을 보면, 인간만이 을 통해서 사유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인들의 언어를 보면 나는 안다오이다라는 동사는 원래 나는 본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보는 것이 곧 아는 것이죠. 그만큼 눈이라는 것, 본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는 것에 근거해서 행동하는 것은 많은 엉뚱한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인류의 역사를 들여다 보면, 그럴 것도 없이 성경에 나와 있는 스토리를 보더라도 보는 것에 근거해서 행동한 것 때문에 인간에게 얼마나 큰 어려움이 닥치는지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위에서 살펴본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노아 때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즉 믿음에 근거하지 않고 보이는 것에 근거해서, 날씨가 좋다는 이유 때문에 노아가 방주 짓는 것을 비웃다가 결국 멸망 당하고 맙니다. 이 후, 다윗 왕 때도 그러한 일이 벌어집니다. 한창 전쟁이 일어났을 때 부하 장수들을 전쟁터에 내보내고 왕궁에서 쉬고 있었던 다윗은 왕궁을 거닐다 우연히 밧세바라는 여인이 목욕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게 됩니다.

 

이에 반해 보는 것에 근거하지 않고, 믿음으로, 즉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행동함으로써 구원의 역사를 체험하는 믿음의 조상들도 즐비합니다. 그 예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보는 것에 근거해서 움직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믿음으로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여서 복의 근원이 된 인물입니다. 훗날, 요셉도 그렇습니다. 형들에게 애굽으로 팔려가 군대장관 보디발의 집에 기거할 때, 눈에 보이는 것에 근거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동하여 목숨을 건지고 크게 쓰임 받습니다. 군대장관의 아내가 얼마나 아름다웠겠습니까? 그 당시 최고의 미인인 중 한 명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요셉은 눈에 보이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행동합니다.

 

보이는 것은 굉장한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추한 것에는 마음이 끌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혹을 느낄 때는 보이는 것이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행동하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보이는 것에 근거해서 행동한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역사를 보십시오.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5). ‘보이는 것에 근거할 때 당장은 쾌락이 있어 좋아 보여도, 결국 그것이 만들어 내는 것은 어려움뿐입니다. 이것은 일일이 예를 들지 않아도, 신앙이 약간이라도 있는 분이라면, 삶 가운데서 많이 경험하셨을 겁니다.

 

이것 때문에 인간의 운명이 달라집니다. 3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것 또한 해석이 필요한, 중요한 말씀입니다.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씀은 인간의 유한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처럼 영원히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 죄악에 물든 육체에서 하나님의 영은 떠납니다. 그것으로 인해 우리 인간은 영원히 살지 못하고, 육체가 온전한 동안만 살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는 말씀은 인간의 수명이 120년이라는 뜻이 아니라, 이후 120년 뒤에 있을 홍수에 대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120년 간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120년 동안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을 겁니다. 120년 동안 만약, 인간이 그들의 죄악 된 삶을 돌이켜 보이는 것에 근거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믿음으로 산다면, 그들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입니다. ‘보이는 것에 근거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믿음으로 살아 보라고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보이는 것에 근거해서 살아 만 만들어 내는 사람들을 보면서 하나님은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십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인간적으로 표현한 부분입니다. 우리의 범죄가 하나님을 얼마나 아프고 슬프게 하는가를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보이는 것에 근거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눈에서 은혜를 보지 못하고, 그저 심판만 보게 됩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와중에서도 보이는 것에 근거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으로살아가는 사람을 준비하십니다. 그가 바로 노아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8). 이가 보이는 것에 근거해서 산 사람이 아니라, ‘믿음으로살았다는 표현이 다음 구절에 나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9). 이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겁니다. ‘보이는 것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사는 사람, 바로 이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인 겁니다.

 

노아는 아들을 셋 낳습니다. 셈과 함 그리고 야벳. 이들을 낳았을 때의 세상이 어떠한지 11절과 12절은 이렇게 전합니다. “그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부패한 세상과 그 부패한 세상에서 의인이라 인정 받는 노아, 그리고 그의 세 아들.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너무도 궁금증을 자아내는 대목입니다. 이제 인간의 운명은 노아와 그의 세 아들에게 달려 있는 듯 합니다. 그 옛날, 마징가 Z나 독수리 오형제, 또는 로보트 태권 V를 보는 듯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발견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의 눈을 발견하십니까? 무엇을 발견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은 너무도 달라집니다. 한쪽은 심판, 한쪽은 구원. 심판과 구원은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그 결과가 질적으로 다른 겁니다. ‘보이는 것에 근거한 삶을 살지 마십시오. ‘죄악으로 빠질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믿음에 근거한 삶을 사십시오. 생명이 거기에 있습니다.

 

신앙은 늘 이  둘의 싸움입니다. '보이는 것'에 근거하지 않으려면, 차라리 눈을 감는 것이 좋습니다. 장님이 되라는 뜻이 아니라, 눈을 감는 자리, 기도의 자리에 나의 존재를 부단히 놓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은혜의 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은혜로 살아야 우리가 생명을 얻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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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